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 그들은 왜 칼 대신 책을 들었나 서가명강 시리즈 14
박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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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맞서 필사의 도약을 감행한 메이지유신의 혁명가들!

'서울대를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라는 서가명강 시리즈의 14권인 이 책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통해 지금의 일본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는 책이다. 일본역사를 다 알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메이지유신은 알아둘 필요성이 있다는 저자의 의견에 처음엔 갸우뚱 했지만 읽어가면서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게 됐다.

일본을 상대하고 경쟁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를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 또 전략적이어야 한다. 세계에서 일본을 무시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뿐이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서양인들은 일본 사회를 조금 이상하게 보기는 해도 무시하지는 않으며, 중국인들은 꽤 미워하지만 그렇다고 깔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무시하고 본다. 꼭 알아야 할 지점에서 눈을 그냥 감아버린다. 그래서는 안 된다. 혹여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일본을 무시한다 해도 우리만큼은 일본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일본을 존경한다 해도 우리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다. (중략) 근대 일본을 아는 첫걸음은 메이지유신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중략) 메이지유신이 깔아놓은 레일 위를 근대 일본은 달려왔고, 현재도 그 레일을 크게 벗어났다고 하기 어렵다. 이 책은 근대 일본의 레일을 깐 네 명의 급진개화파에 대한 얘기다. 그들의 이야기가 일본 역사와 친해지는 데, 나아가 일본의 현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길 바란다. (p. 16 ~ 17)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1부에서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고 2~4부에서는 사무라이 1명씩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한다. 역사는 역시 인물이야기로 읽을때 재미가 월등한 것 같다. 소설이 아님에도 소설처럼 읽히는 인물의 이야기들은 드라마틱함이 느껴질때마다 더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라는 4명의 인물이야기를 통해 메이지유신을 전후한 일본사회를 들여다보는 시간들은 재밌기도 했지만 일본역사에서 메이지유신이 가져온 의미와 더불어 지금의 일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흔히 우리는 일본이 옛날에는 우리보다 못했고 가난했는데 근대에 들어와서 서양 문물을 빨리 받아들이는 통에 우리를 앞서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임진왜란 이후에 수립된 도쿠가와 막부 치하에서 일본은 급속히 발전했다. 이때 이미 무시할 수 없는 강국이 되었고 부자나라가 되었다. 문화적으로도 세련된 수준에 이르러 다도, 가부키, 기모노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전통문화는 대개 이때 형성되었다. (p. 22)

도카가와 시대 일본에서는 상업과 화폐경제가 놀랄 정도로 발달했다. 이게 조선과 가장 다른 점이다. 조선도 농업 생산력이 높은 나라였다. (중략) 이게 조선사의 흥미로운 점이다. 왜 조선은 이웃인 청이나 일본과는 달리 상업이 발전하지 않았는가 (p. 23) 조선의 위정자들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빈부격차였다. 한 사회에 엄청난 부가 쌓이고 상품, 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면 그 혜택을 골고루 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빈부격차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하향평준화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억제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빈부격차는 반드시 사회불안을 낳기 때문이다. (p. 24)

역사를 읽는 데 있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왜곡과 편향된 관점이다. 그렇기에 역사를 읽으면서 기분이 좋아질 때는 바로 그런 왜곡과 편향을 깨닫고 새로운 가르침을 얻을 때다. 무시했던 일본은 앞서가고 있었고 답답했던 조선은 (비록 하향평준이 될지라도) 평화와 평등을 고수하려 노력했다. 역사를 다르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은 늘 반갑다. 게다가 이 책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대한 책이지만 일본과 당시 조선의 이런저런 부수적인 이야기들도 자주 나와서 읽는 재미를 더욱 돋워주고 있었다.

