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의 불시착
박소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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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이라는 우주를 아직 비행 중인 사람들에게,

일하는 이들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보내는 가장 적당한 위로

"어쩌면 나는 31세기형 인재가 아닐까?"

박소연 작가의 첫번째 직장 하이퍼리얼리즘 소설집 <재능의 불시착> 가제본 서평단 모집에 응모했고 단편 한 작품이 실린 얇은 가제본을 받았다. [이 책은 '일하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대다수의 직장인이 한 번쯤은 느꼈을 야릇한 소외감, 비릿한 자괴감, 소박한 연대감 앞에서 짓게 되는 미묘한 표정들을 소설 속 리얼리티 넘치는 상황을 통해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이 이 책을 정말 잘 대변해주는 문장이었음을 단 하나의 작품만을 읽었을 뿐임에도 깨달을 수 있었다.

가제본에 실린 단편은 <막내가 사라졌다> 라는 작품이었는데 콩트처럼 읽히는 이 작품을 읽으며 슬며시 웃음이 나는 것이 요즘 젊은 세대의 위트는 이런 것인가 싶었다.

막내가 사라졌다.

유난히 평범한 날이었다. 기묘하거나 놀라운 일이 일어날 전조 증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p. 5)

회사의 한 부서에 막내사원이 출근하지 않은 어느날이었다. 평범한 날은 그저 평범한 날인데, '유난히' 평범하게 느껴지는 날이 '유난'했던 이유는 '눈에 띄는 이상한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는데(p. 6)'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막내사원 시준의 책상의 풍경, 딱 그런 것이었다. '나는 아까 시준의 책상에서 느꼈던 묘한 이질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책상 위가 완벽하게 깨끗했다. (p. 7)' 완벽하게 깨끗한 책상이 '이질적'이고 '기묘'하게 느껴지는 것 그것이 '평범'함과 다다르다는 것은 달리말하면 '평범'하다는 것은 조금은 어수선하고 조금은 어지럽고 조금은 더러운 그런 것이라는 말이 아닐까.

'저는 오늘부로 퇴사합니다. 필요한 서류는 대리인이 참석해서 처리할 예정입니다. -강시준 드림-'

갑작스러운 퇴사문자도 당황스러운데 회사사람들 모두를 당황시킨 단어는 '대리인' 이라는 단어였다. 퇴사에 왠 대리인? 그런데 의외로 그 단어는 무시못할 위력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회사는 점점 술렁거리고 그리고 어떤 이들은 떨기 시작한다. 대리인이 와서 과연 무어라 말할까? 각자 그동안 자신들과 막내사원과의 일화들을 곱씹어 보는 동안 누군가는 속이 울렁거리고 누군가는 좌불안석이 된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다른 또 누군가는 ㅋㅋㅋ

단순한 무단 퇴사라고 생각했던 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p. 15)

'그러고 보니 나는 시준 씨한테 실수한 거 없나?'

덩달아 불안해진 나는 그동안의 행동과 말을 천천히 복기해보았다. 별것 없었던 것 같기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해서 마음이 어지러웠다. (p. 17)

엄청난 회사기밀을 들고 튄 것도 아니고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큰 회사의 여러 부서 중 하나의 부서에 속한 막내사원이 퇴사하는 것에 대해 무어 그리 많은 사연이 있을까 싶지만 생각보다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하나하나 드러나는 일화들 속에 과연 막내사원이 퇴사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내일까지 두려움에 떨 사람들이 많아 보이네요. 그러게 회사 다닐 때나 상사고 선배지, 그만두면 아무 관계도 아닐 사람들끼리 진즉 기본 매너는 지키고 살면 좀 좋아요? 지금 여기에 다니고 있으니까 껌뻑 죽는 척 해주는 거지, 나가면 알게 뭐에요? 말도 제대로 안 섞어줄 동네 아저씨고 모르는 아줌마지" (p. 20)

몇장 안되는 짧은 작품이었음에도 풍성하게 읽혔고 지금껏 읽은 그 어떤 직장인 에피소드 보다 산뜻하고 발랄하게 다가왔다. 기묘한 퇴사 절차에 대해 당황해 하는 사람들을 보며 21세기형 사람들과 31세기형 사고관의 만남이 유쾌하게 읽혔다.

직장인 에피소드라는 점에서 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이 생각났다. '기쁨'과 '슬픔'이라는 대비에서 알수 있듯이 이 책속 작품들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야 하는 사연들이었다. 그 씁쓸함에 비하면 <재능의 불시착>은 아예 그런 구분을 의식하지 않은 작품들을 모은 책인것 같다. 이 신선한 접근에 조금더 다가가보고 싶다. <막내가 사라졌다> 말고도 다른 작품을 읽으려면 어서 이 책을 집어들어야 겠다. '지구에서 일하는 게 적성에 안 맞아요' 라고 말하는 31세기형 젊은이들은 또 어디에 어떤 불시착들을 했을까 그래서 어디로 안착하게 되었을까 몹시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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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티 Rome City - The Illustrated Story of Rome
이상록 지음 / 책과함께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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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이야기가 겹겹이 쌓인 도시, 로마

3백여 컷의 근사한 일러스트와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유럽 문화의 진수를 만나다

신간소식에서 이 책을 보았을 때 한눈에 반했다. 일단, 표지가 너무 예뻤다!!! (사람 뿐만 아니라 책도 예쁘고 볼 일이다;;;; ㅠㅠ)

읽으면서 또 반했다. 예쁜 것뿐만 아니라 알차기까지 했다!!! 로마의 역사부터 예술, 문화등 로마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할만했다. 무엇보다 최신 역사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좋았다. 저자가 참고한 책들을 보니 더욱 믿음이 갔다. 저자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서양사에 대한 이런저런 책들을 꽤 읽어왔지만 그 책들에서 익혔던 내용들이 이 책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읽는 내내 감탄했고 즐거웠다. 그러니까 이 책은 로마에 한해서만큼은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로마에서 특별한 광경은 유적지나 박물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스쳐 지나는 일상의 풍경이나 로마 사람들의 태도에서 물신 풍긴다. 유적들은 거리나 주택가에서 수백 수천 년의 시간차를 별로 내색하지 않고 섞여 있다. 잠시 쉴만한 그늘을 찾다가 2천년이 다 되어가는 고대 건물의 파편이 벤치처럼 쓰이고 있음을 발견하기도 하고. 무심하게 콜로세움을 돌아 지나가는 버스를 타게 되기도 한다. 의술의 신 신전 터엔 현대식 병원이 자리 잡고 있고, 로마제국의 근위대 병영이 있던 곳은 이탈리아군이 쓰고 있으며, 고대 전차 경기장 터의 트랙은 산책로가 되어 있다. 무심코 들어간 장소에서 거장들의 작품을 발견하는 일도 자주 경험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무심코 건넌 다리가 2천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기도 할 것이다. (P. 12~13)

저자는 로마의 자취를 좇는 일에 대한 가장 큰 이유가 '재미있으니까'라고 했다. 낡은 도시라는 이미지를 풍기는 이 도시가 실은 2700년 내내 멈춰 있던 적이 거의 없었음을 단지 생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격렬히 움직여왔기에 무궁무진한 이야기거리를 품고 있다는 것을 널리 퍼트리고 싶을 만큼 너무너무 재미있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기존에 읽었던 역사책 속 에피소드들이 이 책에서 더욱 생생해졌고 꽤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왠걸 또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면서 읽는내내 재미있었다. 알면 아는만큼 모르면 모르는대로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로마 시내에선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으면서도 성벽의 잔해가 가게안에 떡하니 있다고 한다. 일상이 곧 역사인 도시라니 wow 하지만 무심해 보이는 이 일상속 역사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노력이 필요했는지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생각하게 됐다.

