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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희순 - 노래로, 총으로 싸운 조선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정용연.권숯돌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8월
평점 :
'안사람 의병단'을 이끈 조선 최초의, 유일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따뜻하고 감동적인 그래픽노블로 만나다!
윤희순.
낯선 이름이다.
게다가 독립군도 아니고 의병장 이라...
조선말 의병들의 활동에서 여성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어지러운 나라안팎의 위기속에서 분연히 일어나 목숨 걸고 싸웠던 수많은 의병들 중에서 독립군으로 이어진 사람들은 숱하게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자신의 이름을 남긴 여성은 아마도 많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조선 최초의 여성 의병장' 이라는 타이틀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1961년 서울 변두리 판자촌에서 넝마주이 소년 둘이 재활용품을 수집하고 있다. 거리의 사람들은 흘끔흘끔 쳐다보고 남루한 소년들을 피한다.
"와! 이런 집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 사는 걸까?
"적어도 독립운동가 후손은 아니겠지" (p. 14)
우범자로 신고되어 잡혀간 경찰서에서 인적사항을 대라는 경찰의 말에 독립군집안이라는 동생의 말은 무시당하는 것을 넘어 비웃음을 산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은 무시당해도 친일파의 후손은 떵떵거리고 살던 대한민국이었다. 그렇게 소년의 억울한 눈빛을 뒤로 하고 1935년 과거로 넘어간다.
"어머니, 이리 곡기를 끊으시면 어떡합니까? 아범이 떠난지 벌써 수일이 지났습니다. 압니다. 어머니 마음. 저도 자식을 키우니까요. 하지만 이제 뭐라도 드시고 기운을 차리셔야죠" (p. 54)
왜경에게 큰아들을 잃고 노구의 어미는 붓을 들어 찬찬이 그동안의 일들을 되짚어보기 시작한다. '고흥 유씨 항재 처 패형 윤씨 가정록' 줄여서 '일생록' 이라고도 하는 한글일기를 남기고 있는 이 할머니가 바로 윤희순 의사 이시다. 일기속에서 시간은 다시 거슬러 1868년으로 올라간다. 서양과 일본이 동시에 조선을 넘보던 때였고 아직 중국을 제외한 국제정세를 모르던 조선이었다.
"말이 되는 소립니까? 공맹의 도리를 모르는 자들과 화친이라니요. 그들이 정말 화친을 하자는 것일까요?"
"그들의 꿍꿍이가 무엇이든 이 난관을 헤쳐나가려면 다시 오륜을 세우고 민력을 키우는 수밖에요"
"옳은 말씀입니다. 허나, 어떻게 말입니까?"
"준비를 해야겠지. 우리 유생들도 붓 대신 칼을 들어야 할 때가 올 테니." (p. 62, 63)
윤희순의 집안은 대대로 뼈대있는 유생들을 배출시켜왔고 난국의 상황에 통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에 못지 않게 올곧은 뚝심을 가졌던 윤익상의 아들과 1875년 윤희순은 혼례를 치룬다. 그렇게 한양에서 강원도 춘천까지 오게 되자마자 시아버지는 뜻있는 활동을 하느라 남편은 못다한 공부를 하느라 바빠 넉넉지 않은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은 오로지 윤희순의 몫이었다.
"아~ 우리 팔도 동포들은 차마 망해가는 나라를 내버려두려 하는가!
국모의 원수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는데,
임금마저 머리를 깎이고 의관을 찢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팔도 백성 역시 외세에 의해 몰살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우리 의병은 국가와 자신을 위한 의리와 복수로 마땅히 떨쳐 일어서야 할 것이다.
국가와 대도의 존망 앞에 고하노니 제야의 선비, 산촌의 필부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 함께 일어서자.
능욕 앞에 싸우지 못하면 장차 천하 만세의 입을 어찌 막을 것인가!
거적 위에서 잠자고 창을 베개 삼으면서 모두 끓는 물과 불 속으로 나아갈지어다.
그리하여 기어코 온 세상이 재건되어 하늘이 다시 밝아지는 것을 볼 터이니... 부디 정성을 다해 함께 대의를 펼치자!" (p. 118, 119, 120)
힘없는 나라 안에서 외세가 충돌하고 일본이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선다. 하지만... 너무도 허망할 정도로 의병활동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너무 일찍 가장 아닌 가장이 되어야 했던 첫째 돈상이, 아이다운 투정도 호사였던 민상이, 그리고 곧 몰아닥칠 힘든 시기의 기억밖에 가지지 못할 셋째 교상이.
그때는 할미도 미처 알지 못했다. 자식에 대한 애잔함도 허락지 않을 시간이 오고 있다는 것을. (p. 177)
홀로 세 아들을 건사하며 마을을 지나가던 의병 패잔병들을 보살피던 윤희순은 상황이 더욱 어려워질 수록 자신이 할 수 있는 몫을 일부러 찾아 힘을 보탰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며 하나둘씩 마음을 합쳐나갔다.
"지금은 나라의 존망이 을미년 때보다 더 위태로워졌습니다. 더는 남녀유별이란 병풍 뒤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지요"
"그래서 자네 생각은 뭔가?"
"안사람 의병단을 만들 것입니다." (p. 218)
남자들의 의병활동도 처참히 무너져가던 때 윤희순은 아낙들을 모아 안사람 의병단을 만든다. 뜻을 세웠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해를 시킴으로써 마음을 모았고 총술 훈련에도 앞장섰으며 무기제작에도 힘을 보탰다. 그렇게 다시한번 일어선 의병들은 1907년 도성을 향하지만 역시나 역부족이었다.
