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SF 와 판타지를 좋아한다. 테드창 과 류츠신의 작품을 읽으며 중국SF작가들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면서 켄리우의 작품도 궁금해졌다. 화려한 수상경력도 그렇지만, 다양한 지면에 발표된 개별 작품들을 한국에서 엮어낸 단편집이라는 점에도 호기심이 일었다. 무엇보다 표지 속 저 생명체가 시선을 끌었다. 미리 말해놓자면 이 책에 수록된 그 어느 작품과도 표지는 연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신묘한 표지가 더이상 궁금하지 않을만큼 작품마다마다 여운이 길었다.
나는 과학 소설이 미래를 예견하는 일과 연관이 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쪽 분야에서 과학 소설은 이제껏 별 신통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어쩌면 어떤 작가들은 자신이 쓴 소설 속에서 정말로 미래를 예견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은 나의 관심사나 목적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심지어 '도래할지도 모르는 미래'에 관해서도 쓰지 않는다. 내가 쓰는 이야기는 대부분 의도적으로,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도래할 리 없는' 미래에 관한 것들이다. (p. 7)
현대성이라는 말에서는 어딘가 '동떨어진' 느낌이 난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이야기에서 의식의 업로드나 싱귤래리티(Singularity, 특이점), 포스트 휴머니즘 같은 소재를 많이 다룬다. 그러나 핵심만 놓고 보면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같은 질문을 던진다. 지난날의 지혜가 설득력을 잃은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에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p. 8)
작품을 시작하기전 저자의 말이 이토록 인상적이었던적이 있었나 싶다. SF소설이라고 하면 미래소설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지 않았나. 그런데 저자는 SF소설을 쓰면서 다가올 미래에 대해 쓰지 않는다고 오히려 도래할 리 없는 미래에 대해 쓴다고 말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점이 현재이고 현대이므로 현대적이라는 말은 이미 잠시만 지나면 과거적이 된다는 점에서 '현대성'에 대해 의문을 갖던 나로서는 첨단과학이 등장할 수록 인간 본연의 의미(과거에는 굳이 생각지 않아도 자연스러웠던 그 어떤 것)를 찾아봐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질문과 공명을 일으키는 듯 했다.
통념과 달리 서사시는 지금도 현재성을 띠고 엄연히 존재하는 예술형식이다. 예컨대 뮤지컬 [해밀턴]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정의했던 [아이네이스]와 같은 방식으로 오늘날 미국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보여 주는 미국의 서사시이다. (p. 10)
저자는 중국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하여 지금은 미국 보스턴에서 낮에는 법률 컨설턴트로 밤에는 소설을 쓰는 작가로 살고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의 유년시절과 미국에서의 성장이 어떤 조화를 이루었기에 [아이네이스]를 SF판타지소설집 서문에서 언급할 수 있었던건지 궁금하다. 얼마전 [아이네이스]를 읽으며 로마건국서사시로서만 이해했었는데 그렇게 지배자의 용도적 측면에서 받아들였었는데 [아이네이스] 속 과거가 아닌 그 서사시가 편찬된 시절의 로마인들에게 당대를 살아가는 의미를 알려주는 책이라고 하니 잠시 책장을 덮고 생각해보아야 했다. 서사시의 의미란 무엇인가...
당신은 나에게 삶을 줬지만, 그렇다고 내가 당신을 소유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사랑은 중력 같은 게 아니에요. 그냥 늘 존재하는 거라고,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선 안 돼요. 그러니까 나는 계속 그렇게 기다릴 게 아니라, 마땅히 내 손으로 삶을 개척해야 했던 거죠. (p. 53)
나는 선택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삶을 낭비했다. 그래서 기꺼이 내 삶에 플라스티네이션 처리를 했다. 고치 속에 숨은 누에처럼. 세계 곳곳에서 삶이 영원히 이어져지만, 사람들은 전보다 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함께 나이 들지 않았다. 함께 성숙하지도 않았다. 아내와 남편은 결혼식 때 선서를 지키지 않았고, 이제 그들을 갈라놓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권태였다. (p. 59)
나의 차례가 오면 죽음을 맞기로 했다. 한 여자의 삶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누린 채로. 내 인생은 하나의 기다란 호가 될 터였다. 시작과 끝이 있는. (p. 60)
딸은 나와 다른 세상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서지 못했듯이, 나는 영원한 시간을 감당하며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할 운명이었다. 내가 늙어 가다가 죽기로 마음먹은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다시 그리고 또다시 시작해야 하는 운명으로부터. (p. 61)
인간은 오래전부터 영생을 꿈꾸었다. 누구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하루 살기가 버거운 사람들은 긴 생이 오히려 짐이었다. 하지만 다 가진 사람들, 재물과 권력과 모든 영화를 다 누린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그런 삶을 오래도록 지속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졌다. 하지만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영생의 존재인 스트럴드브럭 처럼 늙어가는 영생은 저주에 가까웠다. 젊음을 유지한 영생 이어야 꿈꿀만 했다. 하지만 이 꿈이 실현되었을때 인간은 정말 행복할까?
