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 카페 - 세상에서 가장 작은 지식 충전소
질다 르프랭스 지음, 최린 옮김 / 가디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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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작은 지식 충전소

지도와 함께 살펴보는 지구상에서 가장 핫한 이슈30개 완벽 분석

 

일반 책보다 큰 사이즈의 이 책을 읽다보면 시사잡지 한권을 읽는 기분이 든다.

세계적 이슈 30가지에 대한 개요를 훑어보면서 매 챕터마다 세계지도가 한번씩은 꼭 등장하다보니 책을 다 읽고 나면 세계지도가 머릿속에 친근하게 남는다. 그리고 어떤 이슈를 읽어도 세계지도에서 비슷한 지역에 계속 색칠이 되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슈를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기도 한다.

바다의 주인은 누구일까? '공해' 영역을 보면서 본토와 멀리 떨어진 지배지역으로 인해 넓은 공해를 소유한 나라들의 역사를 떠올려보고

마약은 어디서 생산할까? 마약재배는 소비와 연결되므로 음성적 패권에 대한 생각을 하다보면

빈곤이 사라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으로 연결되어 결국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큰 문제인걸까 싶기도 하다.

스포츠행사를 왜 열까? 에 나오는 지도를 보며 올림픽과 월드컵 개최지가 어떻게 몰려있는지 새롭게 확인하고 나면

산림파괴의 원인은 무엇일까? 에서 당장 오늘의 경작지를 위해 산림을 불태워야 하는 지역이 어딘지를 보면서 세계적 빈부격차가 다시금 보이고

난민은 어디서 생길까? 의 난민 수용국을 보면서 뉴스에서 난민문제를 거론하는 나라들치고 난민수용을 한 나라가 거의 없었음에 허탈해지기도 한다.

교민은 얼마나 돈을 보낼까? 또한 제 나라를 떠나 경제활동을 해야하는 배경을 생각해보게하고

언어의 세계화는 가능할까? 에서 소수민족의 사라짐이 세계적 번영과 연결되면서

노예는 오늘날에도 있을까? 라는 질문이 너무나 지금도 해당된다는 것에 씁쓸해진다.

사막화는 어디서 일어날까? 같은 자연문제는 지도로 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고

사이버 공격은 누가 저지를까? 같은 권력이 배후에 깔린 문제도 지도에서 보면 분쟁과 연결되어 보이는데

라마단이 왜 문제가 될까? 같은 질문이 왜 질문되어져야 하는지 지도가 눈치채게 해주는 것 같았다.

장벽을 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에서 평소에 미처 알지 못했던 장벽의 실태를 보며

극단주의는 왜 극성일까? 의 지도와 위 질문이 무관하지 않음을 생각하게 되고

세계유산을 보호할 수 있을까? 처럼 현실적인 문제들과의 연관성을 체감하게 되기도 한다.

부패한 국가는 어디일까? 의 세계부패현황지도를 보며 여전히.. 라는 아쉬움과

조세피난처는 어디에 있을까? 의 작은 섬들을 보며 이렇게나.. 하는 분노와

조직범죄는 어떻게 돈을 벌까? 의 화살표들이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우주정복에 왜 나설까? 는 정치와 무관하지 않았고

자연재해는 어디서 일어날까? 는 경제와 무관하지 않았고

전쟁은 왜 일어날까? 는 결국 정치과 경제를 포함한 갈등 현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셰일가스는 어디 묻혀 있을까? 에서 개발하고자 하는 나라들과 개발하지 않는 나라들의 입장차이는

여성이 행복한 나라는 어디일까? 라는 나라의 중심가치들과 어쩌면 연결점이 있어 보였고

해협은 왜 전략상 중요할까? 에서 보여주는 해협들은 다시금 패권문제로 돌아오게 했다.

파탄국가는 어디일까? 에서 보여지는 위기의 국가들은

빈민촌은 어디에 있을까? 라는 빈민들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고

종교순례는 왜 갈등을 빚을까? 라는 질문은 앞서 질문되어졌던 갈등과 분쟁의 지역과 곧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남획을 왜 막아야 할까? 나 SNS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킬까? 그리고 세계인구가 많은 걸까? 하는 마지막 질문들은 인류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얼마나 세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다시 상기시켜주고 있는 듯 했다.

질문이 던져지면 세계지도 한장 크게 펼쳐놓고 전체적으로 관망하면서 요약설명을 읽다가 어느새 쓰윽 책 한권을 다 읽고나면 교양프로그램 한편을 보고난 것 같은 기분이다. 무거울 수 있는 주제들이지만 무겁지 않게 카페에서 차한잔 시켜놓고 한담을 나누듯 읽게 되는 이 책을 읽고나서 좀더 자세하고 깊게 알고 싶다면 그것은 독자가 찾아내야 할 몫이다. 이 책은 세계적 이슈를 세계지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 딱 그만큼의 제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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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켄 리우 한국판 오리지널 단편집 1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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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SF 와 판타지를 좋아한다. 테드창 과 류츠신의 작품을 읽으며 중국SF작가들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면서 켄리우의 작품도 궁금해졌다. 화려한 수상경력도 그렇지만, 다양한 지면에 발표된 개별 작품들을 한국에서 엮어낸 단편집이라는 점에도 호기심이 일었다. 무엇보다 표지 속 저 생명체가 시선을 끌었다. 미리 말해놓자면 이 책에 수록된 그 어느 작품과도 표지는 연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신묘한 표지가 더이상 궁금하지 않을만큼 작품마다마다 여운이 길었다.

나는 과학 소설이 미래를 예견하는 일과 연관이 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쪽 분야에서 과학 소설은 이제껏 별 신통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어쩌면 어떤 작가들은 자신이 쓴 소설 속에서 정말로 미래를 예견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은 나의 관심사나 목적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심지어 '도래할지도 모르는 미래'에 관해서도 쓰지 않는다. 내가 쓰는 이야기는 대부분 의도적으로,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도래할 리 없는' 미래에 관한 것들이다. (p. 7)

현대성이라는 말에서는 어딘가 '동떨어진' 느낌이 난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이야기에서 의식의 업로드나 싱귤래리티(Singularity, 특이점), 포스트 휴머니즘 같은 소재를 많이 다룬다. 그러나 핵심만 놓고 보면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같은 질문을 던진다. 지난날의 지혜가 설득력을 잃은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에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p. 8)

작품을 시작하기전 저자의 말이 이토록 인상적이었던적이 있었나 싶다. SF소설이라고 하면 미래소설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지 않았나. 그런데 저자는 SF소설을 쓰면서 다가올 미래에 대해 쓰지 않는다고 오히려 도래할 리 없는 미래에 대해 쓴다고 말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점이 현재이고 현대이므로 현대적이라는 말은 이미 잠시만 지나면 과거적이 된다는 점에서 '현대성'에 대해 의문을 갖던 나로서는 첨단과학이 등장할 수록 인간 본연의 의미(과거에는 굳이 생각지 않아도 자연스러웠던 그 어떤 것)를 찾아봐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질문과 공명을 일으키는 듯 했다.

통념과 달리 서사시는 지금도 현재성을 띠고 엄연히 존재하는 예술형식이다. 예컨대 뮤지컬 [해밀턴]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정의했던 [아이네이스]와 같은 방식으로 오늘날 미국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보여 주는 미국의 서사시이다. (p. 10)

저자는 중국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하여 지금은 미국 보스턴에서 낮에는 법률 컨설턴트로 밤에는 소설을 쓰는 작가로 살고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의 유년시절과 미국에서의 성장이 어떤 조화를 이루었기에 [아이네이스]를 SF판타지소설집 서문에서 언급할 수 있었던건지 궁금하다. 얼마전 [아이네이스]를 읽으며 로마건국서사시로서만 이해했었는데 그렇게 지배자의 용도적 측면에서 받아들였었는데 [아이네이스] 속 과거가 아닌 그 서사시가 편찬된 시절의 로마인들에게 당대를 살아가는 의미를 알려주는 책이라고 하니 잠시 책장을 덮고 생각해보아야 했다. 서사시의 의미란 무엇인가...

