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끝이 당신이다 - 주변을 보듬고 세상과 연대하는 말하기의 힘
김진해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런 분들께는 굳이 이 책을 권하고 싶지 않다. (중략) 이런 분들은 이 책에다 '불온서적' 이란 딱지를 붙일지도 모른다. 이런 분들께는 적극 권한다. 말실수 때문에 잠 못 이룬 적이 있는 분, (그래서) 말끝이 자주 흐려지는 분, 말과 말 사이에 민감한 분, '없음' 과 '모름' 이 삶과 사회를 풍성하게 한다고 여기는 분, 자기표현이 민주주의의 첫걸음이라고 믿는 분, 지도자보다 '촉진자'가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하는 분, 국민이 아니라 (세계) 시민이 미래를 열어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분... 이런 분들께 이 책은 인문학의 최전위일 것이다. '나'와 우리를 돌아보고 더 나은 내일을 꿈꿀 때 이만한 자극을 줄 수 있는 글이 또 어디 있으랴 싶다. 그렇다. 미래는 '불온한 말'에서 시작된다.

뒷 표지 中 - 이문재 (시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나는 새로운 책을 읽을때면 표지부터 찬찬이 느끼기?! 시작한다. 재질을 만져보고 표지그림의 메세지도 생각해보고 추천사와 홍보문구가 주는 기대치를 한껏 품어보기도 한다. 그러고나면 앞뒤 책날개를 꼼꼼이 읽는 것으로 책읽기를 시작한다. 저자의 이력부터 표지에 못다실은 책소개나 시리즈의 안내등을 읽으며 본책을 읽기 전부터 다른 읽고 싶은 책을 리스트업 해두기도 한다. 이 책은 가제본 같은 느낌의 거친 표지에 대비해 매끈한 페이지들이 일정한 분량의 글을 익숙치 않은 글씨체로 담고있는, 전체적으론 신선한 느낌의 책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에 끌리게 된건 뒷표지에 쓰여져있는 추천사 때문이었다. 이문재 시인의 추천사만큼 멋진 추천사를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이 책을 적극 권할 그런 분들이 나를 지칭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불온서적' 꽤 읽어본 사람으로서 이 시대의 불온서적일지도 모른다는 것만큼 매력적인 추천사가 또 어디 있으랴 ㅎㅎ

이 책은 <한겨레>에 '말글살이'라는 이름으로 매주 쓴 칼럼에서 가려뽑은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한 조건은 아주 고약했다. '이름과 소속 포함 원고지 넉 장, 800자 이내(제목 제외). 제목은 7자 이내. 말과 글이라는 주제를 벗어나서는 안됨.' 글을 시작할라치면 끝을 맺어야 하는 길이었다. (중략) 글쓰기인지 글 지우기인지 헷갈릴 정도. 짧지만 매주 따박따박 써야 한다는 게 절묘한 형벌 같았다. 2년 몇 개월을 이 형식 안에서 살았다. (p. 12)

반복에서 오는 행복이 있다. 형식이 선물하는 자유가 있다. 형식이야말로 내용을 규정한다. 생각해보라. 말에 대한 글이 1,000자가 넘는다면? 지루하고 지쳐서 다 읽지 않을 게 뻔하다. 600자라면? 폐북에서 자기연민이나 자랑질놀이하는 길이밖에 안 된다. 사람과 동식물이 가장 살기 좋은 고도가 해발 700미터라면, 말을 주제로 삼는 글의 가장 쾌적한 길이는 800자이다(믿거나 말거나). 이 짧은 분량은 이제 나에게 가장 자유롭고 편한 공간이 되었다. (p. 13)

종이신문을 읽은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예전처럼 종이신문을 받아 읽었다면 저자의 칼럼을 매주 접했을 텐데 이렇게 책으로 나오고나서야 그 존재를 알게 되다니... 새삼 종이신문이 그립다. 이렇게 한번에 몰아볼 수 있다는게 더 좋은건지 아닌건지는 잘 모르겠다. 기다린다면 한주한주 기다림의 여운이 있었을 것이고 몰아본다면 흐려질새 없이 진한 여운을 책읽는 내내 느낄 수 있을 것이기에... 여하튼, 저자가 800자 분량의 감옥에서 800자 분량의 해방감을 깨달을 때까지의 칼럼들을 나는 아무 힘듦없이 편하게 한권으로 읽을 수 있었다. ^^