현재의 로마는 한정된 공간에 많은 건물과 사람으로 복닥보닥하다. 3백만명이 일상을 이어가는 한 국가의 수도인지라 문화유적도시라는 핑계를 대며 그대로 둘 수만도 없다. 이런 고충을 덜기 위해 높은 빌딩이라도 세우면 좋겠지만 도시 미관을 해치게 되므로 역사 도시들이 대개 그렇듯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하 공간을 조성하는 방안 역시 어렵다. 땅을 파다 보면 거의 틀림없이 뭔가 나오기 때문이다. (중략) 이처럼 로마는 참 불편한 도시다. 보통 다른 도시들은 인프라를 확충하고 편의 시설을 늘릴 때 비용만 고려하면 되지만, 로마에서는 번거롭고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고 효율성과 편리함은 기꺼이 제쳐둔다. (p. 25)

로마는 지하철 노선들도 정작 도심부는 비껴가서 외곽을 돌고 있고 따라서 대중교통도 원활하지 않다고 한다. 편의시설도 많지 않지만 뭐하나 새로 만들기가 참 어려운 도시라고 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로마는 걷기 좋은 도시이고 그렇게 걷다보면 의외의 볼거리를 보게 되기도 한다고 한다. 길을 잃으면 잃는데로 어디든 볼거리가 있는 도시에서 저자는 쉴겸 무슨 교회인지도 모르는 작은 교회로 들어갔을 때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떤 사람이 사다리위에서 교회의 벽을 손보고 있었다고. 그런 손길이 있었기에 로마가 유지되어 온 것이었다. 무심한 일상의 유지란 사실 엄청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법이다. <자본과 유행을 따르자면 트레비 분수나 콜로세움 옆에 호화로운 호텔이나 거대한 쇼핑센터나 테마파크 따위를 세우고 테베레강 근처를 고급 주거지나 빌딩 숲으로 조성할 일이다. 그랬다면 로마는 더 세련되고 편리하고 부유한 도시가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늘날까지 전 세계의 많은 방문자가 시야를 가리는 방해물 없이 콜로세움의 위용을 온전히 느끼고, 스카이라인에서 미켈란젤로의 돔을 바라보고, 옛 시대의 풍경을 상상하며 거닐 수 있는 것은 그런 '의도된 포기' 덕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중략) 문화재 관리는 대개 눈에 띄지 않는다. 구멍 난 항아리에 계속해서 물을 붓는 격이랄까. 부지런히 새 물을 부어야 그나마 현상 유지가 된다.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유산, 즉 항아리가 클수록 부어야 하는 물의 양도 그만큼 많아진다. (p. 53)> 의도적으로 포기하고 커다란 구멍이 난 커다란 항아리에 계속 새 물을 붓고 있는 로마인들에게 경의를 표해본다.

기초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땅속에서 사람의 두개골 하나를 발견했다. 로마인들은 이를 아울루스라는 옛 영웅의 유골이라고 여기며, 장차 이곳이 '카푸트문디(세계의 머리)'로 우뚝 설 징조라고 해석했다. 그 후 이 장소는 카피톨리움(아울루스의 머리)이라고 불렸다. 카피톨리노는 카피톨리움의 이탈리아식 이름이다. (p. 45)

로마라는 한 도시에 집중하다보니 세세한 역사까지 알게되는 재미가 쏠쏠했다. '카피톨리노는 장구한 로마 역사의 요약(p. 47)'이라는 저자의 표현처럼 '워싱턴 의회의사당의 이름은 '캐피틀'이다. 짐작할 수 있듯이 카피톨리노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캐피틀의 돔은 미켈란젤로가 만든 성 베드로 대성당 돔의 디자인도 빌려갔다.) p. 48' 이라는 저자의 안내처럼 로마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모든 시간대에 존재해온 도시이다. 따라서 로마의 중심부터 변두리까지 들여다볼 곳은 다양했고 볼때마다 '아 그랬구나' 하며 빠져들어 읽게 된다. 예쁜 그림으로 그려진 로마를 보려고 손에 든 책이었는데 왠걸 읽다보니 그림보다 글에 더 집중하게 되곤 했다. 그림도 글도 둘다 매력적이었다. 거기에 한가지 더, '팔라티노 언덕에 올라가야 하는 이유! 바로 포룸로마눔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멋진 광경 때문이다. (p. 76)' 같은 로마를 제대로 둘러볼 수 있는 팁도 여기저기서 제공된다. 아~ 정말 가보고 싶다~ 로마!!!

로마의 역사를 읽고 로마의 유적을 둘러보며 로마의 인물들을 알아가다 보면 어느새 작은촌락 로마에서 로마제국을 거쳐 제국의 멸망과 도시국가들의 혼돈속에 현대사로 접어들게 된다. 로마에서 이탈리아로 확장되었다가 다시 로마로 돌아오는 여정은 표지에서 느껴지는 편안한 톤 그대로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부드럽게 읽힌다.

진정한 통일은 땅덩이만 합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통일을 향한 고난은 이제부터라고 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반도의 국가들은 하나였던 시간보다 따로 떨어져 있던 시간이 훨씬 길었다. 천년이 넘는 간극은 도시의 풍경보다 사람들의 정신에 더 깊이 남아 있었다. 이탈리아 민족이라는 새 정체성에 모두가 공감하진 않았고, 모두가 통일을 갈구한 것도 아니었다. 통일을 원했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 완성체의 모양에 관해서는 각자 상상하는 바가 달랐다. (p. 575)

이탈리아반도는 1870년에서야 통일됐다. 물론 세계양차대전을 거치며 이탈리아라는 나라에 대한 통일성은 조금 강화된 면이 있다. 한반도가 분단된지 백년도 안됐지만 우리는 통일후 서로의 이질성에 대해 얼마나 걱정을 하는가? 그런데 천년을 넘게 따로 살아온 도시국가들의 통일이라니...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각각 그 색깔이 너무 달라서 관광객들이 놀라곤 한다고 한다. 로마 한곳만 봐도 그러한데 그런 도시국가들이 여럿이었음을 감안하면 지금의 이탈리아는 엄청 성공한 것 같기도 하다. <한때 경제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유럽에서 가장 뒤처졌던 이탈리아가 지금은 G7 국가에 속하고, 영화, 미술, 음악, 패션, 디자인 ,음식, 자동차 등의 분야를 선도하고 있다. (p. 579)> 물론 그리스처럼 고대시대에 대한 예우가 이탈리아라는 국가에도 조금은 있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무너지고 분열됐던 것을 생각했을 때 지금의 이탈리아는 그리고 로마는 분명 대단하긴 하다. 고대 존재했던 도시들이 현재에도 대도시를 이루고 융성하게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큰 도시들은 융성했다가도 사람들이 떠나고 폐허가 되곤 했다. 하지만 로마는 2700년을 늘 존속해왔다. 이 사실만으로도 로마는 흥미롭다.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다감한 그림들과 함께 볼 수 있어 참 좋았다. 보는 재미 읽는 재미 알아가는 재미가 가득한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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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흑역사 - 왜 금융은 우리의 경제와 삶을 망치는 악당이 되었나
니컬러스 섁슨 지음, 김진원 옮김 / 부키 / 2021년 9월
평점 :
절판


금융은 어떻게 '앞면이고 내가 이기고 뒷면이면 네가 지는' 독식게임을 만드는가?

전문가, 경제학자, 정치인은 어째서 부의 약탈자들과 결탁하고 그들을 정당화하는가?

시민들은 이런 금융의 저주 속에서 무엇을 얼마나 희생당하는가?

(그래서)

왜 금융은 우리의 경제와 삶을 망치는 악당이 되었나

'흑역사'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개 들키면 부끄러운 실수나 실패의 경험을 떠올리게 된다. 제목이 '부의 흑역사'라고 해서 부자들의 부끄러운 과거사라던가 부가 쌓이는 과정에 있었던 검은돈 거래관련 에피소드 등의 가벼운 얘기들이 나오는 역사책이 아닐까 예상했는데... 그런... 책은 아니었다. 영국인인 저자가 영국 금융계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현재 영국 금융계는 저주받은 혹은 저주받아야할 산업이라고 밝히는 책이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Finance Cuese '금융의 저주' 이다.

