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아이 백천수 씨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80
손서은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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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보이의 유쾌하고도 아슬아슬한 일탈

1만 킬로 떨어진 아프리카에서 보낸 뜨거운 여름

 

스펙을 쌓으라는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해외봉사 겸 영어연수 차 간 아프리카 케냐에서 살해사건에 휘말린 고등학생의 파란만장 스토리 라는 출판사의 책 소개글에 호기심이 확 일어났던 책이었다. 자주 왕래가 있던 나라도 아닌 아프리카에서 부모나 의지할 어른도 없는 고등학생이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된다면 얼마나 혼란스럽고 막막할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처질 정도다.

하지만 이 책은 청소년 소설이고 게다가 내가 예전에 무척 감동깊게 읽은 <컬러보이>의 손서은 작가의 작품이다. 무엇보다 '자음과 모음'의 청소년문학 작품들은 늘 나의 기대치를 충족시켜주었었기에 이번 작품에 대한 믿음도 남달랐다. 그리고 이 소설 역시 '자음과모음'사의 청소년문학은 역시 마음에 직접 와 꽂히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20xx년 8월 2일 나이로비 뉴스N

나이로비 근교의 한 펍에서 만취한 한국인 10대 두 명이 현지 경찰에 체포됐다. 국제 자원봉사 단체인 '아이러브 발룬티어'의 참가자들로 케냐를 방문한 이들은 카지아도현의 마사이 빌리지에서 어린이를 숨지게 한 후 차를 훔쳐 달아나던 중에 붙잡혔다. (p. 9)

자극적인 멘트의 나이로비 현지 기사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기사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라 헉 싶으면서 시작과 동시에 작품에 바로 빠져들게 한다.

공항 로비를 가득 메운 한국인 단체 티는 우리는 관광을 위해 케냐에 입성하지 않았노라 선언하고 있었으니 지저즈, 러브, 스탠바이갓 등등의 문구로 자신들의 신성한 임무를 드러냈다. 그 많은 인원이 이반 아셰프의 세련된 지프를 지나쳐서 한국인 선교사가 대절한 값싸고 구질구질한 버스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의 머리 한 귀퉁이가 찌릿했다. 세상에. 노다지가 따로 없었다. 저들의 고귀한 스피릿은 아이러브 발룬티어의 사명과 닮아 있었다. (p. 12)

이반 아셰프는 '아이러브 발룬티어' 라는 국제자원봉사단체를 만든 사람이지만 이 자원봉사단체는 비영리기구도 아니고 이 사람은 케냐 현지인도 아니다. 그에겐 여전히 아프리카 땅이 유럽인들의 땅이었다. 과거에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몰려와 책상에 지도를 펴고 자로 선을 죽죽 그어 자기들끼리 땅따먹기를 했던 그 시절이 물러간지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아프리카는 유럽인들의 여행지, 휴양지였고 그쪽에서 들어오는 돈 없이는 굴러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반 아셰프는 자신이 인류애에 기반한 관광사업을 운영한다고 여겼기에 가슴에 사랑이 새겨진 인류 전체가 그에게 고객이었다. 어느날 우연히 나이로비 공항에서 목도한 코레안단체팀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로 각인되었다.

"한국 시장을 노려 봐야겠어. 아이디어 좀 없나?"

"나이로비에 학원을 세우시든가"

"하건? 그게 뭔데?

"노노, 하건이 아니라 학원이라니깐. 학원은 영어로 대체가 안 되거든. 한국만의 독특한 교육문화라서. 학교 끝나면 뭘 배우러 가는 데야. 그게 다 학원이고. 그중에 제일은 영어 학원이지. 돈 벌고 싶어오? 영어 학원을 세워. 그러면 돼. 한국인들이 사교육비로 쓰는 돈이 연간 한 170억 달러쯤 되지, 아마"

"오! 자넨 천재야. 당장 프로그램을 짜게. 한국 학생들 좀 모아 보지 그래. 처음이니까 현지 숙박은 우리 쪽에서 지원해 주는 걸로 하자고. 단체 홍보도 할 겸. 자네 한국 네트워크를 이용하면 되겠구먼. 오랜만에 힘 좀 써봐" (p. 14, 16)

해리 백은 오래전 선교사로 케냐에 왔다. 하지만 잊지 못할 사건이 있었고 지금은 '아이러브 발룬티어'에서 일하고 있다. 이번 프로그램만 성공시키면 본부로 올라오게 해준다는 이반 아셰프의 말에 머리를 굴리던 그는 십여년 만에 형수에게 이메일을 띄운다.

착한 여행이 유행하면서 미숙씨도 한때 아프리카 현지 여행사와 손을 잡고 이런 프로그램을 운영했던 적이 있다. 커피 농장 투어, 반일짜리 자원봉사, 빌리지 투어, 소똥집 짓기, 이런 것들은 빤한 관광에 걸린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여행 트렌드로 다가왔다. 많은 이들이 현지식, 지속가능성, 자립, 공정, 착한, 에코, 유기농 기타 등등의 단어에 사로잡혀서 그런 참여가 세상을 좋게 만든다고 착각한다. 미숙씨가 보기에 그들은 착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착한 건 현상을 어수룩하게 덮는 거다. 그래서 그런가, 요샌 다크 투어리즘이 새로이 떠올랐다. 지난 세기에 인류가 저지른 죄상을 덮지 않고, 들추어 찾아가서 보고 배우겠다는 것인데 이러나저러나 업계 사람이 보기에 궁극의 목적은 모도 돈으로 귀결되었으니 다르긴 뭐가 다르냐. (p. 19)

해리 백의 형수인 미숙씨는 대학 내내 가난한 배낭여행자로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닌 경험이 바탕이 되어 일찌감치 여행사에 취업, 여행지에서 진화한 생활 영어와 발로 뛰는 영업으로 높은 실적을 올렸고, 여행 업계에서 아이디어와 기획이 뛰어나다는 정평을 일찌감치 얻었다. 저가 항공이 막 태동하던 시기에 과감히 회사를 나온 후 투자를 받아 동료들과 이지고를 창립하여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미숙씨는 직원들에게 근엄한 간부가 아니라 현실적인 멘토이자 돈 잘 쓰는 선배였으며, 학부모 세계에서는 쿨한 맘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미숙씨는 자신의 아들과 서로 간섭안하는 쿨한 사이라며 아들을 천수씨라 부르는 동거인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백천수씨는 그녀의 영원한 '마이넘버원' 이었고 마음에 차지 않는 아들이었다.

미숙 씨의 마이 넘버원 백천수는 밖에서 점심을 먹을 경우 또와 분식집을 이용했는데 그곳 말고 다른 음식점은 안 갔다. 천수는 가는 데만 가고 입는 옷만 입고 먹는 음식만 먹었다. 다른 곳은 낯설고 불편해했다. 호기심도 모험심도 없었다. 식욕 같은 거라도 있으면 메뉴별로 밥집을 훑으며 돌아다닐 텐데 그런 것도 없었다. (p. 21)

여행사를 운영하는 베테랑인 미숙씨가 '아이러브 발룬티어'의 정체가 선진국 사람들의 아프리카 판타지에 자원활동과 빌리지체험을 얹은 전문 여행사 정도로 정의 내리는 데는 타당한 근거가 차고 넘쳤다. 남이 되어 연락끊고 지낸지 십여년만에 받은 시동생의 메일내용은 코웃음치고 바로 휴지통으로 직행했다. 하지만 단 한가지, 천수가 그런 프로그램이라도 체험하면 친구도 사귀고 자신감도 좀 갖게 되지 않을까 싶은 기대가 자꾸만 커져갔다. 미숙씨의 마음이 통했던 것은 아니지만 방학이 오기만 하면 가출하고 싶었던 천수에게도 그 프로그램은 방학이면 더 빡빡해질 학원프로그램을 탈출할 희망처로 보였고 스스로 지원서를 제출했다.

"야, 백천수씨. 그런 건 엄마가 할게. 넌 힐링이나 마저 하셔"

거실 소파에 앉은 엄마는 유명한 스님이 쓴 에세이를 읽으며 구멍 난 마음을 힐링했고, 천수는 구멍 난 학습을 힐링했다. 천수는 대한민국에 힐링이라는 외래종 단어를 처음 들여온 사람을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깟 힐링이 문제가 아니었다. 바야흐로 회복기가 오고 있었으니 여름방학이었다. 방학은 자잘한 상처를 치유하기보다 문제의 근원을 잡아내여 수술하기 좋은 때였다. 학습에 병약한 천수를 위해 미숙씨는 대수술을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p. 33)

 

이 시대 학업과 학원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이 읽으면 공감할 대목이 아닐까. 학교 보다는 학원에서 더 많이 배우고 더 먼저 배우는게 언제부터 일상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방학이면 휴가가 아니라 풀타임으로 짜여진 학원계획표를 짜는 것이 평범해진게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공부하라고 하지 힐링하라고 책상에 내모는 미숙씨에게 천수는 한마디 대꾸도 못하곤 했다.

미숙씨는 아들의 처진 눈커풀과 갉아먹은 손톱을 볼때마다 가슴이 따끔거렸다. 어쩌다 저런 못난 자식을 키우게 됐을까. 저걸 스파르타식 학원에 감금한다고 뼛속에 박힌 맹한 기운을 다 뽑아낼 수 있는 건가 말이다. 미숙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고뇌했다.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모두가 단 하나의 트랙 위에서 단 하나의 목표점을 향해 달려간다. 천수 같은 아이도 살아갈 다른 길이 분명히 있어야 했다. 그러나 미숙씨가 알기로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막차라도 잡아타고 끝까지 쫓아가야 했다. 그런 미숙씨에게 난데없이 해리가 괴상한 제안을 한 것이다. (p. 34)

해리 백은 미숙씨의 남편의 쌍둥이 동생이다. 천수가 일곱살일때 헤어진 그 집안 사람들을 생각하면 화가 날 뿐이지만 천수의 앞날을 생각하자니 그 프로그램에 자꾸만 마음이 갔고 결국 자신의 여행사 홈페이지에 대대적인 홍보글을 올렸다. 어차피 천수는 그 프로그램의 수혜를 받기로 내정되 있었지만 그런 내막을 모르는 천수는 스스로 지원했고 홈페이지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이 게시된 순간 예상외로 뿌듯했고 그때부터 이미 없던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빠를 싫어해. 나는 아빠를 닮았어. 엄마는 나도 싫어해. 억지로 키우는 것뿐이야. 그래서 노력했다. 아빠를 닮지 않으려고. 엄마 마음에 들려고. 착한 아들이 되려고. 그러나 결국 그 세계는 터져 버렸다. 빵꾸 났다. 너덜너덜했다. (p. 59~60)

여행 전날 처음으로 크게 엄마와 다툰 천수는 홀로 집을 나와 홀로 공항버스를 타고 홀로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는 내내 뒤를 수시로 돌아보았지만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혼자 외국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리스 서밋에서 마거릿 패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마거릿은 사교성이 좋아서 사람을 보면 먼저 말을 거는 스타일이었고, 일단 대화를 시작하면 쉽게 끝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가, 몇몇 사람들은 마거릿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잽싸게 내뺐다.

