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뇌과학 - 이중언어자의 뇌로 보는 언어의 비밀 쓸모 많은 뇌과학
알베르트 코스타 지음, 김유경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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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가지 언어에 익숙한 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 뇌를 바꾸는 놀라운 언어의 세계를 엿보다

"다음 세대를 위한 언어교육을 시작하기 전에

세상의 모든 부모와 선생님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지침서" - 정재승

우리의 모국어는 한국어다. 그리고 한국인이 가장 욕심내는 외국어는 영어다. '학원' 이라는 단어가 영어로 번역되지 않는 고유명사로 자리잡을 만큼 영어학원문화는 한국의 독특한 교육문화가 되어 버렸다. 다시말하자면 대다수의 한국인은 한국어와 영어를 사용하는 이중언어자가 되기를 꿈꾼다. 특히나 자녀를 둔 부모의 경우 자녀만이라도 이중언어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이러한 영어에 대한 로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언어교육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지침서' 라는 정재승 박사의 추천사에 혹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세계적인 이중언어 연구자로서 3개 국어를 하는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로서의 생생한 경험이 어우러진 이중언어에 대한 연구들을 쉽고 간결하게 알려주고 있다. 심리학은 점점 뇌과학으로 연결되고 있는데 그렇게 복합적인 영역 중에서도 '이중언어의 뇌' 에 대한 연구들의 선구자인 저자의 글을 읽고나면 '이중언어자'에 대한 로망을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내려놓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ㅎㅎ

서문을 마치기 전에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 두 가지도 나누고 싶다. 우선, 이 책은 제2언어를 배우는 방법을 설명한 책이 아니다. 따라서 학교에서 제2언어를 배우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나 방법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는다. 두번째, 이중언어 사용 현상과 관련된 사회, 정치적 의미와 세계 여러 나라의 교육 모델에 끼친 영향 등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하나의 뇌에 두 언어가 어떻게 공존하는지 알아보는 여행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p. 14, 15)

서문에서 저자는 이 책의 제목만 보고 이중언어자가 되는 방법을 배울수 있으려나 하면서 책을 펼쳐든 독자들에게 NO 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외국어 학습법에 대한 책이 아니라 뇌과학에 대한 책이다. 뇌과학 중에서도 이중언어에 관련된 연구들을 소개하는 책이라는 점을 명시하는 저자의 자세가 믿음직스럽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단순히 단어와 문법을 외우는 데 그치지 않고, 해당 소리와 의사소통 시 맥락에 맞게 그것을 적절히 사용하는 법을 습득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니까 단어만 안다고 언어를 배우는 게 아니다. 언어의 소리를 익히고 그것의 조합 방법을 알며, 어떤 구문 구조가 맞고 틀린지 대화 상대자에게 어떤 표현을 하고 어떤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지 등을 알아야 한다. (p. 21)

하나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굉장히 복잡다단한 능력을 요구한다. 그리고 언어를 배운다는 것을 아기들이 옹알이라도 하면서 시작되는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기들은 뱃속에서부터 언어를 배우고 있었다. 갓 태어난 아기들도 뱃속에서 듣던 언어의 소리사슬들을 구분할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 { 만일 아기들이 그저 먹고 자기만 한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해다! 이제 아기들을 볼 때마다 머릿 속에는 무척 강력한 통계 컴퓨터가 있다는 생각도 하길 바란다. (p. 28) } 는 저자의 표현에 동감한다.

이중언어 노출된 아기들이 언어를 구별하기 위해 입술의 조음 운동에 집중하는 일을 일시적으로 강화하고 지속시키는 듯 보인다. 4개월 된 아기 이중언어자는 아기 단일언어자보다 말하는 사람의 입을 더 많이 쳐다본다. 이런 특징은 최소 한 살까지 유지되는데, 두 언어를 듣고 머릿속이 복잡해진 아기는 그 둘을 구별하기 위해 시각 및 청각 정보를 사용해 의사소통 과정에서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p. 40)

