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시의 함축성과 소설의 서사성을 갖춘

천 개의 시어가 빚어낸 한 편의 아름다운 소설

<달에 울다> 와 <조롱(鳥籠)을 높이 매달고> 라는 두 편의 작품이 실린 이 책의 작가는 마루야마 겐지 다. 개인적 취향상 일본소설을 좋아하지 않지만 '시적인 소설'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문학의 길이 곧 구도의 길이라며 등단 직후 고향에 틀어박혀 고고(孤高)의 작가가 되었다는 저자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두 편의 작품으로 충분히 작가만의 색깔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달에 울다>

봄 병풍에 그려진 그림은 중천에 걸려 있는 흐릿한 달, 동풍에 흔들리는 강변의 갈대, 그리고 걸식하는 법사다. 휘늘어진 버드나무 둥치에 털썩 주저앉은 법사는 달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비파를 타고 있다. 두 눈이 멀어 광대한 강변 일대에 쏟아지는 푸른 달빛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때가 꼬질꼬질한 그의 오체는 삼라만상을 그대로 포착하고 무궁한 시간과 공간에 녹아들어있다. 팽팽한 현의 떨림은 미적지근한 밤기운을 자극하여 봄을 증폭시키고, 병풍 옆의 초라한 이불 속에 기어들어가있는 소년의 아직 두부처럼 여린 영혼에도 깊이 스며든다. 볏짚을 채운 요와 고이노보리를 부수어 만든 이불 속 아이는 바로 30년 전, 이제 막 열살이 된 나다. (p. 9)

대륙에서 전쟁을 겪고 다리를 다쳐 돌아온 소년의 아버지는 괴상해져 돌아왔다. 소년이 보기엔 그랬다. 그 괴상함은 잔인함과 폭력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촌장네 헛간을 털려던 마을주민을 몰아세우는 추격전속에서 아버지는 가장 활기차 보였다. 그렇게 야에코의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야에코와 어머니는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여름 병풍에 그려진 그림은 산기슭에 걸린 초승달, 천지에 무성한 초록 풀, 그리고 거지 법사다. 높다란 바위 머리에 앉은 법사는 흠집 많은 비파를 여인처럼 끌어안고 격렬하게 술대를 치며 은은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그 음향은 후텁지근한 밤기운에 눌리어 멀리까지 가닿지는 못한다. 눈곱이 잔뜩 낀 법사의 눈은 앞이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여러 쌍의 남녀가 교합하는 모습을 한꺼번에 여기저기서 생생하게 포착한다. 바짝 마른 풀은 강렬한 기운을 쏟아내고 시든 뇌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환영을 차례차례 만들어낸다. 그 힘은 가늠하지 못할 만큼 커서 병풍 밖까지 미친다. 얇은 이불 속에 드러두은 젊은 남자의 가슴속 깊이 스며들이 피보다 더 뜨거운 영혼을 크게 동요시킨다. 군데군데 솜이 삐져나온 요와 땀내나는 값싼 담요 사이에 끼어 있는 젊은이는 꼭 20년전, 갓 스무살이 된 나다. (p. 34)

남자는 사과밭에 열심이다. 부모가 그닥 신경쓰지 않는 농사의 한 종류일뿐이지만 오직 사과밭에만 열정을 쏟는다. 하지만 마을에서 텔레비전 없는 유일한 집이고 여전히 야에코네 사과가 훨씬 맛있다. 그리고 밤이면 밤마다 야에코와 몸을 섞었다.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야에코네가 왜 마을을 떠나지 않는 이해가 안가지만 아무일도 없었음에도 남자는 다른 젊은이들처럼 도시로 떠날 생각이 없다. 그저 사과밭을 돌볼 뿐이다. 그러다 병풍속에 들어가고 싶을 뿐이다. 그사이 마을은 마을사람들은 급격하고 변하고 있었다.

가을 병풍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그림자 하나 없는 명월, 가을바람에 굽이치는 초원, 그리고 거지 법사다. 흠집투성이 비파를 등에 맨 장님 법사는 회오리바람이 휘청이며 삭막한 황야를 헤매고 있다. 어디에도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짐승의 기척조차 없다. 그러나 비쩍 마른 그의 몸은 추억으로 가득 차,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행복했던 나날들을 생생하게 기억해낸다. 교교한 보름달의 독기 서린 빛이 등골까지 스며들어 골수를 파먹고 있지만 법사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다. 강풍이 쏟아내는 대지의 비통한 절규는 어딘지 비파소리를 닮았다. 그 소리는 병풍 옆에 깔린 호사스러운 이불 속에 들어가 있는 청년을 압도하고 영혼까지 마비시킨다. 방에 어울리지 않는 거위털 이불과 양털 요 사이에 끼어 있는 그 사내는 꼭 10년 전, 서른 살 때의 나다. (p. 67)

남자는 효자는 아니다. 텔레비전을 보며 멍청하게 웃고 있는 부모에 대해 그닥 애정이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여자였던 야에코와 결혼할 수 없었다. 그저 사과밭을 돌보며 병풍에 그려진 묵화만 바라보며 여전히 '마을주민'으로 살아갈 뿐이었다. 모두가 변해갔고 야에코도 그랬다. 그녀의 네번째 남자까지는 알았는데 그뒤로는 알려하지도 않았고 알게되어도 화가나지 않았다. 하지만 야에코가 사생아를 낳고 그 아기를 키우던 야에코의 어머니가 죽자 야에코가 마을을 떠났을때 남자는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겨울 병풍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잘 닦인 겨울 달, 얼음과 가루눈에 갇힌 산정호수, 그리고 거지 법사다. 자신이 파낸 볼품없는 눈 동굴 속에 앉아 있는 법사는 얇은 누더기를 걸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낮에도 여전히 팽창을 계속하는 얼음의 비명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비파를 타고 싶어도 손이 곱았고, 노래를 부르고 싶어도 열 때문에 목이 부어 있다. 그러나 얄팍한 늑골과 마른 살에 덮인 빈약한 가슴 속에서는 풍요로운 선율과 끝없는 낱말이 끓어올라, 파도처럼 바람처럼 되풀이되고 있다. 흐느낌 같기도 한, 호수의 얼음이 삐걱거리는 소리는 맑디맑은 한기를 자극하여 시간의 흐름까지도 얼어붙게 하고, 병풍 곁의 낡은 이불에 기어들어가 있는 중년 남자의 패기 한 조각 없는 회색빛 영혼을 마비시키고 있다. 전기담요와 전기요 사이에 끼어있는 그 사내는 40년하고 10개월을 산, 현재의 나다. (p. 92)

여전히 병풍없이 잠들지 못하고 여전히 사과밭을 돌보며 여전히 마을주민으로 살고 있는 남자는 이제 혼자다. 백구는 떠난지 오래되었고 야에코도 진즉 떠났었고 부모도 저세상으로 떠났다. 완전히 혼자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살던데로 그냥 살고 있다. 하지만 눈이 엄청나게 많이 오던 겨울 어느날 병풍속의 법사가 죽었다.

나를 대신해 법사가 방랑했다. 40년간 떠돌아다녔지만 사과밭 골짜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허나 법사는 마음껏 살았다. 야에코 또한 후회없이 살았다. 그녀의 40년은 나의 시시한 40년과는 비교하지 못할 만큼 빨갛게 농익어 있다. 야에코는 제 뜻대로 이 세상을 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대로 살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특히 마을을 나가서 다시 마을에 돌아올 때까지의 10년은 상상을 초월하는 나날이었으리라. (p. 109)

사람들은 잘 때마다 쇠약해진다.