마거릿은 특히 아이들을 아꼈다. 마트에서 우는 아이가 있으면 (아이 엄마가 원하건 원치 않건) 자기 돈으로 사탕을 사서 아이의 손에 들려 주었고, 쇼핑몰에서 길을 잃은 아이를 보면 아이 손을 덥석 잡고 아이스크림 가게로 데렸다. 아이를 찾던 부모가 감사의 말대신 마거릿을 신고한 경우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경비가 부모를 뜯어말리며 하는 소리가 패리 여사는 종종 그런다는 것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불행한 10대 아이들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마거릿은 지폐 몇 장을 건네주고 가던 길을 가는 무심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 아이들을 맥도날드에 데려가 마음껏 먹도록 해 주었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엄청난 굉음을 내며 때로 달려오는 모터바이크가 마거릿의 차를 둘러싸고는 배가 고프다고 징징거렸다. 빅맥을 해치운 아이들은 입술에 립스틱을 칠하고 꽉 끼는 셔츠 안에 패드를 넣고 젤 바른 머리를 한껏 치켜올린 다음 모터바이크에 엉덩이를 붙였다.

"근데 왜 웃어? 당신도 저럴 때가 있었겠지. 근데 봐요. 우린 나이들었어. 순식이었잖아. 저때 누군가 얘기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p. 76, 77, 78, 80, 81)

 

마거릿은 자신의 착한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지쳤고 자신을 꼰대라 부르며 놀리던 10대아이들 처럼 일탈을 해보고 싶어졌다. 그때 봉사와 여행이 결합된 '아이러브 발룬티어'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고 남편 존과 함께 케냐로 왔다. 그리고 천수와 (천수가 보기에 엄청난 능력이 있는 아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여고생 고승아 와 한 팀이 된다. 사실 승아는 아기때 외할머니에게 버려졌고 여름방학때 외할머니의 애인과 단칸방에서 지낼 수는 없어서 잘곳을 찾다가 여행사 직원의 호객행위에 이끌려 지원서를 낸 것이 발탁된 경우였다.

"안녕하세요, 리디아에요. 엔젤스 스쿨 1학급 담임입니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패리 여사께서는 오늘 저희 반을 맡으실 거예요. 여기서 가장 어린 학생들이죠"

"다른 학급의 선생님들도 제 수업을 참관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이래 봬도 미국 사람이잖아요. 영어 교육은 케냐에서도 물론 중요하겠죠" 뭐, 세계 공용어니까요. 제가 어떤 식으로 강의를 하는지 다른 선생님들도 보고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해서요" (p. 102, 103)

"그럼 따라 해 볼까? 에이, 애플. 비, 버내너"

아이들은 색연필을 던져 가며 왁자지껄 떠들었다. 종이를 북 찢어서 비행기를 접기도 했다. 마거릿의 얼굴이 점점 뜨거워졌다. 도통 통제가 안 되는 군.

"쟤들 파닉스 다 떼지 않았어?"

해리가 리디아에게 속삭였다.

"영어로 일기도 써요" (p. 104)

 

아프리카 아이들은 그저 못먹고 못배우고 불쌍할 것이라는 그래서 선진국에서 봉사를 가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과연 착하기만 한 생각일까??

앙벵야는 아이러브 발룬티어를 찾는 서양인들에게 민박을 제공하고 돈을 벌었다. 그쪽 사람들은 자신들의 편리한 생활에 주기적으로 염증을 느낀다고 하면서 아프리카를 찾았는데, 이곳에 와서 물도 떠다 주고 염소도 대신 치며 여러 가지 자잘한 일들을 거들다가 2~3일이 지나면 떠났다. 그렇게 앙벵야는 자기 집에서 한 발짝도 더 나가는 수고 없이 저절로 앉아서 돈을 벌었다. 더욱 기막히게 좋은 것은 자원봉사자들이 지어준 마냐타로 이듬해 또 다른 여행객들을 상대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거였다. 앙벵야는 해리의 영어 실력과 인터넷 운용 능력을 빌려 홈스테이로 비즈니스를 확장했다. 매년 여름이 되면 여행객들은 앙벵야의 개인 사이트에 접속해 서로 마냐타에서 자겠다고 경합을 벌였다. (p. 116)

마사이 마을의 대모격인 앙벵야는 해리 백이 처음 케냐에 와서 선교활동을 할때 만났던 인연이었다. 둘의 인연은 이제 상처의 기억으로 얼룩졌지만 여하튼 여전히 둘은 사업적으로 훌륭한 파트너였다. 소똥으로 지은 전통집 맨땅바닥에서 불편한 잠을 자겠다고 오는 서양인들을 앙벵야는 수도없이 봐왔다.

하지만 동네 어린 소녀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았고 그 원인 제공자가 해리가 데려온 4명의 이방인들 중에 있음을 알게 되자 앙벵야는 움직인다.

메리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외국인들, 살인자들, 맞은편 소파에 앉아 기삿거리를 찾던 수습기자의 귀가 크게 열렸다. 뭔가 조합이 마음에 든다.

사냥감을 문 젊은 기자의 두 눈이 빛났다. 기자는 메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상상력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메리가 가고 난 후 그는 심드렁한 경찰들을 부추겼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잖아. 당신들 모두를 승진시켜 줄 큰 사건, 살인이다. 범인은 나왔고 당신들은 그저 시늉만 해라. 기사는 내가 잘 써 줄게. 케냐 경찰이 얼마나 기동성 있게 사건에 대응했는지 전 국민에게 알려 주마. 마침 손톱 때를 다 벗긴 경찰이 곤봉을 들고 일어섰다. 그래? 그럼 슬슬 한번 가볼까. (p. 172)

 

존에게 두둑한 후원금을 받은 이반은 마거릿 부부를 미국으로 안전하게 돌려보냈고 한국아이 두 명은 케냐경찰에게 붙잡혔다. 케냐 언론은 점점 더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냈고 국제사회에도 알려지게 된다. 미국으로 돌아간 마거릿은 길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를 집에 데려와 보살피다가 유괴범으로 몰려 유치장에 갇혔다. 케냐의 유치장에는 천수와 승아가 미국의 유치장에는 마거릿이 갇혀 있는 상황에서 상관 없을 듯한 이 두 사건은 '알리스'라는 한 사람으로 인해 연결되게 된다. ('알리스' 라는 존재는 생각지 않았던 성적 자아정체성 문제까지 생각해보게 만든다.)

브라운 서장은 무조건 자기 아이 편을 들고 자기 아이가 옳다고 주장하는 부모를 여럿 보았다. 학교 폭력으로 고발당한 아이들의 부모는 대다수 비슷한 패턴을 가졌는데 원래 자기 아이들은 순하고 좋은 아이란다. 그들은 어떻게든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고 빠져나가는 데만 혈안이었다. 뭐니뭐니 해도 그들에게 일관된 공통점은 "그래서 피해자 아이는 좀 어때요? 괜찮을까요?"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관심사는 오직 내아이, 내 아이의 미래였다. (p. 180)

마거릿이 데려온 아이 라몬은 자신이 가정폭력으로 도망나왔다고 했다. 열여섯 이라는 나이를 속이고 펍에 가도 될 나이라고 했다. 라몬의 부모는 한달전부터 대대적으로 유괴범을 찾는 중이었다. 그 라몬이 마거릿과 함께 펍에 있을 때 경찰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말해 봐. 그 잘난 혀로 지껄이라고. 여기 온 목적을 달성해야지? 라몬, 네가 저지른 일들을 난 다 이해하고 용서한단다. 우우. 네 본성은 원래 착하잖니. 라몬, 누구나 실수는 하잖니. 다 거기서 거기야. 나도 그랬는데, 뭐 그러니까 너도 그만 널 용서하렴. 밖에서 기다리는 어머니 생각도 해야지. 널 얼마나 사랑한다고, 우우. 빌어먹을 사랑은! 그 얼굴을 보면 다 긁어주고 다 뭉개 버리고 싶어져. 알아? 미친! 당신이 뭘 안다고! 웃겨, 당신은 몰라" (p. 213)

착하다는 것이 무엇일까? 착한 마음이란 무엇일까?

악하기만 사람도 있지 않을까? 이기적이기만 한 사람도 있지 않을까?

나의 선의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상대방을 통제하고 인정받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상대가 아닌 나를 위해서 였던 것이 아닐까?

돕는 다는 것이 착한 행동일까? 사람이 사람을 도와주고 변화시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긴 한걸까?

내가 아닌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까? 부모자식 혹은 부부 라는 가족관계 안에서 이해의 범위는 오히려 좁아지는 것이 아닐까?

착하다 vs 착하지않다 로 양분되는 입장이 될 수 없는 많은 질문들을 품은채 가볍게 빠져 읽은 책에서 무겁게 나오는 중이다.

착한 아이 백천수씨의 일탈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만한 커다란 사건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난 지금 천수가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눈도 못 마주치던 엄마와도 얼굴도 희미한 아버지라는 존재와도 왠지 이제껏 하지 못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착한아이 백천수씨가 멋진어른 백천수씨가 될 것을 믿으며 이시대 모든 (착한아이)백천수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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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희순 - 노래로, 총으로 싸운 조선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정용연.권숯돌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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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람 의병단'을 이끈 조선 최초의, 유일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따뜻하고 감동적인 그래픽노블로 만나다!

 

윤희순.

낯선 이름이다.

게다가 독립군도 아니고 의병장 이라...

조선말 의병들의 활동에서 여성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어지러운 나라안팎의 위기속에서 분연히 일어나 목숨 걸고 싸웠던 수많은 의병들 중에서 독립군으로 이어진 사람들은 숱하게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자신의 이름을 남긴 여성은 아마도 많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조선 최초의 여성 의병장' 이라는 타이틀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1961년 서울 변두리 판자촌에서 넝마주이 소년 둘이 재활용품을 수집하고 있다. 거리의 사람들은 흘끔흘끔 쳐다보고 남루한 소년들을 피한다.

"와! 이런 집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 사는 걸까?

"적어도 독립운동가 후손은 아니겠지" (p. 14)

우범자로 신고되어 잡혀간 경찰서에서 인적사항을 대라는 경찰의 말에 독립군집안이라는 동생의 말은 무시당하는 것을 넘어 비웃음을 산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은 무시당해도 친일파의 후손은 떵떵거리고 살던 대한민국이었다. 그렇게 소년의 억울한 눈빛을 뒤로 하고 1935년 과거로 넘어간다.

"어머니, 이리 곡기를 끊으시면 어떡합니까? 아범이 떠난지 벌써 수일이 지났습니다. 압니다. 어머니 마음. 저도 자식을 키우니까요. 하지만 이제 뭐라도 드시고 기운을 차리셔야죠" (p. 54)

왜경에게 큰아들을 잃고 노구의 어미는 붓을 들어 찬찬이 그동안의 일들을 되짚어보기 시작한다. '고흥 유씨 항재 처 패형 윤씨 가정록' 줄여서 '일생록' 이라고도 하는 한글일기를 남기고 있는 이 할머니가 바로 윤희순 의사 이시다. 일기속에서 시간은 다시 거슬러 1868년으로 올라간다. 서양과 일본이 동시에 조선을 넘보던 때였고 아직 중국을 제외한 국제정세를 모르던 조선이었다.

"말이 되는 소립니까? 공맹의 도리를 모르는 자들과 화친이라니요. 그들이 정말 화친을 하자는 것일까요?"

"그들의 꿍꿍이가 무엇이든 이 난관을 헤쳐나가려면 다시 오륜을 세우고 민력을 키우는 수밖에요"

"옳은 말씀입니다. 허나, 어떻게 말입니까?"

"준비를 해야겠지. 우리 유생들도 붓 대신 칼을 들어야 할 때가 올 테니." (p. 62, 63)

윤희순의 집안은 대대로 뼈대있는 유생들을 배출시켜왔고 난국의 상황에 통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에 못지 않게 올곧은 뚝심을 가졌던 윤익상의 아들과 1875년 윤희순은 혼례를 치룬다. 그렇게 한양에서 강원도 춘천까지 오게 되자마자 시아버지는 뜻있는 활동을 하느라 남편은 못다한 공부를 하느라 바빠 넉넉지 않은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은 오로지 윤희순의 몫이었다.

