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 그들은 왜 칼 대신 책을 들었나 서가명강 시리즈 14
박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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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맞서 필사의 도약을 감행한 메이지유신의 혁명가들!

'서울대를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라는 서가명강 시리즈의 14권인 이 책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통해 지금의 일본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는 책이다. 일본역사를 다 알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메이지유신은 알아둘 필요성이 있다는 저자의 의견에 처음엔 갸우뚱 했지만 읽어가면서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게 됐다.

일본을 상대하고 경쟁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를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 또 전략적이어야 한다. 세계에서 일본을 무시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뿐이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서양인들은 일본 사회를 조금 이상하게 보기는 해도 무시하지는 않으며, 중국인들은 꽤 미워하지만 그렇다고 깔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무시하고 본다. 꼭 알아야 할 지점에서 눈을 그냥 감아버린다. 그래서는 안 된다. 혹여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일본을 무시한다 해도 우리만큼은 일본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일본을 존경한다 해도 우리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다. (중략) 근대 일본을 아는 첫걸음은 메이지유신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중략) 메이지유신이 깔아놓은 레일 위를 근대 일본은 달려왔고, 현재도 그 레일을 크게 벗어났다고 하기 어렵다. 이 책은 근대 일본의 레일을 깐 네 명의 급진개화파에 대한 얘기다. 그들의 이야기가 일본 역사와 친해지는 데, 나아가 일본의 현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길 바란다. (p. 16 ~ 17)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1부에서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고 2~4부에서는 사무라이 1명씩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한다. 역사는 역시 인물이야기로 읽을때 재미가 월등한 것 같다. 소설이 아님에도 소설처럼 읽히는 인물의 이야기들은 드라마틱함이 느껴질때마다 더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라는 4명의 인물이야기를 통해 메이지유신을 전후한 일본사회를 들여다보는 시간들은 재밌기도 했지만 일본역사에서 메이지유신이 가져온 의미와 더불어 지금의 일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흔히 우리는 일본이 옛날에는 우리보다 못했고 가난했는데 근대에 들어와서 서양 문물을 빨리 받아들이는 통에 우리를 앞서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임진왜란 이후에 수립된 도쿠가와 막부 치하에서 일본은 급속히 발전했다. 이때 이미 무시할 수 없는 강국이 되었고 부자나라가 되었다. 문화적으로도 세련된 수준에 이르러 다도, 가부키, 기모노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전통문화는 대개 이때 형성되었다. (p. 22)

도카가와 시대 일본에서는 상업과 화폐경제가 놀랄 정도로 발달했다. 이게 조선과 가장 다른 점이다. 조선도 농업 생산력이 높은 나라였다. (중략) 이게 조선사의 흥미로운 점이다. 왜 조선은 이웃인 청이나 일본과는 달리 상업이 발전하지 않았는가 (p. 23) 조선의 위정자들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빈부격차였다. 한 사회에 엄청난 부가 쌓이고 상품, 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면 그 혜택을 골고루 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빈부격차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하향평준화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억제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빈부격차는 반드시 사회불안을 낳기 때문이다. (p. 24)

역사를 읽는 데 있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왜곡과 편향된 관점이다. 그렇기에 역사를 읽으면서 기분이 좋아질 때는 바로 그런 왜곡과 편향을 깨닫고 새로운 가르침을 얻을 때다. 무시했던 일본은 앞서가고 있었고 답답했던 조선은 (비록 하향평준이 될지라도) 평화와 평등을 고수하려 노력했다. 역사를 다르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은 늘 반갑다. 게다가 이 책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대한 책이지만 일본과 당시 조선의 이런저런 부수적인 이야기들도 자주 나와서 읽는 재미를 더욱 돋워주고 있었다.

경제성장의 혜택을 입지 못한 계층은 정작 지배층인 사무라이였다. 도쿠가와 시대 사무라이들은 주군인 대명에게서 봉록으로 쌀을 받아 생활하는 봉급생활자였다. (p. 26) 물가상승은 임노동자들인 이들에게는 재앙이었다. 이처럼 사회변화에 따라 과실과 손해가 생기게 되면 주로 손해를 보는 층이 사회를 바꾸려 할 것이다. 그런데 사회변혁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 정보, 조직 등 어느 정도의 사회적 자원이 갖춰져야 한다. 빈민, 빈농 보다는 하급 사무라이가 나서게 된 이유다. (p. 27) 19세기 사무라이는 검술만 훈련한 게 아니라 '독서하는 사무라이' 였다. (중략) 유학에 접한 사무라이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전투 대신, 천하대사의 정치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p. 29)

전에 일본역사책을 읽으면서도 절감했었지만 일본은 우리와 정말 너무너무 다르다. 신분제 사회였으나 우리에게 익숙한 신분제와 다르다보니 사회문화도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사무라이 하면 그냥 무사 내지는 용병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막부체제가 안정된 시기의 전쟁없는 평화가 사무라이들에겐 생존의 위협을 가져왔다. 사무라이들은 돌파구를 찾기 위해 책을 들었고 섬나라에 출현한 외국배들을 보며 세계적 변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사무라이들은 사회변혁의 중심세력이 되어갔다.

사무라이들이 변혁운동을 전개해나갈 때 농촌 부르주아들이 부분적으로 그에 가담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주도권은 사무라이층에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 농민들은 변혁 과정에서 관망적인 태도를 취했다. (중략) 상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경제력에 상응하는 정치권력 보유에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중략) 그들은 변혁 과정에서 승산이 있어 보이는 쪽에 줄대기에 바빴다. (p. 44) 메이지유신은 지배층은 사무라이층 내부의 다툼과 그 파장으로 일어난 것이고, 그 속에서 급진개혁파가 주도권을 잡아 이뤄낸 변혁이었다. 이런 메이지유신의 성격은 일본 사회에 보수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중략) 그러니 변혁이 진행되어도 사회질서가 총체적으로 붕괴되는 일 없이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일본 대중은 정치참여에 관심이 덜하다. 정치란 어차피 특정 사람들이 하는 것이란 생각이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다. 또 그만큼 가만히 있어도 지배층이 점진적 개혁을 진행해주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일본의 위기는 이 패턴이 작동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p. 45)

지금 일본이 위기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 여전히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한 국력을 가진 나라를 걱정할 만큼 우리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라서. 여하튼 일본 국민성의 독특함을 설명해주는 부분들이 나올때마다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그랬구나 싶었다. 일본인들은 너무나 오랜 세월을 너무나 같은 곳에서 너무나 같은 신분으로 너무나 같은 일을 하며 너무나 오래오래 살아온 것이 문제라면 문제랄까. 혁명이 없는 나라가 가진 조용함이 나 라면 견디기 힘들 것 같은데...

조선과 일본의 가족제도는 사뭇 다르다. 이렇기 때문에 일본 역사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형제지간, 부자지간에도 성이 다른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중략) 한 사람의 이름이 평생 여러 번 바뀌는 경우도 많다. (중략) 한 사람이 열 개 넘는 이름을 갖는 경우도 있다. (중략) 이런 사정이니 우리가 일본인에게 기분 나쁘다고 '이런 성을 갈 놈'이라고 해봤자 상대는 태연할 것이며 '이 약속을 깨면 내가 성을 갈겠다' 고 한들 믿어주지 않는다. (p. 53, 54)

일본의 신분제는 그나마 유럽식 봉건제와 닮아 있어서 비슷하게 이해되긴 하는데 이름 문화는 그야말로 신기할 따름이다. 유럽에선 같은 이름을 아들 손자 대대로 돌려쓰는 것이 헤깔리더니 일본에선 한 사람이 자꾸 이름을 바꿔대니 이역시 헤깔리는 것이다. 성씨가 곧 가문인 문화에서 일본의 이름문화는 정말 이상하다;;;

여하튼, 이제 4명의 사무라이들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보기 시작한다.

메이지유신의 스승이라 불리는 요시다 쇼인은 그야말로 정열적인 학자였다. 당시 해군이 전무한 상태인 일본사회에 해군이 필요성을 강조하고 몰려두는 제자들을 받기 위해 세운 송하촌숙에서의 학습방법은 회독 會讀 으로 신분도 나이도 상관없이 어디서든 읽고 토론하기를 즐겼다. 저자의 표현대로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었다.(p. 71)' 이런 쇼인의 해외팽창 구상엔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가 있기도 했다.

'조선을 옛날고 마찬가지로 공납하도록 촉구'하자는 말은 고대에서 진구황후가 신라를 정벌했다는 [일본서기]의 전설 같은 얘기에 기초한 것인데 당시에 크게 유행했었다. 쇼인도 물론 그런 유행의 한복판에 있었다. 이런 의식은 학문적으로도 '임나일본부설'을 낳으며 오랫동안 일본인의 조선의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여기까지도 황당무계하고 무모한 발상인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p. 74~75) 당시 일본에서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를 다케시마라고 했다. (p. 76) 울릉도는 그가 꿈꾸는 해외팽창의 발판이었다. (p. 78) 한반도 어딘가에 서양세력이 거점을 만드는 것은 근대 일본이 초지일관 반대해왔던 일이었는데, 그 원형을 여기서 볼 수 있다. (p. 80) 부국강병 노선의 출발이다. 나라는 위기에 빠졌고 이 위기를 구할 것은 강한 군대, 특히 해군밖에 없었다. 강군을 육성하려면 경제력이 있어야 하고 그건 무역이 아니면 안된다. (p. 82) 고메이 천황은 완강하게 칙허를 거부했다. 양이론자들에게는 이 이상의 명분이 없었다. 조약 체결에는 내심 찬성하지만 막부는 비판하고 싶었던 정치세력들은 이를 구실로 일제히 막부에 포문을 열었다. 천황의 허가 없이 조약을 체결했으니 도로 물리고 다시하자는 것이었다. (p. 85)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해지는 압력때문에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반대여론이 들끓자 천황의 입을 빌어 무마시키려 했으나 왠걸 천황이 반대의견을 냈다. 그것은 막부반대세력에게 정당한 구실을 준 셈이 되어버렸다.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양이세력에게도 막부체제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개혁세력에게도 천황의 칙허거부는 유용한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저러나 조선을 자기들의 발판처럼 생각했던 이들이 세력을 키워감에 따라 조선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일본의 밥이 되어 버렸다. 그러한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인식은 지금까지도 유효해 보인다.