경제성장의 혜택을 입지 못한 계층은 정작 지배층인 사무라이였다. 도쿠가와 시대 사무라이들은 주군인 대명에게서 봉록으로 쌀을 받아 생활하는 봉급생활자였다. (p. 26) 물가상승은 임노동자들인 이들에게는 재앙이었다. 이처럼 사회변화에 따라 과실과 손해가 생기게 되면 주로 손해를 보는 층이 사회를 바꾸려 할 것이다. 그런데 사회변혁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 정보, 조직 등 어느 정도의 사회적 자원이 갖춰져야 한다. 빈민, 빈농 보다는 하급 사무라이가 나서게 된 이유다. (p. 27) 19세기 사무라이는 검술만 훈련한 게 아니라 '독서하는 사무라이' 였다. (중략) 유학에 접한 사무라이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전투 대신, 천하대사의 정치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p. 29)

전에 일본역사책을 읽으면서도 절감했었지만 일본은 우리와 정말 너무너무 다르다. 신분제 사회였으나 우리에게 익숙한 신분제와 다르다보니 사회문화도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사무라이 하면 그냥 무사 내지는 용병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막부체제가 안정된 시기의 전쟁없는 평화가 사무라이들에겐 생존의 위협을 가져왔다. 사무라이들은 돌파구를 찾기 위해 책을 들었고 섬나라에 출현한 외국배들을 보며 세계적 변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사무라이들은 사회변혁의 중심세력이 되어갔다.

사무라이들이 변혁운동을 전개해나갈 때 농촌 부르주아들이 부분적으로 그에 가담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주도권은 사무라이층에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 농민들은 변혁 과정에서 관망적인 태도를 취했다. (중략) 상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경제력에 상응하는 정치권력 보유에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중략) 그들은 변혁 과정에서 승산이 있어 보이는 쪽에 줄대기에 바빴다. (p. 44) 메이지유신은 지배층은 사무라이층 내부의 다툼과 그 파장으로 일어난 것이고, 그 속에서 급진개혁파가 주도권을 잡아 이뤄낸 변혁이었다. 이런 메이지유신의 성격은 일본 사회에 보수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중략) 그러니 변혁이 진행되어도 사회질서가 총체적으로 붕괴되는 일 없이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일본 대중은 정치참여에 관심이 덜하다. 정치란 어차피 특정 사람들이 하는 것이란 생각이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다. 또 그만큼 가만히 있어도 지배층이 점진적 개혁을 진행해주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일본의 위기는 이 패턴이 작동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p. 45)

지금 일본이 위기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 여전히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한 국력을 가진 나라를 걱정할 만큼 우리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라서. 여하튼 일본 국민성의 독특함을 설명해주는 부분들이 나올때마다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그랬구나 싶었다. 일본인들은 너무나 오랜 세월을 너무나 같은 곳에서 너무나 같은 신분으로 너무나 같은 일을 하며 너무나 오래오래 살아온 것이 문제라면 문제랄까. 혁명이 없는 나라가 가진 조용함이 나 라면 견디기 힘들 것 같은데...

조선과 일본의 가족제도는 사뭇 다르다. 이렇기 때문에 일본 역사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형제지간, 부자지간에도 성이 다른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중략) 한 사람의 이름이 평생 여러 번 바뀌는 경우도 많다. (중략) 한 사람이 열 개 넘는 이름을 갖는 경우도 있다. (중략) 이런 사정이니 우리가 일본인에게 기분 나쁘다고 '이런 성을 갈 놈'이라고 해봤자 상대는 태연할 것이며 '이 약속을 깨면 내가 성을 갈겠다' 고 한들 믿어주지 않는다. (p. 53, 54)

일본의 신분제는 그나마 유럽식 봉건제와 닮아 있어서 비슷하게 이해되긴 하는데 이름 문화는 그야말로 신기할 따름이다. 유럽에선 같은 이름을 아들 손자 대대로 돌려쓰는 것이 헤깔리더니 일본에선 한 사람이 자꾸 이름을 바꿔대니 이역시 헤깔리는 것이다. 성씨가 곧 가문인 문화에서 일본의 이름문화는 정말 이상하다;;;

여하튼, 이제 4명의 사무라이들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보기 시작한다.

메이지유신의 스승이라 불리는 요시다 쇼인은 그야말로 정열적인 학자였다. 당시 해군이 전무한 상태인 일본사회에 해군이 필요성을 강조하고 몰려두는 제자들을 받기 위해 세운 송하촌숙에서의 학습방법은 회독 會讀 으로 신분도 나이도 상관없이 어디서든 읽고 토론하기를 즐겼다. 저자의 표현대로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었다.(p. 71)' 이런 쇼인의 해외팽창 구상엔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가 있기도 했다.

