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시의 함축성과 소설의 서사성을 갖춘

천 개의 시어가 빚어낸 한 편의 아름다운 소설

<달에 울다> 와 <조롱(鳥籠)을 높이 매달고> 라는 두 편의 작품이 실린 이 책의 작가는 마루야마 겐지 다. 개인적 취향상 일본소설을 좋아하지 않지만 '시적인 소설'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문학의 길이 곧 구도의 길이라며 등단 직후 고향에 틀어박혀 고고(孤高)의 작가가 되었다는 저자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두 편의 작품으로 충분히 작가만의 색깔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달에 울다>

봄 병풍에 그려진 그림은 중천에 걸려 있는 흐릿한 달, 동풍에 흔들리는 강변의 갈대, 그리고 걸식하는 법사다. 휘늘어진 버드나무 둥치에 털썩 주저앉은 법사는 달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비파를 타고 있다. 두 눈이 멀어 광대한 강변 일대에 쏟아지는 푸른 달빛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때가 꼬질꼬질한 그의 오체는 삼라만상을 그대로 포착하고 무궁한 시간과 공간에 녹아들어있다. 팽팽한 현의 떨림은 미적지근한 밤기운을 자극하여 봄을 증폭시키고, 병풍 옆의 초라한 이불 속에 기어들어가있는 소년의 아직 두부처럼 여린 영혼에도 깊이 스며든다. 볏짚을 채운 요와 고이노보리를 부수어 만든 이불 속 아이는 바로 30년 전, 이제 막 열살이 된 나다. (p. 9)

대륙에서 전쟁을 겪고 다리를 다쳐 돌아온 소년의 아버지는 괴상해져 돌아왔다. 소년이 보기엔 그랬다. 그 괴상함은 잔인함과 폭력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촌장네 헛간을 털려던 마을주민을 몰아세우는 추격전속에서 아버지는 가장 활기차 보였다. 그렇게 야에코의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야에코와 어머니는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여름 병풍에 그려진 그림은 산기슭에 걸린 초승달, 천지에 무성한 초록 풀, 그리고 거지 법사다. 높다란 바위 머리에 앉은 법사는 흠집 많은 비파를 여인처럼 끌어안고 격렬하게 술대를 치며 은은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그 음향은 후텁지근한 밤기운에 눌리어 멀리까지 가닿지는 못한다. 눈곱이 잔뜩 낀 법사의 눈은 앞이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여러 쌍의 남녀가 교합하는 모습을 한꺼번에 여기저기서 생생하게 포착한다. 바짝 마른 풀은 강렬한 기운을 쏟아내고 시든 뇌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환영을 차례차례 만들어낸다. 그 힘은 가늠하지 못할 만큼 커서 병풍 밖까지 미친다. 얇은 이불 속에 드러두은 젊은 남자의 가슴속 깊이 스며들이 피보다 더 뜨거운 영혼을 크게 동요시킨다. 군데군데 솜이 삐져나온 요와 땀내나는 값싼 담요 사이에 끼어 있는 젊은이는 꼭 20년전, 갓 스무살이 된 나다. (p. 34)

남자는 사과밭에 열심이다. 부모가 그닥 신경쓰지 않는 농사의 한 종류일뿐이지만 오직 사과밭에만 열정을 쏟는다. 하지만 마을에서 텔레비전 없는 유일한 집이고 여전히 야에코네 사과가 훨씬 맛있다. 그리고 밤이면 밤마다 야에코와 몸을 섞었다.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야에코네가 왜 마을을 떠나지 않는 이해가 안가지만 아무일도 없었음에도 남자는 다른 젊은이들처럼 도시로 떠날 생각이 없다. 그저 사과밭을 돌볼 뿐이다. 그러다 병풍속에 들어가고 싶을 뿐이다. 그사이 마을은 마을사람들은 급격하고 변하고 있었다.