"아~ 우리 팔도 동포들은 차마 망해가는 나라를 내버려두려 하는가!

국모의 원수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는데,

임금마저 머리를 깎이고 의관을 찢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팔도 백성 역시 외세에 의해 몰살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우리 의병은 국가와 자신을 위한 의리와 복수로 마땅히 떨쳐 일어서야 할 것이다.

국가와 대도의 존망 앞에 고하노니 제야의 선비, 산촌의 필부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 함께 일어서자.

능욕 앞에 싸우지 못하면 장차 천하 만세의 입을 어찌 막을 것인가!

거적 위에서 잠자고 창을 베개 삼으면서 모두 끓는 물과 불 속으로 나아갈지어다.

그리하여 기어코 온 세상이 재건되어 하늘이 다시 밝아지는 것을 볼 터이니... 부디 정성을 다해 함께 대의를 펼치자!" (p. 118, 119, 120)

힘없는 나라 안에서 외세가 충돌하고 일본이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선다. 하지만... 너무도 허망할 정도로 의병활동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너무 일찍 가장 아닌 가장이 되어야 했던 첫째 돈상이, 아이다운 투정도 호사였던 민상이, 그리고 곧 몰아닥칠 힘든 시기의 기억밖에 가지지 못할 셋째 교상이.

그때는 할미도 미처 알지 못했다. 자식에 대한 애잔함도 허락지 않을 시간이 오고 있다는 것을. (p. 177)

홀로 세 아들을 건사하며 마을을 지나가던 의병 패잔병들을 보살피던 윤희순은 상황이 더욱 어려워질 수록 자신이 할 수 있는 몫을 일부러 찾아 힘을 보탰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며 하나둘씩 마음을 합쳐나갔다.

"지금은 나라의 존망이 을미년 때보다 더 위태로워졌습니다. 더는 남녀유별이란 병풍 뒤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지요"

"그래서 자네 생각은 뭔가?"

"안사람 의병단을 만들 것입니다." (p. 218)

남자들의 의병활동도 처참히 무너져가던 때 윤희순은 아낙들을 모아 안사람 의병단을 만든다. 뜻을 세웠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해를 시킴으로써 마음을 모았고 총술 훈련에도 앞장섰으며 무기제작에도 힘을 보탰다. 그렇게 다시한번 일어선 의병들은 1907년 도성을 향하지만 역시나 역부족이었다.

갑오년에는 동학도들의 시신으로 뒤덮였던 남도의 들판이 1909년 기유년에는 의병과 그 가족, 이웃의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p. 266)

조선말 의병의 주축은 동학이었던 걸로 알았는데, 이 책에서 의병활동은 동학과의 연관이 불분명하다. 윤희순의 시아버지가 가담한 의병은 종교와는 관련이 없는 걸로 보여지고 당시 혼란스런 나라안에서 다양한 원인으로 일어선 의병활동이 있었겠지만 그 갈래를 설명해주지 않은 것은 좀 아쉬웠다.

여하튼 그렇게 무너져내린 의병활동으로 살아남은 이들은 좌절했지만,

"아버님! 제발 칼을 거두어주십시오"

"말리지 말거라. 선영들께 더는 대죄를 지으며 구차히 살 수 없다.

거의소청도 실패하고 이제 남은 길은 자정치명 밖에 없질 않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님. 거지수구의 길도 아직 남아있습니다"

"부질없는 말이다"

"목숨을 끊기는 쉽습니다. 멋모르는 열여섯에 시집 온 뒤로 아버님이 저를 키워주셨습니다. 아니, 의병운동으로 부재 중인 아버님의 빈자리가 늘 저를 가르쳤습니다. 빈자리는 빈자리가 아니었지요. 늘 꽉 차 있었습니다. 아버님, 저를 위해 한번만 더 어렵고 혹독한 길을 가주십시오." (p. 292, 293)

목에 칼을 댄 시아버지를 만류하며 윤희순은 다시한번 뜻을 세워주시길 간청한다. 윤희순과 가족들은 다시한번 의지를 다지며 중국땅으로 향한다.

할미는 배움이 짧아 조선이 망국에 이른 복잡한 정세는 미처 알지 못한다.

허나 이것만은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너희 조상 모두가 금전과 권력에 어둡고 제 한목숨 부지하기 급급한 건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p. 306)

천신만고 끝에 만주땅에 자리잡은 가족들은 거친 땅을 일구며 중국 현지인들에게도 진심을 다했고 힘든 타국살이에서도 독립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조선에서는 안사람 의병을 길러내던 당신이 중국 땅에선 독립운동가를 기르는 교장이 되었구려" (p. 326)

인재를 기르던 학교도 4년만에 문을 닫아야 했고 그 사이 시아버지와 남편도 저세상으로 떠났다. 하지만 윤희순은 다시 굳건하게 일어섰다.

 

사람들이 찾아와 모일 학교가 없어졌다면 뜻을 품은 자가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일으키면 되는 것.

나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p. 342)

할미라고 왜 없었겠느냐. 슬픔과 동무 되어 오래도록 주저앉고 싶을 때가.

무쇠같이 단단한 마음도 모래처럼 부서지고 무너질 때가 왜 없었겠느냐.

그러나 할미에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다. (p. 351, 352)

아직 어린 세 아들을 데리고 윤희순은 흩어진 간도땅의 동지들을 찾아나섰다. 그렇게 1920년경 다시 조선독리단을 만들고 독립단 학교를 세웠다.

하지만 나날이 악랄해져 가는 일본군에 의해 큰아들을 잃고 나서 노구의 어머니는 더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그리고 1996년 어느날의 서울.

"무덤을 찾았다구요?"

"그래. 그럼 공항에서 보기로 하자"

"평생 숙원을 이루신 거네요"

"그러게 말이다. 대접은 고사하고 멸시를 받을 땐 독립운동가 후손이란 게 원망스러웠다만 버틴 세월이 헛되진 않았나 보구나" (p. 382, 383)

윤희순의 손자, 손녀는 중국 땅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 찾기를 희망했던 할머니의 묘를 찾았다. 다행히도 그 묘는 동네사람들에 의해 대대로 보살펴지고 있었다. 현지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저희 부모님이 늘 말씀하셨지요. 이 동네 사람치고 윤 할머니 덕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요." (p. 385) 나라는 보살피지 않았지만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은 1935년 일생록을 마무리하던 즈음의 날로 되돌아간다.

용서하거라.

죽음보다 어려운 삶을 너희에게만 떠안긴 채 혼자 떠나는 것을.

나라 잃은 백성으로 내 어찌 자식 잃은 슬픔을 혼자만 겪은 듯 유난스레 굴까마는, 이제는 정말 기력이 소하고 고단하여 쉬고 싶구나.

한 번도 나만을위해 살아보지 못한 할미에게 마지막 이기심을 허락해다오.

할미가 다 마치지 못한 일기는 광복된 세상에서 너희가 채워주기 바란다.

그리고 부디 기억해다오.

좋은 옷, 기름진 음식, 푹신한 잠자리에 입히고 먹이고 누이진 못했으나 우리는 너희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는 것을.

무엇을 지키려 했냐고? 글쎄다.

때로 그것은 누군가에겐 가족이었고 누군가에겐 이름이었고 목숨이었고 땅이었고 하늘이었고 자존이었고 독립이었을 테지.

그러나 내 대답은 좀 미뤄두기로 하자.

우리가 그토록 처절히 지키려 한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는 훗날 너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겠느냐?

너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이다. (p. 411 ~ 414)

향년 76세 였다.

일생동안 힘든 길을 마다하지 않았으면서도 미안하다며 무겁게 생을 마쳤다.

당신이 그토록 어렵게 지켜낸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고 자랑스럽게 대답할 만한 무엇을 우리는 지금 갖고 있는가? 여전히 지키고 있는가?

역사가 알아주지 않는 민초의 삶은 늘 더 깊은 묵직함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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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혁명가 김원봉
허영만 지음 / 가디언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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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치하 독립운동사에서 '김원봉'의 이름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굵직한 만화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해온 만화가 허영만에 의해 독립운동가 아니 독립혁명가 김원봉을 접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듯 눈에 생생한 만화를 다 보고 나면 마음 한켠이 묵직해지면서 당시의 고통과 고뇌가 조금은 전해져 오는 것만 같다.

3·1 운동 대표 33이는 군중이 모여 시위가 폭동으로 변할까 봐 모임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요릿집 태화관으로 바꾸고 독립선언식을 치른 뒤 일본 경찰에 통보하고 자기 발로 잡혀 들어갔답니다. '민족이 당면한 문제는 민족 스스로 해결해야 하며 미국은 그런 민족을 돕겠다'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얘기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만세 운동을 일으키면 미국이 일본한테 한국에서 물러가라고 할 것이다? 미국의 민족자결주의가우리나라에도 해당된다면 파리평화회의에서 김규식이 연설할 때 돕는다고 나왔어야히죠. 우리가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겼던 을사년에 가장 먼저 공사관을 철수한 나라가 미국이었어요.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는 것을 일본이 눈감아주는 조건으로 일본의 조선 강탈을 도와줬다고요. (p. 13 ~ 14)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에 내재된 민족과 국가 개념은 미국을 위시한 서방 강대국들을 위한 논리였지 결코 당시 주권을 빼앗긴 약소국들을 위한 논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 약소국들 중에 대한민국은 아예 끼어있지도 않은 국가 취급도 받지 못하는 일본의 식민지일 뿐이었다.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당대 지식인들의 한계를 김원봉은 꿰뚫어 보았다.

저는 3·1 독립선언서보다 대한 독립선언서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지만 강한 방법으로 일본과 싸우겠습니다! 정의로운 열혈 지사를 모집해 단체를 만들겠습니다! (p. 18, 19)

당시엔 좀더 효과적이고 충격적 효과를 줄 만한 방법이 필요했다. 평화적인 협상을 통해 독립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 김원봉의 무력투쟁 결심은 그의 성격상 당연한 결론이었다.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재정을 틀어쥐고 돈을 내어놓지 않으니 다른 독립 단체를 지원할 수 없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세울 예정이던 비행학교 사업도 중단했다. 마흔다섯 유부남이었던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모인 돈으로 스물도 안 된 처녀와 고급 호텔을 이용하며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p. 20)

먼 거리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소통도 어려웠던 때에 미국에서 스스로 한국의 대통령이된 사람을 저지할 방법도 여력도 없었다. 중국과 국내 상황은 점점 어려워져 갔고 그 상황을 돌파할 방법을 찾는 것만도 어려웠던 때였다.

자유와 독립은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의열단원이 선구자가 되어 민중을 각성시킵시다! (p. 27)

김원봉이 찾은 돌파구는 '의열단' 이었다.

