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총기난사와 같은 극단적 폭력성에 대해 우리는 공포를 느끼고 그런 행위의 당사자들이
우리와 별개의 존재임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한다. 예를들어 뉴스에서 다루어지거나 고발프로에서 그런 사건을 재조명하는 걸 유심히 보면 철저하게 일반인들과 분리하려는 도덕적 경계설정과 비판적 관점의 반복을 알수있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과정들이 문제의 해결책이 되는지는 의문이다. 무의미하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매번 한계를 느끼는게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사회적 장치들로 여겨진다. 만일 그렇다고 가정할때 사회가 느끼는 죄책감의 출처는 무엇일까? 무엇을 회피하고자 이런 의도적인(때로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는) 격식을 이어가는걸까. 근본적인 해결책이 부재한 반복적인 집단적 회피는 사실상 용인과 동일한게 아닐까?
해러웨이는 "죽이지 않게 하는것이 아니라
죽여도 되게 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해러웨이의 책을 읽을때는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것같다. 예전에 '육식의 성정치'를 읽으며 여성과 육식과의 관계에 대해 공부해볼 수 있었다.
캐럴 J.아담스에 따르면 육식과 여성에 대한 사회적 관점은 상당히 유사하다. 남성주의 시각에서 자연, 여성, 동물, 장애인은 이 세계를 점유,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착취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계속해서,점차 다양하게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아직은 요원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도는 워낙 오랫동안 강력하게 형성되어있고 부분적인 노력으로는 변화하기 힘든 역학을 이루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육식의 성정치'를 읽고 쓴 리뷰에서 밝힌 바와같이 사람들은 동물을 친구로 여겨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각종 캐릭터를 만들어 상품화 한다. 반려 동물을 기르는 인구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들은 언론에서 비판적으로 다루어지며 비난받는다. 하지만 정작 TV를 켜면 많은 예능, 기타방송에서 고기는 주된 요리로 등장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고기는 먹기좋게 형태가 바뀐 동물이다. 매력적으로 자신을 치장한 인플루언서가 앉은 자리에서 수십개의 닭다리를 먹으며 환호를 받는다. 하지만 우리의 입으로 들어가는 고기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즐겨먹는 사람조차 그 고기의 실체를 어느정도까지는 인지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매번 먹을때마다 도축되는 짐승들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고 우리는 '먹는'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고기를 먹는 사람들에게 무해할까? 식품위생적,영양학적 피해가 아닌 정신적 트라우마를 지적하는 거다. 물론 방송에 등장하는 인플루언서가 먹는 닭다리는 그녀가 직접 도축한 닭이 아니다. 그 잔인한 과정은 육식하는 소비자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타인에 의해 '대리'된다. 그렇게 해서 누군가의 동물 '학대'는 범죄가되고 누군가의 '학대'는 범죄가 아니게 된다. 하지만 소고기와 닭다리를 먹을때 그녀 또는 그는 정확하게 도축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다시 미디어에서 다루어지는 각종 폭력,범죄를 떠올려보자 그것의 원인을 추적할 수 없는 이유는 뭘까? 그것을 막기위한 근본적 해결에 비용을 투자하고 모두가 집중할 수 없는 이유는 뭘까? 왜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관심을 두지 못할까? 왜 다소 피상적으로 여겨지는 또한 피해자에 대한 그 '폭력'만큼이나 잔인한 '행위'에만 집중하는 것일까? 근본 원인은 사회,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에 어디서 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어느순간부터 구조적 문제라는 말은 유용한 회피 수단이 된 것만같다.) 대중은 자극적인 것에 관심이 있으므로 광고주를 잡기 위해서? 어떤 이유든 이런 식의 사회적'회피'는 그 자체로 하나의 '집단적 선택'이다. 나는 이것이 폭력의 내면화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은 미디어에서 어떤 폭력행위를 접할 때 그것이 이 세계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그 '소식'을 '신뢰'하고 거기에 대해 여러형태로 반응한다. 영상과 사진이 제공되지 않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직접 그 상황을 목격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은 어쩌면 이 사회가 그런 사건이 '가능'하도록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사회는 아동에 대한 방임도 학대로 규정한다.) 과연 어떻게 그것이 '조작'이 아니고 '현실'이라고 인지하는 것일까? 평생, 단한번도 누군가 죽는것을 목격해보지 않은 어린 아이도 마찬가지로 그런 사건에 대해 어른만큼은 아니더라도 사실이라고'신뢰'한다. 그 근거는 무엇일까? 어떻게 그런 신뢰가 가능할까?
