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로 보는 현대미술 디테일로 보는 미술
수지 호지 지음, 장주미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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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완성하는 결정적 장면들

작품 구석구석 숨겨진 디테일을 만나다

가장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현대미술

그림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전문가가 아니므로 그저 감상자의 입장에서 쉽고 간단하게 좋네vs별로네 정도로 그냥 가볍게 보아 넘겨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그림을 보다보면 더구나 봐도 당췌 이해가 안되는 현대미술을 보다보면 감상자로서의 내 입장이 무척 초라해지기 일쑤다. 지금 고전이네 명화네 하는 그림들도 당대엔 그리 후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다. 허니 지금 내가 도저히 모르겠는 현대미술작품들도 언젠가는 그런 고전의 반열에 오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함께 당대를 살고 있는 내가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길잡이책으로 이 책에서 도움을 받아보고 싶었다.

많은현대 미술과 동시대미술은 작가의 의도나 감정,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식견 등 어느 정도 배경 지식이 있을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75점의 현대미술과 동시대미술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서 느긋하게 즐길 수 있도록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p. 6) 양식이나 작가와 후원자들의 포부가 어떤 것이든 간에, 르네상스부터 사실주의까지 거의 모든 미술의 공통점은 주체의 이상화였다. (중략) 미술에 변화를 일으키는 기폭제 역할을 한사건 중 하나는 1839년 사진의 발명이었다. (중략) 19세기 중반에 들어 화가들이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일상적인 상황을 자주 그리기 시작했다. (p. 8) 20세기에는 이전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종류의 양식과 접근법에 대한 변화가 있었고 그렇게 미술 역사상 아주 많은 미술 운동들이 있었다. 그러나 21세기로 오면서 작가들의 접근법과 재료 사용이 더욱 다양해졌으며 용인되는 기준도 자유로워졌다. 결과적으로 작가들을 미술 운동이라는 분류로 나누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중략) 이 책은 약120년에걸친 변화와 성장 속에서 예술적 표현과 시도에 대한 개요를 보여주고 있다. (중략)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있는 개념들에 대한 최고의 안내서이며 75명의 최첨단 작가들의 사고와 표현을 상세하게 탐구한다. (p. 9) - 서문 中 -

이 책은 19세기 후반 부터 21세기 현재까지 다루며 75명의 작가들의 작품과 그 작품이 영향을 받았을 다른 작품들까지 함께 소개하고 있다. 사이즈가 큰 책으로 올컬러라서 그림책으로는 좋은 조건의 책이다. 그림의 분석도 펼쳐진 페이지에서 장을 넘기지 않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보기에 편하다. 본문을 읽다보면 어려운 용어들이 난무하여 이해가 어렵기도 했지만 책의 뒤편에 <용어해설>, <작품 인덱스>, <인덱스>, <도판 저작권> 이 정리되어 있으므로 막힐때마다 참고해가며 보는 것이 이 책을 제대로 보는 한 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수백년 동안 작가들이 고수했던 엄격한 아카데미의 전통에 대한 반작용으로 19세기의 마지막 몇 십년 동안에는 여러 새로운 형태와 양식의 미술이 개발되었다. 사실주의는 평민을 소재로 자유분방한 붓질과 거친 표면이 특징이며, 과장과 이상화를 피했고, 인상주의의 도래를 알렸다. 곧 이어진 신·후기인상주의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미술 양식과 접근법으로 이뤄졌고, 자주 현대적인 인조 안료를 사용해서 눈부신 색상을 만들어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p. 11)

<19세기 후반> 에서 처음 다루는 작품은 빈센트 반 고흐의 <오베르의 교회> 다. 고흐가 그림을 그리던 시대에 유럽 화가들이 일본문화의 영향에 매력을 느꼈다는 것은 다른 책에서 읽은적 있었지만 고흐의 그림에서 그 흔적을 이렇게나 많이 찾게될 줄은 몰랐다. 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못> 을 통해 19세기 후반을 간략히 다루고 이 책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20세기 초반>으로 넘어간다.

19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예술적 동향에 뒤이어 20세기 초반에는 획기적인 기술 개발과 발견들이 출현하며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중략) 이러한 새로운 접근법들이 연이어 신속하게 나타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영감을 주었다. (중략) 사상 최초로 미술은 순수한 구상에서 멀어지고, 일단 처음으로 추상 작품들이 창조되자 더 많은 작가들이 그 개념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p. 26)

<20세기 초반> 에서 폴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 구스타프 클림트의 <나무 아래에 피어난 장미 덤불>, 앙리 마티스의 <마티스 부인, 초록색 선>,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까지는 그래도 화가 이름을 들어보도 화가의 다른 작품들도 봤던지라 한층 더 심도깊은 내용을 알게 되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그러나 움베르토 보초니의 <도시의 성장>, 조르주 브라크의 <포르투갈인(이민자)>, 페르낭 레제의 <파랑 옷을 입은 여인>, 프란츠 마르크의 <동물들의 운명>,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의 <거리의 다섯 여인>, 후안 그리스의 <바이올린과 기타>, 오스카 코코슈카의 <바람의 신부>, 조르조 데 키리코의 <거리의 신비와 우울>,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역동적 절대주의>, 장 아르프의 <트리스탕 차라의 초상>, 게오르게 그로스의 <메트로폴리스>, 쿠르트 슈비터스의 <그리고 그림>,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 파울 클레의 <빨간 풍선>,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공간 속의 새>, 호안 미로의 <경작지>, 오토딕스의 <신문기자 실비아 폰 하르덴의 초상>, 헨리 무어의 <누워 있는 사람>, 조지아 오키프의 <흰독말풀>, 알렉산더 칼더의 <꽃잎의 호>, 막스 에른스트의 <안티포프>, 조셉 코텔의 <약국> 등의 작품은 역시 현대미술에 대한 어려움을 절감케하는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중간중간 그렇지 않은 그림들도 있어서 더욱 관심을 갖고 본 작품들이 있었다.

소니아 들로네의 <일렉트릭 프리즘> 에서 "회화는 시의 다른 형태로 색채는 단어고, 그 관계는 리듬이며, 완성된 작품은 완성된 시다"(p. 70)

바실리 칸딘스키의 <즉흥 협곡>에서 "그는 회화를 세 종류루 정의내렸는데 인상, 즉흥, 그리고 구성이라고 불렀다. 인상은 외적인 현실에 기초하는 반면, 즉흥과 구성은 무의식에서 기인한다" (p. 78)

마르크 샤갈의 <생일> 에서 "그가 얼마나 벨라를 사랑하는지 이 세상에 보여주는 샤갈만의 방법이었다" (p. 84)

에곤 실레의 <초록 스타킹을 신은 여인>에서 "실레의 텅 빈 배경은 네거티브 스페이스를 만들어서 대상을 고립시켜, 감상자가 대상에 집중하게 한다. 선으로 처리한 그의 작품은 즉흥성과 에너지를 전달한다" (p. 101)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잔 에비테른, 작가 아내의 초상>에서 "모딜리아니가 활동할 당시는 작가들이 부족미술을 탐구하던 시기였다. 그는 고대 이집트의 조각상들을 비롯해서 다양한 양식의 영향을 받았고, 이는 이집트 흉상 같은 모델의 모양에 반영되어 있다" (p. 105)

한나 회흐의 <독일 최후의 바이마르 맥주 배불뚝이 문화 시대를 다다의 부엌칼로 절개하기>에서 "이 작품은 전후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던 정치적 실패를 엄중하게 꾸짖고 있다" (p. 112)

그랜트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에서 "나는 미국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평화가 가득한 나라, 보존하기 위해 희생할 만한 무한한 가치가 있는 국가의 모습이었다" (p. 140)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에서 "그는 '손으로 그린 꿈의 사진'을 비롯해서 자신의 기법에 대해 '감상자를 마비시키는 흔한 눈속임의 수법들'이라고 설명했다" (p. 145)

프리다 칼로의 <두 명의 프리다> 에서 "당시 신체적·심리적 고통으로 인해 낙담한 그녀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p. 150)

에드워드 포허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에서 "주변 마을과 도시에서 발견한 고독감을 전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고독감을 묘사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p. 163)

