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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 - 메이지 이후의 일본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0년 6월
평점 :
이 책의 원제는 '유신의 그늘'이라고 한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의 제목으로 다시 한번 '유신의 그늘'을 사용하고 있다.
지금이 2020년인데 저자는 왜 '유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걸까? 과거 어떤 사건에 엮인 제한된 그리고 이미 끝난 단어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유신' 이 무슨 뜻이지? 새삼 생각해보니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랐다;;; 검색해봤다. 좀 이상하게도 '유신'의 다섯번째 뜻은 한번 검색으로 나오지 않았다.
유신 維新 -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함
이 책은 일본에 대한 책이므로 여기서의 '유신'은 1868년 메이지유신 의 그 '유신'을 뜻한다. 막부가 통치하던 시대에서 천황이 통치하는 시대로 전환된 일본의 복고는 율령국가 체제로의 복귀선언이었다고 한다.
현대 일본의 정당 가운데 하나인 '유신의 당' 의 영어 표기가 'Japan Innovation Party' 라는 사실에서 눈치챌 수 있듯, 복고란 동시에 혁신(쇄신)이기도 하다. '과거로 돌아가 새로운 것을 취한다' 복고인 동시에 혁신이라는 이율배반적 통합이야말로 유신의 숨은 뜻이라고 하겠다. 유신은 전통을 취사선택하여 내셔널리즘을 만들어내고 과학기술의 끊임없는 진화를 통해 생산력을 증진시킨 서구의 선진국을 좇던 아시아 변방의 국가가 근대화를 위해 취한 방식이었다. 일본은 전통과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며 부국강병에 매진하는 과제에 도전했다. 그 결과 사회와 국민은 약해졌을지언정 국가는 강력해 졌고, 비서구 세계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국민이 지금도 메이지 유신을 긍정하며 이를 자신의 근대적 뿌리이자 '영광 가득한 출발'로 간주하고 있다. (p. 7)
메이지유신 하면 일본의 근대화 라고 등식처럼 역사시간에 외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저자의 글을 읽다보니 과연 그러한가? 라는 의문이 든다. 그렇게 이룬 근대화로 일본이 한 일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점점 더 국가는 강해졌고 점점 더 국민은 보이지 않았다. 막부에 종속되어 사는 것과 국가에 종속되어 사는 것이 과연 달라진것일까? 어차피 시민은 없어 보이는데...
메이지 국가를 영광의 시대로 칭송하며 아름다운 일본을 만들겠다고 말하는 귀태(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의 아이와, 그를 중심으로 하는 통치 시스템은 지금도 '약한 사회 위에 우뚝 솟은 국가주의' 의 생리를 버리지 못했다. 그 결과 일본 전국에서 균열과 비틀림이 계속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여러 한계를 극복하며 착실하게 시민과 사회운동의 힘을 키웠다. 규범과 정의라는 관념이 사회적 결속을 강화했고, '강한 국가'를 견제할 수 있는 '강한 사회'를 갖는 데 성공했다. 끊임없이 민주화를 통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국가를 감시하는 능력을 길러온 역사의 성과일 것이다. (p. 9)
한국이 '강한 사회' 문화를 형성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자가 알려주는 일본 사회에 비하면 국가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의 한국 시민들은 국가에 쓴소리 험한소리 하는 것을 어렵지 않아 한다. 다양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어떤 피해를 당해도 감내하고 어떤 사건에도 시민혁명을 일으키지 않는 일본사회 와는 많이 다른 것 같긴 하다.