옥중에서도 활발한 학문활동을 하던 요시다 쇼인은 초망굴기론을 세워 신분에 관계없이 뜻있는 사람 누구나 일어서서 사회를 바꾸기를 주장한다. 그리고 '몸은 비록 무사시 벌판에 썩어가더라도 남겨놓은 것은 야마토 다마시이(일본혼)' 라는 말을 남기고 처형된다. 그가 남긴 '일본혼'은 그의 제자세대인 사무라이들에 의해서 메이지유신이 되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일본사회에 깃들어 있는 듯 하다.

메이지유신의 아이콘은 사카모토 료마 라고 한다. 비록 메이지유신의 성공을 눈으로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것을 가능케 한 주역이 바로 사카모토 료마 라고 한다. 메이지유신은 사카모토 료마가 이끌어낸 '대정봉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역사상 유명인물이란 것은 특정 시기에, 특정 세력에 의해, 특정한 이유로 현창된 것이 쌓여 우리 앞에 제시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자체가 '역사적 산물' 인 것이다. 그러니 그 평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또 변할 것이다. (p. 105) 그러니 어떤 시대에 어떤 인물들이 교과서나 위인전에 실리고 동상과 지폐초상으로 등장하는가는 그 사회의 사상과 지향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지점이다. 그분들이 훌륭한 건 분명하지만, 그 많고 많은 위인들 중 하필 그분들인 것은 우리 사회의 열망이 그들을 불러낸 까닭이다. (p. 106)

사카모토 료마 라는 인물이 일본 대중에게 유명해진 계기는 일본의 국민작가가 쓴 소설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 때문이라고 한다. 지나간 과거속에 있던 인물이 급부상하게 된 배경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라는 저자의 말이 긴 여운을 남겼다. 위인은 어떻게 위인이 되는가...

도쿠가와 시대 사람들에게 '국가'는 일본 저네가 아니라 자기 번 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국가의 틀을 넘어, 천하로 인식되던 일본을 '새로운, 유일한 국가'로 창출해가는 것, 그리고 번주에 대한 충성을 천황에 대한 충성(존왕주의)로 전환해가는 것, 이것이 메이지유신의 과정이었다. (p. 111)

수백년간 지방 각각의 번들이 그 속민들에겐 국가였다. 수백개의 작은 국가들이 모인 사회가 당시의 일본섬이었다. 그런 수백의 국가들을 통일하여 하나의 일본이 되었으니 세계를 그처럼 하나로 통일하는 꿈을 꾸게 된것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을 떠난 사무라이를 낭인 이라 한다. 재수생이 일본말로 낭인이다. 로진,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것, 일본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상태다. 어딘가 하나에는 소속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맘이 놓인다. 이게 예나 지금이나 보통 일본 사람들의 정서다. 당시 번을 이탈했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거의 국적이탈에 해당하는 것이다. (p. 123)

외세와 결탁했다는 꼬리표는 그것을 능가하는 정치적 손실을 가져오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권력투쟁이 격렬해져도 외세와 결탁하는 것은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정치 엘레트 간에 암묵적으로 진행되어 있었다. (p. 132)

집단에의 소속감, 그러나 외세와 결탁은 안됨, 이러한 특성이 오랑캐를 쳐부수자는 양이론을 메이지유신으로 변화시켰다. 자국의 문제는 자국내에서 알아서 하고자 한다는 기본적 합의는 있었다는 점에서 지금의 우리와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씁슬하게도... 이렇게 소속감이 생명줄처렴 여겨지던 사회에서 사카모토 료마는 자신의 번을 떠났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중재와 협상을 통해 내분을 잠재우고 개혁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렇게 무력충돌 없이 천황 중심의 신정부 탄생의 기반을 닦았다.

앞에서도 말한 대로 일본은 조선이나 중국보다 훨씬 신분제가 강한 사회였다. 우리도 조선시대 때 신분제가 있기는 했지만 사실 양반과 상민과의 경계가 법제적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는 않았다. (중략) 조선의 양반은 법제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그 지역 사람들이 양반이라고 취급을 해주느냐, 안 해주느냐가 중요했다. 그러니 과거 합격과 중앙 관직 획득에 매달리게 되고 그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일본의 신분은 법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 신분에 따라 거주지역도 구분되었다. 그러니 사무라이는 사무라이대로, 상인은 상인대로, 농민은 농민대로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분은 대대로 물려주는 것이다. (중략) 도쿠가와 일본 사회는 가업이 기초가 되는 사회였다. 반면 조선은 유동성이 강한 사회였기 때문에 가업에 대한 생각이 약했다. (p. 138, 139) 심지어는 정치까지도 그렇다. 그러니 세습의원이 저토록 많은 것이다. (p. 141)

신분제라고 하면 양반과 노비의 구분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는 유동적이었다. 능력에 따라 신분상승의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신분제도는 그렇지 않았다. 태생적으로 정해졌다는 점에서 인도의 카스트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신분제를 위아래 상하계층구분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구분으로도 이렇게 오랫동안 존속하면 일종의 숙명처럼 받아들이게 되는건가 싶었다. 그러니 혁명이 일어날 수 없는 사회였다. 그러니 자신의 업이 아닌 다른 분야에 무관심 한 것이 자연스러웠다. 일본의 신분제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릴 필요가 없는 신분제였다.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세계에만 살고 있었다. 지도층이 어떤 야심을 품느냐에 따라 세계사에 남긴 족적이 달라졌을뿐.

'라스트 사무라이' 라고 일컬어지는 사이고 다카모리 는 메이지유신 시대의 어쩔 수 없는 희생양을 스스로 선택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성공한 지배층보다 사그라진 최후의 사무라이를 즐겨 추억하는 지도 모르겠다. 일본 역사인물 중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사람중 한명이라는 사이고 다카모리는 '최후의 사무라이' 이자 '근대 일본의 로망'으로 불린다고 한다.

라스트 사무라이, 사이고는 사후 우상화되었다. (p. 177) 거기에는 근대 일본인의 아이덴티티 문제가 관련되어 있다. 메이지유신은 엄청난 서구화 변혁이었다. 나라의 생존으르 위해서 열심히 서구화를 추구했지만 그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발생하는 민족적 상실감을 사이고를 통해서 만회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이고는 서양과 근대를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일본과 전통을 함께 껴안으려다 상징이 되었다. 그 상징을 통해 근대 일본인들은 허기를 채우려고 했다. (p. 178)

앞서 사카모토 료마가 이끌어낸 대정봉환(막부의 마지막 대장군이 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주겠다는 결정) 만으로 막부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왕정복고 쿠데타에서 사이고는 선두에 섰다. 뛰어난 전장이었으나 막부세력과의 다툼에서 무의미한 백성들의 죽음은 원치 않았다. 사이고는 내전없이 평화협상으로 막부세력을 물리쳤다. 하지만 개혁 정책에 있어서 모두의 입장이 동일할 수는 없었다. 사무라이 계층은 소외되기 시작했고 사이고는 그런 사무라이들에게 믿을만한 마지막 리더였다.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터트리기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을 주장했다. 사이고는 사무라이들의 허기를 정한론으로 채웠던 것이다. 조선을 침략하는 것으로 무사들의 불만을 폭발시켜 사태전환을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국력은 전쟁을 치룰만한 상태가 아니라는 반론때문에 결국 계획을 이루진 못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조선침략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정한론은 그냥 스쳐지나갈 방법은 아니었나 보다. 일본에서의 명분세우기는 항상 조선침략이라는 정한론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제일 편한 방법인 것인가... 어쨌든 사무라이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사이고는 그들의 생각과 방법에 동의하진 않았지만 그들과 함께 정부에 맞서 싸우다 사무라이들과 함께 죽었다. 그야말로 정말 최후의 사무라이 였던 것이다.

근대 일본의 철혈재상 이라 할 수 있는 오쿠보 도시미치 는 지금의 일본을 만든 사람이지만 인기는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억울하다. 천신만고 끝에 근대 일본의 초석을 놓은 건 그였지만, 살아생전에는 '사무라이의 배신자'로, 죽어서는 '냉혈한 독재자'로 비난받았기 때문이다. 역사드라마나 역사소설에서도 그는 거의 주인공이 돼본 적이 없다. 일을 많이 한 정치가는 인정은 받을지언정 사랑받지는 못하는 것인가. 이 책에서는 '로망'은 없었지만 근대 일본의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은 그의 역사적 위치를 정당하게 조명했다. (p. 234)

일본이 세계대전의 주축이 됐을 만큼 급속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걸출한 인물들이 있었던 것이다. 4명의 사무라이 한명한명 그 노력과 열정이 위인전에 기록될만한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일을 많이 한만큼 사랑받지 못한 오쿠도 도시미치 의 일화들은 앞선 3명의 사무라이들과 결이 다른 위업을 알려주었다.

메이지유신 당시에는 '일신'과 '유신'이라는 말이 경쟁하다 유신으로 정착되었다. 700년간 계속된 사무라이 지배를 무너뜨리고 신분제를 혁파하고 서양화를 추구했으니 혁명이라고도 할 만한데, 일본인들은 지금까지도 '일본혁명' 혹은 '메이지혁명' 이라 하지 않고 유신 이라고만 한다. 왜 그럴까? 혁명은 원래 '역성혁명'의 준말로 왕조를 교체한다는 뜻이다. (중략) 그런데 일본은 어떤가.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6세기 이후로는 한 번도 왕조가 바뀐 적이 없다. (p. 248) 메이지 유신 역시 막부는 쓰러뜨렸지만 무너진 것은 도쿠가와씨지 천황가문은 아니다. 무너지기는 커녕 유신으로 천황에게 대권이 다시 돌아왔다. 이러니 혁명이란 말을 쓸 수가 없다. (중략) 여담이지만 천황에겐 성이 없다. (중략) 이름만 있다. 그러니 사실 역성할래야 할 수도 없다. (p. 249)

혁명의 의미부여가 불가능한 혁명이 메이지유신이다. 일본인들은 이름을 자주 바꾼다는 것도 이상했는데 그래서 가족간에도 성씨가 다른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것도 희한했는데 천황은 아예 성이 없고 이름만 있다니... 인간이 아닌 존재로서 인간의 성씨를 갖지 않는 천황이라는 개념이 아무리 일본인들이 믿는 뭔가 의미가 있다해도 나는 그저 성씨도 없이 이천년세월을 유지한 왕가가 이상할 따름이었다;;;