두 그룹의 아기들은 공통 발달 특징을 보였다. 따라서 이중언어 경험이 대상과 단어를 연관시키는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아기 이중언어자와 단일언어자가 용어 학습 과정에서 사용하는 전략은 차이가 났다. 그중 하나를 바로 '상호 배타성 경험법칙' 이라고 한다. (p. 48)

사회적 접촉이 외국어 학습에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의사소통을 통해 상호 작용할 수 있는 환경에 있지 않고 단순히 언어만 노출시킨다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만일 자녀가 외국어를 배우길 바란다면, 동영상이 그 일을 대신 해줄 거로 너무 기대하지 말고 그 언어를 사용해서 아이와 놀아주길 바란다. 즉, 고통 없이는 얻는 게 없다. (p. 52)

아기들의 언어학습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게끔 인간의 뇌는 작동한다. 이중언어 환경에 노출된 아기들은 엄마의 언어와 아빠의 언어가 다를 경우 구분을 위해 시각정보를 활용한다. 그리고 하나의 물체에 하나의 의미를 연결짓는 '상호 배타성 경험법칙' 이 이중언어 환경의 아기들에게는 덜 적용된다. 즉 하나의 물체에 여러 언어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인지 가능하게 된다. 그렇게 이중언어자로 자라나려면 그 무엇보다 대화상대와의 사회적 접촉이 필요하다. 엄마와 아빠가 다른 언어로 아기를 키우는 환경이 아닌, 부모가 같은 언어를 쓰는데 온갖 시청각 자료를 아기에게 보여준다고 해서 아기의 뇌가 이중언어자의 뇌가 되지 않는 다는 말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부모의)고통 없이는 (아이가) 얻는 게 없다. ㅎㅎ

피부색은 같지만 외국인 억양이 있는 아이와, 피부색은 다르지만 외국인 억양이 없는 아이 중에 누구를 선택할까? 억양이 더 중요했다! 아이들은 피부색이 같지만 영어를 할 때 외국인 억양이 있는 아이보다는 피부색이 달라도 모국어처럼 영어를 하는 아이들과 더 친구가 되고 싶어 했다. 즉, 그들의 원하는 친구를 결정할 때 중요한 요소는 피부색보다 말하는 방식이었다. (p. 54)

호모사피엔스만 남기전 아주아주 오랜 시간 전에는 다양한 인류의 조상족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도 나름의 언어가 있었다고 하던데... 비슷비슷해 보이는 유인원들 중에서도 저마다의 다양한 그룹이 뭉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 때문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친구를 선택하는 기준이 외양 보다 억양이라니 의외의 연구결과였다. 하긴 사회적 동물인 인류가 소통을 하려면 생김새보다는 대화가 더 중요했을 테니...

이번 장에서는 뇌가 어떻게 두 언어를 처리하는지에 관해 몇 가지 질문을 살펴보았다. 뇌 손상을 입은 사람의 언어 행동 연구와 뇌 영상 기술을 통해 확보한 건강한 사람의 뇌 활동 평가로 이중언어자의 언어 사용이 뇌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 수 있었다. 특히 뇌에서 언어 통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언어를 아는 것 뿐만 아니라, 사용(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 다가왔길 바란다. (p. 102)

이중언어자에 대한 뇌연구는 아직 밝혀진 것보다 밝혀지지 않은 것이 더 많다. 따라서 저자의 가정과 결론은 조심스럽게 진행된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중언어자의 뇌가 작동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결국 이중언어를 사용하며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이중언어에 대한 극단적인 의견을 자주 접한다. 또한, 이러한 의견은 대부분 분명한 과학 지식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실제로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하다. 특정 근거를 기반으로 하긴 하지만, 전달 내용이 이해관계에 따라 왜곡되어 일반 대중의 판단력을 흐릴 뿐 아니라, 이 분야에서의 연구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p. 106)

이중언어에 노출된 사람들이야 자연스럽게 체득된다 해도 그런 환경이 아닌 단일언어자들은 이중언어자가 되고 싶은 꿈을 꾼다. 이중언어자가 더 똑똑하다느니 아기때부터 배워야 한다느니 이런저런 말들에 마음이 오락가락 한다. 하지만 이중언어자의 뇌에 대한 연구는 진행중이기에 아직 그런 소문들을 다 뿌리뽑을 수는 없다. 그래도 저자가 알려주는 객관적 근거들은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준다.

