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 P67


온갖 유치한 표현이 대중가요에서 받아들여지고 온갖 어리석은 사랑이 문학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건 사랑이라는 속성이 그렇다는 걸 사람들이 한번쯤은 경험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리라. 사랑이라는 화학작용에서는 더 반응하는 쪽이 약자일 수밖에 없다. 더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더 많이 상대를 기다리는 쪽이 아무래도 불리하다. 일단 상황이 시작되면 '유불리'를 따지는게 무의미하긴 하지만 '이성'이 완연할때는 불리한 위치에 있고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이 소설은 그런 면에서 작가의 '자기고백'에 가깝다. '프랑스어'가 아주 유창하진 않은 한 외국인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던 그녀의 그를향한 기다림과 그녀의 삶을 가득채우던 '열정'에 관한 이야기다. 



2008년에 종영한 드라마 '불한당'에는 그런 상대의 마음을 이용해 돈을 벌던 한 남자가 진실한 사랑에 눈뜨는 과정을 담았다. 권오준(장혁)은 외모하나 믿고 여성들에게 접근해 투자를 빌미로 돈을 뜯어낸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하루이틀. 결국 그는 위험한 사채를 쓰고 빚을 지게 된다. 보름안에 3천만원을 갚지 않으면 장기라도 내놓아야 하는 위기에 놓인다. 차 접촉사고로 우연히 만난 진달래(이다해)에게 3천만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그녀를 유혹하려 접근하게 되는데 영 만만치 않다. 유혹하려다 의도치 않게 유혹당한다. 





이 과정에서 이야기가 '전형적'인 방식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어 눈길을 끌었다. 어쩌면 그래서 이 드라마가 당시 큰 인기를 끌지 못했는지 모른다. '진달래'는 히말라야 등반 후 사고로 돌아오지 못한 남편 때문에 싱글맘이 되었고 시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함께 살아간다. 권오준이 늘 하던 방식대로 그녀를 유혹하려 하지만 죽은 여동생을 닮았다고 눈물흘리는 그 앞에서 다른 여자들과 달리 못들은척 졸고 있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쉽게 감당할 수 없어 '명상'을 배웠고 아직 타인의 눈물을 받아줄수도 없는 상태다) 방법이 안통하자 뭐든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유혹하는 그에게 대형서점에 다니는 그녀는 '고객만족 응모함'에 자신의 이름을 써내달라 부탁한다. 


여러 가지 제약이 바로 기다림과 욕망의 근원이었다.- P32


다른 사람에게는 늘 통하던 방법이 이것저것 통하지 않자 그는 그녀에게 온통 마음을 쓰게 된다. 결국 카페 투자로 3천만원을 받아내지만 채권자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그 돈을 되찾아 진달래에게 돌려준다. 가진것 없이 불행한 삶을 살던 그에게 평범하고 진실한'사랑'이란 일종의 사치에 가까웠다. 그래서 속아 넘어온 상대에게 때로 모진 말로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난하기도 했던 그는 이제 새로운 삶을 꿈꾸려 한다. '사치스러운 사랑을'




대중적인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대체로 이야기의 아름다운 '결말'을 그려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삶'이란 것이 그렇듯 '사랑'도 그 여정으로 이미 충만한 것일 수 있다.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열정의 기호'들을 남긴 이유도 그런것이 아닐까? 조각가가 완성된 작품을 만들어내놓는 것도 경이롭지만 그 조각을 만들어내는 과정도 이미 열정의 산물이다. 결말은 그런 의미에서 큰 의미가 없다. '그와 그녀가 어찌되었는지' 보다 동요를 일으키는 부분은' 그와 그녀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이다. 


그 사람과 함께 있던 어느 날 오후, 펄펄 끓는 물이 들어 있는 커피 포트를 잘못 내려놓는 바람에 거실의 카펫을 태워버렸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불에 탄 그 자국을 볼 때마다 그 사람과 함께 보낸 열정적인 순간을 떠올릴수 있어서 행복했다.- P24



우리 관계에서 그런 시간적인 개념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그저 존재 혹은 부재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언제나‘와 ‘어느 날‘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열정의 기호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기호들을 한데 모으면 나의 열정을 좀더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을 열거하거나 묘사하는 방식으로 쓰인 글에는 모순도 혼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글은 순간순간 겪은 것들을 음미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그것들을 돌이켜보며 남들이나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인 것이다.-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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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3-21 00: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여러가지 제약이 바로 기다림과 욕망의 근원이었다는 문장이 콕 박히네요. 그 제약과 기다림이 없다면 사랑도 그저 생활이 되는건 순간이지요. 그래서 그런 생활로서의 사랑은 열정이 없다 생각하기 쉽고요.
불륜이든 이루어질 수없는 사랑이든 그런 것들이 더 아름다워보이는건 바로 그 삶의 척박한 순간들을 같이 겪지 않음으로 해서 환상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지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을 합니다. ㅎㅎ

미미 2022-03-21 11:20   좋아요 2 | URL
맞는 말씀입니다.ㅎㅎ 그런 면에서 보부아르가 떠오릅니다. ‘결혼‘이란 제도가 있는 한 욕망을 꿈꾸는 소설,드라마,영화는 계속 주된 관심을 받을거란 생각도 들고요.^^*

scott 2022-03-21 00: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 불에 탄 그 자국을 볼 때마다 그 사람과 함께 보낸 열정적인 순간] 미미님은 감동 받은 구절에 붙여 놓은 플래그, 형형색색의 플래그를 볼때 마다 작품 속 그곳, 그 장면을 떠올리실것 같습니다! ㅎㅎ 장혁이 추노 이전의 모습인건가요? 풋풋함이 ㅋㅋㅋ

