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고전 살롱 : 가족 기담 - 인간의 본성을 뒤집고 비틀고 꿰뚫는
유광수 지음 / 유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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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을 파헤치다

가부장의 이중생활로부터 열녀 만들기 프로젝트, 자식 사랑 패러독스까지

'가족'을 둘러싼 잔혹하고 기이한 고전 살롱으로의 초대

 

 

'고전'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본제목보다 '가족기담'이라는 소제목에 더 눈길이 가는 책이었다. '고전'이라는 약간 고리타분한 분위기와 살롱이라는 얄궂은 단어의 조합에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고전'을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과 국내고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책이겠거니 하는 약간의 관심으로 읽게된 책이었다.

그런데 웬걸.

읽는 족족 속이 뻥뻥 뚫리다 못해 가끔 혼자 키득거리며 웃음까지 터지게 한 이 책의 매력에 홀딱 빠져버렸다.

학교에서 배운 것들은 다 올바른데 어디서 이런 불온한 이야기들만 모아놨느냐고 핀잔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가 막히게 잘 포장해놓은 이야기들 속에 꼭꼭 숨겨진 신음소리, 한숨소리, 통곡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그 헝크러진 소리들 속에서 인간의 내밀한 본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돌아보는 귀감이 되고 타산지석이 될 것이다. (p. 7)

학교에서 우리는 많은 고전을 배웠다. 아이들 책에도 전래동화라는 이름으로 고전들이 스며들어가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고전 속에서 저자는 뜻밖의 질문들을 꺼낸다. 그리고 현실감 터지는 분석들을 해낸다. 그야말로 기막히게 혁신적으로 고전을 다시 돌아보게 해준다.

고전에 등장하는 효자,효녀,열녀 이야기들을 보며 의문을 품어본 적은 없는가? 그들이 그렇게 기를 쓰고 효자, 효녀가 되려하고 열녀가 되려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사랑이 샘솟는 가족이라고 믿었는데 영아살해와 근친상간을 감추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챈적은 없었는가? 가부장가부장 해도 가부장의 관습이 어느정도 였는지? 여성과 장애인 같은 약자들에게 얼마나 잔인했는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그저 재미있게 읽고 넘겼던 '고전'작품들 속에는 '인간본성'을 꿰뚫는 질문들이 수두룩하게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본성들이 하나씩하나씩 이야기속에서 은근슬쩍 드러날 때마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잘못을 떠넘김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잘못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변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과격하고 더 극단적인 손가락질을 해대는 것이다. 공범이기에 다급한 그 심경을 감추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 행동은 대부분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처가 몽둥이게 맞아죽고 배가 갈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연한 수순이다. 희생양은 죽어야 한다. 그래야 그 모든 죄가 희생양과 함께 사라지고, 그래야 공범자들의 죄가 씻겨 나가기 때문이다. 공범자들이 더 광분할 수 밖에 없는 근본적 메커니즘이다. (p. 27)

<1관 불변의 희생양 메커니즘> 에서 소개하는 고전은 <쥐변신설화, 옹고집전, 배따라기> 이다.

공부하러 들어간 남편이 깍아버린 손톱발톱을 먹고 천년 묵은 쥐가 변신하여 남편행세를 했다는 '쥐변신설화' 에서 '쥐뿔도 몰랐냐'의 쥐뿔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돌아온 남편이 가짜(쥐)남편을 없애고 가짜를 알아보지 못한 부인은 죽임을 당했다. 함께 못알아본 부모는 멀쩡하고.

인색했던 옹고집을 벌주기 위해 짚인형 가짜 옹고집이 진짜 옹고집을 쫓아내는 옹고집전에서도 진짜가 돌아왔을때 웃음거리가 된 것은 부인 뿐이었다.

근대 소설가 김동인의 '배따라기' 에서도 '쥐잡기'는 의처증을 타고 부인과 동생을 쫓아내는 실마리가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늘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순간 그 희생양은 '부인' 이었다.