피에트 몬드리안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에서 "미술이 우주의 영성을 나타낸다는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그림의 모든 요소를 감축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수직과 수평의 직선, 그리고 원색, 흰색, 검은색, 회색만 사용했다. 그는 이것을 신조형주의라고 불렀다." (p. 166)

위의 작품들은 기존에 알던 화가들이라서인지 작품이 아주 낯설지만은 않아서 그 미술가들과 작품들에 대해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몰고 온 그림자가 드리운 채 진행된 20세기는 그 예술적 표현에서 내향적이고, 분노에 차고, 심지어 난폭한 성향을 보였다. 2차 대전 이후 일어난 중대한 변화로는 주요 미술 운동들이 처음으로 미국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중략) 미국에서 개발된 최초의 미술사조로는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의 추상표현주의, 뒤를 이은 팝아트, 그다음에 미니멀리즘이 있었고, 곧 다양한 미술 양식들이 유럽과 북미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p. 176)

20세기 초반과 후반 사이에 <제2차세계대전이후> 라는 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20세기 에서도 특별한 시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핵심은 미국이었는데 잭슨폴록과 앤디워홀로 알 수 있는 미국문화의 뒤에 어떤 영향력(정치)이 있었는지 다른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오르기도 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광장Ⅱ> 에서 "단절과 대중속의 고독"(p. 179)을, 잭슨 폴록의 <파란 막대기들>에서 "정신과 신체 혹은 현대 사회에 얽매인 감정들을 표현"(p. 194)을,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에서 "나의 작업 방식을 저술가와 비교한다면 가장 단순한 어조를 찾아서 문체의 어떤 멋도 부리지 않고, 독자에게 오로지 글쓴이가 표현하려는 생각만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p. 203)는 것을, 마크 로스코의 <빨강의 4색>에서 "색채의 힘과 더불어 로스코는 자기가 만든 형태가 가지는 표현의 잠재력을 믿었으며, 영적인 존재를 포착한다고 여겼다"(p. 218)는 것을, 앤디 워홀의 <캠밸 수프 캔>에서 "반응은 경악과 웃음이었으며 판매는 평편없었다. 그러나 결국 이 작품으로 인해 그는 작가로서 출세했으며 미국 서부에 팝아트를 소개했다"(p. 232) "미국이 가장 위대한 이유는 가장 돈이 많은 소비자도 가장 가난한 사람과 기본적으로 똑같은 물건을 사는 전통을 만들었다는 점이다"(p. 235) 는 것을 깨달은 점은 좋았지만,

위프레도 람의 <대지의 소리>, 윌렘 드 쿠닝의 <여인Ⅰ>, 데이비드 스미스의 <허드슨강 풍경>, 루이즈 부르주아의 <포레(밤 정원)>, 나움 가보의 <구축된 머리 No.2>, 리처드 해밀턴의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매력있게 만드는가?>, 바바라 헵워스의 <줄이 있는 형상(마도요새)1번>, 루이즈 네벨슨의 <하늘의 성당>, 헨리 다거의 <무제(어린이들이 있는 목가적인 풍경)>, 이브 클랭의 <청색 시대의 인체 측정학(ANT82)>, 프랜시스 베이컨의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레트로액티브Ⅰ>,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음-어쩌면> 등의 작품에서는 여전히 이해에 한계를 느끼고 말았다.

개념미술은 주로 뒤샹의 아이디어들과 보다 일반적으로 다다, 초현실주의와 추상표현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미술 사조로 발전한 것은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다. 개념주의란 재료나 기법보다 아이디어가 더 중요한 모든 미술을 말하며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재료와 방법론이 워낙 광범위하다 보니 이후 창조되는 막대한 양의 미술에 대한 선례가 되었다. (중략) 그 사조들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급미술과 대중미술의 경계를 허무는 개념을 이어 나갔다. (p. 249)

<20세기 후반> 부터는 본격적으로 개념미술이 등장함으로써 더욱 난해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이제까지는 작품을 보면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작품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직접적 힌트가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온통 개념들이라 설명을 읽고 작품을 봐도 이해가 쉽지 않았다.

에바 헤세의 <접근Ⅱ>, 요제프 보이스의 <썰매>, 로버트 스미스슨의 <나선형 방파제>, 아나 멘디에타의 <돌 심장과 피>, 루시언 프로이트의 <반사된 상이 있는 벌거벗은 초상화>, 안젤름 키퍼의 <마르가레테>,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추상화>, 신디 서면의 <무제#213> 에서는 이제 회화를 넘어 소재도 주제도 워낙 천차만별인데다가 데미언 허스트의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에서 작가가 "대체품이 애초의 작품과 같은 것이냐는 논란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배경은 개념미술 출신이기 때문에 의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동일한 작품이다'"라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작품 자체보다 그 의도를 중시하는 것까지 미술의 개념이 확장되고 보니 무엇이 진짜 예술인건지 더욱 난감한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백남준의 <TV첼로> 의 파격적 퍼포먼스 일화와 작품분석을 통해 기존에 유명세만큼 이해하지 못했던 백남준 작품의 가치를 알게 되기도 하고

주디 시카고의 <저녁 만찬> 에서 "작품에는 39명의 여성이 등장하는데, 13명씩 3개의 그룹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이는 성서 속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숫자로 그들은 모두 남성이었다.(중략) 거기에 더해 여성 999명의 이름이 흰색 타일 바닥에 금색으로 새겨져 있다. 모두 합쳐서 이 설치 작품은 1,038명의 여성을 기념하고 있다."(p. 268) " 의 경우는 개념에 대해 그나마 접근해볼 수 있었으며

척 클로스의 <자화상> 에서 "각 칸은 추상적인 색채 연구 같지만 멀리서 보면 서로 혼합되어 특정한 색채와 톤을 만들어낸다"(p. 297) 는 말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을 보며 현대미술 분야에서도 그나마 내가 그림을 통해 '멋지다'고 즉각적으로 감탄할만한 작품이 있기는 있구나 싶어서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구상이든 추상이든, 크든 작든, 지속력이 있든 수명이 짧든, 미술은 계속해서 경계와 전통을 허물고 있다. 세계화 현상으로 인간의 상호작용과 소통이 더 신속히 이뤄지면서 예술적 성향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그런데 작가들이 정체성, 젠더, 계급, 관계에 대해 가지는 견해자 사회적·정치적 의미 그리고 가치관이 과거 세대의 대다수 작가들과 완전히 달라지기도 했지만, 놀랍게도 어떤 예술적 접근법과 사고방식은 거의 달라진 것이 없다. (p. 299)

< 21세기 > 에서는 잉카 쇼니바례의 <머리통 두 개를 동시에 날리는 방법(여성)>, 쿠사마 야요이의 <점에 대한 강박-무한 거울의 방>, 모나 하툼의 <작은 덫>, 빌 비올라의 <순교자들(흙, 공기, 불, 물)>, 파울라 레고의 <환영> 이라는 작품들(설치미술 작품들과 사실주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그림한점)을 통해 앞선 장에서 폭이 광범위하게 넓어진 현대미술의 맛보기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작품 하나하나마다 구획을 나눠서 때로는 색채와 작업방법을 때로는 배경과 팔레트를 때로는 리듬과 상징등 그 작품 해석에 필요한 요소별로 다각도로 작품을 분석하고 있는 이 책은 현대미술의 난해함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 책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대미술을 감상한다는 것은 역시 쉬운일이 아닌 것 같다. 이토록 머리아프게 해석해야 하는 미술을 굳이 이렇게까지 노력해서 감상해야 하나 개인적으로 회의감이 들기도 하고;;; 여전히 나는 그저 내눈에 아름다워보이는 그림을 감상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으로 미술감상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하튼 현대미술에 대해 다양한 깨우침을 준 고마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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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 볼가강에서 몽골까지
피터 B. 골든 지음, 이주엽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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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의 세계적 석학 피터 골든이 쓰고

<몽골제국의 후예들>의 저자 이주엽이 옮기다

"우리는 왜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알아야 할까? 가장 현실적인 대답은 '세계사지식의 완성'을 위해서일 것이다" -옮긴이의 말 中-

 