정부는 메이지 150년 세리머니를 통해 네이션의 선성과 애국심을 고취하려 한다. 네이션의 선성-국민의 정부가 어떤 죄를 저지르더라도, 때로 시민이 그 죄에 어떤 방식으로 가담한다 하더라도 네이션은 궁극적으로 선하다는 신념-을 보증하는 것은 이미 죽은 사람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갖고 있는 '단일한 색의 순수성'이다. 양쪽이 지닌 시대적 사회성을 다 벗겨내고 오직 일본인이라는 속성만 살아남았을 때 생기는 순수성 안에서만 네이션은 선하며 무구하다. 앤더슨의 반어적 표현을 빌리자면, '과거완료=과거의 완성된' 일본인이라는 네이션과 '미래완료=미래에 완성될' 일본인 이라는 네이션이 현재에서 만나, 다시 말하면 죽은 자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의 유령적 결합이 네이션의 선성을 보증한다. (p. 16)
일본 국가주의에 대해 이미 과거에 완성된 듯한 일본인 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일본 내부 사정에 대해 처음 알게 되는 것들이 참 많았다. 일본 사회는 정말 의아한 점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좀... 답답할 지경이었다. 이 답답함을 뻥 뚫어주는 존재가 있었는데 근대 일본의 대표작가인 '나쓰메 소세키' 였다. 저자가 종종 인용하는 소세키의 글은 시원스러웠다.
100년 전, 메이지를 대표하는 문호 나쓰메 소세키는 [단편]을 통해 메이지 익찬(힘을 보탠다는 뜻으로 일본 천황을 돕는다는 뜻으로 쓰였다)의 물결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과거로 눈을 돌리는 이유는 (1)앞날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며 (2)내리막 길에 있기 때문이며 (3)이상이 과거에 있기 때문이며 (4)훌륭한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이지39년에는 과거가 없다. 과거가 없을 뿐 아니라 현재도 없으며, 그저 미래만 있다. 청년은 이를 알아야 한다. (p. 17)
100년전에는 나쓰메 소세키 같은 사회에 직언을 던지는 지식인이 있었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은 이런 지식인조차 없어졌다고 한다. 미래로 발전한 것인가 과거로 가서 머물고 있는 것인가...
이 책은 기행문까지는 아니지만 지금의 일본 사회 문제를 직면하게 해줄 장소들을 찾아가 그곳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사색을 한 저자의 기록이자 연재됐던 글의 모음이다. 그리고 저자는 "나는 버려진 자들의 상속인이다"라고 말한다. 재일한국인2세로 도쿄대학 교수인 저자는 일본인과 한국인 그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자신의 위치로 인해 더욱 남다른 사색의 깊이를 보여준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서재와 연구실에서 이루어진 학술 연구라기보다는 현장 연구와 저널리즘의 결과를 이론으로 가공한 것이다. 다시말해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서자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서자로 칭한 이유는 적자적 정통성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데에 이 책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 22)
일본에서 나고자라 일본인에 가까워보이는 저자는 재일한국인2세라서인지 역사인식에서만큼은 중립적인 판단을 가지려 노력하며 산 것 같다. 일본사회가 드러내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며 보다 나아진 일본이 되기를 바라는 동시에 일본에서의 왜곡된 한국역사를 바르게 말하고 싶어하는 모습이 양국 모두에 대한 안타까운 애정이 전해져오는 듯 했다. 그래서 출발장소를 군함도로 선택한 것이 더 의미있어 보였다.
군함도도 후쿠시마 원전도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을 위한 에너지 시설이 아니었다. 저자는 " '에너지가 곧 국가다' 라는 국책이 걸어온 길에는 수많은 사람기둥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p. 38) 는 것을 알아야 함을 강조한다.
왜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나라라는 일본에서 아동7명 중의 1명이 빈곤에 처해 있는 것일까. 그 배경에는 빈곤을 낳는 풍요가 자리잡고 있다. 풍요는 어린이와 한부모가정 같은 사회의 가장 약한 부분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풍요는 극단적인 부의 쏠림을 초래하며 거대한 격차를 낳는다. 여기에서는 오직 부로서만 부를 재생산할 수 있다. 소득 상위 10퍼센트의 국민이 전체 부의 40퍼센트를 가진 격차 사회이자 불평등 사회, 이것이 오늘의 일본이다. (p. 41)
1874년 제정된 오늘날의 생활보호법에 해당하는 환난구휼의 규칙에서는 빈민, 즉 하층민은 놀고먹는 사람, 무위도식자로 간주해 엄격한 제한구제주의가 적용되었다. 남구(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사람까지 보호하는 일)는 저소득층을 지원에 의존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게으른 사람이 늘어날 것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약자를 잘라내고 사회보장을 제한적으로-그 결과 효율적으로-운용해야 한다는 은혜주의적 사고(복지가 사회 구성원의 권리나 국가의 의무가 아니라, 마음이 따뜻한 윗사람의 은혜라는 사고방식)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복지 정책의 구실로 이어지고 있다. (p. 46)
빈부격차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일본사회만의 문제도 아니지만, 일본 복지에 깔린 사고방식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있는 나라인줄 알았더니 그 혜택을 받는 대상 선정에서의 문제가 무시할 수 없어 보였다. 양극화 문제는 대학의 우열을 가리는 것에서도 심각해보였다.