해줄 만한 일은 다 해주었다. (p. 112)

눈 무게 때문에 사과나무 가지가 휘청거린다. (p. 113)

굵은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p. 114)

조금 전까지 마을 하늘에 떠 있던 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p. 115)

사계절의 병품 그림속에 남자의 인생이 모두 들어있었다. 한걸음 떨어져 병풍을 바라보듯 그렇게 자신의 인생도 떨어져 바라보며 살았다. 자신의 사과밭을 돌보면서도 가보지못한 골짜기 사과밭을 생각하며 살았다. 거지법사의 가난한 삶은 남자의 가난한 마음과 닿아있고 거지법사의 방랑은 마을을 떠나지못하는 남자의 삶과 닿아있고 거지법사의 스러져가는 비파소리는 남자의 사랑과 닿아있었다. 그렇게 야에코가 마을에 돌아왔을때 거지법사는 죽었다.

<조롱(鳥籠)을 높이 매달고>

어느새 내 '전반기'는 끝나 있었다. 과연 내가 42년이라는 세월을 헤쳐온 사내일까? 확실한 증거라도 있는 걸까? (p. 121) 20년을 일하고, 자존심까지 바치고, 결국에는 머릿속까지 의심받고서 손에 남은 건 바로 그 돈이었다. 또한 폐차 직전의 승용차와 말라빠진 늙은 개, 그 무거운 피로감과 될 대로 되라는 마음뿐이었다. (p. 122)

"나지도 않는 소리가 들리거나 있지도 않은 사물이 보이면, 이미 우리 병원의 훌륭한 환자입니다" (p. 119) 라는 의사의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는 그동안 자신이 속해왔던 곳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M마을을 떠난지 30년이 지났지만 그동안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내쳐졌다. 그리고 나지도 않는 소리가 들리고 보이지도 않는 사물을 보았다. 남자는 M마을로 향한다. 이제 더이상 아무도 살지않는다는 그 작은 마을로.

피리새 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한두 마리 지저귀는 소리가 아니다. 대부분의 집 처마 아래에는 대나무로 만든 조롱(鳥籠)이 하나씩 매달려 있다. 키우는 새는 수컷으로 정해져 있다. 그 새들은 회색 들깨와 파릇파릇한 별꽃을 번갈아 쪼아 먹고, 찬물을 마시고, 분홍빛 목을 떨어 절묘하게 지저귄다. 그 소리는 바람 소리나 파도 소리, 갓난아기의 웃음소리와도 조화를 이룬다. (p. 141)

가난에 찌든 삶이었지만 자신의 어린시절 10년이 오롯이 담긴 곳, M마을은 그에게 고향인 셈이다. 어려운 형편의 삶들이었지만 그래도 M마을에서는 누구나 조롱 하나쯤은 걸고 살았다. 다만 남자의 토막집에만 그 조롱이 걸리지 않았던 듯 하다. 그마저도 힘든 집이 남자의 집이었다. 그래도 피리새의 소리는 어디서든 들을 수 있었다. 피리새의 소리를 쫓아 돌아온 M마을, 폐가만이 몇 채 남아있는 그곳에서 남자가 처음 본 것은 모래위에 흩어져 있는 말발굽 자국이었다. 400여년전 외딴 섬에 버림받았다는 세명의 무사들이 탔을 그 말들이 남긴 흔적이었다. 남자가 어렸을땐 1년에 몇번 보았던 그들을 30년이 지나고 돌아온 후에는 수시로 볼수 있었다. 남자는 들리지 않는 피리새의 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기마무사들을 보며 M마을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생각해보면 겁에 질려 살아온 40여년 이었다. 잃는 게 두려워 분투했음에도 나는 차례차례 잃어만 갔다. 그러나 나는 많은 것을 잃었기에 나 자신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 내 주위에는 나 밖에 없다. 나는 그런 나에게 눌리어 숨이 막혔다.(p. 151)

오두막 처마에는 대나무 조롱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저귀는 새는 틀림없는 피리새였다. (p. 162)

멀쩡해보이는 폐가 하나를 골라 임시거처를 만든 남자는 버려진 마을에서 혼자 고립을 자초하며 살다가 어느날 외딴 곳에서 오두막을 발견한다. 그 오두막에는 노인이 피리새 조롱을 걸어놓고 살고 있었다. 강제로 뺏다시피 억지로 돈을 쥐어주고 조롱을 가져왔지만 며칠 후 조롱은 다시 노인의 오두막에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노인에게는 시내에서 일하는 빨간구두를 신은 딸이 있음도 알게 된다. 중년의 나이에 거리에서 몸을 팔며 늙은 아비를 보살피는 빨간구두를 신은 딸이 있음을...

나는 불행의 밑바닥에 있다. 쓸데없는 걸 발견했다는 후회는 곧바로 반성으로 이어졌다. 나는 자신을 속이고 있다.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결국 나는 이대로 살다가 죽겠지. 틀림없다. 추락할 대로 추락해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남자, 그게 바로 나였따. 아내와 자식에게 내쫓기고, 직장도 잃고, 돌팔이 의사에게 머리가 이상하다는 얘기를 듣고, 사람보다 믿던 개는 죽어버리고, 겨우 손에 넣은 피리새마저 빼앗긴 40대 남자. 그게 바로 나였다. 틀림없이 M마을보다 내가 훨씬 빨리 풍화하고 있다. (p. 226)

남자는 분노한다. 빨간구두의 여자에게 그 여자의 아비인 노인에게 혼자 밑바닥으로 추락한 자신에게 분노한다. 그 분노를 노인에게 퍼붓던 날 노인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자에게 말한다. "자넨 마음이 가난하고 비열해!" (p. 245) 그리고 얼마후 피리새 조롱이 남자의 머무는 폐가의 현관에 놓여져 있었다.

느릅나무에 기어올라가 조롱을 높이 매달았다. 느릅나무는 잎사귀가 난 부분에 연한 노란색을 띤 작은 꽃을 담뿍 달고 있었다. 하늘에는 수많은 잠자리가 날고 있었다. 나는 조롱에 달린 문을 올려서 열어젖히고, 그것이 내려오지 못하게 고무줄로 꽉 묶었따. 피리새는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조롱 안에서만 지저귀었다. 피리새는 내가 언덕을 내려가고 나서 한참 후에야 바람 속으로 날아갔을 것이다. 적어도 먹이가 떨어질 때쯤에는 날아갔으리라. 설마 그대로 조롱 안에서 죽어버리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사 그랬다 해도 내 책임은 아니다. 피리새 스스로의 선택이니까. (p. 263~264)

M마을을 떠나며 남자는 마지막이었을 피리새 조롱을 마을 언덕 높은 나무에 걸고 문을 열어놓는다. M마을은 이제 정말로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마을이 되었다. 그리고 남자는 이제 정말로 아무도 없는 고고(孤高)한 혼자가 되었다.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한 고독을 그린 수작' 이라고 했다. 문단의 이단아, 반항적인 삶, 아나키스트 기질, 엄격한 문학적 구도자 등등의 작가라고 했다. '수작'인지는 모르겠으나 '차갑고 단단한 고독'은 느낄 수 있었다. '문학적 구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구도적 문학'을 추구한다는 것은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선호하는 작가들은 작품에 작가가 작가의 삶이 온전히 투영된 글을 쓰는 작가들이다. 소설은 분명 허구이지만 그래도 작가의 진심과 마음이 담긴 글들은 전해져오는 무언가가 있다. 그저 상상으로만 그저 거짓으로만 써낸 작품과는 분명 차별적인 무언가가 있곤 했다. 나는 그런 '무언가'에 늘 마음이 끌리곤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저자의 삶이 저자 본인이 온전히 투영된 작가만의 '무언가가' 잘 담긴 작품들이었다. 다만 그 삶의 방식이 그 추구하는 방향이 나와는 좀 달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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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 개정판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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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 성장통과 함께 써내려간, 고통에 관한 고백

 

 

 

권여선 작가의 팬이 된 것은 [안녕, 주정뱅이] 라는 소설집을 읽고 난 후였다. 단편집을 그닥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집은 단편하나하나 마음에 닿는 듯 했다. 특유의 알콜릭한 분위기가 취한듯 아닌듯 인물한명한명에 숨을 불어넣고 있었다. [레몬]이라는 작품은 처음부터 온전히 읽었으면 좋았을껄 출판사에서 일부 발췌한 가제본부터 읽었더니 스릴러로 짜깁기한 발췌가제본과 작가 특유의 느린 호흡의 본편이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온전한 맛을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 그리고 이 작품 [토우의 집] 을 만났다.

