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 역사가가 찾은 16가지 단서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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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탐정의 눈으로 추적한 푸아로와 마플의 시대를 읽는 16가지 단서

'범죄의 여왕' 혹은 '미스터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지닌 애거서 크리스티는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한 세계적인 작가다. 66권의 장편 소설과 14권의 단편집을 포함해 100여 권의 책을 출판했으며 10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녀는 흔히 '셰익스피어와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알려져왔고 실제로 2018년에는 기네스 세계기록에서 역사상 책이 가장 많이 팔린 소설가로 이름을 올렸다. (p. 7) 그런데 작가 애거서의 화려한 프로필보다 내게 더 와닿았던 것은 인간 애거서의 삶이었다. 참혹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굳건하게 견뎌내며 간호사와 약제사로 열심히 일앴던 여성, 정규학교 교육과정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으면서도 독학으로 풍부한 지식을 쌓았고 평생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며 자신을 연마했던 성실한 사람,애거서 말이다. (p. 8)

저자에게 이 책은 코로나패데믹이 가져온 예상치 못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영국사를 전공했고 대학에서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면서 코로나로 제대로 된 활동을 못하게 되면서 다시 읽게된 애거서 크리스트의 소설에서 어릴 때 읽었던 것과는 다른 의미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렇게 생긴 의문들을 풀다보니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애거서의 생애를 염두에 두고 그녀가 쓴 작품을 읽다 보니 개인의 경험과 창작의 결과물 사이의 접점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역사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원 사료와 2차 사료를 병렬해 살펴보는 것 같은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p. 8)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새로 읽기' 정도가 될 것이다. 어른이 되어 그녀의 추리소설을 다시 읽었을 때 새롭게 보이는 것들, 영국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읽었을 때 눈에 들어오는 것들, 그리고 애거서 크리스트 전집과 자서전을 읽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된 것들을 16개의 주제로 담아보았다. (중략) 조금 더 욕심을 부려 이 책의 의미를 찾자면, 애거서 크리스티에게 '비평적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려는 작은 노력이라는 점일 것이다. 애거서의 소설은 100년 동안 대중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아왔지만, 학계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신기하리만치 애거서 작품들에 냉담했다. (p. 10)

저자는 어렸을 때 애거서 전집을 읽었다는데 이상하리만치 나는 애거서의 작품을 읽은 기억이 없다. 홈즈 시리즈는 다 읽었었고 루팡 시리즈도 몇 권 본 것 같은데 애거서 크리스티 라는 이름은 알았어도 그녀의 작품을 그 많다는 작품을 나는 왜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일까 이상할 정도다;;; 작품을 읽은 것도 없는데 이 책을 읽는 것이 가능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다행히 기우였다. 작품 내용을 전혀 모를지라도 이 책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 상관 없었다. 오히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새삼스레 불러일으켰다.

최근에 두툼한 역사책을 읽고 나서 그런지 이 책은 내게 일종의 영국 근현대사로 읽히는 책이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라는 여성 추리 소설가의 삶에 그가 그려낸 작품 속에 세계1,2차 대전을 전후한 영국 사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애거서는 18세 때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작품은 단편 <아름다움의 집>이었고, 이후 장편에 도전했다. 이집트 카이로에 머물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로맨스 소설 <사막에 내리는 눈> 이 바로 그것이다. 그 작품을 모노실라바 라는 다소 생뚱맞은 필명으로 여러 출판사에 보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상심한 딸이 안쓰러웠던 어머니는 마침 이웃에 살던 유명한 소설가 이든 필포츠에게 조언을 구했다. <어둠의 소리>, <빨강 머리 레드 메인즈> 등 다트무어를 무대로 삼은 기괴하고 으스스한 소설을 쓴 바로 그 사람이다. (p. 20)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애거서가 정규학교교육과정을 받지 못하고 간호사등 이런저런 직업을 가지며 자수성가한 인물처럼 소개했지만 아니었다. 본문에서 저자가 알려주는 애거서의 삶은 나름 풍요로운 영국 중산층 가정이었다. 학교교육을 못받았다기 보다는 다닐만한 적절한 학교가 없었고 학교교육이 아니었어도 이런저런 충분한 예술사교육을 받았으며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바로 이웃에 적절한 조언을 해줄 만한 유명한 소설가도 있었다! 애거서는 바로 다른 장으로 전환했고 당시 유행하던 추리소설이 그것이었다.