이 모든 불편하고 괴롭고 힘겨운 상황의 근본 문제는 '부재'였다. 그 부재의 틈을 쥐가 파고들었던 것이다. 절간에 간 남편의 공간적 부재보다, 욕심으로 사리분별을 못하는 옹고집의 상황적 부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의처증 남편의 심리적 부재이다. 자긍심 부재라는 그 열등감의 틈을 쥐가 파고들었던 것이다. (p. 52)

공포와 불안은 마음의 여유가 없는 곳을 파고든다. 그래서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게 한다. 눈이 확 뒤집히게 하는 것이다. (p. 55)

서양의 마녀사냥이 서양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사람사는 세상에서는 어디든 언제든 그러한 일이 있었다. 희생양이 필요해지는 시기에 사람들에게 스며든 공포와 불안은 그렇게 누군가를 탓함으로써 자신을 위안하려 든다. 지금도 그렇게 우리대신 엉뚱하게 벌받고 있는 희생양이 있지 않을까?

국가적 차원에서 '적서차별' 과 함께 고안해낸 것이 '과부재혼금지' 였다. 남자들에게 적서차별이 있었다면 여성들에겐 재혼금지가 있었떤 것이다. 이 두 제도 밑에는 동일한 메커니즘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한정된 관직 숫자 문제다. (p. 60)

열녀 만들기 역시 효자 만들기와 같은 방법이 쓰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효자는 만들어지는 순간 그 당사자가 큰 축복의 영예를 얻지만, 열녀는 만들어지는 순간 그 당사자는 최소한 피곤한 수절을 하든지 최악의 경우 죽어야 한다. 혜택? 그건 고스란히 엉뚱한 집안 식구들에게 남겨진다. (p. 73)

<2관 열녀 이데올리기> 에서 다루는 고전은 <열녀함양박씨전> 이다.

'관직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다' 라는 생각을 깊이 해보지 못했었다. 나랏일 하는 관직의 숫자는 생각보다 적어서 서자 얼자 의 자리까지는 없었는데, 양반댁 과부가 재혼해서 정식?!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은 서자 얼자도 아니기에 관직쟁탈의 경쟁율을 높이는 존재가 되었다. 자리가 적은 만큼 대상자를 줄여야 했다. 관직의 혜택은 소수에게만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밀려난 양반집안에서 얻을 수 있는 혜택에는 특별한 명분이 필요했다. 효자가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며느리가 죽어야 나라가 집안을 알아주었다.

효자 효녀 열녀 의 문화는 도덕과 예절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열여덟 살 몸종이 있다. 늘 그렇듯이 찬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주인 어른 드실 차를 소반에 받쳐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날은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찻잔을 내려놓는 그녀의 거동을 샅샅이 훑어보던 주인어른이 갑자기 뒤에서 덮치는 것이 아닌가. 반항해도 소용없다. 하늘이 핑 돌고 난리가 아니다. 곧 모든 것이 무너지고 끝난다. 겁에 질린 울음이 터진 것도 겨우 그때였다. 며칠 후 그녀는 주인어른의 첩이 되어 외진 곳에 방 하나를 차지하고 들어앉는다. 어제까지 같이 걸레질을 하던 친구들이 형식적으로 고개를 숙이기는 하지만 눈초리가 요상하다. 입이 열이 있어도 말할 수가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인어른을 기다린다. 하지만 처음이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평생을 홀로 지낸다. 이 어린 여자의 이름은 춘섬이다. 귀에 설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 끔찍한 날 이후 배가 불러 태어난 그녀 아들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홍길동. 바로 그녀가 낳은 아들이다. (p. 91~92)

홍길동전을 동화로 읽어서 그런지 원전이 이렇게 폭력적이고 질펀한지 몰랐다. 무엇보다 홍길동의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강렬한 인상을 받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첩' 이라고만 생각하고 넘겼다. 그런데 단순히 첩 이 아니었던 거다. 그런데 이 '처첩' 문제는 굉장히 다양한 양상을 띤다. 왜냐하면 양반남자가 마음에 들어하는 여자가 워낙 다양했기 때문이랄까. 그렇게 목숨줄을 거머쥔 한 남자에 의해 '첩'은 언제든 사악해질 수 있었다.

