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68cm로 중 고등학교 때 항상 맨 끝줄에 앉았다. 특히 창가자리에 앉을 때가 가장 좋았다. 선생님 눈길을 피하기 좋을 뿐 아니라 학급 아이들의 뒷모습이 한 눈에 들어와 안정감이 느껴지고 바깥공기와 경치를 언제든 가장많이 들이켤 수 있었으니까. 이후에도 그런 성향이 지속되었다. 버스를 타거나 영화를 볼 때, 연극을 볼 때, 세미나에 갈때 등 단체로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장소에 가면 사람들에게 뒷통수를 보이고 앉는 것보다 남들의 뒷통수를 보고 앉는 것이 마음 편했다. 학창시절 자리 탓인지 원래 그런것인지는 모르겠다.
커버의 핑크가 예쁘기도 하고,플친 툐툐님이 희곡을 읽었는데 재밌다고 해서 찜해두었던 <맨 끝줄 소년>을 읽게됐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직전 즈음 대학로에서 동명의 공연포스터를 보고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제목도 포스터도 끌렸던 것. 저자인 후안 마요르가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극작가로 수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이 작품 <맨 끝줄 소년>은 그가 수학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실제 경험을 살려 만든 작품이다. 극중 헤르만은 문학과 언어를 가르치는 교사로 아이들의 형편없는 작문 실력에 괴로워하며 아내에게 푸념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P.6 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이 있을까? 내가 이 직업을 선택한 건 위대한 작품들과 접촉하면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지금 난 두려움과 접촉하며 살고 있을 뿐이야. 더 끔찍한건, 하루 하루 더 지독한 무식함에 맞서야 하는 게 아니야. 더 끔찍한 건, 내일 일을 상상해 보는 거야. 이 아이들이 우리 미래라는 거. 누가 이 아이들을 만나 보고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강한 비관주의자들은 야만인들이 침략해 올 거라고 예상하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미 여기 있어. 야만인들이 여기, 우리 교실에 이미 있다고.
해마다 반복되고 있는 일이지만 말도 안되는 학생들의 답안지로 분노하던 그에게 색다른 답안이 들어오게 된다. 작성자는 교실의 맨 끝줄에 앉는 소년 클라우디오 가르시아. 제법 그럴싸한 소년의 작문 답안에 그는 흥미를 느끼고 개인적으로 글쓰기를 지도해주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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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 네 문체는 헤르만 헤세와 쥘 베른 사이에서 헤매고 있어. 네 나이에는 당연해, 네 나이에는닥치는 대로 읽으니까.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낸다.) 도서관 책이 아니야, 내 책이야. 밑줄 치지 마. 모서리 접지 말고, 책을 펴서 엎어 놓지도 마
클라우디오 : 다 읽어야 해요? 더 짧은 거 없어요?
가장 좋은 자리인 맨 끝줄에 앉아 모든 걸 보고 쓰게 되는 소년. 이 작품에는 부조리와 풍자,미스터리,철학, 문학, 예술이 다 들어있다. 극작가의 작품 소재가 소설쓰기에 관한 이야기인 만큼 에드가 엘런포,찰스 디킨스, 체호프, 세르반테스, 톨스토이,피츠제럴드 같은 작가들의 이름과 작품들이 이곳저곳에 나열되면서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이런 목록을 관조하는 기쁨을 준다. 누군가의 글을 읽는 것 부터가 관조의 형태를 띈다. 소년은 맨 뒷자리와 놀이터에서 사람들을 관조하고 그것을 자신의 글에 담아 헤르만에게 넘긴다. 헤르만은 아내와 함께 클라우디오의 작품을 읽으며 그 세계를 관조한다고 생각하고 틈틈히 개입한다. 하지만 이것을 다시 관조하고 있는 클라우디오.
P.21
후아나: 당신도 맨 끝줄에 앉아 봤어?
헤르만: 가장 좋은 자리야. 아무도 거기는 못 보는데 거기서는 모두를 보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비롯해 센과 치히로의 얼굴없는 요괴 가오나시, 데스노트의 엘에 이르기까지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것까지 관조하는 자들에게는 묘한 매력과 힘이 느껴진다. 완전한 관조는 신의 영역이다. 그래서 보는 것에는 힘이 있다. 작가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전지적 작가시점은 작품 속 모든 인물의 내면을 파악하는 신의 시점이다. 누구나 그런 힘, 관찰을 하는 입장이길 바란다. 나도 학창시절 맨 뒷자리에서 그런 힘을 바랐던 것 같다. <맨 끝줄 소년>의 클라우디오는 그 힘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두렵고도 매혹적인 존재로 거듭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