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 역사가가 찾은 16가지 단서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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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탐정의 눈으로 추적한 푸아로와 마플의 시대를 읽는 16가지 단서

'범죄의 여왕' 혹은 '미스터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지닌 애거서 크리스티는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한 세계적인 작가다. 66권의 장편 소설과 14권의 단편집을 포함해 100여 권의 책을 출판했으며 10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녀는 흔히 '셰익스피어와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알려져왔고 실제로 2018년에는 기네스 세계기록에서 역사상 책이 가장 많이 팔린 소설가로 이름을 올렸다. (p. 7) 그런데 작가 애거서의 화려한 프로필보다 내게 더 와닿았던 것은 인간 애거서의 삶이었다. 참혹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굳건하게 견뎌내며 간호사와 약제사로 열심히 일앴던 여성, 정규학교 교육과정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으면서도 독학으로 풍부한 지식을 쌓았고 평생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며 자신을 연마했던 성실한 사람,애거서 말이다. (p. 8)

저자에게 이 책은 코로나패데믹이 가져온 예상치 못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영국사를 전공했고 대학에서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면서 코로나로 제대로 된 활동을 못하게 되면서 다시 읽게된 애거서 크리스트의 소설에서 어릴 때 읽었던 것과는 다른 의미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렇게 생긴 의문들을 풀다보니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애거서의 생애를 염두에 두고 그녀가 쓴 작품을 읽다 보니 개인의 경험과 창작의 결과물 사이의 접점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역사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원 사료와 2차 사료를 병렬해 살펴보는 것 같은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p. 8)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새로 읽기' 정도가 될 것이다. 어른이 되어 그녀의 추리소설을 다시 읽었을 때 새롭게 보이는 것들, 영국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읽었을 때 눈에 들어오는 것들, 그리고 애거서 크리스트 전집과 자서전을 읽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된 것들을 16개의 주제로 담아보았다. (중략) 조금 더 욕심을 부려 이 책의 의미를 찾자면, 애거서 크리스티에게 '비평적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려는 작은 노력이라는 점일 것이다. 애거서의 소설은 100년 동안 대중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아왔지만, 학계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신기하리만치 애거서 작품들에 냉담했다. (p. 10)

저자는 어렸을 때 애거서 전집을 읽었다는데 이상하리만치 나는 애거서의 작품을 읽은 기억이 없다. 홈즈 시리즈는 다 읽었었고 루팡 시리즈도 몇 권 본 것 같은데 애거서 크리스티 라는 이름은 알았어도 그녀의 작품을 그 많다는 작품을 나는 왜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일까 이상할 정도다;;; 작품을 읽은 것도 없는데 이 책을 읽는 것이 가능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다행히 기우였다. 작품 내용을 전혀 모를지라도 이 책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 상관 없었다. 오히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새삼스레 불러일으켰다.

최근에 두툼한 역사책을 읽고 나서 그런지 이 책은 내게 일종의 영국 근현대사로 읽히는 책이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라는 여성 추리 소설가의 삶에 그가 그려낸 작품 속에 세계1,2차 대전을 전후한 영국 사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애거서는 18세 때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작품은 단편 <아름다움의 집>이었고, 이후 장편에 도전했다. 이집트 카이로에 머물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로맨스 소설 <사막에 내리는 눈> 이 바로 그것이다. 그 작품을 모노실라바 라는 다소 생뚱맞은 필명으로 여러 출판사에 보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상심한 딸이 안쓰러웠던 어머니는 마침 이웃에 살던 유명한 소설가 이든 필포츠에게 조언을 구했다. <어둠의 소리>, <빨강 머리 레드 메인즈> 등 다트무어를 무대로 삼은 기괴하고 으스스한 소설을 쓴 바로 그 사람이다. (p. 20)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애거서가 정규학교교육과정을 받지 못하고 간호사등 이런저런 직업을 가지며 자수성가한 인물처럼 소개했지만 아니었다. 본문에서 저자가 알려주는 애거서의 삶은 나름 풍요로운 영국 중산층 가정이었다. 학교교육을 못받았다기 보다는 다닐만한 적절한 학교가 없었고 학교교육이 아니었어도 이런저런 충분한 예술사교육을 받았으며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바로 이웃에 적절한 조언을 해줄 만한 유명한 소설가도 있었다! 애거서는 바로 다른 장으로 전환했고 당시 유행하던 추리소설이 그것이었다.

애거서는 원래 추리소설의 열렬한 독자였다. 그녀가 어렸을 때 영국에서 추리소설은 '읽을 거리'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한 상태였다. 1890년대 중반 영국에서는 약800종의 주간지가 발행되었는데, 그 가운데 무려 240종에 달하는 잡지들이 다양한 형태의 '추리물'을 싣고 있었다. 물론 가장 유명한 것은 <스트랜드 매거진>에 연재되던 셜록 홈스 시리즈였다. (p. 21)

애거서 크리스티가 홈즈 시즈와 코난 도일과 뤼팽 시리즈의 모리스 르블랑 과 동시대 사람이었다니, 그때 추리소설이 그렇게 붐이었다는 것도 그 시리즈를 여전히 우리가 읽고 있다는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작고, 뚱뚱하고, 달걀 모양의 머리에 거대한 콧수염을 기른 우스꽝스러운 모습 (중략) 어느 순간부터 푸아로는 스스로 나서서 셜록 홈스를 언급하고, 심지어 자신이 셜론 홈스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p. 25) 마플은 생계를 위해 일하는 사람도 아니고 결혼을 원하거나 심지어 로맨스를 꿈꾸지도 않는다. 대신 아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여성적 직관과 감정'을 내세워 인간의 심리를 파헤치고 상황을 꿰뚫어 본다. (p. 29)

코난 도일의 추리소설 시리즈에서 주인공이 셜록 홈스 라면 애거서의 추리 소설 시리즈에서 주인공은 푸아로 와 마플 인가 보다. 푸아로는 벨기에 사람인 사립탐정이고 마플은 이른바 노처녀 이다. 이 두 캐릭터는 함께 나오는 캐릭터 라기 보다는 애거서 가 쓴 작품 들 속에 등장하는 대표적 탐정 두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것 같다. 코난 도일은 홈스 한명을 창조했다면 애거서는 두명 이었달까. 여하튼, 다른 무엇보다 푸아로의 외모는 독특하다고 할 수 있었다. 영국신사적인 홈스와 너무너무 달랐다고 한다. 애거서 가 내세운 탐정 캐릭터는 기존 추리 소설들에 나왔던 인물들과는 무척 달랐던 것이다.