금융의 저주라는 개념은 단순하다. 금융 부문이 확장하여 합당한 규모에서 벗어나 유용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면, 이 금융 부문을 지탱하는 국가에 해를 끼친다는 것이다. 금융은 사회에 이바지하고 부를 일군다는 전통적인 역할을 외면하고, 수익을 더 보장하는 활동에 치중할 때가 많아서 다른 경제 부문에서 부를 약탈한다. 정치적으로도 힘을 휘둘러서 자기 입맛에 맞게 법이나 규정이나 심지어 사회까지 바꾸어 놓는다. 이 결과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불평등이 심화하고 시장이 무력해지고 공공서비스가 와해하고 부패가 자행되고 대체경제 부문이 설 자리를 잃고 민주주의와 사회에 막대한 폐혜를 안긴다. (p. 19)

간단하게 말하자면 저자가 말하는 금융의 저주는 금융산업이 일반 시민의 부를 약탈해왔고 그 정도를 점점더 심화시켜왔다는 얘기다. 금융이 부를 축적할수록 대중은 갈수록 가난해지는 이 '금융의 저주' 개념은 저자가 앙골라라는 광물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오히려 더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자원의 저주' 상황을 보면서 떠올리게 됐다고 한다. [영국과 앙골라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점은 기본적인 사실 하나에서 출발한다. 두 나라 모두 규모가 큰 경제 부문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 앙골라의 경우에는 석유, 영국의 경우에는 금융이 그것이다. (p. 22)] 영국 금융의 저주 중심지는 '시티오브런던'이다. 저자는 이곳에서 횡행하고 있는 금융산업은 실은 산업이 아니라 법초월적 약탈행위임을 밝히려 노력한다. ['경쟁력 높게' 금융 부문을 세우는 목적은 저 팽배한 논리를 업고 시티오브런던을 가능한 한 크고 강하게 지키자는 것이다. (p. 36)] 라면서 이런 유형의 '경쟁력'을 추구하는 헛수고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강조한다.

여러 세대에 걸쳐 경제사상가는 이 간극을 인지하고 있었다. 적어도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간한 1776년가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주된 문제는 누구 부의 창출자인지를 두고 서로 의견이 달랐다는 점이다. 보수적인 전통에 따르면 이들은 부자들이었다. 돈과 자본을 소유한 이들이 공장을 세우고 정부에 세금을 내면 정부는 가난한 보조금 수령자에게 이 부를 재분배했다. 이런 역사관에 비추어보면 가난한 사회적 약자는 자본가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같은 존재였다. (p. 43) 거대 자본가는 효율적인 경쟁을 반기지 않으며 자유시장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입으로는'그렇다고 말하지만 경쟁다운 경쟁이 일어나면 가격이 내려가고 임금이 올라가서 결국 수익이 줄어든다. 자본가가 진정 좋아하는 것은 자기 입맛대로 납세자에게 잔인한 시장, 바로 이런 곳에서 노다지를 캘 수 있다. (중략) 사업계 내부에서 벌어지는 경쟁이 아니라 사업계 전체와 나머지 공동체 사이에 벌어지는 경쟁이 되었다. 이 갈등이 금융의 저주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p. 44)

저자는 상식처럼 알려진 경제적 상황들을 조목조목 뒤집어 놓는다. '부의 축적'에 대한 기본적 관점은 마르크스주의적인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자본론의 기본 개념은 '잉여가치'는 '노동'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자본가가 가지고 있던 자산은 항상 유지될 뿐 가치를 더 생산해내지는 않으므로 자본가의 사업으로 인해 사회적 약자에게 부가 나누어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를 거두어 가는 것이 자본가이다. 저자가 [사업가는 결실을 낳는 일정한 흐름 중간에 개입해 나무를 흔들고는 별 힘 들이지 않고 열매를 주워 도망가 버린다. (p. 44)] 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이 아닐까 싶다. 현대의 금융산업은 마르크스 시대에는 상상도 못했을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모든 금융이 다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금융은 없어서는 안될 도구이다. 다만 [규모가 '너무 큰' 금융이며 권력이 '너무 강한' 금융이며 민주주의로 검증받지 않은 '빗나간' 금융 (p. 50)] 이 문제다. 그리고 이런 문제적 금융의 중심지가 시티오브런던 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베블런은 그때나 지금이나 국제 금융이나 경영에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심하게 착각하는 주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간파했다. 바로 국가'경쟁력' 이다. (p. 52)

세금을 예로 들어보자. 베블런 시절에 등장한 전형적인 조세 도피처 수법은 이전가격이다. 다국적기업이 에콰도르에서 컨테이너 한 대 분량의 바나나를 생산하는데 1000달러가 들며 웨일스의 한 슈퍼마켓에서 이 컨테이너에 든 바나나를 전부 3000달러에 산다고 가정하다. 이 체계 어디쯤에 수익 2000달러가 놓여있다. 다국적기업은 이제 자회사 세개를 설립한다. 에콰도르 회사는 바나나를 생산하고 웨일스 회사는 바나나를 슈퍼마켓에 팔고 세번째 회사인 페이퍼컴퍼니 파나마회사를 직원없이 조세도피처에 세운다. 이 세 회사는 바나나를 다국적기업 안에서 서로 팔고 산다. 우선 에콰도르 회사가 파나마 회사에 1000달러를 받고 바나나를 판다. 그 다음에 파나마 회사가 웨일스 회사에 3000달러를 받고 바나나를 판다. 2000달러 수익은 어디에 남을까? 에콰도르 회사는 바나나를 생산하는데 1000달러를 들였다. 그런데 1000달러를 받고 팔았으니 에콰도르에서는 수익이 0이다. 따라서 세금이 없다. 비슷한 방식으로 웨일스 회사는 파나마 회사에 3000달러를 주고 사서 3000달러를 받고 팔았기 때문에 영국에서도 수익이 0이고 세금도 없다. 하지만 파나마회사는 1000달러에 주고 사서 3000달러를 받고 팔았으니 2000달러 수익을 냈다. 그런데 이 회사는 조세도피처에 있기 때문에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는다. 짠! 세금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p. 53)

위의 조세도피처 예시는 가장 쉽고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깨달음을 전달한다. 사업가는 저런식으로 사업을 하면할수록 부를 축적할 수 있고 저런방식이 가능한 조세도피처는 영국령의 섬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국의 지배를 받지 않지만 영국령이기에 다각도의 접근이 용이한 섬들.

조세도피처에 대한 적나라한 현실은 <머니랜드> 라는 책을 통해 읽은 적이 있다. 세계 곳곳에 듣도보도 못한 작지만 서류상으로 부유한 곳들이 참 많아서 놀라웠었는데 저자는 영국령 조세도피처에 주목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과연 누구를 위한 자유였는지 밝힌다. 신자유주의는 경쟁을 없애는 자유를 가능케 했다. 경쟁이 없어질수록 불평등은 심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영국은 세계 경제에 엄청난 폐해를 야기했다. 그러고도 빈털터리가 되었다. (p. 93)] 빈털터리만 되었더라도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영국 시티오브런던은 '악의 소굴이 된 제국의 심장' 이었다.

