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혁명가 김원봉
허영만 지음 / 가디언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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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치하 독립운동사에서 '김원봉'의 이름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굵직한 만화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해온 만화가 허영만에 의해 독립운동가 아니 독립혁명가 김원봉을 접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듯 눈에 생생한 만화를 다 보고 나면 마음 한켠이 묵직해지면서 당시의 고통과 고뇌가 조금은 전해져 오는 것만 같다.

3·1 운동 대표 33이는 군중이 모여 시위가 폭동으로 변할까 봐 모임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요릿집 태화관으로 바꾸고 독립선언식을 치른 뒤 일본 경찰에 통보하고 자기 발로 잡혀 들어갔답니다. '민족이 당면한 문제는 민족 스스로 해결해야 하며 미국은 그런 민족을 돕겠다'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얘기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만세 운동을 일으키면 미국이 일본한테 한국에서 물러가라고 할 것이다? 미국의 민족자결주의가우리나라에도 해당된다면 파리평화회의에서 김규식이 연설할 때 돕는다고 나왔어야히죠. 우리가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겼던 을사년에 가장 먼저 공사관을 철수한 나라가 미국이었어요.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는 것을 일본이 눈감아주는 조건으로 일본의 조선 강탈을 도와줬다고요. (p. 13 ~ 14)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에 내재된 민족과 국가 개념은 미국을 위시한 서방 강대국들을 위한 논리였지 결코 당시 주권을 빼앗긴 약소국들을 위한 논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 약소국들 중에 대한민국은 아예 끼어있지도 않은 국가 취급도 받지 못하는 일본의 식민지일 뿐이었다.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당대 지식인들의 한계를 김원봉은 꿰뚫어 보았다.

저는 3·1 독립선언서보다 대한 독립선언서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지만 강한 방법으로 일본과 싸우겠습니다! 정의로운 열혈 지사를 모집해 단체를 만들겠습니다! (p. 18, 19)

당시엔 좀더 효과적이고 충격적 효과를 줄 만한 방법이 필요했다. 평화적인 협상을 통해 독립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 김원봉의 무력투쟁 결심은 그의 성격상 당연한 결론이었다.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재정을 틀어쥐고 돈을 내어놓지 않으니 다른 독립 단체를 지원할 수 없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세울 예정이던 비행학교 사업도 중단했다. 마흔다섯 유부남이었던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모인 돈으로 스물도 안 된 처녀와 고급 호텔을 이용하며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p. 20)

먼 거리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소통도 어려웠던 때에 미국에서 스스로 한국의 대통령이된 사람을 저지할 방법도 여력도 없었다. 중국과 국내 상황은 점점 어려워져 갔고 그 상황을 돌파할 방법을 찾는 것만도 어려웠던 때였다.

자유와 독립은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의열단원이 선구자가 되어 민중을 각성시킵시다! (p. 27)

김원봉이 찾은 돌파구는 '의열단' 이었다.

단재 신채호는 임시정부가 생기기 전에 이미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당을 만들고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나, 이승만의 만행에 진저리를 치고 사퇴했다. 김원봉은 행동가이고 신채호는 사상가여서 그 성격은 달랐으나 조국 광복이라는 목표는 하나였다. (p. 158)

김원봉이 신채호를 만나 부탁한 '의열단 선언문'은 폭력성으로 매도되곤 했던 의열단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그렇게 나온 것이 '조선혁명선언'이었다.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에 새로운 활력과 투지를 심어주었다. 지금까지의 활동이 다소 즉흥적, 비체계적인 투쟁이었다면 조선혁명선언의 완성으로 의열단은 항일 투쟁 노선을 한층 정당화하고 이념적 지표를 갖게 되었다. 구체화된 민중혁명론은 의열단원 자신이 민중 직접 혁명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필연성을 제시했다. (p. 163)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과 폭탄을 함께 던져넣었던 의열단원들을 어쩔수 없다 생각하면서도 안타까워 했기에 김원봉은 당시 중국 정세에 따라 다양한 투쟁방법을 고심해야 했다. 당시 중국 내부는 외세의 침략과 왕권의 몰락과 새로운 사상투쟁으로 혼란 그 자체였다. 그 여파는 한국 내부에서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3·1 만세 운동 이후 일본은 문화 통치를 내세우며 사회단체를 자유로이 만들 수 있게 했으나 만세 운동을 이끈 개신교와 천도교 산하에는 제대로 된 조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국내의 조선공산당 지부는 남아 있었다. 조선공산당 강력은 조선혁명선언과 일맥상통했고 거사를 위한 새 조직을 만드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조선공산당과 의열단은 손을 잡았다. (p. 176, 177)

중국공산당과도 조선공산당지부와도 러시아공산당과도 그 어느 세력이 되었건 독립을 위해서라면 가능한 다양한 협력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상해임시정부는 사상의 차이에 분명히 선을 그었으나 김원봉은 오로지 '자주독립'을 목표로 삼았다.