당신은 나에게 삶을 줬지만, 그렇다고 내가 당신을 소유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사랑은 중력 같은 게 아니에요. 그냥 늘 존재하는 거라고,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선 안 돼요. 그러니까 나는 계속 그렇게 기다릴 게 아니라, 마땅히 내 손으로 삶을 개척해야 했던 거죠. (p. 53)

나는 선택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삶을 낭비했다. 그래서 기꺼이 내 삶에 플라스티네이션 처리를 했다. 고치 속에 숨은 누에처럼. 세계 곳곳에서 삶이 영원히 이어져지만, 사람들은 전보다 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함께 나이 들지 않았다. 함께 성숙하지도 않았다. 아내와 남편은 결혼식 때 선서를 지키지 않았고, 이제 그들을 갈라놓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권태였다. (p. 59)

나의 차례가 오면 죽음을 맞기로 했다. 한 여자의 삶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누린 채로. 내 인생은 하나의 기다란 호가 될 터였다. 시작과 끝이 있는. (p. 60)

딸은 나와 다른 세상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서지 못했듯이, 나는 영원한 시간을 감당하며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할 운명이었다. 내가 늙어 가다가 죽기로 마음먹은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다시 그리고 또다시 시작해야 하는 운명으로부터. (p. 61)

<< 호 弧 >> 中

인간은 오래전부터 영생을 꿈꾸었다. 누구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하루 살기가 버거운 사람들은 긴 생이 오히려 짐이었다. 하지만 다 가진 사람들, 재물과 권력과 모든 영화를 다 누린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그런 삶을 오래도록 지속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졌다. 하지만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영생의 존재인 스트럴드브럭 처럼 늙어가는 영생은 저주에 가까웠다. 젊음을 유지한 영생 이어야 꿈꿀만 했다. 하지만 이 꿈이 실현되었을때 인간은 정말 행복할까?

젊음을 유지하는 재생시술이 개발된 후 삶과 죽음은 선택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 선택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사랑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원이 아니라 총알같이 날아가는 단 하나의 방향선인 직선이 아니라 처음과 끝은 있되 저마다 휘어짐과 길이가 다를 '호' 는 인생을 나타내는 가장 적절한 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조님들께서 나무배가 물 위를 나아가듯이 별과 별 사이를 거뜬히 날아다니는 방주를 타고 이 별에 도착하셨다는 전설은 내가 어릴 적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p. 72)

"그 요법이 왜 통하는지 설명하느라 당신이 동원한 오행인가 하는 원리는 잘 이해가 안 가요, 어쩌면 그냥 비유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실제로 효과가 있어요. 그러니까 잘 보존해서 나머지 인류에게도 가르쳐 줘야 해요. 유서 깊은 공생 생물들과 더불어 사는 법, 또 더불어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들한테요" (p. 103)

<< 심신오행 >> 中

우주탐사가 자연스러워진 언젠가 인류는 몸속이든 몸밖이든 완전박멸한 상태에서 살고 있었다. 불시착한 행성에서 홀로 살아남은 한 사람이 마지막 에너지를 동원하여 다른 별에 불시착한다. 알려지지 않은 그 별에 인류가 살고 있었고 그들이 사는 방식은 잊혀진 고대의 삶이었다. 하지만 그 고대의 방식은 균이 박멸되고 감정이 박제된 현생인류의 방식보다 가치있어 보였다. 미개와 발달은 어쩌면 관점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난족은 수천년 동안 이 산에서 살았다. 마을에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책들, 즉 몇 세대에 한 번씩 새 삼줄로 새 매듭을 지어 베껴 쓰는 그 책들을 보면 우리 부족의 기원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세상 또한, 보통은, 우리를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둔다. (p. 112)

나로서는 그때껏 산업화 이전 단계의 소수 민족에게서 신약 개발의 아이디어를 수집해 온 나의 전적을 또다시 언급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없는 전설과 미신으로 점철된 이야기보따리 속에는 진짜배기 전문 지식의 알맹이가 드물지 않게 숨어 있었고, 이를 발견하여 개발하면 노다지를 캐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p. 124)

나는 바보였다. 내 딴에는 우리 마을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토무가 제시한 달콤한 조건에는 단서가 주렁주렁 붙어 있었다. 내가 한 일은 결국 먼 곳의 군주가 파놓은 빚 구덩이에 우리 난족을 밀어 낳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군주에게 해마다 공물을 바쳐야 했다. (p. 132)

<< 매듭 묶기 >> 中

과거 전쟁을 피해 산속 깊이 올라 마을을 구성하여 살고 있는 부족이 있었다. 그들의 문자는 매듭이었다. 그들의 책은 매듭묶음으로 만들어졌다. 어느날 그 마을에 서양인 한 사람이 찾아온다. 그는 매듭언어에 관심이 많다. 부족장을 데려가 연구한 끝에 매듭언어와 DNA 관계를 밝혀내어 큰 성공을 거두지만 그가 부족장에게 건넨 것은 수수료가 점점 올라가게 되어있는 볍씨 몇자루 뿐이었다. 고대의 지혜가 첨단의 과학에 의해 어떻게 무너지는지 작은 평화가 외부의 탐욕으로 어떻게 망가지는지 보여주는 판타지는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만약에, 우리가 단지 하루하루 어떤 알고리즘을 따르는 것뿐이라면? 우리 뇌세포가 단지 어떤 신호를 받아서 다른 신호를 찾을 뿐이라면? 우리가 생각이란 것 자체를 안 한다면? 내가 지금 당신한테 들려주는 이야기가 단지 미리 정해진 반응일 뿐이라면, 의식이 개입되지 않은 물리 법칙의 결과라면?" (p. 160)

<< 사랑의 알고리즘 >> 中

첨단 인형을 개발하는 회사가 있었다. 남편은 사장이고 아내는 기술자였다. 점점 사람처럼 반응하는 인형을 만들어가던 아내는 어느날 사람들 사이의 반응 알고리즘을 완벽히 예측하는 수준까지 오르게 된다. 거의 사람처럼 로봇을 만들다가 사람과 구분이 되지 않게 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어져 왔던 것 같다. 영화 '블레이드러너'가 생각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답을 찾진 못한 것 같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런데 이제는 벽에 부딪혔어. 우리는 꿈에 그리던 연산 능력을 모조리 손에 넣었고, 초고밀도 인공 신경망에 필요한 저장 공간도 이미 실용화했어.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어떻게 해야 정신을 만들 수 있는지 우리는 아직 몰라. 그래, 최신형 컴퓨터는 튜링 테스트에서 정체가 드러나기 전에 꼬박 30분을 버텼어. 하지만 내가 보기에 우린 이미 능력의 한계에 부딪혔어. 그래서 장님처럼 더듬더듬 길을 찾고 있지. 우리한테 필요한 건 지도야. 우리가 유일하게 보유한 제대로 작동하는 정신의 플랫폼, 바로 우리 정신 자체의 청사진 말이야.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우리는 두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직도 알지 못해. 우리는 살아 있는 두뇌를 역설계하는 수밖에 없어. 두뇌를 조각조각 분해한 다음, 다시 조립해야 해. 그래야 우리 손으로 정신을 창조하는 방법을 진정으로 깨우칠 수 있어. (p. 187)

<< 카르타고의 장미 - 싱귤래리티3부작 >> 中

육체와 정신은 따로 분리되는 것 같지만 분리할 수 없다. 지금까지는. 육체가 죽는 순간 정신도 죽는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할 수록 이 부분에 의문을 품는 것 같다. 육체를 죽지 않게 유지한다거나 육체는 죽어도 정신만 분리한다거나 하는 방법을 다각도로 연구하는 것 같다. 뇌 지도는 완성되지 않았다. 뇌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죽은 뇌는 뇌의 활동을 보여주지 못한다. 살아있는 뇌를 통해 정신을 연구하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이 살아있는 뇌를 자르는 순간까지 오게 만든다면?

"박사님, 달이 왜 갈수록 점점 커지는 건가요?"

"내 생각엔 달이 지구를 너무 사랑하는 것 같아요. 입맞춤을 하고 싶어서 가까이 다가오는 거죠"

사람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가던 길을 갔다. 대개는 우주공항으로 향하는 사람들이었다. 그곳에서 거대한 눈물방울처럼 생긴 우주선에 올라 외계로 떠나는, 그리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들. (p. 198)

<< 만조 >> 中

달이 점점 더 지구에 가까워지고 지구의 육지는 점점 더 물에 잠겨간다. 지구에 남을 것인가? 지구를 떠날 것인가? 우주선 모양이 거대한 눈물방울 모양이라는 것부터 지구는 이미 눈물투성이였다.

"이제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에버래스팅사가 북극해의 스발바르제도에 거대한 데이터 센터를 짓는 동안, 세계 각국에서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살인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한 소동이 벌어졌다. 업로드된 인간이 한명 생길 때마다 생명을 잃은 육체 한 구가 남기 때문이었다. 파괴적 스캔 과정을 거친 두뇌가 피투성이 곤죽이 된 채로. 하지만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그 인간에게, 그의 본질에게,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이 없어서 굳이 말하자면, 그의 '영혼'에게?