단재 신채호는 임시정부가 생기기 전에 이미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당을 만들고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나, 이승만의 만행에 진저리를 치고 사퇴했다. 김원봉은 행동가이고 신채호는 사상가여서 그 성격은 달랐으나 조국 광복이라는 목표는 하나였다. (p. 158)

김원봉이 신채호를 만나 부탁한 '의열단 선언문'은 폭력성으로 매도되곤 했던 의열단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그렇게 나온 것이 '조선혁명선언'이었다.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에 새로운 활력과 투지를 심어주었다. 지금까지의 활동이 다소 즉흥적, 비체계적인 투쟁이었다면 조선혁명선언의 완성으로 의열단은 항일 투쟁 노선을 한층 정당화하고 이념적 지표를 갖게 되었다. 구체화된 민중혁명론은 의열단원 자신이 민중 직접 혁명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필연성을 제시했다. (p. 163)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과 폭탄을 함께 던져넣었던 의열단원들을 어쩔수 없다 생각하면서도 안타까워 했기에 김원봉은 당시 중국 정세에 따라 다양한 투쟁방법을 고심해야 했다. 당시 중국 내부는 외세의 침략과 왕권의 몰락과 새로운 사상투쟁으로 혼란 그 자체였다. 그 여파는 한국 내부에서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3·1 만세 운동 이후 일본은 문화 통치를 내세우며 사회단체를 자유로이 만들 수 있게 했으나 만세 운동을 이끈 개신교와 천도교 산하에는 제대로 된 조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국내의 조선공산당 지부는 남아 있었다. 조선공산당 강력은 조선혁명선언과 일맥상통했고 거사를 위한 새 조직을 만드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조선공산당과 의열단은 손을 잡았다. (p. 176, 177)

중국공산당과도 조선공산당지부와도 러시아공산당과도 그 어느 세력이 되었건 독립을 위해서라면 가능한 다양한 협력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상해임시정부는 사상의 차이에 분명히 선을 그었으나 김원봉은 오로지 '자주독립'을 목표로 삼았다.

중국이 좌우로 갈라져 유혈 투쟁을 하는 걸 본 의열단은 상해촉성회를 조직하고 동포들끼리 힘을 한곳으로 모아 일제와 싸우자고 했다. (p. 275)

하지만 임시정부는 끝내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 임시 정부는 좌파 성향의 단체와 손잡지 않습니다." (p. 301)

김원봉은 조선공산당 재건 동맹 참여와 레닌주의정치학교 운영으로 인해 우파로부터 공산주의자로 매도되었다. (p. 302)

임시정부는 1942년 4월 20일 28차 국무회의에서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의 합류를 결정했다. (p. 310)

중국내에서의 혼란과 중국내에 있는 독립단체들의 혼란이 섞여들면서 더욱 어려운 과정이긴 했지만 여하튼 '독립'을 목표로 힘을 합쳐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힘을 모아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건만, '독립'은 뜻하지 않게 갑작스럽게 이루어졌고 그 상황은 결코 반갑기만한 선물은 아니었다.

 

"약산! 일왕이 내일 연합군에 항복한다고 하오"

"우리가 쳐들어 갈 때까지 일본이 항복하면 안 돼요!"

"그렇소. 이렇게 되면 우리가 연합군에게 아무 요구도 할 수 없게 되었소" (p. 314)

결국 그렇게 갑작스럽게 외부 상황들로 인해 덩달아 이루어진 '독립'은 국내 상황을 더욱 복잡스럽게 만들고 말았다.

 

 

여러 갈래의 정치 운동이 펼쳐졌다.

여운형이 건국동맹조직을 확대했다.

일제강점기에 모진 탄압을 받아 지하에 잠적했던 박헌영 등 조선공산당 인사들도 부상했다.

일제제 협력했던 한민당 계열은 임시정부를 높이 받든다고 위장하고 나섰다.

가장 먼저 귀국한 이승만은 친일파와 악질 지주를 가리지 않고 세력을 키워나갔다.

김구 중심의 임시정부 요원들은 가장 유리한 위치에서 임시정부의 역할을 감당했다.

중국에 남아 있던 조선독립연맹은 현지에서 조선문지공화국을 만들었다. (p. 320, 321)

다양한 정치세력들은 신탁통치에 대한 왜곡된 이해로 더욱 분열을 가속화했고 그 진상을 파악했을 땐 이미 늦었다.

이 무렵 해방정국은 무법천지였다.

이념과 이해관계에 따라 정적을 납치, 구금, 테러하는 것은 물론 살해 행위도 속출했다. (p. 323)

중부경찰서에서 온갖 수모를 당한 뒤 풀려나 전 의열단원 유석현의 집에서 꼬박 3일간을 통곡했다. 평생을 조국 광복에 몸 바치고 민혁당 서기장을 거쳐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을 지낸 김원봉이 악질 왜경 앞잡이에게 수모를 당했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겠는가. (p. 337)

노덕술. 일본이름 마쓰우라 히로.

일제의 대표적 악질 경찰관이자 혹독한 고문으로 독립운동가를 잡아다 죽음에 이르게 하곤 했던 그가 해방이 되자 미 군정 경찰로 복직하고 수도청 수사과장이 되었으며 김원봉에게 누명을 씌워 잡아갈 만큼 당대는 혼돈과 폭력이 난무하던 시기였다. 일제에게도 잡히지 않았던 김원봉은 노덕술에게 잡혀 고문당했다.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원통해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미 군정 경찰이 된 노덕술은 일경 출신 경찰 간부들과 함께 반민족회의특별조사위원회 요원들의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948년 설립된 반민특위는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자행된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였다. 친일 부역자들을 끌어안고 있었던 미군정은 반민특위 설립을 반대했다. (p. 341)

그러나 반민특위가 애써 체포한 노덕술을 이승만이 석방시켜버렸고 되레 반민특위가 해체되는 계기가 되었다. (p. 349)

노덕술은 헌병으로 자리를 옮겼고, 육군 단장을 지내다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는 등 잘 먹고 잘 사다가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노덕술과 같은 인간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이 이승만 치하였고 그 이후로도 제대로 해결하지 않은 역사의 어두움은 항상 시대의 발목을 잡아오고 있다.

"정치적 구상이 다르다고 그것을 구실 삼아 민족의 지도자를 살해하는 이런 죄악은 천추에 용서받지 못할 짓이다. 그의 죽음은 민족국가의 부흥 발전에 큰 상처를 남겼다. "

여운형의 장례식 행사는 김원봉이 남한에서 활동한 마지막 공개 행사였다. (p. 355)

이후 김원봉은 월북했다. 이미 좌우의 분단이 뚜렷해진 상황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그가 가졌던 정치이념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국내 상황은 광복이전보다 그닥 낫다고 보기 힘들었다.

그는 결국 '자주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 안타까운 마음이 나또한 마지막 장을 무겁게 덮도록 만들었다. 지금의 현실상황들이 그 무거움을 가볍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지금은 과연 '자주독립' 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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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클럽
레오 담로슈 지음, 장진영 옮김 / 아이템하우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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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료슈는 한 무리의 인물들에 대한 읽기 쉬운 입문서를 제공한다.

이들은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수세기 동안 인문학자 및 사회학자들을 매혹시켜 왔다.

<더 클럽>은 특이한 책으로서 일부는 집단 일대기,

일부는 문학 비평이자 문학사상사,

또 일부는 18세기 영국의 정치사회사이다

- 파이낸셜 타임즈 -

 

해가지지 않는 나라 영국에서 18세기 후반은 그야말로 집단지성의 시대라 할만 했다. 나라 밖은 온갖 전쟁들로 끊이지 않았지만 나라 안은 온갖 새로운 사상들의 태동이 끊이지 않았다. '명예혁명'을 통한 왕정과 공화정의 독특한 결합, '산업혁명'을 통한 중농주의와 중상주의의 대립, 셰익스피어를 통한 영국만의 문학적 갈래들은 영국 지성인들의 사유의 세계를 넓혀 주었고 다양한 토론의 장을 열었다.

역사에서 특정한 시대가 주목받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정치경제학적으로(군사적인 것까지 포함해서) 큰 변화를 겪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문화적으로 융성해지는 경우다. 18세기 영국은 그 두 가지 모두를 잉태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또는 문학을 통해서 각각 따로 배우거나 지식을 습득했다. 둘이 함께 만나는 내용을 만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더 클럽>은 이런 모든 요소들을 담뿍 담아냈다는 점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관심을 끈다. (p. 9 - 김경집 '추천의 글' 中)

그 중심에 새뮤얼 존슨이 있었다. 새뮤얼 존슨이 지성인들의 리더가 되어 '클럽'을 이끌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새뮤얼 존슨의 인맥 속에서 '더 클럽'이 만들어졌다. 만들고지고 난 이후에는 새뮤얼 존슨의 인맥을 넘어선 사람들이 추가되며 확장되었고 그렇게 '더 클럽'의 멤버들은 점점 늘어나고 각자의 영역에서 확고히 이름을 새기는 인물들이 속속 등장했는데 그 중에는 애덤 스미스와 에드워드 기번 도 있었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이 두사람 때문이었다.

'더 클럽'의 시작은 1764년 당대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인 조슈아 레이놀즈가 새뮤얼 존슨의 우울한 심산을 해소시켜주기 위한 작은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새뮤얼 존슨, 에드먼드 버크, 조슈아 레이놀즈, 에드워드 기번, 애덤 스미스 등 이 클럽의 멤버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당대의 아이콘이었을 뿐 아니라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다. 이들이야말로 18세기 후반 문화의 '어벤저스'였다. 특정한 건물을 소유하지 않고 자유롭게 모여 온갖 담론과 담화가 오갔던 그 현장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건 바로 제임스 보즈웰 덕분이다. 보즈웰은 존슨에 대한 경의로 그의 언행을 세밀하게 기록했다. (p. 9 - 김경집 '추천의 글' 中)

하지만 <더 클럽> 이라는 이 책은 '존슨전' 이라는 책을 쓴 제임스 보즈웰의 기록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새뮤얼 존슨과 제임스 보즈웰 두 사람의 이야기가 주축을 이룬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 당대의 내로라하는 지성인들이 등장하고 그렇게 그 인물들의 이야기까지 확장되어 서술된다. 이 책의 묘미는 그 인물들 한명한명이 굉장히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이것은 비범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은 18세기 런던에서 별처럼 빛났다. 그들의 모임은 단순한 클럽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클럽에 들어가려면, 중요한 하나의 요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이것이 문화에 대한 기여보다 더 중요한 요건이었을 지도 모른다. 바로 '좋은 벗'이 되는 것이다. 선술집인 터크즈 헤드 태번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모임에서 밤늦도록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면서 논쟁을 벌일 준비가 된 좋은 벗만이 이 클럽에 들어갈 수 있었다. (p. 18)

그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그저 '더 클럽' 이라고 불렀다. 이 모임은 당대 사람들에게 그닥 중요하게 주목받던 클럽도 아니었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더 클럽'의 진정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지위향상을 위한 토대로 맺는 목적적 사회 관계가 아닌 그저 마음 맞는 사람들과 만나 웃고 떠들며 자유롭게 논쟁하는 친목 모임이었기에 멤버들은 생생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다. 회원들의 만장일치로 신입회원을 받아들일 때 그들이 따진 조건은 상대방의 부와 지위와 업적이 아닌 그저 '좋은 벗'으로서 대화할 만한 사람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당대의 지성인들이 이 클럽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진정한 향연을 즐기기 위해.

존슨과 보즈웰이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돈독한 우정을 쌓을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정신질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당시는 정신질환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신질환에 걸릴까봐 몹시 두려워했다. 보즈웰은 변덕스러운 감정기복에 시달렸다. 만약 그가 오늘날의 정신병원을 방문했다면, 분명 조울증이란 진단을 받았을 것이다. 한편, 존슨은 십대 시절부터 줄곧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오늘날이었다면, 그는 강박 장애 진단을 받았을 것이다. (p. 24, 25)

영어사전의 새뮤얼 존슨과 존슨전의 제임즈 보즈웰 이라는 위인전식 사고방식으로 이들을 봤을 땐 그들의 업적이 보일 뿐 사람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인물들의 개인적 성향이 두드러지게 표현됨으로써 그들이 남긴 업적 보다는 사람 자체로서 집중하게 만든다. 아들뻘인 보즈웰에게 정서적 친밀감을 느낀 존슨의 내면에는 오래된 심리적 질환에 대한 동질감 때문이었다. 경박스러운 보즈웰이 그토록 소망했던 '더 클럽'의 멤버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지만 존슨의 절대적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더 클럽'멤버들은 보즈웰의 가입을 원하지 않았다.