가을 병풍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그림자 하나 없는 명월, 가을바람에 굽이치는 초원, 그리고 거지 법사다. 흠집투성이 비파를 등에 맨 장님 법사는 회오리바람이 휘청이며 삭막한 황야를 헤매고 있다. 어디에도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짐승의 기척조차 없다. 그러나 비쩍 마른 그의 몸은 추억으로 가득 차,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행복했던 나날들을 생생하게 기억해낸다. 교교한 보름달의 독기 서린 빛이 등골까지 스며들어 골수를 파먹고 있지만 법사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다. 강풍이 쏟아내는 대지의 비통한 절규는 어딘지 비파소리를 닮았다. 그 소리는 병풍 옆에 깔린 호사스러운 이불 속에 들어가 있는 청년을 압도하고 영혼까지 마비시킨다. 방에 어울리지 않는 거위털 이불과 양털 요 사이에 끼어 있는 그 사내는 꼭 10년 전, 서른 살 때의 나다. (p. 67)

남자는 효자는 아니다. 텔레비전을 보며 멍청하게 웃고 있는 부모에 대해 그닥 애정이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여자였던 야에코와 결혼할 수 없었다. 그저 사과밭을 돌보며 병풍에 그려진 묵화만 바라보며 여전히 '마을주민'으로 살아갈 뿐이었다. 모두가 변해갔고 야에코도 그랬다. 그녀의 네번째 남자까지는 알았는데 그뒤로는 알려하지도 않았고 알게되어도 화가나지 않았다. 하지만 야에코가 사생아를 낳고 그 아기를 키우던 야에코의 어머니가 죽자 야에코가 마을을 떠났을때 남자는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겨울 병풍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잘 닦인 겨울 달, 얼음과 가루눈에 갇힌 산정호수, 그리고 거지 법사다. 자신이 파낸 볼품없는 눈 동굴 속에 앉아 있는 법사는 얇은 누더기를 걸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낮에도 여전히 팽창을 계속하는 얼음의 비명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비파를 타고 싶어도 손이 곱았고, 노래를 부르고 싶어도 열 때문에 목이 부어 있다. 그러나 얄팍한 늑골과 마른 살에 덮인 빈약한 가슴 속에서는 풍요로운 선율과 끝없는 낱말이 끓어올라, 파도처럼 바람처럼 되풀이되고 있다. 흐느낌 같기도 한, 호수의 얼음이 삐걱거리는 소리는 맑디맑은 한기를 자극하여 시간의 흐름까지도 얼어붙게 하고, 병풍 곁의 낡은 이불에 기어들어가 있는 중년 남자의 패기 한 조각 없는 회색빛 영혼을 마비시키고 있다. 전기담요와 전기요 사이에 끼어있는 그 사내는 40년하고 10개월을 산, 현재의 나다. (p. 92)

여전히 병풍없이 잠들지 못하고 여전히 사과밭을 돌보며 여전히 마을주민으로 살고 있는 남자는 이제 혼자다. 백구는 떠난지 오래되었고 야에코도 진즉 떠났었고 부모도 저세상으로 떠났다. 완전히 혼자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살던데로 그냥 살고 있다. 하지만 눈이 엄청나게 많이 오던 겨울 어느날 병풍속의 법사가 죽었다.

나를 대신해 법사가 방랑했다. 40년간 떠돌아다녔지만 사과밭 골짜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허나 법사는 마음껏 살았다. 야에코 또한 후회없이 살았다. 그녀의 40년은 나의 시시한 40년과는 비교하지 못할 만큼 빨갛게 농익어 있다. 야에코는 제 뜻대로 이 세상을 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대로 살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특히 마을을 나가서 다시 마을에 돌아올 때까지의 10년은 상상을 초월하는 나날이었으리라. (p. 109)

사람들은 잘 때마다 쇠약해진다.