책의 내용에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이 책은 성공이다. 책을 집어던질 정도가 된다면 대성공이다. 말에 대한 당신의 고루한 생각에 균열이 갔을 테니까. 우리 사회는 말에 대한 사유가 매우 협소하다. 문법과 맞춤법을 벗어나지 않는다. 어떤 것이 맞는지를 따지는 정도. '맞냐, 틀리냐'는 사유가 아니다. 이견과 논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답 맞추기를 사유하기라 할 수 없다. (p. 14) 나는 하나의 관점을 갖고 있지 않다. 하나의 관점을 갖고 있지 않아서 매주 글을 쓸 수 있었다. 하나의 관점만 갖고 있다면 한 편의 글만 쓰면 된다. 혹여 이 책을 읽고 글쓴이가 어떤 사람일 것이라고 예측되는 바가 있다면 오산이다. 그 사람은 이미 사라졌고, 생각은 진작에 바뀌었다. 그러니 글쓴이를 찾지 말고, 여러분 스스로 말과 글을 둘러싼 이 세계를 독창적으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언어를 탄생시키길 빈다. (p. 15) - 작가의 말 中 -

어떤 소설가는 '작가의 말' 쓰기를 극도로 싫어한다고 고백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작가가 쓴 글일지라도 작가의 손을 떠난 순간 읽는 이의 뜻대로 읽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작가의 말'은 독자가 책을 다 읽은 후 저자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도록 책의 말미에 있곤 했다. 작가가 쓰는 말일지라도 책을 소개하는 경향이 강한 프롤로그나 서문과 '작가의 말'은 다른 느낌인데, 책을 마무리한 후 회고 비슷하게 쓰이는 '작가의 말'을 책의 서두에서 읽으니 이또한 새롭다.

그나저나 책을 다 읽고 '작가의 말'을 다시 읽자니 나는 저자의 의도대로 책을 읽은 것 같지는 않다.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 책을 집어던질 정도가 되기는 커녕 대부분 공감해가며 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대로 책을 읽은 것 같지 않다는 점에서 또한 이 책을 읽는 방식에서는 성공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며 글쓴이를 찾는다기 보다는 내생각과 견주어가며 읽어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새로운 언어를 탄생시킬 수 있게된 것인가? "당신에겐 어떤 문장이 있는가?" 라고 저자가 묻는 다면 나는 아직 답하지 못한다. 그러니 다시 저자의 문장을 일단 들여다보는 수밖에 ㅎㅎ

영어로는 말하는 사람 자신을 모두 1인칭 대명사 '나(I)'로 칭한다. 상대와 어떤 관계인지 상관없이 말하는 이와 듣는 이라는 건조하고 추상적인 역할만 표시한다. 반면, 한국어는 자신과 타인의 관계를 확인하되, 타인을 중심으로 자신을 호명한다. 어린 사람도 상대방을 '너/당신(You)'로 표현하지 않는다. (p. 21~22)

그런가... 한국어가 타인을 중심에 두는 표현방식이었나... '내 어깨 좀 주물러주렴' 하지 않고 '할아버지 어깨 좀 주물러주렴' 하는 것이 '나 먼저 가 있을께' 하지 않고 '아빠 먼저 가 있을께' 하는 것이 '나'를 칭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과 나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상대방이 볼때의 나'로 칭하는 것이 그런 것이었구나... 그러니 '배려' 라는 것이 '눈치'라는 것이 더 비중을 차지하는 사회분위기가 만들어져 온 것일지도...

말하기는 권력이다.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권력자다. 주인과 노예, 위와 아래,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강하게 분리되어 있을수록 더 심하다. 권력자의 말하기는 겉으론 아닌 척해도 결국 명령이다. (중략) "결혼 언제 할래?" 라는 질문은 결혼하라는 명령이고, "취직은 했어?"는 취직하라는 명령이다. 그래서 어른은 질문을 자제할 책임이 있다. 질문하지 말고 감탄하라. "하늘이 높구가" "그새 풀이 많이 자랐네" "의젓해졌구나" 미래를 묻지 말고 과거를 얘기하라. "할아버지는 이런 분이셨다" "여기가 엄마가 다닌 학교란다" 소소한 얘기를 하라. "이렇게 하면 밤이 모양 나게 잘 깎여" "전을 망가뜨리지 않고 뒤집는 방법을 알려주마" 질문은 젊은이들의 몫이다. (p. 25~26)

'질문 안 할 책임'에 한참을 고개 끄덕이고 있었던 것을 보면 나도 어느새 꼰대기질이 생긴 나이였었나 보다. 나도 모르게 질문으로 권력을 표시했던 적은 없나 되짚어본다. 앞으로는 좀더 질문을 참아보리라 다짐해본다. '질문하지 말고 감탄하라' 참 좋은 문장이다.

이 책은 총4부로 구성되어 있다. '말의 심장' '말의 품격' '말의 경계' '기억과 연대, 그리고 말하기'

말에 드러나는 관계와 권력 그리고 순서 등 '말의 심장' 파트에서 가장 많이 공감하며 읽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그동안 '말의 심장'을 잊고 있었기 때문인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의 나의 말에는 예의(품격) 과 경계와 연대는 있었을지라도 연륜(심장)은 아직 없었던 것 같기도...