오늘날 대학을 둘러싼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대학의 우열을 구분해놓은 'G'와 'L' 이 바로 그것이다. G는 글로벌, L은 로컬을 가리킨다. G에 속하는 대학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 있으며 L에 속하는 대학은 피라미드의 바닥에 위치한다. G대학이 국제화와 조직 개혁을 통해 교육과 연구 분야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갖춘 소수의 엘리트 대학이라면, L대학은 지역 경제권에서 즉시 활용할 수 있는 인재 배출을 목표로 삼는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대학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학문과 교육은 G에서만 받을 수 있으며, L은 이름만 대학일 뿐 실제로는 직업 훈련소 역할을 한다. (p. 53)
우리나라의 대학서열화 문제도 심각하다. 그런데 일본처럼 아예 대놓고 G 와 L 로 구분해 놓는다면 교육현장이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심란하다. 일본에서는 어떻게 저렇게 대학 우열을 구분해 놓는 것이 가능했을까...
저자는 지금의 일본 대학이 사회에 필요한 가치를 창조하는 터전이 되지 못하여 '가치의 공동화 空洞化' 가 진행되고 있다며 걱정한다. 그런데 그 빈 구멍을 메우려 국가는 더욱 통제와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정치를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 한다면, 사회의 희소 자원, 재정, 서비스 등을 어디에 투여할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정치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일본의 방위비는 해마다 치솟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생긴 오염수조차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2020년 도쿄올림픽을 개최한다고 한다. 제한된 가치가 제대로 배분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잘못된 정치는 지역과 시민의 활력을 갉아먹고 지역의 힘을 감퇴시킬 것이다. 대지진을 비롯한 천재지변은 가치의 권위적 배분에 관련된 일본 정치의 존재 방식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p. 82)
우리나라처럼 분단국가도 아니면서 미국처럼 해외파병을 수시로 해대는 국가도 아니면서 방위비를 자꾸 올리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저자가 찾아다니는 곳들은 잘못된 정치로 인해 피해를 입은 지역들이었다. 저자는 이 현실들을 좀 직시하라고 정치권에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충고를 하고 있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중에 경세제민 이라는 개념이 있다. 중국 고전에 등장하는 이 말은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고난에서 구제한다' 라는 뜻이다. 그 줄임말이 바로 경제 이다. 이 말은 영어 economy 의 번역어인 경제보다 넓은 의미를 담고 있다. 요샛말로 바꾸면 나라를 통치하는 동시에 곤궁에 빠진 국민을 구하여, 가난한 사람과 이재민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리라. (p. 99)
법안을 의결할 때, 당의 방침에 따라서만 투표한다면 의원은 자리를 지킬 수 있다. 당의 대표가 부르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는 정치가에게 경세제민의 기개를 기대할 수 없다. (p.100)
그렇지.. 경제가 이런 뜻이긴 했다.. 하지만 이 경제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긴 하다... 정치인도 뭐... 다만 모든 당원들이 당대표에게 예스를 남발하는 예스맨이 아니라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게다가 세습에 준하는 정치가문의 세습은 우리네와 많이 달랐다. 그래서인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그런 가문의 정치가를 선거에서 뽑아주는 걸까... 정치가문 뿐만 아니라 정치가를 배출하는 학원도 있고... 흠... 이러나저러나 "산전수전을 거치며 당원에서 지도부로 올라서는 그림은 아예 불가능해졌다"(p. 111) 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그나마 시민사회에서 정치가가 배출될 수 있는 우리사회가 더 나은건가 싶기도 하고... 뭐... 비교하자고 읽은 책은 아니지만... 읽는 내내 비교가 안 될수는 없었다;;;
지금 정부는 지방 창생에 역행할 뿐만 아니라 균형 있는 국토 발전이라는 국가의 의무마저 방기해버렸다. (p. 122)
피해가 확인되고 12년이 지나서야 아세트알데히드 제조 설비의 가동이 중지되고 수은 유출이 멈추었다. 또 40년이 지나서야 환자 단체와 화해 협정에 조인했다. (p. 135)
사람 목숨이 가장 가볍게, 함부로 다뤄지는 순간은 바로 전쟁이다. 메이지 시대 이후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1차세계대전, 시베리아 출병,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이 이어지는 70을 보냈다.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전쟁의 시대를 반성하며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차별을 철폐하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인간이 인간을 살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야 한다. (p. 137)
지방과 중앙도시의 균형발전은 참 어려운 문제긴 하다. 미나마타병이 발생한 지역은 소외된 지방이었다. 미나마타병의 처리과정은 정말 이럴수있나 싶게 너무 안타까웠다. 피해자들의 구제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도 그 질병을 안고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아파하고 있는데...