'조선을 옛날고 마찬가지로 공납하도록 촉구'하자는 말은 고대에서 진구황후가 신라를 정벌했다는 [일본서기]의 전설 같은 얘기에 기초한 것인데 당시에 크게 유행했었다. 쇼인도 물론 그런 유행의 한복판에 있었다. 이런 의식은 학문적으로도 '임나일본부설'을 낳으며 오랫동안 일본인의 조선의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여기까지도 황당무계하고 무모한 발상인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p. 74~75) 당시 일본에서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를 다케시마라고 했다. (p. 76) 울릉도는 그가 꿈꾸는 해외팽창의 발판이었다. (p. 78) 한반도 어딘가에 서양세력이 거점을 만드는 것은 근대 일본이 초지일관 반대해왔던 일이었는데, 그 원형을 여기서 볼 수 있다. (p. 80) 부국강병 노선의 출발이다. 나라는 위기에 빠졌고 이 위기를 구할 것은 강한 군대, 특히 해군밖에 없었다. 강군을 육성하려면 경제력이 있어야 하고 그건 무역이 아니면 안된다. (p. 82) 고메이 천황은 완강하게 칙허를 거부했다. 양이론자들에게는 이 이상의 명분이 없었다. 조약 체결에는 내심 찬성하지만 막부는 비판하고 싶었던 정치세력들은 이를 구실로 일제히 막부에 포문을 열었다. 천황의 허가 없이 조약을 체결했으니 도로 물리고 다시하자는 것이었다. (p. 85)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해지는 압력때문에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반대여론이 들끓자 천황의 입을 빌어 무마시키려 했으나 왠걸 천황이 반대의견을 냈다. 그것은 막부반대세력에게 정당한 구실을 준 셈이 되어버렸다.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양이세력에게도 막부체제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개혁세력에게도 천황의 칙허거부는 유용한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저러나 조선을 자기들의 발판처럼 생각했던 이들이 세력을 키워감에 따라 조선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일본의 밥이 되어 버렸다. 그러한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인식은 지금까지도 유효해 보인다.

옥중에서도 활발한 학문활동을 하던 요시다 쇼인은 초망굴기론을 세워 신분에 관계없이 뜻있는 사람 누구나 일어서서 사회를 바꾸기를 주장한다. 그리고 '몸은 비록 무사시 벌판에 썩어가더라도 남겨놓은 것은 야마토 다마시이(일본혼)' 라는 말을 남기고 처형된다. 그가 남긴 '일본혼'은 그의 제자세대인 사무라이들에 의해서 메이지유신이 되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일본사회에 깃들어 있는 듯 하다.

메이지유신의 아이콘은 사카모토 료마 라고 한다. 비록 메이지유신의 성공을 눈으로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것을 가능케 한 주역이 바로 사카모토 료마 라고 한다. 메이지유신은 사카모토 료마가 이끌어낸 '대정봉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역사상 유명인물이란 것은 특정 시기에, 특정 세력에 의해, 특정한 이유로 현창된 것이 쌓여 우리 앞에 제시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자체가 '역사적 산물' 인 것이다. 그러니 그 평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또 변할 것이다. (p. 105) 그러니 어떤 시대에 어떤 인물들이 교과서나 위인전에 실리고 동상과 지폐초상으로 등장하는가는 그 사회의 사상과 지향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지점이다. 그분들이 훌륭한 건 분명하지만, 그 많고 많은 위인들 중 하필 그분들인 것은 우리 사회의 열망이 그들을 불러낸 까닭이다. (p. 106)

사카모토 료마 라는 인물이 일본 대중에게 유명해진 계기는 일본의 국민작가가 쓴 소설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 때문이라고 한다. 지나간 과거속에 있던 인물이 급부상하게 된 배경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라는 저자의 말이 긴 여운을 남겼다. 위인은 어떻게 위인이 되는가...