애거서는 원래 추리소설의 열렬한 독자였다. 그녀가 어렸을 때 영국에서 추리소설은 '읽을 거리'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한 상태였다. 1890년대 중반 영국에서는 약800종의 주간지가 발행되었는데, 그 가운데 무려 240종에 달하는 잡지들이 다양한 형태의 '추리물'을 싣고 있었다. 물론 가장 유명한 것은 <스트랜드 매거진>에 연재되던 셜록 홈스 시리즈였다. (p. 21)

애거서 크리스티가 홈즈 시즈와 코난 도일과 뤼팽 시리즈의 모리스 르블랑 과 동시대 사람이었다니, 그때 추리소설이 그렇게 붐이었다는 것도 그 시리즈를 여전히 우리가 읽고 있다는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작고, 뚱뚱하고, 달걀 모양의 머리에 거대한 콧수염을 기른 우스꽝스러운 모습 (중략) 어느 순간부터 푸아로는 스스로 나서서 셜록 홈스를 언급하고, 심지어 자신이 셜론 홈스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p. 25) 마플은 생계를 위해 일하는 사람도 아니고 결혼을 원하거나 심지어 로맨스를 꿈꾸지도 않는다. 대신 아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여성적 직관과 감정'을 내세워 인간의 심리를 파헤치고 상황을 꿰뚫어 본다. (p. 29)

코난 도일의 추리소설 시리즈에서 주인공이 셜록 홈스 라면 애거서의 추리 소설 시리즈에서 주인공은 푸아로 와 마플 인가 보다. 푸아로는 벨기에 사람인 사립탐정이고 마플은 이른바 노처녀 이다. 이 두 캐릭터는 함께 나오는 캐릭터 라기 보다는 애거서 가 쓴 작품 들 속에 등장하는 대표적 탐정 두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것 같다. 코난 도일은 홈스 한명을 창조했다면 애거서는 두명 이었달까. 여하튼, 다른 무엇보다 푸아로의 외모는 독특하다고 할 수 있었다. 영국신사적인 홈스와 너무너무 달랐다고 한다. 애거서 가 내세운 탐정 캐릭터는 기존 추리 소설들에 나왔던 인물들과는 무척 달랐던 것이다.

영국에서는 전간기를 '추리 소설의 황금기'로 보는데, 이 황금기를 이끌었떤 대표주자로 세 명의 여성 작가, 즉 애거서 크리스티, 마저리 앨링엄, 도러시 세이어스 를 꼽는다. 앨링엄은 캠피언이라는 탐정을 내세웠고, 세이어스는 피터 웜지 경 시리즈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애거서는 이미 푸아로와 마플 이라는 두 명의 대표선수를 데리고 있었다. 이처럼 여성 작가들이 큰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추리소설의 황금기가 곧 '셜록 홈스와 결별한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심신이 망가진 남성들에게서 셜록 홈스같은 완벽한 영웅상을 대입할 수는 없었다. (p. 30) 이 시대의 추리물은 전쟁 후 피폐해진 일상에서 벗어나는 듯한 환상을 주었다. (중략) 악인을 찾아 처벌하는 결말은 혼탁한 사회에서 종국적으로 도덕성이 회복된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게다가 애거서 작품은 영국의 사법체계를 옹호한다. (p. 31)

애거서 크리스티는 세계1차대전, 세계2차대전을 모두 겪은 세대다. 그 전쟁의 상흔을 이겨내야 했던 시절 속 추리소설은 그 이전 시대의 추리소설과 같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애거서의 작품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재미있고 사립탐정이 사건을 해결하지만 늘 경찰이 범인을 잡을 수 있도록 하는 체제안정적인 결과로 독자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고 한다. 심리스릴러적 추리소설을 읽으며 깔끔한 추론을 통한 카타르시스 를 주면서 권선징악적 엔딩이라... 그런데 B급 소설로 치부되어 왔다는 것은 작가가 여성이었기 때문인 것일까...

영국인들에게는 조금 다른 형태의 집에 대한 집착이 또 있다. 자기들이 발 딛는 곳 어디에나 집부터 짓고 보는 독특한 습성이 그것이다. (중략) 이런 특성 때문에 영국은 대항해 시대 이른바 '신대륙'을 발견한 유럽 국가들의 경쟁에서 최종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 (p. 41)

전쟁이 끝나자 군대뿐만 아니라 군수공장에 투입되었던 여성들은 모조리 가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p. 71) 그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 여성 참정권이다. (p. 72)