새로운 금융시장이 런던에서 태어나 시티오브런던이 신봉하던 자유라는 종교를 자양분으로 삼아 자라나 시티오브런던을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탈바꿈해 놓는다. 이 금융중심지는 놀라우리만치 다양하고 정교한 새 도구로 무장하여 세계 곳곳에서, 영국 곳곳에서 부를 뽑아올린다. 당시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시장은 화려하게 성장해서 제국을 대체하고 능가하여 시티오브런던의 기득권층에 바치는 부와 특권의 원천이 되기에 이른다. (p. 103) 시티오브런던 기득권층은 제국의 붕괴를 몹시 애통해하면서 소리없이 영국을 역외 조세 도피처와 금융 안식처로 변모시켰다. (p. 105)

금융에 대해 잘 모르다보니 저자가 아무리 상세히 풀어설명해 놓아도 이해에 한계가 있긴 했다. 조세도피처가 나쁘다는 것도 알겠고 법인세 인하가 어떤식으로 뒷거래가 되는지도 알겠는데 그렇게 사업가가 부를 축적하는 것이 시티오브런던 금융산업에는 왜 이로운 것일까? 간단하게 이해한바로는 '수수료'때문이었다. [영국중앙은행은 역사적으로 시티오브런던 편에 내내 서 왔다. 외환 관리를 강화할까 봐, 해외령이 외환관리에 어떤 위험을 끼칠까 봐 조바심을 쳤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해외령에 돈을 은닉해 놓는 외국인의 생각을 말없이 반겼다. 이 돈을 관리하면 외환 수수료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p. 114)] 저자는 시티오브런던이 역외 모형의 심장부라고 표현한다. 탈세와 해외은닉으로 거대자본이 된 사업가들은 더더 탐욕을 키우며 독식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오늘날 대형쇼핑몰로 걸어들어가면 보크와 그 지지자가 낳은 자식이 온통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화려한 색깔을 자랑하는 풍요의 뿔처럼 슈퍼마켓 선반이 넘치도록 가득 채운 상품은 서로 다른 다양한 상표로 포장되어 있지만 대부분 유니레버나 크래프트하인즈 같은 몇몇 거대 기업이 생산한 제품이다. 초콜릿을 사먹고, 휴대전화로 수다를 떨고, 선글라스를 쓰고, 신발을 신고, 물을 마시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고, 부대끼며 기차에 타고,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푹 빠져 살면서 지갑을 열 때마다 우리는 숨어 있는 '독점세'를 낸다. (p. 148)

대놓고 독점인 것을 알게하는 시대는 지난지 오래다. 분명 다른 상표이지만 알고보면 같은 그룹의 상품들, 그렇게 경쟁업체끼리의 카르텔보다 더 위험하지만 더 교묘하게 우리는 독점세를 내고 있다. 저자는 말한다. [해체는 도구상자에서 우리가 고를 수 있는 한 가지 도구일 뿐이다. (p. 157)] 라고. [독점과 싸우려면 다양하고 종합적이며 경제 전 영역을 아우르는 전략이 필요하다. (p. 156)] 라고.

저자의 설명을 읽다보면 과거 이러한 금융의 저주는 주로 우파에 의해 주도됐었다면 점점더 좌우의 구분이 없어져 온 것 같다.

제3의 길은 개념이 꽤 단순했다. 좌파 정당이 정계에서 새로운 타협안을 분명히 드러내려는 시도였다. 세계화는 어쩔 수 없는 추세라고 지지자들은 주장했다. 각 나라들이 이를 수용하고 적응해 나가야 성장하는 세계 금융시장에 올라탈 수 있으며 혁신적인 사회 정책을 펴면서 구태의연하지만 바람직한 재분배를 약간만 해도 이 세계화라는 거친 날을 무디게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중략) 하지만 제3의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역외 모형이었다. 거친 세계화의 바다에서 번영을 누리기 위해 스스로를 조세 도피처로 탁월하게 변신시킬 수 있는 국가한테나 맞는 전략이었다. 결국 이 모형을 이끌어가는 토대는 경쟁력 강령이었다. 각 국가가 '사업에 개방'해야 하며 다국적 대기업과 은행과 세계 유동자금을 꾀기 위해 끊임없이 미끼를 흔들어야 한다는 이론이나 이념이었다. (p. 175)

국가경쟁력이나 세계화 관련 내용을 읽으며 조금 무서워지기도 했다. 너무나 익숙했던 이념들인데 긍정의 모토가 아니었단 말인가... 하지만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저자가 말하는 영국의 금융에 대해서 그렇다는 말이지 모든 영역에 확대시키는 것도 곤란하다. 늘 적절한 선이 중요하다. 여하튼 그렇게 국가는 기업이 되고 국민은 종업원이 됐다는 표현에는 수긍가는 면이 있긴 했다.

경쟁력 강령의 중심부에 혼란이 하나둘씩 쌓여 갔다. 경제나 과세 체계나 도시는 기업이 아니며 '경쟁'을 하더라도 별 의미가 없다. 이 용어와 뜻이 가장 잘 통하는 경우는 군사적인 의미로 쓰일 때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복할 만큼 강성해서 '경쟁에서 이길' 때에나 쓰는 말이다. 그런데 경제가 돌아가는 모습은 이와 다르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며 이 이윤에서 세금을 낸다. 도대체 이 이윤에 대응하는 등가물이 국가에서는 무엇일까? 예산 흑자? 무역수지 흑자? 이는 불필요한 긴축처럼 정상이 아닌 경제정책이나 과소소비를 나타내는 징후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예산 흑자에는 어떻게 세금을 매겨야 할까?) (p. 189)

기업의 세금은 낮춰주고 국가운영에 비용은 들고 필요한 세금은 국민에게서 걷는다. 기업은 수익을 해외에 은닉하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인건비를 줄이고 복지를 줄인다. 임금은 줄고 물가는 오르고 세금도 오르면 결국 기업의 상품을 살 구매자도 없어질텐데 왜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어 온 걸까... 한계에 다다르지 않았기 때문인걸까... 조세도피 말고도 부를 축적하는 방법은 실로 다양했다. 특히나 신탁이나 사모투자 는 현대에서 가능한 금융 약탈의 최고봉이라 할만 했다. 게다가 인력낭비도 문제였다. 저자는 책의 초반에서부터 재능 넘치는 젊은이들이 순수학문이 아니라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금융산업에 뛰어들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 했었다. 또다른 분야도 있었지만 여하튼 다 금융산업인 셈이었다.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두 배관, 정부의 위탁정책과 민간 부문의 금융화는 부와 재능 넘치는 사람을 정부와 민간 부문에서 모두 쫓아내고 있다. 이때문에 새로운 질문이 하나 생겨난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갈까? 대답을 하자면 이들은 일정한 형체 없이 꾸준히 규모와 세력을 키우는 경영이나 재무 상담가와 자문가 집단으로 들어간다. (p. 406)] 금융산업에 뛰어들지 않았더라도 교묘한 약틀을 옹호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경제학자들이었다. 저자는 경제학자들에 대해 [아무리 정직하고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춘 연구자라 해도 대형 은행과 다국적기업의 기호에 맞게 체계적으로 증거를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p. 423)] 라고 말한다. 젊은 인력은 낭비되고 국민은 약탈당하고 있는데 영국이라는 국가차원에서도 얻는게 없이 자본가들만 거대한 부를 쌓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반박의 여지없이 현재 영국은 금융의 저주에 걸리고 시름시름 앓고 있다. (p. 454)] 고... 그뿐만이 아니다. 이젠 국가안보까지 그 영향이 끼치고 있다.

금융의 저주는 분열을 초래하고 기반을 약화하고 소수에게 권력을 집중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서구 주요 경제대국 가운데서도 특히 영국이 중국의 영향력에 가장 취약하다는 점을 드러낸다. 2013~16년 사이에 이루어진 핵 협정은 이를 분명히 보여주는 신호다. (p. 460) 예를 들어 시티오브런던에서 몸집이 가장 큰 금융괴물 HSBC를 보자. 홍콩상하이은행이 원래 이름인 이 거대 다국적 기업은 본부가 런던에 있다. (중략) 2017년 즈음 HSBC는 직원의 절반 이상이 아시아인이며 170억 달러에 달하는 세계 수익 가운데 90퍼센트 가까이가 아시아에서, 구체적으로는 홍콩과 중국에서 나왔다고 밝혔다. 이 이유만으로 HSBC는 영국 정부가 내리는 지시보다 중국 공산당이 내리는 지시를 실행에 옮길 가능성이 더 크다. 아니 그 동안의 행태를 살펴보면 오히려 HSBC가 영국 정부에 이래라저래라 지시내릴 수 있고 또 그렇게 해 왔음이 드러난다. (p. 462)

영국에 내린 '금융의 저주'를 읽는 내내 드러난 영국의 실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 하면 신사의 나라 아닌가? 하지만 알고보니 영국은 해적의 나라였다. 예나 지금이나.

