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우의 집 - 개정판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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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 성장통과 함께 써내려간, 고통에 관한 고백

 

 

 

권여선 작가의 팬이 된 것은 [안녕, 주정뱅이] 라는 소설집을 읽고 난 후였다. 단편집을 그닥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집은 단편하나하나 마음에 닿는 듯 했다. 특유의 알콜릭한 분위기가 취한듯 아닌듯 인물한명한명에 숨을 불어넣고 있었다. [레몬]이라는 작품은 처음부터 온전히 읽었으면 좋았을껄 출판사에서 일부 발췌한 가제본부터 읽었더니 스릴러로 짜깁기한 발췌가제본과 작가 특유의 느린 호흡의 본편이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온전한 맛을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 그리고 이 작품 [토우의 집] 을 만났다.

우리는 삼악동에 삽니다.

삼벌레고개요?

아뇨, 삼악동이요, 삼악동.

그러니까 삼벌레고개요.

경사를 끼고 형성된 모든 동네가 그렇듯 삼벌레고개에서도 재산의 등급과 등고선의 높이는 반비례했다. (p. 10~11)

익숙한 동네 전경이 아닐 수 없다. 이름하여 산동네 라면 다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동네 이름이 있어도 특유의 별칭으로 불리는 그런곳, 아랫동네와 윗동네가 확연히 구분되는 그런곳, 비탈을 올라가야 집이 나오는 그런곳...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엔 이런 산동네가 참 많았는데... 언제부턴가 그 비탈진 경사에도 아파드들이 들어서는걸 보면 새삼 격세지감을 느끼곤 한다.

우물집 안주인인 순분은 살짝 하자가 있는 식모를 싼값에 알차게 부리는 재주 외에도 집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세놓아먹는 재주도 겸비하고 있었다.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는 우물집엔 무려 네 가구가 살았는데 크든 작든 머릿수만 헤아리면 도합 열세 식구나 되었다. (p. 12)

산동네 집은 작은 면적일수록 많은 인원이 사는 묘한 곳이다. 부엌이 따로 있어 원래 세를 놓을 수 있게끔 되어있는 곳도 있지만 방하나만 세를 놓을 수도 있는 곳이 그동네 집이었다. 대문 하나 열고 들어가면 방마다 다른 가족이 살고 있달까... 이또한 예전엔 참 흔한 풍경이었는데...

삼벌레고개에서 행해지는 모험의 등급도 고갯길의 등고선에 따라 나뉘었다. 아랫동네 소년들은 집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았고 부모 몰래 불량 냉차를 사 먹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축이었다. 반대로 윗동네 소년들은 극히 불온하고 위험해, 모험이라기보다 범죄에 가까운 짓거리에 물들어 있었다. 결국 소년다운 모험은 삼벌레고개 중턱 소년들의 몫이었다. '높이의 모험' 과 '넓이의 모험'은 중턱 소년들이 즐기는 모험의 씨실과 날실이었다. 높이의 모험은 윗동에 꼭대기에서 이루어졌고, 넓이의 모험은 아랫동네 개천가에서 이루어졌다. (p. 13)

사는 곳이 다르면 노는 물도 다르기 마련이었다. 산동네 중간즈음에 위치한 우물집은 집앞에 오래된 이제는 안쓰는 말라버린 우물이 있어서 우물집이라고 불렸다. 이 우물집의 안주인인 순분에게는 금철과 은철이라는 형제가 있다. 어느날 새로 세들어온 새댁네 식구는 영이와 원이 라는 자매가 있었다.