해줄 만한 일은 다 해주었다. (p. 112)

눈 무게 때문에 사과나무 가지가 휘청거린다. (p. 113)

굵은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p. 114)

조금 전까지 마을 하늘에 떠 있던 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p. 115)

사계절의 병품 그림속에 남자의 인생이 모두 들어있었다. 한걸음 떨어져 병풍을 바라보듯 그렇게 자신의 인생도 떨어져 바라보며 살았다. 자신의 사과밭을 돌보면서도 가보지못한 골짜기 사과밭을 생각하며 살았다. 거지법사의 가난한 삶은 남자의 가난한 마음과 닿아있고 거지법사의 방랑은 마을을 떠나지못하는 남자의 삶과 닿아있고 거지법사의 스러져가는 비파소리는 남자의 사랑과 닿아있었다. 그렇게 야에코가 마을에 돌아왔을때 거지법사는 죽었다.

<조롱(鳥籠)을 높이 매달고>

어느새 내 '전반기'는 끝나 있었다. 과연 내가 42년이라는 세월을 헤쳐온 사내일까? 확실한 증거라도 있는 걸까? (p. 121) 20년을 일하고, 자존심까지 바치고, 결국에는 머릿속까지 의심받고서 손에 남은 건 바로 그 돈이었다. 또한 폐차 직전의 승용차와 말라빠진 늙은 개, 그 무거운 피로감과 될 대로 되라는 마음뿐이었다. (p. 122)

"나지도 않는 소리가 들리거나 있지도 않은 사물이 보이면, 이미 우리 병원의 훌륭한 환자입니다" (p. 119) 라는 의사의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는 그동안 자신이 속해왔던 곳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M마을을 떠난지 30년이 지났지만 그동안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내쳐졌다. 그리고 나지도 않는 소리가 들리고 보이지도 않는 사물을 보았다. 남자는 M마을로 향한다. 이제 더이상 아무도 살지않는다는 그 작은 마을로.

피리새 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한두 마리 지저귀는 소리가 아니다. 대부분의 집 처마 아래에는 대나무로 만든 조롱(鳥籠)이 하나씩 매달려 있다. 키우는 새는 수컷으로 정해져 있다. 그 새들은 회색 들깨와 파릇파릇한 별꽃을 번갈아 쪼아 먹고, 찬물을 마시고, 분홍빛 목을 떨어 절묘하게 지저귄다. 그 소리는 바람 소리나 파도 소리, 갓난아기의 웃음소리와도 조화를 이룬다. (p. 141)

가난에 찌든 삶이었지만 자신의 어린시절 10년이 오롯이 담긴 곳, M마을은 그에게 고향인 셈이다. 어려운 형편의 삶들이었지만 그래도 M마을에서는 누구나 조롱 하나쯤은 걸고 살았다. 다만 남자의 토막집에만 그 조롱이 걸리지 않았던 듯 하다. 그마저도 힘든 집이 남자의 집이었다. 그래도 피리새의 소리는 어디서든 들을 수 있었다. 피리새의 소리를 쫓아 돌아온 M마을, 폐가만이 몇 채 남아있는 그곳에서 남자가 처음 본 것은 모래위에 흩어져 있는 말발굽 자국이었다. 400여년전 외딴 섬에 버림받았다는 세명의 무사들이 탔을 그 말들이 남긴 흔적이었다. 남자가 어렸을땐 1년에 몇번 보았던 그들을 30년이 지나고 돌아온 후에는 수시로 볼수 있었다. 남자는 들리지 않는 피리새의 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기마무사들을 보며 M마을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생각해보면 겁에 질려 살아온 40여년 이었다. 잃는 게 두려워 분투했음에도 나는 차례차례 잃어만 갔다. 그러나 나는 많은 것을 잃었기에 나 자신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 내 주위에는 나 밖에 없다. 나는 그런 나에게 눌리어 숨이 막혔다.(p. 151)

오두막 처마에는 대나무 조롱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저귀는 새는 틀림없는 피리새였다. (p. 162)