존슨은 남학생들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최고의 방법은 체벌이라고 했다. 새뮤얼 존슨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조너선 스위스트는 '회초리가 불러일으키는 공포심'을 떠올렸고, 에드워드 기번은 '학교는 공포와 슬픔으로 가득한 동굴로 혈기 왕성한 청소년들을 잡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책과 책상에 묶어둔다. 이렇게 사로잡힌 포로들은 채찍질 당하는 페르시아의 군인들처럼 힘겹게 움직인다'고 말했다. (p. 53)

책을 읽으면서 18세기 후반의 영국 문화를 느끼는 것은 이 책이 주는 재미 중 하나였다. 중세와 근대 유럽문화 관련 책을 읽으면서 매번 느끼는 거지만 300년 전 런던도 굉장히 퇴폐적이고 보수적이고 폭력적이고 알콜릭했다. '더 클럽' 멤버들의 회합 장소도 술집이었고, 커피하우스에서도 커피보다는 술이 더 많이 팔리던 때였다.

"찢어질 듯 가난했을 때, 나는 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가난의 장점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네. 하지만 솔직히 내가 가난하다는 현실이 너무 슬펐어. 이봐, 사람들은 가난은 악이 아니라고 주장하지. 하지만 실제로 그런 주장들이 가난은 거대 악이라는 반증이라네. 자네는 자신이 부유한 환경에서 매우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설득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p. 82)

존슨은 귀족도 아니었고 부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봉건적이었고 보수적이었다. 여러가지 모순을 안고 있는 사람이었고 스스로를 위한 자기합리화는 당대 지식인들이 겪는 갈등이 한 사람에게 체화된 듯 보이기도 했다. 존슨 이라는 한 인간을 보다보면 당대 영국의 혼란스러움이 고스란히 보이는 듯 했다.

새뮤얼 존슨은 작가로서 유명해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가장 유망한 듯 보였던 시와 희곡이라는 두 장르는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는 소설에 별다른 재능이 없었다. 시, 희곡 그리고 소설 외에 유망한 장르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기간행물이었다. (p. 87)

새뮤얼 존슨은 작가다. 그러데 지금도 여전히 느끼는 거지만 서양에서의 작가라는 타이틀은 내게 익숙한 개념이 아니곤 하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시, 소설, 희곡 등 문학을 창작하는 사람들을 작가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창작이 아닌 글만 써도 작가가 되었다. 팜플렛이나 칼럼 혹은 비평 등의 잡지용 글만 기고해도 유명 작가가 되었다. 지금도 서양에서 기자나 작가가 되는 길은 내게 익숙하지 않은 방법의 길들이 있다. 기자가 되고나서 기사를 쓰고 창작을 하고나서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글을 먼저 쓰다가 기자가 되고 창작을 하지 않아도 작가가 된다. 새뮤얼 존슨도 문화비평으로 여겨질 간행물기고글들로 작가가 되었다. 그렇게 작가가 된 존슨을 기념비적 인물로 만들어준 것은 그가 편집한 '영어사전' 때문이다.

새뮤얼 존슨의 <영어사전>이 나오기 전까지, 모든 사전은 단어 목록에 지나지 않았다. 의미의 뉘앙스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단어의 의미가 어떻게 변해 왔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존슨은 단어의 '맛'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랑했다. 그리고 단어의 뉘앙스를 알고 살아 있는 생물과 같은 언어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인지하고 있었다. 존슨은 단어를 정의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는 단어가 사용되는 모든 상황을 사전에 담고자 했다. 작가들이 그 단어를 사용한 구체적인 문맥을 예문으로 사용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이 방법에 따라 단어를 정의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새뮤얼 존슨을 '위대한 사전 편집자'로 부르기 시작했다. (p. 94, 95)

당시 영국에서 출판된 거의 모든 책들을 조사하고 예문을 골라내며 10년동안이나 편집한 존슨의 '영어사전'은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이 책으로 학비가 없어 졸업하지 못했던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그는 명예학위를 수여받았고 그동안의 가난을 끊어줄 국가연금도 받게 되었다. 존슨박사는 이제 생계를 위해 글을 파는 사람이 아닌 그야말로 작.가.가 되었고 다방면의 문화계 사람들과 교류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존슨을 경외한 사람들 중 보즈웰이 있었다.

보즈웰은 똑똑했지만 지적이진 않았다. 그가 만나고 싶었던 이는 위대한 사상가가 아닌 유명인 장 자크 루소였다. (p. 197)

루소의 집에 초대되어 저녁식사를 함께한 것은 보즈웰에게 대단한 성취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볼테르의 집에 가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p. 199)

스위스에서 쫓겨나다시피 도망친 루소는 잉글랜드에서 지내라는 데이비드 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르바쇠르는 루소가 잉글랜드에서 머무를 곳을 마련한 뒤에 그와 합류할 계획이었다. 프랑스 칼레에서 순풍을 기다리던 중 르바쇠르는 보즈웰을 자신의 침대로 초대했다. (p. 200, 201)

보즈웰은 이탈리아에서 반가운 사람과 우연히 재회했다. 바로 존 윌크스였다. (p. 203)

장 자크 루소, 볼테드, 데이비드 흄, 존 윌크스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보즈웰은 루소의 비하를 알아채지 못했고 볼테르의 비아냥을 눈치채지 못했으며 흄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햇고 윌크스의 정치감각이 무엇인지 몰랐다. 게다가 루소의 동거녀와 동침을 했고 가십거리를 양산하던 윌크스와는 정치가 아닌 다른 면에서 죽이 맞았다. 보즈웰은 당대의 사상가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나 그 기회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잘 하는 것은 매일 쓰던 일기, 그것도 대화까지 고스란히 옮겼을 정도의 세세한 기록능력이었다. 그랬기에 존슨 사후 '존슨전'을 씀으로써 일생 그렇게 바라던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존 웨인은 새뮤얼 존슨의 전기에서 런던 클럽은 20세기 파리의 카페와 유사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프랑스 여류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는 장 폴 사르트르와 함께 레 되 마고 카페를 드나들었다. 하지만 더 클럽에는 여성 회원이 없었다. 그 누구도 여성을 더 클럽의 회원으로 들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존슨은 여성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매우 즐거워했다. 이것이 헤스터 스레일이 자신의 스트레텀 대저택에서 열던 만찬이 일종의 그림자 클럽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p. 231)

당대에도 여성작가들 여성화가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비주류로서 어쩌다 이름이 회자될 뿐이었다. 이십대 초반에 20살 연상의 여인과 결혼한 후 오래 떨어져 살다 사별한 존슨의 여성관은 좀 특이했던 것 같다. 클럽의 멤버로 받아들일 순 없었지만 여성과 대화하기를 즐겼고 정신적 지주같았던 스레일 부인과의 교류는 그에게 큰 위안이었다. '더 클럽' 의 신규회원들이 늘어나고 존슨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스레일가에서의 모임은 그에게 또다른 클럽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보즈웰은 <존슨전>에서 더 클럽의 모든 회원들에 충분한 관심을 쏟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새뮤얼 존슨에 집중했다. 보즈웰은 에드먼드 버크를 깊이 존경했다. 하지만 그의 주옥같은 발언을 모두 기록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보즈웰은 조슈아 레이놀즈와 친했지만, 그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연극 관람을 좋아했지만, 그는 선구적인 감독이자 극장 관리자였던 데이비드 개릭을 오직 배우로만 여겼다. 에드워드 기번과 애덤 스미스는 <존슨전.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보즈웰은 기번을 싫어했고 자신을 가르쳤던 애덤 스미스를 놀라울 정도로 얕잡아봤다. (p. 232)

새뮤얼 존슨과 제임스 보즈웰을 통해 '더 클럽'의 탄생기를 정리한 후 저자는 보즈웰의 <존슨전>에서 중심인물은 아니지만 <더 클럽>의 중심인물이라 할 만한 인물들을 한명한명 소개하기 시작한다.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린 조슈아 레이놀즈, 유능한 연설가이자 활발한 의회 활동을 했던 에드먼드 버크, 당대 최고의 연극 배우 데이비드 개릭, 극작가로 이름을 날린 올리버 골드스미스와 리처드 셰리든 그리고 존슨에게 '더 클럽' 과는 또다른 의미로 소중했던 모임의 주최자 스레일 부부 등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뚜렷한 활동을 보인 인물들이었다.

버크는 국민에 의한 정부를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격을 가준 소수가 이끄는 국민을 위한 정부를 지지했다. 대부분의 미국 건국자들도 이와 유사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p. 277)

소수의 원칙에서 소수집단은 그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지위에서 나오는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었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쇠망사>에서 "근면하고 유용한 노동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고 "우연히 노동자들 위에 서게 된 선택된 소수는 자신의 시간을 이익이나 영예를 추구하고 부동산의 가치를 높이거나 학문을 닦거나 사회적 의무, 즐거운 행위 그리고 심지어 사회적으로 어리석은 행위를 하는 데 쓴다"고 했다. 에드워드 기번은 세상에서 자신의 지위를 정확하게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운이 좋아서 적지 않은 재산을 물려받았고 일하지 않고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복종은 절대 다수의 범죄, 심지어 죽음으로 처벌받아야 할 범죄좌도 재산상 손해를 입히는 것이라고 여기는 냉혹한 현실의 철학적 토대였다. 존슨은 법이 너무나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성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로마제국쇠망사>에서 기번은 "사회의 내부 평화를 깨트리는 범죄의 대다수는 필요하지만 불공평한 규제 때문에 발생한다. 물권법은 다수가 탐내는 물건을 극소수만 소유하도록 제한하여 인류의 욕망을 억누른다"고 했다. 기번이 우정을 나누 애덤 스미스도 법학 강의에서 정확하게 동일한 주장을 했다.

루소와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보다 더 훌륭하게 불평등을 풀어냈다. 차이점은 애덤 스미스는 불평등을 좋은 것으로 봤고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루소가 한 주장을 반박했다는 점이다.

휘그당이든 토리당이든 영국의 사상가들은 대체로 복종의 본질적인 보증인을 종교라 여겼다. (p. 281, 282)

소수자나 절대권력에 대한 복종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과 부자연스럽다고 여기는 사람과 나아가 불평등하다고 인식하는 사람이 한데 모여 대화를 나누는 곳, 그곳이 '더 클럽' 이었다. '더 클럽' 에서의 대화는 시대적 변화에 따라 논쟁점을 바꿔가며 끊임없는 토론의 장이 되곤 했다. 그들은 때로는 듣고 때로는 큰소리치며 서로의 생각을 교류했다.

스레일 부부 저택에서의 만찬을 중심으로 한 일명 '그림자 클럽' 에서는 이와는 다른 대화와 교류가 이어졌다.