도쿠가와 시대 사람들에게 '국가'는 일본 저네가 아니라 자기 번 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국가의 틀을 넘어, 천하로 인식되던 일본을 '새로운, 유일한 국가'로 창출해가는 것, 그리고 번주에 대한 충성을 천황에 대한 충성(존왕주의)로 전환해가는 것, 이것이 메이지유신의 과정이었다. (p. 111)

수백년간 지방 각각의 번들이 그 속민들에겐 국가였다. 수백개의 작은 국가들이 모인 사회가 당시의 일본섬이었다. 그런 수백의 국가들을 통일하여 하나의 일본이 되었으니 세계를 그처럼 하나로 통일하는 꿈을 꾸게 된것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을 떠난 사무라이를 낭인 이라 한다. 재수생이 일본말로 낭인이다. 로진,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것, 일본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상태다. 어딘가 하나에는 소속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맘이 놓인다. 이게 예나 지금이나 보통 일본 사람들의 정서다. 당시 번을 이탈했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거의 국적이탈에 해당하는 것이다. (p. 123)

외세와 결탁했다는 꼬리표는 그것을 능가하는 정치적 손실을 가져오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권력투쟁이 격렬해져도 외세와 결탁하는 것은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정치 엘레트 간에 암묵적으로 진행되어 있었다. (p. 132)

집단에의 소속감, 그러나 외세와 결탁은 안됨, 이러한 특성이 오랑캐를 쳐부수자는 양이론을 메이지유신으로 변화시켰다. 자국의 문제는 자국내에서 알아서 하고자 한다는 기본적 합의는 있었다는 점에서 지금의 우리와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씁슬하게도... 이렇게 소속감이 생명줄처렴 여겨지던 사회에서 사카모토 료마는 자신의 번을 떠났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중재와 협상을 통해 내분을 잠재우고 개혁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렇게 무력충돌 없이 천황 중심의 신정부 탄생의 기반을 닦았다.

앞에서도 말한 대로 일본은 조선이나 중국보다 훨씬 신분제가 강한 사회였다. 우리도 조선시대 때 신분제가 있기는 했지만 사실 양반과 상민과의 경계가 법제적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는 않았다. (중략) 조선의 양반은 법제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그 지역 사람들이 양반이라고 취급을 해주느냐, 안 해주느냐가 중요했다. 그러니 과거 합격과 중앙 관직 획득에 매달리게 되고 그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일본의 신분은 법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 신분에 따라 거주지역도 구분되었다. 그러니 사무라이는 사무라이대로, 상인은 상인대로, 농민은 농민대로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분은 대대로 물려주는 것이다. (중략) 도쿠가와 일본 사회는 가업이 기초가 되는 사회였다. 반면 조선은 유동성이 강한 사회였기 때문에 가업에 대한 생각이 약했다. (p. 138, 139) 심지어는 정치까지도 그렇다. 그러니 세습의원이 저토록 많은 것이다. (p. 141)

신분제라고 하면 양반과 노비의 구분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는 유동적이었다. 능력에 따라 신분상승의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신분제도는 그렇지 않았다. 태생적으로 정해졌다는 점에서 인도의 카스트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신분제를 위아래 상하계층구분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구분으로도 이렇게 오랫동안 존속하면 일종의 숙명처럼 받아들이게 되는건가 싶었다. 그러니 혁명이 일어날 수 없는 사회였다. 그러니 자신의 업이 아닌 다른 분야에 무관심 한 것이 자연스러웠다. 일본의 신분제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릴 필요가 없는 신분제였다.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세계에만 살고 있었다. 지도층이 어떤 야심을 품느냐에 따라 세계사에 남긴 족적이 달라졌을뿐.

'라스트 사무라이' 라고 일컬어지는 사이고 다카모리 는 메이지유신 시대의 어쩔 수 없는 희생양을 스스로 선택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성공한 지배층보다 사그라진 최후의 사무라이를 즐겨 추억하는 지도 모르겠다. 일본 역사인물 중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사람중 한명이라는 사이고 다카모리는 '최후의 사무라이' 이자 '근대 일본의 로망'으로 불린다고 한다.