학교에서 기본적으로 쓰는 단어만 비교하면 두 집단 간에 차이가 없었다. 일리 있지 않은가? 학교에서는 모든 아이가 같은 단어에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다. 학교에서 어휘량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이중언어 사용이 학교 성적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p. 117)

이중언어 환경 속에서 자란 아동에게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일찍 발달하고, 자기 관점을 상대방의 관점에 다라 바꿀 수 있음을 시사한다. (p. 129)

이중언어를 하면 학교 공부를 더 잘 할거라는 것은 왜곡된 편견이 아닐까? 이중언어의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학습능력보다는 공감능력이 더 발달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중언어를 하다보니 상대방의 다른 언어 방식에 더 개방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중언어자가 되면 공부를 더 잘하는 게 아니라 사회성이 더 좋아진다는 것은 학습 때문에 이중언어자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들에게 제대로 뿌린 찬물이 아닐지 ㅎㅎ

단일언어자와 이중언어자의 뇌 구조를 비교한 연구들은 결과를 놓고 인과적 해석을 시도할 때는 문제가 생긴다. 즉,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져나의 문제이다. 우리는 이중언어 경험이 뇌 모양을 결정하는지 아니면 특별한 뇌 구조를 가진 사람들이 언어를 배우는 데 더 많이 준비되어 있어 더 쉽게 이중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만일 뇌 모양이 결정되어 있다면, 이중언어 환경에서 자라더라도 뇌 구조에 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두 변수는 서로 관계가 있지만, 이것이 인과 관계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p. 137)

비록 찬물 한바가지를 뒤집어쓰긴 했지만 아직 희망의 끈을 놓을 정도는 아니다. 이중언어의 뇌가 타고나는 것인지 아닌지 뇌과학자도 아직 확답할 수 없다고 하니 ㅎㅎ

결국 이중언어 사용은 우리의 언어 발달과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중언어 경험이 주는 혜택이나 문제에 대해 쓴 글이나 말을 접할 때 신중해야 한다. 적어도, 과학을 그런 목적으로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많은 연구 결과물이 말하는 내용은 그들이 말하는 내용과 다르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꼭 다시 강조하고 싶은 말이었다. (p. 141)

과학의 부분적 이용에 대한 저자의 우려는 나도 깊이 동의한다. 어떤 연구결과에 대해 판단할 때는 그 하나만 보면 안된다. 관련된 다른 것들과 함께 고려 해야 한다. 하지만 일반인이 과학적 연구결과들을 수시로 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과학책을 읽을때 저자와 같은 객관적이고 신중한 태도로 쓴 책들을 읽어야 할 것이다.

이중언어 사용이 인지 예비용량 확장을 돕고 뇌의 퇴화로 인한 부정적 영향을 감소시킨다는 것을 암시한다. (p. 171) 이중언어 사용은 치매 증상을 4년이나 지연시켰다. 이 연구에서는 교육 수준의 잠재적 영향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 지역에는 학교 문앞에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맹자 하위 표본에서 이중언어 사용 효과가 여전히 컸고, 치매 증상을 6년 지연 시켰다. (p. 173)

서양에는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곳이 많이 있고 따라서 태어나면서 부터 이중언어 환경에 노출되어 이중언어자로 자라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그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구했을때 이중언어 능력은 '뇌의 퇴화'에 효과적이었다. 즉, 이중언어자로 자라면 학습이고 뭐고는 차치하고 치매가 지연된다! 우리나라에서 이중언어능력의 효과가 학습능력이 아니라 치매예방에 효과적이라고 말하면 영어학원들이 좀 줄어들려나? 아니 여전히 성행하려나?!

