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랜드 - 사악한 돈, 야비한 돈, 은밀한 돈이 모이는 곳
올리버 벌로 지음, 박중서 옮김 / 북트리거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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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돈, 야비한 돈, 은밀한 돈이 모이는 곳

불법 금융과 돈세탁의 전초기지는 어디인가

스위스 은행, 파나마의 유령회사, 저지섬의 신탁, 리히텐슈타인의 재단....

21세기 금융공학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나라

21세기 해적질에 관한 통렬한 고발장

 

 

사악한 돈, 야비한 돈, 은밀한 돈이 모이는 곳이 어디인가? 머니랜드다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민주주의를 잠식하고, 독재자의 약탈을 묵인하는 핵심 기지는 어디인가? 머니랜드다.

불법 금융과 돈세탁의 전초기지는 어디인가? 머니랜드다.

금융공학이라는 고급진 허울뒤에 숨은 진짜 목적은 21세기형 해적질이었다. 그 해적들의 보물섬은? 머니랜드다.

'머니랜드' 는 저자가 만들어낸 가상의 비밀국가 이름이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머니랜드의 실체를 진짜 이름을 지도위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이 무너졌을때, 어떤 역사가는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이겼다고 서방세계는 들떠올랐다. 하지만 그 이후의 동유럽의 정치상황은 전혀 예상밖으로 흘러갔다. 새롭게 출발하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며 생생한 기사를 쓰고자 모스크바로 이주했던 저자는 '이후 10여 년 동안 나는 자유와 우정에 관하여 글을 쓰기는커녕, 오히려 전쟁과 학대에 관해서 보도하고, 편집증과 괴롭힘을 경험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역사의 종말은 없었다. 오히려 역사는 가속화되었다.' (p. 20)

부패정권이 속출했고 국민들의 세금은 엉뚱한 곳에 쓰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로 저자가 우크라이나 의 현실을 알려주는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현실에서 어떻게 삶이 지속될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무법지대였다.

국가는 이들 주위에서 증발한 상태였다. 부패가 어찌나 속을 갉아먹었던지, 불법적인 치부의 수단으로 이용될 때 말고는 국가 자체가 존재하기를 중단해 버리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서 국민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서만 노력하는 국가를 과연 누가 지키고 싶어 하겠는가? 부패가 온 나라에서 그 합법성을 앗아 가 버린 셈이었다. 이런 종류의 분노가 우크라이나를 잠식했으며,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들을 잠식해 버렸다. 아프가니스탄, 나이지리아, 중동의 국민들이 테러리스트 집단에 가입하게 된 동기도 역시나 이런 분노였다. (p. 29)

길가다 교통신호를 어기면 경찰에게 돈을 주면 되었다. 아파서 병원에 가면 진료비 외에 의사에게 돈을 따로 주어야 했다. 사업을 하려면 공무원에게 일단 뇌물을 주어야 했다. 공무원은 세금을 착복하느라 혈안이 되었고 병원에는 약이 떨어졌으며 사방이 무법천지가 되는 동안 뭐라도 하려면 일단 돈부터 상납해야 했다. 그 와중에 나라의 대통령은 황금궁전을 지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궁전이 지어진 곳은 다른나라의 소유였다. 혁명세력에게 쫒겨난 대통령은 국외에 쌓아두었던 돈으로 호의호식하느라 제 나라로 어차피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역외 책략을 이용하는 부유한 사람들의 능력이 우리에게는 이용 불가능하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그토록 훨씬 덜 평등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 가운데 일부라는 사실쯤이야 굳이 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p. 32)

부패는 반서구 적국들에게 전력 증강 요소이지만, 정작 서구는 계속해서 적들의 더러운 돈을 수십억 달러씩 자기네 경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 돈이 우리가 서 있는 곳을 빨아들이면, 결국 땅이 무너진다. (p. 34)

돈의 흐름은 국경을 넘나들지만, 법은 그러지 못한다. 부자는 전 세계를 누비며 살아가는 반면, 나머지 우리는 국경을 갖고 있다. (p. 36)

돈 버는 수단이 다양해지는 만큼 돈을 숨기는 방법도 다양해진 것 같다. 국내에서 재산을 지킬 수 없다면 국외로 내보내 쌓아둔다. 나라마다 다른 법은 그러한 재산들을 보호될 수 있는 틈이 있었고 부자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되었다. 가난한 나라는 더 가난해지고 부자나라는 더 부자가 되고 있었다. 내돈은 내돈 니돈도 내돈 뭐 그런식으로.

그 당시 영국의 라디오 청취자들은 들을 만한 새로운 방송국 몇 개가 더 생겼다. 그 당시 영국에서는 법적으로 오로지 BBC만 라디오로 방송이 가능했기에, 새로운 팝 아티스트들을 청취자와 공유할 시기에는 후진적일 수밖에 없었다. 십 대 청취자는 신나고 새로운 음악을 듣고 싶어 했으며, BBC가 이들의 곡을 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진취적인 선주들은 여기에서 새로운 기회를 보았다. 이들은 자기네 선박에 라디오 장비를 실어서 영국의 영해 바깥에 정박시킨 다음, 영국을 향해 팝 음악을 방송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라디오 운영자를 해적이라고 불렀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방송국을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바로 '역외' 라는 이름이었는데, 비록 재미는 덜하지만 언어상으로는 더 정확했다. (p. 61)

1950년대 아직 세계대전의 여파로 경제가 어려웠지만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고 문화또한 그랬다. 섬나라 영국에서는 바다라는 무한한 공간을 이용하기가 용이했고 '해적방송'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이 해적방송의 아이디어는 돈의 세계에도 엄청난 힌트가 되었다. 시작은 '무기명 채권' 즉 역외채권이었다. 이 기발한 채권은 조세회피와 수익창출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최초의 고객들은 나치를 피해 스위스에 돈을 은닉했던, 그리고 마침내 그 돈을 이용해 생계를 유지할 방법을 발견했던 유럽 유대인이었다. 문제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텔아비르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매력을 느꼈던 그 사생활 보장과 운반 가능성과 편의상에 급기야 안트베르펜의 치과의사, 런던의 내부 거래 은행가, 심지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나치까지도 매력을 느꼈다는 점이다. 스위스에서는 합법적으로 대피한 돈이 야비한 조세 회피 자금과 뒤섞였고, 이는 또다시 사악하게 약탈한 돈과 뒤섞였다. 유로본드는 그 출처를 불문하고 숨겨야 하는 현금을 지닌 모두에게 편리했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머니랜드의 마법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부자들이 열어 놓은 최초의 순간이라고 할 법하다. (p. 70)

스위스의 중립성은 여러면에서 안전함을 보장했다. 스위스은행은 그 안전함을 이유로 돈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 쌓여가는 돈을 묵혀놓는다는 것을 아까워한 사람들이 유로본드 라는 역외채권을 만들어냈다. 안전했던 돈은 이제 돈이돈을 벌어들이게까지 되었다. 철저한 보안성은 돈의 출처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금고에 넣어주었었는데, 이제 그 돈들은 더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바르부르크의 투자은행에서 시작된 발전은 단순한 유로본드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 기본 패턴은 복제 가능했다. 그들은 자신들과 고객들에게 돈을 벌어 줄 수 있는 사업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들은 세계를 둘러보아 그 사업에 적절한 법령을 보유한 사법관할구역(예를 들어 리히텐슈타인, 쿡섬, 저지섬 등)을 찾아냈고, 그런 곳들을 명목상의 기지로 사용했다. 딱 어울리는 법규를 가진 사법관할구역을 찾아내지 못하면, 자신들에게 융통성을 발휘하도록 법규를 바꿀 때까지 위협하거나 아첨했다. (p. 74)

돈이 돈을 버는 동안 나라의 법규들이 자리를 잡아갔다. 그렇게 국내법에 제한이 걸릴 것 같으면 다른나라의 법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치권을 가졌으나 작은 나라들이 그 전초기지가 되었다. 왠만큼 큰 세계지도가 아니면 어디있는지도 몰랐던 그런 나라들은 법적으로 존재하나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그런 가상의 주소지를 기꺼이 제공했다. 그 댓가로 그 작은 영토를 유지관리할 수 있는 나라의 수입이 창출되었다.