그 사람은 이제 인공지능일까? 아니면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인간일까, 실리콘과 탄소 동소체 그래핀이 신경 세포의 기능을 수행하는? 단지 의식의 하드웨어 업그레이드를 마친 것일 뿐일까? 아니면 그 사람은 단순한 알고리즘이, 자유 의지의 태엽 장치 모사품이 되어 버린 걸까? (p. 206)

오로지 이 세상뿐이다. 우리가 살아갈 운명을 타고난 세상, 우리를 붙들어 놓고 우리에게 존재하라고 요구하는 세상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환상으로 이루어진 상상의 풍경이 아니다. 이메일 속의 엄마는 진짜 엄마의 시뮬라크림이었다. 선전용으로 만든 전자 기록, 염세주의로 유혹하는 초대장. (p. 220)

<< 뒤에 남은 사람들 - 싱귤래리티 3부작 >> 中

육체를 소멸시키고 정신만 살아있을 수 있다면 그 삶 또한 진정한 삶인 것일까? 그러한 삶에서 시간이란 무슨 의미일까? 가족이란? 지구가 점점 더 살기 힘든 환경이 되어가고(그 환경을 만든 주체가 인간이고) 물질로 이루어진 실체적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져갈때 점점 야생화되어가는 땅을 밟고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새 생명이 살아야 할 환경은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이 로봇은 죄책감을 덜어 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너무 멀리 살고 핑곗거리도 너무 많은 이들을 위하여. 어머니 곁의 당신이 본질적으로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기술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p. 239)

<< 곁 >> 中

인간형 로봇이 상용화된다면 어떤 분야에서 가장 먼저 시작될까? 무언가를 만드는 기술을 가진 로봇은 굳이 인간형태일 필요는 없다. 인간을 상대하는 서비스에서 인간형 로봇이 필요할 것이다. 그 서비스는 아마도 돌봄영역에서 가장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곁을 지켜주는 존재가 로봇이 된다는 것은 (비록 그 로봇을 먼곳에서 가족이 조종하고 있다할지라도) 현실적인 가능성이다. 가족은 무엇인가?

우리가 하는 숙제는 유전학과 유전 형질에 관한 프로젝트다. 어제 수업 시간에 바이 박사님이 우리 의식을 여러 개의 구성 알고리즘으로 분해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각각의 알고리즘은 다시 루틴과 서브루틴으로 해체되었고, 결국 우리는 개별 명령어, 즉 근원 코드가 되었다. 그런 다음 바이 박사님은 우리 부모님들이 어떻게 제각각 우리에게 그 알고리즘의 일부를 주었는지 설명하셨다. 우리가 태어나는 과정에서 알고리즘들이 여러 루틴을 재결합하고 재배치한 결과 우리는 완전한 인격, 즉 우주에 새로이 탄생한 어린 의식이 되었다. (p. 247)

엄마는 싱귤래리티 이전의 사람, 고대인이다. 고대인은 온 우주를 통틀어 수십억 명밖에 안 된다. 엄마는 업로드를 하기 전에 육체를 지닌 채 26년간 살았다. (p. 249)

카메라가 보여 주는 이륙 광경 속에서, 우리 아래의 데이터 센터는 스발바르제도에 위치한 하얀 빙원 한복판의 까만 정육면체이다. 이곳은 집이자, 우주에 있는 모든 세계의 하드웨어적 토대이다. (p. 255)

<<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 싱귤래리티 3부작 >> 中

의식의 시대가 되었다. 3000억 명의 의식이 데이터센터에 모여 산다. 사는걸까?... 여하튼 의식들만으로도 새로운 가정이 탄생하고 공간은 무한하고 의식의 범주도 확장되어 간다. 하지만 여하튼 그 모든 것은 지구에 있다. 지구는 점점 살기에 위태로운 환경이 되고 있다. 외계의 별로 우주선을 보내려 한다. 우주선에 실린 의식은 목표된 별에 도착한 후 지구로 돌아오지 못한다. 아직 거기까지의 기술은 없다. 엄마의 의식은 이 우주선에 탑승할 예정이다. 엄마와 잠깐 여행을 하고 왔을 뿐인데 지구의 시간 45년이 흘렀다. 딸이 그 짧고도 긴 여행에서 본 물질세계는 잊지 못할 광경이었다. 의식은 물질을 반영하게 되었다. 직접 본 순록 한마리는 의식 속에서 무리를 만들수 있게 된다. 의식은 꿈을 꿀 수 있게 된다.

"그 아이가 진실로 믿고 받아들이는 날에, 너의 이야기는 비로소 진실이 될거다" (p. 287)

<< 달을 향하여 >> 中

달나라에 사람이 산다는 설정은 전래동화 같지만 판타지다. 중국에서 미국에 이민자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은 달나라에 사람이 살게되는 것 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믿었을때 이야기는 현실이 된다.

"중요한 건 맛의 균형이다. 중국인에게 운명이란 단맛과 신맛, 쓴맛, 매운맛, 짠맛, 마라 맛, 그리고 부드러운 위스키 맛을 한꺼번에 모두 맛보는 거다. 뭐, 사실 중국인은 위스키가 뭔지 모를 테지만, 그래도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너도 알 거다" (p. 340)

백인들은 백인 광부에게서 채굴권을 빼앗아간다는 이유로 중국인 고아부들을 백안시했다. 그 채굴권은 대개 백인들이 포기한 것이었는데도 그러했다. (p. 351)

"여기가 내 집이다. 나는 여기서 마침내 세상의 모든 맛을 찾았다. 그 모든 단맛과 쓴맛, 위스키 맛과 고량주 맛, 거칠고 아름다운 남자들과 여자들, 그들이 지닌 야성의 흥분과 불안, 아직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대지의 평화와 고독...... 한마디로 말해 정신을 고양시키는 짜릿한 맛, 그게 바로 미국의 맛이다" (p. 404)

<< 모든 맛을 한 그릇에 - 군신 관우의 아메리카 정착기 >> 中

이 책에서 가장 긴 작품이면서 중국인의 미국이민사 기록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은 삼국지의 관우 이야기와 함께한 중국인들의 고난극복기이다. 새로운 땅을 먼저 차지한 이들과 뒤이은 자들의 배척과 인간대 인간으로 어우러지게 되는 배려가 함께 하는 것이 결국 인간의 삶인 것인지도...

"나는 되게 오랫동안 우주여행을 했어. 우주선은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 안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단다. 고작 석 달밖에 안 지난 것 같은 느낌이야"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아빠가 전에 다 설명해준 이야기였다. 엄마가 시간을 속이는 방법이 바로 그거라고 했다. 엄마한테 남은 시간인 2년을 길게 늘여서, 내가 자라는 모습을 보려고. (p. 410)

<< 내 어머니의 기억 >> 中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남아있는 생의 2년을 늘이고 늘여서 열살, 열일곱살, 서른여덟살, 여든살 때의 딸의 모습을 보는 엄마. 그렇게 젊은 모습의 엄마와 늙은 모습의 딸은 마지막이 되어서야 더이상 이별하지 않게 된다. 우주과학이 이런 용도로 쓰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AI는 할 수 없는 인간적인 생각인 것은 아닐까...

독자들은 제가 책에 쓴 단어 하나하나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겁니다. 왜냐면 독자 한명 한명이 자기만의 이야기보따리와 자기만의 해석 틀, 자기만의 상처, 자기만의 정서적 공명점을 지닌 채로 책을 펼친 다음, 제가 쓴 글을 읽고 완전히 다른 세상을 쌓아올릴 테니까요. 이로써 완성된 결과물은 사실 절반만 제 것이고, 절반은 독자의 것입니다. (p. 416) <저자의 인터뷰 中>

독자가 이해하거나 말거나 자신만의 생각을 강요하거나 주입하는 작가들보다는 애초에 이렇게 작가의 몫과 독자의 몫을 함께 인정하는 생각이 좋아보였다. 백프로 독자의 몫이라고 하는 것은 무책임하게 떠넘기는 것 같고 독자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은 너무 독선적인것 같고, 작가가 썼으나 독자의 몫도 있다고 하는 말이 훨씬 공감이 갔다.

독자의 몫으로 남겨지는 부분이 많은 소설들이었다. 작품 하나하나 질문이 스토리보다 질문이 남는 책이었다. 그 질문들이 미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철학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소설들이었다. 미래를 예상하는 소설이건 오지 않아야 할 미래를 이야기하는 소설이건 요즘의 SF소설들은 한결같이 묻고 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이냐고, 그런 삶을 만들어가려면 과학은 어떠해야 하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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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를 위한 자연수업 2 - 물방울부터 바다까지 물이 드러내는 신호와 패턴을 읽는 법 산책자를 위한 자연수업 2
트리스탄 굴리 지음, 김지원 옮김 / 이케이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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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부터 바다까지 물이 드러내는 신호와 패턴을 읽는 법

How to Read Water

 

현대에도 탐험가가 직업이 될 수 있구나 라는 것을 저자를 통해 알았다. 자연 네비게이션을 통해 자연에서 얻은 다양한 지식을 탐구하고 저술하는 저자의 삶은 탐험가 라는 단어가 풍기는 느낌에 비해 적어도 이 책에서만큼은 다이나믹하지는 않다. 제목처럼 정말 산책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읽게되는 책이다. 1권의 산책코스는 모르겠으나, 2권의 산책 코스는 물가 이다. 여름용 산책코스로는 제격이랄까.