감정적 가치는 외국어가 모국어보다 낮고, 그 결과 우리 주의를 덜 끌고, 주요 과제 실행에도 덜 간섭을 받는다. (p. 191) 성인이 되어 배웠거나 사회적으로 거의 사용하지 않고 학문적으로만 배운 외국어(제2언어)는 언어 사용에 따르는 감정 반응을 감소시킨다. (p. 197) 즉, 외국어는 손실 프레임에서 부정적인 감정 효과를 일으키지 않으므로 수익 프레임에 비해 위험한 응답이 증가하지 않는 것이다. (p. 201) 모국어보다 외국어로 표시할 때 위험 회비 빈도수가 훨씬 적었다. (p. 202) 의사 결정에서 외국어의 영향은 위험에 대한 평가에까지 확대된다. 예를 들어, 참가자들에게 특정 활동의 이익이나 위험을 평가하도록 요청할 때, 외국어를 사용하는 환경에서 위험은 실제보다 덜 위험한 것처럼 보이고 이익은 더 크게 보인다. (p. 205) 다른말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외국어 환경에 있을 때 더 냉철한(또는 덜 감정적인) 사람이 될 것이고, 아마도 더 실용적이 될 것이다. (p. 211) 외국인 억양이 끼치는 영향은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외국인 억양이 있는 사람보다 원어민의 말을 더 많이 믿는다. (p. 217)

도덕적 의사결정을 할때 언어의 힘은 컸다. 이중언어자라 할지라도 주요 언어인 모국어가 있다. 모국어외의 언어는 제2언어 즉 외국어다. 다양한 실험들을 통해 외국어로 제시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모국어로 제시될 때보다 더 냉혹한 판단을 내렸다. 모국어로 표현되는 상황은 감정을 건드렸지만 외국어로 표현되는 상황은 감정을 크게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중언어자에게 원하는 대답을 듣고 싶다면 그사람의 모국어로 질문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국제회의에서 공용어로 진행해야 할 회의는 결국 외국어로 진행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국제회의에서는 피해국에 대한 감정적 고려 없이 냉철한 판단이 내려지는 것일까;;; 하지만 언어가 같다고 해도 억양이 주는 영향력이 또 있다. 같은 영어롤 쓰더라도 니편내편 구분이 바로바로 가능해질 수 있달까;;;

하지만 넬슨 만델라의 말을 기억해두고 싶다.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한다면 그 대화는 상대방의 머리로 간다. 상대방의 언어로 말한다면 그 대화는 상대방의 가슴으로 간다" 어쩌면 만델라가 적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 염두에 두었던 말일 수도 있다. 그는 도리에 맞게 말할 뿐만 아니라, 그들 마음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의 언어로 대화하길 원했다. (p. 183)

그리고 저자가 책의 제일 앞과 책의 제일 뒤에서 한 말도 기억해두고 싶다.

하나의 뇌 속에 어떻게 두 언어가 공존하는지, 그리고 거기 따른 인지적, 신경학적, 사회적 영향에 관한 연구 및 이와 관련된 흥미진진한 세계가 독자에게 잘 전달되었길 바란다. 무엇보다도 이 일에 관심을 갖고 계속 참여해보기를 바란다. 공자가 "들은 것은 잊어버리고, 본 것은 기억하고, 직접 해본 것은 이해한다" 라고 한 말이 일리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p. 218)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 듣기만 해서는 까먹고 보기만 한 것은 가물하니 직접 소리내 말해 보는 경험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겠다. 그리고 그 언어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아야 겠다.

{ 언어의 기본 수단은 바로 소리다. 우리는 말을 듣는 것보다 할 때가 더 많다. 읽고 쓰는 것을 배운 후에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토킹 헤즈'(Talking Heads)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라이팅 헤즈'(Writing heads)가 아니다! 말하는 머리지, 글 쓰는 머리가 아니다. (p. 38) } 라는 문장이 인상깊었다. 그렇다. 인간의 언어는 주로 '말'로 인식된다. 나의 모국어를 모르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내게 그닥 있을 것 같진 않지만 혹시나 만나게 된다면 상대방의 머리 보다는 가슴으로 가는 언어를 말하고 싶다. 이렇게 또다시 이중언어자에 대한 로망이 생겨나지만 분명 이 책을 읽기전의 로망과는 다를 것이다. 심장을 품은 토킹 헤즈 라고나 할까. ㅎㅎ