진정한 혁명은 법치가 없는 국가, 또는 서양 같은 튼튼한 정치 제도가 없는 국가에서 이런 책략들이 차용되면서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러니까 브레턴우즈 체재에서 자본이 갇혀 있었던 시절, 머니랜드의 탄생은 이미 과거 여러 세기 동안 대결을 벌여 왔던 과세 당국 대 부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전투의 결과였다. 부유한 사람들의 돈을 통제하기 위한 이 장기간의 전쟁은 포식자와 멋잇감 사이에서 진화론적 군비 경쟁을 만들어 냈고, 양측은 속도와 교활하과 기민함에서 더 눈부신 개가를 올리기 위해 번갈아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유령회사, 신탁, 비밀 은행 계좌, 무기명 도구 기타 등등.. 미국 재부부조차도 이런 종류의 저항에 맞서기 위해 분투하는실정이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곳에서는 자기네가 지금 뭐에 맞서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하지만 변호사들과 회계사들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구소련의 생태계에 이 포식자들의 도구를 풀어 놓게 되자, 그것이야말로 완벽히 잘못된 만남이 되고 말았다. (p. 109)

나쁜일은 빨리 배운다고, 차근차근 발전을 거듭하며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고 갑작스런 체제변화로 한꺼번에 신문물이 쏟아져 들어간 국가들에서의 혼란은 표면적인 것보다 그 아래 숨겨진 부분들이 더 급성장을 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이 미끼를 꿀꺽 독식했다.

비닐봉지를 더 많이 겹쳐서 개똥을 담을수록, 외부자들은 그 내부에 뭐가 있는지를 깨닫기가 더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그 봉지를 유명 귀금속 업체 티파니엔드컴퍼니의 로고가 새겨진 쇼핑백에 넣어 두면, 어느 누구도 그 안에 똥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다. (p. 134)

유령회사는 검은 돈을 싸고싸고 또 싸는 검은 봉지가 되어 점점 더 내용물이 보이지 않도록 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발전했다. 이제 페이퍼컴퍼니를 전문적으로 만들어주는 회사를만드는 회사가 성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곳을 살펴보든지 간에 연구자들은 부패와 빈곤의 상관관계를 발견했다. 부패의 수준이 더 클수록 엘리트는 더 많은 돈을 벌었고, 이는 불평등을 초래하는 동시에 사회를 한데 엮어 주는 유대를 약화시킨다. 경제학자의 건조한 언어로 말하자면, 학교와 보건과 도로와 안전에 투자되는 돈은, 역외로 가져가서 타조 가죽 신발을 사는 데 사용하는 돈보다 더 높은 승수효과를 지닌다.(즉 그렇게 돈을 쓸 때마다 경제에 되돌아오는 것이 더 많다) 더 잘 통치되는 국가는 더 높은 생활 수준, 더 나은 건강, 더 긴 기대 수명, 향상된 교육 결과, 더 잘 작동하는 경제를 보유한다. (p. 184)

부패의 역학에 우리가 적절하게 관여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누군가가 정직하고 번영하는 민주주의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지금 얼마나 드문 일인지, 즉 역사적 관점에서 얼마나 독특한지를 서구 사람들이 종종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정치사상 상당수는 '선진'국가의 자유민주주의를 역사 발전의 자연스러운 결말로 내다보았기에 다른 사회들도 '개발도상'에 있다고 지칭했다. 마치 그 사회들이 종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종착역으로 인도될 선로 위의 열차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p. 187)

동유럽 국가들과 아프리카 국가들 그리고 작은 섬나라 여러 곳들의 실제 사례를 읽을 때마다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어떻게 이럴수가!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나라만 볼 수 있을 뿐 바깥 나라들을 너무 몰랐다. 우리나라 정도면 정말 깨끗한 거였다. 아주 살만한 국가였다. 무법 천지 국가들의 현실은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검은 돈들은 끊임없아 거대해져갔고 역외채권이나 유령회사를 넘어선 또다른 방법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작은 나라의 여권을 돈으로 사고 심지어 외교관으로 임명받아 외교관면책특권을 누리려는 시도까지 가능해졌다.

그러나 점점 더 발전하는 새로운 형태의 머니랜드를 유지시켜주는 것은 결국 나라 안의 법들이었다. 일례로 영국의 엄격한 명예훼손법은 저술가와 출판인에게 검은돈을 추적과정을 글로 쓰고 편찬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자국내 돈이 바깥에 쌓아져 가는 것을 더이상 두고 볼수 없게된 것을 깨달은 후 역외로 빠져나간 돈을 회수하는 방법들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산 회수는 어려운 일이다. 머니랜드는 그 부를 손쉽게 포기하지 않으며, 돈은 차마 셀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쌓이며 계속해서 세계를 돌아다니고 국경을 넘나든다. 그걸 감시해야 할 사람들보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백만 걸은 더 앞서 나간다. 정의는 계속해서 국경을 넘지 못하며,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처벌받지 않고 빠져나가는 사람은 단지 도둑만이 아니다. (p. 280)

돈을 갖고 달아난 사람이 도둑이라면 도둑만 머니랜드에 가던 시절도 옛말이 되었다. 이제 그 도둑을 비호해주는 세력이 그 도둑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권력이 나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적떼가 출몰하는 나라들이 있었다. 도둑을 쫒는 사람들을 해치우는 암살자들도 국경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첩보영화를 따로 안 봐도 될 지경이었다.

그렇게 거대하게 쌓은 돈을 대체 어디에 쓰는 것일까? 온갖 호화로운 사치품 소비는 개인적인 것들로 그렇다치자. 문제는 고급 부동산 이었다. 화려하게 장식되고 멋진 풍광과 편리하고 안전한 고급 주택들.. 그 주택들의 실소유주가 과연 자국민이 많을까? 그렇게 집도 땅도 외국인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 어떤 여파를 몰고 올까? 그런 집을 사고 그런 사치품들을 걸친 그들만의 파티를 우리는 이대로 둘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일단 스위스은행으로의 검은돈 유입을 차단하기로 나라들이 움직였다. 자산의 정보를 공유하기로 규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중 대표적 나라가 미국이었다. 그런데 이 규제에도 헛점이 있었다.

무려 100개국 이상의 금융기관들이 미국 시민이나 거주민 소유의 자산에 대한 정보를 미국과 반드시 공유해야 하지만, 미국의 금융기관들은 다른 나라에 아무것도 보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미국의 금융기관들은 세계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관해서 완전한 정보를 얻을 것이지만, 다른 국가들의 금융기관들은 미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완전히 깜깜한 상태로 남을 것이다. 런던의 시티에서 유로본드를 탄생시켰던 작은 구멍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는지를 돌이켜 보고 나서, 세계의 새로운 금융 구조물의 심장부에서 이와 같은 틈새를 통해서는 과연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을지 상상해보라. (p. 355)

대표적인 곳이 '세계 최대의 소도시'로 일컬어지는 네바다주 북부 와쇼티가운티의 리노 라고 한다. 미국의 이 '최!대!의 소!도시'는 스위스은행보다 더 안전한 조세피난처가 되고 있는 중이다. 그 합법적인 방법이 바로 '신탁' 이었다.