이 책은 당신이 웅덩이 옆에 서 있든, 수 킬로미터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든, 그 물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물리적 단서와 신호, 패턴에 관한 책이다. (p. 5)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 그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p. 7)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풀꽃도 자세히 보면 예쁘다고 했다. 경치좋은 자연은 보는 것만으로도 멋지지만 알고 보면 더 경이로울 수 있다. 그 자연 속 물가를 탐험가의 눈으로 둘러보는 산책을 시작하는 첫 코스는 부엌이다. ㅎㅎ

아주 사소한 것들이 더 큰 관측 결과와 합쳐지면 우리에게 더 깊은 통찰력을 준다는 사실을 확인해보려고 한다. 예를 들어 어지러운 부엌에서의 실험이 해변 산책과 합쳐지면 동네의 강이 불어 넘칠지 아닐지를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된다. (p. 31)

컵 안의 물 표면이 평평한 것이 아니라 가장자리 쪽이 살짝 위로 올라간 곡선 형태인 '메니스커스' 와 물방울과 물방울 사이의 인력, 장력, 점성 사이의 관계와 물방울이 모이고 모이다 흐르게 되는 과정을 의식적으로 살펴보다 보면 물의 과하적 특성을 새삼스레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흐르는 물을 닦으며 모세관 현상을 생각하면 자연 곳곳에 스며든 물이 퍼져가는 과정을 머릿속에 상상해볼 수도 있다. 이렇듯 부엌에서부터 '우리는 어느 한 지역이 물을 이해하는 것이 다른 곳의 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개념을 배우게 될 수 있다.'(p. 32)

백악(백색 연한 석회암) 지역에 살고 있어서 물이 고이는 대신에 아래로 스며들기 때문에 자연 연못에서 수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p. 33)

백악으로 된 다공성 바위가 불투수성 바위층과 만나는 곳에서 종종 샘이 생기는데, 이런 샘이 하나 발견되었다면 같은 깊이에 더 많은 샘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p. 74)

진흙으로 된 땅에 내리는 비는 몇 시간 안에 그 지역 강물의 수위를 높이지만, 백악에 내리는 비는 몇 달 동안 그 지역의 강에 눈에 띄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진흙 지역의 강물은 아주 온벽히 반짝거리고, 백악 근처의 강은 전혀 반짝거리지 않는다. (p. 83)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중요하게 말하는 부분이 아닌데도 읽는 내게 꽂혀들어오는 단어가 있곤 하다. 그 책을 읽는 당시에 내가 관심있어 하는 분야와 관련있는 단어들이다. 이 책을 읽으며 '백악' 이라는 단어가 나올때마다 반가웠다. 틈날때마다 '일리아스'를 조금씩 읽고 있는 중인데 그리스반도의 대부분을 이루는 '백악'지형에 대한 묘사들이 자주 나와서 이 책을 읽으면서도 '백악'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고대로 잠시 생각이 널을 뛰곤 했다.

다시 원래의 책으로 돌아와서, 저자는 부엌을 나와 집근처의 연못가를 거닐고 있다. 연못에서 볼수 있는 '잔물결' 패턴을 통해 넓고 넓은 태평양의 섬들 사이를 지날 수 있는 해도로 범위를 자연스럽게 확장시킨다. 작은 물방울에서 홍수까지 연못에서 태평양까지 저자의 물가 산책의 범위는 순식간에 그리고 자유롭게 왔다갔다한다. 여하튼, 주변에서 흔하게 보아왔던 작은 신호들을 통해 큰 신호를 짐작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꾸준히 알려준다. 물 자체에서 얻는 신호들도 많지만 물 밖에서 얻을 수 있는 신호들도 많다.

너울의 패턴을 비롯하여 주된 단서 중 하나는 눈에 보이는 새들의 종류다. 새는 종에 따라 육지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려준다. (p. 51)

못생긴 잡초부터 매력적인 야생화에 이르기까지, 키가 작은 모든 식물은 선호하는 습도가 있고, 그래서 땅에 있는 물의 양과 근처에 물이 있을 가능성을 알려준다. (p. 54)

동물의 크기 면에서 거의 끄트머리에 있는 곤충의 서식지에 대해서도 흥미를 느껴볼만 하다. 거미줄에 걸린 곤충을 잠깐 살펴보면, 물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것들과 물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 아주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p. 57)

'물'만 봐도 물은 많은 것을 알려주지만 '물'을 보지 못해도 물을 알수 있게 해주는 것들은 다양했다. '이 모든 기술은 물을 '눈으로 보기 전에 미리 보는 법'을 배우는 재미있는 기술이다. 내 마지막 조언은 여러분이 걸어온 길을 종종 돌아보라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때에 물을 맞닥뜨린다면 이것은 아주 훌륭한 기회다.'(p. 60) 어느 도시로 여행하러 갈때 도시이름에도 물이 들어있는 곳이 있다. 물가를 향해가는 동안 동식물들이 힌트를 주고 있기도 하다. 그동안 알아채지 못했던 이러한 힌트들을 알려주는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저자가 아주 신이나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 유쾌함을 즐기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방법중 하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연못처럼 뭔가 아기자기한 맛이 없는 그냥 어쩌다 생긴 웅덩이도 저자는 '보잘것없지 않은 웅덩이'라며 기꺼이 땅바닥에 엎드려 웅덩이를 관찰한다. 강과 시내를 통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때로는 과학자적인 면모가 물씬 풍기는 내용들에 지루해질법 하면 하루살이가 공룡보다 1억5천만년 전부터 존재했고 지금까지도 번성하고 있다는 얘기같은 흥미거리들을 통해 분위기를 가볍게 환원시켜주곤 해서 부담이 없다.

바다 위에 있는 배에 앉아 있는데, 친구가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해보자. "바다는 무슨 색깔이야?"

당신은 이게 엄청나게 멍청한 질문이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주위를 한번 둘러본 다음 자신만만하게 대답할 것이다. "파란색이지. 아니, 잠깐만... 초록색인가... 회색일지도 모르겠는데"

이쯤 되면 친구는 몸을 기울여 컵을 바닷물에 담갔다가 들어 올려서 앞에 내밀 것이다. 당신은 완벽하게 투명한 액체를 보며 잠깐 내가 왜 이런 놈이랑 친구를 했을까 생각할지도 모른다. (p. 155)

물의 색깔은 오묘하다. 여름을 시원하게 느끼게 해주는 바닷가에서 보면 바다는 푸르디푸른데 사실 바닷물도 물이라 투명한 액체일 뿐이다. 물의 색깔은 빛과의 관계에 의해 정해진다.

맑은 물은 색깔이 없지만, 색깔을 약간 흡수한다. 백색광이 물에 닿으면 일부는 반사되고 일부는 물 분자에 흡수된다. 물에 들어가는 백색광은 무지개의 모든 색깔로 이루어져 있고, 그 색깔들은 똑같이 흡수되지 않는다. 빨강과 주황, 노랑이 파랑보다 물에 더 많이 흡수된다. 그 결과 백색광이 지나가는 물의 양이 많을수록 밖으로 나왔을 때 더 파랗게 보인다. (p. 159)

욕조에서 수영장으로 규모를 더 키우면, 빛이 지나가야 하는 물의 양이 더 많아지고, 더 많은 빨간색부터 노란색까지의 빛이 흡수된다. 수양장 바닥은 하얗지만, 우리가 수영장을 밝은 파란색으로 생각하게 되는 이유다. (p. 160)

바닷물은 그저 파랗구나 했다. 수영장바닥이 무슨 색인지 미처 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 물이 파랗게 보이니까 수영장도 그저 파란색이겠거니 싶었다. 흠.. 파랗게 칠해놓은 수영장도 물론 있겠지만 하얗게 칠해놓은 수영장도 분명 많을 것 같다. 물의 깊이와 파란색의 채도가 갑자기 흥미롭게 다가온다. 빛과 물의 관계는 색뿐만이 아니다.

반사된 상은 당신이 보는 물체와 약간 다른 시점을 보여준다. 반사된 상은 당신이 보고 있는 물체를 당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의 시점이 아니라 물에서의 시점으로 보여준다. 반사된 상은 낮은 다리나 아주 얕은 물에 서 있는 오리의 엉덩이 부분처럼 물속이나 물 근처에 있는 물체의 아래쪽을 더 많이 보여준다. 잔잔한 물 맞은편에 서 있는 나무와 물에 비친 그 상을 보면 같은 나무의 두 가지 서로 다른 시점을 볼 수 있다. (p. 178)

물은 거울이기도 했다. 하지만 물은 거울처럼 그대로 비춰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가의 나무는 제일 위쪽 가지보다 뿌리쪽이 더 물에 크고 선명하게 비춰졌고 물위 다리나 건물은 잔물결속에서 수평은 사라지고 수직 부분만 보였다. 물에 비친 것들을 한두번 본것도 아닌데 물의 성질과 연결지어 보니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신선하게 보인다.