갓 결혼한 것도 아니고 딸도 둘이나 있고 나이도 많았지만, 잘난 체하는 새댁은 그 후로도 쭉 새댁이라 불렸다. 새댁의 말투와 몸짓에는 새댁만이 가지고 있을법한 야릇한 급진성이 깃들어 있었다. 삼벌레고개 중턱에서는 애들을 격일제로 두들겨 패지 않고 남편을 몹시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새댁스러울 수 있었다. 세상에 그런 어이없는 참을성과 별난 열정을 짧은 새댁 시절 말고 누가 계속 지니고 있을 수 있겠는가. (p. 19)

그런게 있다. 영원히 '새'라는 접두어가 붙는 존재가. 예를들어 결혼하면 불리곤 하는 '새언니' 는 할망구가 되어도 새언니다. 그에 반해 아가씨는 영원히 아가씨이고. 그렇게 낯선 존재로 영원히 한 가족으로 묶여 사는 그런 호칭들이 있다. 여기서 '새댁'은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한집에 살지만 결코 같아질 수 없는 존재 하지만 한 공동체로 묶인 낯설지만은 않은 존재. 여하튼 여기서 새댁은 아마도 영원히 새댁일 것이다.

소설의 문체가 참 향토스러웠달까 전원스러웠달까... 가끔 '얼쑤' 하고 추임새를 넣어주고 싶을만큼 이 작품 속 작가의 문체는 묘하게 옛날틱했다. 흥이 나는 민요같기도 하고 한이 서린 판소리같기도 하고 묘한 리듬감이 읽는 내내 마음을 절절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우리가 스파이라는 거 안 잊어먹었지?"

"안 잊어먹었어"

"이제 활동을 시작해야 해"

"알았어"

"내일 아침 먹고 우물로 나와"

"응"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우물 뒤에 숨어 있어"

"걱정 마" (p. 45)

일곱살 동갑내기 은철과 원이는 단박에 친해진다. 매일 붙어다니며 이런저런 놀이를 했는데, 원이가 어디선가 알게된 '스파이'라는 단어를 은철에게 알려주면서 둘은 '스파이 놀이?!'를 하게 된다. 두 꼬맹이는 마을사람들의 정보를 캐묻거나 귀동냥하며 둘만의 스파이활동을 이어나간다. 꼬맹이들이 어른들에게 묻는 첫 질문은 항상 '이름' 이 뭐냐는 것이었다.

동창이 의례적이고 소극적으로 말부리를 따면 새댁은 가능한 한 길고 장황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말을 먼저 꺼내는 쪽은 언제나 동창이었고 새댁은 침묵을 감내하며 동창이 어떤 화제든 먼저 꺼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너덧 명의 동창 이름을 들먹거리며 지루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동안 원은 얌전히 앉아 있었다.

"나 사는 게 이렇다, 효경아"

"문숙이 네가 나보다는 형편이 나을 줄 알았는데. 상호씨 직장이 안정적이라"

"직장이 있으면 뭐 하니? 여기저기 뜯기는 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 뜯겨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런 사정 모를 거야"

"뜯기는 구나"

"뜯기지. 뜯겨도 이만저만 뜯겨야 말이지"

"애들은 점점 커가는데"

"그래. 애들은 커가지" (p. 82, 83)

새댁은 오랜만에 시내에 있는 동창의 집에 갔더랬다. 그리고 본론은 꺼내지 못한채 빙빙 돌며 말을 하고 동창 또한 모르는 척 빙빙 돌며 말을 하고 그렇게 대화인지 아닌지 모를 대화를 했다. 단칸방에 네식구가 살면서 새댁이 처음으로 궁한 소리를 하러 동창네를 찾은 것 같은데, 새댁은 동창에게서 조금도 '뜯어낼' 수 없었다. 애초에 그럴 마음도 없었는데...

"내가 그놈 안 보고 산 지가 얼만에 이런 얘길 어디서 듣는 줄 아세요? 저쪽에서 벌써 녀석 근황을 다 꿰고서 나한테 연락을 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게 무슨 뜻이겠어요. 제수씨?"

