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사회 모두 서로 상호 침투하는 담론이며, 언어와 사회 모두 텍스트로써 읽고 해석하고 다시 쓰기하는 과정에 열려 있다. 쓰기와 문화가 서로 간섭하게 되면 결국 불가피하게 사회가 변할 것이다. P.210
코로나로 몇 년간 상황이 여의치 않았겠지만 요즘은 중학교는 물론 초등학교에서도 토론 수업을 많이 하는 걸로 알고 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토론 수업이 있기는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제대로 된 토론이라 할 수는 없었고 토론이란 무엇인지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는 형식적인 자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열띤 논쟁도 없었고 딱딱하고 썰렁하고 어색함만 감도는...얼른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만 간절한 분위기였다. 그것은 소통이 부재한 주입식 수업의 연장선이었고 또 그 악순환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토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수업 시간에 질문을 한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다. 자칫 선생님의 권위에 대한 저항으로 비칠까 두려웠던 것도 같다.
이걸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10대 친구들끼리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입씨름하는 걸 어렵지 않게 본다. 어떤 친구가 나를 놀리면 은유든 반어법이든 적절히 대꾸하는 건 그들에게 나름 중요해 보였고 자존감이 걸린 일처럼 여겨졌다. 재치 있게 받아치는 능력은 그 사람을 돋보이게 했다. 특히 그 상황을 지켜보는 눈이 있을 때 그런 말싸움의 중요성, 위력과 파급력은 커진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런 문화는 사회의 자유로운 발언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지식의 제국인 미국, 전 세계 지식과 담론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 지적인 다양성에 대해서는 열려있는 곳.ㅡ『정희진의 공부』 물론 미국 사회가 문제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 어떤 사회 보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충돌하는 곳이지만 논쟁에 있어서는 우리보다 훨씬 열려있다. 한국 사회처럼 서비스 노동자에 대한 소비자의 잘못된 위계 의식이 '갑질'로 표출되는 곳은 다른 생각 간의 충돌을 터부시하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 갑질은 부족한 논쟁, 이질적인 계층간에 소통 불가능이 가져온 결과일지 모른다. 또한 갑질은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한국사회가 자본주의가 만난 결과물이 아닐까?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는게 익숙치 않은 사람들은 쉽게 감정적이게 되고 제대로 전달하는 방법을 몰라 윽박지르거나 또는 아예 소통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정희진의 공부』를 통해 영화<두 교황>을 봤다. 베네딕토와 프란체스코는 같은 종교인임에도 극단적으로 다른 출신 배경과 문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영화 속에서 많은 것들을 두고 논쟁하며 신경전을 벌인다. 보통 이런 차이를 가진 사람들은 대화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결과적으로 카톨릭 역사상 최초의 선택을 하게 된다. (심지어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 권위를 가진 쪽이 그렇지 않은 쪽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 데 있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논쟁을 부정적으로 여긴다.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끼리는 쉽게 모이지만 다른 주장하는 사람과 서로 대화할 공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논쟁하지 않는다고 평화가 저절로 생기는건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 증거다. 갈등이 많은 사회에서는 말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늘 존재한다. 논쟁하는 게 두려워서 또는 논쟁적으로 싸우는 건 부정적이니까 회피하고 그나마 어렵게 자리를 같이하면 형식적인 의견 전달에 그친다. 내 생각에 이런 회피의 결과는 끊임없는 갈등이고 사회 갈등과 소통부재는 높은 자살률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논쟁이 늘 좋은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당장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라도 타인의 입장, 의견을 듣고 교환하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 논쟁의 부재는 그런 가능성, 새로운 담론을 형성할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다.
이 책 『페미니즘 이론과 비평』을 읽으며 오타, 비문도 여러 군데에서 보았고 영어 한글 표기법에 의문이 들어ㅡ왜 번역자는 자꾸 '레즈비안'이라고 썼을까... ㅡ 집중에 방해가 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소개한 페미니즘 이론과 소설의 모순, 갈등을 드러내는 방식이 나는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수잔 왓킨스는 남성 권력이 줄곧 회피하는 것들을 용기 있게 펼쳐 보인다. 새로운 비판의 가능성을 감수하고 페미니즘 이론과 역사의 문제점들을 파고들었다. 물론 모든 의견에 동의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놀라움의 연속이었고 각 이론의 부딪힘, 충돌이 오히려 페미니즘의 변화에 생동감을 부여한다고 느꼈다. 기득권의 변화에 대한 저항과 폐쇄성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고인 물은 오염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나는 다양한 사유가 가능하고 앞으로도 가능해질 페미니즘의 미래를 기대한다. 페미니즘은 기존의 모순과 실패를 보완하고 또 다른 충돌을 야기하면서 지금도 다양한 담론을 생성하고 있다. 페미니즘 이론은 기존의 한계를 벗고 계속 변화할 것이다.
우리는 결여가 아니다. 뭔가를 기다리는 공백이다. 풍요로움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완성된다. 우리의 입술로 우리는 여성이다. P.213
어떤 이분법이든지간에 뭔가를 감시하고 배제하려고 할 때, 그 시도는 필시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배제된 것은 결코 애초부터 부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P.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