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는동안 집중하고 최대한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여러차례 강제로 안드로메다를 다녀와야 했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서는 이런 고난이도의 글에 대해 집단고소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현학적이고 난해해 읽기 버거운 글이 있고 번역의 오류 때문에 읽기 힘든 글이 있다. 이 둘은 구분되어야 한다. 나는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읽기 전부터 이 책이 무척 난해하다는 의견과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두 가지 의견을 접했다. 번역에 문제 있는 책을 나도 몇 권 읽어봤기 때문에 어느정도일지 두려웠다. 하지만 '옮긴이 해제'를 읽어보니 이 책의 경우, 번역의 문제 보다는 버틀러의 난해한 글쓰기가 근본 원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당연히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난해함은 어떤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떨어뜨려 배제를 추구한다고 믿었던 나는 버틀러가 왜 하필 이렇게 까지 어려운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게 된 것인지 내내 의문을 가지고 책을 읽어나갔다.
철학자이자 퀴어이론가이면서 수사학과 비교문학과 교수인 주디스 버틀러는 이 책에서 뤼스 이리가레, 위티크,푸코,보부아르,프로이트,라캉,크리스테바,에르퀼린의 이론의 일부를 분석하고 때로 비판한다.ㅡ역시 이 과정에서 철학 개념어들이 쏟아지는 것도 이 책이 난해해 지는데 한 몫을 했다.ㅡ주디스 버틀러의 흥미로운 주장을 몇 가지 정리해 보면 이렇다.
금기와 이중부정
보통 생각하는 것과 달리 욕망 다음에 법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고 법이 욕망을 구성한다.
버틀러는 보다 근원적인 욕망은 동성애였으며 이 것 다음이 근친상간. 근친애라고 주장한다. 근친상간의 금기가 법으로 규정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이성애가 정상적인 것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즉 어떤 것의 금기는 다른 것의 허용을 의미한다. 근친애를 제외한 이성애가 정상이 됨으로써 동성애는 금기가 된다.
P.38 배제된 동성애는 완전히 배제되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부정이 부정되어'이중부정'의 방식으로 주체의 내부에 이미 들어와 있다. 그래서 남성 안에 여성이 있고, 이성애자 안에 이미 동성애가 있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조현준)
젠더의 수행성
젠더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굳건한 젠더 정체성이란 환상에 불과하다. 반복과 수행으로 인해
물화되고 상투화된다.정상/비정상,적절/부적절등의 구분에 깔린 규범이 있다. 비정상은 정상이 무엇인지를 가리키고 부적절은 적절한게 무엇인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규제를 만든 관념과 담론은 감춰져 있으며 이를 반복하는 수행성으로 인해 힘을 얻는다. 젠더는 환상일 뿐이며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의 반복된 수행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P.13 만일 우리가 여성이나 남성에 대해 어떤 특성이나 특질을 기대하고 있다면, 사실상 그런 본질에 대한 기대가 그 속성을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본질은, 본질이라고 믿어지는 특성에 대한 기대와 그런 기대가 만든 반복적 의례 행위에 의해 만들어지는 구성물이라는 주장이다.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조현준)
젠더 계보학과 정치
사회,문화적 구성물로 여겨지는 젠더가 어떻게 구성되어졌는지 역사적인 배경과 권력의 역학관계를 밝히려는 시도다. 젠더 계보학에 의하면 "섹스는 언제나 젠더였다." 버틀러는 젠더 계보학을 정치학에 적용해 여성없는 페미니즘이 가능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반복된 의미화 규범과 수행성으로 만들어진 정체성이기에 규범을 전복하기 위해서 정체성의 범주가 열려야 하는 것이다.
P.79 타고난 운명이라고 말해지는 해부학적인 성차나 근원적 욕망이라 말해지는 섹슈얼리티조차 사실은 당대의 지식체계가 구성한 규범의 산물이자 담론적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푸코의 지식의 계보학을 기반으로 버틀러는 젠더의 계보학을 논의한다.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조현준)
주디스 버틀러는 여러 철학자들의 관점을 이야기하고 비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한다. 버틀러가 어려운 글쓰기를 하는 이유는 규범에 따르는 '정상적인'범주의 고정화된 글쓰기에서 탈피하고자 함이다. 수행과 수행문의 그렇듯이 반복적인 수행과 수행문은 규범을 강화하고 복종을 의미한다.
버틀러는 섹스는 언제나 젠더였다고 말하지만 내 생각에 젠더는 언제나 여성이었다. 젠더의 개념 자체가 분류를 위한 것이다. 남성은 중립적이거나 언제나 보편적 인간을 가리킨다. 그들과 동등하다면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의 가슴에 별을 달거나 출신을 묻는다는 것은 그들을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하고 분류하는 것이다.
하지만 버틀러는 이 정체성이란 가면이고 환상이라고 말한다. 젠더라는 가면과 환상으로 인구의 절반을 분류하는 것은 결국 모두를 지치게 만들 뿐이다. 버틀러의 암호적 글쓰기가 가리키는 곳은 명명화된 구분이 없어지고 모두가 그 존재만으로 존중받는 세상이다.
P.301 성을 명명하는 것은 지배와 강제의 행위이며, 성차의 원칙에 따라 담론적/지각적인 몸의 구성을 요구함으로써 사회적인 실제를 창조하고 또 합법화하는 하나의 제도화된 수행문이다. 따라서 위티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우리는 몸과 마음속에서 특질 하나하나마다 우리를 형성해온 자연의 관념에 맞출 것을 강요당한다.(중략)남성과 여성은 정치적인 범주일 뿐 자연적인 사실이 아니다."(Ibid.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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