세계사 역사의 중심은 서양사였다. 그래서 세계사 책을 읽을 때면 늘 서양사의 역사를 읽게 되곤 했다. 하지만 역사는 서양사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세계사와 서양사는 동의어가 될 수 없었다. 세계사라고 쓰여진 서양사를 읽으며 중간중간 벽에 부딪히거나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는 부분들이 느껴지곤 했다. 역사를 온전하게 읽으려면 세계사를 진정한 세계사로 이해하려면 유목사 다시말하자면 '중앙아시아사'를 읽어야 했다. 이 책은 서양사 중심의 세계사의 한계를 낮춰주고 구멍을 메꿔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새 옥스퍼스 세계사' 시리즈 편집부의 요청에 따라 저는 3000년이 넘는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가능한 한 간결하게 정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중앙아시아(또는 중앙유라시아)는 헝가리대평원에서 만주의 삼림 지대와 한국의 변경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입니다. 이 지역의 민족들은 유라시아 즉 유럽과 아시아 전역의 역사와 문화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중앙아시아는 여러 문명, 종교, 그리고 근대 세계의 형성에 핵심적 역할을 한 정치 집단들이 만나는 공간이었습니다. 진정으로 현대의 글로벌화 현상의 초기 요소들은 과거 중앙아시아의 제국들에서 기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 9) -한국어판 서문 中-

저자는 중앙아시아사 연구에서 원전 사료를 원어 그대로 연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학자중 한 사람이다. 역자는 유목제국사와 몽골제국사를 강의하는 교수이다. 전문가의 책을 전문가가 번역했다고 볼 수 있다. 부족한 중앙아시아사 책 중에서 이렇게 믿을만한 책이 나와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중앙아시아인들은 역사적으로 하나의 지역 혹은 민족을 이룬 적이 없다. 중앙아시아인들의 정체성은 씨족, 부족, 신분, 지역, 종교에 기반을 두었고, 이것들은 보통 서로 중첩되었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에게 정치적 경계선은 큰 의미가 없었다. 유목국가는 영토가 아니라 사람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수천년 동안 동양과 서양의 가교 역할을 해온 중앙아시아는 중국, 인도, 이란, 지중해지역, 보다 최근에는 러시아의 영향을 받았다. 중앙아시아는 샤머니즘, 불교,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같은 종교들이 만나는 공간이었다. 중앙아시아의 민족적, 언어적, 정치적, 문화적 경계선은 늘 유동적이었는데 서로 영향을 주면서도 근본적으로 상이했던 두 생활양식을 포괄했다. (p. 15) 고대와 중세 시기의 외부 관찰자들은 중앙아시아를 '문명 세계'의 주변부로 여겼다. 그러나 현대의 역사가들은 근대 이전 시기의 가장 큰 제국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배출되었다는 점에서 중앙아시아를 유라시아 역사의 '심장부' 또는 '중심축'으로 여긴다. (p. 16) 유목민은 일생 동안 경작지에서 고된 노동을 하며 사는 농경민들보다 자신들이 더 우월한 삶을 산다고 행각했다. (p. 21) 중아아시아의 역사가 상세히 보여주듯, 중세와 현대의 '민족'들은 보통 여러 종족과 언어 집단이 오랜 시간 융합하는 과정을 거치며 형성되었다. 특히 현대에는 적지 않은 정치적 계산에 따라 '민족'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 (p. 23) 민족들의 형성 과정은 현재에도 진행 중에 있다. (p. 24) -서문 中-

서양중심적 그리고 기독교중심적 역사에서 소아시아를 비롯한 이슬람 문화권의 역사는 폄하되곤 했다. 하지만 이슬람 역사의 입장에선 중세 서양을 미개하다고 무시했었다는 것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나마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전투라는 입장에서 서양과 소아시아근방 동양은 서로 직접적으로 맞부디히곤 했다. 그에 비해 중앙아시아에 기반을 둔 유목민들은 서양에서도 근동에서도 이방인이고 따라서 야만인이라 무시되곤 했다. 어쩌면 아예 유목민들의 역사는 아예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느날 갑자기 훈족이 몰려오고 어느날 갑자기 몽골족이 몰려온 것이 아니었다. 중앙아시아에서도 끊임없이 제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역사의 바퀴를 굴리고 있었다. 모르면 무시하기 쉬운 법이다. 그러나 무시하면 결국 제대로 알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해야 통찰할 수 있다. 역사는 어느 한곳에서만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다.

선사 시대의 중앙아시아 민족들, 이들과 인도 아대륙 및 중동 사이의 초기 관계는 아직 연구가 더 필요한 주제다. (p. 28)

우리의 인식은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들과 새로우면서도 종종 상호 모순적인 해석들로 끊임없이 바뀌고 있다. 사실 아무도 정확히 어디에서 혹은 왜 완전한 형태의 유목 생활 양식이 처음 출현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p. 30)

고대와 중세의 기록들은 유목민의 가정생활에 대해 거의 알려주는 것이 없다. (p. 35)

지금으로부터 먼 과거의 역사일수록 유목사 연구는 더딘 속도임을 드러낸다. 자료의 부족과 연구자의 부족 및 왜곡되고 폄하된 인식으로 인해 초기 유목사의 연구는 알아낸 것보다 알아내야 할 것들이 더 많은 분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 책이 알려주는 역사의 흐름은 의미를 더해갔다.

마력馬力의 활용은 불길한 군사적 결과를 불러왔다. 기마전투술을 발전시킨 인도-유럽인 유목민들은 민족 이동을 시작했다. (p. 31)

외부인들은 유목민들이 목적지 없이 물과 풀을 찾아 방랑한다고 기록했지만 사실 유목민들은 신중하게 계획되고 방어된 경로와 목초지를 따라 이동했다. (p. 33)

정착 생활은 신분의 추락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놓은 유목민들은 자발적으로 지역 족장이 이끄는 군단의 일원이 되었다. (p. 35)

유목 세계에서 국가의 존재는 예외적 현상이었다. 군사적 침공 혹은 주변 국가들의 획책으로 초래된 내부 위기에 대응해 형성된 유목민의 정치 조직은 유목제국 아니면 다양한 비국가적 부족연합의 형태를 띠었다. (p. 38) 유목민들은 보통 정주사회를 정복하려 하지 않았다. (중략) 그런데 유목민들이 정주 지역을 정복하는 경우에는 강력한 지배왕조들을 탄생시켰다. (p. 39)

유목민들은 중간 상인과 문화 전파자로서 더 넓은 세계에 장거리 교역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중략) 유목 세계에서는 여성들도 정치권력을 행사했다. (p. 41)

역사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우위를 따지는 태도는 불필요하다. 역사를 발달이나 발전과 같은 의미로 보는 것도 유의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다 제각각의 인격을 존중받아야 하듯이 모든 역사는 다 제각각의 의미를 존중해야 한다. 유목민들이 야만적이라거나 미개하다는 식의 편견은 버려야 한다. 달랐을 뿐이다. 그 다름은 주변의 상황과 맞물려 돌아가면서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농경생활 중심이 되면서 노동력과 힘 중심으로 재편된 정주지역의 역사보다 오히려 유목민들의 역사에서는 권력의 불평등이 덜 한 면도 있었다. 그리고 사회의 시작은 서양세계와 마찬가지로 도시국가에서부터였다.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의 상인, 관료, 종교인들은 유목제국의 행정과 문화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중략) 투르코-몽골 유목민들은 영속성 있는 도시들을 거의 건설하지 않았다. 중앙아시아의 대도시들은 주로 이란계 민족들이 건설했다. (p. 43) 오아시스 도시들은 실크로드의 거점이었거니와 스텝 지역으로 흘러들어 가는 물품들의 주요 공급지이기도 했다. (p. 47) 인도-이란계 주민들의 이동으로 선사 시대에서 역사 시대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p. 52) 유목 세계의 경계 지대에 거주하며 유목민들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박트리아인, 화라즘인, 특히 소그드인들은 무역에서 중간 상인이 될 수 있는 아주 좋은 위치에 있었다. (p. 58)

기원이 불분명한 흉노는 기원전 3세기에 출현했다. (p. 61) 흉노의 정복 활동은 중국의 변경 지대에서 서방으로의 민족 이동을 수차례 촉발시켰다. 월지와 이란계 유목민들은 초원을 가로질러 박트리아와 이란까지 이주했다.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이들에 의해 멸망했고 그 소식은 중국과 유럽에까지 전해졌다. 이처럼 중국 북방의 유목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격변은 서방의 민족들과 국가들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p. 65)

초기 도시국가들의 발달과정은 고대그리스시대의 폴리스발달과정과 무척 비슷해 보였다. 작은 농업기반과 함께 목축을 하면서 물이 있는 곳에 정착촌이 생기고 그 정착촌들을 기점으로 하는 네트워크가 생기면서 상업이 발달하게 되고 그 상업을 바탕으로 도시국가가 커지는 흐름은 지중해연안의 도시국가의 발달과 다를게 없어보였다. 거기만 발달하고 있었던게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동시에 제각각 발달하고 있었다. 그러다 활동범위가 넓어지면서 동서양은 서로 연결되게 된다. 따로따로가 아니었다. 그러니 역사에서 빠뜨려서는 안될 것이었다.