해러웨이의 주장을 떠올릴때 이것은 사회가'폭력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폭력을 금지하는 겉모습과 달리 '폭력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도축과정을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공개한다면 각종 미디어에서 지금과 마찬가지로 육식을 행복한 삶의 즐거움으로 포장할 수 있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도축과정을 직접적으로 모두 공개하진 않더라도 어느정도는 대중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거대한 집단적 기만행위에서 조금은 속죄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진실이 고통스럽더라도 대중은 그것을 알아야할 권리가 있다고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하워드 진은 주장했다. 이 기만행위(도축을 '대리'시키고 공개하지 않는)에는 적극적 가담과 소극적 가담만이 있을 뿐이다. 누구도 이 기만과 거기에 따른 폭력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철저하게 도축과정을 비공개로 한다고 해서 그것을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거짓,기만,위선이 육식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에 대한 수용을 죄의식없이 가능하게 하고 스스로를 속이도록 조장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완전범죄란 없다. 적어도 본인이 어떤 식으로든 범죄사실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폭력이 또다른 폭력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개개인에게 이렇게 내면화된 폭력은 여러 방식으로 발현될 것이다. 그 범위를 다양한 개성들만큼 확대해석할 필요가 있다. 국가,종교,문화 공통적으로 크고 작게 벌어지는 각종 차별,괴롭힘,혐오,조롱등 불법과 또는 합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범죄로 규정되지 못한 타인에 대한 멸시를 포함해야한다. 이런 끊임없는 폭력성의 바탕에는 개인의 특성을 넘어선 강력한 조건과 이유가 깔려있다.
침묵 자체가 말로 표현되는 담화와 비슷하다.-뤼스 이리가레
모두가 하루 세끼 육식을 하지 않더라도 육식은 너무나 손쉬운 접근성을 지니고 있다. 육식에서 벗어나기는 어렵지만 육식에 접근하기는 숨쉬는 것만큼이나 쉬울정도로 육식은 자본주의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폐해는 강력한 기만행위의 당위성 아래 동물에 대한 폭력과 함께 묵인된다. 이 무한반복이 영속되고 권력과 물질적 욕망이 이상적 가치로 유지되는 한 여성의 종속적 삶도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비가시성, 각종 폭력과 혐오, 전쟁도 계속되지 않을까?
엄청나게 많은 수를 죽이려고 살게 만드는 거죠. 끔찍한 조건에서 죽이기 위해 끔찍한 조건에서 살게 만드는 것은...이윤을 위해서죠. 자본주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ㅡP.285 '반려자들의 대화' 중 도나 해러웨이
인간은 어쩌면 폭력의 내면화를 매 끼니마다 반복, 재생산하고 있다. 스스로를 위해,함께 살아가는 동물들과ㅡ종종 아닌것처럼 인간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잊혀지지만 우리도 역시 동물이다.ㅡ 이 세계의 생명들을 위해 이 문제를 더이상 외면해선 안돼며 모두 재창조해야만 한다. 끊임없이. 기존에 반복한 '폭력의 내면화'의 강력한 힘을 상쇄시키려면 세밀하고 촘촘한 창조가 요구될 것이다. 폭력을 막는 것을 넘어 폭력이 가능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같은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되는 순간, 사실은 모순이 된다. - P33 육식의 성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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