"애들 고모님을 생각해보세요, 아주버니"

"내 말이 그말입니다. 누님은 천재였어요. 그렇게 재주가 많던 우리 누님이 왜 그렇게 됐습니까? 제수씨야말로 생각을 좀 해보세요"

"고모님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 생각을 해보세요, 아주버니"

"제수씨, 세상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때가 어느 땐데요. 제수씨가 잘 몰라서 그렇지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제수씨도 계속 교편을 잡았어야 했어요" (p. 94, 95)

남편 모르게 처음 찾은 시아주버님 이었다. 원이에게 처음 인사시킨 큰아버지였다. 하지만 ...

"너도 잘했고 나도 잘했으니 사백 번 잘했다. 느이 아버지도 뭐라고는 못 하실 거다. 그런 위험한 일을 그렇게 허술한 데서들...... 그래. 이번일 가지고 그이도 더는 뭐라고 못 하겠지. 이제 다시는 안 갈거니까.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뜯어낸 거니까" (p. 109)

꽤 오래전 이야기인것 같긴한데 소설은 처음부터 시간적 배경을 바로 알려주지 않는다. 이런저런 상황 설명을 보면 분명 현대는 아닌데... 소설의 1/3쯤 가서야 어림짐작으로 시간적 배경을 알게 된다. 육이오가 터지고 전후상황이 안정되었으나 사회적불안요소가 많았던 시절... 대략 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 초반즈음 같다. 새댁과 남편은 지식인층이었다. 남편이 하고 있는 일은 아마도 반사회적 활동 같다. 생활은 점점 더 궁핍해져갔고 아주버님은 양복점을 크게 하고 있었지만 남편과 연락을 하지 않고 있던 사이였다. 그곳을 찾아갔던 것이다. 새댁은. 원이를 데리고.

그럴 때면 가슴속 유리 상자에 쫙쫙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달리면 달릴 수록 그의 마음은 심하게 베었지만, 파란호스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로 항상 질척거리는 창자처럼 깊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은철은 온통 신발에 진흙을 튕기며 달리고 또 달려갔다. 아 시시하다, 시시해. 칫칫! (p. 173)

하루가 멀다하고 은철은 새댁네로 가서 원이와 놀곤 했다. 새댁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도 좋고 원이와 함께 하는 소꿉놀이도 좋았다. 그러던 어느날 손님들이 오실때는 오지말라고 새댁이 하는 말을 은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마음에 그 하루 오지말라는 소리가 무척 서운했다보다. 은철은 그후로 아예 발길을 끊고 원이도 아는채 안하고 형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하지만 새댁이 부르거나 원이가 부를때면 마음이 아팠다. 어린 마음에 유리 같은 마음에 금이 가는 것 같았다...

"빨리 먹어! 씹어 먹으라고! 이거 사람이 먹는 거라고!" (p. 176)

새댁이 해주는 음식들은 은철 입에 꼭 맞았다. 하지만 은철의 집에서는 내장탕이니 닭발볶음이니 생간 같은 것이 식탁에 올라왔다. 원이를 멀리할수록 은철의 마음은 옹색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날 은철에게 반갑게 인사하던 원이에게 은철은 우악스럽게 생닭발을 입에 욱여넣어버렸다. 원이는 기절했다.

순분은 불구가 될지 모르는 작은아들의 시련과 괴로움, 그리고 그 강도와 길이에 상응하여 큰아들이 지고 가야 할 자책과 죄의식에 깊은 동정을 느꼈다. 그렇게 매를 때리기 좋아하던 순분이 이제 아들들에게 내릴 평생의 매는 다 내렸다고 결정한 순간, 빗자루나 막대자 연탄집게 같이 매질에 동원되었던 모든 도구는 제본성을 되찾고 바닥을 쓸거나 눈금을 재거나 연탄을 집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되었다. (p. 202)

분명 짠한 장면인데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야말로 웃픈 표현이었다고나 할까. 꼰대같은 말이지만 예전엔 정말 그랬다. 손에 잡히는 데로 집어들어 패곤 했다. 집에서는 빗자루며 먼지떨이총체로 맞고 학교에서는 대걸레자루며 지시봉으로 맞았다. 그것들 모두 본연의 임무가 있었을텐데 말이다.