우리는 삼악동에 삽니다.

삼벌레고개요?

아뇨, 삼악동이요, 삼악동.

그러니까 삼벌레고개요.

경사를 끼고 형성된 모든 동네가 그렇듯 삼벌레고개에서도 재산의 등급과 등고선의 높이는 반비례했다. (p. 10~11)

익숙한 동네 전경이 아닐 수 없다. 이름하여 산동네 라면 다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동네 이름이 있어도 특유의 별칭으로 불리는 그런곳, 아랫동네와 윗동네가 확연히 구분되는 그런곳, 비탈을 올라가야 집이 나오는 그런곳...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엔 이런 산동네가 참 많았는데... 언제부턴가 그 비탈진 경사에도 아파드들이 들어서는걸 보면 새삼 격세지감을 느끼곤 한다.

우물집 안주인인 순분은 살짝 하자가 있는 식모를 싼값에 알차게 부리는 재주 외에도 집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세놓아먹는 재주도 겸비하고 있었다.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는 우물집엔 무려 네 가구가 살았는데 크든 작든 머릿수만 헤아리면 도합 열세 식구나 되었다. (p. 12)

산동네 집은 작은 면적일수록 많은 인원이 사는 묘한 곳이다. 부엌이 따로 있어 원래 세를 놓을 수 있게끔 되어있는 곳도 있지만 방하나만 세를 놓을 수도 있는 곳이 그동네 집이었다. 대문 하나 열고 들어가면 방마다 다른 가족이 살고 있달까... 이또한 예전엔 참 흔한 풍경이었는데...

삼벌레고개에서 행해지는 모험의 등급도 고갯길의 등고선에 따라 나뉘었다. 아랫동네 소년들은 집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았고 부모 몰래 불량 냉차를 사 먹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축이었다. 반대로 윗동네 소년들은 극히 불온하고 위험해, 모험이라기보다 범죄에 가까운 짓거리에 물들어 있었다. 결국 소년다운 모험은 삼벌레고개 중턱 소년들의 몫이었다. '높이의 모험' 과 '넓이의 모험'은 중턱 소년들이 즐기는 모험의 씨실과 날실이었다. 높이의 모험은 윗동에 꼭대기에서 이루어졌고, 넓이의 모험은 아랫동네 개천가에서 이루어졌다. (p. 13)

사는 곳이 다르면 노는 물도 다르기 마련이었다. 산동네 중간즈음에 위치한 우물집은 집앞에 오래된 이제는 안쓰는 말라버린 우물이 있어서 우물집이라고 불렸다. 이 우물집의 안주인인 순분에게는 금철과 은철이라는 형제가 있다. 어느날 새로 세들어온 새댁네 식구는 영이와 원이 라는 자매가 있었다.

갓 결혼한 것도 아니고 딸도 둘이나 있고 나이도 많았지만, 잘난 체하는 새댁은 그 후로도 쭉 새댁이라 불렸다. 새댁의 말투와 몸짓에는 새댁만이 가지고 있을법한 야릇한 급진성이 깃들어 있었다. 삼벌레고개 중턱에서는 애들을 격일제로 두들겨 패지 않고 남편을 몹시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새댁스러울 수 있었다. 세상에 그런 어이없는 참을성과 별난 열정을 짧은 새댁 시절 말고 누가 계속 지니고 있을 수 있겠는가. (p. 19)

그런게 있다. 영원히 '새'라는 접두어가 붙는 존재가. 예를들어 결혼하면 불리곤 하는 '새언니' 는 할망구가 되어도 새언니다. 그에 반해 아가씨는 영원히 아가씨이고. 그렇게 낯선 존재로 영원히 한 가족으로 묶여 사는 그런 호칭들이 있다. 여기서 '새댁'은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한집에 살지만 결코 같아질 수 없는 존재 하지만 한 공동체로 묶인 낯설지만은 않은 존재. 여하튼 여기서 새댁은 아마도 영원히 새댁일 것이다.

소설의 문체가 참 향토스러웠달까 전원스러웠달까... 가끔 '얼쑤' 하고 추임새를 넣어주고 싶을만큼 이 작품 속 작가의 문체는 묘하게 옛날틱했다. 흥이 나는 민요같기도 하고 한이 서린 판소리같기도 하고 묘한 리듬감이 읽는 내내 마음을 절절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우리가 스파이라는 거 안 잊어먹었지?"

"안 잊어먹었어"

"이제 활동을 시작해야 해"

"알았어"

"내일 아침 먹고 우물로 나와"

"응"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우물 뒤에 숨어 있어"

"걱정 마" (p. 45)

일곱살 동갑내기 은철과 원이는 단박에 친해진다. 매일 붙어다니며 이런저런 놀이를 했는데, 원이가 어디선가 알게된 '스파이'라는 단어를 은철에게 알려주면서 둘은 '스파이 놀이?!'를 하게 된다. 두 꼬맹이는 마을사람들의 정보를 캐묻거나 귀동냥하며 둘만의 스파이활동을 이어나간다. 꼬맹이들이 어른들에게 묻는 첫 질문은 항상 '이름' 이 뭐냐는 것이었다.

동창이 의례적이고 소극적으로 말부리를 따면 새댁은 가능한 한 길고 장황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말을 먼저 꺼내는 쪽은 언제나 동창이었고 새댁은 침묵을 감내하며 동창이 어떤 화제든 먼저 꺼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너덧 명의 동창 이름을 들먹거리며 지루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동안 원은 얌전히 앉아 있었다.

"나 사는 게 이렇다, 효경아"

"문숙이 네가 나보다는 형편이 나을 줄 알았는데. 상호씨 직장이 안정적이라"

"직장이 있으면 뭐 하니? 여기저기 뜯기는 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 뜯겨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런 사정 모를 거야"

"뜯기는 구나"

"뜯기지. 뜯겨도 이만저만 뜯겨야 말이지"

"애들은 점점 커가는데"

"그래. 애들은 커가지" (p. 82, 83)

새댁은 오랜만에 시내에 있는 동창의 집에 갔더랬다. 그리고 본론은 꺼내지 못한채 빙빙 돌며 말을 하고 동창 또한 모르는 척 빙빙 돌며 말을 하고 그렇게 대화인지 아닌지 모를 대화를 했다. 단칸방에 네식구가 살면서 새댁이 처음으로 궁한 소리를 하러 동창네를 찾은 것 같은데, 새댁은 동창에게서 조금도 '뜯어낼' 수 없었다. 애초에 그럴 마음도 없었는데...

"내가 그놈 안 보고 산 지가 얼만에 이런 얘길 어디서 듣는 줄 아세요? 저쪽에서 벌써 녀석 근황을 다 꿰고서 나한테 연락을 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게 무슨 뜻이겠어요. 제수씨?"

"애들 고모님을 생각해보세요, 아주버니"

"내 말이 그말입니다. 누님은 천재였어요. 그렇게 재주가 많던 우리 누님이 왜 그렇게 됐습니까? 제수씨야말로 생각을 좀 해보세요"

"고모님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 생각을 해보세요, 아주버니"

"제수씨, 세상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때가 어느 땐데요. 제수씨가 잘 몰라서 그렇지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제수씨도 계속 교편을 잡았어야 했어요" (p. 94, 95)

남편 모르게 처음 찾은 시아주버님 이었다. 원이에게 처음 인사시킨 큰아버지였다. 하지만 ...