존슨은 스트레텀 대저택에서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여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들은 존경받는 유명인들이지만 존슨에겐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존슨은 그들과 시시덕거리고 장난을 쳤다. (p. 347)

블루스타킹은 문학을 좋아하는 지적인 여성이나 여성 문학가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실제로 파란색 스타킹을 신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 한 명이 실크 스타킹 대신 청색 모직 양말을 신은 데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당시 일부 여성들은 사교계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지적인 대화를 나눌 벗으로서 서로를 만났다. (p. 352)

제임즈 보즈웰은 스트레텀 대저택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존슨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말도 너무 많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즈웰을 존슨이 너무 좋아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꼴사나운 스패니얼 이라고 생각했다. 한 저녁 만찬에서 보즈웰은 솔직하게 존슨을 숭배한다고 선언했다. (p. 361)

스레일 부인은 명석한 여자였다. '더 클럽'의 회원은 아니었지만 남편을 통해 알게 된 존슨과 정신적 교감을 나누며 당대의 다른 여성 지식인들에게 대화의 장을 제공했다. 보즈웰은 '더 클럽' 에서도 스트레텀 대저택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지만 존슨을 알게 된 이후 평생을 그의 뒤를 쫓으며 존경했다. 거의 집착에 가까워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성향이 존슨과 잘 맞는 부분이었다. 존슨도 평생 자신의 두려움에 집착하고 불안해했다. "보즈웰이 존슨에게서 그토록 바랐던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했다면, 존슨은 보즈웰에게서 그가 결코 가지지 못한 아들의 모습ㅇ르 발견했다. 존슨에 대한 보즈웰의 존경심은 점점 커져 거의 숭배에 이르렀다. 그런 그의 존경심은 존슨의 인정 욕구를 가득 채워 줬을 것이다." (p. 389) 둘의 관계는 특이했지만 서로에게 필요충분적인 관계이기도 했다.

더 클럽에 나가는 것은 의무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이따금씩 더 클럽에 나갔다. 1775년부터 1785년까지 10년 동안 출석률이 제일 좋은 회원은 조슈아 레이놀즈였다. 하지만 그가 10년 동안 더 클럽에 나간 횟수는 고작 연간 16회에 불과했다. 레이놀즈 다음으로 모임에 자주 참석했던 회원은 에드워드 기번이었고, 그는 10년 동안 연간 14회 정도 모임에 나갔다. 새뮤얼 존슨은 더 클럽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 1778년에는 더 클럽의 모임에 9번 정도 나갔지만, 이 해를 제외하고는 그가 더 클럽에 나간 횟수가 3회를 넘기지 않았다. 존슨은 더 클럽이 개성없이 단순히 튀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전락했다고 보즈웰에게 말했다. (p. 439)

존슨의 우을증을 달래주기 위해 레이놀즈가 모은 친구들로 시작된 '더 클럽'이라는 대화의 장이 생기자 점차 존슨 보다도 다른 사람들에게 더 유익한 모임이 되어갔다. 그들은 서로에게 대화상대가 필요했다. '더 클럽'은 매주 열렸지만 매번 참석자가 일정치 않았고 일단 참석하면 특정한 규범이나 주제 없이 자유롭게 논쟁하며 밤새 웃고 떠들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좋은 벗으로서 '더 클럽'은 유지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본의아니게 존슨과 보즈웰의 우정이야기를 깊이 알게 되었지만, 21챕터 600여 페이지의 두꺼운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16~19 챕터 때문이었다. 16. 대영제국과 식민지 / 17. 애덤 스미스 / 18. 에드워드 기번 / 19. 불신자와 신앙인 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 책에서 크지 않지만 <로마제국쇠망사>를 읽고 있는 중인 내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당시 영국은 유럽에서 패권을 잡아가는 중이었고 미국이라는 커다란 식민지와 노예산업에도 발을 들였으며 이것은 제국주의를 형성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존슨은 아일랜드와 미국의 식민지적 입장에 대해 보수적이었지만 '더 클럽'의 회원들 중에는 개혁성향의 멤버들도 다수 있었다. 그중 대표적이라고 할수 있는 사람이 애덤 스미스와 에드워드 기번 이었다.

새로운 산업이 속속 등장하면서 경제 구조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경제학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당시 '정치경제학'이라 불리던 학문의 범위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p. 483)

정치경제학은 누군가 가계를 관리하듯이 국가의 재정을 관리하는 것을 가리켰다. 그래서 정치경제학은 통치자나 행정부가 채택한 구체적인 재정 정책을 의미했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와 특히 프랑스 사상가들은 경제에 대하여 이론을 세우기 시작했다. (p. 484)

이 당시만 해도 대학교에서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주로 가르쳤고 학문의 분화와 연구는 세부적이지 않았다. 애덤 스미스는 논리학과 형이상학 교수에서 윤리학 교수로 대학에서 강의했고 <국부론>을 쓰기 전에 <도덕감정론>을 써냈다. 그는 경제학자라기 보다는 경제원리로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고자 한 도덕철학자였다. 그리고 그의 내성적인 성격은 존슨에게 무시당하곤 했다.

더 클럽의 회원으로서 애덤 스미스는 이상하게 주목받지 못했다. 보즈웰은 구제 불능일 정도로 사교적인 인물이었고, 애덤 스미스는 전형적으로 내성적인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는 새뮤얼 존슨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존슨은 애덤 스미스를 "자신이 봤던 최고로 멍청하고 따분한 개새끼"라고 불렀다. 애덤 스미스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자신만의 독창적인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는 그런 생각들을 문서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싶었을 뿐이다. (p. 487)

애덤 스미스와 존슨은 기질과 종교적 신념 뿐만 아니라 지식을 추구하는 방식도 달랐다. 존슨은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행동에 대하여 고민하는 도덕주의자였다. 반면 애덤 스미스는 사람들의 행동을 분석하는 사회과학자였다. 존슨은 기회만 생기면 이런저런 잡다한 글을 많이 발표하는 수필가였지만, 애덤 스미스는 이론가였고 수년 동안 공을 들여 공식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p. 489)

'더 클럽' 회원으로서 보는 애덤 스미스의 인간적 면모와 <국부론>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초기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자유방임주의가 아닌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애덤 스미스는 주장한다" (p. 494) 라는 문장을 보면서 애덤 스미스의 저서도 읽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만으로 애덤 스미스를 너무 오해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1769년 올리버 골드스미스가 <로마사>를 발표했다. 솔직히 새로울 것이 없는 책이었다. 골드스미스는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책을 썼다. 골드스미스는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책이 자신의 책보다 훨씬 더 뛰어난 대작이 될 것임도 짐작했다. 그래서 그는 1774년 기번에게 더 클럽에 들어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기번은 만장일치로 더 클럽의 회원으로 선출됐다. (p. 496)

출판되자마자 <로마제국쇠망사>는 명작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논란을 일으킬 요소를 담고 있었다. 기번은 기독교의 확산은 오직 기적적인 신의 중재로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해 공공연하게 회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기독교의 확산을 세속적인 증거들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독교의 초기에 일어난 사건들이 역사적으로 실제 사건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존슨과 보즈웰은 기번을 증오했다. 그들은 그를 '불신자'라 불렀다. (p. 496~497)

<로마제국쇠망사>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획기적인 책이 되었고 논쟁적인 책이 되었다. 하지만 기번은 일관되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고 흔들리지 않았다. 반면 그의 일상은 그런 뚝심과 어울리지 않게 느긋하고 여유롭고 한가하다 못해 지나치게 뚱뚱해지고 그럼에도 낙천적으로 허허 웃고 넘기는 모습에서 <로마제국쇠망사>의 저자로서 느껴지는 인물과 동일인물인가 의아할 정도였지만 가벼워서 오히려 좋았고 <로마제국쇠망사>가 탄생하기 까지의 과정은 흥미롭게 다가왔다. 불우한 어린시절, 개종, 프랑스 문헌과의 만남, 민병대활동, 상무원직 등...

그가 본격적으로 로마의 역사를 책으로 쓰기 시작한 시점에 미국 식민지들은 영국에서 독립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국들과 그들의 몰락은 아주 시사적인 주제였다. '위대한 제국의 쇠망'이란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되짚는다는 생각은 분명 영국 독자들을 매혹시킬 것이었다. 기번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 권에서 그는 널리 흩어진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로마가 극복해야 했던 장애물을 다뤘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극복해야 했던 장애물은 그가 살던 영국이 직면한 장애물이기도 했다. (p. 509)

기번은 화제가 되던 주제에 대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새로운 종류의 역사를 적어 내려갔다. 그들의 영웅인 볼테르와 함께 계몽사상가들은 자신들이 역사기록학에서 돌파구를 마련했다고 믿었다. 연대순으로 과거 사실을 지루하게 나열하는 대신, 그들은 그 일을 일으킨 근본적인 힘을 밝혀내기 위해 과거 사실의 이면을 깊이 파고들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철학적 역사'로 알려졌다. 분명 기번도 과거 사실의 이면을 파고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사실이 없는 이론은 속빈 강정일 뿐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로마제국쇠망사>에 대략 8,000개의 각주를 달았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가 어디서 그 정보를 얻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 정보를 설득력 있게 해석했는지를 나름대로 고민해볼 수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각주를 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당시에는 전례없는 일이었다. (p. 510)

다수의 역사가들은 마치 자신이 오래전에 일어난 사건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글을 썼다. 대부분의 경우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역사가의 역할은 독자가 그 확실하지 않은 증거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로마제국쇠망사>에서 기번은 우리가 확실치 않은 증거를 평가하도록 도우며 역사의 무대 뒤로 안내했다. (p. 511)

기번은 당시 누가 그 증거를 작성햇는지에 대하여 생각해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리고 그가 그 증거를 써내려간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도 생각하라 말한다. 역사 속 인물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그들을 증오했던 적들의 기록에서 나온다. 기번의 위대한 업적은 독자가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p. 513)

역사책을 읽을때 그 역사책이 쓰여진 시기와 저자에 대한 배경지식을 알고 읽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로마제국쇠망사> 를 읽을때 기번에 대한 사전지식은 내용이해에 필수적이다. <로마제국쇠망사>에는 정말 많은 각주들이 나온다. 때로는 불필요한 내용처럼 보일 때도 많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설명을 읽고 나니 아하~! 싶었다. '기번의 수다'라 불리는 각주들은 정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거였다. 기번은 천재적인 역사학자라 할만 하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쇠망사>에서 기독교의 기원을 다뤘다. 그는 사실에 근거해서 책을 썼지만, 그의 책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신앙인들은 공황에 빠졌고 위협을 느꼈다. <로마제국쇠망사>의 출간은 문화사에서 흥미로운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7세기에 사람들은 당연히 종교적 약속은 신앙에 기초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8세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의심했다. (p. 518)

기번에게 기적이란 진실 아니면 거짓이었다. 그래서 모들린 칼리지를 다닐 때 기적은 모두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가톨릭교로 개종을 결심했던 것이다. (p. 520)

다수의 프랑스 철학자들과 달리, 기번은 기독교 자체를 절대 경멸하지 않았다. 이것은 강조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그가 초기 기독교의 도덕성은 순수하다고 했을 때,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예수를 깊이 존경했다. 하지만 기번은 예수가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의 아들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는 예수를 위대한 스승이라 생각했다. (p. 523)

기번은 기적에 대해 훨씬 더 냉소적이었다. 하지만 기번의 동시대인들에겐 모든 기적이 진짜여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기적이 기독교의 신성한 권한을 입증하는 없어서는 안 될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초기 기독교신자들에 가해진 박해에 대해서 기번은 일부 금찍한 사건들도 있었지만 실제로 박해를 받아 죽은 기독교신자들은 많지 않았다는 증거를 어렵지 않게 제시했다. 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황제들은 기독교를 박해하지 않았고, 오랫동안 기독교는 공식적으로 용인됐다는 증거도 제시했다. 그는 후대에 전해지는 끔찍한 이야기는 종교적인 거짓말일 분이라고 주장했다. 예상대로 <로마제국쇠망사>가 출판된 이후 반발이 불같이 일어났다. 하지만 기번은 흔들리지 않았다. (p. 525)

기번의 종교에 대한 생각들을 더 알고 싶었지만 이 책은 존슨과 보즈웰이 중심인 책이므로 기번에 대해 자세히 다뤄지진 않는다. 그럼에도 당시의 분위기와 기번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큰 소득이었다.