물소리를 들으며 근처의 지형지물을 짐작할 수 있고 파도를 생물처럼 읽으면 파도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해안과 해변에서 볼수 있는 것들, 해류와 조수가 의미하는 것들은 바다에서의 삶의 지혜와 연결되고 특히나 밤에 조명신호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기도 한다.

밤이면 육지가 바다보다 빨리 식기 때문에 사이클이 반대되어 물바람이 불어오고, 공기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바람은 잔잔한 날에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바람이기도 하다. 이것이 찌는 듯이 더운 날에 사람들이 여전히 해안에서 시원함을 찾는 이유 중 하나다. 이것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네스토르와 유리메돈이 몸을 식히기 위해서 해안 바람을 찾아 나오던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까지도 강력한 습관이다. (p. 264)

유럽사람들에게 스며들어 있는 호메로스의 영향력은 참 대단하다. 문학을 읽을 때는 그렇다쳐도 이렇게 과학책을 읽는데도 호메로스가 등장한다. 여하튼, 요즘 내 관심책인 일리아스의 등장은 그저 반가울 따름이다.

우리는 수영하고서 흡습이라는 현상 때문에 몸을 말리는 데 실패한 채 해변을 떠나게 된다. 뜨거운 햇빛에 한참 전에 몸이 완전히 말랐어야 하는데도 늘 축축하고 끈근한 느낌이 남아있다. 흡습성이란 특정한 물질이 물을 끌어당기는 방식을 부르는 이름이다. 염분은 흡습성을 가진 물질이고, 그래서 소금 창고에 종종 쌀을 넣어두거나 소금에서 습기를 제거할 만한 다른 방법을 쓰는 것이다. 또한 그래서 바다에서 수영하고 나면 한동안 계속 축축한 것이다. 햇빛 아래서 아무리 몸을 말려도 우리 몸의 염분이 공기 중의 습기를 우리 피부로 다시 끌어들인다. (p. 311)

제습제의 성분이 염화어쩌구 인것을 알면서도 바닷가에서 해수욕하고 나면 남아있곤 하던 축축함을 왜 연결시키지 못했나 싶어 헛웃음이 났다. 이렇게 일상은 어떤 호기심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저자처럼 사소한 것에서 과학을 끌어내는 사람들을 보면 참 신기해서 감탄하게 된다.

책의 마지막장은 물의 현상들 중에서 '드물고 특별한 것들' 이다. 켈빈파, 쓰나미, 조숙, 무조, 이상파랑, 용오름, 환류, 소용돌이, 수중번개 등 간략하게 용어설명하듯 훑고 지나가는 단어들은 앞서 살펴보았던 것들처럼 일상적이지 않은, 좀 더 섬세한 효과를 보이는 현상들인 만큼 더 많은 얘깃거리가 된다며 저자는 마무리한다. 뭔가 남겨진듯한 기분이 드는 마무리는 다음 산책을 기대하게 된다.

물을 읽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라고 했을 때 어떤 책일지 감이 오지 않았었다. 물에 대한 과학적 특성을 다룬 책일까? 물에서 사는 생존법을 알려주는 책일까? 하지만 딱히 어느쪽이라고 구분지을 필요가 없는 책이었다. 일상을 탐험하듯 일상 속 물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연못이든 호수든 강이든 바다이든 물가를 산책할때 갑자기 아!! 하고 물을 읽는 재미를 알게 해주는 책이었다. 자연을 거대한 과학책이라고 했던가, 물또한 책이 될 수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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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와 함께하는 여름 함께하는 여름
실뱅 테송 지음, 백선희 옮김 / 뮤진트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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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라디오 방송국 <프랑스 앵테르>에서 2017년 여름에 방송된 <호메로스의 함께하는 여름>을 바탕으로 저술되었다. 저자 실뱅 테송은 이 책을 쓰기 위해 키클라데스 제도의 섬에 틀어박혀 에게해 해변과 햇빛, 파도 거품, 바람과 함께 지냈다. 그가 우리에게 제안한다. 하던 일을 멈추고, 당장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펼쳐 들고 바다 앞에서, 방 창문 앞에서, 산꼭대기에서 큰 소리로 몇 구절 읽어볼 것을. (표지 中)

 

신기한 일이다.

라디오에서 2천8백년 전의 서사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은.

더 신기한 일이다.

문화 깊숙이 호메로스가 자리잡은 사회에서 자란것도 아닌 내가 이런 책에 끌리고 이런 책을 쓴 저자의 권유에 마음이 설렌다는 것은.

이건 고대의 기적이다. 2500년 전 에게해의 자갈밭에 던져진(혹은 상륙한) 한 시인이, 몇몇 사상가가, 철학자들이 세상에 내놓은 가르침이 이토록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무뎌지지 않았다니! 그리스인들은 우리가 아직 되지도 않은 상태에 대해 알려준다. (p. 11)

몇 편의 노래로 인간의 윤곽을 그려낸 것. 호메로스 이후로 아무도 다시 하지 못한 일이다. (p. 13)

서양역사와 철학을 읽는동안 호메로스를 수시로 만났다. 고대그리스 비극과 아이네아스까지 읽고 나니 정작 가장 먼저 읽었어야 할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고전을 읽은 듯 하다. 이책저책에서 하도 자주 접해서인지 안 읽었음에도 이미 읽은 듯한 기분이 드는 이 두권을 나는 올여름에 꼭 읽어야할 것 같다. 비록 키클라데스 의 어느 섬에 가지 못하고 에게해는 커녕 동해바다 조차 구경하기 힘들지라도 올여름엔 꼭 이 두 고전을 읽어야 할 것 같다. 이런저런 책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호메로스가 이미 다 풀어냈던 이야기들임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호메로스의 존재를 둘러싼 불가사의에는 두 가지 가설이 있다.

하나는 신들이 정말로 존재해서 그들의 이야기에 영감을 주었다는 것. 신들이 호메로스에게 예지를 불어넣었다는 것. 그렇게 시간의 심연 속에 던져진 이 시는 우리 시대를 만나도록 예정된 전조였다는 가설이다.

또 하나의 가설은 제우스의 태양 아래 다랄진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리하여 이 시들을 관통하는 주제들-전쟁과 명예, 위대함과 달콤함, 두려움과 아름다움, 기억과 죽음-은 영원회귀라는 화로의 연료라는 것이다.

나는 믿는다. 인간의 불변성을. 현대의 사회학자들은 인간이 개선될 수 있으며 진보가 인간을 개선해주고 학문이 인간을 개량한다고 믿는다. 객설이다! 호메로스의 시가 시들지 않는 것은 인간이 옷을 갈아입어도 여전히 동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트로이 평원에서 투구를 쓰고 있건 21세기의 버스 노선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건, 똑같이 가련하거나 위대하며 똑같이 보잘것없거나 숭고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p. 22)

사람은 안 변한다. 내가 자주 쓰는 말이다. 개과천선? 글쎄... 허드렛말로,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라고 했다. 사람은 안 변한다. 2천8년전부터 안 변했고 아마 역사시대 이전의 사람들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변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고대 서사시에서는 더 원초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의 글들이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화려하게 꾸민 나머지 엄청나게 변한 것처럼 여겨지게 할 수 있지만, 사실 사람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기때문에 고전이 고전이 되어 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 오래된 책들을 읽어야 했던 어린 시절이 기억나는가? 중학교1학년 교과 과정에 호메로스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숲속을 쏘다니며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이었다. 그러니 지독히도 지루해하며 교실에서 창밖을 내다보곤 했는데, 그때 하늘에는 전차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짜릿한 현대성을 띤 시, 독창적이기에 영원한 황금시가, 소란과 격노로 들끓는 노래가, 풍성한 교훈과 더없이 가슴 저린 아름다움을 담고 있어 오늘날에도 시인들이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암송하는 노래가 우리 안에서 우러나도록 기다려보는 건 어떨까? (p. 24)

이 신의 노래들, 이 황금시들, 이 열정적인 시를 여러 세대가 누리지 못하게 박탈하는 건 불행한 일이다. 교육부 소속 교육학자들의 노고 덕에 그리스-라틴 인문학이 위축되고 있다. 관념론자들이 학교 개혁을 책임지면서 50년 만에 고대 학문이 죽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죽은 언어를 배우는 건 엘리트주의라는 것이다. (p. 32)

wow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중학교 1학년 교과 과정에 있다니;;; 정작 고전을 배워야 할 나이엔 고전을 배우지 않게 되고... 하지만 어렸을때 고전을 만나는 경험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라도 만나봐야 어른이 되었을때 떠올릴 수 있다. 그렇게 생각나서 찾게 될 수 있다. 청소년기에 고전을 배우는 것도 좋지만 나는 대학필수교양과정에 고전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할 여유가 있고 삶에 대한 고민이 있을때 고전은 새롭게 다가온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처럼 풍성한 결과를 낳은 작품은 많지 않다 - 종교적 계시가 담긴 위대한 텍스트들은 별도로 치고, 이런 해설 활동은 경이로운 놀이인 셈이다.