"너도 잘했고 나도 잘했으니 사백 번 잘했다. 느이 아버지도 뭐라고는 못 하실 거다. 그런 위험한 일을 그렇게 허술한 데서들...... 그래. 이번일 가지고 그이도 더는 뭐라고 못 하겠지. 이제 다시는 안 갈거니까.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뜯어낸 거니까" (p. 109)

꽤 오래전 이야기인것 같긴한데 소설은 처음부터 시간적 배경을 바로 알려주지 않는다. 이런저런 상황 설명을 보면 분명 현대는 아닌데... 소설의 1/3쯤 가서야 어림짐작으로 시간적 배경을 알게 된다. 육이오가 터지고 전후상황이 안정되었으나 사회적불안요소가 많았던 시절... 대략 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 초반즈음 같다. 새댁과 남편은 지식인층이었다. 남편이 하고 있는 일은 아마도 반사회적 활동 같다. 생활은 점점 더 궁핍해져갔고 아주버님은 양복점을 크게 하고 있었지만 남편과 연락을 하지 않고 있던 사이였다. 그곳을 찾아갔던 것이다. 새댁은. 원이를 데리고.

그럴 때면 가슴속 유리 상자에 쫙쫙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달리면 달릴 수록 그의 마음은 심하게 베었지만, 파란호스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로 항상 질척거리는 창자처럼 깊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은철은 온통 신발에 진흙을 튕기며 달리고 또 달려갔다. 아 시시하다, 시시해. 칫칫! (p. 173)

하루가 멀다하고 은철은 새댁네로 가서 원이와 놀곤 했다. 새댁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도 좋고 원이와 함께 하는 소꿉놀이도 좋았다. 그러던 어느날 손님들이 오실때는 오지말라고 새댁이 하는 말을 은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마음에 그 하루 오지말라는 소리가 무척 서운했다보다. 은철은 그후로 아예 발길을 끊고 원이도 아는채 안하고 형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하지만 새댁이 부르거나 원이가 부를때면 마음이 아팠다. 어린 마음에 유리 같은 마음에 금이 가는 것 같았다...

"빨리 먹어! 씹어 먹으라고! 이거 사람이 먹는 거라고!" (p. 176)

새댁이 해주는 음식들은 은철 입에 꼭 맞았다. 하지만 은철의 집에서는 내장탕이니 닭발볶음이니 생간 같은 것이 식탁에 올라왔다. 원이를 멀리할수록 은철의 마음은 옹색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날 은철에게 반갑게 인사하던 원이에게 은철은 우악스럽게 생닭발을 입에 욱여넣어버렸다. 원이는 기절했다.

순분은 불구가 될지 모르는 작은아들의 시련과 괴로움, 그리고 그 강도와 길이에 상응하여 큰아들이 지고 가야 할 자책과 죄의식에 깊은 동정을 느꼈다. 그렇게 매를 때리기 좋아하던 순분이 이제 아들들에게 내릴 평생의 매는 다 내렸다고 결정한 순간, 빗자루나 막대자 연탄집게 같이 매질에 동원되었던 모든 도구는 제본성을 되찾고 바닥을 쓸거나 눈금을 재거나 연탄을 집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되었다. (p. 202)

분명 짠한 장면인데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야말로 웃픈 표현이었다고나 할까. 꼰대같은 말이지만 예전엔 정말 그랬다. 손에 잡히는 데로 집어들어 패곤 했다. 집에서는 빗자루며 먼지떨이총체로 맞고 학교에서는 대걸레자루며 지시봉으로 맞았다. 그것들 모두 본연의 임무가 있었을텐데 말이다.

"정말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짓을 할까요? 난 믿을 수가 없어요, 여보"

"저들이 보기에 말도 안 되는 건 우리니까요" (p. 220)

"얘기는 가면서 합시다. 여긴 아무래도 댁이니까" (p. 248)

뚜벅이할매가 죽고 똥순할매가 사라진 뒤 기력을 잃고 비실대던 박가는 산삼이라도 달여 먹은 듯 예전의 성질과 기세를 단박에 회복했다. 우물집 앞에 형사 둘이 불침번을 서게 된 후부터 박가는 통장으로서의 사명감에 불타올라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p. 264) 통장집도 틈만 나면 남편으로부터 반공 교육을 받아 꽤 유식한 소리를 떠들어댈 줄 알게 되었다. 그 아슬아슬한 소문의 가로장을 밟고 오르다 보면 삼벌레고개 전체에 파다하게 퍼진 흉흉한 소문의 오케스트라를 들을 수 있었다. (p. 265)

설마설마 했는데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남편은 붙잡혀가고 새댁대가 세들어사는 우물집앞엔 형사들이 지키고 섰다.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말은 가장 무서운 말은 '빨갱이'였다.

"무서운데 멈출 수가 없어요, 저놈들이 멈추지 않으면 우리도 멈출 수가 없어요" (p. 269)

원은 가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 친구들에게 간첩 중에는 좋은 간첩도 있고 나쁜 간첩도 있는데 좋은 간첩을 스파이라고 한다고 큰소리로 얘기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데 간첩은 그렇다치고 빨갱이는... 알 수 없었다. 담임선생님은 짝의 귀를 물어뜯은 원을 야단치는 대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했다. (p. 278)

그래도 새댁네는 다행이었다. 집주인 순분은 새댁에게 죽을 쑤어먹였고 이제막 1학년으로 입학한 원의 담임선생님은 원을 혼내지 않았다.

은철은 차창에 다가가 정면을 보고 앉아 있는 원의 옆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원은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은철은 알았다. 자기가 병실에서 느꼈던 것처럼, 원도 날카로운 고통이 사방에 철창을 두른 작은 방 속에 갇혀버렸다는 것을.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그 방에 원 혼자 갇혔다는 것을. (p. 327)

우물집 식구들은 하나둘 떠나가고 마지막으로 순분네와 새댁네도 떠나게 된다. 집은 새주인을 맞을 것이고 그렇게 새삶의 터전이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떠났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의 기억속에 우물집은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토우를 묻은 무덤처럼 그렇게...

나는 그들의 고통은 물론이고, 내 몸에서 나온, 그 어린 고통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고통 앞에서 내 언어는 늘 실패하고 정지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 어린 고통이 세상의 커다란 고통의 품에 안기는 그 순간의 온기를 위해 이제껏 글을 써왔다는 걸. 그리하여 오늘도 미완의 다리 앞에서 직녀처럼 당신을 기다린다는 걸. (p. 331) -작가의 말 中-

다른 책에서 말하길 작가의 말을 쓰기 싫다고 했었다. 내키지 않는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멋지게 쓰는 걸. 나는 앞으로도 권여선 작가의 '작가의 말'을 기다리지 않을 수가 없다.

오래전 이곳에 삼악산이 있었지

북쪽은 험하고 아득해 모르네

남쪽은 사람이 토우가 되어 묻히고

토우가 사람 집에 들어가 산다네

그래봤자 토우의 집은 캄캄한 무덤 (p. 329)

집이 무덤같고 사람이 토우 같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흘러간다.

그 시간을 이렇게 따듯하게 품어주는 작품이 계속 나오는한 아마도 생은 살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통의 품에 안길지라도 온기를 느낄 수 있게하는 글이 있고 그런 글을 이렇게 읽을 수 있다면 아마도 삶은 살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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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잉게 숄 지음, 송용구 옮김 / 평단(평단문화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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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나치의 폭압에 죽음으로 맞선 '백장미'

우리가 몰랐던 독일인의 저항 정신을 소설로 읽는다!

 

 

 

모든 독일인이 나치주의자는 아니었고 나치와 싸우다 죽어간 수많은 피가 있었으며 나치만큼이나 지독했던 민주화와 자유를 향한 독일인의 의지를 대표하는 인물로 한스 숄과 소피 숄이 있다고 한다. 이름에서 느껴지겠지만 둘은 남매다. 그리고 저자는 이 남매의 누나이자 언니인 잉게 숄이다. 두 동생에 대한 실명글이자 실화인데 왜 소설이라고 하는건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숄 남매는 나치에 저항한 뮌헨대학교 대학생들이 주축을 이뤘던 '백장미단'의 주동자였다. 두 남매는 단두대형에 처해졌고 가족들은 옥고를 치루긴 했으나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렇게 두 남매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전하는데 평생 노력했다.