라스트 사무라이, 사이고는 사후 우상화되었다. (p. 177) 거기에는 근대 일본인의 아이덴티티 문제가 관련되어 있다. 메이지유신은 엄청난 서구화 변혁이었다. 나라의 생존으르 위해서 열심히 서구화를 추구했지만 그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발생하는 민족적 상실감을 사이고를 통해서 만회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이고는 서양과 근대를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일본과 전통을 함께 껴안으려다 상징이 되었다. 그 상징을 통해 근대 일본인들은 허기를 채우려고 했다. (p. 178)

앞서 사카모토 료마가 이끌어낸 대정봉환(막부의 마지막 대장군이 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주겠다는 결정) 만으로 막부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왕정복고 쿠데타에서 사이고는 선두에 섰다. 뛰어난 전장이었으나 막부세력과의 다툼에서 무의미한 백성들의 죽음은 원치 않았다. 사이고는 내전없이 평화협상으로 막부세력을 물리쳤다. 하지만 개혁 정책에 있어서 모두의 입장이 동일할 수는 없었다. 사무라이 계층은 소외되기 시작했고 사이고는 그런 사무라이들에게 믿을만한 마지막 리더였다.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터트리기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을 주장했다. 사이고는 사무라이들의 허기를 정한론으로 채웠던 것이다. 조선을 침략하는 것으로 무사들의 불만을 폭발시켜 사태전환을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국력은 전쟁을 치룰만한 상태가 아니라는 반론때문에 결국 계획을 이루진 못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조선침략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정한론은 그냥 스쳐지나갈 방법은 아니었나 보다. 일본에서의 명분세우기는 항상 조선침략이라는 정한론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제일 편한 방법인 것인가... 어쨌든 사무라이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사이고는 그들의 생각과 방법에 동의하진 않았지만 그들과 함께 정부에 맞서 싸우다 사무라이들과 함께 죽었다. 그야말로 정말 최후의 사무라이 였던 것이다.

근대 일본의 철혈재상 이라 할 수 있는 오쿠보 도시미치 는 지금의 일본을 만든 사람이지만 인기는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억울하다. 천신만고 끝에 근대 일본의 초석을 놓은 건 그였지만, 살아생전에는 '사무라이의 배신자'로, 죽어서는 '냉혈한 독재자'로 비난받았기 때문이다. 역사드라마나 역사소설에서도 그는 거의 주인공이 돼본 적이 없다. 일을 많이 한 정치가는 인정은 받을지언정 사랑받지는 못하는 것인가. 이 책에서는 '로망'은 없었지만 근대 일본의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은 그의 역사적 위치를 정당하게 조명했다. (p. 234)

일본이 세계대전의 주축이 됐을 만큼 급속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걸출한 인물들이 있었던 것이다. 4명의 사무라이 한명한명 그 노력과 열정이 위인전에 기록될만한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일을 많이 한만큼 사랑받지 못한 오쿠도 도시미치 의 일화들은 앞선 3명의 사무라이들과 결이 다른 위업을 알려주었다.

메이지유신 당시에는 '일신'과 '유신'이라는 말이 경쟁하다 유신으로 정착되었다. 700년간 계속된 사무라이 지배를 무너뜨리고 신분제를 혁파하고 서양화를 추구했으니 혁명이라고도 할 만한데, 일본인들은 지금까지도 '일본혁명' 혹은 '메이지혁명' 이라 하지 않고 유신 이라고만 한다. 왜 그럴까? 혁명은 원래 '역성혁명'의 준말로 왕조를 교체한다는 뜻이다. (중략) 그런데 일본은 어떤가.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6세기 이후로는 한 번도 왕조가 바뀐 적이 없다. (p. 248) 메이지 유신 역시 막부는 쓰러뜨렸지만 무너진 것은 도쿠가와씨지 천황가문은 아니다. 무너지기는 커녕 유신으로 천황에게 대권이 다시 돌아왔다. 이러니 혁명이란 말을 쓸 수가 없다. (중략) 여담이지만 천황에겐 성이 없다. (중략) 이름만 있다. 그러니 사실 역성할래야 할 수도 없다. (p. 249)

혁명의 의미부여가 불가능한 혁명이 메이지유신이다. 일본인들은 이름을 자주 바꾼다는 것도 이상했는데 그래서 가족간에도 성씨가 다른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것도 희한했는데 천황은 아예 성이 없고 이름만 있다니... 인간이 아닌 존재로서 인간의 성씨를 갖지 않는 천황이라는 개념이 아무리 일본인들이 믿는 뭔가 의미가 있다해도 나는 그저 성씨도 없이 이천년세월을 유지한 왕가가 이상할 따름이었다;;;