일찍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존슨은 꽤 오래 살았다. 말년에 이런 저런 신체적 고통을 덜기 위해 아편등의 약물에 중독되기도 했지만 <영국 시인전> 이라는 역작을 정리해낸다. 75세의 나이로 친구들이 그의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편안하게 숨을 거뒀다.

존슨의 아들뻘인 보즈웰은 존슨이 세상을 떠나고 11년을 더 살았을 뿐이다. 그는 정신적 지주를 잃고 힘들어 했지만 그제서야 그의 소명을 깨달았다. 바로 <존슨전>을 쓰는 것.

보즈웰은 매우 독창적인 인물이었다. 보즈웰 이전에 그 누고도 실제 대화를 전기에 삽입할 생각을 못했다. 심지어 전기의 주인공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보즈웰만큼 어조, 표정, 웃음과 몸짓을 표현해서 사실성과 생동감을 불어넣는 재능을 지닌 전기작가는 거의 없었다. <존슨전>은 '새뮤얼 존슨의 재연'이란 극찬을 받았다. (p. 582)

존슨과 보즈웰의 인생을 마무리한 후 저자는 '더 클럽'의 주요 회원들의 생의 마감도 간략하게 덧붙인다. 그리고 '더 클럽'의 최후도.

더 클럽도 어쩔 수 없이 변해갔다. 오늘날 더 클럽은 런던 문예 학회란 이름으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다음은 회원과 그들이 회원으로 선출된 연도다. 월터 스콧(1818), 토마스 배빙턴 매콜리(1839), 윌리엄 글래드스턴(1857), 알프레드 테니슨(1865), 매슈 아놀드(1882), 러디어드 키플링(1914), 네빌 체임벌린(1929), 케네스 클라크(1941), T.S.엘리엇(1942), 맥스 비어봄(1942), 그리고 헤럴드 맥밀런(1954). 이들 외에도 수백 명의 회원들이 더 있지만,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이들은 아니다. 문학계와 예술계가 아닌 정계와 귀족 출신의 회원들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는 부분이 눈에 띈다.

새뮤얼 존슨과 에드먼드 버크가 살아 있었다면, 이토록 많이 이들이 회원으로 선출되지 못했을 것이며 어느 누가 새로운 회원으로 선출될 수 있었겠는가? 아마 디킨스, 새커리, 트롤로프, 하디, 로렌스, 오웰, 오든 그리고 라킨은 회원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더 클럽에는 보수적인 정치성향을 지닌 총리들도 몇몇 있었지만, 영국의 가장 위대한 총리인 윈스턴 처칠은 없었다. 그리고 조지 엘리엇이나 버지니아 울프도 회원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더 클럽은 끝까지 남성들만을 위한 모임이었다. (p. 606)

영국 지성인들의 살아숨쉬는 생생한 목소리와도 같았던 '더 클럽'이 세월이 흐를 수록 좋은벗이 아닌 인맥형성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된것을 안타까워 하는 저자의 마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내내 향수어린 목소리로 런던의 지식인들을 묘사하던 저자의 부드러운 문장 들을 마무리한 문장은 의외로 강렬한 문장이었다.

'더 클럽은 끝까지 남성들만을 위한 모임이었다'

이 문장뒤에 그 어떤 말을 붙여도 결국 사족이 될 것이다. 여러모로 인상깊은 멋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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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귀환 - 누구나 아는,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제이슨 바커 지음, 이지원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20세기 최고의 사상가에 대한 가장 불경스러운 기록

[마르크스의 귀환]은 이 악명높은 19세기 '급진주의자'의 삶에 관한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학구적이거나 철학적이지 않습니다. 한국 독자들은 책 속 마르크스가 너무 평범해서 놀랄 수도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추구한 것은 정말로 품위있는 삶이었을까요? 강박성 성격장애자가 으레 그러하듯, 마르크스는 주변 모든 사람이 엉뚱하거나 미심쩍다고 여기는 무언가에 몰두합니다. 그는 한 가지 생각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그런 드문 -일종의 미치광이라 부를만한- 사람입니다. (p. 6 - 한국어판을 내며 中 -)

철학을 공부했고 다큐멘터리 제작도 하는 저자는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에 대한 책을 쓰고 <마르크스 재장전> 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으며 다양한 매체에 칼럼을 게재하기도 하는, 현재는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에서 영화,철학,드라마 를 가르치고 있는 교수이다. 마르크스의 일대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있는 중이기도 한 저자는 어쩌면 마르크스 덕후 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마르크스는 기존의 상식적 이미지를 파괴한다.

이 책은 소설이다. 현대철학자 중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한 이름일 것 같은 마르크스에 대한 소설이지만 역사소설이나 위인전이나 전기같은 종류의 소설이 아니다. 마르크스에 대한 호기심을 소설로 풀어보려던 내게 이 소설은 기존에 알던 것마저 무너뜨리는 혼란을 준 작품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뚜렷이 구분하지 않는 이 소설은 일종의 환상소설처럼 읽혀졌다.마르크스의 머릿속을 풀어내고 있는듯한 이야기 속에서 마르크스는 저자가 앞서 언급했듯이 미치광이라 부를만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소설은 1849년 마르크스가 독일과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영국 런던에 정착하기 시작하던 때부터 시작된다. 그는 혁명적 사상가였으나 그의 혁명적 철학이 두드러지지 않을만큼 그 시대 자체가 여기저기 혁명적인 시대였다.

마르크스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생각했다. 옆에 앉은 남자는 횡설수설하는 광인이거나 허황된 몽상가였다. 그렇지만 술집 안을 잠시만 훑어보아도 모두가 마찬가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테이블 하나하나가 세계 혁명의 소우주였고, 월척을 놓친 어부의 경험담이었다. 화약 폭파에 실패한 비밀 결사대는 순전히 그들이 만들어 낸 자기들만의 세상에서 다시금 음모를 계획 중이었다. 온 세상이 무대였다. 다만 그 무대에는 양 끝의 가려진 공간이 없었다. 파리의 대참사가 그렇게 희비극적인 결말을 맞고 있었다. (p. 53)

유럽의 근대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다보면 모두 술에 취해 있는 듯 하다. 근대 보다 중세시대가 더 그렇긴 하다. 여하튼 유럽은 술독에 빠진 것 처럼 보인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을 퍼마신다. 그 알콜릭 상태에서 역사가 일어나고 혁명이 일어난다. 맨정신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잔인하고 그렇게 무모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르크스의 혁명적 대화도 대부분 술집에서 이루어진다. 술집안에 있는 사람 모두가 혁명가처럼 보였다.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자코뱅파, 무정부주의자, 민주주의자... 사소한 실랑이가 일상이던 시대였고 그들 모두는 혁명을 이야기했다.

"자넨 거의 뭐랄까... 혁명적 활동을 하거나 거기에 참여하는 걸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여. 대체 왜 그런가? 어째서 노동자 행진에 참여하기를 그토록 꺼리는 거지?"

"참여할 행진이 있다면 참여하지"

"그렇지만 내 행진은 사양하겠다?"

"행진은 없었어. 그건 주정뱅이들의 난동이었다고" 마르크스가 코웃음을 쳤다.

"혁명이란 게 처음에는 다 난동이지"

"그래 맞는 말이야. 그렇고말고. 물론 마르크스 자네가 노동자에게 어떤... 혐오감이나 무슨 악감정 같은 게 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야. 그건 전적으로 틀린 말일 테지. 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자네에게 어떤 현실적인 대안이 있는가, 이제 이 당의 정치적 노선은 어떤 것인가, 하는 걸세. 자네의 대안은 무엇인가, 마르크스?난 정말 모르겠어. 대체 자네는 정확히 무얼 바라나?"

"자네가 말한 그 '대안'을 자본을 다룬 논문의 형태로 다음 회의 때 내놓도록 하겠네" 마르크스가 선언했다. (p. 115, 116)

혁명의 시기이긴 했으나, 구심점이 없고 철학이 없는 혁명은 어이없이 자멸하곤 했다. 그 불씨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고 더 큰불로 키워낼 수 있는 사람은 혁명을 말하는 사람중에서도 그리 많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활동가라기 보다는 사상가였고 그의 사상은 초기엔 지인들로부터도 공감을 얻지 못했다. '공산주의자 선언'이 불씨는 만들 수 있었을지 몰라도 그 다음을 구축하진 못했다. 철저하고 현실적인 계획이 필요했다. 마르크스는 그 방법이 '자본론'의 집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지독하게 가난했고 현실은 그를 집필에만 몰두할 수 있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이들은 밥을 굶었고 갓난아들은 죽었으며 그 자신은 항문종기로 고생했다. 세상이 미쳐돌아가기 전에 그 자신이 미쳐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마르크스는 펜을 놓지 않았다. 아니 놓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몰두했다. 명확한 설명이 필요했다. 세상에도 자기자신에게도.

피터 듀랜드가 통조림 깡통을 발명한 것은 1810년이었다. 그로부터 60년이 흐른 뒤에야 누군가가 깡통따개를 발명해야 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자본주의를 시스템이라 말하기는 곤란했다. 거기에는 통합된 사고가 없었다. 그건 결코 리바이어던이 아니었다. 프랑켄슈타인이요, 생과 사에 동시에 속한 혼종, 광적이고 극단적인 컬트, 비시스템이었다. (p. 134)

런던의 정치조직들이 조직에 가입할 수 있는 지지자 수보다 많다는 사실은 그런 환상을 방증한다. 우선 지도자가 되고, 다음으로 당을 조직한다. 그 멍청이들은 그렇게 말 앞에 수레를 두고 있었다. 공산주의 정당의 과제는 혁명 운동에 대응하고 그 역동성에 적응하는 것이지, 진흙과 지푸라기로 그걸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었다. 혁명은 하인첸 같은 연금술사가 아니라 마르크스 같은 과학자를 필요로 했다. 혁명의 물결이 빠져나간 지금, 그는 혁명을 더 잘 예측할 수 있도록 차라리 연구 활동으로 물러나는 편이 나았다. (p. 205)

보나파르트는 봉기를 진압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봉기를 해협 너머로 수출해버리는 것이다. 상인의 나라에서는 뭐든 비축하려 들 테니, '믿을 수 없는 앨비언(유럽 대륙에서 영국을 경멸조로 가리키던 명칭)'은 혁명의 마지막 기항지이자 떨이 장터였다. 기차를 가득 채운 망명자가 여전히 런던, 버밍엄, 맨테스터라는 사회적 공장으로 배달되고 있었다. 런던이 터널 끝의 빛처럼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그들은 여전히 터널 안에 있었고, 빠져나갈 가망성은 나날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p. 206)

자본주의는 철저한 시스템이 아니었고 혁명가들은 말로만 혁명을 논하고 있었으며 유럽대륙에서의 봉기들은 하나같이 짓밟혔다. 그 끝에 있는 도시 런던에 마르크스가 떠밀려와 있었다. 그는 혁명의 기차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런던에 도착한 이래로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혁명 최고의 이론가가 원고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따. 마르크스는 그 모두를 위태로운 허세꾼의 기행 정도로 해석했다. 그렇지만 그저 무모해 보이기만 했던 그런 행동-파란만장한 연애와 런던과 맨체스터를 끊임없이 오가는 부산함-은 사실 마르크스가 친구에게 지운 부담 때문이었다. 책의 완성에만 맹목적으로 몰두하던 마르크스는 그걸 깨닫지 못할 정도로 둔감했다. (p. 231)

엥겔스가 없었다면 마르크스의 책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엥겔스는 그야말로 물심양면으로 마르크스를 돕고 있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엥겔스는 아주 잠깐 나올 뿐이다.