그때 한스는 열다섯 살의 소년, 소피는 열두 살의 소녀였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조국, 동포애, 민족공동체, 향토애 따위의 말들을 귀에 익도록 들었씁니다. 이런 말들ㅇ느 우리를 감동하게 했고 학교에서나 길거리에서 이 말들이 들려올 때마다 열성적으로 귀를 기울였습니다. (중략) '조국'도 고향과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말을 사용하는 같은 민족이 사는 더 큰 고향이나 다름없지요. (p. 18) 10대에서 성인에 이르기까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업시 우리 모두는 존엄성을 인정받고 위대한 조직의 구성원이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온 국민이 창조해가는 하나의 과정과 하나의 운동에 우리가 동참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p. 21)

숄 남매들이 어렸을때 작은 고향마을에서도 애향심은 뜨거웠다. 큰 도시로 나와 살게 되면서 조국애로 그 마음은 확대되었고 그 당시 독일을 휩쓸었던 히틀러사상에 어른아이 할 것없이 빠져들었다. 모든 활동이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빠져들고 체험하면 할 수록 이상한 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진정한 자유를 열망하여 참여했으나 활동은 억압적이었다.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고 믿었었으나 실상은 불행에도 눈감아야 했다.

이럴 수가! 그때까지 한 점의 불꽃처럼 미미했던 의심이 마침내 깊은 슬픔으로 변하더니 결국 분노의 불길로 타오르고야 말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순수한 믿음의 세계가 산산이 부서져 조각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조국을 이런 모습으로 망가뜨렸단 말인가요? 자유도 거짓, 번영의 삶도 거짓, 조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발전과 행복도 거짓이었습니다. (p. 30)

실상을 깨닫게 되었을때 그 실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준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히틀러 독재의 모순과 오류를 지적하고 알려주면서 남매들에게 '시대가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나는 너희가 인생을 올바르고 자유롭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라고 응원해주었다. 남매들은 '청소년회'를 자체적으로 결성해서 자유롭게 가치관을 형성해 나아갔고 대학생이 되어 뮌헨에 갔을때 더욱 심도깊게 삶을 고민하고 성찰하게 된다.

"진실을 말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마침내 나타나고야 말았군" (p. 51)

1942년 우편함에서 발신인 없이 복사된 편지를 발견했는데 내용은 뮌스터의 신부가 미사에서 들려준 설교문의 내용을 옮긴 것이었다. 주교는 뮌스터 지역에서 벌어진 약자들에 대한 폭압적 행위들에 대해 고발하고 있었다. 이 편지와 교수들과의 대화와 친구들과의 토론을 통해 자극받고 성장한 남매와 친구들은 저항활동을 계획하게 된다.

나치를 비판하는 전단들이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떠돌아다닌 것이었습니다. 대량으로 복사해 퍼뜨린 전단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은 흥분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무언가를 해냈다는 승리감과 끓어오르는 열정, 역겨워하는 거부감과 치를 떠는 분노가 뒤섞여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p. 83)

모든 활동은 일단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야 뭐라도 시작해볼 수 있다. 숄남매와 친구들이 시작한 행동은 현실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지시키는 것이었다. 전단지 배포활동은 문구작성부터 배포까지 게슈타포의 감시를 피해 살떨리는 긴장속에서 진행되는 만큼 성취감도 남달랐다.

신문은 날마다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일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p. 113)

한스와 그의 친구들은 이런 생각에 젖어들었습니다. 대도시마다 그런 저항 단체가 하나둘씩 연이어 생겨난다면 그 단체들로부터 태어난 저항의 정신은 독일의 모든 장소로 확산할 것이라고. (p. 123)

언론이 침묵할수록 지하에 숨어든 지성인들은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그 중심에 대학생들이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나라의 70~80년대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세계2차대전 시기의 일제치하의 독립운동을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역사에서 그러했듯이 숄남매와 친구들은 결국 붙잡히고 사형선고를 받는다.

"우리의 행동을 통해 수천 명의 의식이 깨어나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내 죽음도 헛된 것은 아닐 거야" (p. 139)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살아야 해.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p. 145)

남매와 친구들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지만 역시나 이들의 죽음은 언론에서 배반자의 죽음으로 짧게 언급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마침내 수백만 명을 억누르는 실체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고 비판하는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엉터리 전설은 없애버리자"라고 독일인들에게 호소했던 헬무트 폰 몰트케를 비롯한 저항 운동가들이 저항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p. 163)

실패했다고 해서 그 활동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활동들이 있었기에 그렇게라도 독일인의 양심이 지켜졌기에 지금의 독일이 있게 됐을 것이다. 독일인 모두가 나치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독일총리가 유태인학살에 대해 말없이 무릎꿇고 사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보니 어떤 면에선 지금의 일본이 조금 이해되는 면도 있다. 폭압이 극심했을때조차 자성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그 폭압이 과거의 역사속으로 묻힌 현재에 와서 더더욱 그런 목소리가 생겨날 바탕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고... 결국 일본은 영원히 사죄라는 생각을 못하게 되는게 아닐까 하고...

짧은 본문이 끝나고 나면 부록으로 백장미단의 전단 들과 독일 저항운동 선언문 등이 실려있는데 그 절절함이 당대에 읽었으면 몹시 마음을 울렸을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 문장들 사이사이에 녹아있는 고전을 보며 교육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기도 했다. 이 책이 최근에 나온 신간이라서 그동안 나치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못나오다가 늦게 나온걸까 했었는데 아니었다.

잉게 숄의 실명소설 <백장미>는 한 명의 독문학자와 한 명의 번역가에 의해 각각 <백장미의 수기> ,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백장미의 수기>는 독문학자가 번역한 작품답지 않게 원문을 수십 군데 누락시켰고, 무수한 오역을 범했다. 인명, 지명, 학술 용어 들도 잘못 표기한 것이 많았다. 독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번역가가 옮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앞서 출간된 <백장미의 수기>를 거의 베끼다시피 했다. 그래서 누락된 부분, 오역된 부분, 인명, 지명, 학술 용어의 오기등이 대부분 일치한다. 이는 잇어서는 안될 불상사이며, 잉게 숄의 원작 소설을 모독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번역서에서 잉게 숄의 원작을 가능한 오역없이 번역하고, 원문을 누락시키지 않으며, 인명과 지명과 학술 용어의 정확성을 재생하는 윤리를 철저히 지키고자 최선을 다했다. (p. 226~227)

작고 아담한 사이즈에 본문이 20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글 임에도 불구하고 초판본에서 그렇게 오역과 누락이 많았다니 의외다. 여하튼 이렇게 자신있게 지적하고 수정했다니 다행이다 싶긴 하다.

실명과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수기'라고 하는게 맞을 것 같지만 수기라고 하기에도 차근차근 서술되는 건 아니었기에 소설로 보면 더더욱 맥락과 개연성이 뚝뚝 끊기는 글이었다. 하지만 독일인에게 숄 남매의 존재가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보는 의미있는 시간을 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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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읽는 말 - 4가지 상징으로 풀어내는 대화의 심리학
로런스 앨리슨 외 지음, 김두완 옮김 / 흐름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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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네 가지 방식으로 대화한다

대립의 티라노사우루스, 순응의 쥐, 통제의 사자, 협력의 원숭이

당신은 그리고 상대는 어떤 동물처럼 소통하는가

 

 

 

범죄심리학자 부부가 미국 정보기관의 의뢰로 완성한, 상대를 읽어내고 움직이는 심리 대화법이라니 궁금했다. 관계를 잘 맺는 것은 결국 대화를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인데 이런저런 처세술 책들이 많긴 하지만 범죄를 밝혀내는 심리대화법 만큼 믿을만한 기술이 또 있을까 싶었다. 감추고 싶은 자신의 죄를 털어놓게 할만한 대화법이라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갈등정도야 손쉽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갖게 했다.