젊음을 유지하는 재생시술이 개발된 후 삶과 죽음은 선택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 선택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사랑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원이 아니라 총알같이 날아가는 단 하나의 방향선인 직선이 아니라 처음과 끝은 있되 저마다 휘어짐과 길이가 다를 '호' 는 인생을 나타내는 가장 적절한 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조님들께서 나무배가 물 위를 나아가듯이 별과 별 사이를 거뜬히 날아다니는 방주를 타고 이 별에 도착하셨다는 전설은 내가 어릴 적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p. 72)
"그 요법이 왜 통하는지 설명하느라 당신이 동원한 오행인가 하는 원리는 잘 이해가 안 가요, 어쩌면 그냥 비유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실제로 효과가 있어요. 그러니까 잘 보존해서 나머지 인류에게도 가르쳐 줘야 해요. 유서 깊은 공생 생물들과 더불어 사는 법, 또 더불어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들한테요" (p. 103)
우주탐사가 자연스러워진 언젠가 인류는 몸속이든 몸밖이든 완전박멸한 상태에서 살고 있었다. 불시착한 행성에서 홀로 살아남은 한 사람이 마지막 에너지를 동원하여 다른 별에 불시착한다. 알려지지 않은 그 별에 인류가 살고 있었고 그들이 사는 방식은 잊혀진 고대의 삶이었다. 하지만 그 고대의 방식은 균이 박멸되고 감정이 박제된 현생인류의 방식보다 가치있어 보였다. 미개와 발달은 어쩌면 관점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난족은 수천년 동안 이 산에서 살았다. 마을에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책들, 즉 몇 세대에 한 번씩 새 삼줄로 새 매듭을 지어 베껴 쓰는 그 책들을 보면 우리 부족의 기원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세상 또한, 보통은, 우리를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둔다. (p. 112)
나로서는 그때껏 산업화 이전 단계의 소수 민족에게서 신약 개발의 아이디어를 수집해 온 나의 전적을 또다시 언급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없는 전설과 미신으로 점철된 이야기보따리 속에는 진짜배기 전문 지식의 알맹이가 드물지 않게 숨어 있었고, 이를 발견하여 개발하면 노다지를 캐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p. 124)
나는 바보였다. 내 딴에는 우리 마을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토무가 제시한 달콤한 조건에는 단서가 주렁주렁 붙어 있었다. 내가 한 일은 결국 먼 곳의 군주가 파놓은 빚 구덩이에 우리 난족을 밀어 낳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군주에게 해마다 공물을 바쳐야 했다. (p. 132)
과거 전쟁을 피해 산속 깊이 올라 마을을 구성하여 살고 있는 부족이 있었다. 그들의 문자는 매듭이었다. 그들의 책은 매듭묶음으로 만들어졌다. 어느날 그 마을에 서양인 한 사람이 찾아온다. 그는 매듭언어에 관심이 많다. 부족장을 데려가 연구한 끝에 매듭언어와 DNA 관계를 밝혀내어 큰 성공을 거두지만 그가 부족장에게 건넨 것은 수수료가 점점 올라가게 되어있는 볍씨 몇자루 뿐이었다. 고대의 지혜가 첨단의 과학에 의해 어떻게 무너지는지 작은 평화가 외부의 탐욕으로 어떻게 망가지는지 보여주는 판타지는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만약에, 우리가 단지 하루하루 어떤 알고리즘을 따르는 것뿐이라면? 우리 뇌세포가 단지 어떤 신호를 받아서 다른 신호를 찾을 뿐이라면? 우리가 생각이란 것 자체를 안 한다면? 내가 지금 당신한테 들려주는 이야기가 단지 미리 정해진 반응일 뿐이라면, 의식이 개입되지 않은 물리 법칙의 결과라면?" (p. 160)