당시 서부에서는 유목민들이 세운 쿠샨제국과 훈이 부상중이었다. 쿠샨 왕조는 그리스-박트리아를 멸망시켰던 월지 출신의 쿠줄라 카드피세스에 의해 기원후 1세기에 세워졌다. (중략) 쿠샨 제국은 당대의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국가 중 하나였지만 그 정치사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주화들과 고고학적 발굴물들을 통해 재구성할 수 있을 뿐이다. (p. 69) 쿠샨제국은 실크로드 모피교역, 보석의 거래에서 필요불가결한 존재였다. (중략) 교역과 순례 루트들이 서로 얽혀있음으로 해서 쿠샨 제국은 불교 순례활동과 국제무역 활동을 동시에 장려했다. 쿠샨제국은 이란의 새 지배자인 사산 왕조에 의해 십중팔구 230년대부터 약270년경가지 지속된 대결 끝에 멸망당했다. (중략) 이후 '흉노'라는 명칭은 유럽에서 '훈'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p. 73) 훈은 아마 중앙아시아에서 발생한 부족들의 이동으로부터 압박을 받아 375년에 볼가강을 건너 알란과 그들의 이웃인 고트 부족연합을 격파했다. (p. 74) 흉노의 멸망은 유목민들의 서방 이동을 처음으로 촉발시켰다. 이로써 유럽인들은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을 처음으로 가까이 접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실제의 영향보다 훨씬 더 과장된 기억과 전설을 만들어냈다. 훈은 난폭한 야만인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흉포한 이미지와는 달리 동양의 훈(흉노)와 서양의 훈은 중국 혹은 로마 제국의 존립에 결코 위협이 되지 않았다. (p. 75)

로마제국쇠망사를 읽으며 은근 자주 접하게 된 이민족이 흉노족 혹은 훈족이었다. 그들의 이미지는 말을 타고 약탈하는 야만인 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누가 더 야만적이었을까? 제국의 권력자들과 그 지배층들이 과연 이들보다 덜 야만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이들은 제국의 존립에 결코 위협이 되지 않았다는 저자의 표현에서 왠지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당대의 커다란 제국인 로마와 중국에게 유목민들의 침략은 존폐를 걸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위치가 악명을 떨치게 되는 것엔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것일지도.

중국 사가들이 기록한 돌궐의 기원 신화에 따르길, 아시나 돌궐인들은 암늑대와 적에게 전멸당한 한 부족의 유일한 생존자 사이의 교합을 통해 탄생했다. 늑대 혹은 늑대에게 양육된 자를 시조로 둔 기원 신화들은 유라시아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p. 84)

'투르크 룬 문자'는 그 직접적 관계는 없지만 여러 게르만 민족이 사용했던 룬 문자와 형태가 비슷하다고 붙은 이름이다. 돌궐 눔자, 오르콘 문자라고도 한다. (p. 94)

아바르 제국, 헤프탈 왕조, 돌궐 제국, 위그르 제국, 키르기즈, 거란제국으로 이어지는 유목사를 읽며 중앙아시아에서는 그저 유목민들이 여기저기 이동하며 살기만 했을 뿐 어떤 왕조가 연이어 있었다는 생각을 그동안 못했음에 부끄러웠다. 그곳에서도 끊임없이 제국들이 일어서고 번성하고 망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서양이나 동양과 마찬가지로 중앙에서도 말이다. 게다가 신화나 문자 등의 연결성을 통해 외따로 떨어진 역사도 아니었다. 문화는 서로 연결되고 역사도 서로 연결되어 있었음에도 우리는 왜 그동안 이 역사를 몰라왔던 것일까...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이루어진 아랍-이슬람 제국의 정복활동은 종교적 열정, 영토 욕심, 전리품, 제국의 심장부에서 심화되던 내부 갈등을 밖으로 돌리기 등 다양한 동기에서 비롯했다. (p. 126) 중앙아시아에 여전히 눈독을 들이던 두 제국인 이슬람 제국과 중국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중략) 사마르칸트로 끌려간 중국인 포로들 중에는 제지 기술자가 있었고, 이들로부터 종이가 더 넓은 지중해 세계로 전파되었다고 오랫동안 주장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을 보면, 중국은 이르면 3세기 초부터 종이를 수출해왔고 종이는 이슬람 이전 시기에 상인들과 불교 순례자들을 통해 신장과 소그디아에 전파되어 있었다. 따라서 제지술이 중앙아시아로부터 중동의 이슬람 세계에 전해졌을 수 있지만 이것이 반드시 751년 탈라스전투와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p. 130)

이슬람교는 초기에는 정복 엘리트 집단이 믿는 종교였다. 이슬람교로의 개종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중략) 이란은 정복지들 중 가장 먼저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한 지역이 되었지만 자신의 고유 언어인 페르시아어와 고유 문화는 상실하지 않았다. 다음 몇 세기 동안 중앙아시아의 이란어 사용 도시민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중략) 이슬람교 개종자들은 옛 관습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정복이 개종의 토양을 마련해주었지만 이슬람교의 개종은 보통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영적, 정치적, 사외적, 경제적 동기들이 합쳐진 결과였다. 상업 마인드를 가졌던 소그드인과 화라즘인 상인들은 팽창하는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는 것이 자신들에게 경제적으로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다. (p. 131)

소그디아, 박트리아, 호탄, 쿠차, 아그니, 코초, 부하라 등의 실크로드 중심지들을 통해 '트란스옥시아나'지역의 중요성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역사는 이미 고정된 학문같지만 사실은 자꾸 새로운 학설이 나올 수 있는 살아있는 학문분야라는 것도 또한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슬람교의 전파는 상업이 중시되었던 중앙아시아에서 그 어떤 종교보다 빠르고 자발적인 개종으로 속도를 더해갈 수 있었다. 종교는 결국 믿음만의 문제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기독교 세계에서나 이슬람교 세계에서나.

10세기에 서중앙아시아의 투르크 세계는 이슬람화되는 전환기를 맞이했다. 대규모 이슬람교 개종이 이루어졌음에도, 샤머니즘 및 여타 종교적 관습은 살아남았다. (p. 151) 카라한 왕조의 통치하에서 이슬람 색채를 지닌 독창적 문학 작품들이 투르크어로 쓰였다. (중략) 이란 세계 뿐 아니라 더 넓은 지역에서 인기를 끌었던 '군주들을 위한 거울'이라는 오래된 문학 장르에 속하는 이 작품은 군주와 그의 조언자들은 군주에게 위대한 사람이거나 하찮은 사람 모두를 정의롭게, 동정심을 가지고, 공평하게 대하라고 요구한다.(주석-'군주들을 위한 거울'은 군주들에게 윤리적, 정치적 조언을 제공하는 문학장르로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유럽과 이슬람 세계에서 인기를 끌었다.) (p. 155)

자 이제 본격적으로 초원에 초승달이 뜬 시대가 되었다. 이슬람과 투르크계 민족들이 중앙아시아사의 주역이 되면서 서양세계와 접촉했던 그들은 폭넓은 학문적 성과를 이루어낸다. 이슬람교로 개종했더라도 좁은 지역의 중앙집권적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넓은 지역 각각에서 자체적인 샤머니즘은 여전히 존속했다. 어쩌면 그래서 이슬람교로의 개종이 더 쉬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군주들을 위한 거울' 이라는 책을 보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12년에 '군주론'을 집필한 마키아벨리는 과연 먼저 있었던 이 '군주들을 위한 거울'을 알았을까 몰랐을까 궁금해진다.