"정말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짓을 할까요? 난 믿을 수가 없어요, 여보"

"저들이 보기에 말도 안 되는 건 우리니까요" (p. 220)

"얘기는 가면서 합시다. 여긴 아무래도 댁이니까" (p. 248)

뚜벅이할매가 죽고 똥순할매가 사라진 뒤 기력을 잃고 비실대던 박가는 산삼이라도 달여 먹은 듯 예전의 성질과 기세를 단박에 회복했다. 우물집 앞에 형사 둘이 불침번을 서게 된 후부터 박가는 통장으로서의 사명감에 불타올라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p. 264) 통장집도 틈만 나면 남편으로부터 반공 교육을 받아 꽤 유식한 소리를 떠들어댈 줄 알게 되었다. 그 아슬아슬한 소문의 가로장을 밟고 오르다 보면 삼벌레고개 전체에 파다하게 퍼진 흉흉한 소문의 오케스트라를 들을 수 있었다. (p. 265)

설마설마 했는데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남편은 붙잡혀가고 새댁대가 세들어사는 우물집앞엔 형사들이 지키고 섰다.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말은 가장 무서운 말은 '빨갱이'였다.

"무서운데 멈출 수가 없어요, 저놈들이 멈추지 않으면 우리도 멈출 수가 없어요" (p. 269)

원은 가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 친구들에게 간첩 중에는 좋은 간첩도 있고 나쁜 간첩도 있는데 좋은 간첩을 스파이라고 한다고 큰소리로 얘기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데 간첩은 그렇다치고 빨갱이는... 알 수 없었다. 담임선생님은 짝의 귀를 물어뜯은 원을 야단치는 대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했다. (p. 278)

그래도 새댁네는 다행이었다. 집주인 순분은 새댁에게 죽을 쑤어먹였고 이제막 1학년으로 입학한 원의 담임선생님은 원을 혼내지 않았다.

은철은 차창에 다가가 정면을 보고 앉아 있는 원의 옆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원은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은철은 알았다. 자기가 병실에서 느꼈던 것처럼, 원도 날카로운 고통이 사방에 철창을 두른 작은 방 속에 갇혀버렸다는 것을.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그 방에 원 혼자 갇혔다는 것을. (p. 327)

우물집 식구들은 하나둘 떠나가고 마지막으로 순분네와 새댁네도 떠나게 된다. 집은 새주인을 맞을 것이고 그렇게 새삶의 터전이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떠났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의 기억속에 우물집은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토우를 묻은 무덤처럼 그렇게...

나는 그들의 고통은 물론이고, 내 몸에서 나온, 그 어린 고통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고통 앞에서 내 언어는 늘 실패하고 정지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 어린 고통이 세상의 커다란 고통의 품에 안기는 그 순간의 온기를 위해 이제껏 글을 써왔다는 걸. 그리하여 오늘도 미완의 다리 앞에서 직녀처럼 당신을 기다린다는 걸. (p. 331) -작가의 말 中-

다른 책에서 말하길 작가의 말을 쓰기 싫다고 했었다. 내키지 않는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멋지게 쓰는 걸. 나는 앞으로도 권여선 작가의 '작가의 말'을 기다리지 않을 수가 없다.

오래전 이곳에 삼악산이 있었지

북쪽은 험하고 아득해 모르네

남쪽은 사람이 토우가 되어 묻히고

토우가 사람 집에 들어가 산다네

그래봤자 토우의 집은 캄캄한 무덤 (p. 329)

집이 무덤같고 사람이 토우 같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흘러간다.

그 시간을 이렇게 따듯하게 품어주는 작품이 계속 나오는한 아마도 생은 살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통의 품에 안길지라도 온기를 느낄 수 있게하는 글이 있고 그런 글을 이렇게 읽을 수 있다면 아마도 삶은 살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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