애거서 처럼 단호하게 뛰어난 외모와 성적 매력을 전혀 별개의 카테고리로 취급하는 작가는 아주 드물다. (p. 79) 그렇다면 남성들은 어떠한가. 애거서 작품 속의 남성들은 단순히 여성의 외모에 현혹되어 사랑에 빠져버리는 그런 남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사랑은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요인에서 출발한다. (p. 80)

퍼블릭 스쿨은 엄격한 위계와 의식화된 코드, 계율과 질서의 총본산이다. 그것의 핵심에는 지독하게도 배타적인 엘리트 의식이 있었다. (중략) 사립학교 출신들은 옥스브리지(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를 합쳐 부르는 말)를 거쳐 영국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핵심부로 진출했다. (p. 115) 오늘날까지도 영국에서 정치, 군 수뇌부, 법률, 언론, 금융 등은 사립학교 졸업생들이 지배하는 분야로 굳건하게 남아있다. (중략) 이튼은 아직도 여학생 입학을 허용하지 않는다. (p. 117)

애거서의 삶과 작품 속 캐릭터들로 보는 당시의 영국사회 읽기는 무척 재미있었다. 소설 줄거리를 몰라도 저자가 알려주는 캐릭터적 특성만으로도 충분히 이해될 만한 주제풀이였다. 그렇게 읽은 영국사회는 지금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추리소설 작가로서 최고의 성공을 거둔 뒤에도 애거서는 '나는 여전히 작가인 척하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에 휩싸여 있다'라고 고백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가 창조해낸 캐릭터들을 사랑하지도, 심지어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의 정체성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그 부분에 대해 답을 한 적이 없다. (p. 130)

애거서는 부유했고 박학다식했고 활동범위도 넓었고 지적욕구도 높았다. 해외여행도 자주 한만큼 다양한 경험이 있었고 그렇게 활발히 움직이면서도 엄청난 다작을 써낸 작가였다. 그런데 작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남겨놓았다. 그리고 후대의 문학가들은 그녀의 작품을 홈스시리즈만큼 대우해주지 않았다. 왜였을까...

영국은 아직도 U and Non-U (상류층과 비상류층)을 구별하는 '분명한 분별 기준'이 있는 나라다. 냅킨은 상류층의 용어이고, 중하류층은 냅킨을 서비엣이라고 부른다. 중하류층은 후식을 디저트나 스위트라고 부르지만, 상류층은 푸딩이라고 부르기를 고집한다. 중상류층이 2~3인용 안락의자를 소파라고 부르는 데 비해 그 아래 계층은 세티 혹은 카우치라고 부른다. (p. 199)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를 거쳤고, 이성을 앞세운 근대성이 완성되었다고 여겨진 시대, 도대체 왜 그렇게 미신적인 내용이 많단 말인가. (p. 203)

영국에 계층간 사다리는 없다. 막강한 선진국이고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대국이지만 영국은 여전히 귀족문화가 지배적인 나라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나라이고 과학과 계몽주의를 일으킨 나라이지만 마녀, 마술, 심령술, 관상 등 다양한 미신이 여전히 생활 깊숙이 자연스레 존재하고 있는 나라다. 애거서 시대의 영국은 현재의 영국을 다시보게 한다.

애거서의 소설은 주로 20세기에 집필된 것이지만 그 내용은 19세기 말 제국의 영광과 빅토리아 시대의 정서를 담고 있다. 20세기 후반 그 소설에 열광했던 시간은 영제국의 헤게모니를 자연스럽게 내재화하는 훈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21세기에도 애거서의 콘텐츠는 끊임없아 재생산되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처럼 제국주의를 문화적 현상으로 보자면 '식민'과 '탈식민'의 시간적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중요한 것은 식민지의 정치적 종속이 아니라 '식민 세력이 타자의 몸과 공간에 스스로를 새겨 넣는 순간'인 것이다. 애거서가 소설 속에 녹여 넣은 '영원한 영국'을 이제는 좀 더 냉정한 시선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p. 244)

다분히 영국제국주의적 시각이 들어간 애거서의 작품들을 셰익스피어 작품이나 홈스 캐릭터처럼 국가의 대표 문학으로 내세우진 않지만 은근히 드라마로 영화로 새로운 번역으로 유통시키는 것엔 여전한 제국주의적 저의가 숨어 있는 것일까? 문학은 가볍게 소비하기 쉬운 분야인만큼 무의식중에 내재화되는 문화이기도 하다. 그러한 문학과 문화를 역사가의 눈으로 보면 이렇게 볼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감탄하며 읽었던 책이었다. 이런저런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영국은 참 여전히 늘 흥미로운 나라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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