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 The Old Man and the Sea 원서 전문 수록 한정판 새움 세계문학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작가가 쓴 서술 구조 그대로의 직역으로 다시 태어났다.

바른 번역으로 끌어올린 [노인과 바다]의 진정한 감동

나의 사춘기 시절은 헤세와 헤밍웨이의 작품과 함께였다. 그래서인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았어도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와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는 늘 내게 추억어린 정감이 함께하는 소설들이었다. 그 작품들이 생각날때마다 동시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그때 만약 [위대한 개츠비] 와 [호밀밭의 파수꾼] 을 읽었었다면 피츠제럴드와 셀린느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해할수 없더라도 어른이 되어 추억어린 좋은 이미지로 다시 읽어볼 수 있었을까... 하는...

여하튼, 헤밍웨이의 작품 중 좋아하던 작품이 [노인과 바다]는 아니었다. 읽었었는데 이미지조차 흐릿한 걸 보니 헤밍웨이 최고의 작품이라는 찬사가 나의 개인적 호감도와는 상관이 없었던 듯 하다. 게다가 왠지 [모비딕]과 늘 헤깔리곤 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읽었으니 안 헤깔릴 것이다. ㅎ

'이정서 번역' 에 대한 기사였나 소개였나 여하튼 '번역'에 대한 역자의 의견을 담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유명한 작품이고 고전에 속하는 작품들임에도 의외로 오역과 왜곡된 번역이 많다며 자신이 원문 그대로의 직역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던 글이었다. 그렇게 몇 작품을 다시 번역한 것을 알고 있었던지라 궁금하던 차에 이정서 작가의 새번역으로 나온 [노인과 바다]를 읽게 됐다.

눈 말고는 모든 것이 노쇠했는데, 그것들은 바다 같은 색깔에 불패의 생기를 띠고 있었다.

"산티아고 할아버지" 그들이 돛단배를 정박하고 기숡을 오르고 있을 때 소년이 그에게 말했다. "나 할아버지와 함께 다시 갈 수 있어요. 얼마간 논을 벌었거든요" (p. 12)

새번역에서 역자가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소년'의 나이였다. 기존의 번역본에서는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 소년으로 번역했으나 헤밍웨이의 원문은 그렇지 않다며 소년의 나이를 유추할 수 있는 구절들을 골라 뽑아 증거로 들며 결과적으로 고등학생 정도의 소년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소년은 5살때부터 산티아고의 배를 타며 고기잡이를 배웠으나 지금은 다른 배롤 타고 있는 중이다.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84일간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정밀하게 지킬 테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단지 나는 최근에 운이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누가 알겠나? 어쩌면 오늘은 다를지. 매일매일은 새로운 날이지. 운이 따른다면 더 좋을 테지만 나는 차라리 정확히 할 테다. 그러면 운이 찾아왔을 때 준비가 되어 있을 테니. (p. 35)

고기를 못 잡은지 85일째 되던날도 노인은 늘 하던 대로 바다에 나갔다. 지금까지는 운이 없었지만 언제 그 운이 오더라도 잡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며.

바다에서는 불필요하게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고, 노인은 항상 그렇게 여겼으므로 그것을 존중했다. 그러나 이제 화를 낼 사람이 아무도 없어진 이후, 그는 자신의 생각을 소리 내어 몇 번이고 말했다. (p. 42)

노인은 혼자이지만 소리내여 자기자신과 대화를 나눈다. 혼자 노를 젓고 혼자 낚시줄을 드리우고 혼자 키를 잡고 있지만 끊임없이 이야기를 한다. 이 작품은 노인의 독백인 셈이다. 그러다 고기가 걸렸다. 그것도 아주 큰 놈같다.