라포르는 자주 쓰면서도 정의하기 힘든 용어다. (중략) 성공적인 대인관계의 바탕에는 대부분 라포르가 있다. (p. 11) 재차 강조하지만, 고문은 필요악이 아니라 완벽한 무용지물임을 연구를 통해 확인했다. (p. 15)

저자들은 라포르가 타인의 마음을 여는 열쇠라고 말한다.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와 관타나모 수용소 캠프 엑스레이의 고문사건으로 인해 '고강도 신문 기법' 같은 혹독한 기법은 거센 비난에 처했다. 효과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고문은 효과가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게 당연한 수순이고 그렇게 핵심에 자리잡게 된 것이 '라포르' 형성이었다. 미국정보기관 에서는 저자들이 그동안 연구해온 라포르 전략에 관심을 갖게 됐고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분야에 이용되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는 라포르 형성에서 중요한 두 가지 측면을 다룬다. 1부에서는 솔직함, 공감, 자율성, 복기 등 라포르 전략의 네 가지 기본 원칙(HEAR 대화 원칙)을 소개한다. HEAR 대화 원칙은 타인과의 소통 능력을 키우고 자신이 바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늘려준다. 2부에서는 의사소통 유형 네 가지를 다룬다. 우리는 각각의 의사소통 유형을 이를 상징하는 각 동물에 대입해 설명한다. (p. 17)

저자들은 라포르의 다양한 활용 범위를 확인할 수 있었고 이를 범죄에서의 신문기술로서 뿐만 아니라 더 넓혀서 일상에서도 적용할 수 있으리라 여기며 이 책에서 그 활용법을 정리하고 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지고 다양한 사례와 함께 각 장마다 뒷부분에 핵심요약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술술 읽히면서도 깔끔한 책이었다.

라포르 전략이란 당신이 자리를 뜨자마자 사라지는 겉만 멀쩡한 단기성 속임수가 아니다. 상대방과 진정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렇다고 테러리스트와 친구가 되란 뜻은 아니다)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는지와 상관없이 존중, 존엄, 동정을 보일 때 진정한 라포르가 형성된다. (p. 20)

라포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종종 있었지만 자주 만나고 마음을 터놓고 그렇게 쌓인 친분 관계를 통해 범죄자의 신뢰를 얻은 후 자백을 받아내는 기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라포르가 형성된다고 해서 그것이 친해졌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진정한 관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친밀한 사이인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일상에서 적용하려면 범죄자와의 사이에서 형성되는 라포르 보다는 친밀한 라포르가 형성되는 경우가 대다수 이긴 하지만 여하튼 좀 달랐다.

누군가와 라포르를 형성하는 것은 속임수가 아니다. 라포르는 정직과 공감에 기반한 의미 있는 관계를 뜻한다. 제대로 라포르를 형성한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했는지 사실 그대로 솔직하게 말할 것이다. 그게 아무리 끔찍한 일이더라도 말이다. (p. 34)

'당신 말에 집중하고 있어요!' 중요한건 상대방에 대한 존중 이었다. 의외로 사람들은 자신의 말만 하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일이 드물다. 하지만 집중해서 경청하고 있다는 것을 신뢰감 있는 태도로 보여주기만 해도 상대가 범죄자이든 사이나쁜 친구이든 간에 그 태도만으로도 대화의 물꼬가 트인다.

라포르는 다음 네 가지 핵심 기초 위에서 형성된다. 우리는 이를 HEAR 대화 원칙 이라고 부른다.

HEAR 대화 원칙

솔직함 Honesty 의도나 느낌을 객관적이고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공감 Empathy 상대방의 신념과 가치를 이해한다.

자율성 Autonomy 상대방의 자유 의지와 선택을 보장한다.

복기 Reflection 대화가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중요하고 유의미하고 전략적인 요소를 확인하고 되짚는다. (p. 49~50)

사실 나는 이 책의 실전전략인 2부의 4가지 동물로 표현한 대화법보다 기초원리라고 할 수 있는 1부의 4가지 원칙들이 더 유용하게 다가왔다. 저자들은 상황이 얼마나 적대적이건 불편하건 상관없이 이 4가지 원칙을 반드시 지키기만 하면 아무리 어그러지고 부정적인 관계일지라도 강하고 긍정적인 관계처럼 동일하게 이 원칙이 작동하게 될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말 뜻 그대로가 아닌 좀더 융통성 있는 활용법들을 추천한다. 솔직하지만 예의없지 않게 공감하지만 동정하지 않게 자율성을 주면서도 내권리를 인정받고 복기하는 것이 단순동어반복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공감은 다정하고 친근하게 대하는 것과 별개다. 이건 공감이 아니다. 우리가 논의한 것처럼,진심어린 공감을 보이려면 상대방과 그 사람이 신경쓰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상대가 이슬람 국가 테러리스트든, 무장 강도든, 성범죄자든 상관없다. 다만 누군가의 동기, 가치, 행동을 이해한다는 게 꼭 그것들에 동의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의 입장에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판단이나 의견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진심 어린 관심을 보여야 한다. (p. 85)

솔직함, 공감, 자율성, 복기 라는 4가지 원칙은 사실 경청의 기본토대다. 집중해서 듣고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 이 기본적인 태도가 생각보다 잘 이루어지지 않기에 일상에서도 수시로 관계트러블이 생기곤 한다. 무조건 수용도 아니고 무조건 거부도 아닌 그렇다고 완전히 공감하는 것도 완전히 반대하는 것도 아닌 적절함, 이런 태도는 굉장히 오랜 노력이 필요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저자들은 좀더 쉽게 적용할 수 있도록 타인을 4가지 타입으로 분류하여 파악해봄으로써 적절한 응용법을 적용시킬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른바 애니멀 서클이다.

이 도식은 인간의 상호작용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일종의 공식으로 활용하면 특정한 의사소통방식을 빠르게 떠올릴 수 있다. 모든 대인 관계는 대략 수직적 '권력' 과 수평적 '친밀감'에 기반한 규칙을 따른다. 사자의 지배적인 행동은 다른 사람을 순종적인 쥐처럼 행동하도록 부추긴다. (중략) 이와 달리 순종적인 쥐의 행동은 지배적인 사자의 행동을 부추긴다. (p. 149) 수평축에서는 티라노사우루스의 의사소통은 역효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p. 150) 비슷하게,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강력하게, 원숭이 행동을 부른다. 협조적이고 다정하며 친근한 태도는 다른 사람에게서 본능적으로 같은 행동을 끌어낸다. (중략) 인간은 관계를 맺을 때 대부분 이 네 가지 의사소통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한다. 상호작용을 이끌거나(사자) 따른다(쥐). 협조하거나(원숭이) 갈등을 겪는다(티라노사우르스). (중략) 권력의 역학을 파악하고 나면 서클 모델을 활용해서 상대가 원하는 당신의 서클상의 위치를 예측할 수 있다. (p. 151)

어떤 상대냐에 따라서 적절한 나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실전활용서에 가깝다. 148p. 에 있는 '인간의 상호작용에 관한 애니멀 서클 모델' 은 간단하면서도 그럴 법 하다. 수직축 위에는 통제-사자 아래에는 순응-쥐 수평축에는 갈등-티라노사우르스 와 협력-원숭이 이렇게 십자 모양의 위아래 좌우로 간략하게 그려진 이 도표들을 보면서 상대방이 정확하게 이 4가지 타입으로 구분되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4가지 유형의 사이 어딘가 있으면서 변하기도 한다. 따라서 나또한 그때그때 적절하고 융통성있게 대응해줘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모든 타입에 대처 가능한가? 그또한 그렇지 않다. 그러니 일단 나의 상징적 동물을 파악해보는 것이 필요할텐데 171p. 에 '나의 서클'을 해석할 수 있는 설문과 점수에 따른 해석이 있으니 한번 해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아무리 좋은 방법이라도 내가 할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내가 할수있는 '정도'를 파악한다는 건 늘 필요한 법이다.