영국에서는 전간기를 '추리 소설의 황금기'로 보는데, 이 황금기를 이끌었떤 대표주자로 세 명의 여성 작가, 즉 애거서 크리스티, 마저리 앨링엄, 도러시 세이어스 를 꼽는다. 앨링엄은 캠피언이라는 탐정을 내세웠고, 세이어스는 피터 웜지 경 시리즈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애거서는 이미 푸아로와 마플 이라는 두 명의 대표선수를 데리고 있었다. 이처럼 여성 작가들이 큰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추리소설의 황금기가 곧 '셜록 홈스와 결별한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심신이 망가진 남성들에게서 셜록 홈스같은 완벽한 영웅상을 대입할 수는 없었다. (p. 30) 이 시대의 추리물은 전쟁 후 피폐해진 일상에서 벗어나는 듯한 환상을 주었다. (중략) 악인을 찾아 처벌하는 결말은 혼탁한 사회에서 종국적으로 도덕성이 회복된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게다가 애거서 작품은 영국의 사법체계를 옹호한다. (p. 31)

애거서 크리스티는 세계1차대전, 세계2차대전을 모두 겪은 세대다. 그 전쟁의 상흔을 이겨내야 했던 시절 속 추리소설은 그 이전 시대의 추리소설과 같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애거서의 작품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재미있고 사립탐정이 사건을 해결하지만 늘 경찰이 범인을 잡을 수 있도록 하는 체제안정적인 결과로 독자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고 한다. 심리스릴러적 추리소설을 읽으며 깔끔한 추론을 통한 카타르시스 를 주면서 권선징악적 엔딩이라... 그런데 B급 소설로 치부되어 왔다는 것은 작가가 여성이었기 때문인 것일까...

영국인들에게는 조금 다른 형태의 집에 대한 집착이 또 있다. 자기들이 발 딛는 곳 어디에나 집부터 짓고 보는 독특한 습성이 그것이다. (중략) 이런 특성 때문에 영국은 대항해 시대 이른바 '신대륙'을 발견한 유럽 국가들의 경쟁에서 최종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 (p. 41)

전쟁이 끝나자 군대뿐만 아니라 군수공장에 투입되었던 여성들은 모조리 가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p. 71) 그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 여성 참정권이다. (p. 72)

애거서 처럼 단호하게 뛰어난 외모와 성적 매력을 전혀 별개의 카테고리로 취급하는 작가는 아주 드물다. (p. 79) 그렇다면 남성들은 어떠한가. 애거서 작품 속의 남성들은 단순히 여성의 외모에 현혹되어 사랑에 빠져버리는 그런 남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사랑은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요인에서 출발한다. (p. 80)

퍼블릭 스쿨은 엄격한 위계와 의식화된 코드, 계율과 질서의 총본산이다. 그것의 핵심에는 지독하게도 배타적인 엘리트 의식이 있었다. (중략) 사립학교 출신들은 옥스브리지(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를 합쳐 부르는 말)를 거쳐 영국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핵심부로 진출했다. (p. 115) 오늘날까지도 영국에서 정치, 군 수뇌부, 법률, 언론, 금융 등은 사립학교 졸업생들이 지배하는 분야로 굳건하게 남아있다. (중략) 이튼은 아직도 여학생 입학을 허용하지 않는다. (p. 117)

애거서의 삶과 작품 속 캐릭터들로 보는 당시의 영국사회 읽기는 무척 재미있었다. 소설 줄거리를 몰라도 저자가 알려주는 캐릭터적 특성만으로도 충분히 이해될 만한 주제풀이였다. 그렇게 읽은 영국사회는 지금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추리소설 작가로서 최고의 성공을 거둔 뒤에도 애거서는 '나는 여전히 작가인 척하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에 휩싸여 있다'라고 고백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가 창조해낸 캐릭터들을 사랑하지도, 심지어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의 정체성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그 부분에 대해 답을 한 적이 없다. (p. 130)

애거서는 부유했고 박학다식했고 활동범위도 넓었고 지적욕구도 높았다. 해외여행도 자주 한만큼 다양한 경험이 있었고 그렇게 활발히 움직이면서도 엄청난 다작을 써낸 작가였다. 그런데 작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남겨놓았다. 그리고 후대의 문학가들은 그녀의 작품을 홈스시리즈만큼 대우해주지 않았다. 왜였을까...

영국은 아직도 U and Non-U (상류층과 비상류층)을 구별하는 '분명한 분별 기준'이 있는 나라다. 냅킨은 상류층의 용어이고, 중하류층은 냅킨을 서비엣이라고 부른다. 중하류층은 후식을 디저트나 스위트라고 부르지만, 상류층은 푸딩이라고 부르기를 고집한다. 중상류층이 2~3인용 안락의자를 소파라고 부르는 데 비해 그 아래 계층은 세티 혹은 카우치라고 부른다. (p. 199)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를 거쳤고, 이성을 앞세운 근대성이 완성되었다고 여겨진 시대, 도대체 왜 그렇게 미신적인 내용이 많단 말인가. (p. 203)

영국에 계층간 사다리는 없다. 막강한 선진국이고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대국이지만 영국은 여전히 귀족문화가 지배적인 나라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나라이고 과학과 계몽주의를 일으킨 나라이지만 마녀, 마술, 심령술, 관상 등 다양한 미신이 여전히 생활 깊숙이 자연스레 존재하고 있는 나라다. 애거서 시대의 영국은 현재의 영국을 다시보게 한다.

애거서의 소설은 주로 20세기에 집필된 것이지만 그 내용은 19세기 말 제국의 영광과 빅토리아 시대의 정서를 담고 있다. 20세기 후반 그 소설에 열광했던 시간은 영제국의 헤게모니를 자연스럽게 내재화하는 훈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21세기에도 애거서의 콘텐츠는 끊임없아 재생산되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처럼 제국주의를 문화적 현상으로 보자면 '식민'과 '탈식민'의 시간적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중요한 것은 식민지의 정치적 종속이 아니라 '식민 세력이 타자의 몸과 공간에 스스로를 새겨 넣는 순간'인 것이다. 애거서가 소설 속에 녹여 넣은 '영원한 영국'을 이제는 좀 더 냉정한 시선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p. 244)

다분히 영국제국주의적 시각이 들어간 애거서의 작품들을 셰익스피어 작품이나 홈스 캐릭터처럼 국가의 대표 문학으로 내세우진 않지만 은근히 드라마로 영화로 새로운 번역으로 유통시키는 것엔 여전한 제국주의적 저의가 숨어 있는 것일까? 문학은 가볍게 소비하기 쉬운 분야인만큼 무의식중에 내재화되는 문화이기도 하다. 그러한 문학과 문화를 역사가의 눈으로 보면 이렇게 볼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감탄하며 읽었던 책이었다. 이런저런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영국은 참 여전히 늘 흥미로운 나라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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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순간, 이런 클래식 - 바이올리니스트의 인생 플레이리스트
김수연 지음 / 가디언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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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모든 순간'과 어울리는 클래식을 찾는다면,

바이올리니스트가 아껴왔던 클래식 리스트를 당신에게만 알려 드립니다.

몇달 전에 바이올리니스트 이자 대중강연자인 저자의 첫 책 <Fun한 클래식 이야기>를 읽었었다. 세계 유명 작곡가들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어렵게 느껴졌던 클래식에 쉽게 다가가고 음악적 상식도 얻을 수 있는 책이었다. 첫 책의 반응이 꽤 좋았었나 보다. 일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두번째 책이 나왔다. 어쩌다보니 그 두번째 책을 내가 또 연이어 읽게 됐다. ^^

저자는 오랜 세월 클래식에 몸담아 온 바이올리니스트이지만 방송이나 강연장등 다양한 매체에서 클래식을 전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던 듯 하다. 그래서인지 교수님 처럼 어렵지 않고 전문가 처럼 티내지 않고 그저 편안하게 언젠가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클래식을 이야기를 짧은 에세이글과 함께 소박하게 전달한다.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언급하듯이 '살다 보면 음악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어떤 순간 들었던 음악이기에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하고 어떤 순간을 문득 떠올리게 하는 것이 음악이기도 하다. 때로는 그저 기분에 따라 알맞은 음악을 찾기도 하고 거리나 카페에서 우연찮게 들린 음악에 위로받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일상에서 하루종일 음악을 단 한번도 듣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있을까? 이어폰을 꽂지 않아도 다양한 매체에서 다양한 공간에서 음악은 매일매일 일상과 함께 해왔다. 하지만 좀더 내게 맞는 음악, 내가 찾고 싶은 음악, 그런 음악이 필요할 때 이 책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노랫말이 있는 음악을 들으면 다른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부턴가 연주곡을 틀어놓고 이런저런 일을 하곤 한다. 기왕이면 클랙식 음악이 왠지 더 고급스러운 듯 느껴지지만 딱히 아는 것도 없고 유명한 작곡가들의 연주곡을 들어봐도 그닥 감흥이 없어서 그냥그냥 유투브에서 이런저런 검색어로 얻어걸린 음악들을 틀어놓을 때가 많다.