일본의 전쟁사가 70년이나 됐다는게 새롭게 다가왔다. 긴 전쟁의 상흔은 인식에 깊게 새겨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지배자들의 머릿속엔 상흔이 아닌 재도전의 욕구를 새겨놓았을지도...
애국심과 내셔널리즘에는 커다란 결함이 있다. 그것은 통치 시스템으로서 국가가 휘두르는 폭력을 반성하지 않는다. 어떤 미사여구를 사용한들 국가의 통치에는 폭력이 따르기 마련이다. 국가란 "정당한 물리적 폭력 행사의 독점을 (실효적으로) 요구하는 인간 공동체"(막스 베버)이기 때문이다. 패젼 이후 '평화국가'를 주창하며 민주국가로 다시 태어나려 한 일본에서도 폭력은 필수 도구였다. 그럼에도 국가가 휘두르는 폭력이 잘 보이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p. 170)
폭력의 대표적 상징은 '군대' 다. 일본에서 국가의 폭력을 드러내는 군대가 보이지 않는 까닭은 군대가 일본의 가장 변방 오키나와 에 거의 주둔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오키나와에 폭력을 집적시키고 격리한 이유는 군사 전략이나 억지력 때문이 아니다. 이는 오키나와가 일본이지만 일본이 아니라서가 아닐까?"(p. 173) 라는 저자의 의문아닌 의문은 일본 본토인들이 오키나와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알고나면, 그 차별성을 알고 나면 안타깝지만 수긍하게 된다. 그리고 차별엔 늘 화가 난다. 일본내에서의 다양한 차별 문제는 이 책의 마지막 대상인 '자이니치' 로 연결된다.
2000년대가 되면서 재일 외국인 중 중국 국적자의 수가 재일 한국인·조선인을 웃돌게 되었다. 재일 외국인의 국적이 다양해지면서 자이니치가 재일 한국인·조선인을 가리키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다. 2016년 [출입국 관리 및 난민 인정법] 개정 이후, 재류 자격이 28종으로 늘어났다. 2016년 당시 재류 자격을 가진 전체 외국인 240만명 가운데 재일 한국인·조선인은 4분의 1에 불과했다. (p. 196)
'혐한' 시위대를 뉴스에서 자주 봤다. 혐한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일본 정치인들도 자주 봤다. 그런데 과거에 비해 일본체류 외국인중 한국인의 비중은 많이 줄어들었다. 원래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가리키던 자이니치 라는 단어는 그 의미가 무색하게 재일한국인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어왔다. 하지만 이제 자이니치 본래의 단어로 써야할 만큼 재일한국인의 비중은 전과 같지 않음에도 그 사용현실은 달라지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혐한분위기를 보면 그저 한국이 마냥 만만한 자기네들 밥인가 싶기도 하다. 내부문제에서 관심을 돌리기 위한 희생양으로 한국만한 상대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 거의 습관이 된 듯...