이 신탁은 외국 법률상으로는 미국 국적이었고, 미국 법률상으로는 외국 국적이었다. 즉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셈이었다. (p. 368)

오로지 한 가지 확실성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머니랜드가 계속해서 진화하리라는, 그 보호는 계속해서 강화되리라는 것이었다. 그곳의 상상력 뛰어나고 충분한 동기를 갖춘 방어자들은 자기네를 가장 환영하는 그 어떤 사법관할구역에서도 (그곳이 네비스이건, 영국이건, 믹ㄱ이건, 아니면 완전히 다른 어딘가이건 간에) 그 시민들이 돈을 숨기고 배가할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 낼 것이기 때문이었다. 민주주의 발상과 법치를 고수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것은 매우 걱정스렁누 생각이 아닐 수 없다. (p. 376)

뛰는놈 위에 나는놈 있다고, 머니랜드는 이제 지도상의 작고 힘없는 나라들에 세워두었던 기지들을 금융선진국인 영국과 미국내에 합법적으로 세우는 것을 넘어 무형의 공간까지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해적질은 갈수록 교묘해지고 우리는 점점 눈치조차 챌 수 없게 소외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이민자에 대항하여 국경을 강화하기만 하면 우리나라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도널드 트럼프 같은, 또는 영국에서는 브렉시트 운동 주도자인 나이젤 파라지 같은 사람들의 말을 믿는 시민이 너무 많다. 자유 질서에 대한 진정한 위협은 가난한 이민자들이 아니라 무채임한 돈이다. 역외 강도들은 세계를 약탈하고 있으며, 이런 약탈은 민주주의를 잠식하고, 불평등을 촉진하고, 우리가 차마 따라갈 수도 없는 머니랜드로 점점 더 커다란 양의 부를 빨아들인다. 이데 대한 해결책은 도개교를 들어올리지 않는 것, 즉 자국의 돈이 안착한 땅에서 자기도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며 무너지는 자국을 떠나 도망쳐온 외국인을 악마화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애초에 피난민 위기를 촉진하는 불안정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것이다. (p. 395)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다. 시간도 걸리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늘 최약체에게로 시선을 돌리게끔 하는 희생양의식에 저절로 빠져들게 된다. 정작 원인제공자는 그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그 사람인데 우리는 쉽게 그 손가락질이 향한 그 방향으로 눈길을 따라가곤 한다. 그동안 그 손가락질의 주체는 머니랜드의 돈방석위에 돈방석을 또 쌓고 있는 중인데 말이다. 그 돈방석은 눈치도 못채고 희생양의 구멍난 돗자리를 뺏지 못해서 안달하는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민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누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도둑을 감옥에 넣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세계의 훔친 부를 우리의 도시들이 세탁하지 못하도록 저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처럼 인내를 요구하고, 힘겹고, 전문적이고, 빛나지 않는 일을 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제휴를 구축할 준비가 딘 정치인을 지지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해야만 진정으로 우리의 경제와 우리의 사회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고,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세계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p. 396)

그나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독재가 횡행하고 무법천지가 당연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 희망이 될 수도 있을까? 그나마 우리가 알려고만 들면 이런 책도 아무 제한 없이 읽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 힘이 될 수 있을까? 편한 길은 없다. 쉬운 방법도 없다. 하지만 일단 알기는 해야 한다. 모든 행동은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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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 김현진 연작소설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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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한국 여자의 이야기, 감당할 수 있겠어요?

[네 멋대로 해라] 김현진의 도발적 문제작

 

아담한 크기의 작고 얇은 이 소설책에 실린 8편의 단편 중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없다.

소설집에 실린 단편 들 중 하나의 제목으로 책의 제목을 대신하는 것보다 이 책처럼 책 제목을 따로 붙인 소설집이 늘 더 인상좋게 다가온다. 그 제목은 책속의 단편들을 아우르는 일관된 주제를 드러내고 있기 마련이고, 단편집이라 해도 장편 못지 않게 일관된 주제를 전하는 소설집이 더 성의있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정아' 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한국 여성을 대표하는 이름인 셈이다.

친구들과 함께 나눴던 이야기들은 데운 우유 위에 생긴 막처럼 얄팍하고도 녹기 쉬운 가벼운 것들이어서 어떤 내용이었는지도 다 잊었지만, 그 이야기들을 나누며 마셨던 음료들은 그녀들이 더 이상 그립지 않은 것만큼이나 격렬하게 그리웠다. (p. 10)

그날 그 카페에서 오천오백 원이나 하는 그 스트로베리프라페 값은 은미가 지불해버리는 바람에. 그것만 아니었어도. 그냥, 길에서 둘이 천 원짜리 소프트아이스크림이나 먹으면 좋았을 걸. 그랬으면 아무 상관없었을 텐데. (p. 15)

뭘로 하실래요? 남자애는 구석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캐러멜모카...... 프라푸치노요, 조금 망설이다가 프라푸치노, 하고 강하게 말했다. (p. 27)

< 정아 > 中

한끼 식사값보다 비싼 음료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이름이 잘 외워지지도 않는 생소한 음료들이 카페의 메뉴판마다 즐비한 것을 보며 놀랄때가 종종 있다. 그 희한한 이름의 음료가 이름이 희한할수록 왠지 더 비싼 가격인것 같은 그 음료들이 삶의 질을 나타낼 수도 있구나 싶었다. 백원짜리 자판기 커피가 아직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페에 즐비한 음료들 대신 자판기 커피로 대신해야 했던 정아는 희한한 이름의 음료를 마시고나면 늘 더 내려갈 수 없다고 느껴지는 현실에서 더 바닥으로 내려앉아야 했다. 대입에도 실패하고 취업에도 실패했으며 다단계까지 겪었던 정아에게 그 음료를 마신 댓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그들이 한때 정정은 씨가 자신의 약지에 끼워질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주 큰 캐럿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러 다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정정은 씨의 심장에는 막이 생겼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막은 한 켜 한 켜 딱딱해지기만 했다. (p. 49)

사람들은 충동적인 것이 청소년기의 본성이라고 하지만, 한때 청소년이었던 모든 어른들도 가끔 자제력을 잃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그날은 정정은 씨의 마음속 청소년이 대폭발한 그런 날이었다. (p. 62)

< 정정은 씨의 경우 > 中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남친.. 뒷바라지를 하는 여친... 사법고시에 붙자마자 등돌린 남자.. 결혼시장에 던져진 상품으로서는 나이가 많아진 여자..

여자의 직업으로 최고라는 교사 라는 직업을 가진 정정은 씨지만, 드라마에서 닳도록 봤던 그 현실이 코앞에 닥쳤을때는, 드라마에서 남의일이라 봤던 결혼현실이 믿을 수 없게 자신을 깍아내리고 있었다.

말에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자기 일도 아니며 앞으로도 결코 안 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칭찬이든 위로든 실컷할 수 있는 거였다. (p. 80)

"인파이터. 무조건 들이대는 애들"

"인파이터 말고는 아웃파이터가 있어요. 음... 간단히 설명하면, 빙글빙글 돌면서 간 보는 애들" (p. 99)

꼭 맞아야 하는 주먹은 맞되, 그 이외에 쓸데없는 펀치는 전혀 맞니 않는 게 아웃파이터. 한번은 맞아야 했던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맞지 않고서는 권투란 스포츠는 성립하지 않으니까. (p. 101)

< 아웃파이터 > 中

첫 연애에서 호되게 당한 영진에게 첫 남자는 인파이터 였다. 맞고 나서야 알았다. 앞으로 만날 남자는 슬슬 간보는 아웃파이터일 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그녀에게 사랑은 이제 핑크빛 설레는 로망이 아니라 치고받는 권투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영진이 쓸데없는 펀치를 맞지 않는 아웃파이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마냥 행복할 수 있을까? 처음처럼?

