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 좋은 글이다.'라는 말이 있다.
나도 한때는 이 말이 '진리'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지식은 널리 퍼져야 하므로 더욱 그렇게 믿었던것 같다.
지식이 특정 소수만의 것이 되어선 안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오늘 <페미니즘 철학 입문>는 읽고 이 말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라는게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누구나'도 특정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이해할 수 없는 말은 문제가 있는 것인가? 이것도 이분법적 사고가 아닐까 하는 의문들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도 종류가 무궁무진하다. 우리가 자주 접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짓기도 한다. 낯선 이야기, 낯선 표현들, 낯선 목소리, 낯선 주장들, 낯선 언어,....
낯선 것들에 대해 쉽게 부정적인 느낌을 갖는다. 그리고 책에서 이 부분이 가장 충격적이었는데 이런 것들에 '설명을 요구하는 상대의 태도'다. '내가 이해하지 못했으니 설명을 해 달라는 것.' 그러나 그런 요청에 저자는 되묻는다. '이해하려고 해 본적이 있느냐'고.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자기 중심적 기준으로 설명을 요구하는 것 아니냐고. 왜 그런 태도에 내가 설명까지 해 줘야 하느냐고, 그건 너의 몫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페이스북 상의탈의 시위'라는게 있었다. 당시 나는 상의 탈의한 여성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사회가 남성탈의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여성탈의에 음란이니 뭐니 불온한 시선을 갖는게 일반적이라는 건 공감했었다. 그래도 이 방식이 너무? 급진적이라 생각했었고, 모자이크 처리되어 기자에게 인터뷰한 시민이 말하듯 '이것이 남성의 하의탈의'와 같다고 생각했다. 가부장적 사고방식이란게 이렇게 무섭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에초에 여성의 몸을 음란화한 주체가 누구인지 생각해보지 않았다는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프레임이 여성을 얼마나 구속하고 억압했는지 보이니 이들의 시위가 새롭게 와닿았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는 사회일수록 섹슈얼리티에 대해서 여성이 말할 권리를 박탈해요. 가부장제가 섹슈얼리티를 정의하고 사용하고 누릴 권리를 독점합니다. p.347
어떤 영화는 평론가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고 동시에 일반 관객에게는 혹평을 받기도 한다. 또 반대의 경우도 있다. 평론가들과 관객들의 시각차이가 그렇게 때때로 이슈가 되기도 한다. 나도 그럴때 평론가들의 입장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관객의 의견에 동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단은 그렇게 의견이 갈릴 경우 내 의견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게는 참 별로였는데,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 재미없었는데 누군가 거기 감동하고 거기서 나름의 가치를 찾았다면 거기엔 내가 발견못한 가치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동진 작가의 말처럼 '귀책 사유가 이해하지 못한 나에게 있을 수도 있는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이해하지 못했다며 때로 온갖 혐오발언을 쏟기도 한다.
오랜 역사동안 남성들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악으로, 미친것으로, 별난 것으로, 문제 있는 것으로 규정했다.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여성은 성적 존재로 여겨지면서 남성 소유의 섹슈얼리티로 이용당하고 핍박당했다. 여성들의 순결함을 강조,신성화하고 창녀들을 모욕하는 멸칭들을 보라. 그리스 시대에는 매춘행위를 하수구에 오물 버리는 행위로 비유하기도 했다. 남성들은 정상적인 주체요,여성성을 이용하는 주인이라는 인식이다. 지금도 이런 인식은 사라지지않고 내면화되어 많은 문제를 야기시킨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악으로, 문제로 받아들이는 이런 태도는 다양성을 파괴한다. 많은 목소리를 억누르고, 여러 의견을 쉽게 묵살한다. 이해를 요구하기전에 과연 그'이해'의 주체가 누구인가 질문해야 한다. 특권의식으로 낯선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건 아닌지. 당신도 특수한 의견을 가진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물을 필요가 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셰익스피어를 만나 봤나요? 안 만나봤죠. 그래도 읽잖아요. '보편문학'이라고 하잖아요. 보편적이라는 건데, 공자가 왜 보편적이죠? 2500년 전 중국 사람이 하는 말인데, 예수의 말씀이라는 것도 중동 지방에서 2,000년 전에 했던 말씀인데 그걸 왜 보편이라고 하나요. 한 번 도 되어본 적 없는 사람들을 보편적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어떤 흑인 여성이 말하는 걸 어떻게 이해하느냐고 하는 게 말이 되냐는 거죠. 그 안에는 이미 편견이 있는 거예요. 누구를 보편으로 삼고, 누구를 보편 인간으로 삼는 거요. 사실 그들도 특수한 것일 수도 있는데 왜 보편으로 삼느냐는 거죠.p.333
책도 마찬가지다. 내가 발견못해서 재미없을 수 있다. 그게 무조건 그 작가의 탓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먼 훗날 다시 읽었을 때 새롭게 보일수도 있고 그럼에도 변함없을 수도 있지만 내가 이해 못한것이 오롯이 작품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볼만하다. 그래서 누군가의 글이 쉽게 쓰이지 않았다고 해서 꼭 그 필자의 문제인 것은 아니다. 나에게 낯선 서술방식, 생각들은 내가 그동안 나와 다른 다양한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일수도 있다.
먹고 싶은 건 꼭 먹어야 한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