'이게 내 방식이야. 상대방이 알아서 대처해야 할 거야' 하고 마음먹어 버리면, 인간관계에서 최선의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을 제한하는 셈이 된다. 기술을 더 확장할 수록 이점도 더 많아진다. 대인 유연성은 정서지능과 공감력과도 관련이 있다. (p. 304)

저자들은 4가지 동물타입별 사례들을 풀어놓으면서 이 네가지 동물 유형을 자유자재로 쓰려면 유능성, 민감성, 융통성 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그리고 이런저런 가정을 통해 실전연습을 해볼 것을 제안한다. 나를 알고 상대를 알면 사실 대화가 안될래야 안될수가 없다. 중요한건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으로 우리는 모두에게 뭔가를 주었으면 한다. 당신이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고 하건 기존 관계를 더 깊이 하려고 하건, 이 책이 당신이 라포르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 이 책으로 우리는 대인 기술의 기준을 세우고, 우리 모두가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 혹은 -현실과 가상 모두의 - 공동체 안에서 이 원칙을 지키길 바란다. (p. 332) 애니멀 서클을 이해하면 나쁜 행동을 피하고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쓸 수 있는 긍정적인 기술을 발전시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p. 333) 이 모든 걸 항상, 그리고 상호작용을 하는 모든 경우에 기억할 수 있을까? 절대 아니다. (중략) 그 과정에서 차질이 생길 수도 있고, 예전 버릇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라. 계속 노력하면 거기에 맞는 보상을 얻을 뿐만 아니라 실천도 더 쉬워지고 덜 수고스러울 것이다. 명심하라. 당신이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알고 있는 것과 함께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p. 336)

아는만큼 행동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몰라서 못하는 것보다야 일단 알아놓기라도 하는게 좋다는 건 아니까 이런저런 것들을 알아내며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저자들의 기법은 응용하자고 들면 거의 모든 대화에 응용할 수도 있고, 읽고 넘기자면 그렇고그런 대화법으로 지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의 대화법을 잘 활용하면 '이 세상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든다. 그건 분명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다' 라는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여운을 남긴다. 우리는 누구나 다 더 살기 좋은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을까? 나의 대화법이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다면 한번 시도해볼법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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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심리학으로 말하다 3
게리 W. 우드 지음, 한혜림 옮김 / 돌배나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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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심리학으로 말하다]는 '심리학으로 말하다' 시리즈의 한 편으로, 일상적인 이해, 대중심리학, 학술 저서 사이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 저술된 비판적 입문서이다. (p. 8) 이 책에서 젠더라는 개념에 숨겨진 중요한 가정들을 다루고, 몇 가지 질문에 해답을 제시하며, 독자가 스스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도록 돕고 더 많은 탐구를 할 수 있도록 안내할 것이다. (p. 9)

이 책은 '심리학으로 말하다' 시리즈의 3번째 책이라고 한다. 음모론을 시작으로 신뢰, 젠더, 섹스, 다이어트, 패션, 학교폭력, 일터, 퍼포먼스, 은퇴, 셀러브리티, 음악, 애도, 중독, 운전 이렇게 15가지 주제가 번역 혹은 번역될 예정인 듯 하다. 책 사이즈가 작고 얇은 편인데다 '입문서' 라고 하니 가벼운 마음으로 그리고 심리학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심리학 책인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이 이 세계에서 우리가 하는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성姓과 젠더는 정체성의 근본 구성단위로서 우리의 관점을 형성하고, 이러한 관점을 통해 세상과 교류하는 사이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고 세상의 일부인 우리 자신을 경험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p. 14) '젠더'는 생물학적 성을 사회문화적 그리고 심리학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즉,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생물학적 특징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말한다.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 구별이며, '남성적'과 '여성적'은 젠더에 따른 구별이다. (p. 15)

세상을 살아가며 다양한 상황에서 판단을 내릴 때 각자가 지닌 가치관, 세계관 등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한 개인들의 소신에 가장 큰 영향을 미는 것이 아마도 '심리' 아닐까. 그런데 '심리'는 타고나는 부분과 자라면서 변화및발달 하는 부분이 있을텐데 '젠더' 구분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저자는 성별이 보는 사람의 생각에 달린 것이라고 말한다.

'X정자'는 XX(여자), 'Y정자'는 XY(남자)를 만들어낸다. Y 염색체의 일부 유전자는 X 염색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남자가 더 유전병에 걸리기 쉽다. 여자의 경우에는 비정형 유전자를 양쪽 부모 모두에게서 물려받아야만 X 염색체 두 개가 모두 영향을 받아 질병에 걸리지만, 남자의 경우에는 영향을 받게 되는 X염색체가 한 개밖에 없다. 따라서 염색체 측면에서 본다면 '남자'는 더 취약한 성이며, 이는 전통적인 남성중심적 관점과 상충한다. (P. 29) 배아는 자연스럽게 여성 생식계통으로 발달한다. 생물학적 작용에 의해 남자를 만들라는 지시가 없는한 여자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학자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음경은 음핵이 확대된 것으로 묘사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P. 31) 생물학적 성을 비교해보면, 호르몬은 유형보다는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나며, 남성과 여성이 분비하는 호르몬의 숫자와 범위는 사실상 동일하다. (P. 32)

생물학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뚜렷이 구분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눈에 보이니까. 하지만 그렇지도 않은가보다. 생각보다 높은 비율로 육안으로 구분할 수 없는 생물학적 구분이 되지 않는 성의 탄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전통적 심리학에서 여자는 남자에 비해 결핍과 부족의 존재로 묘사되어 왔다. 하지만 염색체측면에서 남성은 여성보다 취약하고 성기구분에 있어 남성의 성기가 여성에게 없는 것이 아니며 호르몬에 있어서도 구성에는 차이가 없었다. 호르몬에 성적 구성의 차이가 없다는 것은 결국 두 성으로의 구분보다는 개개인별 호르몬의 정도가 다 다르다는 다양성으로 성의 구분을 확장시킬 수밖에 없게 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정치가 가시적인 전문 용어 싸움처럼 되어버렸다. 모든 정체성과 성 소수자 단체를 포함할 수 있는 포괄적인 용어나, 더 중요하게는, 모두가 동의하는 용어는 아직까지 만들어지지 않았다. (P. 50)

이 책도 초반에 '젠더'란 무엇인가로 시작했듯이 어떤 분야이든 가장 기초는 '정의' 내리는 것이다. 따라서 용어 합의 문제는 간단하지가 않다. 트랜스젠더, 입소젠더, 에이젠더, 젠더퀴어, 시스젠더... 그 어떤 용어도 아직 서로가 만족할 만한 합의지점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에 성의 다양성은 더 많은 측면에서 확인되어지고 있는 듯 하다. 아직 용어도 없는데 가짓수는 자꾸 늘어가는 형편이랄까. 나와 다른 성에 대해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불러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고정불변의 구성체가 아닌 '불분명한 근사치'와 모호함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젠더는 명확하지 않은 발판을 토대로 하므로 다양한 변이와 해석이 가능하다. 자기 정체성을 나타내는 명칭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젠더가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개념에서, 사회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정체성에 대한 개념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P. 63)