나도 단어를 잃어버림과 맞물려 점점 완고해지고 있다. 완고하다는 건 약해졌다는 뜻.

일반적으로 실어증의 원인을 '망각'에서 찾지만 프로이트는 정반대로 해석한다. 실어증은 망각이 아니라 '심화된 기억'이라는 것이다. 특정 시기에 대한 기억만 강렬하게 남고 나머지는 사라진 결과다. 언어능력이 제대로 작동하는 사람은 같은 말을 눈치껏 달리 표현하거나 고친다.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기억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직조한다. 말을 잃어가고 있는 사람은 고체처럼 하나의 기억에 사로잡혀 같은 말을 끝없이 반복한다. (p. 37)

'인쇄된 기억' 이라는 표현이 참 와닿았다. 나이가 들수록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것이 갈수록 단어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 스스로 고체화 시킨 기억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라는 풀이가 참 와닿았다. 기억을 인쇄해간다는 것은 기억을 점점 더 단단하게 만들어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약해지는 것이라는 풀이가 참.. 와 닿았다. 그렇게 인쇄된 기억만 갖고 살다가 퇴보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나는 가끔 태극기집회에 간다. 그곳에선 어떠한 머뭇거림도 찾을 수 없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부추겼고, 확신에 찬 1만 명은 마치 한 사람 같았다. 그 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다 빨갱이였다. 언어는 퇴보하고 있었다. 막힌 하수구처럼 다른 말은 흐르지 못했다. 고향을 알면 빨갱이인지 알 수 있단다. 소득주도성장 때문에 나라를 망친 대통령은 빨갱이다. 북한에 돈을 제일 많이 갖다 바친 대통령은 빨갱이다.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놈들은 빨갱이다. 그래서 다 죽여야 한다. 빨갱이면 왜 죽여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먼저 죄인이라 불러놓고 죄목을 찾는다. 비통함이 없는 분노는 얼마나 위험한가. 망설임이 없는 적개심은 얼마나 맹목적인가. 거기, 나의 아버지들이 단어 하나를 부여잡고 막무가내로 앉아있다. (p. 51~52)

저자의 말에는 '심장'이 있다. 여기서 뜨거워졌다가 저기서 뜨거워졌다가 한다. 그 펄떡임에 나는 작은 진동으로 공감할뿐 선뜻 그 파동에 몸을 내맡기진 못한다. 원래 '심장'이라고 하면 젊은이의 펄떡임을 연상하기 쉽지만 '말의 심장'은 다른 것 같다. '말의 심장'에는 연륜이 필요하다. 나의 심장은 아무래도 좀더 나이가 들어야 할 것 같다.

유독 기독교에 이단·사이비가 많은데, 신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왔다는 데에 이 종교의 심오함과 딜레마가 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아니 상상으로밖에 가늠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믿음의 체계이다. '신이면서 인간'인 예수. 'A이면서 B'라는 등식은 동시에 'A도 아니고 B도 아니'라는 말도 된다. 신이면서 인간인 존재는 신이 아니고 인간도 아닌 존재다. 그게 기독교의 시작점이다. 그래서 쉽게 끝이 달라진다. 알 수 없는 존재가 우리 곁에 온 사건 때문에 이단에 잘 빠지는 걸까? 아니다. 그 역사적 사건이 '반드시'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한 번 더 벌어져야 한다는 욕망이 문제다. 자신이 끝이자 시작이고자 하는 욕망. 우리는 끝도 시작도 아닐지 모른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예수는 신이면서 인간이었다.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었다. 우리도 나이면서 남이다. 나도 아니고 남도 아니다. 이 둘 사이의 줄타기는 삶 속에 뒤엉켜 거듭 드러날 뿐, 그 외에는 모른다. (p. 55~56)

이 책 속의 글은 앞서 '작가의 말'에 언급되었던 것처럼 분량이 일정하다. 한 페이지를 살짝 넘어가는 내용들이 한 장 한 장 넘길때마다 새롭다. 저자의 눈길은 한곳에 있다가도 모든 곳에 있고 모든 곳을 살피다가도 한곳을 집중한다. 일정 분량의 글을 쓰는 것은 무척 힘들었겠지만 일정 분량의 글을 읽는 다는 것은 읽을 때마다 묘한 재미가 더해졌다.