미미 2022-03-21 11:23   좋아요 3 | URL
네 스콧님! 사랑에 관한 솔직한 고백을 들은 기분이예요.ㅎㅎ 고백을 듣는 와중에도 참 설레고 좋았습니다. 추노 이전에 연기력을 인정받았던 의외로 괜찮은 드라마였어요^^*

페넬로페 2022-03-21 01: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정말 사랑엔 완벽한 균형은 없는것 같아요.
제목처럼 단순한 열정이 오히려 더 앞뒤 안 볼 수도 있고요^^
장혁, 이다해 배우가 불한당이란 드라마에도 같이 나왔군요.
사랑은 언제나 아이러니하지만 사랑 그 자체로 오케이입니다**

미미 2022-03-21 11:26   좋아요 3 | URL
‘사랑은 언제나 아이러니하지만 사랑 그 자체로 오케이‘!! 이 말 넘 좋은데요?!ㅎㅎ 두 사람이 함께 출연한 드라마가 몇개나 되더라구요. 아이리스2,추노,이 드라마까지요. 웃다 울다 하며 참 재밌게 봤는데 이 책 읽고 떠올랐어요^^*

새파랑 2022-03-21 0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와 장혁과 김동률 조합이군요 ^^ 사랑도 약간 권력같은게 더 좋아할수록 더 아쉽게 되는거 같더라구요~ 이 책 얇은데 여운은 많이 두꺼운 책인거 같아요 ^^

미미 2022-03-21 11:30   좋아요 3 | URL
네! 새파랑님 이소라 언니도 같이 불렀습니다.ㅎㅎ 사랑에도 권력이 있다니 참 웃픈 현실입니다.ㅎ얇지만 말씀대로 여운은 정말 두껍네요. 출간되고 세간을 놀라게 했다니 재밌고 ‘그 남자‘가 누굴까 궁금했어요.^^*

책읽는나무 2022-03-21 09: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열정적인 순간들은 사랑 말고도 다른 곳에도 쏟을 수 있겠죠???^^
계속 처지고, 가라앉아 열정이 식어가는 이때, 김동률의 노래는 감미롭네요. 이소라 가수랑 분위기가 잘 어울립니다.
그리고 왜 물감님이 같이 떠오르는 걸까요???
이동욱스런 물감님ㅋㅋㅋㅋ
불한당이란 드라마가 있었군요?
장혁도 열정 빼면 시체일 것 같은 배우 중 한 사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다해도 열심히 하는 배우였던 것 같구요.
아...그러고 보니 두 배우 추노에도 함께 나왔었던???.....ㅋㅋㅋ

미미 2022-03-21 11:39   좋아요 3 | URL
그럼요! 나무님이 주신 댓글 읽을 땐 커피 마시면 안되겠어요ㅋㅋㅋㅋ저 또 쏟을 뻔ㅋ갑자기 출연하신 물감님ㅋㅋㅋㅋ김동률,이소라 목소리 조합이 꽤 드라마틱하네요? 흠뻑 빠져 듣고 있어요~♡ 이 드라마 6~7회 정도까진 꽤 볼만해요. 당시 압도적인 인기를 누린 드라마에 동시간대에 눌려 빛을 못봤대요. 후반부는 시청률이 낮아져서 그랬던건지 뭔가 배우들도, 각본도 조금 김이 새는 느낌을 받았어요.ㅠㅠ(장혁만 그대로?) 연기보고 감탄해서 바로 ‘검객‘이란 영화 봤는데 역시 훌륭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두 배우 3편정도 함께했어요.^^*

프레이야 2022-03-21 19: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불한당이란 드라마가 있었단 말이에요? ㅎㅎ
장혁이 저때만 해도 풋풋하군요.
아니 에르노 넘 좋아요 미미 님.

미미 2022-03-21 20:57   좋아요 3 | URL
네! ㅎㅎ 웨이브에서 볼 수 있는데요 7화정도까진 지루할틈없이 아주 잘 만들었어요. 장혁 연기가 압권입니다. 아니 에르노의 글 매력있죠~^^♡

2022-03-21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21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2-03-22 01: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 두 사람이 똑같이 좋아하는 일은 별로 없을까요 어느 한쪽이 더 좋아할지... 다시 생각하니 그럴 때가 더 많을 듯합니다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좋을지도...


희선

미미 2022-03-22 09:53   좋아요 2 | URL
그럼요~♡ㅎㅎ 저도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에서 화자가 늘 그 사람을 기다리고 그를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약자라고 써봤습니다. 헷

mini74 2022-03-22 21: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불에 탄 자국을 볼 때마다 그 사람을 떠올릴수 있어 행복하다는 구절이 저는 눈에 들어오네요. 그런 자국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면 사랑은 끝난거겠지요. ㅠㅠ 불한당과 에르노를 이렇게 잘 풀어내시다니 미미님 💕멋지십니다 ㅎㅎㅎ

2022-03-22 2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22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