그런데 이 책에는 유투브로 연결되는 QR코드가 있다. 매 곡 마다 제목 옆에 위치한 QR코드를 스캔하면 저자가 직접 고른 유투브 연주영상으로 연결된다. 같은 곡이라도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다르기 마련인데 전문가가 골라준 영상이니 그야말로 믿고 들을 수 있는 영상인 셈이다. 그렇게 저자의 곡 소개를 읽고 연주 영상을 틀어보기도 하고 곡에 관련된 비하인드 이야기를 읽고 연주 영상을 틀어 보기도 하면서 생각보다 에너지 넘치게 책장을 넘기게 됐다. 다음엔 또 어떤 곡이 나올까 하면서.

일단 내용이 궁금해서 책을 다 읽긴 했는데 내용이 중요한 책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정말로 클래식 리스트로서 도움될 책이었다. 그래서 다 읽었어도 가끔씩 문득문득 책장을 들춰보며 QR코드를 스캔하게 될 것 같다. 저자가 그 음악을 들으며 느낀 것과 내게 느껴지는 것은 같을 수 없다. 저자가 아무리 강력하게 추천했어도 나에겐 별로 일 수 있고 저자가 스치듯 소개했는데 나에겐 맞춤한 곡일 수도 있다. 그렇게 가끔씩 책 속의 QR코드를 스캔하다 보면 나만의 클래식 리스트가 만들어지려나 ㅎㅎ

오늘은 비가 오고 흐린 날이었지만 나는 이 책에서 알게 된 '프레데리크 쇼팽 : 왈츠 작품번호 34번 '화려한 대활츠' 중 3번 '고양이 왈츠' (p. 54) 가 마음에 들었다. 새끼 고양이가 피아노 위에 잘못 올라가 건반이 눌려 그 소리에 놀라며 당황하는 모습을 음악으로 표현한 곡이라는데 사실 고양이가 놀라면 바로 팔짝 뛰어오르기 때문에 이런 곡이 나올 순 없다. 하지만 고양이 발로 눌러지는 건반을 상상하며 들으니 재미난 기분이 들었다.

이 책을 통해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골라 들을 수 있는 96개의 클래식 리스트를 얻은 것 같고, 그 자리에서 바로 QR코드를 통해 감상할 수 있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손쉬운 즐거움이 클래식을 좀더 가깝고 편안하게 들을 수 있게 한다. 그런 순간? 이런 클래식!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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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 올드 사나에서 바그다드까지 18년 5개국 6570일의 사막 일기
손원호 지음 / 부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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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사나에서 바그다드까지, 18년 5개국 6570일의 사막 일기

당신이 몰랐던 아랍, 아랍인 이야기를 만나 보시죠.

'아랍'은 우리에게 멀게 느껴지는 단어다. 어떻게 보면 '이슬람' 보다도 더 낯선 단어 같다. 서구식 문명과 미국식 문화에 익숙한 우리에게 중앙아시아라던가 아랍지역 혹은 이슬람지역으로 통칭되는 곳들은 비행기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가는 비행길의 중간지일뿐 도착지인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역사책을 좀 읽다보니 이 지역들에 대해 무수한 질문과 관심이 생겨났다. 이 책은 아랍의 역사를 다룬 책은 아니고 아랍의 '현재'를 알려주는 책이지만, 일단 지금 모습 그대로의 현실감 현재감 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좀더 친근한 접근 아니겠는가?!

저자는 아마도 아랍어를 전공한 것 같다. 이집트에서의 어학연수와 한국석유공사에서의 이라크 생활 등 아랍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문화와 역사가 궁금해졌고 지금은 두바이에서 아랍의 역사에 대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고 한다. 현지어로 소통하며 장시간을 함께 지내온 만큼 저자가 들려주는 아랍인들의 이야기는 생동감이 넘친다. 저자가 들려주는 아랍이야기는 크게 5개국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집트, 예멘,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아랍에미리트연합.

아랍 세계를 오랜 기간 경험하고 공부하자 다른 사람에게도 이 사막 도시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졌다. 뉴스에서 접하는 단편적인 뉴스만으로 아랍 세계를 단정짓고 이해하는 것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다. 지리적으로 광대할 뿐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역사적 깊이로 인해 아랍 세계에는 우리가 모르는 신비한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이 책을 통해 인간 아랍인을 가슴으로 느끼고, 그들이 만들어 온 매혹적인 역사와 현재의 이야기들을 여행하며 아랍 세계에 빠져들 수 있기를 바란다. (p. 9 -프롤로그 中-)

저자는 아랍지역에서의 정서에 진심으로 매혹된 것 같다. '술도 없이 남자들이 밤새도록 수다를 떠는 풍경은 언제 봐도 낯설다. (p. 18)' 고 느꼈던 저자가 고대이집트에서의 술 문화가 이어진 이집트 맥주회사의 '사카라 맥주'를 즐겨 마시면서 표면적으로만 알던 아랍문화에 풍덩 빠져드는 과정은 사이사이 등장하는 역사이야기와 맞물리면서 나또한 그 기분에 동화되게 만드는 진정성이 전달됐다.

아랍의 문화와 역사를 알게 될수록 유럽세계와 기독교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도 느낄 수 있었는데,

이 시기에 72명의 유대인 번역자가 알렉산드리아에 모여 히브리어로 된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일은 유명하다. 이렇게 번역된 구약 성경을 70인 역이라고 부르는데 유럽어판 구약 성경들은 모두 이것을 원전으로 삼고 있다. (p. 47) 예수의 가족이 석 달간 머물렀다는 역사적인 장소였다. 그래서 성 세르기우스 바쿠스 교회는 한국인 순례객들 사이에서 '예수 피난 교회'라고도 불린다. (p. 56)

이집트에 남아있는 기독교인들과 그 문화의 소수성과 예외성이 우리네 인식 속에서 아랍인들의 소수성 및 예외성과 다를바 없는 것 같아서 상식아닌상식이 고착화되기 전에 좀더 제대로 잘 알아야 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처음엔 기독교지역이었다고는 하나 이슬람화 된 이집트 외에 처음부터 이슬람문화권이었던 아랍지역에서의 이야기들은 더 생소하게 다가오는 것들이 많았다.