"우리가 애를 낳아? 딸이면 어떡해? 나 닮은 딸이면 어쩌냐고. 어릴때부터 코끼리 소리 들으면서 사는 뚱땡이는 나로 족해. 나 그 꼴 볼 수 없어. 내가 한 일 중에 그나마 잘한 일이 바로 수술해버린 거야! 가난뱅이는 우리로 족하지 않아?" (p. 134)

뒤를 돌아보자 남자는 아직도 가로등 밑에서 불빛을 받아 파랗게 빛나는 하얀 화장지를 든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전히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약간 망설였지만 다시 돌아보지는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세상에 울고 있는 사람은 저 사람 하나뿐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함께 살고 있는 걸까. 사각사각, 김은정의 마음속 빈자리에서 소리가 났지만 그녀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p. 136)

< 공동생활 > 中

김병권은 좋은 만자였다. 윤정화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푸근한 살집을 가진 그녀가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다. 윤정화를 위해 방한칸짜리 옥탑방에서 방두개짜리 지하월세방을 얻었고 윤정화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며 욕심없이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했다. 하지만 윤정화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렇게 김병권의 사랑마저 가벼이 여기고 말았다. 그녀는 다이어트에 실패했고 동네주민 김은정은 그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지금 그놈 찾아가자, 당장 멱살 잡자 해도 모자랄 판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네가 사회생활 하는 법을 몰라서 그래! 다 같이 더럽게 사는 거야! 누가 덜 깨끗하고 더 깨끗하고, 이거 어차피 흙탕물에서 다 같이 뒹구는데 아무 의미도 없는 거라고!" (p. 151)

아이씨 미국에선 마트에서 총이랑 총알도 세트로 판다는데 성가시게시리... 면밀하고도 냉정히 머리를 굴리다가 다시 나는 흠칫, 놀란다. 아니, 당신, 아가씨, 댁은 도대체 누구세요? 내 안에 지금 계신 분, 누구예요? 누구냐고요, 우리 오늘 처음 만나는 것 같은데, 얘기 좀 해요. 나는 팬티를 벗어 세탁기에 던진다. 저 팬티는, 내 팬티가 아니다. 그럼, 누구 팬티야?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p. 169)

< 누구세요? > 中

내편이라고 생각했다. 경제관념이 철저한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미덕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애인이라는 남자는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하가 희망퇴직을 강요받은 여자친구에게 제정신이냐며 화를 냈다. 그렇게 제정신이던 남친은 아무 증거도 남겨놓지 않고 완벽하게 그녀의 돈도 깨끗이 가져갔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그녀는 그동안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도둑을 만난다. 남친만 도둑이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훔친 것보다 그녀가 도둑맞은 것이 더 그녀를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었다.

남들은 여학교 때 한 번은 다 보고 지나간다는 속칭 바바리맨이었다. 화정은 6년 내내 여중고를 다녔는데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p. 184)

바바리맨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화정은 맥이 탁 풀렸다. 그의 어깨라도 두드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한 걸음 내딛자 바바리맨은 소스라치며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간신히 바지를 꿰입은 바바리맨은 부리나케 도망치기 시작했다. 뛰어가다가 바바리맨은 또 엎어졌다 간신히 일어났다 또 엎어졌다 하며 바바리맨은 사투를 벌였다. (p. 189)

< 부장님 죄송해요 > 中

불금의 어느 저녁이었다. 화정은 그 금요일따라 유독 하루가 꼬였다. 불금이라며 칼퇴근하던 부장님은 그런 화정에게 불금을 즐기라고 했다. 그러나 뭐가 되는게 없던 그날 밤 골목길에서 난생 처음 바바리맨을 만나기까지 했다. 그 바바리맨에게 분노가 올라와 몇마디 했을 뿐인데 바바리맨은 줄행랑치며 자신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았다. 그는 또다른 어딘가의 부장님이었다.

잠깐 눈을 감은 수연은 이렇게만 지내게 해주세요, 하고 소원을 빌었다. 지금보다 더 잘 살거나 화려하게 살지 않아도 좋았다. 그냥 딱 이 정도만. 지금 이 정도면 수연은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p. 200)

<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나요 > 中

소설에 나오는 여자들 중 가장 행복한 여성이 수연이었다. 소박하지만 자신이 이룬 것에 감사하고 여전히 어렵겠지만 믿고 의지할 사람에게 감사해하며 지금처럼만 살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다고 생각한 생일밤이었다. 그밤 남녀공용화장실에서 생면부지의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가 가지고 들어온 신문뭉치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기 전까지는...

숙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불만의 표시였지만 그녀의 부모는 침묵의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뭔가 말할 수 없는 것이 그 앞에서 숙이가 나는 당신들이 뽑아 놓은 킹카 신랑감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고, 내가 원하는 건 아버지가 사오년 전 저잣거리에서 주워 온 거지새끼이자 우리 집 머슴인 바우와 초가삼간이라도 좋으니 오순도순 사는 거요, 하고 말해봤자 아이고 우리 딸아이는 사상이 아주 프리하구나, 하고 찬성할 부모가 아니라는 것은 숙이도 너무 잘 알았다. (p. 229)

그러나 그녀는 결코 바우를 다시 만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간혹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딸과 그 딸의 딸과 그 딸의 딸과 딸들도, 바우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사랑은 원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것. 대다수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적절한 '합의'에 불과하지만, 딸과 딸과 딸과 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합의에만 도달해도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했다. 사실 대부분 그랬다. (p. 237)

< 이숙이의 연애 > 中

조선말 다 가진 양가집 규수 숙이가 마음에 둔 남자는 머슴 바우 였다. 바우도 숙이를 사랑했다. 둘은 다시 만나기 위해 헤어졌지만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작가는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8편의 단편들은 짠했다가 웃겼다가 심지어 시대도 달리하면서 능수능란하게 여성이 처한 현실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다양한 여성들을 등장시키면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삶인지 알려준 이유를 '에필로그' 에서 설명한다.

태아들이 태어남을 선택할 수 있다면, 여성인 태아들에게 미래의 삶을 이야기해주고 그런 현실에 태어나는 것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한다면, 그 태아들은 과연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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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더 피플 - 복수하는 사람들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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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하는 사람들' 이라는 부제가 붙은 <THE OTHER PEOPLE> 가제본을 받아 읽을 기회를 얻었다.

작가는 C.J.튜더

그녀의 첫 작품 '초크맨'을 읽었던지라 세번째 작품이라는 이 소설에 호기심이 일었다.(두번째 작품은 '애니가 돌아왔다' 도 곧 읽어볼까 싶긴 하다) 첫 소설 '초크맨'은 나오자마자 영화판권이 팔렸을 만큼 대중성을 인정받은 작품이었다. 나또한 재미있게 읽었었다. 첫작품 같지 않게 서사의 촘촘함에 신경쓴 티가 났다고나 할까 ㅎㅎ

'디 아더 피플' 은 '초크맨'보다 더 밀도높게 진행되면서 마지막에 초자연적 현상까지 등장한다는 점에서 스티븐 킹 이 떠오르기도 했다.

세상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현상보다 어쩌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더 많을 수도 있기 마련이니까.

처절한 고통을 가까운 사람보다는 생판 모르는 남에게 오히려 속깊게 털어놓을 수 있다는 심리 자체가 사실 설명하기 쉬운 심리는 아닐수도... 이 작품은 그러한 복잡미묘한 인간의 심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단순히 복수 라고 말하기엔 뭔가 모자란 표현 같은 그런...

실종은 죽음과 다르다. 어떻게 보면 더 나쁘다. 죽음에는 끝이 있다. 죽음에는 슬퍼하는 시간이 허락된다. 추모하고 촛불을 켜고 꽃을 놓는 시간이. 떠나보내는 시간이.

실종은 천국과 지옥의 사이에 있는 림보다. 당신은 오도 가도 못하게 발목이 잡힌다. 지평선 위에서 희망이 희미하게 어른거리고 절망이 콘도르처럼 맴을 도는 낯설고 암울한 세상 안에서. (p. 25)

게이브는 퇴근 중이었다. 아내와 딸과 저녁을 함께 먹고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그런 평범한 저녁을 꿈꾸며 집에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꽉 막힌 도로에서 앞차 뒷좌석에 있는 딸아이의 얼굴이 보았다. 그차를 맹렬이 쫓아봤지만 놓쳤다. 집에 갔을 땐 아내와 딸이 모두 살해되었다며 경찰이 막아섰다. 그는 시신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딸은 죽은 것이 아니라 실종된 것이었다. 살해되었다는 딸이, 분명히 앞차 뒷좌석에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며 아빠 라고 말하는 딸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고 그는 이후 미친듯이 고속도로를 헤매며 딸을 찾는 생활을 전전하게 된다.