시에 빠져들어 이따금 성경의 시편을 암송하듯 그 시들을 암송해보자. 누구라도 거기서 자기 시대의 그림자를, 자신의 번민에 대한 답을, 자신의 경험에 대한 예시를 발견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거기서 교훈을 끌어낼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위안을 찾을 것이다. (p. 34)

나도 고전에 맛을 알게 된지 얼마되지 않았다. 그래서 진작 알았다면 좋았을껄 아쉬웠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서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고전이 가슴으로 읽히는 때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고전을 읽게되어 감사할 따름이다.

빛과 파도 거품, 바람의 젖을 먹고 자란 늙은 젖먹이, 맹인 예술가의 영감을 이해하려면 그곳의 작은 섬에 머물러 봐야 한다. 장소의 정기가 인간을 기른다. 나는 우리 영혼에 지리의 링거가 꽂혀 있다고 믿는다. 나는 그렇게 그 초소에 머물러 보고서야 <오디세우스> 와 <일리아스> 의 물질적 본질에 다가설 수 있었다.

모든 공간은 저마다의 문장을 갖고 있다. 그리스의 공간은 바람이 때리고, 빛이 관통하며, 의미심장한 발현들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모습이다. 오디세우스는 고통의 배를 타고 그런 신호들을 받았다. 프리아모스와 아가멤논의 병사들은 트로이 평원에서 그 신호들을 자각했다. 지리 地理 속에 산다는 것은 독자의 육신과 텍스트의 추상 사이의 거리를 넘어서는 일이다. (p. 40)

인간의 삶은 환경적 조건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그 들이 쓰여진 그 곳에 가야 글 속에 스며든 그 바람과 파도와 햇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직접 슝~ 날아가 에게해 섬에서 호메로스를 읽었던 저자가 부럽다. 하지만 장소의 현장감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한글로 이 위대한 고전을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숲출판사 천병희 선생님의 그리스로마 고전 책들이 있어 정말 감사하다. 이 책들이 있어 고전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영역 일역의 중역이 아닌 그리스어 라틴어 원전 번역서들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정말 정말 감사하고 감사한 일이다.

섬들은 소통하지 않는다. 이것이 호메로스의 가르침이다. 다양성은 저마다 개별성을 지키도록 요구한다. 다양성이 존속하길 바란다면 거리를 유지하라! (p. 57)

태양 아래 드러나는 현실 속에서 인간의 길을 열정적으로 걷지 않고 왜 내세를 희망한단 말인가? (p. 59)

현시대에 던지는 호메로스의 전언은 이렇다. 문명은 모조리 잃을 것이고, 야만은 모조리 얻을 것이다. 매일 아침 독서를 하며 호메로스를 기억할 것 (p. 79)

어떤 사람들은 경이로움을 알아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한다. 호메로스는 우리가 운명 앞에서 평등하지 않음을 알려준다. (p. 147)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신화의 세계에서는 계급이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왕자와 거지는 똑같은 범용과 똑같은 덕성을 보일 수 있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인간애를 타고난 피조물이 아니며, 하인이라고 반드시 순진함을 전유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영주라고 해서 반드시 영혼의 품격을 갖춘 것도 아니다. 호메로스의 세계는 본질주의적이지 않다. 그 세계는 현실을 닮아서 횡으로 열려 있다. (p. 151)

이 작은 책을 읽으며 이렇게 내가 밑줄치고 싶은 문장을 많이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저 가볍게 그리스고전에 대한 감상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으로 읽었던 책이 이렇게 다시 고전에의 열망을 갖게 할 줄은 몰랐다. 고대시대 사람들에게 들려졌던 이야기들이 현대의 나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그것도 아주 매력적으로.

우리는 천 년 후에도 호메로스를 읽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이 시에서 21세기 초의 세계를 뒤흔드는 변화들을 이해하게 해줄 지혜를 발견할 것이다. 아킬레우스, 핵토르, 오디세우스가 하는 말이 복잡성의 안개 속에 무지를 감추는 데 탁월한 기술자인 전문가들의 분석보다 더 많은 걸 밝혀준다. 호메로스는 그저 영혼의 불변요소들을 발굴해낼 뿐이다.

투구와 갑옷을 바꿔보라. 말을 탱크로, 범선을 잠수함으로 대체해보라. 도시의 성벽을 유리 타워로 바꿔보라. 나머지는 유사하다. 사랑과 증오, 권력과 복종,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 주장과 망각, 유혹과 굳건함, 호기심과 용기, 지구상에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신들은 다른 얼굴들을 취했고, 사람들은 더 무장했으며, 인구가 늘어나서 지구는 작아졌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 내면의 이타케를 하나씩 품고 있다. 그곳을 되찾기를, 때로는 그곳으로 되돌아가기를 꿈꾸지만, 대개는 그것을 지킬 수 있기를 꿈꾼다. (p. 167)

십년간의 트로이 전쟁, 십년간의 귀향길...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오디세우스의 이타케를 향한 여정을 보며 인간삶의 희노애락을 고전의 문장들로 확인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흥미롭다. 그리고 여전히 사는게 거기서거기다 라고 느껴지는 그 감정이 때로는 좌절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평온함과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고전에서 강조하는 절제를 우리는 지금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곤 한다.

<일리아스> 는 전쟁의 시이기 때문에 시사성이 있다. 2500년이 흘렀어도 피의 갈증은 여전히 펄떡이고 있다. 무기만 변했을 뿐이다. 진보란 인간이 자신의 파괴력을 키우는 능력이다. (p. 291)

얼마나 영혼이 지치고 심장이 메말라야 우리 눈앞에 생생하고 화려하게 펼쳐진 경이를 두고도 불확실한 낙원을 희망하게 될까? (p. 337)

고전을 읽는다고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질문만 가득 떠안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질문들이 중요하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삶의 근본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이 질문들을 기억해내는 경험은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마음에 드는 책이었는데 표지가 너무 아쉬었다. 사마귀라니;; 왜 하필;; 사마귀 표지만 아니었다면 두고두고 쓰다듬었을 책인데;;;) 여하튼, 올여름엔 꼭 <일리아스> 와 <오디세이아> 을 읽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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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 - 메이지 이후의 일본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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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유신의 그늘'이라고 한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의 제목으로 다시 한번 '유신의 그늘'을 사용하고 있다.

지금이 2020년인데 저자는 왜 '유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걸까? 과거 어떤 사건에 엮인 제한된 그리고 이미 끝난 단어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유신' 이 무슨 뜻이지? 새삼 생각해보니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랐다;;; 검색해봤다. 좀 이상하게도 '유신'의 다섯번째 뜻은 한번 검색으로 나오지 않았다.

유신 維新 -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함

이 책은 일본에 대한 책이므로 여기서의 '유신'은 1868년 메이지유신 의 그 '유신'을 뜻한다. 막부가 통치하던 시대에서 천황이 통치하는 시대로 전환된 일본의 복고는 율령국가 체제로의 복귀선언이었다고 한다.

현대 일본의 정당 가운데 하나인 '유신의 당' 의 영어 표기가 'Japan Innovation Party' 라는 사실에서 눈치챌 수 있듯, 복고란 동시에 혁신(쇄신)이기도 하다. '과거로 돌아가 새로운 것을 취한다' 복고인 동시에 혁신이라는 이율배반적 통합이야말로 유신의 숨은 뜻이라고 하겠다. 유신은 전통을 취사선택하여 내셔널리즘을 만들어내고 과학기술의 끊임없는 진화를 통해 생산력을 증진시킨 서구의 선진국을 좇던 아시아 변방의 국가가 근대화를 위해 취한 방식이었다. 일본은 전통과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며 부국강병에 매진하는 과제에 도전했다. 그 결과 사회와 국민은 약해졌을지언정 국가는 강력해 졌고, 비서구 세계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국민이 지금도 메이지 유신을 긍정하며 이를 자신의 근대적 뿌리이자 '영광 가득한 출발'로 간주하고 있다. (p. 7)

메이지유신 하면 일본의 근대화 라고 등식처럼 역사시간에 외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저자의 글을 읽다보니 과연 그러한가? 라는 의문이 든다. 그렇게 이룬 근대화로 일본이 한 일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점점 더 국가는 강해졌고 점점 더 국민은 보이지 않았다. 막부에 종속되어 사는 것과 국가에 종속되어 사는 것이 과연 달라진것일까? 어차피 시민은 없어 보이는데...