이것이 녀석을 죽일 거야. 노인은 생각했다. 녀석은 영원히 이러고 있을 수는 없을 테니. 그러나 네 시간 후에도 물고기는 여전히 바다 멀리로 계속해서 헤엄치고 있었고, 돛단배는 끌려가고 있었으며, 노인은 낚싯줄을 등에 가로지른 상태로 단단히 버티고 있었다. (p. 48)

노인은 굉장한 물고기를 많이 보아 왔다. 천 파운드가 더 나가는 것들도 많이 봐 왔고 살면서 그 크기의 고기를 두 마리 잡아 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혼자 한 건 아니었다. 지금은 혼자로, 육지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지금껏 봐 오고, 지금껏 들어본 중에 가장 큰 물고기에 단단히 매달려 있는 중이었는데, 그의 왼손은 여전히 오그라진 독수리의 발톱처럼 뻑뻑한 상태였다. (p. 67)

낚싯줄에 고기가 걸렸을때 무겁고 큰 놈이란건 알았지만 물밖으로 나오지 않아 크기를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물고기는 노인의 배를 점점 더 먼바다로 끌고 갔다. 하지만 노인은 다른 모든 낚시줄을 이어 그 물고기와 연결된 줄에 이어붙이고 자신의 온 몸으로 그 줄을 지탱하면서 결코 그 줄을 끊지 않았다.

네가 나를 죽이겠구나, 물고기야, 노인은 생각했다. 그래, 너는 그럴 자격을 가지고 있지. 결코 나는 지금까지 너보다 더 거대하거나, 더 멋지거나, 혹은 침착하거나 더 당당한 것을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형제야, 어서 와서 나를 죽이렴. 나는 누가 누굴 죽이건 개의치 않는단다. (p. 97)

그는 물고기가 공격당하고 있을 때 마치 자신이 공격당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 물고기를 공격하는 상어를 죽인 게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p. 108)

믈고기에 계속 끌려가면서 그 물고기의 실체를 확인 한 후 노인은 자신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물고기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며칠 간의 사투 끝에 물고기를 배에 묶을 수 있었지만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진정한 사투는 어쩌면 이제 시작이었다. 커다란 물고기의 피냄새를 맡고 상어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노인은 첫번째 상어를 물리쳤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반쪽 물고기야" 그는 말했다. "너였던 물고기야, 미안하다. 내가 도를 넘어서 유감이구나. 나는 우리 둘 다를 망가뜨렸구나. 그렇지만 우리는 많은 상어를 죽여왔지. 너와 나는, 그리고 많은 다른 것들을 망가뜨렸지. 너는 이제까지 얼마나 많이 죽였니, 늙은 물고기야? 네 머리의 창을 쓸데없이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닐 테니 말이야" (p. 120)

상어는 물리쳐도 새로운 놈이 또 몰려왔고 그렇게 잡아묶은 물고기의 살점들은 먹혀가고 배도 망가져가고 노인의 몸엔 부상이 쌓여갔다. 하지만 노인은 포기하지 않았고 드디어 마을의 항구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무엇이 자네를 이긴 거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그는 소리내어 말했다. "나는 너무 멀리 나갔던 것뿐이야" (p. 125)

며칠간의 사투끝에 집에 다시 돌아왔다. 소년은 노인을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노인의 배에 묶여 있는 커다란 뼈를 보았다. 소년은 울었다.

"우리 이제 다시 함께 고기를 잡아요"

"안 된다. 나는 운이 없다. 나는 더 이상 운이 없어"

"운 따윈 상관없어요" 소년이 말했다. "운이라면 제가 가져올게요" (p. 130)

커다란 물고기를 잡았던 그때 그순간엔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는데, 멀고 먼 길을 오는 동안 상어에게 다 먹히고 뼈만 남아있게 상황에서 과연 노인에겐 운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없었따고 있다고 해야할까 없다고 해야 할까...