부의 수탈이 불러온 불평등은 특히 위험하며 분열과 불화를 낳는다. 중산층이나 빈곤층이 심한 박탈감을 느끼고 독 안에 든 쥐 같은 신세로 전락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억만장자 계층이 어떻게 부를 쌓는지 우리가 그 과정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우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낡은 정치 공식으로 되돌아간다. 언론 통제력을 이용해 대중의 분노를 다른 방향으로, 피부색이 다른 사람에게로, 성적 성향이 다른 사람에게로, 종교가 다른 사람에게로 돌린다. 증오라 가득 찬 이 공식을 세상은 과거에도 이미 목격한 적이 있다. (p. 465)

익숙한 공식이다. 알면서도 당하는 수법이다. 오랜 세월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은 아마도 계속 효력이 있을 것 같은 방법이다. 하지만 무력하게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저자는 '금융의 저주를 물리칠 똑똑한 자본통제'를 주장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문적이고 혁신적인 새로운 시민사회운동이다. (p. 470)] 그밖에도 저자는 할수 있는 모든 방안을 고민한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시민이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다. 정치도 경제도 그 둘이 힘을 합친 금융도 모두 국민을 일반노동자를 시민을 위협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오늘날 영국에서 가장 첨예한 정치적 대립은 금융화와 금융의 저주를 지지하는 편과 금융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사회를 섬기기를 바라는 편 사이에 놓여 있다. 자, 어느 편에 설 것인가? (p. 475)] 로 마무리한 저자의 질문에 우리는 답할 수 없다. 우리는 영국 시민이 아니니까 저자가 제시한 첨예한 대립각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물론 크게 보면 정치 경제 금융 각 부분들에서 세계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는 공통적인 내용들이 있었고 충분히 알아두면 좋을 내용들이었다. 상세한 <미주> 와 <찾아보기> 만 봐도 저자가 얼마나 꼼꼼히 찾아보고 연구해서 정리한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국금융의 저주를 세계적 부의 흑역사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었다. 표지도 너무 예쁘고 편집도 깔끔해서 눈에 들어오는 책인데 본문내용과 어색한 제목이 아쉽다.(처음 예상을 잘못한 내 탓도 있겠지만...;;;) 여하튼, 읽는 내내 우리나라 얘기가 아니라 다행이다 싶었다. 우리나라 정치 경제 금융계가 깨끗하다는 건 아니지만 시티오브런던 처럼 적어도 세계적으로 패악을 끼치는 것은 아니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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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 절을 걷다 - 누구나 찾지만 잘 알지 못하는 사찰을 구석구석 즐기는 방법
탁현규 지음 / 지식서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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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간송미술관 학예사와 떠나는 지식여행

일주문부터 산신각까지 절 곳곳의 궁금증을 풀어주다

가을이다. 걷기 참 좋은 계절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등산까지는 못하더라도 산의 정취는 느끼고 싶을 때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아마 절이 아닐까 싶다. 우리의 전통이자 유적지인 절을 천천히 거닐다보면 마음까지 고즈넉해져서 그 분위기가 좋아서 종교에 상관없이 가끔 절에 가고 싶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절을 찾아다니다 알게 된 것은 절 구성이 다 다른 것 같아도 큰 틀에서는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큰 틀에서 비슷해도 똑같은 절은 있지 않았다. 절은 모두 산속에 있었고 산 지형은 모든 절이 달랐다. 그러니 똑같은 절이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또 집 이름이 절마다 조금씩 다른 것도 흥미로웠다. (p. 9) 이 책은 그 차이들에서 뽑아낸 공통점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물론 공통점을 특정 미술품 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절에서 만나는 불교미술품에서 각 분야를 대표하는 작품을 정하여 이를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다. (p. 10) 이 책에서는 절로 들어가며 처음 만나는 일주문부터 절을 빠져나오며 마지막으로 만나는 부도림까지 여러 공간에 모셔진 조각상과 탱화들의 의미와 특징을 살펴보았다. (p. 11) -들어가는 글 中-

산책이 되었든 여행이 되었든 한국에 살면서 절에 한번도 안가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그 절들에서 보고 오는 것은 정작 절이 아니고 나무나 꽃이나 산이나 길이기 일쑤이다. 다 비슷한 집같고 다 비슷한 불상같아서 뭐가뭔지 모르겠기에 그냥 대충 쓱 보고나오면서도 허전하고 아쉽곤 했다. 이 책은 그러한 아쉬움을 달래주는 요긴한 책이었다. 책한권을 읽는 동안 절에 들어가서 나오기까지 한적하지만 꼼꼼한 여행을 시켜주기에 읽고나면 마음이 왠지 흡족해지는 책이다. 자, 이제 절로 천천히 걸어들어가보자.

우리나라 절들은 계곡 옆에 터를 잡는 경우가 많다. 이는 절에 사람이 살며 가장 필요한 것이 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은 능선 길보다 계곡 길이 오르기에 좋아서 웬만한 절들은 모두 계곡 옆 너른 터에 자리잡는다. 산이 깊으면 물이 많고 물이 많으면 돌다리를 크게 세워야 하니 무수한 절에서 무수한 무지개다리가 세워졌다. (p. 17)

산속에 세워진 절은 산의 지형에 따라 자유분방하게 지어질 수밖에 없지만 절도 사람사는 곳이니 물 가까이 세우게 되고 그래서 절에 가기위해서는 돌다리를 건너는 경우가 많다. 이 돌다리를 무지개다리 라고 한다. 반려동물이 명을 달리했을때 무지개다리를 건너갔다 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절로 들어가는 무지개다리 또한 차안(우리가 사는 이 세사예에서 피안(깨달음의 세계)로 건너가는 것이니 다른 세상을 연결해주는 다리라는 의미에서 무지개다리 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 것 같다. 이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입구에 커다란 문이 있기 마련이다.

기둥2개위에 지붕만 있는 형태의 이 문을 일주문이라고 한다. 일주문을 지나고 나오는 문이 금강문인데 이 문은 양옆에 공간이 있어서 금강역사 라는 건강한 장승 둘이 삿된 것들을 막고 있다. (4천왕과 금강역사의 차이점은 금강역사는 하의만 입고있고 있는 씨름선수 처럼 보인다면 4천왕은 갑옷을 입은 장군 같다.) 하지만 금강역사 보다 절 하면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 아마 4천왕 일텐데 금강문 다음에 나오는 천왕문안에 이 4천왕이 있다. 우락부락한 표정의 거대한 그 4천왕 ㅎㅎ 이 4천왕들은 부처님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한다.

자, 이제 입구를 통과하여 절마당으로 들어섰다. 절 마당으로 가기위해서는 계단을 조금 오르기마련인데 이 계단위에 루(다락집)이 있는 경우가 많다. 2층형태이지만 1층이 계단이라 2층이 절마당과 평행을 이루어 절마당에서 바로 루로 연결되는 구조다. 산의 기울기를 이용한 때문이라고 한다. 루에는 '사물'이 있는데 법고, 목어, 운판, 범종 이렇게 4가지를 일컫는다. 아침저녁 예불때마다 법고-목어-운판-범종 순서로 치는데,

법의 소리가 나는 북이라는 뜻의 법고는 땅에 사는 중생들이 그 소리를 듣고 해탈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친다. 목어는 나무로 만든 물고기로, 배속이 비어 있어 여기에 나무막대기 2개를 넣고 앞뒤로 움직이며 배 안쪽을 친다. 물속에 사는 중생이 해탈하길 기원한다. 운판은 청동으로 만든 구름 모양 판으로, 나무망치로 가운데를 두드린다. 하늘에 사는 중생이 해탈하기를 기원한다. 마지막으로 범종이다. 범종은 땅 윙, 물속, 하늘 위 모든 중생들이 해탈하길 바라는 의미에서 아침에는 28번, 저녁에는 33번 친다. 28은 불교에서 말하는 삼계인 육계, 색계, 무색계가 28천으로 이루어진 것을 상징하고 33은 수민산 정상에 있는 33천을 상징한다. 가죽, 나무, 청동이란 3가지 재질로 된 물건을 나무로 때리면서 나는 소리는 산사를 깨우고 잠들게 하는 법의 소리다. 사물은 모두 스님들이 친다. (p. 57)

라는 상세한 설명이 너무 좋았다. 아~ 그런거였구나~!!!

