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외딴 마을에 가난한 가족이 살고 있다. 다큐멘터리 PD가 그 집에 방문한다. 가족들은 손님을 위해 이것저것 음식을 준비한다. 그들은 모두 환하게 웃고있다. 방문을 마친 PD는 집앞에 서서 말한다." 참 아름답지 않나. 가난해도 이들은 행복해 보인다." PD에게 묻고 싶다. 손님이 집에 찾아왔는데, 그것도 카메라를 들고 들어왔는데 거기다 찡그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거기서 어제 다툰일을 꺼내 투닥투닥 싸우는 부부가 있을까? 무엇을 위한 해석인가? 누구를 위한 해석인가? 왜 유독 가난은 쉽게 해석되어지는가?
혐오의 대상을 구별하는 핵심은 몸이다. 몸이 차별의 근거가 된다. 혐오는 이분법을 타고 흐른다. 남성/여성, 문명/야만, 장애/비장애, 젊음/늙음…. 이분법에는 위계가 있고 혐오는 은유를 타고 확장된다. 젊음은 혁신의 은유, 남자답다는 용기의 은유, 아름다움은 선함의 은유가 된다. 은유에는 논리가 없고 설명이 필요 없다. 스며들 뿐이다. 맞서 싸우기 힘들다. 그래서 몸의 차이를 근거로 차별하면 쉽게 오래 착취할 수 있다. 착취당하는 사람 스스로 자신을 혐오하게 되니까. P.11
내 몸은 과연 내것인가? 질문한다. 여성의 몸은 과연 여성의 것인가? 노동자의 몸은 과연 노동자의 것인가? 장애인의 몸은 장애인의 것인가? '그렇다'라고 할 수 있으려면 주체의 의지대로 '몸'이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주체가 필요로 할때 '안전'한 장소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여성들에게 '집', '화장실'은 안전한가? 장애인들에게 '이동'은 안전한 것인가? 노동자들에게 '일터'는 안전한가?
왜 어떤 '몸'들은 유독 사회적인가?
특권은 편안함이다. 너무 자연스러워 특권을 누리는 게 느껴지지도 않아야 일상적 특권이다. 피부색, 성별, 가난 탓에 자기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매 순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다. 타인의 시선,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자기 시선, 그 시선을 회의하는 또 다른 자기 시선, 이 모든 시선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다. 그 시선들의 투쟁이 일어나는 복잡한 마음을 알지도 못하면서 묻는다. ‘그걸 왜 못 해?’ ‘왜 그렇게 꼬였어?’ P.74
*https://n.news.naver.com/article/002/0002241492?cds=news_media_pc 뉴스기사
얼평,몸평하는 사회. 혐오의 뿌리는 우리들의 몸
*https://www.ytn.co.kr/_ln/0103_202205010525069459 뉴스기사
중대재해법 도입 석 달 동안 59명 사망 "죽지 않을 권리"
'근로자의 날'이다. 노동계는 법의 한계를 지적하며 '법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하고 경영계는 '감정적인 처벌보다 예방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경영책임자의 처벌수위는 최대 징역1년이다)
*https://www.ytn.co.kr/_ln/0103_202205010525069459 뉴스영상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는 죽어야 들린다.
하지만 어떤 이들의 목소리는 아무리 계속 죽어도 잘 들리지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