첨단 인형을 개발하는 회사가 있었다. 남편은 사장이고 아내는 기술자였다. 점점 사람처럼 반응하는 인형을 만들어가던 아내는 어느날 사람들 사이의 반응 알고리즘을 완벽히 예측하는 수준까지 오르게 된다. 거의 사람처럼 로봇을 만들다가 사람과 구분이 되지 않게 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어져 왔던 것 같다. 영화 '블레이드러너'가 생각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답을 찾진 못한 것 같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런데 이제는 벽에 부딪혔어. 우리는 꿈에 그리던 연산 능력을 모조리 손에 넣었고, 초고밀도 인공 신경망에 필요한 저장 공간도 이미 실용화했어.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어떻게 해야 정신을 만들 수 있는지 우리는 아직 몰라. 그래, 최신형 컴퓨터는 튜링 테스트에서 정체가 드러나기 전에 꼬박 30분을 버텼어. 하지만 내가 보기에 우린 이미 능력의 한계에 부딪혔어. 그래서 장님처럼 더듬더듬 길을 찾고 있지. 우리한테 필요한 건 지도야. 우리가 유일하게 보유한 제대로 작동하는 정신의 플랫폼, 바로 우리 정신 자체의 청사진 말이야.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우리는 두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직도 알지 못해. 우리는 살아 있는 두뇌를 역설계하는 수밖에 없어. 두뇌를 조각조각 분해한 다음, 다시 조립해야 해. 그래야 우리 손으로 정신을 창조하는 방법을 진정으로 깨우칠 수 있어. (p. 187)
<< 카르타고의 장미 - 싱귤래리티3부작 >> 中
육체와 정신은 따로 분리되는 것 같지만 분리할 수 없다. 지금까지는. 육체가 죽는 순간 정신도 죽는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할 수록 이 부분에 의문을 품는 것 같다. 육체를 죽지 않게 유지한다거나 육체는 죽어도 정신만 분리한다거나 하는 방법을 다각도로 연구하는 것 같다. 뇌 지도는 완성되지 않았다. 뇌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죽은 뇌는 뇌의 활동을 보여주지 못한다. 살아있는 뇌를 통해 정신을 연구하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이 살아있는 뇌를 자르는 순간까지 오게 만든다면?
"박사님, 달이 왜 갈수록 점점 커지는 건가요?"
"내 생각엔 달이 지구를 너무 사랑하는 것 같아요. 입맞춤을 하고 싶어서 가까이 다가오는 거죠"
사람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가던 길을 갔다. 대개는 우주공항으로 향하는 사람들이었다. 그곳에서 거대한 눈물방울처럼 생긴 우주선에 올라 외계로 떠나는, 그리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들. (p. 198)
달이 점점 더 지구에 가까워지고 지구의 육지는 점점 더 물에 잠겨간다. 지구에 남을 것인가? 지구를 떠날 것인가? 우주선 모양이 거대한 눈물방울 모양이라는 것부터 지구는 이미 눈물투성이였다.
"이제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에버래스팅사가 북극해의 스발바르제도에 거대한 데이터 센터를 짓는 동안, 세계 각국에서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살인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한 소동이 벌어졌다. 업로드된 인간이 한명 생길 때마다 생명을 잃은 육체 한 구가 남기 때문이었다. 파괴적 스캔 과정을 거친 두뇌가 피투성이 곤죽이 된 채로. 하지만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그 인간에게, 그의 본질에게,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이 없어서 굳이 말하자면, 그의 '영혼'에게?