몽골인들은 12세기 후반의 몽골과 몽골의 인접 지역에 거주하던 여러 부족연합의 하나였다. (p. 168)

<몽골비사>에 따르면, 알란 코아는 자신의 남편이 사망한 후 '천막의 연기 구멍 혹은 천장의 문을 통해 들어온 빛나는 노란 남자'를 통해 기적적으로 수태를 했다. 이 노란 남자는 그녀의 배를 문지리렀고 그의 빛이 그녀의 자궁에 들어왔다. (p. 170)

칭기스 칸과 그의 후예들은 유목 세계의 전통적 권력과 주권의 상징들을 활용했다. 예컨대 유목민들이 신성시하는 지역을 본거지로 삼았고, 칸 혹은 카간 과 같은 황실 존칭을 사용했으며, 국가 통치를 위해 새로운 법을 선포했다. (p. 173)

중앙아시아 안에서도 동쪽과 서쪽은 다른 양상을 띠었다. 이슬람제국과 맞닿은 서쪽과 중국과 맞닿은 동쪽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데 칭기스 칸의 집안에 내려오는 '수태신화' 가 낯설지 않다. 이 수태신화의 주인공 알란 코아는 칭기스 칸의 조상이다. 몽골제국은 갑자기 나타났다가 칭기스 칸의 죽음과 함께 소멸된 제국이 아니었다. 유럽땅에 들어섰던 왕조들처럼 비슷한 과정을 거쳐 성장했고 칭기스 칸 사후에도 오래도록 중앙아시아에 제국의 맥을 잇는 후손나라들에 영향을 끼쳤다.

유목민 전사들은 계속해서 혜택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군 지도자 곁에는 오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만큼, 유목 세계에서 성공적으로 나라를 세운 지도자들은 부하들을 계속 휘하에 두기 위해 새로운 군사적 성공과 전리품을 그들에게 제공해야 했다. 칭기스 칸도 정복 계획을 수립했다. (p. 175)

몽골 제국의 방대한 크기와 여러 칭기스 가문 및 울루스 간의 대립되는 이해관계로 몽골 제국의 통일성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p. 182)

13세기 후반에 몽골 제국은 고려, 중국, 만주 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까지 이어졌다. (중략) 정복활 동을 끝낸 뒤 몽골인들은 현지 출신과 외국인 참모들의 도움을 받아 정복지의 재건에 나섰다. 몽골 제국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 (p. 185)

몽골 제국은 정주 세계를 정복한 가장 큰 유목제국이었다. 그리고 유라시아의 초원지역, 삼림지대, 다수의 인근 국가들을 하나의 광대한 세계 국가로 통합한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그리고 지리적으로 연결된 육상제국이었다. 몽골제국은 세계사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1250~1350년 사이에 국제 교류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초기의 '세계체제'를 태동시켰다. 몽골 제국은 근대 세계의 선구자였다. (p. 193)

로마제국쇠망사를 읽는 기분이었다. 제국의 흥망성쇠는 너무나 닮아있었다. 로마에서도 용병들의 전리품을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정복전을 벌여야 했고 현지주민들을 활용했으며 포용적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그렇게 커진 제국은 한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권력에 균열이 생겼으나 쇠망의 과정은 길고 복잡했다. 로마제국이 그렇게 중세이전 세계의 선구자였다면 몽골제국은 그 뒤를 잇는 세계의 선구자인 셈이다. 하지만 세계사에서 이 '근대세계의 선구자' 는 일회성 이벤트처럼 언급될 뿐이다.

티무르는 차가다이 울루스의 극심한 부족 간, 씨족 간 대립 관계를 아주 잘 이용하여 1370년 무렵 차카타이 울루스의 실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칭기스 일족만이 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티무르는 칸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대신, 티무르는 칭기스 일족을 꼭두각시 군주로 추대하고 자신이 실질적으로 통치했으며, 칭기스 가문 출신 여인들과의 혼인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했다. (p. 205)

로마제국도 그랬다. 황제라고 인정받지 못한 인물이 황제의 권력을 차지할 때면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을뿐 황제의 권력을 모두 가졌고 그 정당성을 위해 황제가문의 딸과 결혼했다. 제국의 영위는 다 비슷한 모습이었던 셈이다.

화약의 시대가 중앙아시아에 도래했고 티무르는 이러한 새로운 전쟁 도구들의 추가적 확산에 기여했다. 하지만 유목민들은, 대체로 새 화약 무기들을 도입하는 데서 적극적이지 않았다. 화약 무기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는 화기의 신회성과 정확성이 훈련받은 궁수의 그것들을 따라가지 못했던 까닭이다. (중략) 그러나 유럽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갈수록 더 명중율이 높아진 화약 무기로 무장한 보병은 궁기병보다 더 우수한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다. 15세기 후반이 되면 유목민들은 더는 화약 무기로 방어되는 요새화된 도시들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전쟁 기술이 수천 년 동안 우위를 차지해온 기동성을 갖춘 기마궁사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p. 225)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다. 화약이 중국에서 발명된 만큼 서양보다 중앙아시아에 화약이 먼저 유래됐을 것이다. 하지만 초기 화약무기는 말을 탄 궁사보다 전투에서 효과가 없었다. 그사이 유럽에선 화약무기가 엄청난 진화를 하게 된다. 유목민족이 실력이 떨어져서 라고 생각이 모자라서 라고 말하긴 어려워 보인다. 수천년동안 어딜 가든 효과적으로 전투력을 발휘했던 것이 기마궁기 였다. 이제 막 시작된 화약무기를 어찌 믿을 수 있었을까. 화약을 믿고 활과 말을 버리기엔 그동안 너무 오랜 세월 전투에서 승리해왔다. 그에비해 오로지 인력으로 전투를 치뤘던 서양에서는 무기의 발달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역사는 한쪽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16세기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1547년 이후 '러시아')이 중앙아시아의 서부 변경 지역으로 침투해 오기 시작했다. 정교회와 몽골 지배자들로부터 정통성을 부여받은 모스크바 대공국은 다른 루스 공국들을 복속시켰다. (p. 234) 이반4세는 볼가강 유역의 칸국들을 정복한 후에는 비잔티움 황제들과 몽골 칸들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는데, 이것은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선언이었다. 러시아는 이반4세의 정복 활동을 이슬람에 대한 십자군 전쟁으로 묘사하는 한편 무슬림 타타르인들을 그리스도교로 집단 개종 시키려 했다. (p. 235) 1500년부터 1900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팽창하는 국가 중 하나였던 러시아는 하루에 약 50제곱마일(130제곱킬로미터)의 영토를 획득해 나갔다. (p. 236) 러시아의 전진은 만주인의 청 제국과 충돌한 뒤에야 멈추었다. (p. 237) 서로 대립하던 몽골 집단들은 국내의 경쟁자와 중국을 상대하기 위해 갈수록 더 러시아의 지원이 필요해졌고, 이는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p. 239)

거대한 제국이 무너지면 작은 공국들이 난립하기 마련이다. 유럽도 서로마제국이 멸망했을때 엄청난 분열과 작은 국가들이 이합집산했다. 몽골제국이 무너진 중앙아시아의 상황도 비슷했다. 그 난립된 작은 나라들을 빠르게 복속시킨 것이 러시아였다. 유럽을 건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 유럽보다 늦게 발달한 러시아가 확장할 수 있는 방향은 동쪽과 남쪽이었고 때마침 몽골제국이 망한 후라 혼돈과 난립속에 크게 힘들이지 않고 영역확장을 할 수 있었다. 유럽기독교세력과 이슬람세력의 대립속에 이 두 세력은 중앙아시아까지 넘볼 여력이 없기도 했다. 게다가 몽골제국의 가장 큰 잔존세력도 중국과 대립하느라 러시아를 막기는 커녕 지원을 바라고 있는 상황이었다. 러시아는 그렇게 순식간에 커졌다.