여하튼, 왕정복고 이후 메이지유신 정부는 혼란스러웠다. 번과 번주들을 개혁하지 않는한 유신은 의미가 없었다. 그 모든 개혁 체계를 잡은 것이 오쿠보 도시미치였다. 외국에 나가 직접 보고들으며 배운 것들을 통해 일본의 현상황을 직시했던 오쿠보 도시미치는 일본을 유럽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의 일본을 위해 악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장봉기 세력은 그렇다 쳐도 일본의 초기 민주주의운동을 주창한 세력이 그 뿌리를 정한론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후 메이지 정치세력 중 중요한 한 부분인 민권파는 대내적으로 인민의 자유와 정치참여를 촉구했지만, 대외적으로는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침략적인 태도를 강하게 드러냈다. 오히려 메이지 정부가 이들의 강경한 주장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메이지 정부를 비롯한 국권파뿐만 아니라 이들도 공격적인 내셔널리즘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원래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부국강병을 좋게 보지 않는 편이었다. 부국하려면 세금을 많이 거둬야 하니 결국 백성을 괴롭히게 되고, 강병은 전쟁위기를 고조시키니 이 또한 민생에 위협적인 것이었다. 조선의 위정척사파들은 서양과 일본의 부국강병 정책에 끝까지 비판의 날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일찌감치 부국강병을 받아들였다. (p. 266~ 267)

오쿠보 도시미치가 서양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직접 보고 배운 것을 토대로 비스마르크 주도하의 독일을 모델로 삼은 것이 일본의 메이지유신 이후 정부체제가 제국주의로 갔던 이유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오쿠보 도시미치 가 살해당한 이후에도 정부는 오쿠보가 구상했던 대로 정책을 펼쳐나갔다. 그 중심에 그를 추종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고 한다. 간간이 등장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보면서 일제치하에서의 이토 히로부미와 또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물론, 그보다 부국강병이 결코 좋은 개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더 신선했다.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프랑스대혁명에서 찾는다. 미국인들은 국가의 나아갈 방향을 물을 때 독립혁명의 아버지들을 소환한다. 메이지유신은 일본에서 같은 의미를 갖는다. 일본인들은 근현대 일본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 메이지유신을 불러낸다. 그 방식은 당연히 일정하지 않다. (중략) 그러니 우리가 현대 일본의 유래와 현재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을 깊게 이해하려면 메이지유신에 대한 식견을 갖고 있어야 한다. 또 메이지유신은 그 자체로도 혁명사의 흥미로운 사례다. (중략) 한편으로 메이지유신은 일본의 한계와 약점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중략) 메이지유신을 존왕양이와 부국강병으로만 회상하는 것은 위험하다. 메이지유신의 또 하나의 목표였던 문명개화는,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에 관한 한, 아직도 미완성이다. (중략) 일본사회의 이해는 메이지유신부터다. (p. 286 ~288)

저자는 메이지유신의 다른 한 면이 아직 미완성이라고 하지만 그 미완성 부분은 영원히 그렇게 미완성일것 같다. 일본인들은 메이지유신을 존왕양이와 부국강병으로만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까? 그들이 미완성임을 느끼지 못하는데 외부에서 미완성이라고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연장선에서 저자가 한국의 빠른 발전으로 지금에서야 일본과 제대로 경쟁이 가능해진 시대가 됐다고 한 것에 대해서도 나는 의구심이 생긴다. 일본은 여전히 한국을 아래로 보는데 한국만 일본을 동등한 경쟁자로 생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여하튼, 일본사회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일본섬이 어디 멀리로 떠내려가지 않는한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앞으로도 계속 적군과 아군을 오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일본사회의 이해는 메이지유신부터라는 것에 어느정도 동의하게 됐다. 일본의 독특함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그 바탕이 된 일본의 메이지유신 전후를 알고 싶다면 이 책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런 생각 많은 시민들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는 더 건강해질 것이며 더 튼튼해질 거라는 점이다. 이 책이 그런 분들의 고민과 생각에 하나의 '거리'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p. 294) -나가는 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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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대혼돈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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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사회주의, 포퓰리즘, 인종차별, 문화권력, 디지털 정치, 기후위기…

전 지구적 이슈에 대한 지젝의 재기발랄하면서도 핵심을 꿰뚫는 통찰

 

 

슬라보예 지젝

지은이 소개글에 따르면 저자는 현대철학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자,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꼽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슬로베니아 출생으로 파리와 런던, 뉴욕 그리고 한국의 경희대학교를 오가며 종횡무진 활약한 저자는 급진적 정치이론, 정신분석학, 현대철학에서의 독창적인 통찰로 독보적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저자가 여러 언론 매체에 기고한 짧은 글들을 묶은 이 책은 그러한 지젝의 통찰을 살짝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사실 책의 제목이 된 '천하대혼돈'도 이런 바탕에서 나왔다. 이 표현은 세계를 끊임없는 모순의 충돌로 이해한 마오쩌둥의 사상을 응집한 것이기도 하다. 질서와 안정은 정치의 소멸을, 대혼돈은 정치의 출현을 의미한다. (중략) 이 책에서 지젝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의 귀환이자 또한 정치적 주체의 호명이다. (중략) 그 정치의 도래에서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용기이다. 제작의 말을 받아서 우리가 행동을 결정할 차례이다. (p. 7) -추천의 글 中-

하나의 주제에 대해 깊이있게 탐구한 책이 아닌 이런저런 글을 모은 책은 대부분 맥락을 파악하기가 좀 어려운 경우가 많다. 더구나 지젝이 사용하는 용어들은 철학을 좀 공부한 사람들만 알법한 전문개념들도 사용하고 있어서 더 현학적으로 다가오는 문장들로 인해 이해하는데 많이 버거웠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들을 굳이 다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고 대충 넘기면서 핵심만 파악해보면 지젝의 통찰은 제법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다.

자유주의적 서구가 다른 세계에 기준을 부과하는 일은 더는 허용되지 않는다. 모든 삶의 방식은 동등한 것으로 취급될 것이다. (p. 17) 이러한 새로운 '관용'을 뒷받침하는 슬픈 진실은 오늘날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더는 해방된 인류라는 긍정적 전망을 이데올로기적 꿈의 형태로도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중략) 포퓰리즘은 바로 이 실패의 증상, 그 헌팅턴식 질환이다. (p. 18)

과거에는 우월한 나라가 있고 그렇지 못한 나라가 있을때 우월한 나라가 열등한 나라를 도와주는 관용을 통해 세계적 평등을 추구했다면 지금은 저마다 모두 우월한 나라라고 자칭하며 동등하게 취급하는 대신에 서로에 대한 관용은 오히려 없어진 셈으로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인류의 해방에 대해 왜곡된 모습으로 자리잡아 버렸다. 세계적 평등을 추구하는 보편주의가 사라지고 저마다 자국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게 된 지금의 세계는 포퓰리즘이 득세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것을 저자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우리는 지금 정말로 난관에 처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모두 망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든 치명적 위험이 있다. 여기서 누가 결단을 내릴 것인가? 과연 누구에게 결단을 내릴 자격이 있나? 이 시점에는 직접적 이해득실을 따지기보다 거시적 안목에서 과학척 추론을 근거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우리가 이미 생태적 교란의 효과를 느끼고 체험하고 있다해도 우리의 일상생활은 아직 실제로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구온난화 탓으로 인간은 그 모든 정신적이고 실제적인 행위의 보편성에도 기본적 충위에서는 그저 지구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생물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략) 지구온난화의 교훈은 인류의 자유가 지구 생명체의 안정적인 자연적 변수를 바탕으로 해서만 가능했다는 점이다. (p. 21)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어도 우선순위를 똑바로 세우고, 전쟁으로 차지하려는 바로 그 지구가 위험에 처해 있는 참에 지정학적 전쟁 놀음을 벌이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인정하는 일이다. 국가 간 경쟁이라는 논리가 지극히 위험한 발상인 이유는 인류가 환경을 대하는 새로운 관계 양식의 변화를 정립해야 할 시급한 필요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p. 23)

새로운 세계질서의 필요성은 정치적 혼란뿐만 아니라 전지구적 생명의 위협때문에라도 긴급히 필요하게 된 시점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법은 어느 한나라 또는 몇몇의 선두나라의 변화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정말 전지구적 협력이 필요하다. 자국우선주의가 심화될때 지구적 문제는 더욱 급속하게 심각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유럽은 미국-먼저, 러시아-먼저, 중국-먼저 라는 구호 사이에서 지배력을 경쟁하는 세계와 맞지 않다. 군대를 만들지 않으면 유럽은 이 거대 삼자 세력이 벌이는 지배 경쟁의 놀이터가 될 터이고,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p. 37) 초국가적 통일체인 유럽으로서, 작금의 도전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국민국가라는 제약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는 유럽이다. (중략)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적어도 유럽에서는 '주관적'사회민주주의에 맞선 '객관적' 사회민주주의다. (p. 40)

새로운 세계질서 구축방법의 하나로 저자는 유럽연대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고 있다. 유럽통합군대라는 실질적 방어조직과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념적 대안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 새로운 세계질서를 조금은 혁명적으로 꿈꾸고 있는 것도 같다.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투쟁과 이슬람혐오에 대항한 싸움은 동일한 투쟁의 두 측면으로 보아야만 한다. 오늘날에는 반유대주의가 좌파적이라는 주장이 종종 나온다. 이러한 몰이해에 반대하여 우리는 오늘날의 반유대주의가 포퓰리즘이라고 강조해야만 한다. 포퓰리즘은 언제나 국민의 화합을 위협하는 외부의 적을 필요로 한다. 그게 유대인이든 이주민이든 혹은 둘이 합쳐진 것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진정한 좌파는 결코 반유대주의적이지 않다. (p. 58)

오늘날 궁극의 '적'은 구체적인 사회적 행위자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시스템 그 자체, 행위자로 쉽사리 귀속할 수 없는 시스템의 어떤 작동 양상이다. (p. 86) 개인의 탐욕에 맞춰 점증하는 불평등을 도덕주의적 측면에서 접근하기보다 더는 '탐욕적'행위를 허용하거난 심지어 부추기는 일이 없게 시스템을 바꾸는 일이 우리의 임무이다. (p. 87)