"저게 뭐죠?" 그녀는 웨이터에게 물었고 이제 막 밀물에 쓸려 쓰레기로 떠내려가길 기다리고 있는 거대한 물고기의 긴 등뼈를 가리켰다. "티뷰론이요" 웨이터가 말했다. "상어죠"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나름 성의를 다하고 있었다. "나는 상어가 저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꼬리를 가졌는지 몰랐는데" (p. 132)

주둥이에 길다란 창이 달린 물고기 커다란 물고기 그 바다에서 주로 잡히는 그렇게 생긴 커다란 물고기는 청새치 라고 한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관광객의 질문에 카페 웨이터는 티뷰론이라고 대답한다. 티뷰론은 상어라는데... 웨이터는 왜 상어라고 한 것일까? 역자는 청새치임이 분명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어렸을 때 읽은 기억에도 노인이 잡은 물고기는 상어였었다. 헤밍웨이는 왜 이런 마무리를 한 것일까...

[노인과 바다]가 출간되었던 1952년, 헤밍웨이는 10년 넘도록 의미 있는 문학작품을 쓰지 못한 상태였다. (p. 246) 이 소설의 우화 같은 구조는 이야기가 상징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알레고리로서 [노인과 바다]를 보는 이유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그 모든 것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혹은 적어도, 그렇게 말했다. "거기에는 어떤 상징주의도 없다" 고. (중략) 헤밍웨이는 자신의 편집자 월리스 마이어에게 원고를 보내면서 말했었다. "나는 이 소설이 내 인생을 통틀어 쓸 수 있었던 최고라는 것을 알고 있다네. 내 생각에, 또한 이것과 나란히 놓이는 것으로 멋지고 훌륭한 작품이 해를 입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고" 그러고 나서 그는 그것이 "내가 작가로서 통과해야 하는 비평 집단을 제거하는'계기가 되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p. 249)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의 마지막 소설이다. 우화적으로 읽히지만 그런 상징따위 없다며 비평가들을 조롱하면서 자신에게 최고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온통 상징적으로 읽히게 써놓고 상징따위 없다고 비평가들의 상징주의적 분석따위 의미없다고 일갈하는 헤밍웨이의 삐딱함이 눈에 그려지는 듯 하다. 단순하게 읽으면 노인이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았으나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는 이야기다. 이 단순한 서사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이 단순한 서사로 자신의 최고작품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던 이유는 단순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스스로 알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일까?

비교적 짧은 작품인데다 번역에 대한 역자의 자신감때문에라도 이 책은 한글본과 영문본이 함께 실려있고 저자의 강조을 담은 역자해설도 붙여져 있다. 영어를 모르니 번역에 대한 바름의 정도는 일단 건너뛸 수밖에 없는데 그런 후에도 왠지 추억속의 작품과 느낌이 다르다. 늙은 어부의 삶이 좀더 생생하게 느껴기는 하는데 '상징'을 뺀다면 무엇을 남겨야 할지는 좀더 막막해지는 기분이다.

85일째에서야 잡은 커다란 물고기... 그동안 없던 운이 횡재가 될수도 있었으나... 고기에게 끌려가는 작은배... 그럼에도 노련하게 낚시줄을 당겼다풀었다 하며 고기를 기어코 잡은 노인... 상어들의 연이은 공격... 살점하나 남지 않은 물고기... 몸 여기저기 다치고 또 다쳐서 성한데 한곳 없이 빈손으로 돌아오게 된 노인... 다시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탈 수 있을지없을지 모르는 상태... 청새치를 잡았으나 상어를 더 여러마리 해치웠으니 그 뼈만 남은 물고기는 청새치가 아니라 상어라고 불러야 하는걸까... 운이 없어도 고기를 못잡아도 늘 준비하고 일상을 하루도 빠짐없이 채웠던 노인에게 그 물고기는 운이었을까 아니었을까... 노인에게 바다란 무엇이었을까... 그런 노인을 바라보며 어부가 된 소년에게 바다는 무엇이 될까...

겉표지를 벗겨내면 보이는 하드커버에 그려진 삽화에 한참 눈길을 두게 된다. 저 작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배보다 큰 물고기를 오직 낚시줄로 잡은 노인의 노고에 대해 그저 한참 먹먹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그 막막함을 조금이나마 줄여본다. 바다란 늘 그렇게 그저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삶도 그런 것이려나...

-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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