화장실, 탈의실, 거울이 있는 모든 곳. 프랜은 예전에는 앨리스의 거울 공포증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에 말도 안 되는 공포는 없었다. 공포를 느끼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논리적일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는 전처럼 아무것도 모르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거울이 앨리스의 기면증을 유발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p. 41)

계속 도망쳐 다니며 계속 겁에 질렸다. 어떤 아이도 그런 식으로 살면 안 된되는 거였다. 하지만 어떤 아이도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면 안 되는 거였다. (p. 70)

프랜은 어린 소녀인 앨리스를 데리고 도망다니는 중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앨리스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수 있었다. 앨리스를 지키기 위해 계속 도망쳤다. 하지만 곧 발각되곤 했다. 게다가 앨리스에게는 그녀가 모르는 공포가 심어져 있었다.

그녀는 잠을 잔다. 하얀 방에 누워 있는 창백한 소녀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미리엄은 가장 오래된 직원으로 이 집에 처음부터 있었다. 처음 그 이전부터 있었다. 그 현상은 2~3년 전에 시작됐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1층에서 차를 끓이는데 음 하나가 들렸다. 피아노 건반 소리였다. 딱 한번. 아이가 눈을 뜬 것일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적이 벌어지기도 하지 않는가. (p. 45, 46)

미리엄은 오랫동안 한 여자를 돌보고 있다. 어릴때부터 보아와서 식물인간이 된 소녀때 모습 그대로로만 보이는 여자를 미리엄은 살뜰히 간호하고 있었다.

게이브는 다시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여러 단어와 글자의 파편들이 서로 겹쳐져 있었다. 하지만 다섯 글자가 도드라져 보였다. 죽은 남자가 남긴 희미한 각인이었다.

다른 사람들. (p. 81)

비쩍 마른 그 남자에게 커피를 가져다주지 않았더라면,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다시금 고개를 내민 악몽처럼 너덜너덜한 수첩 위로 떠오른 그 단어를 보지 않았더라면.

다른 사람들. (p. 86)

케이티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일하는 웨이트리스다. 두아이의 싱글맘으로 최선을 다해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중이다. 그녀가 일하는 카페에 정기적으로 들러 식사를 하고 가는 게이브를 몇 년째 보고 있다. 그가 딸의 실종전단지를 돌릴 때부터 3년째 고속도로위를 헤매며 카페에 들를때마다. 그러다 어느날 그가 뚫어져라 보고 있는 수첩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는 단어를 보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

한참 뒤에 사마리아인은 자기 잔을 집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한숨을 쉬었다. "다크 웹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

게이브는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당연히 들어본 적 있었다. 실종된 아이나 친척이 있는 사람은 다크 웹에 대해 모를 수가 없었다. 기존의 검색 엔진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광대한 지하 인터넷. 화려한 공식 웹 아래에 숨겨진 공간. 일반적인 웹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그곳을 이용했다. 하지만 법의 테두리 밖에서 활동하려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깊고 어두컴컴한 곳이 원래 그렇듯 거기에 오물과 침전물이 쌓였다. (p. 161)

게이브가 자살을 생각했던 다리에서 한 남자를 만만다. 이름이 아닌 다양한 별칭으로 불린다는 그는 그저 '사마리아인'으로 부르라 했다. 그는 여러모로 게이브가 딸의 실종을 추적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유는 모르지만 게이브는 물어볼 수 없었다. 이 검은 남자는 위험했다. 하지만 게이브는 그저 딸의 실종을 추적하는 것에만 집중하면 될뿐 그의 사연을 알아낼 필요도 여력도 없었다. 그로부터 다크 웹 세상의 '다른 사람들' 을 알게 됐다.

Q: 명칭을 다른 사람들이라고 지은 이유가 뭔가요?

A: 인간은 누구나 비극은 다른 사람들에게만 벌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벌어지기 전까지는요, 우리도 당신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끔찍한 일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용서하거나 잊어버리는 데서 위안을 느끼지 않습니다. 정의를 구현하도록 서로 돕는 데서 느끼죠.

Q: 대가를 지불해야 하나요?

A: 돈이 오가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라도 우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도. 우리는 기브 앤드 테이크 시스템으로 운영합니다. 요청하고 신세를 갚는 시스템으로요. (p. 180, 181)

게이브의 아내는 살해당했다. 딸도 함께 살해당했다고 경찰도 처가도 얘기하지만 게이브는 딸이 실종됐다는 믿음이 있다.

그렇다면 그의 집에 있던 여자아이의 시신은 누구인가? 왜 장인어른은 게이브에게 시신검안을 못하도록 했나? 프랜을 쫓는 자들은 누구인가? 앨리스가 보는 환영은 누구인가?

게이브가 수십년간 숨겨온 비밀이 끔찍한 살해사건과 함께 세상에 알려진 날 그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양심적인 사람은 없었다. 그는 수십년째 약속을 이행중이었다. 고문에 가까운 약속을.

그 약속과 그에게 벌어진 참혹한 사건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식물인간 소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정말 식물인간인가? 사마리아인은 왜 게이브를 돕는가?

프랜이 사라졌을때 앨리스는 케이티에게 연락할 수 밖에 없었다. 케이티는 앨리스가 앨리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케이티가 자신의 아이들과 앨리스를 데리고 게이브에게 도망쳐 왔을 때 그들은 서로의 퍼즐을 맞춰볼 수 있었다. THE OTHER PEOPLE 이 누구인가를.

나에겐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 생각한 사건이 갑자기 터져버렸을 때, 뉴스에 나오는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일이 내게 벌어졌을 때, 그 억울함과 분노를 법이 만족스럽게 처벌해주지 않을 때, 낯선이가 다가와서 다른 방법이 있다고 알려준다면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내가 누군가의 복수를 해주고 누군가가 나의 복수를 해준다면, 내가 했던 복수가 내게 복수로 돌아오고 누군가가 했던 복수가 누군가에게 또다른 복수로 돌아오고, 그렇게 복수가 복수를 낳고 복수가 복수를 낳는 세상은 어찌 되는 것일까...

세상에 The Other People 이 더 많을 것 같지만 The Same People 이 더 많다.

나와 다른 사람들 보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 이 세상을 만들어 간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차곡차곡 쌓아가다 하나를 풀고 다음을 풀어가며 차근차근 전체를 완성해가는 이 작품은

인간의 고통이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 굉장히 현실적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인간이 고통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는지도 함께 보여준

단숨에 읽히지만 긴 생각이 남겨지는 괜찮은 스릴러 소설이었다.

여름엔 역시 스릴러 소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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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내게 화학을 알려줘 내게 과학을 알려줘 1
닥터 스코 지음 / 푸른들녘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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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같은 화학 히어로가 되고 싶은 이에게 권하는 책

 

스파이더맨을 둘러싼 과학적 호기심들을 아주 유쾌발랄한 어투로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보니 과학책을 읽고 있는 건지 스파이더맨 분석서를 읽고 있는 건지 헤깔릴 정도다. 처음 만난 사람인데 아주 격없이 친근하게 다가와 힘차게 악수하고는 호탕하게 웃으며 어깨동무를 해오는 사람을 만난 기분이랄까 ㅎㅎ

저자는 과학을 전공했고 전공을 살린 회사를 다니고 있는 사이 종종 대중과학서도 쓰고 유투브 실험 영상도 올리는 활기찬 사람인듯 하다. 거기에 마블시리즈 중에서 스파이더맨 '찐' 덕후인 것 같다. 스파이더맨의 만화책 부터 영화까지 두루 섭렵하고 있다보니 저자가 알려주는 스파이더맨 이야기를 읽다보면 스파이더맨이 만화나 영화속 주인공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실존인물인것 마냥 여겨진다.

스파이더맨 이라는 친숙한 매개인물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과학적 호기심을 일으키고 있는 저자의 질문들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폭넓고 다양하다.