아랍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에 대한 극도의 차별은 오히려 7세기 이슬람 교리를 통해 개선되었다. (p. 80) 지금도 예멘 여성들은 남성들의 권위주의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그들이 역사를 통해 만들어 온 어두운 문화적 프레임이다. (p. 82) 많은 아랍인이 자신의 주관을 개입시켜 회의의 방향을 본인 위주로 끌어가려고 고집한다. 사실만 근거로 해서 이들을 설득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p. 97) 아랍인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말과 음성, 몸짓으로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아랍에서 수사학인 발라가가 발달한 이유이기도 하다. (p. 101)

아랍, 이슬람, 코란 하면 남녀차별 문제가 가장 먼저 생각나는데 코란에서 오히려 남녀평등을 이야기 했음에도 예멘같은 곳에서는 여전히 극도의 차별적 억압문화가 바뀌지 않고 있고 그런 모습과 상반되는 것 같은 열정적인 아랍인의 표현방법은 체험해보지 않으면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저자 또한 '아랍인과 가까워지는 법,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러나 해결의 열쇠는 있다. 이성을 총동원하여 전략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만이 상책이 아니다. 그들과 얼마나 감정적인 유대감을 조성하여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느냐, 이것이 키다. (p. 105)' 라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아마도 이 열쇠를 획득했기에 그토록 깊은 애정을 품고 아랍을 공부하며 살기로 마음먹을 수 있었나 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분야인 역사 이야기가 나올때면 더욱 눈길이 확 쏠리곤 했는데

무함마드가 신의 특별한 예언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알라의 예증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이야기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연옥-천국 여행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스페인계 이슬람·아랍 언어학자 미겔 아신 팔라시오스는 무함마드의 승천이 단체의 <신곡> 구상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p. 141) 요르단 왕가는 아랍 국가 중 유일하게 선지자 무함마드의 혈통이 다르시는 국가로 남아 있다. (p. 162) 이란의 사파비 왕조는 역사상 처음으로 국교를 시아 이슬람으로 공포한 페르시아 왕조면서 현재 이란이 시아 종주국이 된 시발점이기도 하다. (p. 221)

무함마드의 '하룻밤의 기적?!' 이나 왕조들의 이야같은 신선한 이야기들도 좋았지만 지금의 아랍국가들의 형성과 갈등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들이 무척 유용했다. '현재 중동의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인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을 사람들은 자꾸 종교와 엮으려고 하는데... 이건 유대-아랍 민족 간의 영토 분쟁이야. 종교 싸움이 아니라고. (p. 149)' 라는 현지인의 말은 지금 우리가 얼마나 그들을 모르는가를 가장 직적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말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아랍과 중동 지역들의 갈등을 종교문제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은 민족간 영토분쟁이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서구열강들이 뿔려놓은 것이었다.

현재 중동 국가들 대부분의 국경이 직선으로 되어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직선 안으로 들어온 아랍인들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정해진, 생전 처음 들어보는 '국가'란 개념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인위적인 국경선으로 인해 같은 민족, 같은 부족이 다른 국가로 갈라졌다. 특히 쿠르드민족의 경우, 본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민족과 문화가 전혀 다른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 네 국가에 찢어져 살게 되면서 세계 최대의 유랑 민족이 되고 말았다. (p. 160) 쿠르드족은 아랍인이 아니라 언어, 문화 자체가 아예 다른 민족이었다. (p. 222) 물과 기름처럼 결코 섞일 수 없는 종파와 민족들로 구성된 모자이크 국가 이라크는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p. 225)

'국가'개념이 없이 민족과 부족단위로 살던 지역에 서구 열강이 도입한 국가라는 틀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문화와 역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쿠르드족과 이라크 라는 나라가 왜 지금까지 그토록 서로 갈등할 수 밖에 없는지 이해하게 되면서 그들의 고단한 삶이 무척 안타깝게 다가왔다. 더구나 지금의 그 처참함에서 상상할 수 없는 과거의 그들의 역사를 알게 되면 더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금할길 없어진다.

알만수르가 2대 칼리파가 되면서 이슬람 세계에는 본격적인 변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서유럽 기독교 세계가 문을 걸어 잠그자 갈 데가 없어진 세속 그리스 및 헬레니즘 학문이 이슬람 세계의 문을 두드렸다. (p. 271) 왕이 만들어준 무대에서 다재다능한 천재 학자들은 경제적 장애물 없이 마음껏 실력을 발휘했다. (중략) 17세기 부터는 이런 사람을 폴리매스 라고 불렀는데, 이슬람 세계에서는 학자라면 으레 폴리매스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중세 시대 바그다드에는 전 세계적으로 뛰어난 폴리매스 학자들이 넘쳐났다. (p. 274)

이라크에 비해서 아랍에미리트 는 무척 현명한 길을 걸어온 것으로 보였다.

아랍에미리트는 일곱 토후국으로 구성된 연방국가다. 각 토후국에는 통치자가 존재하는데 한마디로 해당 토후국의 '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p. 287) 정작 이들에게는 선조들을 기억할 만한 유형 문화재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실제로 에미리트인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고난의 삶을 통한 인내와 끈기'라는 정서적 유산 뿐이다. 어떻게 하면 과거를 잊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이를 위해 두바이의 통치자 세이크 무함마드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냈다. 무형의 자산을 형상화해 현대 건축물에 반영하는 것이다. (p. 308)

지도를 보면 그닥 크지 않은 땅덩어리를 지녔고 역사적으로 다른 아랍국가들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았던 아랍에미리트가 연방국가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쪼개지고 갈라진 다른 지역들에서도 이런 연방체제를 잘 형성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따지고 보면 유럽의 많은 국가들도 연방국가이거나 연방국가가 아닐지라도 각 주나 도시들이 강한 권한을 지닌 체제들이다. 유럽의 역사를 읽을 때도 느꼈던 건데, 현대를 국가사회라기 보다는 부족사회로 이해할 때 더 많은 것들이 파악되는 것 같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사적인 시간을 즉흥적으로 또 기꺼이 할애하는 유연성이 있다. (p. 319) 한국인들은 대부분 크로노스의 시간을 체계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p. 321) 반면 카이로스는 특정한 의미가 부여된 '주관적 시간'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거나 중요한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질적' 시간이다. 우리가 걸프 아랍 지역에서 만나는 아랍인들은 이러한 주관적인 시간에 익숙하다. 이들의 시간 관념은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곗바늘에 얽매이지 않는다. (p. 322)

아랍과 우리의 문화적 차이를 가장 크게 실감할 수 있게 하는 건 '시간' 개념 일 것 같다. 저자는 익숙해져서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의 시간개념을 맞닥뜨렸을때 무척 당황스러울 것 같다. ^^;;; 여하튼 저자가 들려주는 아랍인들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친근하고 생각보다 거부감없이 그들의 문화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을 읽으며 때로는 감탄하고 때로는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의 현재가 어떠한지 들여다보는 시간은 무척 의미있었다. 저자만큼 아랍에 황홀경을 느끼진 못하겠지만 저자가 18년 동안 5개국의 아랍문화를 경험하며 살아온 것이 부러워지는 것을 보면 아랍엔 분명 매혹적인 무언가가 있긴 있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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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끝이 당신이다 - 주변을 보듬고 세상과 연대하는 말하기의 힘
김진해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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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들께는 굳이 이 책을 권하고 싶지 않다. (중략) 이런 분들은 이 책에다 '불온서적' 이란 딱지를 붙일지도 모른다. 이런 분들께는 적극 권한다. 말실수 때문에 잠 못 이룬 적이 있는 분, (그래서) 말끝이 자주 흐려지는 분, 말과 말 사이에 민감한 분, '없음' 과 '모름' 이 삶과 사회를 풍성하게 한다고 여기는 분, 자기표현이 민주주의의 첫걸음이라고 믿는 분, 지도자보다 '촉진자'가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하는 분, 국민이 아니라 (세계) 시민이 미래를 열어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분... 이런 분들께 이 책은 인문학의 최전위일 것이다. '나'와 우리를 돌아보고 더 나은 내일을 꿈꿀 때 이만한 자극을 줄 수 있는 글이 또 어디 있으랴 싶다. 그렇다. 미래는 '불온한 말'에서 시작된다.