지리적 변경이 아니더라도 사회적·문화적·심리적 변경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들을 나는 왜 따라갔을까.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변경을 체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의 후손으로 태어나 일본에서, 그것도 일본 본토에서 산다는 것은 변경을 몸에 두르고 사는 삶을 뜻한다. 동시에 고도성장 시대의 적자라고 할 수 있는 내게 삶은 변경에서 이탈하여 볕이 잘 드는 중앙으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빛을 구하려 한 결과, 나는 언제부터인가 변경적인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p. 203)
그러나 볕이 드는 곳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드리우기 마련이다. 메이지 국가의 반짝이는 미래에서 가장 먼저 어둠을 찾아낸 사람이 나쓰메 소세키다. "일본국 전체 어디를 둘러보아도 반짝이는 단면은 1촌4방도 없지 않느냐. 모조리 암흑뿐이다." [그후]의 주인공의 염세적인 독백에 소세키의 심정이 잘 묻어 있다. (p. 204)
나는 변경을 몸에 두른 자들의 상속인이다. 내 앞에 놓인 지리적 국경이, 사회적·문화적·심리적 국경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이번 여행은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이들을 만나는 기쁨으로 가득했다. 일본은 그런 이들을 끊임없이 배출했다. 바로 여기에 이 나라의 희망이 깃들어 있다. (p. 206)
저자가 알려주는 일본 곳곳에 산재한 문제들은 일본의 그늘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늘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빛을 찾아내고 있었다. 나는 그저 제삼자로서 일본의 현실을 좀더 알 수 있었고 다른 나라의 내부사정을 알게 될때마다 그나마 우리나라가 살기 좋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끼며 감사할뿐 그네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저자는 일본에 살고 있는 현지인이다. 그의 체감은 나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저자가 찾아낸 희망이 정말 희망의 빛이 되기를 바랄뿐....
국가주의의 융기와 감각적 충동의 해방, 국권과 민권의 분열, 국가와 자본의 유착, 도쿄로 쏠린 부와 재화, 피폐해진 지방, 미국에 대한 추종과 그 밖의 다른 나라에 대한 무시... 그 모든 문제는 메이지 국가가 완성될 때 이미 배태되었다. (p. 213)
이 상황을 바로잡는 것은 정치가의 몫이다. 전후 민주주의는 '평화국가'의 기치를 내걸고 개인의 인권과 함께 인간다운 '문화생활'을 보장하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일본은 마치 국가를 위하여 국민이 존재하는 것처럼 도착된 상태였다. 국민 없는 국가주의만 팽창했다. (p. 214)
메이지 초기에는 다카시마 탄광의 갱부를 억압하는 궁핍과 아시오 광독 사건의 참상을 폭로한 지식인이 있었다. 전후에도 공해 반대 운동, 시민운동, 평화운동, 차별철폐 운동 등에 투신한 지식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 힘이 화혼을 꺾을 만큼 강하지 않았다. 그러던 찰나에 국민 없는 국가주의가 대두하면서 지식인의 사회적 응집력이 증발해 버렸다. 이제 '지식인의 종언'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렇다면 유사인텔리에 착목해야 하지 않을까? '유사'는 '사이비'라는 뜻이 아니다. 근대적 의미에서는 지식인이 아니지만, 그 아종이라할 만한 지식인을 가리킨다. 이 책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은 사회적 곤경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올린 유사인텔리이다. 그들의 유산이 현대로 계승된다면 메이지의 그늘에 갇혀 국가를 올려다보기만 하던 순종성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국가라는 돔을 바깥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과거아 아니라 미래에서 희망을 구해야 한다. (p. 219)
노벨상도 많이 타고 이런저런 학문분야에서 세계적 업적을 거둔 일본사회에서 지식인이 증발했다는 저자의 표현은 일본사회를 지배하는 슈퍼엘리트들이 지식인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회에 올바른 목소리를 내야할 지식인들이 특권층이 되어 자신들의 이익만 따지는 사회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다만 어떻게 바꾸느냐, 바꿀수 있긴 하느냐가 문제라면 문제랄까...
이 책이 알려주는 일본사회의 문제는 우리사회의 문제또한 그대로 상기시켜주는 것도 있었기에 남의일인양 무시할 수만은 없는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그정도까지 곪아가기 전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게 해주는 내용들이었기에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비하면 우리사회가 훨씬 희망적이긴 한 것 같다. 이 희망의 빛들이 점점 더 우리사회를 밝게 비춰줄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