지난 달에 읽은 책인데 이제서야 독후감을 쓴다. 내게 10대 시절은 두려운 마음으로 어두운 터널 속에서 출구를 찾아 헤매는 시간이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누구를 붙잡고 물어야 할지...어쩌면 당시 나는 뭘 물어야 할지도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끝 모를 막연한 감정들을 일기에 적기도 하고 유치하게 시로 남기기도 했는데 엄마는 나 몰래 그 일기를 가지고 동네 서점에 가서 책을 내 달라고 했었다. 서점 아저씨는 '분량이 부족하니 더 써오라고 했다'고. 지금 생각해도 이 일은 좀 충격적인데 엄마는 한 번도 내게 사과한 적이 없고 나도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 같다. 워낙 눈앞에 감당해야 문제가 커 보였고 미래는 막막했고 벅찼으니까.
이제 막 고1이 된 찰리는 그런 불안한 마음을 편지에 담는다. 상대는 특정되지 않는데 어쩜 일기보다는 누군가와 소통하는 느낌의 편지 형식이 그에게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찰리는 그렇게 편지로 계속해서 자신의 일상을 이름 모를 친구에게 전한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부쩍 외로움을 느끼던 그에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샘(엠마 왓슨)과 유쾌하고 다정한 패트릭(에즈라 밀러)이란 남매가 친구가 되어준다. 남매에겐 오랫동안 함께 해온 친구들이 더 있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 같이 어울리게 된다. 거기다 독서를 좋아하는 찰리를 알아본 문학 선생님도 수업 외에 읽어보라며 책을 하나씩 골라준다.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파티, 친구들이 직접 연기하는 록키호러 픽쳐 쇼 ,따로 책을 빌려주고 에세이를 봐주는 선생님까지. 찰리는 안정을 찾아가는 듯 보인다. 세 친구들은 차를 타고 음악을 들으며 터널을 달린다. 그는 이제 터널로 상징되는 통과의례가 영원하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혼자서 직면해야 하는 문제들이 있다. 어린 시절 찰리에게는 그를 아껴주는 이모가 있었는데 그녀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함께 살고 있었는데 크리스마스이브가 생일인 찰리에게 늘 두 개의 선물을 챙겨주었던 이모는 그의 선물을 사러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찰리는 그 일로 죄책감을 느끼는 걸까? 가끔 공황 상태에 빠지고 정기적으로 정신과 의사를 만나는 찰리. 담당의는 어찌 된 일인지 이모의 사고 이전의 일들을 그에게 묻곤 한다. 조금만 감정이 격해져도 눈물을 곧잘 흘리고 관계에 너무 몰입하는 찰리는 어떤 문제가 생겨 친구들이 모두 외면하자 극도로 예민해진다. 그가 진짜 직면해야 할 상처는 무엇이었을까? 결말에 이르러서야 실마리가 조금 보이는데 그 사건을 이야기 중심에 두지 않은 작가의 의도가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원서로 다 읽고 예전에 봤던 영화를 다시 감상했는데 전에 느꼈던 감동은 이제 찾을 수가 없었다. 역시 책이 더 좋았다. 찰리의 감정들과 그의 심적 변화를 함께 따라가는 것은 영상을 보는 것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번역서 문장은 짧고 단순한 서술이었는데 이런 경우 원서로 영어 공부할 땐 오히려 유용한 것 같다. 대신 내용은 의외로 단순하지가 않았다. 동성애, 가정폭력, 성폭력, 약물남용, 임신중절,...뭐가 꽤나 많다. (그래서 지루할 틈이 없음) 오더블의 찰리 목소리도 10대 소년으로 들려서 더 실감이 났다. 시간이 될 때 외워두고 싶은 문장들이 여러 페이지 있었다. 미국 청소년들의 문화를 간접 체험해 보는 것도 덤이고. 그런데 고딩들 사이에 마약이 왜 이리 쉽냐. 술, 마약, 섹스, 파티, 공연 ...우리나라 보다 훨씬 자유분방한 것 같은데도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문제는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선생님은 올해의 마지막 책을 주셨어. 제목은 '마천루'인데, 아주 긴 소설이야. 그 책을 주시면서 "이 책에 대해선 회의론자가 되어야 해. 아주 훌륭한 책이지만 필터가 되도록 노력해야지 스펀지가 돼선 안 된다."고 하셨어. 선생님은 내가 열여섯 살이라는 걸 가끔 잊으시는 것 같아. 하지만 그렇다면 오히려 기분은 무척 좋을 것 같아. p.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