뒷 표지 中 - 이문재 (시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나는 새로운 책을 읽을때면 표지부터 찬찬이 느끼기?! 시작한다. 재질을 만져보고 표지그림의 메세지도 생각해보고 추천사와 홍보문구가 주는 기대치를 한껏 품어보기도 한다. 그러고나면 앞뒤 책날개를 꼼꼼이 읽는 것으로 책읽기를 시작한다. 저자의 이력부터 표지에 못다실은 책소개나 시리즈의 안내등을 읽으며 본책을 읽기 전부터 다른 읽고 싶은 책을 리스트업 해두기도 한다. 이 책은 가제본 같은 느낌의 거친 표지에 대비해 매끈한 페이지들이 일정한 분량의 글을 익숙치 않은 글씨체로 담고있는, 전체적으론 신선한 느낌의 책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에 끌리게 된건 뒷표지에 쓰여져있는 추천사 때문이었다. 이문재 시인의 추천사만큼 멋진 추천사를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이 책을 적극 권할 그런 분들이 나를 지칭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불온서적' 꽤 읽어본 사람으로서 이 시대의 불온서적일지도 모른다는 것만큼 매력적인 추천사가 또 어디 있으랴 ㅎㅎ

이 책은 <한겨레>에 '말글살이'라는 이름으로 매주 쓴 칼럼에서 가려뽑은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한 조건은 아주 고약했다. '이름과 소속 포함 원고지 넉 장, 800자 이내(제목 제외). 제목은 7자 이내. 말과 글이라는 주제를 벗어나서는 안됨.' 글을 시작할라치면 끝을 맺어야 하는 길이었다. (중략) 글쓰기인지 글 지우기인지 헷갈릴 정도. 짧지만 매주 따박따박 써야 한다는 게 절묘한 형벌 같았다. 2년 몇 개월을 이 형식 안에서 살았다. (p. 12)

반복에서 오는 행복이 있다. 형식이 선물하는 자유가 있다. 형식이야말로 내용을 규정한다. 생각해보라. 말에 대한 글이 1,000자가 넘는다면? 지루하고 지쳐서 다 읽지 않을 게 뻔하다. 600자라면? 폐북에서 자기연민이나 자랑질놀이하는 길이밖에 안 된다. 사람과 동식물이 가장 살기 좋은 고도가 해발 700미터라면, 말을 주제로 삼는 글의 가장 쾌적한 길이는 800자이다(믿거나 말거나). 이 짧은 분량은 이제 나에게 가장 자유롭고 편한 공간이 되었다. (p. 13)

종이신문을 읽은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예전처럼 종이신문을 받아 읽었다면 저자의 칼럼을 매주 접했을 텐데 이렇게 책으로 나오고나서야 그 존재를 알게 되다니... 새삼 종이신문이 그립다. 이렇게 한번에 몰아볼 수 있다는게 더 좋은건지 아닌건지는 잘 모르겠다. 기다린다면 한주한주 기다림의 여운이 있었을 것이고 몰아본다면 흐려질새 없이 진한 여운을 책읽는 내내 느낄 수 있을 것이기에... 여하튼, 저자가 800자 분량의 감옥에서 800자 분량의 해방감을 깨달을 때까지의 칼럼들을 나는 아무 힘듦없이 편하게 한권으로 읽을 수 있었다. ^^

책의 내용에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이 책은 성공이다. 책을 집어던질 정도가 된다면 대성공이다. 말에 대한 당신의 고루한 생각에 균열이 갔을 테니까. 우리 사회는 말에 대한 사유가 매우 협소하다. 문법과 맞춤법을 벗어나지 않는다. 어떤 것이 맞는지를 따지는 정도. '맞냐, 틀리냐'는 사유가 아니다. 이견과 논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답 맞추기를 사유하기라 할 수 없다. (p. 14) 나는 하나의 관점을 갖고 있지 않다. 하나의 관점을 갖고 있지 않아서 매주 글을 쓸 수 있었다. 하나의 관점만 갖고 있다면 한 편의 글만 쓰면 된다. 혹여 이 책을 읽고 글쓴이가 어떤 사람일 것이라고 예측되는 바가 있다면 오산이다. 그 사람은 이미 사라졌고, 생각은 진작에 바뀌었다. 그러니 글쓴이를 찾지 말고, 여러분 스스로 말과 글을 둘러싼 이 세계를 독창적으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언어를 탄생시키길 빈다. (p. 15) - 작가의 말 中 -

어떤 소설가는 '작가의 말' 쓰기를 극도로 싫어한다고 고백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작가가 쓴 글일지라도 작가의 손을 떠난 순간 읽는 이의 뜻대로 읽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작가의 말'은 독자가 책을 다 읽은 후 저자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도록 책의 말미에 있곤 했다. 작가가 쓰는 말일지라도 책을 소개하는 경향이 강한 프롤로그나 서문과 '작가의 말'은 다른 느낌인데, 책을 마무리한 후 회고 비슷하게 쓰이는 '작가의 말'을 책의 서두에서 읽으니 이또한 새롭다.

그나저나 책을 다 읽고 '작가의 말'을 다시 읽자니 나는 저자의 의도대로 책을 읽은 것 같지는 않다.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 책을 집어던질 정도가 되기는 커녕 대부분 공감해가며 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대로 책을 읽은 것 같지 않다는 점에서 또한 이 책을 읽는 방식에서는 성공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며 글쓴이를 찾는다기 보다는 내생각과 견주어가며 읽어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새로운 언어를 탄생시킬 수 있게된 것인가? "당신에겐 어떤 문장이 있는가?" 라고 저자가 묻는 다면 나는 아직 답하지 못한다. 그러니 다시 저자의 문장을 일단 들여다보는 수밖에 ㅎㅎ

영어로는 말하는 사람 자신을 모두 1인칭 대명사 '나(I)'로 칭한다. 상대와 어떤 관계인지 상관없이 말하는 이와 듣는 이라는 건조하고 추상적인 역할만 표시한다. 반면, 한국어는 자신과 타인의 관계를 확인하되, 타인을 중심으로 자신을 호명한다. 어린 사람도 상대방을 '너/당신(You)'로 표현하지 않는다. (p. 21~22)

그런가... 한국어가 타인을 중심에 두는 표현방식이었나... '내 어깨 좀 주물러주렴' 하지 않고 '할아버지 어깨 좀 주물러주렴' 하는 것이 '나 먼저 가 있을께' 하지 않고 '아빠 먼저 가 있을께' 하는 것이 '나'를 칭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과 나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상대방이 볼때의 나'로 칭하는 것이 그런 것이었구나... 그러니 '배려' 라는 것이 '눈치'라는 것이 더 비중을 차지하는 사회분위기가 만들어져 온 것일지도...