메이지 국가를 영광의 시대로 칭송하며 아름다운 일본을 만들겠다고 말하는 귀태(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의 아이와, 그를 중심으로 하는 통치 시스템은 지금도 '약한 사회 위에 우뚝 솟은 국가주의' 의 생리를 버리지 못했다. 그 결과 일본 전국에서 균열과 비틀림이 계속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여러 한계를 극복하며 착실하게 시민과 사회운동의 힘을 키웠다. 규범과 정의라는 관념이 사회적 결속을 강화했고, '강한 국가'를 견제할 수 있는 '강한 사회'를 갖는 데 성공했다. 끊임없이 민주화를 통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국가를 감시하는 능력을 길러온 역사의 성과일 것이다. (p. 9)

한국이 '강한 사회' 문화를 형성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자가 알려주는 일본 사회에 비하면 국가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의 한국 시민들은 국가에 쓴소리 험한소리 하는 것을 어렵지 않아 한다. 다양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어떤 피해를 당해도 감내하고 어떤 사건에도 시민혁명을 일으키지 않는 일본사회 와는 많이 다른 것 같긴 하다.

정부는 메이지 150년 세리머니를 통해 네이션의 선성과 애국심을 고취하려 한다. 네이션의 선성-국민의 정부가 어떤 죄를 저지르더라도, 때로 시민이 그 죄에 어떤 방식으로 가담한다 하더라도 네이션은 궁극적으로 선하다는 신념-을 보증하는 것은 이미 죽은 사람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갖고 있는 '단일한 색의 순수성'이다. 양쪽이 지닌 시대적 사회성을 다 벗겨내고 오직 일본인이라는 속성만 살아남았을 때 생기는 순수성 안에서만 네이션은 선하며 무구하다. 앤더슨의 반어적 표현을 빌리자면, '과거완료=과거의 완성된' 일본인이라는 네이션과 '미래완료=미래에 완성될' 일본인 이라는 네이션이 현재에서 만나, 다시 말하면 죽은 자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의 유령적 결합이 네이션의 선성을 보증한다. (p. 16)

일본 국가주의에 대해 이미 과거에 완성된 듯한 일본인 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일본 내부 사정에 대해 처음 알게 되는 것들이 참 많았다. 일본 사회는 정말 의아한 점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좀... 답답할 지경이었다. 이 답답함을 뻥 뚫어주는 존재가 있었는데 근대 일본의 대표작가인 '나쓰메 소세키' 였다. 저자가 종종 인용하는 소세키의 글은 시원스러웠다.

100년 전, 메이지를 대표하는 문호 나쓰메 소세키는 [단편]을 통해 메이지 익찬(힘을 보탠다는 뜻으로 일본 천황을 돕는다는 뜻으로 쓰였다)의 물결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과거로 눈을 돌리는 이유는 (1)앞날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며 (2)내리막 길에 있기 때문이며 (3)이상이 과거에 있기 때문이며 (4)훌륭한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이지39년에는 과거가 없다. 과거가 없을 뿐 아니라 현재도 없으며, 그저 미래만 있다. 청년은 이를 알아야 한다. (p. 17)

100년전에는 나쓰메 소세키 같은 사회에 직언을 던지는 지식인이 있었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은 이런 지식인조차 없어졌다고 한다. 미래로 발전한 것인가 과거로 가서 머물고 있는 것인가...

이 책은 기행문까지는 아니지만 지금의 일본 사회 문제를 직면하게 해줄 장소들을 찾아가 그곳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사색을 한 저자의 기록이자 연재됐던 글의 모음이다. 그리고 저자는 "나는 버려진 자들의 상속인이다"라고 말한다. 재일한국인2세로 도쿄대학 교수인 저자는 일본인과 한국인 그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자신의 위치로 인해 더욱 남다른 사색의 깊이를 보여준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서재와 연구실에서 이루어진 학술 연구라기보다는 현장 연구와 저널리즘의 결과를 이론으로 가공한 것이다. 다시말해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서자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서자로 칭한 이유는 적자적 정통성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데에 이 책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 22)

일본에서 나고자라 일본인에 가까워보이는 저자는 재일한국인2세라서인지 역사인식에서만큼은 중립적인 판단을 가지려 노력하며 산 것 같다. 일본사회가 드러내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며 보다 나아진 일본이 되기를 바라는 동시에 일본에서의 왜곡된 한국역사를 바르게 말하고 싶어하는 모습이 양국 모두에 대한 안타까운 애정이 전해져오는 듯 했다. 그래서 출발장소를 군함도로 선택한 것이 더 의미있어 보였다.

군함도도 후쿠시마 원전도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을 위한 에너지 시설이 아니었다. 저자는 " '에너지가 곧 국가다' 라는 국책이 걸어온 길에는 수많은 사람기둥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p. 38) 는 것을 알아야 함을 강조한다.

왜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나라라는 일본에서 아동7명 중의 1명이 빈곤에 처해 있는 것일까. 그 배경에는 빈곤을 낳는 풍요가 자리잡고 있다. 풍요는 어린이와 한부모가정 같은 사회의 가장 약한 부분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풍요는 극단적인 부의 쏠림을 초래하며 거대한 격차를 낳는다. 여기에서는 오직 부로서만 부를 재생산할 수 있다. 소득 상위 10퍼센트의 국민이 전체 부의 40퍼센트를 가진 격차 사회이자 불평등 사회, 이것이 오늘의 일본이다. (p. 41)

1874년 제정된 오늘날의 생활보호법에 해당하는 환난구휼의 규칙에서는 빈민, 즉 하층민은 놀고먹는 사람, 무위도식자로 간주해 엄격한 제한구제주의가 적용되었다. 남구(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사람까지 보호하는 일)는 저소득층을 지원에 의존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게으른 사람이 늘어날 것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약자를 잘라내고 사회보장을 제한적으로-그 결과 효율적으로-운용해야 한다는 은혜주의적 사고(복지가 사회 구성원의 권리나 국가의 의무가 아니라, 마음이 따뜻한 윗사람의 은혜라는 사고방식)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복지 정책의 구실로 이어지고 있다. (p. 46)

빈부격차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일본사회만의 문제도 아니지만, 일본 복지에 깔린 사고방식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있는 나라인줄 알았더니 그 혜택을 받는 대상 선정에서의 문제가 무시할 수 없어 보였다. 양극화 문제는 대학의 우열을 가리는 것에서도 심각해보였다.

오늘날 대학을 둘러싼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대학의 우열을 구분해놓은 'G'와 'L' 이 바로 그것이다. G는 글로벌, L은 로컬을 가리킨다. G에 속하는 대학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 있으며 L에 속하는 대학은 피라미드의 바닥에 위치한다. G대학이 국제화와 조직 개혁을 통해 교육과 연구 분야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갖춘 소수의 엘리트 대학이라면, L대학은 지역 경제권에서 즉시 활용할 수 있는 인재 배출을 목표로 삼는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대학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학문과 교육은 G에서만 받을 수 있으며, L은 이름만 대학일 뿐 실제로는 직업 훈련소 역할을 한다. (p. 53)

우리나라의 대학서열화 문제도 심각하다. 그런데 일본처럼 아예 대놓고 G 와 L 로 구분해 놓는다면 교육현장이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심란하다. 일본에서는 어떻게 저렇게 대학 우열을 구분해 놓는 것이 가능했을까...

저자는 지금의 일본 대학이 사회에 필요한 가치를 창조하는 터전이 되지 못하여 '가치의 공동화 空洞化' 가 진행되고 있다며 걱정한다. 그런데 그 빈 구멍을 메우려 국가는 더욱 통제와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정치를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 한다면, 사회의 희소 자원, 재정, 서비스 등을 어디에 투여할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정치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일본의 방위비는 해마다 치솟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생긴 오염수조차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2020년 도쿄올림픽을 개최한다고 한다. 제한된 가치가 제대로 배분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잘못된 정치는 지역과 시민의 활력을 갉아먹고 지역의 힘을 감퇴시킬 것이다. 대지진을 비롯한 천재지변은 가치의 권위적 배분에 관련된 일본 정치의 존재 방식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p. 82)

우리나라처럼 분단국가도 아니면서 미국처럼 해외파병을 수시로 해대는 국가도 아니면서 방위비를 자꾸 올리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저자가 찾아다니는 곳들은 잘못된 정치로 인해 피해를 입은 지역들이었다. 저자는 이 현실들을 좀 직시하라고 정치권에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충고를 하고 있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중에 경세제민 이라는 개념이 있다. 중국 고전에 등장하는 이 말은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고난에서 구제한다' 라는 뜻이다. 그 줄임말이 바로 경제 이다. 이 말은 영어 economy 의 번역어인 경제보다 넓은 의미를 담고 있다. 요샛말로 바꾸면 나라를 통치하는 동시에 곤궁에 빠진 국민을 구하여, 가난한 사람과 이재민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리라. (p. 99)

법안을 의결할 때, 당의 방침에 따라서만 투표한다면 의원은 자리를 지킬 수 있다. 당의 대표가 부르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는 정치가에게 경세제민의 기개를 기대할 수 없다. (p.100)