17세기 중반, 이슬람권 투르크-페르시아 세계는 동쪽에서는 불교도 몽골인들에게, 남쪽에서는 무굴인들에게, 남서쪽에서는 시아파의 사파비왕조에, 북서쪽에서는 그리스도국가 러시아에 둘러싸여 있었다. 시반 왕조의 우즈벡 칸국은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던 점에서 몽골과 유사했다. (p. 245)

중앙아시아사라고 부를 수 있는 영역이 점점 줄어들고 줄어들고 있었다. 주변 모두에게 조금씩 먹혀가고 있는 막바지 같아 보이는 시기였다. 부족연합국의 한계는 늘 유목국가의 통일성을 방해했다. 지금까지 중앙아시아라고 볼 수 있던 곳은 대부분 이제 러시아 와 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16세기에 유럽인들이 동양과 아메리카대륙으로 가는 새로운 해양 노선을 개척하고 17세기에는 기후변화(소빙기),기근, 경제침체, 인구감소, 끝없는 정치적 혼란 등의 글로벌한 위기가 발생함에 따라 세계무역의 패턴이 바뀌었다.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러한 변화들은 중앙아시아가 경제적으로 주변부화되고, 지적으로 정체된 원인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은 이와 같은 시각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p. 249) 중앙아시아는 세계무역 체제의 일부로 남아 있었고 바뀐 것은 교역 물품들과 루트들이었다. 그 흐름은 동-서 방향 보다는 남-북 방향이 더 주를 이루었다. 중앙아시아는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가는주요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p. 250)

동서교류의 폭이 좁아졌다고 해서 동쪽의 역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방향이 남북으로 바뀌면서 유럽과의 교류가 줄었다고 해서 세계의 주변부로 칭해서는 안될 말이었다. 세계사는 늘 함께 역동하고 있었다. 어느 한곳 멈춰있는 곳은 없었다.

19세기 초,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중앙아시아는 쇠퇴하는 청 제국 및 급속히 팽창하는 러시아 제국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알려진 중앙아시아에서의 영국과 러시아의 패권 경쟁과 관련해 중앙아시아를 방문했던 영국인들은 중앙아시아를 빈곤한 지역으로 묘사했다. (p. 267) 영국은 이 나라(아프가니스탄)를 인도에 눈독을 들이던 러시아에 대한 완충물로 여겼따. (p. 269) 러시아는 새로 획득한 중앙아시아 영토에 대한 종합적 통치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총독들은 기존의 전통적인 (현지인)지배층을 통해 주민들을 다스렸다. 러시아 당국은 통치 비용을 줄이고 토착민의 이슬람 정서를 해치지 않으려 되도록 원거리에서 통치를 했다. (p. 275)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인들을 분열된 상태로 남겨두고 민주주의와 같은 '유해한'근대화 사상으로부터 차단시키려 했다. (중략) 중앙아시아인들의 변화를 막기 위해 전제주의 차르 정부는 종종 더 보수적인 지배층 인사들 및 울라마와 손을 잡았다. (중략) 이런 정책들은 중앙아시아의 후진성을 더 영속시켰다. (p. 276) 러시아 정부는 유목민들을 안정적인 납세자로 만들기 위해 유목민들의 정착을 장려하는 한편, 유목민들의 가장 훌륭한 목초지들을 꾸준히 잠식해갔다. (p. 277)

러시아의 세력확장과 식민지배는 결과적으로 중앙아시아를 빠른 속도로 뒤처지게 했다. 분열된 식민지는 빠르게 발달하는 서양사의 속도를 점점 더 따라잡기 힘들게 했다. 유목민으로서의 삶의 방식마저 점점 유지하기 힘들어져 갔다. 거대한 부를 이루었던 제국은 이제 다시 세워지기 힘들어졌다.

중앙아시아에서 개혁과 일신은 이슬람의 부흥이라는 보다 큰 틀에서 그리고 유럽의 위협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종교와 문화의 일신, 교육개혁,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족의식 즉 민족주의(내셔널리즘)의 등장이라는 단계들을 거치며 이루어졌다. (p. 279) 러일전쟁에서의 패배는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을 촉발했다. 러일전쟁은 근대화된 비유럽 민족이 유럽의 강국을 패배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여, 당시 한 세기 넘게 러시아에 영토를 빼앗기고 있던 오스만 제국과 이란에서 혁명 운동들을 부추겼다. (p. 283) 러시아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붕괴되었다. (p. 284)

러시아 제국은 빠르게 쇠망할 듯 보였다. 그러나 급부상한 '공산주의' 로 인해 연합국으로 다시 우뚝 서게된다. 가장 늦게까지 존속했던 전제주의 국가가 가장 급진적인 사회주의연합으로 변신하다니 의외의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소비에트 정부는 각 공화국에 맞추어 민족들을 창조해냈다. 그러나 근대화 추진자들을 제외하고는 '민족' 개념을 가진 중앙아시아인은 거의 없었다. 중앙아시아의 복잡한 민족 구성도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모든 소비에트 민족은 자의적인 정치적 결정에 따라 규정되었으며 이는 민족지학과 언어학 연구자들에 의해 합리화되었다. 이런 점에서, 소련의 민족 정책은 거대한 사회공학 및 민족공학 프로젝트였다고 보아야 한다. 소비에트 정체성에 있어 중요한 지표는 언어였다. 결과적으로 근대 중앙아시아 언어들의 기원, 형성, 계통 문제는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 논쟁거리가 되었다. (p. 288)

'민족'의 개념을 생각보다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한반도의 경우 워낙 지리적 위치상 타 민족과 섞일 일이 거의 없어서 민족에 대한 개념이 오래 유지되왔지만 일반적으로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였다. 유럽처럼 아프리카를 자대고 선을 긋진 않았으니 소련이 정한 국경선은 그나마 합리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 탄생한 '민족'의 개념은 또다른 분열의 씨앗이 되었기에 꼭 그렇다고도 말할 수 없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후 소비에트 체제의 말기에 집권했던 다양한 수준의 권위주의 정권들의 통치하에 있던 중앙아시아인들은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게 되었다. 중앙아시아인들은 현재 엄청난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오염은 질병과 생태적 재앙의 유산을 남겼다. 막대한 부(석유, 가스, 여러 천연자원)가 눈앞에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소련에 의해 확립된 민족 정체성들은 여전히 중앙아시아의 민족 정체성들을 규정하고 있지만 새로운 요소들이 더해지고 있다.(중략) 중앙아시아에서 국민들, 민족들, 지역들 사이의 대립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P 294)

중국공산당은 위그르 민족주의를 탄압하고 신장의 역사를 다시 쓰며 신장이 고대로부터 중국땅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p. 297) 내몽골은 1911년 신해혁명 이후에도 중국의 일부로 남았다. (p. 298) 몽골인들은 현재 경제적 저개발이라는 막대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따. 목초지는 육지의 75퍼센트를 차지하지만 몽골의 지배적 산업인 유목은 현대 세계경제에서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해 있다. (. 300)

세계2차대전 이후 세계질서는 재편되었다. 지금의 국경선은 그때 정해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심어진 각 민족들의 정체성은 국경의 문제를 벗어나 있곤 하다. 그 분쟁은 지금도 현재진행중이다. 우리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오랜세월 유지되어 왔기에 그런 분쟁들과 상관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중국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는 지금도 여전히 어쩌면 과거보다 더 강력하게 한반도의 역사를 지우고 자신들의 역사를 세우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왜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알아야 할까? 아마도 이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대답은 '세계사 지식의 완성'을 위해서일 것이다. (중략) 역사가들은 중앙아시아를 '역사의 중심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중앙아시아에 관한 역사적 지식이 없다면 우리의 세계사 지식에는 큰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p. 335) 이책이 국내외를 통틀어 '중앙아시아사 전문가'가 쓴 가장 최신의 그리고 학문적으로 가장 엄밀하고 완성도가 높은 중앙아시아 통사라는 점이다. (p. 336) 요컨대 옮긴이에게 국내외에서 출간된 중앙아시아 통사들 중에서 가장 최근의 연구 성과들을 종합한 책, 가장 학술적으로 신뢰할 만한 책, 일반 독자들도 읽기 어렵지 않은 책, 균형적인 시각을 갖춘 책을 고르라 한다면 주저없이 <중앙아시아사>를 선택할 것이다. 중앙아시아사를 비롯해 역사를 좋아하는 독자들과 초학자들에게 이 책을 필독서로 권한다. (p. 337) - 옮긴이의 말 中 -

역사를 읽는 다는 것을 시대를 이어오는 통찰력을 키우고자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을 때가 많지 않을까 한다. 우리의 역사를 넘어 세계의 역사를 읽어옴에 있어 늘 부족하고 궁금했던 부분이 유목사였는데 이 책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역사통사이다 보니 적절한 지도자료나 연표등이 함께 있었더라면 내용이해에 훨씬 큰 도움을 받았을 텐데 그런 시각적 자료가 없어서 아쉬웠다. 하지만 옮긴이의 말처럼 그동안의 세계사 지식에는 큰 공백이 있어왔기에 이 책이 그 구멍을 메꾸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역사를 읽고 세계사를 좋아하는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이 읽혔으면 하고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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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 The Old Man and the Sea 원서 전문 수록 한정판 새움 세계문학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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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번역이 바른번역이길. 다시 읽은 노인과 바다가 준 막막한 먹먹함이 고전의 참맛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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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 The Old Man and the Sea 원서 전문 수록 한정판 새움 세계문학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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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쓴 서술 구조 그대로의 직역으로 다시 태어났다.