스파이더맨 하면 떠오르는 거미줄! 그 거미줄 용액부터 거미줄을 쏘는 스파이더맨과 그 스파이더맨의 수트 로 이어지는 내용들은 스파이더맨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영화장면들이 떠오르면서 머릿속에서 구체적으로 연상이 되는 재미가 있다.

나는 마블시리즈에 뒤늦게 흥미를 가진 사람이다. 거의 해마다 나오는 마블시리즈가 상영관들을 점령할때 한두번 보긴 했지만, 앞뒤 내용을 모르니 한참 뒤에 나오는 쿠키영상에 왜 그렇게 관심들을 갖고 기다리는지 알수가 없었다. 그러다 지난 겨울 이후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이런저런 영화들을 찾아보게 되고 그러다 마블시리즈를 정주행하고 나서야 아~! 깨달았다. 역시 알고 봐야 더 재미있는 거였다. 이렇게 알고나니 이제 마블시리즈가 새로 나오면 여유로운 마음으로 저 캐릭터가 왜 저러는지 웃으며 볼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본 마블시리즈 가 책읽을때 도움이 될 줄이야 ㅎㅎ 스파이더맨 영화도 마블시리즈에 속한 건 다 봤기에 덕후까지는 아니지만 저자의 스파이더맨 상황설명을 대충은 다 알아먹을 수 있었다. ^^

스파이더맨의 주무기인 거미줄 용액을 화학적으로 예상분석해보면서 스파이더맨의 본 인물인 과학영재 피터 파커의 생각을 추리하는 과정을 읽다보면 스파이더맨 까지는 아니더라도 피터 파커 라는 사람이 마치 실존하는 것 같다. 저자는 피터 파커라는 과학자의 사고과정을 따라가는 중 같달까 ㅎㅎ 스파이더맨이 쏜 거미줄의 특성을 연구해보고 스파이더맨이 입고 다니는 수트에 대한 다양한 호기심까지 충족시키고 나면 조만간 업그레이드 된 스파이더맨이 우리 동네에 나타날 것만 같다. ^^

보너스로 실린 <완소 쿠키 자료> 에서는 어렵지 않은 실험 몇 가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실험들을 유투부에서 직접 볼 수 있도록 QR코드도 함께 있어서 이 책을 흥미롭게 읽은 청소년들은 찾아봄직 하다.

이 쿠키자료가 끝이 아니다.

그 뒤에 <스파이더맨 연대기> 에서 스파이더맨 영화 기록과 소유권 분쟁의 간략한 설명과 스파이더맨 에게 보내는 애정어린 편지까지 읽고 나면 wow 저자의 스파이더맨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구나 싶다.ㅎ

청소년들에게 과학을 좀더 친근하고 흥미롭게 느끼게 해주고 싶다면,

스파이더맨 거미줄의 근원인 웹플루이드의 정체는 무엇일까? 거미줄의 능력은 어느정도 일까? 스파이더맨은 어떻게 벽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스파이더맨의 안경이 어떤 렌즈인지? 등이 영화속 스파이더맨을 보며 궁금한적이 있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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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고전 살롱 : 가족 기담 - 인간의 본성을 뒤집고 비틀고 꿰뚫는
유광수 지음 / 유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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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을 파헤치다

가부장의 이중생활로부터 열녀 만들기 프로젝트, 자식 사랑 패러독스까지

'가족'을 둘러싼 잔혹하고 기이한 고전 살롱으로의 초대

 

 

'고전'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본제목보다 '가족기담'이라는 소제목에 더 눈길이 가는 책이었다. '고전'이라는 약간 고리타분한 분위기와 살롱이라는 얄궂은 단어의 조합에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고전'을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과 국내고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책이겠거니 하는 약간의 관심으로 읽게된 책이었다.

그런데 웬걸.

읽는 족족 속이 뻥뻥 뚫리다 못해 가끔 혼자 키득거리며 웃음까지 터지게 한 이 책의 매력에 홀딱 빠져버렸다.

학교에서 배운 것들은 다 올바른데 어디서 이런 불온한 이야기들만 모아놨느냐고 핀잔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가 막히게 잘 포장해놓은 이야기들 속에 꼭꼭 숨겨진 신음소리, 한숨소리, 통곡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그 헝크러진 소리들 속에서 인간의 내밀한 본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돌아보는 귀감이 되고 타산지석이 될 것이다. (p. 7)

학교에서 우리는 많은 고전을 배웠다. 아이들 책에도 전래동화라는 이름으로 고전들이 스며들어가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고전 속에서 저자는 뜻밖의 질문들을 꺼낸다. 그리고 현실감 터지는 분석들을 해낸다. 그야말로 기막히게 혁신적으로 고전을 다시 돌아보게 해준다.

고전에 등장하는 효자,효녀,열녀 이야기들을 보며 의문을 품어본 적은 없는가? 그들이 그렇게 기를 쓰고 효자, 효녀가 되려하고 열녀가 되려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사랑이 샘솟는 가족이라고 믿었는데 영아살해와 근친상간을 감추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챈적은 없었는가? 가부장가부장 해도 가부장의 관습이 어느정도 였는지? 여성과 장애인 같은 약자들에게 얼마나 잔인했는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그저 재미있게 읽고 넘겼던 '고전'작품들 속에는 '인간본성'을 꿰뚫는 질문들이 수두룩하게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본성들이 하나씩하나씩 이야기속에서 은근슬쩍 드러날 때마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잘못을 떠넘김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잘못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변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과격하고 더 극단적인 손가락질을 해대는 것이다. 공범이기에 다급한 그 심경을 감추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 행동은 대부분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처가 몽둥이게 맞아죽고 배가 갈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연한 수순이다. 희생양은 죽어야 한다. 그래야 그 모든 죄가 희생양과 함께 사라지고, 그래야 공범자들의 죄가 씻겨 나가기 때문이다. 공범자들이 더 광분할 수 밖에 없는 근본적 메커니즘이다. (p. 27)

<1관 불변의 희생양 메커니즘> 에서 소개하는 고전은 <쥐변신설화, 옹고집전, 배따라기> 이다.

공부하러 들어간 남편이 깍아버린 손톱발톱을 먹고 천년 묵은 쥐가 변신하여 남편행세를 했다는 '쥐변신설화' 에서 '쥐뿔도 몰랐냐'의 쥐뿔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돌아온 남편이 가짜(쥐)남편을 없애고 가짜를 알아보지 못한 부인은 죽임을 당했다. 함께 못알아본 부모는 멀쩡하고.

인색했던 옹고집을 벌주기 위해 짚인형 가짜 옹고집이 진짜 옹고집을 쫓아내는 옹고집전에서도 진짜가 돌아왔을때 웃음거리가 된 것은 부인 뿐이었다.

근대 소설가 김동인의 '배따라기' 에서도 '쥐잡기'는 의처증을 타고 부인과 동생을 쫓아내는 실마리가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늘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순간 그 희생양은 '부인' 이었다.

이 모든 불편하고 괴롭고 힘겨운 상황의 근본 문제는 '부재'였다. 그 부재의 틈을 쥐가 파고들었던 것이다. 절간에 간 남편의 공간적 부재보다, 욕심으로 사리분별을 못하는 옹고집의 상황적 부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의처증 남편의 심리적 부재이다. 자긍심 부재라는 그 열등감의 틈을 쥐가 파고들었던 것이다. (p. 52)

공포와 불안은 마음의 여유가 없는 곳을 파고든다. 그래서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게 한다. 눈이 확 뒤집히게 하는 것이다. (p. 55)

서양의 마녀사냥이 서양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사람사는 세상에서는 어디든 언제든 그러한 일이 있었다. 희생양이 필요해지는 시기에 사람들에게 스며든 공포와 불안은 그렇게 누군가를 탓함으로써 자신을 위안하려 든다. 지금도 그렇게 우리대신 엉뚱하게 벌받고 있는 희생양이 있지 않을까?