루에서 내려오면 마당한가운데 석등이 있기 마련이다. 석등의 보이지 않는 빛은 부터님 말씀을 의미한다고 한다. 부석사 석등이 가장 오래됐고 화엄사 석등은 후백제 견훤이 세운 것이라니 놀라웠다. 이 화엄사 석등안에는 특이하게도 공양하는 스님상이 있는데 공양자의 시선이 향한 곳에 3층석탑이 있어 공양자가 탑에 경배드리는 의미라고 한다. 이렇게 석탑으로 넘어간다.

석등과 석탑은 모두 돌이어서 절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물건인데 석탑은 부처님 사리를 모신 일종의 무덤인 셈이라고 한다. 석탑의 최고봉은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이다. 사리를 모신 석탑이 하나가 아니라 둘인 것도 특이한 경우인데, 다보탑은 다보불의 상징이고 석가탑이 석가모니불의 상징이라고 한다. 다보불은 석가모니불의 설법이 옳고 바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땅에서 솟아난 탑 안에 앉아계시던 부처라고 하는데, 자 이제 부처가 사시는 집을 볼 차례다.

<한국 절의 중심 전각은 대부분 대웅전이다. 대웅이란 석가모니불의 다른 이름이다. (p. 75)> 대웅전을 설명하면서 석굴암 불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이어지는데 양 페이지가 다 사진들인 경우 가운데부분이 책장 사이에 묻혀 잘 안보이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여하튼, 석굴암에 갔을때 부처님 불상만 보고 오곤 했는데 주변을 둘러싼 그 모든 조형물들에 제각각 의미가 있는 것을 읽고보니 석굴암이 다시 보고 싶어진다. 내게 가장 참고가 됐던 내용은 석가모니불 앞 양쪽에 있는 존재가 지혜 문수보살과 실천 보현보살이라는 것이었다. 이 삼존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이 가장 뜻깊었다. 이 삼존은 조선 후기에 <석가모니불, 약사불, 아미타불 세 불을 함께 모시는 것으로 확장되는데, 이는 조선 불교의 종합화 현상이다. (p. 98)> 삼존불 탱화에서 부처님 세분이 그려졌더라도 여하튼 석가모니불 앞 좌우에 서계신 두 존재는 지혜 문수보살 과 실천 보현보살 이다. 불상 뒤 벽에는 항상 탱화가 있기 마련인데, [용주산 대웅보전 후불탱] 에 정조임금과 효의왕후를 상징하는 캐릭터가 그려졌다는 점이 재미있으면서도 신기했다. 탱화 속 정조대왕의 얼굴은 우리에게 익숙한 초상화 속 그 얼굴과는 다르지만 상상으로 그려진 어진보다 이 탱화속 정조대왕의 얼굴이 더 실물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유심히 보게 된다. 대웅전에 후불탱으로 영산탱이 걸리고 대웅전 좌우 벽에도 탱화가 걸리는데 왼쪽 벽에 걸리는 탱화가 감로탱, 오른쪽 벽에 걸리는 탱화가 신중탱 이라고 한다. 대웅전에서 만나는 마지막 탱화는 대웅전에 보관하다가 꺼내어 대웅전 앞마당에 거는 괘불탱인데, 탱화 하나하나의 의미를 읽다보니 그림책을 보는 기분이었다. 쓰윽 지나쳐볼때는 탱화들도 다 비슷해보이더니 절마다 전각마다 이렇게 제각가 다른 사연을 품은 탱화들이 있었구나~.

다음은 대웅전 주변의 전각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자. 부처님 일생을 8폭그림으로 건 집을 '팔산정'이라고 하는데 이 탱화를 팔상탱이라 한다. 글을 몰라도 이 8폭의 그림을 보면 부처님의 80 생애를 파노라마처럼 볼수 있다. 이중 두번째 폭에서 부처님 탄생관련 내용, '태자가 탄생계를 마치자 하늘에서 9마리 용이 나타나 입에서 물을 토하여 태자를 목욕시켜 준다. 여기에서 '구룡'이라는 단어가 생긴다. (p. 149)' 을 읽으니 올여름 다녀온 구룡포에서 본 청동상이 생각났다. 아홉마리의 용이 서로 얼키고설켜있는 거대한 청동상이었는데 그 '구룡'이 불교에서 나온 것이었구나. 다섯번째 폭에서 스스로 삭발을 하는데, '불교에서 삭발을 하는 것은 높은 터번으로 상징되는 신분을 포기한다는 표시다. (p. 159)' 라는 의미였다니, 불교가 외국에서 들어온 종교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터번은 없었지 않은가. 마지막 폭에서 열반 내용이 나오는데 '관이 활활 타오르면서 무수한 검은 알갱이가 사방으로 쏟아지니 이것을 '사리'라 부른다. 사리는 인도말로 '유골'이란 의미로 불교에서는 화장한 후 몸에서 나오는 구슬을 뜻한다. (p. 179)' 의 그림을 보며 까만 알갱이들과 (투명한 구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사리가 같은 것이라는 게 처음엔 잘 연결되지 않았다. 구슬보다는 재로 보이는 그림을 보면서 사리의 변용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은 '대광명전'이라고 한다. 비로자나불은 부처님 법이 몸을 갖췄다하여 '법신불'이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석가모니불의 손자세를 항마촉지인 이라고 하는데 비로자나물은 지혜주먹 모양을 하고 있다. (왼손 주먹을 오른손으로 감싼 형태)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살짝 구부린 형태의 손짓을 가진 부처님상은 설법 손짓이라고 하니 이제 손 모양만 봐도 부처님상을 조금은 구별할 수 있을 것 같다.

극락의 주인 아미타불을 모신 곳은 극락전 이고, 병을 고쳐주는 약사불을 모신 곳은 약사전이라 한다.

지옥 왕들에게 죄를 심판받는 명부전이 없는 절은 없다는데, 명부전에는 염라대왕 말고도 왕이 9명이나 더 있어 이를 시왕이라 한다고 한다. '원래는 십왕이지만 발음이 부드럽지 못해 '십'에서 'ㅂ'을 빼 버려 시왕이 되었다. 명부전은 그래서 시왕이 사는 집이다 하여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시왕전 주존은 시왕이 아니라 지장보살이어서 명부전, 시왕전을 지장전이라고도 부른다. (p. 211)' 보살이 주존인 두번째 집이 '관음전' 인데 현실 고통을 없애주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부처님, 보살 에 이어 옛 스님들을 모신 전각을 보자. 번뇌를 떨친 아라한이 사는 집이 '나한전' 이다. '아라한(산스크리트어 아르하트의 음역)은 부처님 말씀을 직접 듣고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결실인 아라한과를 얻은 스님을 말한다. 아라한과는 모든 번뇌가 소멸한 단계이고, 아라한은 더 이상 생사 윤회를 하지 않는다. 석가모니불 제자 1,250명은 모두 아라한이라 부를 수 있고 부처님 열반 후 아라한을 믿고 따르는 신앙이 생겼다. (p. 237) 아라한을 모신 집을 나한전 혹은 응진전 이라고 한다. 응진 이란 '진리에 상응하는 자'란 뜻으로 아라한의 다른 이름이다. 중국인들은 산스크리트어를 음역한 아라한을 줄여 나한이라고 불렀다. '아'가 부정의 접두어이고 '라한'이 '번뇌가 있는'이라는 뜻으로 '아라한'은 '번뇌가 없는'이란 말인데 만약 '나한'만 하면 '번뇌가 있는'이란 뜻이 된다. 하지만 언어란 관습이어서 '나한'은 중국 한자에서 일반명사가 되었다. (p. 238)'

절을 세운 스님을 '으뜸되는 스승' 이라는 말로 조사 라고 하는데 절을 창건한 스님의 초상화를 봉안한 전각을 '조사전'이라 한다.