중국이 좌우로 갈라져 유혈 투쟁을 하는 걸 본 의열단은 상해촉성회를 조직하고 동포들끼리 힘을 한곳으로 모아 일제와 싸우자고 했다. (p. 275)

하지만 임시정부는 끝내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 임시 정부는 좌파 성향의 단체와 손잡지 않습니다." (p. 301)

김원봉은 조선공산당 재건 동맹 참여와 레닌주의정치학교 운영으로 인해 우파로부터 공산주의자로 매도되었다. (p. 302)

임시정부는 1942년 4월 20일 28차 국무회의에서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의 합류를 결정했다. (p. 310)

중국내에서의 혼란과 중국내에 있는 독립단체들의 혼란이 섞여들면서 더욱 어려운 과정이긴 했지만 여하튼 '독립'을 목표로 힘을 합쳐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힘을 모아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건만, '독립'은 뜻하지 않게 갑작스럽게 이루어졌고 그 상황은 결코 반갑기만한 선물은 아니었다.

 

"약산! 일왕이 내일 연합군에 항복한다고 하오"

"우리가 쳐들어 갈 때까지 일본이 항복하면 안 돼요!"

"그렇소. 이렇게 되면 우리가 연합군에게 아무 요구도 할 수 없게 되었소" (p. 314)

결국 그렇게 갑작스럽게 외부 상황들로 인해 덩달아 이루어진 '독립'은 국내 상황을 더욱 복잡스럽게 만들고 말았다.

 

 

여러 갈래의 정치 운동이 펼쳐졌다.

여운형이 건국동맹조직을 확대했다.

일제강점기에 모진 탄압을 받아 지하에 잠적했던 박헌영 등 조선공산당 인사들도 부상했다.

일제제 협력했던 한민당 계열은 임시정부를 높이 받든다고 위장하고 나섰다.

가장 먼저 귀국한 이승만은 친일파와 악질 지주를 가리지 않고 세력을 키워나갔다.

김구 중심의 임시정부 요원들은 가장 유리한 위치에서 임시정부의 역할을 감당했다.

중국에 남아 있던 조선독립연맹은 현지에서 조선문지공화국을 만들었다. (p. 320, 321)

다양한 정치세력들은 신탁통치에 대한 왜곡된 이해로 더욱 분열을 가속화했고 그 진상을 파악했을 땐 이미 늦었다.

이 무렵 해방정국은 무법천지였다.

이념과 이해관계에 따라 정적을 납치, 구금, 테러하는 것은 물론 살해 행위도 속출했다. (p. 323)

중부경찰서에서 온갖 수모를 당한 뒤 풀려나 전 의열단원 유석현의 집에서 꼬박 3일간을 통곡했다. 평생을 조국 광복에 몸 바치고 민혁당 서기장을 거쳐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을 지낸 김원봉이 악질 왜경 앞잡이에게 수모를 당했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겠는가. (p. 337)

노덕술. 일본이름 마쓰우라 히로.

일제의 대표적 악질 경찰관이자 혹독한 고문으로 독립운동가를 잡아다 죽음에 이르게 하곤 했던 그가 해방이 되자 미 군정 경찰로 복직하고 수도청 수사과장이 되었으며 김원봉에게 누명을 씌워 잡아갈 만큼 당대는 혼돈과 폭력이 난무하던 시기였다. 일제에게도 잡히지 않았던 김원봉은 노덕술에게 잡혀 고문당했다.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원통해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미 군정 경찰이 된 노덕술은 일경 출신 경찰 간부들과 함께 반민족회의특별조사위원회 요원들의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948년 설립된 반민특위는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자행된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였다. 친일 부역자들을 끌어안고 있었던 미군정은 반민특위 설립을 반대했다. (p. 341)

그러나 반민특위가 애써 체포한 노덕술을 이승만이 석방시켜버렸고 되레 반민특위가 해체되는 계기가 되었다. (p. 349)

노덕술은 헌병으로 자리를 옮겼고, 육군 단장을 지내다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는 등 잘 먹고 잘 사다가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노덕술과 같은 인간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이 이승만 치하였고 그 이후로도 제대로 해결하지 않은 역사의 어두움은 항상 시대의 발목을 잡아오고 있다.

"정치적 구상이 다르다고 그것을 구실 삼아 민족의 지도자를 살해하는 이런 죄악은 천추에 용서받지 못할 짓이다. 그의 죽음은 민족국가의 부흥 발전에 큰 상처를 남겼다. "

여운형의 장례식 행사는 김원봉이 남한에서 활동한 마지막 공개 행사였다. (p. 355)

이후 김원봉은 월북했다. 이미 좌우의 분단이 뚜렷해진 상황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그가 가졌던 정치이념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국내 상황은 광복이전보다 그닥 낫다고 보기 힘들었다.

그는 결국 '자주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 안타까운 마음이 나또한 마지막 장을 무겁게 덮도록 만들었다. 지금의 현실상황들이 그 무거움을 가볍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지금은 과연 '자주독립' 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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