국가적 차원에서 '적서차별' 과 함께 고안해낸 것이 '과부재혼금지' 였다. 남자들에게 적서차별이 있었다면 여성들에겐 재혼금지가 있었떤 것이다. 이 두 제도 밑에는 동일한 메커니즘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한정된 관직 숫자 문제다. (p. 60)

열녀 만들기 역시 효자 만들기와 같은 방법이 쓰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효자는 만들어지는 순간 그 당사자가 큰 축복의 영예를 얻지만, 열녀는 만들어지는 순간 그 당사자는 최소한 피곤한 수절을 하든지 최악의 경우 죽어야 한다. 혜택? 그건 고스란히 엉뚱한 집안 식구들에게 남겨진다. (p. 73)

<2관 열녀 이데올리기> 에서 다루는 고전은 <열녀함양박씨전> 이다.

'관직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다' 라는 생각을 깊이 해보지 못했었다. 나랏일 하는 관직의 숫자는 생각보다 적어서 서자 얼자 의 자리까지는 없었는데, 양반댁 과부가 재혼해서 정식?!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은 서자 얼자도 아니기에 관직쟁탈의 경쟁율을 높이는 존재가 되었다. 자리가 적은 만큼 대상자를 줄여야 했다. 관직의 혜택은 소수에게만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밀려난 양반집안에서 얻을 수 있는 혜택에는 특별한 명분이 필요했다. 효자가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며느리가 죽어야 나라가 집안을 알아주었다.

효자 효녀 열녀 의 문화는 도덕과 예절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열여덟 살 몸종이 있다. 늘 그렇듯이 찬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주인 어른 드실 차를 소반에 받쳐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날은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찻잔을 내려놓는 그녀의 거동을 샅샅이 훑어보던 주인어른이 갑자기 뒤에서 덮치는 것이 아닌가. 반항해도 소용없다. 하늘이 핑 돌고 난리가 아니다. 곧 모든 것이 무너지고 끝난다. 겁에 질린 울음이 터진 것도 겨우 그때였다. 며칠 후 그녀는 주인어른의 첩이 되어 외진 곳에 방 하나를 차지하고 들어앉는다. 어제까지 같이 걸레질을 하던 친구들이 형식적으로 고개를 숙이기는 하지만 눈초리가 요상하다. 입이 열이 있어도 말할 수가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인어른을 기다린다. 하지만 처음이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평생을 홀로 지낸다. 이 어린 여자의 이름은 춘섬이다. 귀에 설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 끔찍한 날 이후 배가 불러 태어난 그녀 아들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홍길동. 바로 그녀가 낳은 아들이다. (p. 91~92)

홍길동전을 동화로 읽어서 그런지 원전이 이렇게 폭력적이고 질펀한지 몰랐다. 무엇보다 홍길동의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강렬한 인상을 받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첩' 이라고만 생각하고 넘겼다. 그런데 단순히 첩 이 아니었던 거다. 그런데 이 '처첩' 문제는 굉장히 다양한 양상을 띤다. 왜냐하면 양반남자가 마음에 들어하는 여자가 워낙 다양했기 때문이랄까. 그렇게 목숨줄을 거머쥔 한 남자에 의해 '첩'은 언제든 사악해질 수 있었다.

<3관 처첩의 세계> 에서 다루는 고전 <홍길동전> <사씨남정기> <춘향전> 고전을 몰라도 아마 이 세작품은 다 알것 같은, 이 유명한 세 작품을 전혀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이 작품들에 등장하는 '처첩'의 갈등은 단순히 여성들의 질투가 문제가 아니었다. 생존게임이었고 복수혈전이었다. 그리고 적서폐지를 그렇게 강하게 요구하던 홍길동은 율도국에서 '첩'을 만들어 가졌다. '길동 이놈도 역시 남자였던 것이다.'(p. 102)

19세기에 창작된 한 소설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남자들은 이젠 기녀들에게 절개가 아니라 순결을 요구한다. 그녀들의 처녀성을 요구한다. 기녀와 처녀성.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또 그것을 이야기의 중요한 핵심으로 사용한다. 남자들의 꿈과 환상은 이제 로망을 넘어 '노망'수준으로 치닫는다. <옥루몽>이 그렇다. (p. 12)

일반 독자들은 물론이고 연구자들조차 기녀들에게 성적 순결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와 은밀하고 은폐된 폭력의 문제를 제대로 분석해내지 못했다. 눈앞에 버젓이 적혀 있지만 그렇게 보지 못했던 것, 아니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는 말했듯이 그런 프로노그래피적 상황을 연출한 자들이 모두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p. 139)

<4관 가부장의 이중생활> 에서 다루는 고전 <구운몽, 옥루몽> 중 <옥루몽>은 잘 모르는 고전이었지만, 저자가 인용하는 고전마다 얼개를 다 설명해주기 때문에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구운몽> <옥루몽> 다 '몽'자가 들어가는 걸로 보아 꿈이야기인데 이 꿈이 그야말로 남성들의 로망실현 그 자체다. 그리고 이 판타스틱한 꿈을 성취하는 주인공에 집중하다보면 '설마 주인공이 그랬겠어' 하며 주인공을 두둔하게 된다. 그렇게 주인공의 로망을 자신의 것인양 꿈꾸며 주인공을 닮아간다.

조선시대 양명학을 이단으로 몰아 발도 못 붙이게 한 이유는 성리학의 사상적 체계가 매우 수준 높기에도 그랬지만,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제 마음보다 세상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번드르르하게 늘어놓기 잘하는 훈련된 전문 빅마우스들이 듣기에, 왕수인의 '마음을 바르게 써야지' 라는 훈계가 날카로웠기 때문인 것 같다. 밖에서는 성인군자지만 안에서는 추잡한 음란마귀로 변하는 자신들의 모습에 찔끔했기 때문인 것 같다. (p. 141)

시대의 사상 성리학이 양명학을 이긴 배경에는 이런 남성적 욕망이 숨어져 있었다. 스스로의 인격을 성찰하며 아는 만큼 실천하도록 가르치는 양명학 보다 세상의 이치 자체를 연구하면 인격수양도 절로 된다는 성리학이 지배층 남성들에게 훨씬 편했던 것이다. 공부만 하면 성인군자가 된다고 믿는 것이 좋았던 것이다. 하지만 공부와 현실이 다를때 이성과 실천이 연결되지 않을때 얼마나 삶이 비참해지는지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인간 본연의 욕망이란 것이 누른다고 없어지고 눈감아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답답하게 갑갑하게 억압할수록 더 심해지는 것이 욕망이다. 미친 듯이 돌아다니는 에너지가 점점 터질 듯이 커지다가 어디 한 곳 토해낼 출구를 찾으면 정신없이 쏟아져 나온다. 양반 여자들에게 그 출구는 소설이었다. (p. 146)

<5관 욕망의 세계> 에서는 <옥루몽> 과 <홍계월전> 을 다룬다.

김탁환 작가의 <대소설의 시대> 라는 작품이 생각났다. 한글 사용이 보편화 되고 아녀자들도 책을 읽고 쓰는 것이 원활해졌을 때 한글소설의 인기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렇게 소외되었던 여성들이 쓰고 읽는 소설속 내용은 기존의 작품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앞서 저자가 언급했던 <옥루몽> 과 비교하는 <방한림전> 과 <홍계월전> 은 여성의 욕망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말도 안되는 있을 수 없는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에 황부인이 몸부림을 친다. 사람들은 그것을 투기라고 매도했다. (p. 160)

그녀는 어릴 적부터 보고 듣고 알았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투기 갈등은 단순한 쟁총이 아니라 여자의 자기 위치 찾기로서의 정당한 갈등이었던 것이다. (p. 165)

<홍계월전>에서는 '처첩' 갈등을 다른 측면에서 재조명한다. 정실부인인 '황부인'의 몰락에 집중한다. 왜 황부인은 존중받지 못했는가?