말하기는 권력이다.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권력자다. 주인과 노예, 위와 아래,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강하게 분리되어 있을수록 더 심하다. 권력자의 말하기는 겉으론 아닌 척해도 결국 명령이다. (중략) "결혼 언제 할래?" 라는 질문은 결혼하라는 명령이고, "취직은 했어?"는 취직하라는 명령이다. 그래서 어른은 질문을 자제할 책임이 있다. 질문하지 말고 감탄하라. "하늘이 높구가" "그새 풀이 많이 자랐네" "의젓해졌구나" 미래를 묻지 말고 과거를 얘기하라. "할아버지는 이런 분이셨다" "여기가 엄마가 다닌 학교란다" 소소한 얘기를 하라. "이렇게 하면 밤이 모양 나게 잘 깎여" "전을 망가뜨리지 않고 뒤집는 방법을 알려주마" 질문은 젊은이들의 몫이다. (p. 25~26)

'질문 안 할 책임'에 한참을 고개 끄덕이고 있었던 것을 보면 나도 어느새 꼰대기질이 생긴 나이였었나 보다. 나도 모르게 질문으로 권력을 표시했던 적은 없나 되짚어본다. 앞으로는 좀더 질문을 참아보리라 다짐해본다. '질문하지 말고 감탄하라' 참 좋은 문장이다.

이 책은 총4부로 구성되어 있다. '말의 심장' '말의 품격' '말의 경계' '기억과 연대, 그리고 말하기'

말에 드러나는 관계와 권력 그리고 순서 등 '말의 심장' 파트에서 가장 많이 공감하며 읽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그동안 '말의 심장'을 잊고 있었기 때문인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의 나의 말에는 예의(품격) 과 경계와 연대는 있었을지라도 연륜(심장)은 아직 없었던 것 같기도...

나도 단어를 잃어버림과 맞물려 점점 완고해지고 있다. 완고하다는 건 약해졌다는 뜻.

일반적으로 실어증의 원인을 '망각'에서 찾지만 프로이트는 정반대로 해석한다. 실어증은 망각이 아니라 '심화된 기억'이라는 것이다. 특정 시기에 대한 기억만 강렬하게 남고 나머지는 사라진 결과다. 언어능력이 제대로 작동하는 사람은 같은 말을 눈치껏 달리 표현하거나 고친다.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기억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직조한다. 말을 잃어가고 있는 사람은 고체처럼 하나의 기억에 사로잡혀 같은 말을 끝없이 반복한다. (p. 37)

'인쇄된 기억' 이라는 표현이 참 와닿았다. 나이가 들수록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것이 갈수록 단어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 스스로 고체화 시킨 기억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라는 풀이가 참 와닿았다. 기억을 인쇄해간다는 것은 기억을 점점 더 단단하게 만들어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약해지는 것이라는 풀이가 참.. 와 닿았다. 그렇게 인쇄된 기억만 갖고 살다가 퇴보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나는 가끔 태극기집회에 간다. 그곳에선 어떠한 머뭇거림도 찾을 수 없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부추겼고, 확신에 찬 1만 명은 마치 한 사람 같았다. 그 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다 빨갱이였다. 언어는 퇴보하고 있었다. 막힌 하수구처럼 다른 말은 흐르지 못했다. 고향을 알면 빨갱이인지 알 수 있단다. 소득주도성장 때문에 나라를 망친 대통령은 빨갱이다. 북한에 돈을 제일 많이 갖다 바친 대통령은 빨갱이다.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놈들은 빨갱이다. 그래서 다 죽여야 한다. 빨갱이면 왜 죽여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먼저 죄인이라 불러놓고 죄목을 찾는다. 비통함이 없는 분노는 얼마나 위험한가. 망설임이 없는 적개심은 얼마나 맹목적인가. 거기, 나의 아버지들이 단어 하나를 부여잡고 막무가내로 앉아있다. (p. 51~52)

저자의 말에는 '심장'이 있다. 여기서 뜨거워졌다가 저기서 뜨거워졌다가 한다. 그 펄떡임에 나는 작은 진동으로 공감할뿐 선뜻 그 파동에 몸을 내맡기진 못한다. 원래 '심장'이라고 하면 젊은이의 펄떡임을 연상하기 쉽지만 '말의 심장'은 다른 것 같다. '말의 심장'에는 연륜이 필요하다. 나의 심장은 아무래도 좀더 나이가 들어야 할 것 같다.

유독 기독교에 이단·사이비가 많은데, 신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왔다는 데에 이 종교의 심오함과 딜레마가 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아니 상상으로밖에 가늠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믿음의 체계이다. '신이면서 인간'인 예수. 'A이면서 B'라는 등식은 동시에 'A도 아니고 B도 아니'라는 말도 된다. 신이면서 인간인 존재는 신이 아니고 인간도 아닌 존재다. 그게 기독교의 시작점이다. 그래서 쉽게 끝이 달라진다. 알 수 없는 존재가 우리 곁에 온 사건 때문에 이단에 잘 빠지는 걸까? 아니다. 그 역사적 사건이 '반드시'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한 번 더 벌어져야 한다는 욕망이 문제다. 자신이 끝이자 시작이고자 하는 욕망. 우리는 끝도 시작도 아닐지 모른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예수는 신이면서 인간이었다.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었다. 우리도 나이면서 남이다. 나도 아니고 남도 아니다. 이 둘 사이의 줄타기는 삶 속에 뒤엉켜 거듭 드러날 뿐, 그 외에는 모른다. (p. 55~56)

이 책 속의 글은 앞서 '작가의 말'에 언급되었던 것처럼 분량이 일정하다. 한 페이지를 살짝 넘어가는 내용들이 한 장 한 장 넘길때마다 새롭다. 저자의 눈길은 한곳에 있다가도 모든 곳에 있고 모든 곳을 살피다가도 한곳을 집중한다. 일정 분량의 글을 쓰는 것은 무척 힘들었겠지만 일정 분량의 글을 읽는 다는 것은 읽을 때마다 묘한 재미가 더해졌다.

모든 운동은 기존 운동을 비판하는 데에서 발전한다. 결점은 우리를 이루는 일부다. 우리는 확신에 찬 사람들끼리 모인 돌 무더기가 아니다. 인간의 삶이란 분명하지도 확고하지도 정해져있지도 않다. 다양한 목소리와 작은 다짐을 이어 붙인 조각보, 허하다고 실한 곳으로 튀는게 아니라 그 허한 곳 한가운데, 텅 빈 그 자리에 앉아있어야 한다. 허한 사람들이 새로운 길을 낸다. 그래도 허하긴 허하다. (p. 78)

인간의 본성 중에서 좋은 게 하나 있다. 뭔가를 '잘 못하는 능력'이다. 잘할 수 있는데도, 잘 못하는 능력, 가장 빠른 길을 알면서도 골목길을 돌아돌아 유유자적하는 능력. (중략) 다른 동물들은 자신의 능력을 덜 발휘하지 않는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 새들은 최선을 다해 울고, 고양이는 있는 힘껏 쥐를 잡는다. 너나없이 최선을 다하는 사회는 야수사회다. (p. 79)