갑오년에는 동학도들의 시신으로 뒤덮였던 남도의 들판이 1909년 기유년에는 의병과 그 가족, 이웃의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p. 266)
조선말 의병의 주축은 동학이었던 걸로 알았는데, 이 책에서 의병활동은 동학과의 연관이 불분명하다. 윤희순의 시아버지가 가담한 의병은 종교와는 관련이 없는 걸로 보여지고 당시 혼란스런 나라안에서 다양한 원인으로 일어선 의병활동이 있었겠지만 그 갈래를 설명해주지 않은 것은 좀 아쉬웠다.
여하튼 그렇게 무너져내린 의병활동으로 살아남은 이들은 좌절했지만,
"아버님! 제발 칼을 거두어주십시오"
"말리지 말거라. 선영들께 더는 대죄를 지으며 구차히 살 수 없다.
거의소청도 실패하고 이제 남은 길은 자정치명 밖에 없질 않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님. 거지수구의 길도 아직 남아있습니다"
"부질없는 말이다"
"목숨을 끊기는 쉽습니다. 멋모르는 열여섯에 시집 온 뒤로 아버님이 저를 키워주셨습니다. 아니, 의병운동으로 부재 중인 아버님의 빈자리가 늘 저를 가르쳤습니다. 빈자리는 빈자리가 아니었지요. 늘 꽉 차 있었습니다. 아버님, 저를 위해 한번만 더 어렵고 혹독한 길을 가주십시오." (p. 292, 293)
목에 칼을 댄 시아버지를 만류하며 윤희순은 다시한번 뜻을 세워주시길 간청한다. 윤희순과 가족들은 다시한번 의지를 다지며 중국땅으로 향한다.
할미는 배움이 짧아 조선이 망국에 이른 복잡한 정세는 미처 알지 못한다.
허나 이것만은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너희 조상 모두가 금전과 권력에 어둡고 제 한목숨 부지하기 급급한 건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p. 306)
천신만고 끝에 만주땅에 자리잡은 가족들은 거친 땅을 일구며 중국 현지인들에게도 진심을 다했고 힘든 타국살이에서도 독립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조선에서는 안사람 의병을 길러내던 당신이 중국 땅에선 독립운동가를 기르는 교장이 되었구려" (p. 326)
인재를 기르던 학교도 4년만에 문을 닫아야 했고 그 사이 시아버지와 남편도 저세상으로 떠났다. 하지만 윤희순은 다시 굳건하게 일어섰다.
사람들이 찾아와 모일 학교가 없어졌다면 뜻을 품은 자가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일으키면 되는 것.
나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p. 342)
할미라고 왜 없었겠느냐. 슬픔과 동무 되어 오래도록 주저앉고 싶을 때가.
무쇠같이 단단한 마음도 모래처럼 부서지고 무너질 때가 왜 없었겠느냐.
그러나 할미에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다. (p. 351, 352)
아직 어린 세 아들을 데리고 윤희순은 흩어진 간도땅의 동지들을 찾아나섰다. 그렇게 1920년경 다시 조선독리단을 만들고 독립단 학교를 세웠다.
하지만 나날이 악랄해져 가는 일본군에 의해 큰아들을 잃고 나서 노구의 어머니는 더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그리고 1996년 어느날의 서울.
"무덤을 찾았다구요?"
"그래. 그럼 공항에서 보기로 하자"
"평생 숙원을 이루신 거네요"
"그러게 말이다. 대접은 고사하고 멸시를 받을 땐 독립운동가 후손이란 게 원망스러웠다만 버틴 세월이 헛되진 않았나 보구나" (p. 382, 383)
윤희순의 손자, 손녀는 중국 땅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 찾기를 희망했던 할머니의 묘를 찾았다. 다행히도 그 묘는 동네사람들에 의해 대대로 보살펴지고 있었다. 현지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저희 부모님이 늘 말씀하셨지요. 이 동네 사람치고 윤 할머니 덕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요." (p. 385) 나라는 보살피지 않았지만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은 1935년 일생록을 마무리하던 즈음의 날로 되돌아간다.
용서하거라.
죽음보다 어려운 삶을 너희에게만 떠안긴 채 혼자 떠나는 것을.
나라 잃은 백성으로 내 어찌 자식 잃은 슬픔을 혼자만 겪은 듯 유난스레 굴까마는, 이제는 정말 기력이 소하고 고단하여 쉬고 싶구나.
한 번도 나만을위해 살아보지 못한 할미에게 마지막 이기심을 허락해다오.
할미가 다 마치지 못한 일기는 광복된 세상에서 너희가 채워주기 바란다.
그리고 부디 기억해다오.
좋은 옷, 기름진 음식, 푹신한 잠자리에 입히고 먹이고 누이진 못했으나 우리는 너희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는 것을.
무엇을 지키려 했냐고? 글쎄다.
때로 그것은 누군가에겐 가족이었고 누군가에겐 이름이었고 목숨이었고 땅이었고 하늘이었고 자존이었고 독립이었을 테지.
그러나 내 대답은 좀 미뤄두기로 하자.
우리가 그토록 처절히 지키려 한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는 훗날 너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겠느냐?
너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이다. (p. 411 ~ 414)
향년 76세 였다.
일생동안 힘든 길을 마다하지 않았으면서도 미안하다며 무겁게 생을 마쳤다.
당신이 그토록 어렵게 지켜낸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고 자랑스럽게 대답할 만한 무엇을 우리는 지금 갖고 있는가? 여전히 지키고 있는가?
역사가 알아주지 않는 민초의 삶은 늘 더 깊은 묵직함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