<3관 처첩의 세계> 에서 다루는 고전 <홍길동전> <사씨남정기> <춘향전> 고전을 몰라도 아마 이 세작품은 다 알것 같은, 이 유명한 세 작품을 전혀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이 작품들에 등장하는 '처첩'의 갈등은 단순히 여성들의 질투가 문제가 아니었다. 생존게임이었고 복수혈전이었다. 그리고 적서폐지를 그렇게 강하게 요구하던 홍길동은 율도국에서 '첩'을 만들어 가졌다. '길동 이놈도 역시 남자였던 것이다.'(p. 102)

19세기에 창작된 한 소설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남자들은 이젠 기녀들에게 절개가 아니라 순결을 요구한다. 그녀들의 처녀성을 요구한다. 기녀와 처녀성.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또 그것을 이야기의 중요한 핵심으로 사용한다. 남자들의 꿈과 환상은 이제 로망을 넘어 '노망'수준으로 치닫는다. <옥루몽>이 그렇다. (p. 12)

일반 독자들은 물론이고 연구자들조차 기녀들에게 성적 순결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와 은밀하고 은폐된 폭력의 문제를 제대로 분석해내지 못했다. 눈앞에 버젓이 적혀 있지만 그렇게 보지 못했던 것, 아니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는 말했듯이 그런 프로노그래피적 상황을 연출한 자들이 모두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p. 139)

<4관 가부장의 이중생활> 에서 다루는 고전 <구운몽, 옥루몽> 중 <옥루몽>은 잘 모르는 고전이었지만, 저자가 인용하는 고전마다 얼개를 다 설명해주기 때문에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구운몽> <옥루몽> 다 '몽'자가 들어가는 걸로 보아 꿈이야기인데 이 꿈이 그야말로 남성들의 로망실현 그 자체다. 그리고 이 판타스틱한 꿈을 성취하는 주인공에 집중하다보면 '설마 주인공이 그랬겠어' 하며 주인공을 두둔하게 된다. 그렇게 주인공의 로망을 자신의 것인양 꿈꾸며 주인공을 닮아간다.

조선시대 양명학을 이단으로 몰아 발도 못 붙이게 한 이유는 성리학의 사상적 체계가 매우 수준 높기에도 그랬지만,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제 마음보다 세상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번드르르하게 늘어놓기 잘하는 훈련된 전문 빅마우스들이 듣기에, 왕수인의 '마음을 바르게 써야지' 라는 훈계가 날카로웠기 때문인 것 같다. 밖에서는 성인군자지만 안에서는 추잡한 음란마귀로 변하는 자신들의 모습에 찔끔했기 때문인 것 같다. (p. 141)

시대의 사상 성리학이 양명학을 이긴 배경에는 이런 남성적 욕망이 숨어져 있었다. 스스로의 인격을 성찰하며 아는 만큼 실천하도록 가르치는 양명학 보다 세상의 이치 자체를 연구하면 인격수양도 절로 된다는 성리학이 지배층 남성들에게 훨씬 편했던 것이다. 공부만 하면 성인군자가 된다고 믿는 것이 좋았던 것이다. 하지만 공부와 현실이 다를때 이성과 실천이 연결되지 않을때 얼마나 삶이 비참해지는지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인간 본연의 욕망이란 것이 누른다고 없어지고 눈감아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답답하게 갑갑하게 억압할수록 더 심해지는 것이 욕망이다. 미친 듯이 돌아다니는 에너지가 점점 터질 듯이 커지다가 어디 한 곳 토해낼 출구를 찾으면 정신없이 쏟아져 나온다. 양반 여자들에게 그 출구는 소설이었다. (p. 146)

<5관 욕망의 세계> 에서는 <옥루몽> 과 <홍계월전> 을 다룬다.

김탁환 작가의 <대소설의 시대> 라는 작품이 생각났다. 한글 사용이 보편화 되고 아녀자들도 책을 읽고 쓰는 것이 원활해졌을 때 한글소설의 인기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렇게 소외되었던 여성들이 쓰고 읽는 소설속 내용은 기존의 작품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앞서 저자가 언급했던 <옥루몽> 과 비교하는 <방한림전> 과 <홍계월전> 은 여성의 욕망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말도 안되는 있을 수 없는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에 황부인이 몸부림을 친다. 사람들은 그것을 투기라고 매도했다. (p. 160)

그녀는 어릴 적부터 보고 듣고 알았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투기 갈등은 단순한 쟁총이 아니라 여자의 자기 위치 찾기로서의 정당한 갈등이었던 것이다. (p. 165)

<홍계월전>에서는 '처첩' 갈등을 다른 측면에서 재조명한다. 정실부인인 '황부인'의 몰락에 집중한다. 왜 황부인은 존중받지 못했는가?