오늘날 근본적 변화를 상상하기 힘든데도 왜 근본적 변화를 고집하는가? 왜냐하면 우리와 전 지구적 곤경이 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급진적 변화만이 생태적 파국과 유전공학의 위험 및 우리 삶의 디지털 통제 같은 전망에 대처하게 해줄 수 있다. 이 과제는 불가능하지만 그만큼 절실하다. (p. 97)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보스니아 등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포퓰리즘 적 정치사건들에 대해 저자는 쓴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건들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쉽사리 휩쓸리지 말고 그 사건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아채야 한다. 하지만 때론 그 주체가 불분명하기에 세계정세는 더욱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시스템적으로 교묘하게 이용되는 행위들이 더 교묘해지기전에 급진적 변화가 꼭 필요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진리로 회귀하는 유일한 길은 보편적 해방에 참여하는 입장으로부터 진리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역설은 보편적 진리와 당파성이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사회적 삶에서 보편적 진리는 해방을 향한 투쟁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질 수 있고, '객관적' 무관심의 태도를 견지하려는 사람에게는 닫혀 있다. (p. 106)

그러한 범죄와 싸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것들의 끔찍함을 그대로 드러내야 하고, 그것으로부터 충격을 받을 필요가 있다. <동물농장>의 서문에 조지 오웰은 자유가 어떤 의미를 지닌다면 이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말할 권리"를 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언론 미디어가 검열되고 규제될 때 우리는 바로 이 자유를 빼앗긴다. (p. 114)

트로츠키는 국가의 핵심이 정치적이고 행정적인 조직이 아니라 기술적 서비스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트로츠키가 우편, 전기, 철도 등을 지배하는 일이 권력의 혁명적 쟁취의 핵심 계기라고 보았던 것과 유사하게 국가와 자본의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디지털 망체계의 '점령'이 오늘날 다른 무엇보다도 결정적이지 않을까? (p. 138) 권력을 가진 자들이야말로 저항운동을 고립시키고 봉쇄하기 위해 디지털 망체계를 선별적으로 폐쇄하는 일에 스스럼이 없을 사람들이라는 것. 대중의 불만이 대규모로 폭발할 때 첫 번째 행동은 언제나 인터넷과 휴대폰의 차단이 될 것이다. (p. 139)

참여해야 바뀐다. 무관심은 곧 자발적 복종이 된다. 알아가는 과정에선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할 이야기들이 보고 싶지 않아도 보아야 할 장면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들에 대해 왜곡과 검열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과연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정치는 디지털세계에서 더욱 난해해지고 있다. 거짓뉴스가 판을 치게 된 세상에서 시끄러워도 너무 시끄러워진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자유를 추구해야 할까?

오늘날 삶이 어떻게 규제되는지 이해하고 이 규제가 어떻게 자유로 체험되는지 알려면 인류의 공유재를 통제하는 민간기업과 비밀 국가기관의 음험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는 중국이 아니라 그와 같은 규제를 받아들이는 스스로에 충격을 받아야 한다. 그 와중에 우리는 스스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으며 언론이 우리의 목표를 실현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믿고 있다. 반면 중국 사람들은 자신이 규제받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 새로운 인지적-군사적 복합체의 가장 큰 업적은 직접적이고 공공연한 억압이 더는 필요 없다는 점이다. 개인은 스스로 자기 삶의 자유롭고 자율적인 행위자라고 지속적으로 느낄 때 훨씬 더 잘 통제되며 바라던 방향에 '맞춰 들어'간다. 이러한 도착적 뒤틀림이 더 나아가면, 이제 통제와 검열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협적으로 가로막을 트라우마적 경험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방식의 하나로 정당화될 수 있다. (p. 184) 우리는 최근에 발흥하고 있는 새로운 학문인 '행복학'에 의문을 던져야 한다. 인생의 목표가 곧바로 행복으로 정의되는 때이자 정신화된 향락주의의 시대에 어째서 불안과 우울증은 폭발하고 있는 것인가? (p. 185)

우리는 통제받고 조종된다. 뿐만 아니라 '행복한' 사람들은 심지어 속으로는 그리고 위선적이게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조종받기를 요구한다. 진실과 행복은 함께 가지 않는다. 진실은 아프고, 불안을 가져오며, 우리 일상생활에 매끈한 흐름을 방해한다. 현실은 방향타 없는 공간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가르침이 바로 여기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직면해야 할 궁극적 선택은 둘 중 하나다. 행복하게 조종받길 원하는가, 아니면 진정한 창조성의 위험, 이 위험이 불러일으키는 지속적 불안에 자신을 과감히 드러낼 것인가? (p. 192)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느끼며 살고 있을때 그런 현실에 의문을 던지기는 쉽지 않다. 저자의 말처럼 '진실과 행복은 함께 가지 않'기 때문이다. 안정된 불행과 행복한 불안 중 선택해야 한다면 과연 '행복한 불안'을 선택하는 이들이 더 많을까?

현재까지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었따. 물론 때때로 노골적인 독재로 기운 적도 있었지만, 일이십 년이 지난 후에는 민주주의가 다시 세워졌다. 그러나 이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연결이 끊어졌다. 그래서 우리 미래의 모델을 중국식 자본주의적 사회주의로 삼게 될 가능성이 꽤 있다. 이는 우리가 꿈꾸어왔던 사회주의는 분명 아닐 것이다. (p. 220)

오늘날 중국에서 가장 위험한 일은 공식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믿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중략) 중국 공산당이 마르크스주의적 이념을 실질적으로 충실하게 따르지 못한다는 유감을 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이데올로기 자체에, 적어도 그 전통적 형태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p. 224)

트럼프는 기존 체제를 흔드는 불안정한 멍청이다. 그러나 자체로 그는 하나의 증상, 즉 기득권 체제 자체의 문제가 불거진 효과이다. 진짜 괴물은 트럼프의 행동으로 인해 충격을 받은 바로 그 기득권 체제이다. 트럼프의 행동에 대한 당혹한 반응은 그가 미국의 정치적 기성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손상하고 불안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p. 228)

정치적 올바름을 '문화적 마르크스주이'라고 지칭하는 일이 옳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통념과는 반대로, 정치적 올바름은 그 모든 사이비 급진성에도 마르크스주의 개념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자유주의의 최후 방어기제로서, '주요 모순'인 계급 투쟁을 혼탁하게 만들거나 추방해버린다. (p. 239)

저자는 전방위적으로 예민하게 날을 세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혹은 기득권 뿐만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와 좌파세력에 대해서도 무차별적 비판을 거듭한다.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고 잘못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그런 잘못된 부분들을 고치려는 사람들은 찾기 쉽지 않다. 있다해도 소수정예로 해결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천하대혼란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찌해야 할까?

우리는 지금 우리의 지배자(기술 관료들)를 신경질적으로 자극하는 와중에 있다. 이 자극은 한 걸음 더 나아간 조치로 이어져야만 한다. 시스템에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말고 시스템 자체의 '불가능한'변화를 요구하는 일, 그런 변화가 '불가능해'보이고 현 시스템의 좌표 내에서 생각하기 어렵지만, 이 변화는 분명 우리가 처한 생태주의적이고 사회적인 곤경이 요구하는 것이며 유일하게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공한다. (p. 246)

저자의 급진적 보편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세계시민 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민으로서 사회에 대한 관심과 책무를 게을리하지 않고 그 역할을 하나의 국가에 제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 모두가 이런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시스템적으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 그런 세계시민.

사실 세계시민 이란 단어는 최근 읽었던 에픽테토스의 철학책에서 읽었던 건데 스토아 철학자의 이 단어가 현대의 급진적 사상가가 촉구하는 변화에 대한 핵심용어로 이렇게 적합하게 될 줄이야.

저자는 '생존이 걸린 항해에 우리는 이제 막 나섰다'며 자신의 급진적 날선 비판들이 생존과 직결된 문제임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이 시대에 필요한 지적이었고 귀담아들을만한 통찰이었으나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들로 인해 많은 부분을 덮고 지나칠 수밖에 없어서 개인적으로 많은 아쉬움이 남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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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선 - 하드보일드 무비랜드
김시선 지음, 이동명 그림 / 자음과모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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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 없는 것이 반전인 김시선의 영화 생활

취미, 특기, 직업 모두가 영화 보기인 프로 영화 덕후 김시선의

영화와 함께하는 웃픈 일상

 

 

나는 요즘시대 분위기에 맞지 않게 여전히 영상매체와 그닥 친하지 않은 사람이다. 빠른 소통의 도구인 SNS도 하지 않는다.

나를 옛날사람이라 칭해도 어쩔 수 없지만 영상이라면 영화나 TV가 다일뿐 그외의 정보매체로서 나는 여전히 눈으로 보는 매체라면 인쇄된 것이 좋고 소통을 한다면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다. 아니 내겐 거의 유일한 방식이다.

그런 내가 영화 유투버인 김시선을 알리 없다. '김시선의 영화 생활' 이라는 부제에서 내 눈길이 갔던 것은 '영화' 라는 단어였는데 알고보니 이 책은 '생활'에 방점이 찍힌 책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좋았다. 영화를 사랑하는 그 진정성이 차고넘쳐 자연스럽게 읽는이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저자의 영상한번 본적 없는 내가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되다니... 역시 책이 좋다. ㅎㅎ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느낌은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준다는 것. 사랑하는 상대가 생기면 근거 없는 용기가 생긴다. 그 용기와 믿음은 다음 행동의 근거가 된다. (p. 11)

저자는 영화유투버 1세대 라고 한다. 사실 1세대 였기에 이 정도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성공이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유투버들의 세상은 그야말로 전쟁터가 아닐까 싶다. 유투브를 거의 안 보는 내가 이렇게 느낄 정도면... 무엇이든 1세대는 어쩌면 행운의 세대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 성공이 가능했다. 예를들어 인터넷세상의 1세대라 할수있는 PC통신 1세대들은 지금 게임업계의 리더에 포진해있다. 어떤 드라마에도 나오지 않았던가, 아이돌 1세대를 좋아하던 팬덤문화의 1세대는 그 열정으로 본인의 재능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면 뭐가 되든 되는 때가 있었다. 불과 몇십년 사이에... 지금은? 어느 분야에서든 그런 사람이 너무 많다...