그렇지.. 경제가 이런 뜻이긴 했다.. 하지만 이 경제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긴 하다... 정치인도 뭐... 다만 모든 당원들이 당대표에게 예스를 남발하는 예스맨이 아니라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게다가 세습에 준하는 정치가문의 세습은 우리네와 많이 달랐다. 그래서인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그런 가문의 정치가를 선거에서 뽑아주는 걸까... 정치가문 뿐만 아니라 정치가를 배출하는 학원도 있고... 흠... 이러나저러나 "산전수전을 거치며 당원에서 지도부로 올라서는 그림은 아예 불가능해졌다"(p. 111) 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그나마 시민사회에서 정치가가 배출될 수 있는 우리사회가 더 나은건가 싶기도 하고... 뭐... 비교하자고 읽은 책은 아니지만... 읽는 내내 비교가 안 될수는 없었다;;;

지금 정부는 지방 창생에 역행할 뿐만 아니라 균형 있는 국토 발전이라는 국가의 의무마저 방기해버렸다. (p. 122)

피해가 확인되고 12년이 지나서야 아세트알데히드 제조 설비의 가동이 중지되고 수은 유출이 멈추었다. 또 40년이 지나서야 환자 단체와 화해 협정에 조인했다. (p. 135)

사람 목숨이 가장 가볍게, 함부로 다뤄지는 순간은 바로 전쟁이다. 메이지 시대 이후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1차세계대전, 시베리아 출병,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이 이어지는 70을 보냈다.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전쟁의 시대를 반성하며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차별을 철폐하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인간이 인간을 살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야 한다. (p. 137)

지방과 중앙도시의 균형발전은 참 어려운 문제긴 하다. 미나마타병이 발생한 지역은 소외된 지방이었다. 미나마타병의 처리과정은 정말 이럴수있나 싶게 너무 안타까웠다. 피해자들의 구제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도 그 질병을 안고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아파하고 있는데...

일본의 전쟁사가 70년이나 됐다는게 새롭게 다가왔다. 긴 전쟁의 상흔은 인식에 깊게 새겨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지배자들의 머릿속엔 상흔이 아닌 재도전의 욕구를 새겨놓았을지도...

애국심과 내셔널리즘에는 커다란 결함이 있다. 그것은 통치 시스템으로서 국가가 휘두르는 폭력을 반성하지 않는다. 어떤 미사여구를 사용한들 국가의 통치에는 폭력이 따르기 마련이다. 국가란 "정당한 물리적 폭력 행사의 독점을 (실효적으로) 요구하는 인간 공동체"(막스 베버)이기 때문이다. 패젼 이후 '평화국가'를 주창하며 민주국가로 다시 태어나려 한 일본에서도 폭력은 필수 도구였다. 그럼에도 국가가 휘두르는 폭력이 잘 보이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p. 170)

폭력의 대표적 상징은 '군대' 다. 일본에서 국가의 폭력을 드러내는 군대가 보이지 않는 까닭은 군대가 일본의 가장 변방 오키나와 에 거의 주둔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오키나와에 폭력을 집적시키고 격리한 이유는 군사 전략이나 억지력 때문이 아니다. 이는 오키나와가 일본이지만 일본이 아니라서가 아닐까?"(p. 173) 라는 저자의 의문아닌 의문은 일본 본토인들이 오키나와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알고나면, 그 차별성을 알고 나면 안타깝지만 수긍하게 된다. 그리고 차별엔 늘 화가 난다. 일본내에서의 다양한 차별 문제는 이 책의 마지막 대상인 '자이니치' 로 연결된다.

2000년대가 되면서 재일 외국인 중 중국 국적자의 수가 재일 한국인·조선인을 웃돌게 되었다. 재일 외국인의 국적이 다양해지면서 자이니치가 재일 한국인·조선인을 가리키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다. 2016년 [출입국 관리 및 난민 인정법] 개정 이후, 재류 자격이 28종으로 늘어났다. 2016년 당시 재류 자격을 가진 전체 외국인 240만명 가운데 재일 한국인·조선인은 4분의 1에 불과했다. (p. 196)

'혐한' 시위대를 뉴스에서 자주 봤다. 혐한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일본 정치인들도 자주 봤다. 그런데 과거에 비해 일본체류 외국인중 한국인의 비중은 많이 줄어들었다. 원래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가리키던 자이니치 라는 단어는 그 의미가 무색하게 재일한국인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어왔다. 하지만 이제 자이니치 본래의 단어로 써야할 만큼 재일한국인의 비중은 전과 같지 않음에도 그 사용현실은 달라지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혐한분위기를 보면 그저 한국이 마냥 만만한 자기네들 밥인가 싶기도 하다. 내부문제에서 관심을 돌리기 위한 희생양으로 한국만한 상대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 거의 습관이 된 듯...

지리적 변경이 아니더라도 사회적·문화적·심리적 변경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들을 나는 왜 따라갔을까.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변경을 체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의 후손으로 태어나 일본에서, 그것도 일본 본토에서 산다는 것은 변경을 몸에 두르고 사는 삶을 뜻한다. 동시에 고도성장 시대의 적자라고 할 수 있는 내게 삶은 변경에서 이탈하여 볕이 잘 드는 중앙으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빛을 구하려 한 결과, 나는 언제부터인가 변경적인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p. 203)

그러나 볕이 드는 곳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드리우기 마련이다. 메이지 국가의 반짝이는 미래에서 가장 먼저 어둠을 찾아낸 사람이 나쓰메 소세키다. "일본국 전체 어디를 둘러보아도 반짝이는 단면은 1촌4방도 없지 않느냐. 모조리 암흑뿐이다." [그후]의 주인공의 염세적인 독백에 소세키의 심정이 잘 묻어 있다. (p. 204)

나는 변경을 몸에 두른 자들의 상속인이다. 내 앞에 놓인 지리적 국경이, 사회적·문화적·심리적 국경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이번 여행은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이들을 만나는 기쁨으로 가득했다. 일본은 그런 이들을 끊임없이 배출했다. 바로 여기에 이 나라의 희망이 깃들어 있다. (p. 206)

저자가 알려주는 일본 곳곳에 산재한 문제들은 일본의 그늘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늘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빛을 찾아내고 있었다. 나는 그저 제삼자로서 일본의 현실을 좀더 알 수 있었고 다른 나라의 내부사정을 알게 될때마다 그나마 우리나라가 살기 좋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끼며 감사할뿐 그네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저자는 일본에 살고 있는 현지인이다. 그의 체감은 나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저자가 찾아낸 희망이 정말 희망의 빛이 되기를 바랄뿐....

국가주의의 융기와 감각적 충동의 해방, 국권과 민권의 분열, 국가와 자본의 유착, 도쿄로 쏠린 부와 재화, 피폐해진 지방, 미국에 대한 추종과 그 밖의 다른 나라에 대한 무시... 그 모든 문제는 메이지 국가가 완성될 때 이미 배태되었다. (p. 213)

이 상황을 바로잡는 것은 정치가의 몫이다. 전후 민주주의는 '평화국가'의 기치를 내걸고 개인의 인권과 함께 인간다운 '문화생활'을 보장하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일본은 마치 국가를 위하여 국민이 존재하는 것처럼 도착된 상태였다. 국민 없는 국가주의만 팽창했다. (p. 214)

메이지 초기에는 다카시마 탄광의 갱부를 억압하는 궁핍과 아시오 광독 사건의 참상을 폭로한 지식인이 있었다. 전후에도 공해 반대 운동, 시민운동, 평화운동, 차별철폐 운동 등에 투신한 지식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 힘이 화혼을 꺾을 만큼 강하지 않았다. 그러던 찰나에 국민 없는 국가주의가 대두하면서 지식인의 사회적 응집력이 증발해 버렸다. 이제 '지식인의 종언'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렇다면 유사인텔리에 착목해야 하지 않을까? '유사'는 '사이비'라는 뜻이 아니다. 근대적 의미에서는 지식인이 아니지만, 그 아종이라할 만한 지식인을 가리킨다. 이 책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은 사회적 곤경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올린 유사인텔리이다. 그들의 유산이 현대로 계승된다면 메이지의 그늘에 갇혀 국가를 올려다보기만 하던 순종성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국가라는 돔을 바깥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과거아 아니라 미래에서 희망을 구해야 한다. (p. 219)

노벨상도 많이 타고 이런저런 학문분야에서 세계적 업적을 거둔 일본사회에서 지식인이 증발했다는 저자의 표현은 일본사회를 지배하는 슈퍼엘리트들이 지식인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회에 올바른 목소리를 내야할 지식인들이 특권층이 되어 자신들의 이익만 따지는 사회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다만 어떻게 바꾸느냐, 바꿀수 있긴 하느냐가 문제라면 문제랄까...

이 책이 알려주는 일본사회의 문제는 우리사회의 문제또한 그대로 상기시켜주는 것도 있었기에 남의일인양 무시할 수만은 없는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그정도까지 곪아가기 전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게 해주는 내용들이었기에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비하면 우리사회가 훨씬 희망적이긴 한 것 같다. 이 희망의 빛들이 점점 더 우리사회를 밝게 비춰줄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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