여하튼, 왕정복고 이후 메이지유신 정부는 혼란스러웠다. 번과 번주들을 개혁하지 않는한 유신은 의미가 없었다. 그 모든 개혁 체계를 잡은 것이 오쿠보 도시미치였다. 외국에 나가 직접 보고들으며 배운 것들을 통해 일본의 현상황을 직시했던 오쿠보 도시미치는 일본을 유럽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의 일본을 위해 악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장봉기 세력은 그렇다 쳐도 일본의 초기 민주주의운동을 주창한 세력이 그 뿌리를 정한론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후 메이지 정치세력 중 중요한 한 부분인 민권파는 대내적으로 인민의 자유와 정치참여를 촉구했지만, 대외적으로는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침략적인 태도를 강하게 드러냈다. 오히려 메이지 정부가 이들의 강경한 주장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메이지 정부를 비롯한 국권파뿐만 아니라 이들도 공격적인 내셔널리즘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원래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부국강병을 좋게 보지 않는 편이었다. 부국하려면 세금을 많이 거둬야 하니 결국 백성을 괴롭히게 되고, 강병은 전쟁위기를 고조시키니 이 또한 민생에 위협적인 것이었다. 조선의 위정척사파들은 서양과 일본의 부국강병 정책에 끝까지 비판의 날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일찌감치 부국강병을 받아들였다. (p. 266~ 267)

오쿠보 도시미치가 서양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직접 보고 배운 것을 토대로 비스마르크 주도하의 독일을 모델로 삼은 것이 일본의 메이지유신 이후 정부체제가 제국주의로 갔던 이유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오쿠보 도시미치 가 살해당한 이후에도 정부는 오쿠보가 구상했던 대로 정책을 펼쳐나갔다. 그 중심에 그를 추종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고 한다. 간간이 등장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보면서 일제치하에서의 이토 히로부미와 또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물론, 그보다 부국강병이 결코 좋은 개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더 신선했다.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프랑스대혁명에서 찾는다. 미국인들은 국가의 나아갈 방향을 물을 때 독립혁명의 아버지들을 소환한다. 메이지유신은 일본에서 같은 의미를 갖는다. 일본인들은 근현대 일본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 메이지유신을 불러낸다. 그 방식은 당연히 일정하지 않다. (중략) 그러니 우리가 현대 일본의 유래와 현재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을 깊게 이해하려면 메이지유신에 대한 식견을 갖고 있어야 한다. 또 메이지유신은 그 자체로도 혁명사의 흥미로운 사례다. (중략) 한편으로 메이지유신은 일본의 한계와 약점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중략) 메이지유신을 존왕양이와 부국강병으로만 회상하는 것은 위험하다. 메이지유신의 또 하나의 목표였던 문명개화는,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에 관한 한, 아직도 미완성이다. (중략) 일본사회의 이해는 메이지유신부터다. (p. 286 ~288)

저자는 메이지유신의 다른 한 면이 아직 미완성이라고 하지만 그 미완성 부분은 영원히 그렇게 미완성일것 같다. 일본인들은 메이지유신을 존왕양이와 부국강병으로만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까? 그들이 미완성임을 느끼지 못하는데 외부에서 미완성이라고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연장선에서 저자가 한국의 빠른 발전으로 지금에서야 일본과 제대로 경쟁이 가능해진 시대가 됐다고 한 것에 대해서도 나는 의구심이 생긴다. 일본은 여전히 한국을 아래로 보는데 한국만 일본을 동등한 경쟁자로 생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여하튼, 일본사회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일본섬이 어디 멀리로 떠내려가지 않는한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앞으로도 계속 적군과 아군을 오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일본사회의 이해는 메이지유신부터라는 것에 어느정도 동의하게 됐다. 일본의 독특함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그 바탕이 된 일본의 메이지유신 전후를 알고 싶다면 이 책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런 생각 많은 시민들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는 더 건강해질 것이며 더 튼튼해질 거라는 점이다. 이 책이 그런 분들의 고민과 생각에 하나의 '거리'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p. 294) -나가는 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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