시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느낌을 운율이 있는 언어뢰 압축하여 표현한 글이라는데, 내 생각에 그걸 영상으로 옮길 수 있는 감독은 오직 아바스 키아로스타미뿐이다. (p. 16)

영화 유투버의 책이라서 다양한 영화들에 대해 많이 알게 되는 책일줄 알았다. 보고싶은 영화들을 잔뜩 찾아낼 수 있을 것을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영화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저자의 생활을 담아낸 책이다. 생활속에 녹아들어 있는 장면에서 연결되는 영화들이 나오긴 하지만 영화 자체에 집중하는 글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영화에 관련된 다양한 활동들을 읽으면서 영화를 보고 엔딩크레딧이 끝나기전에 일어서버렸던 (엔딩크레딧에 올려진 이름들을 미처 다 읽지 않았던) 미안함을 조금 덜어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수천편의 영화를 본 저자가 인생영화로 꼽은 이란 감독의 <체리향기(1997)>라는 영화가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이내 보고싶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인생영화라는 것은 다분히 그 누군가의 굉장히 개인적인 사연이 엮인 의미가 부여된 영화다. 따라서 저자의 인생영화가 내 인생영화가 될 수는 없다. 큰상을 받고 엄청난 가치부여를 해가며 인생영화가 될법한 영화를 소개하는 글들을 읽고 그런 글들을 따라서 영화를 보고자 하는 것보다 저자의 솔직담백한 영화이야기가 주는 깨달음이 나만의 영화를 찾고 싶은 나만의 영화에 대한 애정을 움트게 했다. 그 어떤 영화소개글보다 더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까 싶었다.

총551분 동안 이어지는 변화를 하나하나 글로 적는 건 무의미하다. 그저 태어나 살다가 죽어가는 한 노인의 삶을 보듯 영화를 봐야 한다. 앞서 말했듯 러닝타임이 긴 영화들은 기억하는 것보다 느끼는 게 중요하다. 이 영화를 보고 내가 느낀 것은 '한때는 물건을 가득 실은 열차가 지나간 철로엔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구나. 우리 인생사도 그럴까?' 였다. (p. 45)

<철서구>(2003)이란 영화의 러닝타임은 총551분이라고 한다. 이 영화가 가장 긴 영화냐 하면 그렇지 않다. 773분짜리 영화도 있었고 어쩌면 그보다 더 긴 영화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긴 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그렇게 긴 영화일수록 스토리보다 느낌이 남는다는 저자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왠지 알것만 같았다. 저자는 긴영화의 특징을 표현하기 위해 그런 변화를 하나하나 글로 적는 건 무의미하다고 했지만 그런 변화를 하나하나 적은 글을 읽는 것도 영화못지 않은 섬세한 느낌을 전달해준다. 저자는 영화를 통해 그런 느낌을 받겠지만 나는 책을 통해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 더 좋다. 오히려 영상이 뚜렷이 보여주는 것보다 글로 상상해내는 장면들이 더 그런 긴 호흡을 느낌적인 느낌을 전달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리 힘들고 귀찮아도 써야만 한다. 한 문장이라도 써놔야만 매년 700편씩 쌓이는 영화를 몇 년이 지나도 기억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많은 영화를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나에게는 너무나 큰 숙제다. (p. 54)

저자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방법은 '에어테이블'이란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영상매체가 정보전달의 주류가 될지라도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글로 써야 한다. 오히려 영상매체의 전달방법이 변해갈때 '쓰여지는 글' 이라는 수단은 더 오랫동안 지속될 지도 모른다. 저자의 영화에 대한 애정을 읽으며 나의 책에 대한 애정을 자꾸 견주게 되곤 했다. 나는 역시 책이었다.

'영화 비평을 하는 최고의 방법은 인터뷰'란 생각이 없었다면, 이놈의 인터뷰는 진즉에 그만뒀을 것이다. 말은 이렇게 해도 다음에 누구를 인터뷰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설렌다. (p. 85)

온간 해석들이 넘쳐날 수 있는 영화에 대해서 결국 가장 잘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그 사람의 생각을 직접 듣는 방법이 인터뷰다. 감독의 생각이 정답은 아니듯이 관람객의 생각이 오답은 아니다. 그렇게 표현해도 저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원래의도를 안다는 것은 확실히 의미가 있다. 인터뷰는 결국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대면방식이다. 아무리 빠른 소통방식이 등장해도 대면과 대화가 주는 가치는 여전하다.

좋아하는 일을 해도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분명히 열심히 하고 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성과도 없을 때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나?'자책하기도 하고, 어쩌면 여기서 그만하는 게 나와 가족에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내가 믿고 가는 길에 대한 의심이 솟는 그 순간이 가장 힘들다. (p. 105)

그럴때, 그런 힘듦이 찾아왔을 때 다시 힘을 준 것도 역시 사람이었다. 자신처럼 영화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갖고 있는 지인을 보며 초심을 되새기곤 했다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나또한 그런 관계들을 떠올려본다. 진솔한 에세이는 이렇게 자꾸 나의 에세이를 속으로 쓰게 만드는 것 같다.

"<행복한 라짜로>가 후일 비평가 사이에 걸작이 될 수 있는 영화라면, <교실 안의 야크>는 누군가의 인생 영화가 될 수 있는 영화에요" (p. 138)

저자의 에세이 속에는 영화를 사랑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중 영화수입사업을 하시는 분의 이야기가 마음을 짠하게 했다. 영화를 보고 즐긴다는 것은 감상적으로 생각하면서 영화산업이라는 것은 그저 사업적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영화에 대한 다양한 진심들을 읽으면서 애정을 갖고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곤 했다. 여하튼, 박대표 아저씨 화이팅!

요즘엔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이 오간다. 그러나 영화는 빛과 어둠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빛은 너무 아름답지만, 어둠이 없다면 그 빛을 아무도 볼 수 없다. 망작이 있어야 걸작도 존재할 수 있다. 망작영화제를 통해 '걸작'이든 '망작'이든 사람들이 모든 영화를 사랑하고 응원했으면 좋겠다. (p. 146)

날마다 운이 좋으면 사실 그렇게 일상이 된 행운은 더이상 행운이 아니다. 어쩌다 한번 찾아왔을 때 행운의 가치는 빛나기 마련이다. 영화가 빛과 어둠의 산물이라는 것에 대해 정말 그렇구나 싶었다. 깜깜한 상영관에서 광고조차 끝나고 모든 불이 꺼지는 그 순간이 가장 설렌다. 곧 다가올 환하게 빛날 영화가 가장 기대되는 순간이다. 망작의 필요성도 공감 ㅎㅎ

우린 부모님의 바람에 따라 '주인공'으로 자란다. 친구들은 나를 중심으로 지나가고, 학교는 나를 중심으로 존재하며, 부모님은 내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산다. 그렇게 평생을 주인공으로 살고 싶지만, 이른바 '인생의 장애물'이라 불리는 허들에 몇 번씩 부딪히고 나면 어느새 주인공에서 멀어져간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나는 조연이었구나... 내가 조연이라니!' 처음엔어색하고 불안하지만, 첫 조연 데뷔를 잘 마치고 나면 그 배역에 익숙해진다. (p. 186) 그러니까 애초에 '영화 속 조연들은 조연이라도 행복할까?'라는 질문은 틀렸다. 조연도 얼마든지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남의 영화에선 조연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내 영화에선 내가 주인공이 되면 된다. 당신이 영화를 만들면, 당신은 반드시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 (p. 188)

그런가? 모두가 주인공으로 살다가 조연인 것을 깨달을때 좌절하는가... 요즘 세대는 확실히 그런것 같다. 하지만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평생 단 한번도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가져본적 없이 삶을 사는 것이 숙명처럼 받아들여지던 때가 있었다. 평생을 조연 그것도 아니면 엑스트라라는 것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과 주인공인줄 알았다가 조연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중 무엇이 더 힘들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껏 주인공으로 살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게 그렇게 아쉽거나 좌절스럽진 않다. 나는 내 배역이 무엇이건 충실하고 진심이었다는 자긍심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다.

나는 유투브 플랫폼이 모든 콘텐츠의 성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표현했듯이, 유투브는 그저 도구다. 못을 박으려면 망치가 필요하고, 종이를 자르려면 가위가 필요하다. 유투브는 망치가 될 수도 가위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일정 시기가 지나 모서리가 닳으면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유투브가 아니라, '글'보다 '영상'이라는 언어를 더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세대가 오고 있다는 점이다. (p. 228)

그럴까? 정말 그럴까? '글'보다 '영상'을 더 편하게 보고즐기는 시대가 되긴 했다. 편한 것을 더 익숙하게 받아들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글'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수천편의 영상을 보는 저자도 결국은 글로 기록해야 했다. 영상은 사라져도 글은 남는다. 유투브가 아닌 또다른 혁명적인 영상매체가 등장해도 여전히 글은 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마 그때에도 책을 읽고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성공한 내 이야기가 아니라 여전히 부족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실패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중략) 이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마음껏 '영화 보는 인간'으로 살고 있으니, 나름 성공한 인생이다. (p. 240) 요즘, 영화 보는 삶이 더 행복해졌다. 동시에 그만큼 배워야 할 것도 많아져서 두렵기도 하다. 혹시 내 주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줄까 봐. 하지만 항상 그랬듯이 일단 해볼 것이다.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멈춰 있으면 우연은 생기지 않는다. (p. 242)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오랜만에 포옥 빠져서 읽었던 에세이였다. 영화든 책이든 역시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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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얼지 않게끔 새소설 8
강민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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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온인간이 되어가는 인경과

직장동료 희진의 잔잔하고 단란한 연대

 

 

지금까지 읽었던 자음과모음의 새소설 시리즈(밤의 행방, 빛의 마녀, 스모킹 오레오)들은 모두 취지에 걸맞다 싶은 느낌이 오는, 젊고 새로운 감각의 새·소·설· 들이었다. 작고 예쁜 이 작은 소설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이 이번 작품에선 또 어떨지 궁금했는데.. 결과부터 말하자면 '역시' 였다.

이 넓은 사무실 내에, 부채질하거나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지 않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때 눈치챘어야 했다. (p. 12)

최인경은 여행사의 배테랑 가이드다. 같은 층에 근무하긴 하지만 팀이 다른 송희진은 사무실에서 에어컨 앞을 고수하며 회계라는 업무 특성상 비용처리 과정에서 대부분의 직원과 마찰을 겪는 고슴도치같은 존재였다. 서로 잘 모르던 두 사람이었지만 부득이한 상황으로 베트남 출장에 함께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인경도 몰랐던 인경의 비밀을 희진이 눈치채게 된다.

