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말로 내돈내산인 나의 첫 책은 '발랄한 신입생 다렐르'라는 책이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주머니 속 꼬깃꼬깃 용돈이 어디 도망갈까 손을 넣어 꼭 쥐고서 충무로 한 구석에 있던 작은 서점에 혼자 입장을 했다. 그날을 떠올리면 책을 산다는 셀렘과 내가 고른다는 떨림과 혼자 이걸 해낼거라는 긴장과 두근두근 콩닥콩닥이 나를 붕 뜨게 만들어 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책을 사서 돌아오던 길보다는 사러 가던 길을 행복한 기억으로 남겨준것 같다.이제 생각해보니 곧 초등학교에 입학할꺼라는 기대 때문에 마침 그 책에 손이 간 것 같다. 표지에서 다렐르는 수줍고도 깜찍한 표정으로 교복과 어울리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런 다렐르 자신도 주변의 누군가도 콕 찝어 내게 말해주진 않았지만 다렐르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은 미지의 세상에 이제 막 던져진 나에게 세상살이의 힌트를 희미하게 보여주었다.
p.54 이상한 나라와 체스 왕국은 창조되자마자 만유萬有의 도서관에 입장했고, 마치 에덴동산처럼 우리가 한 번도 발 디뎌본 적 없어도 그 존재를 익히 아는 곳이 되었다. 앨리스의 세계는 비록 어느 지도에도 나오지 않지만(멜빌은 "진짜존재하는 장소들은 절대로 지도에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우리의 꿈속 삶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풍경이다.
신데렐라를 읽으면서 동물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며 도둑고양이를 쫒아다녔고 피노키오를 읽으면서 거짓말을 하고 나면 뭔가 기분나쁜일이 생길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삐삐는 내게 양말은 짝짝이로 신어야 간지라는 감각을 알려주었고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미인은 잠꾸러기니까 그냥 잠꾸러기도 열심히 자다보면 미녀가 될 수 있을거라는 엉뚱한 확신으로 착각의 자유를 주었다. 알베르토 망겔의 <끝내주는 괴물들>을 읽다보면 내가 잊고 지냈지만 어쩌면 내게서 떠난 적 없던 동화속, 소설속 특별한 친구들이 하나둘씩 그 유쾌한 모습을 드러낸다.
p.9 유니콘은 꿈꾸는 듯한 눈길로 앨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을 해봐, 어린이야."
앨리스는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며미소가 비어져 나오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저기요, 저는 유니콘이야말로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괴물인 줄 알았단 말이에요. 살아 있는 유니콘을 보는 건 처음이에요!"
"흠, 그런데 우리가 이제 서로를 보게 됐구나.
네가 나를 믿는다면, 나도 널 믿을게. 그럼 공평하지?"
루이스 캐럴,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심지어 망겔 선생덕에 더 만나야할 친구목록이 노트를 가득 채웠다. 돈키호테와 단테, 몬테크리스토 백작과 리어왕. 드라큐라와 포스터스 박사,파우스트 박사,돈 조반니 또는 돈 후안을 비롯한 각자의 절절한 사연을 가진 캐릭터들이 기록들 안에 즐비하다. 다렐르 이후로 나의 세계를 채워준 지난 책장과 지금의 책장속 존재들, 이 무리들, 괴물들, 또는 동반자들의 행렬이 더 길어져 남은 삶을 함께 해주길 기대해본다.
p.294 동화는 우리 세상에서 암울하고 공포스러운 많은 부분들을 특유의은근한 방식으로 설명해준다. 회의주의자인 우리는 동화에 거짓,가짜 희망, 공상 같은 의미를 부여해 왔지만, 백 년간의 잠으로 저주를 풀 수 있으리라거나, 이벨을 드러낸 포악한 짐승이 기대감을 안고서 우리 할머니 침대에 누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우리가좀처럼 잊지 못하는 까닭은 불신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