부처님에서 보살을 거쳐 스님까지 왔으니 이제 토속신앙과 만난 전각을 볼 순서다.

산신을 모신 '산신각', '홀로 수행하는 성인' 이란 뜻의 독성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의인화되어 부처로 모셔진 '칠성각' 까지 보고나면 이제 절에서 나오며 스님의 돌무덤은 '부도'를 마지막으로 보게 된다. 부도란 스님 사리탑을 말하며 승탑이라고도 하고 이 부도가 많이 세워져 부도의 숲인 '부도림'이 조성된다.

절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세심하게 눈여겨 본 적이 있었나 싶다. 새록새록 신선한 내용들을 하나하나 알아갈 때마다 너무나 즐거운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절에 가면 이 책을 떠올리며 아~! 라는 감탄사를 즐기고 싶다.

ps. 참 유용한 책인데 표지가 너무 옛스러운것이 좀 아쉬웠다. 선뜻 읽고 싶어지는 표지가 아니라서;;; 표지가 좀더 산뜻하고 감각적이었다면 이 유익한 책에 좀더 많은 사람들이 손을 뻗어 집어들지 않을까 하는... 여하튼, 절에서 걷는 것을 좋아한다면 이 책을 한번 읽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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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 - 예술과 철학의 질문들
백민석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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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삶과 예술은 구별되지 않는다"

"그 존재의 불안은 깨어 있음, 그 각성의 대가다"

아주 오래전에 <미학 오디세이> 라는 책을 읽었었다. '오디세이' 가 그리스 고전에서 나온 말인줄도 모르던 때 읽었기에 하물며 '미학 오디세이'라니 그 내용을 제대로 알아먹었을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책이었기에 개인적으로 꼽는 인생책중의 하나다. 철학과 미학은 그 불분명함으로 인해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 이후로 한참동안 그 연결고리를 다시 접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얼마전부터에서야 고전이니 미술사니 하는 책들을 읽으면서도 때론 깨우침을 얻고 때론 그 자체에 감탄하면서도 미학적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역사는 역사로서 배우고 그림은 그림으로써 볼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저 감상수준이었다. 물론 그러한 감상 자체만으로도 좋았지만 남겨진 질문들에 대해 무심히 덮어두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이 그러한 잊혀진 질문들을 생각나게 했다. 그 질문들이 미학적일 수 있다는 오래전의 미학적 느낌을 그 연결고리를 되살려 주는 듯 했다.

저자는 미술을 비롯해 음악과 문학 그리고 영화를 넘나들며 질문하고 생각한다. 그렇게 쓰여진 '미학 에세이'는 이해할 수 없더라도 아름답다는 것은 분명하게 느끼기에 스스로 이해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었다. 저자가 언급하는 작품들을 몰라도 충분히 본문을 이해할 수 있을만큼 참고자료는 충분했지만 나는 그 자료들에 대해 2차적 감상을 하기보다는 저자의 문장 그 자체에서 1차적 감상을 하는 것이 좋았다. 그러니까 저자는 다양한 예술작품들에 대해 미학적 사고를 했다면 나는 저자의 문장들에 대해 미학적 사고를 해봤다고나 할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듯한 현대 추상회화도 최소한 '이것도 예술인가?', '이런 작품을 그런 비싼 값에 팔아도 되는가?' 하는 판단을 하게 한다. (p. 17)> 어느 미술관련 책에서 벽에다 바나나 하나를 떡하니 붙여놓고는 코미디 라는 작품명을 붙인 것을 봤을 때 추상미술에 대해 몹시 난감한 마음이 들었더랬다. 화장실 변기를 가져다 놓고 '샘'이라고 한 것은 미술사적으로 그래 의의가 있었다고 하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벽에 붙은 저 바나나 하나는 무어란 말인가... 하지만 그 바나나는 결국 나를 생각하게 한 셈이었다. 적어도 '저자는 왜?' 라는. <예술은 사유하게 한다. 사유를 촉발하는 힘까지 예술의 일부이다. (p. 18)> 그랬구나... 예술은 보기에 아름답거나 창의적으로 만들거나 거창한 상징을 가진 그 무언가만이 아니라 '사유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예술이 될 수 있었구나... 내가 벽에 붙은 그 바나나 하나가 대체 왜 웃기는 코미디냐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나와의 연결성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려나... 그렇다면 나는 어떤 연결고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나? 나? 인간?? 사회???

<이름이든 사회적 호칭이든 기본적인 역할은 같다. '내가 여기 있다'고 그어놓은 실존의 마지노선이다. (p. 22)>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문장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의 실존을 증명하는 것은 일단 이름이라는 것에 대해 누군가에게 불려지는 호칭이라는 것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실존의 증거가 이름이라고 보면 저자가 말하는 '인간 증발' 방법에 대해 이름을 지우는 것에 대해 수긍이 가는 면이 많다. 살아있으되 이름이 없다는 것에 대한 실존은 무엇으로 증거할까... 결국 그 이름없는 사람이 살아있음을 알고 있는 누군가에 의해서다. 이름이 없어져도 실존은 결국 타자에 의해서 가능한 것일까... 하지만 데카르트는 '나'의 실존에 대해 '나의 생각' 에 초점을 두었고 이러한 생각이 근대적 철학을 일으켜 세웠다. '나' 와 '사회적 나' 는 참 따로 떼어생각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그렇다면 사회에서는 개인을 어떻게 보는가?

<인간을 기름처럼 퍼다 쓴 (p. 35)> 기업이 나라의 대표기업으로 성장하는 동안 과연 '나' 로서의 '개인'이 존재했었나? 하지만 그러한 '개인'들은 <낮은 보상을 수용하면서까지 보상 범위를 넓히고자 했다. (p. 42)> 자신들과 같은 피해를 당했을때 자신들보다 더 나은 처우를 받을 수 있도록 활로를 열어준 것으로 이미 희생당한 몸을 마지막까지 밑거름으로 썼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이 꺼끌하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게 우리는 예술에 대해서도 매끄러운 것만 밝혀 온 것은 아닐까?

<매끄러움은 우리의 감각에서 흠, 상처, 끊김, 더러움, 고통을 제거해 부정성의 영역으로 넘기고, 매끄러운 자신은 어느새 '긍정적인 즐거움' 뿐인 긍정성의 영역이 된다. (p. 47)> 하지만 사회는 결코 매끄럽지 않다. 아무리 보지 않으려 해도 우리는 안다. <약자의 실존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차별이, 여러 상이한 관계뜰 속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들 차별에서 국적, 인종, 피부색, 계급 같은 차이들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닐 수 있다. (p. 64) 작위적으로 그어진 경계에 의해 그때그때, 역사적으로 구조적으로 만들어지고 해체되는 일시적인 지위들이다. 거역할 수 없이 자연적으로 주어졌거나 숙명처럼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동일자와 타자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스스로를 가둔 인공적 경계다. (p. 65)> 이 경계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은 '언어'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타자의 언어가 고통당하지 않게 하려면, 나의 언어에 '함몰되거나 통합'되도록 강제하지 않아야 한다. 나의 언어와 동등한 언어로 배려해야 한다. (p. 69) 약자의 언어를 억압하는 것은 육신을 구속하는 일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보다 언어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p. 70)> 하다못해 재가 지금 읽고 쓰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언어'에 의해서 가능하다. 태어나자마자 언어부터 학습하는 것처럼 예술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게모르게 학습한 것들이 혹시 우리가 껄끄러운 예술에 대해 편견을 가지게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린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땅을 일구는 사람들의 소박함, 곡식을 준 땅에 가지는 경건함, 하루 일을 끝낸 농부의 평온함 같은 것을 느끼도록 학습되었지, 가난에 찌든 농부의 절망을 읽어내도록 학습되지는 않았다. (p. 87)> 우리가 자주 본 그림들에서 놓친것은 평화로운 농촌 풍경에서 보이지 않는 농부의 표정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아 왔던가?