"최대리님, 최대리님. 언제부터 이랬어요?"

"송주임님, 뭐 하는 거예요. 안 그래도 최근에 송주임님 너무 불편했는데, 갑자기 사람 놀라게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냐고요"

"최대리님, 팔이. 설마 했는데, 팔이, 이 더위에"

"뭐라고요? 송주임님, 똑바로 말해보세요. 지금 저랑 장난하자는 거예요?"

"대리님, 그거 맞요? 파충류나 양서류 그런 종류요, 땀도 안 나고 온도에 따라 체온도 변하고 하는, 그거 뭐더라, 그거요, 대리님" (p. 32, 33)

변온동물

아니 변온인간

인경은 몰랐다. 자신이 언제부터 땀을 흘리지 않았던건지 언제부터 더위에서 더 에너지가 넘쳤던건지.

희진은 더위를 조금도 못참는 체질이었다. 사내규정에 어긋난다고 할 정도의 짧고 얇은 복장으로 출퇴근을 고집하면서도 땀을 비오듯이 흘리고 에어컨도 모자라 선풍기 여러대를 돌려야 그나마 살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희진에게 베트남에서 인경의 모습은 너무도 특이했다.

송희진과 나는 그날 사우나실에서 겪었던 일을 당분간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 자신의 일이니 어디에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송희진의 답이 필요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건 사실이었다. 우리의 추측대로 만일 내가 영영 변온성을 가진 인간으로 변해버렸다면, 그러니까 열대 기온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 확실하다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할지 당장은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p. 42)

변온인간이라니.

SF도 아닌데 소설 속 주인공이 변온인간으로 변한다는 설정이 독특할 수도 있지만 자연스럽게 몰입되었다.

작가의 심리표현 능력이 좋아서이기도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내 체질 때문에 저절로 수긍이 되었다. 농담삼아 나는 내가 변온동물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곤 했다. 추위를 비정상적으로 타서 한겨울이면 양파처럼 켜켜이 옷을 껴입고 여름에도 왠만해선 땀이 잘 흐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소설속 인경처럼 더위속에 더 팔팔해지는 건 아니지만 추위와 더위에 대한 적응체질이 워낙 비정상적이라는 얘기를 많이 듣고 살아서인지 인경의 갑작스런 변온인간 변화에 그럴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된다면 얼마나 막막할까?;;;

"그 유툽 채널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이구아나인가 뱀인가, 아무튼 그 비슷하게 생긴 것들이었는데 겨울철에 온도를 높여주고 습한 곳에서 키워도, 꼭 동면은 몇 주 정도 해야 한다고. 그 이유가 탈피라는 걸 해야 한다던가" (p. 70)

봄에 시작한 이 소설은 여름과 가을 겨울로 향하면서 새로운 상황들을 연이어 만들어낸다.

실험체가 되어 죽을 작정이 아니라면 연구소나 국가기관에 함부로 의논할 수도 없고 온갖 검색과 자료수집을 해봐도 변온인간에 대한 상황은 없었던 것 같고 우연히 비밀을 공유하게 된 사람은 잘 모르던 회사동료 한명 뿐이다. 요즘 세상에 가족은 멀면 멀수록 좋은 관계일 경우가 많다. 인경도 그랬다. 누구하고도 비밀을 의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회사동료는 왜이렇게 인경을 도와주는 걸까?

"기억 못 하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인경 씨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거면 지금 이 상황을 함께 감내할 만한 이유로도 충분하고, 어쨌든 나름의 책임감도 생기고요"

"제가 희진씨에게 도움을 줬다고요?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말을 보태지 않으셨잖아요, 그런 소문들에" (p. 77)

"누구나 변할 수 있는 거잖아요, 인경 씨처럼" (p. 80)

저자는 2019년 겨울에 이 작품을 썼는데 그해 10월과 11월에 연이어 세상을 떠난 두 여성 연예인에 대한 자극적인 기사들을 보며 우울과 슬픔을 겪었다고 한다. 그 시간들의 일부분이 이 소설에 엮이에 되었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닥친 막막한 상황을 가족도 친구도 그 어떤 의지처도 없이 소문으로 떠돌다가 어느순간 비수가 되어 돌아올 그런 말들이 생기지 않도록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때 뜻밖의 인물과의 사이에서 생겨난 연대감은 또다른 희망이 되어줄 수 있음을 소설로 표현하면서 그런 연대감을 느끼지 못하고 떠난 이들을 애도하고 있는듯 했다.

"자고 일어나면 아무것도 없으면 어쩌죠.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라면 어쩌죠. 실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이 겨울, 서른세 번째의 겨울에 떠나도록 되어 있는 시한부 인생이었다는 걸 모르고 살아온 것이라면 어쩌죠" (p. 196)

"그래도 겨울은 추운 게 좋겠어요. 겨울에만 살아 있는 동물들도 있을 텐데, 나는... 겨울에 이렇게 자도 되니까요" (p. 199)

매달매달 달라지는 몸상태를 겪으며 혼란스러운 인경과 그 모든 과정에서의 고민을 함께 해주는 희진을 보며 직장동료 그 이상의 연대감을 보여주는 두 여성의 이야기는 겨울에서 끝난다. 변온인간으로서 처음 경험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신선함이 먼저 다가왔다면 아마도 이 소설은 SF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설정이나 상상력보다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고 함께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새로운 연대감을 느끼게 해주고 있기에 이 소설은 희망을 품은 새·소·설·로 다가왔다. 그 어떤 계절보다 봄은 항상 기다림과 희망을 상징하는 계절이 아닐까. 그래서 이 소설은 내게 봄같은 소설로 기억될 것 같다. 인경과 희진이 꼭 함께 봄을 맞이할 수 있기를...

지구가 한 번 공전하고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에도 무사히 살아남아 아무도 다치지 않고 죽지 않은 채 손을 맞잡고 안부를 물을 수 있는 두 여성의 이야기, 그 과정을 전하고 싶었다. (p. 202) 이번 봄이 아니면 내년의 봄이, 이 여름이 아니라면 언젠가 다가올 여름이 우리를 기다려주고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품으며. (p. 203) - 작가의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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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털리 부인의 연인 1 펭귄클래식 에디션 레드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음, 최희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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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육체가 조화를 이룰 때, 정신과 육체가 서로를 자연스럽게 존중할 때... 비로소 삶은 견딜 만해진다.

계급을 넘어선 두 남녀의 사랑을 세밀히 묘사한 탓에 금서로 사라질 뻔했던 이 작품은 출간 6주 만에 200만부 판매 기록을 세우며 널리 사랑받았다.

"이제껏 로렌스만큼 성<性)과 사랑의 힘 다툼을 제대로 표현해낸 작가는 없었다" - 도리스 레싱 서문 中 -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이 작가의 이름이 내 머리에 각인되게 된 계기는 소설가로서가 아니라 박물관에서 본 문장때문이었다. 재작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에트루리아전을 보던 중 전시회장 곳곳에 쓰여있던 로렌스의 여행기에서 뽑은 문장들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로렌스의 에트루리아 여행기는 국내 번역된 것이 없었고 그렇게 알아보던 중 로렌스가 유명한 소설가였다는 것을 알게됐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이라는 소설 제목은 들어봤지만 해외작가이름을 워낙 잘 못 외우는 편이라;;;

그렇게 에트루리아도 로렌스도 흐릿해지던 요즘 페이퍼북스타일로 가벼운 표지를 한 펭귄북의 새 책을 알게 됐다. 이참에 드디어 로렌스의 작품을 읽어봐야겠다 싶었다. 무삭제판 출간시 기소되고 영미권에서 검열에 걸려 정식 출판되기까지 상당 기간이 필요했다는 것이나 노골적인 성묘사와 비속어 그리고 하층계급 남자와 귀족부인의 사랑을 다뤘다는 점에서 엄청난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는 것등의 자극적인 안내문구가 개인적으로 내 취향과 맞지 않아 거부감을 조금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노벨문학상을 탔다는 도리스 레싱의 서문에서 그런 불편한 선입견은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서문이라기보다는 작품해설에 가까운 긴 서문을 먼저 읽고 작품을 시작하고 보니 왠지 예전에 읽었던 것을 다시 읽는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이 작품의 가치를 찾는데 좀더 집중하게 만들기도 했다.

채털리 부인은 대중의 상상력 속에서 벌거벗은 고디바 부인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다. (중략) D.H.로렌스 덕분에 희극배우라면 누구든 사냥터지기를 언급하면서 웃음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로렌스가 섹스를 일종의 신비롭고 신성한 것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의 결과과 문명의 추잡함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한 가지 요소로 설파했다는 것이다. (p. 7)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출간되기 이전에 로렌스는 이미 성 개혁운동가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의 소설들은 출판이 금지되거나 판매 중에 압수되었고, 이미 판매된 책은 추문을 불러일으켰다. (p. 9) 이 사람의 천부적인 재주는 놀랍고, 그의 최상의 작품에 필적할 만한 영문학 작품을 쓴 작가는 한 사람도 없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그의 소설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작품이고, 로렌스는 이 작품을 자신의 유언으로 여겼다. (p. 44) - 도리언 레싱의 서문 中 -

1885년 에 광부아버지와 교사어머니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젊었을 때 걸린 폐렴으로 평생 힘들어하다가 1930년 4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로렌스에게 이 작품은 1928년에 (3판으로 최종본을 다시 써내) 출판한 마지막 작품이었다. 그의 소설에서의 성적지향은 그의 아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로렌스는 27세때 스승이었던 교수의 부인이자 여섯살 연상이었던 프리다와 사랑의 도피 후 (프리다의 이혼절차가 마무리된 후) 결혼식을 올렸고 이 커플의 사랑은 여러면에서 독특함으로 유명세를 탔다고 한다.