바른 번역으로 끌어올린 [노인과 바다]의 진정한 감동

나의 사춘기 시절은 헤세와 헤밍웨이의 작품과 함께였다. 그래서인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았어도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와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는 늘 내게 추억어린 정감이 함께하는 소설들이었다. 그 작품들이 생각날때마다 동시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그때 만약 [위대한 개츠비] 와 [호밀밭의 파수꾼] 을 읽었었다면 피츠제럴드와 셀린느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해할수 없더라도 어른이 되어 추억어린 좋은 이미지로 다시 읽어볼 수 있었을까... 하는...

여하튼, 헤밍웨이의 작품 중 좋아하던 작품이 [노인과 바다]는 아니었다. 읽었었는데 이미지조차 흐릿한 걸 보니 헤밍웨이 최고의 작품이라는 찬사가 나의 개인적 호감도와는 상관이 없었던 듯 하다. 게다가 왠지 [모비딕]과 늘 헤깔리곤 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읽었으니 안 헤깔릴 것이다. ㅎ

'이정서 번역' 에 대한 기사였나 소개였나 여하튼 '번역'에 대한 역자의 의견을 담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유명한 작품이고 고전에 속하는 작품들임에도 의외로 오역과 왜곡된 번역이 많다며 자신이 원문 그대로의 직역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던 글이었다. 그렇게 몇 작품을 다시 번역한 것을 알고 있었던지라 궁금하던 차에 이정서 작가의 새번역으로 나온 [노인과 바다]를 읽게 됐다.

눈 말고는 모든 것이 노쇠했는데, 그것들은 바다 같은 색깔에 불패의 생기를 띠고 있었다.

"산티아고 할아버지" 그들이 돛단배를 정박하고 기숡을 오르고 있을 때 소년이 그에게 말했다. "나 할아버지와 함께 다시 갈 수 있어요. 얼마간 논을 벌었거든요" (p. 12)

새번역에서 역자가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소년'의 나이였다. 기존의 번역본에서는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 소년으로 번역했으나 헤밍웨이의 원문은 그렇지 않다며 소년의 나이를 유추할 수 있는 구절들을 골라 뽑아 증거로 들며 결과적으로 고등학생 정도의 소년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소년은 5살때부터 산티아고의 배를 타며 고기잡이를 배웠으나 지금은 다른 배롤 타고 있는 중이다.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84일간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정밀하게 지킬 테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단지 나는 최근에 운이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누가 알겠나? 어쩌면 오늘은 다를지. 매일매일은 새로운 날이지. 운이 따른다면 더 좋을 테지만 나는 차라리 정확히 할 테다. 그러면 운이 찾아왔을 때 준비가 되어 있을 테니. (p. 35)

고기를 못 잡은지 85일째 되던날도 노인은 늘 하던 대로 바다에 나갔다. 지금까지는 운이 없었지만 언제 그 운이 오더라도 잡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며.

바다에서는 불필요하게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고, 노인은 항상 그렇게 여겼으므로 그것을 존중했다. 그러나 이제 화를 낼 사람이 아무도 없어진 이후, 그는 자신의 생각을 소리 내어 몇 번이고 말했다. (p. 42)

노인은 혼자이지만 소리내여 자기자신과 대화를 나눈다. 혼자 노를 젓고 혼자 낚시줄을 드리우고 혼자 키를 잡고 있지만 끊임없이 이야기를 한다. 이 작품은 노인의 독백인 셈이다. 그러다 고기가 걸렸다. 그것도 아주 큰 놈같다.

이것이 녀석을 죽일 거야. 노인은 생각했다. 녀석은 영원히 이러고 있을 수는 없을 테니. 그러나 네 시간 후에도 물고기는 여전히 바다 멀리로 계속해서 헤엄치고 있었고, 돛단배는 끌려가고 있었으며, 노인은 낚싯줄을 등에 가로지른 상태로 단단히 버티고 있었다. (p. 48)

노인은 굉장한 물고기를 많이 보아 왔다. 천 파운드가 더 나가는 것들도 많이 봐 왔고 살면서 그 크기의 고기를 두 마리 잡아 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혼자 한 건 아니었다. 지금은 혼자로, 육지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지금껏 봐 오고, 지금껏 들어본 중에 가장 큰 물고기에 단단히 매달려 있는 중이었는데, 그의 왼손은 여전히 오그라진 독수리의 발톱처럼 뻑뻑한 상태였다. (p. 67)

낚싯줄에 고기가 걸렸을때 무겁고 큰 놈이란건 알았지만 물밖으로 나오지 않아 크기를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물고기는 노인의 배를 점점 더 먼바다로 끌고 갔다. 하지만 노인은 다른 모든 낚시줄을 이어 그 물고기와 연결된 줄에 이어붙이고 자신의 온 몸으로 그 줄을 지탱하면서 결코 그 줄을 끊지 않았다.

네가 나를 죽이겠구나, 물고기야, 노인은 생각했다. 그래, 너는 그럴 자격을 가지고 있지. 결코 나는 지금까지 너보다 더 거대하거나, 더 멋지거나, 혹은 침착하거나 더 당당한 것을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형제야, 어서 와서 나를 죽이렴. 나는 누가 누굴 죽이건 개의치 않는단다. (p. 97)

그는 물고기가 공격당하고 있을 때 마치 자신이 공격당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 물고기를 공격하는 상어를 죽인 게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p. 108)

믈고기에 계속 끌려가면서 그 물고기의 실체를 확인 한 후 노인은 자신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물고기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며칠 간의 사투 끝에 물고기를 배에 묶을 수 있었지만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진정한 사투는 어쩌면 이제 시작이었다. 커다란 물고기의 피냄새를 맡고 상어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노인은 첫번째 상어를 물리쳤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반쪽 물고기야" 그는 말했다. "너였던 물고기야, 미안하다. 내가 도를 넘어서 유감이구나. 나는 우리 둘 다를 망가뜨렸구나. 그렇지만 우리는 많은 상어를 죽여왔지. 너와 나는, 그리고 많은 다른 것들을 망가뜨렸지. 너는 이제까지 얼마나 많이 죽였니, 늙은 물고기야? 네 머리의 창을 쓸데없이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닐 테니 말이야" (p. 120)

상어는 물리쳐도 새로운 놈이 또 몰려왔고 그렇게 잡아묶은 물고기의 살점들은 먹혀가고 배도 망가져가고 노인의 몸엔 부상이 쌓여갔다. 하지만 노인은 포기하지 않았고 드디어 마을의 항구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무엇이 자네를 이긴 거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그는 소리내어 말했다. "나는 너무 멀리 나갔던 것뿐이야" (p. 125)

며칠간의 사투끝에 집에 다시 돌아왔다. 소년은 노인을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노인의 배에 묶여 있는 커다란 뼈를 보았다. 소년은 울었다.

"우리 이제 다시 함께 고기를 잡아요"

"안 된다. 나는 운이 없다. 나는 더 이상 운이 없어"

"운 따윈 상관없어요" 소년이 말했다. "운이라면 제가 가져올게요" (p. 130)

커다란 물고기를 잡았던 그때 그순간엔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는데, 멀고 먼 길을 오는 동안 상어에게 다 먹히고 뼈만 남아있게 상황에서 과연 노인에겐 운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없었따고 있다고 해야할까 없다고 해야 할까...