<나치즘, 인종주의 ,파시즘 등은 언제라도 세상을 다시 한번 비극적인 상황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주변에 늘 우리를 깨어 있게 하는 눈이 있어야 하는 이유다. 존재의 불안은 그 깨어 있음, 각성의 대가다. (p. 105)> 우리를 깨어있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가 예술인가 보다. 예술과 이러한 각성의 연결고리가 아마도 미학이 아닐까. 우리가 가장 많이 보고 가장 자주 보는 것은 아마도 나의 혹은 누군가의 '얼굴'일 것이다.

<인간이 자기 초상에 집착하는 이유는 다양할 테지만 얼른 떠올릴 수 있는 건, 초상이 인간의 자기 만족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라는 사실이다. (p. 110)>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대변한다. 얼굴을 가린다면? <"가면은 인간을 가장 잔인하게 만들'기 때문. 얼굴을 가렸을 때 무엇도 함께 가려질 수 있는지 꿰뚫어보는 대목이다. (p. 117) 가면으로 얼굴을 가릴 때조차 인간에게 얼굴은 중요하다. 가면으로 가려서라도 인간은 얼굴을 지키려 한다. (p. 118) 얼굴이 세계에 대해 자기 존재의 개별성을 주장할 수 있는 마지막 근거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p. 119)> 코로나 시대에 마스크로 얼굴을 절반이상 가리고 다닌지 거의 이년이 다 되어 간다. 이 마스크는 우리의 무엇을 가렸을까? 시대는 변했다. 가면이 인간의 무엇도 함께 가렸었다면 코로나는 얼굴을 가림으로써 무엇을 지킬 수 있는지 생각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마스크로 가린 얼굴에 대한 의미가 변한 시대에서 예술또한 삶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예술은 재료가 가진 범속한 물성을 부정해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물성을 창조하고, 사회 일반의 통념과 관습을 부정해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행위다. 예술은 부정하기를 통해 대상에 미학적 균열ㅇ르 내고 그 균열에서 전에는 상상치 못했던 예술성을 창조한다. 삶으로 돌아가보자. 인간에게 삶과 예술은 구별되지 않는다. (p. 133)> 특히나 예술가들에서 삶은 예술과 더더욱 구별되지 않을 것이다. <작가가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되어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삶에 어느 정도 감정 이입은 할 수 있어야 한다. (p. 147)> 나는 그래서 작가의 감정이입이 들어가 있지 않은 소설은 그렇게 가식적 문체로만 글을 쓰는 작가의 작품은 읽지 않는다. 독자는 읽으면 느낄 수 있다. 이 글 속에 작가가 들어 있는지 없는지 그렇게 작가의 삶과 내 삶이 연결되는지 아닌지.

그러한 공감은 특출난 예술가들에 의해 더 많이 더 넓게 이루어지곤 한다. <'특출한 사람들이 지닌 위대한 재능은(...)독창적이고 중요한 유추를 통해 누구도 이전에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포착하는 데서 나'온다. 이런 재능은 어느 시대에서나 매우 드물다. (p. 161)> 하지만 이러한 특출함도 인류가 존재했을 때 얘기다. 언제부턴가 인류종말 지구종말 같은 디스토피아적 작품이 왕왕 등장하곤 한다. <종말의 상상력은 예술은 영원할 것이라는 세간의 인식에 참혹한 의문을 제기한다. 예술품을 보고 즐길 인간이 없는 상황에서 예술품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 (p. 169)> 예술의 존재는 인간의 존재와 함께 일때 그 가치를 인정받는게 아닐까. 그러니까 예술이 아무리 위대하다할지라도 결국 인간이 있고난 후 가 아닐까.

<예술가는 별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소설가나 화가나 연주자는 공식 문서에 기재되는 직업의 하아고, 그것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업이 됐다. 당연히 예술가의 삶도 보통 생활인의 삶과 다르지 않다. (p. 188)> 직업이라함은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인데 보통 예술가의 삶은 배고픔의 대명사이곤 하다. 예술가가 만들어낸 작품의 고고함 뒤엔 노동자로서의 예술가의 고달픈 손과 배고픈 배가 있기 마련이다. 예술가가 별스럽다 함은 작품의 위대성을 보는 것이고 예술가가 흔한 직업이라 함은 예술작품도 특별할게 없어 보이게 한다. 우리는 그중 어떤 것을 먼저 보고 있는 것일까?

<작품은 예술에 속하지만, 그 예술에 이르는 과정은 삶에 속한다. 작품과 삶은 판이하게 다를 수 있다. (p. 229) 푸코의 말을 따르면 "우리는 스스로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야' 한다. (p. 233)> 작품과 삶 사이의 균형잡기는 예술가와 비예술가 사이의 간극을 메꾸는데 필요하다. 예술가만 예술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도 예술작품이 될 때 서로 소통하게 된다. <작가 자신의 실존에 밀착되어 있을수록 작품은 상투성과는 멀어진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작가가 곁에 서서 나지막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 어디에도 없는 방식으로 들려주는 느낌을 받는다. (p. 238)>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은 결국 이런 것이다. 나와 멀지 않은 것 나의 마음과 다르지 않은 것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란 점에서 추상미술에 대한 도전에 새로운 힘이 생기는 듯 하다.

<추상회화는 해석과 번역이 둘 다 본질적으로 어렵다. (p. 242) 관람객이 어떤 작품을 보며 느끼는 깊이는 작품의 깊이가 아니라, 많은 경우 그 작품이 촉발한 관람객의 사유의 깊이다. (p. 243) 인간의 일임에도 사유란 쉽지 않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취향에 맞는 작품을 찾아다니며 즐겁기를 바라지, 사유로 골치가 아프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예술에서 원하는 것이 사유 없이 그저 즐겁기만 한 것일까. (p. 246)> 뼈아픈 문장이었다. 나는 아마도 예술에서 즐겁기만 바라왔던 것인가 보다. 어려운 것은 피하고만 싶었다. 내가 굳이 예술에서까지 이런 고민을? 하며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들은 외면하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추상회회를 읽어낼 수 없다. 우리는 그 대신 자신을,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의 언어를 읽어내고 사유하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그 일을 즐긴다. 예술이 촉발하는 사유의 고통은, 그 예술의 이해되지 않는 아름다움처럼 때때로 충분히 즐길 만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무해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p. 247)> 예술의 가치를 '인간의 사유'라는 측면에서 새삼 깨닫게 한 책이었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미학적 가치가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의 실용적 가치로 변모하는 시대에 예술에 대해 우리는 어떤 기준을 갖고 있을까? 나는 아마도 '과함'은 '사치'로만 여겼던 것 같다. 나에게 과한 상징은 (예를 들어 처음에 말한 그 바나나 작품 같은) 예술가들이 부린 사치로 받아들여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치도 따지고 보면 나를 '사유'하게 만들었다. 예술의 가치가 깊이있는 사유를 끌어냄으로써 더욱 유의미해질 수 있다는 것, 그 과정이 조금은 고통스러울지라도 '무해한 고통'이라는 것 에서 앞으로는 예술에 대한 거리감을 좀더 좁혀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예술작품과 사회상을 동시에 엮여낼 수 있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며 책을 읽는동안 오랜만에 미학적 사고로 충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참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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