그 사람은 이제 인공지능일까? 아니면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인간일까, 실리콘과 탄소 동소체 그래핀이 신경 세포의 기능을 수행하는? 단지 의식의 하드웨어 업그레이드를 마친 것일 뿐일까? 아니면 그 사람은 단순한 알고리즘이, 자유 의지의 태엽 장치 모사품이 되어 버린 걸까? (p. 206)
오로지 이 세상뿐이다. 우리가 살아갈 운명을 타고난 세상, 우리를 붙들어 놓고 우리에게 존재하라고 요구하는 세상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환상으로 이루어진 상상의 풍경이 아니다. 이메일 속의 엄마는 진짜 엄마의 시뮬라크림이었다. 선전용으로 만든 전자 기록, 염세주의로 유혹하는 초대장. (p. 220)
<< 뒤에 남은 사람들 - 싱귤래리티 3부작 >> 中
육체를 소멸시키고 정신만 살아있을 수 있다면 그 삶 또한 진정한 삶인 것일까? 그러한 삶에서 시간이란 무슨 의미일까? 가족이란? 지구가 점점 더 살기 힘든 환경이 되어가고(그 환경을 만든 주체가 인간이고) 물질로 이루어진 실체적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져갈때 점점 야생화되어가는 땅을 밟고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새 생명이 살아야 할 환경은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이 로봇은 죄책감을 덜어 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너무 멀리 살고 핑곗거리도 너무 많은 이들을 위하여. 어머니 곁의 당신이 본질적으로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기술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p. 239)
인간형 로봇이 상용화된다면 어떤 분야에서 가장 먼저 시작될까? 무언가를 만드는 기술을 가진 로봇은 굳이 인간형태일 필요는 없다. 인간을 상대하는 서비스에서 인간형 로봇이 필요할 것이다. 그 서비스는 아마도 돌봄영역에서 가장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곁을 지켜주는 존재가 로봇이 된다는 것은 (비록 그 로봇을 먼곳에서 가족이 조종하고 있다할지라도) 현실적인 가능성이다. 가족은 무엇인가?
우리가 하는 숙제는 유전학과 유전 형질에 관한 프로젝트다. 어제 수업 시간에 바이 박사님이 우리 의식을 여러 개의 구성 알고리즘으로 분해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각각의 알고리즘은 다시 루틴과 서브루틴으로 해체되었고, 결국 우리는 개별 명령어, 즉 근원 코드가 되었다. 그런 다음 바이 박사님은 우리 부모님들이 어떻게 제각각 우리에게 그 알고리즘의 일부를 주었는지 설명하셨다. 우리가 태어나는 과정에서 알고리즘들이 여러 루틴을 재결합하고 재배치한 결과 우리는 완전한 인격, 즉 우주에 새로이 탄생한 어린 의식이 되었다. (p. 247)
엄마는 싱귤래리티 이전의 사람, 고대인이다. 고대인은 온 우주를 통틀어 수십억 명밖에 안 된다. 엄마는 업로드를 하기 전에 육체를 지닌 채 26년간 살았다. (p. 249)
카메라가 보여 주는 이륙 광경 속에서, 우리 아래의 데이터 센터는 스발바르제도에 위치한 하얀 빙원 한복판의 까만 정육면체이다. 이곳은 집이자, 우주에 있는 모든 세계의 하드웨어적 토대이다. (p. 255)
<<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 싱귤래리티 3부작 >> 中
의식의 시대가 되었다. 3000억 명의 의식이 데이터센터에 모여 산다. 사는걸까?... 여하튼 의식들만으로도 새로운 가정이 탄생하고 공간은 무한하고 의식의 범주도 확장되어 간다. 하지만 여하튼 그 모든 것은 지구에 있다. 지구는 점점 살기에 위태로운 환경이 되고 있다. 외계의 별로 우주선을 보내려 한다. 우주선에 실린 의식은 목표된 별에 도착한 후 지구로 돌아오지 못한다. 아직 거기까지의 기술은 없다. 엄마의 의식은 이 우주선에 탑승할 예정이다. 엄마와 잠깐 여행을 하고 왔을 뿐인데 지구의 시간 45년이 흘렀다. 딸이 그 짧고도 긴 여행에서 본 물질세계는 잊지 못할 광경이었다. 의식은 물질을 반영하게 되었다. 직접 본 순록 한마리는 의식 속에서 무리를 만들수 있게 된다. 의식은 꿈을 꿀 수 있게 된다.