저자가 설명하는 '르네 지라르 의 '욕망의 삼각형''이라는 이론에 무척 공감이 갔다. 욕망하는 주체가 목표대상을 곧장 추구하면 되는데 인간은 그러지 않고 목표대상보다 수준이 낮은 중간대상을 설정해서 그 중간대상 즉 매개자를 모방하려고 든다는 것이다. 감히 엄두도 못낼 목표 보다는, 이정도면 해볼법한 중간대상을 모방함으써 목표를 추구하다보니 주체는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거참... 인간의 심리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6관 - 무능열전 : 흥부전, 심청전, 변강쇠가> 였다.

할수 있는 거라곤 새끼 내지르는 일뿐이었던 흥부와 잘 하는 거라곤 섹스뿐인 기둥서방 변강쇠 둘 다 그저 못난 놈팡이일뿐, 무능하고 무기력한 핑계쟁이에 불과하다는 직설적인 저자의 풀이를 읽다보면 저절로 ㅋㅋㅋ 웃음이 났다. 그에 반해 심청전의 심봉사는 의외로 의지적 인간이었고 그랬기에 똑부러진 딸 심청이를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심봉사의 의지는 인정받지 못했는데.... 그 배경에 장애인에 대한 문화적 폭력이 깔려 있었다.

심봉사는 장애가 있어서 무능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무기력하게 대한 것이다.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일을 할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회는 그가 할수 있는 일을 줄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그냥 그대로 앉아 '효성 지극한 딸의 봉양이나 받으시라'고 하는 것이 최대의 배려였다. 아무도 그를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그를 인간답게 대접한 사람은 오직 한명, 그의 딸 심청뿐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심봉사는 장애인이 아니라 한명의 사람, 아버지였다.

장애인을 무기력하게 보는 시선보다 더 혹독한 것은 따로 있다. 장애을 '웃음거리'로 보는 것, 그것을 넘어 '죄'로 '악'으로 보는 눈길이 장애인을 두번, 세번 죽인다. (p. 205)

심봉사도 무능하다고만 생각했다. 자신의 욕심에 딸을 팔아넘긴 대책없는 아비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저자의 해석을 읽고 보니 아닐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예로 든 <피터팬> 의 후크선장도 <보물섬>의 존실버도 다른 동화속 마녀들도 다리를 절든 등이 굽든 결과적으로 장애인이었고 그 모습은 희화화 되어있었고 혐오화 되어 있었다. 심지어 '악인' 을 장애인의 모습을 한 인물이 대표함으로써 악을 대리화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니 장애인을 평범하게 볼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저자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아비인 흥부의 모습을 보고자란 흥부네 아이들도 분명 사회에 제 몫을 다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예상하며 심청이가 그렇게 야무지게 자란 것은 다 심봉사 덕분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부모를 보고 자란다. 그건 맞는 말이다.

<손순매아> <헨젤과 그레텔> <장화홍련전> 을 예로들어 '은폐된 패륜'을 이야기 하는 '7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장화홍련전> 이었다.

먹고살것이 부족한데 할머니 반찬에 손을 대는 자식을 묻어버리러 산에 올라갔던 부모가 효심을 칭찬받는 이야기는 <손순매아>는 제목은 낯설어도 익히 아는 내용이다. <헨젤과 그레텔> 도 <손순매아> 도 친부모가 기근을 못이겨 자식을 버리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차라리 자식을 버리는 게 낫지 더한 짓을 한 부모가 <장화홍련전> 속 아버지인줄 미처 몰랐다.