엥겔스의 지원은 불규칙적이었고 마르크스 스스로의 능력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일감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생활고에 시달릴수록 오히려 더 망상적으로 집필에 집착하는 마르크스는 더이상 전당포에 맡길 물건이 없자 아이의 장난감까지 들고 나선다. 미분과 극한 개념에 몰두하고 기차의 궤적운동에 빠져든다.

"만약 자본주의를 기관차로 묘사하고, 기관차로서 운동의 궤적을 그릴 수 있다면 어떨까? 자본주의의 움직임, 말하자면 그것의 '진정한 운동'을 더할 나위 없는 정확도로 추적해서, 전체 회로를 하나의 공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면?" (p. 328)

"자본주의는 한가하게 원운동을 하지도 않고, 직선으로 움직이지도 않아. 엄정함과 정확함의 이름으로, 우리는 자본주의의 고점과 저점을 그래프에 나타내야 해.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지! 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건 아무것도 없어. 지니는 깊이 파묻혀있지. 우리는 더 깊이, 핵심까지 내려가야 해. 그런데 무한의 차원에서 '아래'는 어디를 말하는 거지? 거기서 지리는 아무 의미가 없는데? 우린 자본주의의 이탈과 우회에도 그 본질을 간파해야 해. 더 나아가, 불규칙한 등락과 선회 속에서도 그것이 미래로 전진하는 경로를 그려내야 해. 동지들, 그걸 달성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더 긴 철로야" (p. 330)

장난감 기차를 빼앗긴 아들은 병이났고 전당포에 장난감 기차를 맡긴 아비는 눈에 뵈는게 없는 사람처럼 오직 이론에 몰두했으며 정신을 차렸을 땐 아들의 차가운 시신을 안고 있었다.

과거 없는 삶은 악몽이었다. 유령들은 더는 현재를 기웃거리지 않았다. 그들은 아예 거처를 옮겨 산 자들 가운데 머물렀다. 과거가 이주한 것처럼 미래는 정지했다. 미래는 더는 저 앞에, 저 지평선 너머에 있지 않았다. 그건 어디에나 존재하면서 모든 진취적인 사고를 억압했다. 역을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도착한 기차, 혹은 끊임없이 움직이되 절대 도착하지 않는 기차 같았다. (p. 346)

지난 1850년대 초, 그와 엥겔스는 혁명이 얼어붙어 동면기에 들어갔다고 선언했다. 순진하고 혈기 왕성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그들은 마르크스의 이론서에 의망을 걸었다. 그들은 그 책이 모두를 구원하고 혁명을 제 궤도에 올려놓을 거라고, 혹은 적어도 길잡이가 되어줄 나침반을 제공하리라고 믿었다. (p. 347)

소설은 마르크스의 생애라기 보다는 '자본론' 집필기 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자본론'을 집필하기까지의 마르크스의 내적 고뇌를 다루고 있다.

연이은 아이들의 죽음, 더이상 내다 팔 것이 없자 스스로를 버린 듯한 아내, 메모 쪼가리들 말고는 아무것도 이룬게 없는 것 같은 자신... 고통이 점증하고 분노가 폭발하려 할때 마르크스는 울부짖는다. "그 책에서 날 좀 놔줘! 날 좀 놔줘!" (p. 367)

관념 철학이 그가 다루어야 할 적이었다. 그렇지만 단번에 제압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의 목표에 동조하도록 설득해야 했다. 어떤 목표를 위해서? 물론 혁명적 목적, 궁극적으로는 공산주의를 위해서였다. 노동자의 자유로운 연합에 기초한 미래사회, 자유의 의미가 개인의 진정한 자기통치에 있는, 그런 사회 말이다. 마르크스가 견지한 사회 비평이 조금이라도 존재 가치를 가지려면, 현실적이어야 했다. 추상적인 저술가가 될 수는 없었다. 계급적 조건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저술은 직업이어야 했다. (p. 390)

소설이긴 하지만 마르크스의 생애를 읽는 동안 울화가 치밀곤 했다. 궁핍에 찌들어가는 삶 속에서 그 어떤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다고 혁명가로서 어떤 조직을 구성한다거나 학습을 시킨다거나 하는 활동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서, 오로지 이론 오로지 집필에만 몰두하고자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가 없었다. 위 구절을 읽고서야 조금은 알것도 같았다.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이론이 맞다는 증명을 하기위해서라도 그자신 스스로의 작업은 가치가 있어야 했고 직업이 될 수 있어야 했다. 그렇다해도 모순적으로 다가오는 면들은 여전히 많았다. 하지만 뭐 마르크스가 무슨 종교적 성인이나 국가적 지도자도 아니고 그저 우리와 같은 사람일 뿐이었으니 어쩌면 과한 기대를 했던 것인지도...

미친 과학자들의 추론에 따르면, 충분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는, 질량이 에너지와 같고 하나가 다른 하나로 전환될 수 있는 한, 무한을 가로지를 수 있다. 속도가 두 배 였다면 그보다 더 무거웠을 것이다. 혁명 열차도 마찬가지다. 시속 수천 킬로미터로 달리는 그것은 플랫폼에 가만히 서있는 기차와 완전히 달랐다. 아예 같은 '물체'가 아니었다. 전혀. 화폐 유통의 영역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었다. 변화하는 크기는 변화하는 자본의 양으로 전환되었다. 모든 단단한 것이 공기 중으로 녹아들지만, 공기 중으로 녹아드는 것은 그저 사라지지 않는다. 상품은 소비하기 위한 것이지만, 돈은 결코 소비할 수 없다. 물질이 생성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은 노동력, 프로이센 군대, 천연자원, 기차 모형, 자본 그 자체를 망라한 모든 것의 판매, 구매, 대여로부터 늘 새로운 형태를 얻는다. 결국에 자본에는 한계가 없다. 자본이 상품 세계의 지배자고 신이다. (p. 402)

마르크스의 책은 과학적인 기획이었고, 본질에서는 여전히 진행중인 작업이었다. [자본]은 성경이 아니었다. 실험의 원재료였다. 그의 이론을 증명하는 작업은 정확한 해석적 도구로 무장하고 테이블에 앉는 것에 비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을 바로 그런 정신으로 읽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단순한 이해가 전부가 아니었다. 노동자는 누구나 그의 말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의 한 줄 한 줄에 그들의 투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책은 하나의 시작이었다. 끝이 어디일지는 현재로서는 불분명했다. 하지만 명심할 점은, 혁명이 멀지 않았다는 것, 사회 각 영역에서 감지되는 지각의 변동으로 보아, 노동자들은 그들의 혁명적 실천을 통해 이미 그의 이론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p. 410)

이 책의 앞부분에 추천사 비슷한 '책머리에'를 쓴 저자의 한국동료교수는 "이 소설의 미덕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론적 집적물이 눈앞에서 사사로 전개된다는 점이다"(p. 10) 이라고 말했다. 마르크스의 고뇌들을 그의 생애와 겹쳐 쓰면서 서사로 그의 이론적 고민들이 풀이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이 소설의 미덕인지는 모르겠다. 이러다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걱정될 정도의 소설 속 마르크스의 상태는 소설이라는 허구이기에 읽을만 했다. 만약 허구가 아니었다면 그가 평생 심혈을 기울여 쓴 책 [자본]이 어느 미치광이의 헛소리로 치부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윈이 자연사 분야에서 오랫동안 해온 작업을, 비로소 내가 사회경제사 분야에서 시작하고 있는 거야"

"흠, 난 자네가 다윈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하는데" 엥겔스가 말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윈의 작업은 과거에 대한 거야. 그는 오늘날까지의 진화를 연구하지. 자네의 작업은 그 모든 걸 포괄하면서 거기서 다 나아가, 미래를 전망하니까! 자네는 모든 면에서 진보적인 역사이론을 만들어냈어. 자넨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과학을 발명해 낸 거야"

"진정해. 내가 전반적으로 자연철학과 양립 가능한 접근법을 역사 분야에서 발견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아직 2부와 3부가 남아있어. 끝날때까지 끝난 게 아니지" (p. 435, 436)

그의 생전에 [자본론]은 1권까지만 나왔다. 2권과 3권은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에 의해 편찬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살던 시대은 다양한 사상들이 폭발적으로 생성되던 시대였다. 다윈과 마르크스는 동시대를 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믿었고 당대의 혁명성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자신들의 이론을 체계화했다. 시대가 그들의 사유에 자유를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 아버지가 어째서 아버지의 자존심에 속고 있는지, 제 삶에 대한 아버지의 해석이 왜 잘못됐는지, 진짜 이유를 말씀드릴게요. 아버지가 언급하지 않은, 우리 두 사람이 아닌 다른 중대한 행위자가 있어요. 엄연히 이 드라마의 당사자아지만 아버지의 주의를 비켜났죠. 하지만 아버지보다도 훨씬 큰 존재감을 발하고 있어요. 실은 여기 없기에 더욱더 그러하죠. 바로 공산주의에요!" (p. 453)

"더는 공산주의가 그저 제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아실 거예요. 공산주의는 이미 여기 와있어요! 정말로 이 책을 아버지 때문에 썼다고 믿으세요? 하! 글쎄요, 사실 모를 일이요. 아버지, 어쩌면 그랬는지도요, 정말 어쩌면요. 그렇지만 현대 파리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통치되고 있다는 사실은, 제 600페이지짜리 편지가 이 방의 네 벽을 넘어서는 더 넓은 의미가 있다는 걸 시사하지 않겠어요? 모르시겠어요? 아버지를 위해 이 책을 쓴 게 아니에요! 노동자들을 위해 썼어요. 혁명을 위해서요!" (p. 454)

도피생활 중 늘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고 느낀 마르크스는 책의 말미에 가서야 그 감시자가 아버지 유령이었음을 알게 된다. 아버지 유령과의 대화 속에서 노년의 마르크스는 그제야 아들로서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독립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소설의 마무리는 역설적으로 마르크스의 이론이 굉장히 개인적인 산물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마르크스가 작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져서 평범한 아무개보다도 더 하찮게 여겨질 정도였다.

'누구나 아는,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이라는 부제가 붙은 <마르크스의 귀환> 이라는 제목을 봤을 땐, 근대의 혁명적 사상이 현대에서 다시 영향을 끼칠만한 이론으로 귀환했다는 이야기일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소설은 마르크스를 근대에서 현대로 귀환시킨 것이 아니라, 시대를 흔든 거대한 사상에서 혼란스러운 개인적 이론으로 귀환시키고 있는 듯 하다. 책 뒤표지에 써있듯이 그야말로 '20세기 최고의 사상가에 대한 가장 불경스러운 기록' 이라 하겠다. 저자는 마르크스와 '자본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건지 사뭇 궁금해진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사유의 흐름을 담은 이 소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앞 부분에 있었다.

더이상 전당포에 맡길 물건도 없고 더이상 돈을 빌릴 곳도 없이 전재산이라고는 주머니에 든 1페니 뿐이었던 마르크스는 집에 가는 길에서 죽어가던 아이에게 배고프다며 울고 있는 아이에게 살갗이 트고 동상에 걸린 맨발을 드러낸 채 여기저기 곪고 헐벗은 다리와 누더기를 걸친 채 비쩍 마른 몸에 이가 들끓고 숨만 겨우 쉬는 상태였던 어린 아이에게 그 1페니를 준다. 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기저에 이런 인간애가 있었음을 여전히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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