"그 아이가 진실로 믿고 받아들이는 날에, 너의 이야기는 비로소 진실이 될거다" (p. 287)
달나라에 사람이 산다는 설정은 전래동화 같지만 판타지다. 중국에서 미국에 이민자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은 달나라에 사람이 살게되는 것 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믿었을때 이야기는 현실이 된다.
"중요한 건 맛의 균형이다. 중국인에게 운명이란 단맛과 신맛, 쓴맛, 매운맛, 짠맛, 마라 맛, 그리고 부드러운 위스키 맛을 한꺼번에 모두 맛보는 거다. 뭐, 사실 중국인은 위스키가 뭔지 모를 테지만, 그래도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너도 알 거다" (p. 340)
백인들은 백인 광부에게서 채굴권을 빼앗아간다는 이유로 중국인 고아부들을 백안시했다. 그 채굴권은 대개 백인들이 포기한 것이었는데도 그러했다. (p. 351)
"여기가 내 집이다. 나는 여기서 마침내 세상의 모든 맛을 찾았다. 그 모든 단맛과 쓴맛, 위스키 맛과 고량주 맛, 거칠고 아름다운 남자들과 여자들, 그들이 지닌 야성의 흥분과 불안, 아직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대지의 평화와 고독...... 한마디로 말해 정신을 고양시키는 짜릿한 맛, 그게 바로 미국의 맛이다" (p. 404)
<< 모든 맛을 한 그릇에 - 군신 관우의 아메리카 정착기 >> 中
이 책에서 가장 긴 작품이면서 중국인의 미국이민사 기록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은 삼국지의 관우 이야기와 함께한 중국인들의 고난극복기이다. 새로운 땅을 먼저 차지한 이들과 뒤이은 자들의 배척과 인간대 인간으로 어우러지게 되는 배려가 함께 하는 것이 결국 인간의 삶인 것인지도...
"나는 되게 오랫동안 우주여행을 했어. 우주선은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 안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단다. 고작 석 달밖에 안 지난 것 같은 느낌이야"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아빠가 전에 다 설명해준 이야기였다. 엄마가 시간을 속이는 방법이 바로 그거라고 했다. 엄마한테 남은 시간인 2년을 길게 늘여서, 내가 자라는 모습을 보려고. (p. 410)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남아있는 생의 2년을 늘이고 늘여서 열살, 열일곱살, 서른여덟살, 여든살 때의 딸의 모습을 보는 엄마. 그렇게 젊은 모습의 엄마와 늙은 모습의 딸은 마지막이 되어서야 더이상 이별하지 않게 된다. 우주과학이 이런 용도로 쓰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AI는 할 수 없는 인간적인 생각인 것은 아닐까...
독자들은 제가 책에 쓴 단어 하나하나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겁니다. 왜냐면 독자 한명 한명이 자기만의 이야기보따리와 자기만의 해석 틀, 자기만의 상처, 자기만의 정서적 공명점을 지닌 채로 책을 펼친 다음, 제가 쓴 글을 읽고 완전히 다른 세상을 쌓아올릴 테니까요. 이로써 완성된 결과물은 사실 절반만 제 것이고, 절반은 독자의 것입니다. (p. 416) <저자의 인터뷰 中>
독자가 이해하거나 말거나 자신만의 생각을 강요하거나 주입하는 작가들보다는 애초에 이렇게 작가의 몫과 독자의 몫을 함께 인정하는 생각이 좋아보였다. 백프로 독자의 몫이라고 하는 것은 무책임하게 떠넘기는 것 같고 독자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은 너무 독선적인것 같고, 작가가 썼으나 독자의 몫도 있다고 하는 말이 훨씬 공감이 갔다.
독자의 몫으로 남겨지는 부분이 많은 소설들이었다. 작품 하나하나 질문이 스토리보다 질문이 남는 책이었다. 그 질문들이 미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철학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소설들이었다. 미래를 예상하는 소설이건 오지 않아야 할 미래를 이야기하는 소설이건 요즘의 SF소설들은 한결같이 묻고 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이냐고, 그런 삶을 만들어가려면 과학은 어떠해야 하겠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