저자는 직진이 필요한 삶의 허함을 이야기하다가도 1일1농담 하자며 직진로가 아닌 우회로를 권하기도 한다. 모두를 위한 평등은 말에서 시작한다면서도 '말에 반드시 표시해야 할 건 의외로 적을 수도 있다. 대부분은 통념과 편견일 것이다. (p. 90)' 라며 말을 아낄 것을 권하기도 한다. 말은 조심해서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언어 순수주의를 주창하는 언어학자이지는 않다. '언어는 순화의 대상이 아니다. 자제의 대상일 뿐. (p. 112)' 이라며 말을 고치려 하기 보다는 '말의 바깥'을 볼 것을 제안한다. '언어에 대한 문제가 실은 언어 밖의 문제인 셈이다. (p. 114)' 그렇게 말의 '경계'를 넘어설 것을 저자는 바라고 있는 듯 하다. '언어 체계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바로 그 순간 말이 말다워지는 순간이다. 체계에서 뱆된 요소가 실은 구겨진 채로 체계 안에 숨어 있다.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라. (p. 126)'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해야 하는 까닭은 '연대'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신의 피조물이라면 이 깨어진 세상에서 더욱 연대할 의무밖에 없다. 깨지고 찢어진 사회를 이어 붙이는 공교한 실력을 추구할 뿐이다. 우연이란 없다. (p. 200)'

한국의 디지털 정보 문해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중엥서 바닥권이라는 피사(PISA)의 발표가 있었다. 보고서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내용은 학생이 읽어야 하는 글의 길이였다. 핀란드, 덴마크, 캐나다 등 상위 국가는 100쪽이 넘는 글이 전체 글의 70~75%를 차지한다. 한국은 10%에도 못 미쳤다. 76개국 중 67위다. 긴 글을 읽는 행위와 문해력은 상관관계가 높다. 또한 디지털보다 종이책으로 읽고, (시험이나 강제가 아닌) '즐거움'을 위해 읽어야 문해력이 길러진단다. 방법은 많지 않다. 문해력을 기르려는 공동 노력뿐이다. (p. 233~234)

한국은 문맹비율이 낮고 교육수준이 높다고 알려져 있지만 '문해력'은 다른 문제다. 글의 길이라... 긴 글을 읽지 못하는 사회, 그 조급함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가? 긴 글의 책이 부담스럽다면 이 책, 저자의 800자 부터 읽어보는 건 어떤지 ㅎㅎ

돌림병이 다시 알려주었지만, 우리는 이미 죽음을 앞뒤에 모시고 산다. 우리는 길 잃은 연약한 존재다. 죽음이 두려우니 죽음에 대한 의례가 가장 많다. 아기들도 산 것과 죽은 것을 구분하고 달리 대한다. 놀랍게도 인간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노래와 시와 그림과 춤을 만들어내도록 진화해왔다. 죽음은 개인이 당면해야 할 일이지만 개인에게 모든 걸 맡기지 않는 것, 죽음에 대해 말함으로써 죽음을 뛰어넘는 것, 그게 연약한 인간의 본성이다. 약한 사람들이 할 일은 기억과 연대, 그리고 말하기다. (p. 237)

죽음을 터부시해온 기간과 죽음을 노래하고 그리고 춤춘 기간 중 어느 것이 더 길까? 인류의 탄생이후 아니 사회를 이루어 살기 시작한 구석기시대 이후 인류에게 '죽음'은 늘 삶과 함께 였다. 그 죽음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사회와 말할 수 있는 사회 중 어느 것이 더 건강한 것일까?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가 리더가 되고 개혁가가 되고 운동가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기억해주고 공감해주고 말해줄 수는 있다. 그런 우리의 말 끝에 상대방이 있다. '나'의 말끝은 항상 '당신'을 향한다. 말하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는 상대방을 향한다. 그렇게 함께 할 수 있다. '말끝이 당신이다. (p. 20)'

- 한겨레출판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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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생물 콘서트 - 바다 깊은 곳에서 펄떡이는 생명의 노래를 듣다
프라우케 바구쉐 지음, 배진아 옮김, 김종성 감수 / 흐름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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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깊은 곳에서 펄떡이는 생명의 노래를 듣다]

플랑크톤부터 대왕고래까지,

바닷속 생물들이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생명의 하모니

이 책의 독일어 원제를 번역기에 돌려보면 '바다가 빛나는 이유, 물고기가 노래하는 소리, 바다와 우리의 관계가 특별한 이유 - 신비한 세계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 이라는 긴 제목이 풀이된다. 이렇게 긴 제목을 선택한 저자의 의도는 아마도 '바다'에 대해 그만큼 넘치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는 것이 아닐까.

나 자신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아마도 '탈라소필thalassophile(바다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가장 적합할 것이다. '탈라소필'이란 바다를 사랑하고 해안가나 바다에서 사는 것을 선호하지만, 전적으로 거기에만 매달리지 않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p. 11) 나는 이 책을 통해 나를 매료시킨 바다의 매력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미지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여행에 여러분들을 데려가고 싶다. (중략) 나는 이 책을 통해 내가 느낀 바다에 대한 사랑을-그리고 그와 더불어 이 유일무이한 세계를 보호하려는 소망을-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도 일깨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 (p. 15) -서문 中-

역사책을 읽다보면 지도가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다. 역사를 읽다보면 지도를 봄으로써 한방에 이해되는 장면들이 있다. 그렇게 이미지들은 때론 수천자의 글보다 확실하게 깨닫게 해주는 뭔가가 있곤 한다. 그림책도 아닌 (분류하자면 과학으로 분류될) 책을 읽으며 이토록 사진이든 그림이든 이미지가 절실하게 보고팠던 책이 또 있었나 싶다. 저자가 알려주는 바다속 생명체들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놀랍고 신기해서, 평소 바다를 그리 애정하지 않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너무나도 보고싶게 만들고 만다. 아주 미세한 플랑크톤부터 거대한 고래까지, 부유하는 유기체부터 심해의 반짝임까지.

플랑크톤이라는 이 단어는 '이리저리 떠다니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 고대 그리스오 '플랑크토스planktos'에서 유래했다. 플랑크톤은 물속에 살면서 자유롭게 떠다니는 식물성 혹은 동물성유기체 전체를 지칭한다. (p. 22) 숨을 내쉬고 들이쉴 때마다 당신은 바다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왜냐하면 지구 전체 산소의 절반 이상을 식물성플랑크톤-크기가 0.0001밀리미터에서 1밀리미터에 이르는 극도로 작은 식물성 유기체-이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식물성 플랑크톤은 '바다의 초록색 폐'로 불리기도 한다. (p. 27)

눈에 보이지도 않는 플랑크톤은 알면알수록 신기하고 위대한 존재이다. 다른 책에서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 삼림이 사실 따지고 보면 '지구의 허파'가 아니라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그때 비교된 것이 바로 바다에 부유하는 식물성 플랑크톤이었다. 바다는 그저 수영을 하고 물고기를 잡는 곳이 아니다. 바다는 그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제라도) 알아야 한다. '200년 전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인간들이 화석연료를 대랴응로 연소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대기 중 이산화탄소량이 급속도로 상승하였고, 그때부터 바다는 인간이 만들어낸 이산화탄소 중 대략 4분의 1을 수용해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이는 바다의 수용력과 그것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무한하지 않다. (p. 29)' 관용어처럼 쓰이는 '바다는 생명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태아에게 젖을 주는 존재라는 직접적인 의미뿐만이 아니라 '숨'을 불어넣어주는 태초의 단계부터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식물성 플랑크톤의 중요성은 '숨' 뿐만이 아니다.