모든 운동은 기존 운동을 비판하는 데에서 발전한다. 결점은 우리를 이루는 일부다. 우리는 확신에 찬 사람들끼리 모인 돌 무더기가 아니다. 인간의 삶이란 분명하지도 확고하지도 정해져있지도 않다. 다양한 목소리와 작은 다짐을 이어 붙인 조각보, 허하다고 실한 곳으로 튀는게 아니라 그 허한 곳 한가운데, 텅 빈 그 자리에 앉아있어야 한다. 허한 사람들이 새로운 길을 낸다. 그래도 허하긴 허하다. (p. 78)

인간의 본성 중에서 좋은 게 하나 있다. 뭔가를 '잘 못하는 능력'이다. 잘할 수 있는데도, 잘 못하는 능력, 가장 빠른 길을 알면서도 골목길을 돌아돌아 유유자적하는 능력. (중략) 다른 동물들은 자신의 능력을 덜 발휘하지 않는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 새들은 최선을 다해 울고, 고양이는 있는 힘껏 쥐를 잡는다. 너나없이 최선을 다하는 사회는 야수사회다. (p. 79)

저자는 직진이 필요한 삶의 허함을 이야기하다가도 1일1농담 하자며 직진로가 아닌 우회로를 권하기도 한다. 모두를 위한 평등은 말에서 시작한다면서도 '말에 반드시 표시해야 할 건 의외로 적을 수도 있다. 대부분은 통념과 편견일 것이다. (p. 90)' 라며 말을 아낄 것을 권하기도 한다. 말은 조심해서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언어 순수주의를 주창하는 언어학자이지는 않다. '언어는 순화의 대상이 아니다. 자제의 대상일 뿐. (p. 112)' 이라며 말을 고치려 하기 보다는 '말의 바깥'을 볼 것을 제안한다. '언어에 대한 문제가 실은 언어 밖의 문제인 셈이다. (p. 114)' 그렇게 말의 '경계'를 넘어설 것을 저자는 바라고 있는 듯 하다. '언어 체계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바로 그 순간 말이 말다워지는 순간이다. 체계에서 뱆된 요소가 실은 구겨진 채로 체계 안에 숨어 있다.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라. (p. 126)'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해야 하는 까닭은 '연대'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신의 피조물이라면 이 깨어진 세상에서 더욱 연대할 의무밖에 없다. 깨지고 찢어진 사회를 이어 붙이는 공교한 실력을 추구할 뿐이다. 우연이란 없다. (p. 200)'

한국의 디지털 정보 문해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중엥서 바닥권이라는 피사(PISA)의 발표가 있었다. 보고서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내용은 학생이 읽어야 하는 글의 길이였다. 핀란드, 덴마크, 캐나다 등 상위 국가는 100쪽이 넘는 글이 전체 글의 70~75%를 차지한다. 한국은 10%에도 못 미쳤다. 76개국 중 67위다. 긴 글을 읽는 행위와 문해력은 상관관계가 높다. 또한 디지털보다 종이책으로 읽고, (시험이나 강제가 아닌) '즐거움'을 위해 읽어야 문해력이 길러진단다. 방법은 많지 않다. 문해력을 기르려는 공동 노력뿐이다. (p. 233~234)

한국은 문맹비율이 낮고 교육수준이 높다고 알려져 있지만 '문해력'은 다른 문제다. 글의 길이라... 긴 글을 읽지 못하는 사회, 그 조급함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가? 긴 글의 책이 부담스럽다면 이 책, 저자의 800자 부터 읽어보는 건 어떤지 ㅎㅎ

돌림병이 다시 알려주었지만, 우리는 이미 죽음을 앞뒤에 모시고 산다. 우리는 길 잃은 연약한 존재다. 죽음이 두려우니 죽음에 대한 의례가 가장 많다. 아기들도 산 것과 죽은 것을 구분하고 달리 대한다. 놀랍게도 인간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노래와 시와 그림과 춤을 만들어내도록 진화해왔다. 죽음은 개인이 당면해야 할 일이지만 개인에게 모든 걸 맡기지 않는 것, 죽음에 대해 말함으로써 죽음을 뛰어넘는 것, 그게 연약한 인간의 본성이다. 약한 사람들이 할 일은 기억과 연대, 그리고 말하기다. (p. 237)

죽음을 터부시해온 기간과 죽음을 노래하고 그리고 춤춘 기간 중 어느 것이 더 길까? 인류의 탄생이후 아니 사회를 이루어 살기 시작한 구석기시대 이후 인류에게 '죽음'은 늘 삶과 함께 였다. 그 죽음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사회와 말할 수 있는 사회 중 어느 것이 더 건강한 것일까?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가 리더가 되고 개혁가가 되고 운동가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기억해주고 공감해주고 말해줄 수는 있다. 그런 우리의 말 끝에 상대방이 있다. '나'의 말끝은 항상 '당신'을 향한다. 말하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는 상대방을 향한다. 그렇게 함께 할 수 있다. '말끝이 당신이다. (p. 20)'

- 한겨레출판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