세상은 이분법으로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객관식이 4지선다에서 5지선다로 그리고 그 이상으로 늘어가다가 모든 문제가 다 주관식으로 풀어야할 상황이 되버린듯 하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어떤 조사를 할때 남성인지 여성인지 의 두가지 선택란에서 골라 체크를 하곤 한다. 심리학 책들도 많은 경우 남성의 뇌와 여성의 뇌가 뚜렷이 다르다는 식으로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대중 심리학 서적들은 젠더 역할 고정관념을 확고하게 고수한다. (P. 78) 우선 지나치게 단순화딘 '두 개의 두뇌'라는 용어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우리의 두뇌는 한 개이고, 일부 특수화딘 두 개의 반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반구와 좌반구는 광범위하게 상호 교류한다. 자기공명영상을 이용한 최근 연구에서는 엄격하게 편향된 두뇌 유형에 대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연구 결과는 머리기사에 실리지 않았다. 젠더에 관한 연구도 마찬가지이다. 대중 미디어에서 최신 이론과 연구는 고정관념에 부합하고 '쉽게 이해될 수 있는'것에 미려 무시된다. (P. 79) 증거를 바탕으로 '성별 전쟁'에 이의를 제기하는 연구는 종종 '정치적 올바름이 도를 지나쳤다'라는 명목으로 조소당하고 일축된다. (P. 80)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성에 대한 고정관념들이다. 남자는 이럴때 이렇고, 여자는 저럴때 저렇고. 이런 식의 분석은 두 성의 차이점을 연구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왔었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할수록 이러한 양분법의 기준이 될만한 근거들은 찾을 수 없었다. 염색체에서도 호르몬에서도 뇌연구에서도 확실하게 존재하리라고 믿었던 차이점 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동안의 고정관념들을 고수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남자 뇌에만 있는 기능이 있고 여자 뇌에만 있는 기능이 있다면 성적 이형화 개념이 성립한다. 연구팀은 남성성-여성성의 스펙트럼에서 양극단에 위치한, 일관되게 나타나는 뇌의 특징은 거의 없다고 밝혔다. 인간의 뇌는 남성 뇌와 여성 뇌의 뚜렷한 두 개의 범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뇌의 대부분은 독자저긴 기능이 '모자이크'를 이루며 구성된다. 거침없는 비평가로 잘 알려진 인지 신경과학자 지나리폰은 남자와 여자가 다른 행성에서 왔다는 접근법을 '신경학계의 쓰레기'라고 표현했다. (P. 102) 연구결과들은 생물학적 본질주의의 관점에 이의를 제기한다. 남자와 여자는 차이점보다 유사성이 더 많다. 게다가 그 차이점은 질적인 것이 아닌 양적인 것에 있는 경우가 더 많다. (P. 111)

생물학적으로 가장 뚜렷하게 남성과 여성이 구분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생물학적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분은 누구에게 왜 필요했던 것일까 라는 점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세계는 남성의 관점에서 이해되며 그런 점에서 힘의 불균형이 존재한다. (중략) 젠더 역할 고정관념과 불평등을 이해하려면 권력 구조 관계의 체계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P. 127) 젠더 고정관념이 세상을 구조화하는 방법일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중략) 모두 아울러 짧게 고찰한 결과들은 우리가 이분법 체계에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생물학적 필연성만으로는 젠더에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들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사회적 역할과 요인을 더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P. 138)

뚜렷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눈 체계는 결국 상하로 나누기 위함이었다. 누군가는 위에 있고 누군가는 아래 있어야 했다. 수직적 관계에서는 뚜렷한 구분이 당연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수직체계에 의문을 제기하자고 이 책은 말한다. 우리 모두는 똑같은 인간이다 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사실 그동안 모두 똑같은 인간은 아니어왔고 지금도 그러하기에 여기저기서 사회적 문제들이 이러한 차별과 불평등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중이다. 수평적 관계는 사실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인류는 다신론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들에는 흥미로운 자취가 남아 있다. 성서의 창조론 이야기에서 하나님God은 '엘로힘Elohim'이라는 단어에서 번역된 것인데 이 단어는 사실 남성 명사의 복수형이다. '엘로힘'은 문자 그대로 '신들gods'을 뜻하며, 신들, 여신들, 그리고 여타 신성시되는 존재를 포함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는 인간 창조에 관해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중략) 이 이야기는 원래 인간이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양성이거나 간성이었다는 점을 내포한다. (p. 149) 첫째, 아담은 인간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로 '붉은 땅'을 뜻한다. 둘째, '쎌라tsela'라는 단어는 이 부분에서만 '갈비뼈'로 번역이 되었다. 성경에서는 '쎌라'라는 동일한 단어가 40번 사용되었는데 모두 '한쪽 면'으로 번역이 되었다. 따라서 갈비뼈가 아니라 '한쪽 면'이라는 뜻으로 번역하면, 신들은 최초의 인간을 절반으로 나누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로써 더 평등주의적인 창조 신화가 만들어진다. (p. 150)

아담의 갈비뼈에서 이브가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오역이라는 것은 수메르신화를 읽을때부터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같은 단어를 딱 한곳에서만 다르게 번역했다는 것을 읽고나니 그 저의가 짐작이 되어 다시금 마음이 어두워진다. 본래의 뜻 그 의미 그대로만 전해졌어도 얼마나 좋았을까... 오역.. 왜곡이란 참...

하지만 '만약 모든 것이 유동적이라면, 우리가 새로운 남자, 새로운 여자, 새로운 관계들로 구성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젠더가 미치는 더 큰 영향들은 무엇일까? (p. 161)

점점 더 기존의 상식들이 흔들리고 점점 더 다양성이 다변화되는 가운데 용어조차 아직 정립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모든 것이 유동적이라면 우리가 무엇을 정리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정리가 필요하긴 한 것일까? 연구가 생각이 가능하긴 한 것일까?

우리는 젠더라는 이야기에 맞춰 태어난다. 젠더는 '그냥 원래 그런 거야' 라는 이야기이다. 젠더는 상향식이면서 하향식이다. 생물학의 사회적 해석이며 가치의 사회적 표현, 즉 '자연계의 질서'이다. 생물학적 본질주의, 남성중심주의, 권력 이 모두가 제한된 자원을 두고 벌어지는 제로섬 게임이라는 이데올로기 안에서 작용한다.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시스템에 대한 도전은 조롱을 당하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불길하게 들리겠지만,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 (p. 171) 새로운 젠더 심리학은 개인적, 사회적, 심리적 편견을 배제한 젠더화되지 않은 용어를 사용해 인간의 특성과 특징을 재평가하고, 계층적이고 남성중심적인 관점을 넘어설 다른 방안을 고찰할 것이다. (p. 183)

기존에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비정상인 것이었다며 원래의 태초의 정상적인 것들로 재정립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일리는 있지만 너무 포괄적이라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과연 가능할것인가...

이분법의 부정적 측면은, 세상을 내집단과 외집단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다르지만 평등한 관점'은 지나친 포부일까? 우리는 현실적으로 낡은 체계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새로운 체계, 새로운 패러다임은 어떨까?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젠더 체계의 변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대중 심리학적 자기 계발서는 젠더 체계가 불가피하다고 선언한다. 그러면 우리는 삶의 부조리를 비웃으며 현 상황을 고수해야 할까?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제로섬 게임에 갇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젠더 역할 고정관념의 포로인가? (p. 187) 젠더는 되는 것이자 속하는 것이다. 젠더는 개인의 정체성이면서 사회와의 관계이다. 따라서 젠더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우리는 사회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재평가하고 재협상하고 재천명해야 하며,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같은 작업을 해야 한다. (p. 188)

'심리학으로 말하다 - 젠더' 라는 책 제목을 봤을땐 그저 여성과 남성의 심리를 각각 이해할 수 있는 팁을 주는 그런 심리학대중서 겠거니 예상했었다. 그러나 오히려 정반대의 책이었다. 이분법적 구분 자체를 문제시삼는 것으로 시작하는 책이었다. 기존 질서에 대한 모든 것에 물음표를 던지게 하는 책이었다. 하지만 그어떤 뚜렷한 지침이나 안내는 없는 책이었다. 유일한 해법 제시격인 결말 역시 호기심과 관심 그리고 결국 질문으로 끝나는 책이었다. 이 책이 과연 그동안 쌓아져 온 남녀구분적 심리학의 토대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인가....

계속해서 질문하고 계속해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계속해서 귀를 기울여라.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 (p. 190)

축하인지 아닐지는 읽는 이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이 마지막 문장이 좀 후덜덜했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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