이른바 '클로 가설'에 따르면, 식물성 플랑크톤은 지구의 온도조절 장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물성 플랑크톤이 구름을 만들어냄으로써 공기 온도와 바닷물 온도가 효과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중략) 이 가설은 2011년 바르셀로나 해양학 연구소가 남태평양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에서 사실로 입증되었다. (p. 35)

안타깝게도 '해조류가 만들어낸 구름만으로는 전 세계적인 기후 온난화를 조절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 연구의 결론이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온실가스 양에 비해 구름을 통한 태양광선 차단 효과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p. 35)' 식물성 플랑크톤의 어마어마한 역할도 놀랍지만 동물성 플랑크톤도 못지 않다. 동물성 플랑크톤이 수직운동을 함으로써 '바다의 믹서 같은 기능을 수행'(p. 40) 한다는 내용까지 읽고 나면 푸른바다는 그야말로 신비의 세계로 탈바꿈하여 다가오게 된다. 이제 이 '신비의 세계'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 보면 놀란입을 다물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호주 퀸즈랜드 해안에 2300킬로미터 길이로 펼쳐진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는 거의 3000개에 이르는 개별 암초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주 공간에서도 보일 정도로 그 규모가 엄청나다. (p. 57)

'극도로 작은 동물들, 즉 산호-폴립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는 가장 거대한 살아있는 구조물(p. 57)' 이 우주 공간에서도 보인다는 것도 놀랍지만 이 산호초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의 이야기들도 그에 못지않게 놀랍다. 무엇보다도 '널리 통용되는 생각과는 달리 물고기들은 과묵함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p. 76)' 며 물고기들의 노랫소리 혹은 울부짖음 소리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들은 무척 신선했다.

산호초에 사는 생명체 라고 하면 <니모를 찾아서>라는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해진 흰동가리 물고기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이야기를 생물학적으로 정확하게 들려준다면, 분명 '18세 이상 관람가'라는 자체검열 마크를 부착해야 하거나 아니면 아예 대중들 앞에 공개할 수 없을 것이다. (p. 87)' 라는 내용을 읽을 땐 그야말로 빵 터졌다. 음... 이 영화가 생물학적으로 정확하게 묘사되었다면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상영금지 되지 않았을까 ㅎㅎㅎ 여하튼, '지금까지 물고기들에게는 수많은 다양한 종류의 성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어떤 종류의 성이건 다른 종류와 꼭 마찬가지로 '정상'이라는 점을 알아보았다. (p. 89)' 라는 저자의 마무리는 성에 해한 편협성이 유독 인간에게만 강화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일지 잠시 멈추어 생각하게 만들었다.

바닷속에도 '클리닝 스테이션'이라는 병원 역할의 장소가 있고, 물고기들도 즐거움과 고통을 느끼는 등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해조류를 재배하는 농부물고기들도 있는 등 바닷속은 그야말로 바쁘디바쁜 삶의 터전이었다. '고요한 바다'라는 이미지는 인간의 착각이다. 사실 이러한 '착각'은 플랑크톤 이야기부터 깨지긴 했다.

바닷물 속에 들어 있는 이 이온들의 성분비는 94:2:2:100으로 인간의 혈액과 거의 동일하다. 노이만의 주장에 따르자면,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 바다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라고 한다. 이 이론을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는 이 자리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어쨌거나 나는 그 이론이 매우 흥미롭고 그럴싸한 것 같다. (p. 150)

매우 흥미롭고 그럴싸한 이야기들은 바닷물의 이온성분비와 인간 혈액의 이온성분비가 같다는 이론 뿐만이 아니다. 해류가 기후에 미치는 영향 같은 지구적 차원의 이야기부터, '용연향' 이라는 값비싼 향수 원료가 향유고래의 배설물 이라는 풍자적 이야기와, 해마다 모기와 개에 물려 죽는 사람들의 숫자가 이른바 바다의 악한(상어)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의 숫자보다 훨씬 더 많다는 (죠스라는 영화로 인해 왜곡된 상어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이야기등등 저자는 바다에 대한 과학적 정보들을 다양한 생명체들을 통해 풍요롭게 풀어낸다. 하지만 저자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신비롭고 풍성한 바다를 인간이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이다.

심해에서는 모든 과정이 아주, 아주 긴 세월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파괴된 것이 다시 복구되는 데 설령 수백 년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저어도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p. 217)

인간은 생각보다 바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특히 '심해'에 대해서는 밝혀낸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 자원에 한눈 팔려서 어두운 심해에 그보다 더 어두운 탐욕의 손을 뻗치고 있다. 그 후폭풍이 어떻게 될지도 모른채 섣불리 손을 대는 것은 자칫 자멸의 길이 될 수도 있음을 저자는 경고한다. '그처럼 폭력적인 방식으로 심해에 개입하기에 앞서서 먼저 심해에 존재하는 다양한 생태계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아야만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런 심각한 자연 개입 행위가 우리에게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가져다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p. 246)' 메세지가 분명한 책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내 의미만 강요한다면 책을 읽는 재미가 떨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저자는 완급 조절을 하듯 심각한 내용을 이야기하다가도 눈길을 확 끄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풀어내곤 한다. 이 책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파트는 아마도 '제5장 섹스와 바다'가 아니었을까. ㅎ

제 아무리 풍성하고 부드러운 털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해달 수컷은 명백하게 지구상에서 가장 역겨운 동물이다! (p. 253)

아델리펭귄의 가장 어두운 비밀이 밝혀진 것은 20세기 초 조류학자 조지 머레이 레빅에 의해서였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내용에 너무나도 당황한 나머지 그 내용의 일부를 고대 그리스어로 작성하였다. 이는 그 기록이 부적절한 사람들의 손에 들어갈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어에 능통한 소수의 영국 상류층 지식인 남성들만 자신이 관찰한 내용을 볼 수 있도록 하겠노라고 마음먹었다. (p. 256)

귀여운 외모의 해달이나 펭귄의 성폭력 이야기처럼 섬뜩한 것도 있지만 '2008년 63세의 한 한국 여성이 몸소 체감한 것처럼 매우 효과적이다. (p. 266)' 라는 오징어 생식의 에피소드 처럼 키득거리며 읽게되는 이야기도 있었고 몇년을 먹지도 움직이지도 않은채 알을 지키는 문어 처럼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는 정말 바다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바다는 거칠고, 너무나 아릅답고, 결코 길들여지지 않고, 끝없이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첫인상은 착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바다는 지금 현재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열대 산호초에서부터 남극해와 북극해에 이르기까지, 표해수층에서부터 심해 해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플랑크톤부터 고래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전부터 정교하게 조화를 이루며 운행되었던 모든 해양생태계가 수십 년 전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 그 원인은 바로 우리들, 인간 때문이다. (p. 281)

이 책의 마지막장에서 서술되는 바다오염이야기는 읽을수록 마음 아팠다. 앞서 진기한 바닷속 생명체 이야기들을 읽어서 그런지 바다에 대해 한껏 치솟은 애정때문에 더욱 진하고 깊게 다가오는 내용들이었다. 그럴수록 더더욱 저자의 이야기들에 한번 눈길을 주고 한번더 귀기울이고 한번더 공감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야 다음 세대에게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바다를 남겨줄 수 있을 테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이 바다에 달려 있다는 마음으로 바다를 존중하고 성심성의껏 보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바다가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p.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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