멀쩡해보이는 폐가 하나를 골라 임시거처를 만든 남자는 버려진 마을에서 혼자 고립을 자초하며 살다가 어느날 외딴 곳에서 오두막을 발견한다. 그 오두막에는 노인이 피리새 조롱을 걸어놓고 살고 있었다. 강제로 뺏다시피 억지로 돈을 쥐어주고 조롱을 가져왔지만 며칠 후 조롱은 다시 노인의 오두막에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노인에게는 시내에서 일하는 빨간구두를 신은 딸이 있음도 알게 된다. 중년의 나이에 거리에서 몸을 팔며 늙은 아비를 보살피는 빨간구두를 신은 딸이 있음을...

나는 불행의 밑바닥에 있다. 쓸데없는 걸 발견했다는 후회는 곧바로 반성으로 이어졌다. 나는 자신을 속이고 있다.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결국 나는 이대로 살다가 죽겠지. 틀림없다. 추락할 대로 추락해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남자, 그게 바로 나였따. 아내와 자식에게 내쫓기고, 직장도 잃고, 돌팔이 의사에게 머리가 이상하다는 얘기를 듣고, 사람보다 믿던 개는 죽어버리고, 겨우 손에 넣은 피리새마저 빼앗긴 40대 남자. 그게 바로 나였다. 틀림없이 M마을보다 내가 훨씬 빨리 풍화하고 있다. (p. 226)

남자는 분노한다. 빨간구두의 여자에게 그 여자의 아비인 노인에게 혼자 밑바닥으로 추락한 자신에게 분노한다. 그 분노를 노인에게 퍼붓던 날 노인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자에게 말한다. "자넨 마음이 가난하고 비열해!" (p. 245) 그리고 얼마후 피리새 조롱이 남자의 머무는 폐가의 현관에 놓여져 있었다.

느릅나무에 기어올라가 조롱을 높이 매달았다. 느릅나무는 잎사귀가 난 부분에 연한 노란색을 띤 작은 꽃을 담뿍 달고 있었다. 하늘에는 수많은 잠자리가 날고 있었다. 나는 조롱에 달린 문을 올려서 열어젖히고, 그것이 내려오지 못하게 고무줄로 꽉 묶었따. 피리새는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조롱 안에서만 지저귀었다. 피리새는 내가 언덕을 내려가고 나서 한참 후에야 바람 속으로 날아갔을 것이다. 적어도 먹이가 떨어질 때쯤에는 날아갔으리라. 설마 그대로 조롱 안에서 죽어버리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사 그랬다 해도 내 책임은 아니다. 피리새 스스로의 선택이니까. (p. 263~264)

M마을을 떠나며 남자는 마지막이었을 피리새 조롱을 마을 언덕 높은 나무에 걸고 문을 열어놓는다. M마을은 이제 정말로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마을이 되었다. 그리고 남자는 이제 정말로 아무도 없는 고고(孤高)한 혼자가 되었다.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한 고독을 그린 수작' 이라고 했다. 문단의 이단아, 반항적인 삶, 아나키스트 기질, 엄격한 문학적 구도자 등등의 작가라고 했다. '수작'인지는 모르겠으나 '차갑고 단단한 고독'은 느낄 수 있었다. '문학적 구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구도적 문학'을 추구한다는 것은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선호하는 작가들은 작품에 작가가 작가의 삶이 온전히 투영된 글을 쓰는 작가들이다. 소설은 분명 허구이지만 그래도 작가의 진심과 마음이 담긴 글들은 전해져오는 무언가가 있다. 그저 상상으로만 그저 거짓으로만 써낸 작품과는 분명 차별적인 무언가가 있곤 했다. 나는 그런 '무언가'에 늘 마음이 끌리곤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저자의 삶이 저자 본인이 온전히 투영된 작가만의 '무언가가' 잘 담긴 작품들이었다. 다만 그 삶의 방식이 그 추구하는 방향이 나와는 좀 달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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