참고로 이탈리아의 에트루리아를 찾아가보고 연구하여 에트루리아 여행기를 펴낸 것은 1927년이다. 그리고 이 당시의 이탈리아는 세계1차대전 직후의 혼란 속에 무솔리니의 극우적 파시즘이 퍼져있던 (거의 반전시 준비)상태였다. 거의 백여년 전의 작품인 이 소설을 읽다보면 놀라우리만치 지금의 현실과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최근 읽었던 경제서에서 2차세계대전 직전의 경제상황과 지금의 현실이 거의 흡사하다며 경고하는 내용을 읽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로렌스가 작품속에서 산업발달로 인한 자연의 훼손과 자본주의 심화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을 언급할때마다 어쩌면 이렇게 지금의 사회문제와 비슷한지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어서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큰 변동이 일어난 후 우리는 폐허 속에 살고 있으며, 조그만 거주지를 새로 세우고, 새롭고 작은 희망을 품기 시작한다. 이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미래로 나아가는 순탄한 길이 이제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장애물을 돌아서 가거나 기어 넘어간다. 우리는 살아 나가야 한다. 하늘이 아무리 여러 번 무너진다 해도 말이다. (p. 49)

소설의 첫 문단을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읽으니 더 와닿는다. 이 시작은 작가가 이 작품의 결말을 미리 말해준 것 같기도 하다. 이 작품은 비극적인 시대속에서 살아나가기 위한 비애를 표현하고 있었다. 온 몸으로.

세 페이지만에 콘스탄스는 채털리 부인이 됐고 클리퍼드 채털리는 전쟁에서 당한 부상으로 하반신 마비의 휠체어신세가 됐다. 한달의 신혼기간후 참전하고 돌아온 클리퍼드의 모습은 이 부부에게 이미 고난을 예고하고 있었다. 코니 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채털리 부인은 젊다고하기보다 차라리 어린 나이였고 준남작인 클리퍼드경은 젊었으나 남성성을 잃었다. 그렇게 생경한 모습으로 외따로 떨어진 고향집 랙비 저택에 이 어리지만 슬픈 부부가 들어와 살게 됐다.

클리퍼드는 코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체격이 크고 건장했지만 무력했기 때문에 매 순간 그녀를 필요로 했다. (중략) 그는 코니가 항상 곁에 있으면서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야망이 있었다. 그는 단편소설을 쓰는 일에 전념했는데, 내용은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들에 관한 이상하면서도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였다. 그가 쓴 단편소설들은 재치 있고 꽤 심술궂기도 했지만 불가사의하게도 다소 무의미한 것들이었다. 관찰력이 비범하고 독특했지만 접촉해 있다는 느낌, 실제로 어딘가에 맞닿아 있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마치 모든 일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같았다. (p. 69~70)

그들은 매우 친밀했으나 접촉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이였다. (p. 73)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친밀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부부이지만 생과부상태로 살게 된 코니에게 클리퍼드는 일종의 플라토닉 러브를 주지시키지만 해가 지날수록 아무 '접촉' 이 없는 관계란 서로에게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코니는 자기 마음속에서 불안감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접촉이 없는 데서 오는 불안함이 광기처럼 그녀를 사로잡았다. (중략) 광적인 불안감이었다. 그때문에 심장은 아무 이유없이 격렬하게 뛰었고 그녀는 점점 야위어 갔다. 그것은 불안감일 뿐이었다. 코니는 클리퍼드를 내팽개치고 공원을 가로질러 달려나가 고사리 덤불 위에 엎드리곤 했다.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집과 사람들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숲은 그녀의 유일한 피난처이자 지성소였다. (p. 77)

다행히 렉비 저택은 공원과 숲이 딸린 대저택이었다. 숲은 코니에게 숨쉴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코니는 저택에 손님으로 왔던 마이클리스라는 극작가를 통해 자신의 여성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를 자신의 연인으로 여겨보기도 했지만 마이클리스는 코니에게 숲이 될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당신은 내 말에 동의하는 거지, 그렇지? 함께 살아가는 평생에 비하면 어쩌다 갖는 우연한 성적인 관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말이야. 긴 인생의 필수적인 여러 가지 일에 비하면 성적인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끌리기 때문에 그저 섹스를 이용할 뿐이라고. 그런 일시적인 흥분이 중요하기는 할까? 인생의 문제는 오랜 세월에 걸쳐 하나의 완전한 인격을 서서히 쌓아 올리는 것이 전부가 아닐까? 온전한 삶을 사는 것 말이야. 온전하지 못한 삶은 아무 의미가 없어. 성관계가 없어서 당신이 온전한 삶을 살 수 없다면, 그렇다면 밖으로 나가서 연애를 해. 아이가 없어서 온전한 삶을 살 수 없다면, 그렇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대로 아이를 가져. 그렇지만 당신이 그런 일들을 한다면 그건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여야만 해. 그래야 길고 조화로운 것이 되지. 그리고 당신과 나 둘이 힘을 합해 그렇게 할 수 있어.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중략) 내 말이 맞지 않아? (p. 125)

코니가 야위어가고 우울해져갈수록 클리퍼드의 집착은 더 집요해졌다. 하지만 코니에겐 점점 더 모든 것이 무의미해져갈 뿐이었다. 처음엔 왜그런건지 스스로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클리퍼드의 시중을 들며 하루하루 묵묵히 감내할 뿐이었고 가끔 숲에 가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렇지만 코니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부당하다는 느낌, 기만당했다는 느낌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육체적으로 부당한 일을 당했다는 느낌은 일단 그것을 의식하고 나면 위험한 감정이었다. 배출구가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느낌을 의식한 사람의 마음을 파먹어 들어간다. (p. 175) 반항심이 코니의 마음속에 사무치게 끓어올랐다. 이 모든 짓거리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자신의 삶을 클리퍼드에게 헌신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자신이 그렇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것이 결국 무엇을 위해서인가? (p. 176)

코니의 언니가 코니의 상태를 알고 렉비저택으로 와서 문제해결을 모색한다. 클리퍼드는 내켜하지 않았지만 코니의 언니는 코니를 의사에게 데려가고 간호사 출신인 볼턴부인을 고용하여 클리퍼드를 돕게 함으로써 코니에게 코니만의 시간을 갖도록 정리해준다. 코니는 점점 해방된 기분을 느낀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올리브는 미래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미래에는 아기들을 병속에서 기르고 여자들은 아기를 낳는 일에서 '면제'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p. 179)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 책속의 책 발견~ ㅎㅎ

문명사회는 제정신이 아니다. 돈과 소위 사랑이라는 것, 이 두 가지에 문명사회는 광적으로 집착하고 있다. 물론 돈에 단언 광적으로 집착했다. 개인은 서로 아무 관련 없이 미친 상태에서 돈과 사랑이라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p. 224)

진정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공감이 흘러가고 물러나는 방식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소설, 바르게 다룬 소설이 지는 엄청난 중요성이 있다. 제대로 창작한 소설은 우리의 공감 의식이 흘러갈 새로운 장소를 알려 줄 수 있고 또 실제로 우리의 공감을 죽어버린 사물을 피해 멀리 달아나도록 인도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소설은 제대로 창작하기만 하면 삶의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들을 드러낼 수 있다. 왜냐하면 섬세하고 민감한 인식의 물결이 밀려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며 정화하고 새롭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삶의 열정적이고 내밀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p. 232)

얼마 안 있으면 지구 껍데기에는 사람이 아무 쓸모없어지고 온통 기계만 남게 될 날이 올것 같아요. (p. 241) 세상이 해마다 바뀌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 되었어요. (p. 242) 그녀는 이따금 일종의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문명화된 종족 전체가 광증의 초기 단계에 들어가고 있다는 공포감이었다. (p. 249)

이 소설의 독특한 점은 주인공의 심정에 공감하며 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작품속에 수시로 언급되는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은 이 소설이 추구하는 방향에 대해 깨닫게 하는 바가 크다. 작가가 당시를 비판하는 내용들은 지금의 현실에 대고 말해도 크게 어긋나는 점이 없는 것들이었다. 다만 저자가 해결점으로 선택한 방법이 좀 개인적이었을 뿐.

코니는 오후에 닭장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조그만, 아주 조그만 새끼 꿩 한 마리가 의기양양하게 닭장 앞에서 종종걸음으로 깡충거리며 돌아다니고 어미 닭이 겁에 질려 꼬꼬댁거리고 있었다. (p. 255) 코니는 이 모습에 매혹되어 넋이 나갔다. 그와 동시에 전과 비할 수 없을 만큼 통렬하게 여자 역할에서 버림받은 자신의 처지에 아픔을 느꼈다. 그 아픔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해지고 있었다. (p. 256) 사냥터지기는 그녀 옆에 쭈그리고 앉아 즐거운 표정으로 그녀의 손에 있는 그 대담하고 작은 새를 주의깊에 지켜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손목 위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p. 258) 그는 걱정스럽게 코니를 힐끗 보았다. 그녀는 얼굴을 모로 돌린채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자기 세대에서 버림받은, 쓸쓸한 처지에서 오는 온갖 고뇌에 빠진 울음이었다. (p. 259) "저기 누워유!" 사냥터지기가 부드럽게 말하고는 문을 닫았다. 실내가 어두워졌다. 칠흑같이 깜깜해졌다. 묘하게 순종적인 태도로 코니는 담요위에 누웠다. (p. 260)

사냥터지기 멜로즈. 광부의 아들이었으나 고등교육을 받았고 전쟁에 참전했을때 장교까지 올라갔던 남자. 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내려와 사냥터지기로 숲속 오두막에 스스로를 고립시킨 그는 여자에게 받은 상처로 더이상 여자를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었다. 하지만 코니는 달랐다. 멜로즈와 코니는 시작부터 남달랐다. 어쩌면 운명이었다.

그런데 참 묘한것이 두 연인의 로맨스가 이루어져가는 설레이면서도 짠할수도 있는 그러한 전개들을 읽는 기분이 좀 독특했다. 코니의 마음을 읽을때도 멜로즈의 마음을 읽을때도 연인으로서의 두 인물의 심리가 아니라 저자의 독백을 읽는 것만 같았다. 성불구이자 상류계층으로서의 독재적 면이 있는 클리퍼드와 성능력자이자 하류계층으로서의 상실감이 있는 멜로즈라는 두 남자의 생각을 읽을때도 로렌스 자신의 서로다른 두 자아를 읽는 것 같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클리퍼드는 작가이자 주류였고 멜로즈는 성해결사이자 비주류였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처럼.)