"저게 뭐죠?" 그녀는 웨이터에게 물었고 이제 막 밀물에 쓸려 쓰레기로 떠내려가길 기다리고 있는 거대한 물고기의 긴 등뼈를 가리켰다. "티뷰론이요" 웨이터가 말했다. "상어죠"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나름 성의를 다하고 있었다. "나는 상어가 저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꼬리를 가졌는지 몰랐는데" (p. 132)

주둥이에 길다란 창이 달린 물고기 커다란 물고기 그 바다에서 주로 잡히는 그렇게 생긴 커다란 물고기는 청새치 라고 한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관광객의 질문에 카페 웨이터는 티뷰론이라고 대답한다. 티뷰론은 상어라는데... 웨이터는 왜 상어라고 한 것일까? 역자는 청새치임이 분명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어렸을 때 읽은 기억에도 노인이 잡은 물고기는 상어였었다. 헤밍웨이는 왜 이런 마무리를 한 것일까...

[노인과 바다]가 출간되었던 1952년, 헤밍웨이는 10년 넘도록 의미 있는 문학작품을 쓰지 못한 상태였다. (p. 246) 이 소설의 우화 같은 구조는 이야기가 상징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알레고리로서 [노인과 바다]를 보는 이유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그 모든 것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혹은 적어도, 그렇게 말했다. "거기에는 어떤 상징주의도 없다" 고. (중략) 헤밍웨이는 자신의 편집자 월리스 마이어에게 원고를 보내면서 말했었다. "나는 이 소설이 내 인생을 통틀어 쓸 수 있었던 최고라는 것을 알고 있다네. 내 생각에, 또한 이것과 나란히 놓이는 것으로 멋지고 훌륭한 작품이 해를 입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고" 그러고 나서 그는 그것이 "내가 작가로서 통과해야 하는 비평 집단을 제거하는'계기가 되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p. 249)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의 마지막 소설이다. 우화적으로 읽히지만 그런 상징따위 없다며 비평가들을 조롱하면서 자신에게 최고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온통 상징적으로 읽히게 써놓고 상징따위 없다고 비평가들의 상징주의적 분석따위 의미없다고 일갈하는 헤밍웨이의 삐딱함이 눈에 그려지는 듯 하다. 단순하게 읽으면 노인이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았으나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는 이야기다. 이 단순한 서사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이 단순한 서사로 자신의 최고작품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던 이유는 단순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스스로 알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일까?

비교적 짧은 작품인데다 번역에 대한 역자의 자신감때문에라도 이 책은 한글본과 영문본이 함께 실려있고 저자의 강조을 담은 역자해설도 붙여져 있다. 영어를 모르니 번역에 대한 바름의 정도는 일단 건너뛸 수밖에 없는데 그런 후에도 왠지 추억속의 작품과 느낌이 다르다. 늙은 어부의 삶이 좀더 생생하게 느껴기는 하는데 '상징'을 뺀다면 무엇을 남겨야 할지는 좀더 막막해지는 기분이다.

85일째에서야 잡은 커다란 물고기... 그동안 없던 운이 횡재가 될수도 있었으나... 고기에게 끌려가는 작은배... 그럼에도 노련하게 낚시줄을 당겼다풀었다 하며 고기를 기어코 잡은 노인... 상어들의 연이은 공격... 살점하나 남지 않은 물고기... 몸 여기저기 다치고 또 다쳐서 성한데 한곳 없이 빈손으로 돌아오게 된 노인... 다시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탈 수 있을지없을지 모르는 상태... 청새치를 잡았으나 상어를 더 여러마리 해치웠으니 그 뼈만 남은 물고기는 청새치가 아니라 상어라고 불러야 하는걸까... 운이 없어도 고기를 못잡아도 늘 준비하고 일상을 하루도 빠짐없이 채웠던 노인에게 그 물고기는 운이었을까 아니었을까... 노인에게 바다란 무엇이었을까... 그런 노인을 바라보며 어부가 된 소년에게 바다는 무엇이 될까...

겉표지를 벗겨내면 보이는 하드커버에 그려진 삽화에 한참 눈길을 두게 된다. 저 작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배보다 큰 물고기를 오직 낚시줄로 잡은 노인의 노고에 대해 그저 한참 먹먹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그 막막함을 조금이나마 줄여본다. 바다란 늘 그렇게 그저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삶도 그런 것이려나...

-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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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바두르 오스카르손 지음, 권루시안 옮김 / 진선아이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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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저편, 미지의 세상이 궁금한 두 친구의

순수한 호기심과 엉뚱한 상상을 담은 이야기

그림책은 어린아이들만 읽는 책일까?

그렇지 않다. 어른에게도 때론 그림책이 필요하다. 어른만을 위한 그림책을 소개한 책을 읽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램책은 온전히 한권의 그림책으로 만나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가끔 일부러 그림책을 찾아 보곤 한다. 그 짧은 시간이 주는 느낌이 참... 좋다.

북유럽아동청소년문학상, 화이트레이븐상, 북서유럽아동청소년문학상 등 책을 감싸고 있는 띠지에 메달처럼 박혀있는 도장들이 이 책을 빛나게 해주는듯 하지만 이런 금빛도장들이 찍혀있는 책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읽고나면 사실 그러한 홍보문구들은 의미없어진다. 그런 문구들이 없어도 책한권의 온전한 가치는 마지막장을 덮었을때 독자에게 나름의 가치를 부여해준다.

하지만 솔직히 이런 금도장들은 아이를 둔 부모들에게 톡톡한 효과를 발휘한다. 좋은 그림책을 보여주고픈 부모라면 아이에게 기왕이면 어디선가 인정받았다는 기왕이면 누군가에게 검증되었다는 그런 책을 보여주고싶지 않겠는가. 그냥 어른인 내가 읽으려해도 그런 금도장들에 눈길이 가는데 ㅎㅎ

저자는 북유럽의 작은 나라 페로 제도에서 태어나 어린이 잡지의 삽화작가로 활동하다가 그림책을 내게 됐는데, 만화 일러스트레이션 처럼 한눈에 명확하게 파악이 되는 특징의 그림책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이 <나무> 라는 그림책만 해도 단순한 그림체이지만 다양한 상을 받았다.

별다른 채색도 없이 내내 거의 무채색으로 간단하게 그려진 펜화인듯한 그림은 그 단순함때문에라도 캐릭터에 집중하며 보게 된다.

'저 나무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커다란 당근을 끌고 가는 토끼 한마리가 등장한다. 문득 멈춰선 자리에서 보이는 것은 저 멀리 나무 한그루뿐. '밥'이라는 이름의 토끼는 생각한다. '저 나무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밥은 한번도 저 나무 너머에 가본적이 없었다. 그때 친구 힐버트를 만난다.

"난 전 세계를 돌아다녔거든"

힐버트는 자신만만하게 나무 너머의 세상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하지만 힐버트는 밥의 주변을 떠난적이 없다. 제 여행을 한 걸까? 그것도 전 세계를?

"난 날 수 있거든. 그래서 다닐 때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아"

심지어 힐버트는 사실 자신이 날아다닌다고 이야기 한다. 힐버트는 '개'인데.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ㅎㅎ

과연 밥은 나무 너머로 가보게 될까?

정말 힐버트는 날아서 나무 너머의 세상을 여행하고 온 것일까?

여백이 많다는 것은 읽는이에게 그만큼 넓은 상상력의 세계를 펼치게 한다.

나는 이미 저 나무 뿐만 아나라 그 뒤의 산 그 아래의 바다까지 다 돌고돌아온 어른이지만

그림책을 보며 아이때 그렇게 커보이고 그렇게 멀어보이던 나무 너머의 세상에 대해 잠시 되돌아가볼 수 있었다. 세상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을 반짝거리던 그때로...

어린 자녀가 있어 이 그림책을 아이에게 읽어주었을 때 그 아이는 어떤 질문을 하게 될까? 생각만으로도 흐뭇해진다.

그림책의 순수함은 역시 어른에게도 좋은 것 같다. 지금 내 앞엔 어떤 나무가 서있는것일까? 그 나무 너머의 세상에 대해 내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조금은 순수해지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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