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언니의 해제부터 구구절절 의미심장하다.
p.11 국민은 동질적인 존재 같지만, 실상 사회는 성원권 개념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성원권은 군사화된 보호 개념으로 정의된다.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구별과 위계화가 그것이다.
공동체를 지킨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보호해야 할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을 구별하는 권력을 갖게 된다.
그것이 배제, 타자화, 혐오이다. 성차별과 젠더 정치의 핵심은, ‘정상 남성‘인 보호자가 남성 문화가 규정한 남성 이외의 사람들을 타자 the others로,
피보호자로, 비非국민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 평화는 외부로부터 ˝지키는 것˝이 된다. 이처럼 평화가 성취의 목표가 되면, 전쟁은 불가피하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일상은통제된다. ˝나라를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국가주의와 안보 이데올로기의 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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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평화는 ‘지키는 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호 돌봄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리어든의 주장이다. 국제정치학이만들어내는 국제정치 영역은 젠더가 만들어지는 방식과 유사한이원적 대립에 근거한다. 전쟁/평화, 국외/국내, 질서/혼란, 현실/이상과 같은 이분법에서, 어느 한편은 성별화性別化된다. 이를테면 질서가 남성적 가치라면, 혼란은 예측할 수 없는 여성의 심리와 같은 것으로 취급된다.
국제정치학이 별도의 학문 분과로제도화된 시기가 여성들이 선거권을 획득함으로써 국내 정치에진출하게 된 이후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 P11
리어든은 발상의 전환을 제안한다. "평화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페미니즘의 주장은 평화를 대상화하거나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존의 전쟁과 평화는 반대말이 아니라 같은 말이다. 침략과 정복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전쟁은 없다. 모든 전쟁은 정의justice에서 출발한다. 텔레반으로부터 이슬람 여성 같은약자를 보호하고, ‘악의 축인 북한과 같은 깡패 국가로부터‘ 평화를 지킨다는 설득력 있는 명분이 따른다.
미국의 (우익) 페미니스트들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지지한 것은 전혀 놀라운일이 아니다. 2018년 한국의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난민 수용을거부한 명분 역시 한국 여성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여성주의‘였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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