남자는 다시 내려가 외부와 격리된 어두운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지만 그는 숲이 외부와 격리되었다는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산업 현장에서 나는 소음이 고독을 갰고 날카로운 불빛들이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그 숲을 조롱하고 있었다. 인간은 더 이상 은둔하여 물러나 있을 수 없다. 세상은 은둔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 여자를 취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고통과 잘못된 운명의 새로운 순환에 뛰어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경험을 통해서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여자의 잘못도 아니고 심지어 사랑의 잘못도 아니고 섹스의 잘못도 아니었다. 잘못은 저기, 저 바깥세상에, 저 사악한 불빛과 악마처럼 덜거덕거리는 엔진 소리에 있었다. (p. 265~266)

코니와 멜로즈는 두 사람다 각자의 인생에서 커다란 변곡점을 맞았다. 어떤 의미로 보면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1권은 이 책을 읽기전 갖고 있던 선입견들이 무색하리만치 외설시비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는 것이 의아해지게 하는 줄거리였다. 오히려 작가의 시대적 한탄과 자아 성찰의 내용들이 소설인듯 아닌듯 현실적 고뇌로 읽혀지면서 로맨스, 불륜, 연인 같은 소재들보다 더 큰 범주의 고민들을 던져놓는 듯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둘러싼 논쟁점들은 2권을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2권은 여러 면에서 1권보다 노골적이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버리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우리나 똑같이 굶주리라고 주문을 거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모든 사람이 굶주리는 것이 절대 고상한 목표는 아니잖아. 보편적인 가난도 역시 좋은 일이 못 되고, 가난은 추한 거야"

"불평등은요?"

"그건 운명이야. 왜 목성이 해왕성보다 크지? 사물들의 근본적인 짜임새를 바꿀 수는 없어!" (p. 38)

"중요한 것은 누가 우리른 낳느냐가 아니라 운명이 우리를 어느 자리에 갖다 놓느냐 하는 거야"

"그렇다면 하층 대중이라는 것이 본래 타고난 어떤 종족은 아니라는 거네요. 귀족이라는 것도 본래 타고난 혈통은 아니고요"

"맞아, 여보! 그건 모두 낭만적ㅇ니 환상이야. 귀족 계급은 하나의 역할, 운명의 한 부분이야. 그리고 대중에게는 운명의 다른 부분을 맡아서 하는 역할이 있지. 개인은 거의 중요하지 않아. 문제는 그 사회에서 그들이 어떤 역할을 맡도록 키우고 길들이느냐 하는 거야"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공통된 인간성이 전혀 없네요!"

"당신 좋을 대로 생각해. 우리는 우리 배를 채울 필요가 있어. 그렇지만 표현하는 기능이나 실행하는 역할이라는 문제에서 지배계급과 섬기는 계급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한계, 절대적인 심연이 있다고 믿어. 두 계급의 역할이 서로 상반되지. 그리고 그 역할이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거야." (p. 42, 43)

이 소설은 코니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코니가 클리포드와 하는 대화를 통해 점점 코니의 생각이 변해가는 것을 볼 수 있고 코니가 멜로즈와 하는 행위를 통해 점점 코니의 사고방식이 바뀌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코니는 양 극단의 두 남자를 통해 자신의 여성성을 확실하게 깨닫고 주체성도 키워나간다.

돈, 돈, 돈뿐이라니까유! 모든 현대인들은 인간에게서 본래의 인간적인 감정을 죽여 없애는 데서, 아담과 이브를 분쇄해 버리는 데서 진정한 흥분을 얻는다니까유. 모두 똑같아유. 세상 전부가 똑같아유. 인간의 실체를 죽여 없애는 거지유. (p. 107)

우리 뭔가 다른 것을 위해 살자. 돈만 벌기 위해 살지는 말자. 우리 자신을 위해서든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든 그러지 말자. 지금 우리는 그렇게 살도록 강요받고 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 벌고 우두머리를 위해서는 아주 많이 벌도록 강요받고 있다. 그만두자! 조금씩조금씩 그것을 그만두자. 우리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떠들어댈 필요는 없다. 조금씩조금씩 산업사회의 삶을 벗어나 인간 본연의 삶으로 돌아가자. 돈은 아주 조금, 최소한만 있으면 될 것이다. 모든 사람, 나와 당신, 우두머리와 주인, 심지어 왕을 위해서까지도 말이다. 돈은 아주 조금, 최소한이면 될 것이다. 그냥 그렇게 하기로 결심만 하면 이 엉망진창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다. (p. 110~111)

신사교육을 받았고 표준어를 구사할 줄 알지만 장교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아버지일을 물려받고 사투리를 고집하는 멜로즈와 귀족이라는 신분과 유산으로 받은 재산을 떠나 오직 여성성으로만 자신을 어필하는 코니는 서로 닮아있다.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숲속 오두막집에서 서로만을 원하며 살기를 바라는 이 커플의 모습은 서문에서 읽었던 로렌스의 실제 삶과도 닮아 있었다.

"나는 육체적 삶이 정신적 삶보다 더 훌륭한 실재라고 믿어요. 육체가 정말로 깨어나 살게 될 때에는 말이에요. 그렇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그 유명한 바람소리기계처럼, 육체적으로는 죽어 있는 시체에 불과한 몸뚱이에 정신을 매달고 살아갈 뿐이에요"

"육체적 삶이란 것은 그저 동물적인 삶에 불과해"

"하지만 나는 그런 삶이 지성만 발달하고 몸뚱이는 죽은 시체의 삶보다 좋아요." (p. 141)

사람들은 모두 유령 같고 얼빠져 보였다. 아무리 활달하고 잘생긴 모습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살아 있는 행복이 전혀 없었다. 모두 메말라 있었다. 코니는 행복에 대한 여자의 맹목적인 갈망을 지니고 있었고 행복을 확신하고 싶었다. (p. 179)

2권에서 묘사되는 성적 장면들은 외설적이라기 보다는 로렌스의 철학적 판단처럼 읽혀졌다. 작가가 느끼는 시대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추구한 해결 방법은 육체적 접촉이었다. 계급격차와 자본의 논리 그리고 성적 합일에 대한 인식이 노골적으로 표현되는 2권은 통속적으로 읽힐수도 있는 스토리였지만 그또한 로렌스식 적나라함과 연결되어 있는 듯 했다.

"나는 돈의 뻔뻔스러움을 증오하고 계급의 뻔뻔스러움을 증오하오. 그러니 현재의 이런 세상에서 내가 한 여자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소?" (p. 221)

"그렇지만 왜 꼭 무엇을 주어야 해요? 이건 거래가 아니잖아요. 단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뿐이잖아요." (p. 222)

그는 혼잣말을 했다. '나는 인간들 사이의 육체적 접촉의 깨달음을, 부드러운 애정의 접촉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리고 이 여자는 내 동반자다. 이것은 돈과 기계와 이 세상의 생명 없는 관념적인 원숭이 같은 작태와의 싸움이다. 그러니 이 여자는 내 뒤, 바로 거기에서 나를 후원할 것이다. 고맙게도 내게는 한 여자가 있다! 너무나 고맙게도 나에게는 나와 함께 있엊고, 부드러운 애정이 있고, 나를 알아주는 한 여자가 있다! 고맙게도 이 여자는 난폭한 여자도 아니고 바보다 아니다. 고맙게도 이 여자는 부드러운 애정이 있고 의식이 깨어 있다' 그리고 그의 정액이 그녀의 몸속으로 용솟음쳐 들어갈 때, 그의 영혼도 그녀를 향해 솟아올라 나아갔다. 그것은 생식 행위를 넘어서는 창조 행위의 솟아오름이었다. (p. 227)

존 토머스와 제인 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이 커플의 남성성과 여성성은 그들의 자아실현의 한 방법으로 서로가 육체적 접촉을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작가의 다른 소설들을 아직 읽기 전이라서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서문에서 보니 다른 작품들도 비슷한 경향을 띠었던 것 같다. 소설가라서 이런 해결방법에 도취되었던 것일까? 2권의 뒷부분은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이야기> 라는 글로 작가 스스로의 작품에 대한 해명?이 상당히 길게,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고 있다.

성(性)에서는 정신이 육체를 따라잡아야 한다. 아니, 모든 육체 활동에서 그래야 한다. 정신적으로 우리는 성적인 사고에서 뒤처져 있으며, 흐릿함 속에 미숙하고 다소 야만적인 조상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천박하고 감추어진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바로 성적이고 육체적인 이 한가지 점에서 정신은 진화하기 않은 채 머물러 있다. 이제 우리는 따라잡아야 하고 성에 대한 의식과 성행위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고, 육체적 느낌과 경험에 대한 사려 깊은 의식, 이 육체의 느낌과 경험 자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행위에 대한 의식과 행위 자체의 균형을 맞추자. 이 둘을 조화시키자' 이 말은 성에 대해 적절한 경의를 표하며 육체적 이상한 경험에 적절한 외경심을 품으라는 의미다. 이 말은 소위 외설적인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그 단어들이 정신이 육체에 대해 갖는 의식의 자연스러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외설이라는 것은 정신이 육체를 경멸하고 두려워할 때, 그리고 육체가 정신을 증오하고 저항할 때에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p. 282)

지금까지 어떤 시대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보다 감상적이고, 진정한 느낌이 결여되고, 거짓된 느낌을 과장한 적은 없었다. (p. 288) 가짜로 만들어낸 정서의 문제점은 어느 누구도 정말로 행복하지 않고,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어느 누구도 평화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p. 289)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탈고한 지 거의 이 년이 지난 후에 쓴 이 글에는 무엇을 설명하거나 해설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어쩌면 이 책의 배경으로 필요할지도 모를 정서적인 믿음을 보여주고자 할 뿐이다. 이 책은 관습에 도전하여 쓰인 책이라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어쩌면 이런 도전에 대한 어떤 이유를 제시해야 할 것 같았다. (p. 328) -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이야기 中 -

자비로 소량 출판한 자신의 책이 해적판으로 너무나 인기를 얻으면서 본내용이 왜곡되기까지 함으로써 저자는 온갖 비난을 받지만 그에 맞서는 소책자를 내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할 정도로 저자는 용감하다. 소설에서는 그나마 은유적으로 당대의 문화를 비판했다면 이 소책자에서는 논리적으로 성인식과 결혼 그리고 종교까지도 문제가 있음을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하지만 갑론을박이 난무했을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시니컬하거나 독단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소설에서는 (비록 방법적으로 무난하지 않다해도) 로맨티스트 로 사상적으로는 성평등주의자 로 보이는 로렌스에 대해 여전히 궁금증이 남는다. 어쩌면 혁명가처럼 느껴지는 이 소설가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진다. 여러모로 의미있는 고전임은 분명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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