대체 계모는 왜 이들을 죽인단 말인가? 아무 이득도 없는데. 말했듯이 전처소생 중에 아들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납득이 된다. 하지만 배좌수 집에는 그냥 시집가버리면 그만인 장화와 홍련 말고는 전처소생이 없다. 아들이 없단 말이다. 그런데도 계모는 장화와 홍련을 죽이려고 술수를 부린다. (p. 240)

도대체 배좌수는 다 큰 딸들을 왜 품에 품고 있었을까?왜 놓아주질 않았을까?배좌수는 끔찍한 비극에 대해 손톱만큼도 책임지지 않는다. 모든 죄를 악독하고 사악한 계모와 그의 아들에게도 미뤄버리고 그는 다시 재기한다. 그는 새장가를 가서 다시 자식을 낳는다. 그렇게 고을을,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끝난다. (p. 251)

<장화홍련전> 하면 계모에게 시달리다 억울하게 죽은 자매의 이야기로만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계모는 자매를 죽일 이유가 딱히 없었다. 말그대로 시집보내면 끝이다. 하지만 자매의 친아버지가 장성한 두 딸을 시집보내지 않고 애지중지 한다. 그러다 계모가 꾸민 장화의 임신 누명에 사건당일 장화에게 자초지종을 묻지도 듣지도 않고 바로 계모의 계획을 승인한다. 언니가 죽자 홍련은 따라서 자살을 한다. 마을사또앞에 자매가 나타났을 때에도 장화는 침묵을 지킨다. 홍련만이 구구절절 하소연할 뿐이다. 왜였을까? 자신을 지켜줄 언니가 없어지자마자 홍련을 죽기를 결심했다. 홍련이 두려워했던 존재는 장화가 침묵해야 했던 존재는 계모가 아니라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해와달이 된 오누이> <여우누이> 를 통해 <자식사랑 패러독스> 를 말하는 <8관> 을 읽다보면 지금의 현실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딸래미가 여우라는 걸 알았으면 간을 내어줄 것이 아니라 사냥하는 법을 알려줬어야 했다. 몰랐다면 편애의 색안경을 벗지 못했던 부모의 책임감을 통렬하게 깨우쳐야 한다.

마지막 <9관 가족의 재탄생 : 최고운전> 의 <최고운전> 은 처음 보는 고전이었다. <야래자설화> 와 <아기장수 설화> , <지하대적퇴치설화> 를 비틀어내고 꿰뚫어낸 <최고운전>은 신라시대 실존 인물인 최치원의 인생을 멋지게 형상화한 소설이라고 한다.

밤에 귀한 존재가 방문하고 간뒤 낳은 아들이 영웅이 된다는 <야래자설화> 와 별볼일 없는 평민집에 어느날 날개달린 아기장수가 탄생하자 두려움에 죽일 수밖에 없었던 <아기장수 설화> 그리고 귀한집에서 여자와 보물을 훔쳐가는 도둑을 귀인이 섬멸하는 <지하대적퇴치설화> 는 모두 <최고운전> 에 슬쩍슬쩍 섞여있는데 기존 설화의 결말들과는 전혀 다른 전개를 만들어냄으로써 최치원의 삶을 더 극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능력은 있으나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시대, 탁월하면 탁월할수록 그것이 발목을 잡는 상황, 나를 위한 욕심이 아니라 남을 위한 희망이 외면당하는 갑갑한 현실, 이는 꼭 최치원이 살았던 시대만이 아니라 <최고운전>의 작가가 살았던 시대에도, 그리고 지금도 역시 반복되고 있다. (p. 307)

조선시대 소설가가 신라시대 인물로 당대를 풍자하는 것이나 조선시대 인물로 지금을 빗댈 수 있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역사는 늘 외양만 바꿀 뿐 비슷한 리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본성 또한 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달라졌을까 싶다. 역사도 사람도 너무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다는... 이런 생각때문에 고전을 읽는다. '고전'은 늘 지금의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더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듯 하다. 재밌으면서도 의미까지 있는 좋은 책이었다. 강추~!^^

장 폴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라는 놀라운 명제를 천명했지만 그 말의 어려움만큼이나 실천은 더 어려운 듯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진정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아무 목적 없이 그냥 던져지듯 있다는 무의미에서 허무감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은 오히려 그렇게 이유없이 던져진 듯하기에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존재가 된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혜안이다. 본래부터 결정되고 정해진 것이 없기에, 오히려 본질적으로 구속하는 것이 없는 진정한 자유 상태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짐으로써 자기 삶의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어떠한 인간이다(본질)' 라는 것보다 '스스로 선택하고 의미를 만들어가는(실존)' 것이 더 먼저 있다는 거다. (p. 314)

 

 

 

-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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