저자가 설명하는 '르네 지라르 의 '욕망의 삼각형''이라는 이론에 무척 공감이 갔다. 욕망하는 주체가 목표대상을 곧장 추구하면 되는데 인간은 그러지 않고 목표대상보다 수준이 낮은 중간대상을 설정해서 그 중간대상 즉 매개자를 모방하려고 든다는 것이다. 감히 엄두도 못낼 목표 보다는, 이정도면 해볼법한 중간대상을 모방함으써 목표를 추구하다보니 주체는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거참... 인간의 심리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6관 - 무능열전 : 흥부전, 심청전, 변강쇠가> 였다.

할수 있는 거라곤 새끼 내지르는 일뿐이었던 흥부와 잘 하는 거라곤 섹스뿐인 기둥서방 변강쇠 둘 다 그저 못난 놈팡이일뿐, 무능하고 무기력한 핑계쟁이에 불과하다는 직설적인 저자의 풀이를 읽다보면 저절로 ㅋㅋㅋ 웃음이 났다. 그에 반해 심청전의 심봉사는 의외로 의지적 인간이었고 그랬기에 똑부러진 딸 심청이를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심봉사의 의지는 인정받지 못했는데.... 그 배경에 장애인에 대한 문화적 폭력이 깔려 있었다.

심봉사는 장애가 있어서 무능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무기력하게 대한 것이다.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일을 할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회는 그가 할수 있는 일을 줄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그냥 그대로 앉아 '효성 지극한 딸의 봉양이나 받으시라'고 하는 것이 최대의 배려였다. 아무도 그를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그를 인간답게 대접한 사람은 오직 한명, 그의 딸 심청뿐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심봉사는 장애인이 아니라 한명의 사람, 아버지였다.

장애인을 무기력하게 보는 시선보다 더 혹독한 것은 따로 있다. 장애을 '웃음거리'로 보는 것, 그것을 넘어 '죄'로 '악'으로 보는 눈길이 장애인을 두번, 세번 죽인다. (p. 205)

심봉사도 무능하다고만 생각했다. 자신의 욕심에 딸을 팔아넘긴 대책없는 아비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저자의 해석을 읽고 보니 아닐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예로 든 <피터팬> 의 후크선장도 <보물섬>의 존실버도 다른 동화속 마녀들도 다리를 절든 등이 굽든 결과적으로 장애인이었고 그 모습은 희화화 되어있었고 혐오화 되어 있었다. 심지어 '악인' 을 장애인의 모습을 한 인물이 대표함으로써 악을 대리화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니 장애인을 평범하게 볼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저자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아비인 흥부의 모습을 보고자란 흥부네 아이들도 분명 사회에 제 몫을 다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예상하며 심청이가 그렇게 야무지게 자란 것은 다 심봉사 덕분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부모를 보고 자란다. 그건 맞는 말이다.

<손순매아> <헨젤과 그레텔> <장화홍련전> 을 예로들어 '은폐된 패륜'을 이야기 하는 '7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장화홍련전> 이었다.

먹고살것이 부족한데 할머니 반찬에 손을 대는 자식을 묻어버리러 산에 올라갔던 부모가 효심을 칭찬받는 이야기는 <손순매아>는 제목은 낯설어도 익히 아는 내용이다. <헨젤과 그레텔> 도 <손순매아> 도 친부모가 기근을 못이겨 자식을 버리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차라리 자식을 버리는 게 낫지 더한 짓을 한 부모가 <장화홍련전> 속 아버지인줄 미처 몰랐다.

대체 계모는 왜 이들을 죽인단 말인가? 아무 이득도 없는데. 말했듯이 전처소생 중에 아들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납득이 된다. 하지만 배좌수 집에는 그냥 시집가버리면 그만인 장화와 홍련 말고는 전처소생이 없다. 아들이 없단 말이다. 그런데도 계모는 장화와 홍련을 죽이려고 술수를 부린다. (p. 240)

도대체 배좌수는 다 큰 딸들을 왜 품에 품고 있었을까?왜 놓아주질 않았을까?배좌수는 끔찍한 비극에 대해 손톱만큼도 책임지지 않는다. 모든 죄를 악독하고 사악한 계모와 그의 아들에게도 미뤄버리고 그는 다시 재기한다. 그는 새장가를 가서 다시 자식을 낳는다. 그렇게 고을을,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끝난다. (p. 251)

<장화홍련전> 하면 계모에게 시달리다 억울하게 죽은 자매의 이야기로만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계모는 자매를 죽일 이유가 딱히 없었다. 말그대로 시집보내면 끝이다. 하지만 자매의 친아버지가 장성한 두 딸을 시집보내지 않고 애지중지 한다. 그러다 계모가 꾸민 장화의 임신 누명에 사건당일 장화에게 자초지종을 묻지도 듣지도 않고 바로 계모의 계획을 승인한다. 언니가 죽자 홍련은 따라서 자살을 한다. 마을사또앞에 자매가 나타났을 때에도 장화는 침묵을 지킨다. 홍련만이 구구절절 하소연할 뿐이다. 왜였을까? 자신을 지켜줄 언니가 없어지자마자 홍련을 죽기를 결심했다. 홍련이 두려워했던 존재는 장화가 침묵해야 했던 존재는 계모가 아니라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해와달이 된 오누이> <여우누이> 를 통해 <자식사랑 패러독스> 를 말하는 <8관> 을 읽다보면 지금의 현실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딸래미가 여우라는 걸 알았으면 간을 내어줄 것이 아니라 사냥하는 법을 알려줬어야 했다. 몰랐다면 편애의 색안경을 벗지 못했던 부모의 책임감을 통렬하게 깨우쳐야 한다.

마지막 <9관 가족의 재탄생 : 최고운전> 의 <최고운전> 은 처음 보는 고전이었다. <야래자설화> 와 <아기장수 설화> , <지하대적퇴치설화> 를 비틀어내고 꿰뚫어낸 <최고운전>은 신라시대 실존 인물인 최치원의 인생을 멋지게 형상화한 소설이라고 한다.

밤에 귀한 존재가 방문하고 간뒤 낳은 아들이 영웅이 된다는 <야래자설화> 와 별볼일 없는 평민집에 어느날 날개달린 아기장수가 탄생하자 두려움에 죽일 수밖에 없었던 <아기장수 설화> 그리고 귀한집에서 여자와 보물을 훔쳐가는 도둑을 귀인이 섬멸하는 <지하대적퇴치설화> 는 모두 <최고운전> 에 슬쩍슬쩍 섞여있는데 기존 설화의 결말들과는 전혀 다른 전개를 만들어냄으로써 최치원의 삶을 더 극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능력은 있으나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시대, 탁월하면 탁월할수록 그것이 발목을 잡는 상황, 나를 위한 욕심이 아니라 남을 위한 희망이 외면당하는 갑갑한 현실, 이는 꼭 최치원이 살았던 시대만이 아니라 <최고운전>의 작가가 살았던 시대에도, 그리고 지금도 역시 반복되고 있다. (p. 307)

조선시대 소설가가 신라시대 인물로 당대를 풍자하는 것이나 조선시대 인물로 지금을 빗댈 수 있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역사는 늘 외양만 바꿀 뿐 비슷한 리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본성 또한 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달라졌을까 싶다. 역사도 사람도 너무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다는... 이런 생각때문에 고전을 읽는다. '고전'은 늘 지금의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더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듯 하다. 재밌으면서도 의미까지 있는 좋은 책이었다. 강추~!^^

장 폴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라는 놀라운 명제를 천명했지만 그 말의 어려움만큼이나 실천은 더 어려운 듯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진정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아무 목적 없이 그냥 던져지듯 있다는 무의미에서 허무감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은 오히려 그렇게 이유없이 던져진 듯하기에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존재가 된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혜안이다. 본래부터 결정되고 정해진 것이 없기에, 오히려 본질적으로 구속하는 것이 없는 진정한 자유 상태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짐으로써 자기 삶의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어떠한 인간이다(본질)' 라는 것보다 '스스로 선택하고 의미를 만들어가는(실존)' 것이 더 먼저 있다는 거다. (p. 314)

 

 

 

-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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