뇌과학 책을 읽었는데 이렇게 감상적인 마무리를 하게 되다니;;; 머리에 대한 책을 읽었으나 심리를 건드리는 재미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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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에 대한 거의 모든 생각 - 이제부터 당신 메뉴에 '아무거나'는 없다
마틴 코언 지음, 안진이 옮김 / 부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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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당신 메뉴에 '아무거나'는 없다

 

 

I Think, Therefore I Eat : The World's Greatest Minds Tackle the Food Question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먹는다' 라는 문장은 이 책에 즐겨 나오는 표현이다. 영국의 철학자인 저자는 음식에 대한 본인의 다양한 생각들을 풀어내는 동시에 본인의 장기를 살려 '음식'에 대한 철학자들의 생각까지 곁들여 낸다. 글 사이사이의 레시피는 일종의 부록 같지만, 진짜 부록은 책 뒤에 알찬 내용으로 덧붙여져 있다.

현명한 식생활을 위한 나의 세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디테일이 중요하다.

2.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

3. 크리스털 꽃병을 깨뜨리지 말라.

'디테일이 중요하다'는 쉬운 해결책과 사고의 단순화에 저항하라는 말이다.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는 음식에 관한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다가 얼마 후에는 그 논쟁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크리스털 꽃병을 깨뜨리지 말라'는 '스위스제 시계를 집에서 수리하지 말라'는 표현으로 바꿀 수도 있겠다. 이것이 이 책의 핵심 주제다. 복잡성을 인정하라. 크리스털 꽃병(또는 스위스제 시계)에 망치를 갖다 대지 말라. (p. 15, 16)

나는 이 책을 '건강한 음식에 대한 탐구'라는 중심 주제를 가지고 가벼우면서도 깊이있게 집필했다. 책의 구성 측면에서는 바쁜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방식을 택했지만, 정보를 보다 효과적이고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그리고 복잡한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심오한 철학적 개념을 사용했다. (p. 17)

인간의 기본욕구를 의식주 라고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먹는다'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인간역사의 시간이 쌓여갈수록 '음식'의 다양성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그러한 음식들에 대해서는 그닥 깊이 생각해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음식'에 대한 생각을 좀더 진지하게 해볼 것을 제안하는데 풀어내는 방식이 그리 어렵진 않았다. 음식에 대한 철학 이라기 보다는 음식에 대한 과학을 읽는 기분이었고 덤으로 유명 철학자들의 식생활을 엿볼때마다 웃음이 나기도 했다.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았던 베들레헴이라는 정착촌이 예수의 탄생지로 선택된 데도 숨은 메시지가 있다.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은 '빵의 집'으로 번역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까지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은 사실이지만,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손꼽히는 존 로크와 장자크 루소가 마치 서정시를 쓰듯 갈색 빵의 미덕을 찬양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 (p. 41)

음식에도 팩트체크가 필요하다며 가짜 음식을 찾아나선 저자가 제일 먼저 언급하는 음식은 '빵'이다. 인간이 빵을 먹어온지는 오래됐다. 하지만 지금의 빵은 순수하지 않다. 온갖 화학적 첨가물이 잔뜩 들어가 있고 인위적이로 성급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저자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먹었던 마른 빵을 지금은 찾을 수 없음에 존 로크가 서글퍼했을 것이라며 지금의 빵이 진짜가 아님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빵이 주식이 아닌 내게는 존 로크 만큼 서글픔이 전해지진 않는다. ㅎㅎ

무시무시한 아조디카본아미드는 어떤 상황에서든 금지되는 화학물질이지만 매우 흔한 식품 첨가물이기도 하다. 제빵업계에서는 밀가루를 표백하기 위해, 그리고 개량과 숙성을 위해 아조디카본아미드를 사용한다. 아조디카본아미드는 스타벅스와 같은 체인점에서 판매하는 제품들(예컨대 스타벅스의 크로아상 제품들)에 첨가되고 패스트푸드 음식점에서는 햄버거와 핫도그 빵의 형태로 판매된다. 규제 담당 기관들도 아조디카본아미드가 '호흡 과민성 물질'로서 알레르기 반응을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아조디카본아미드가 분해될 때는 세미카바자이드라는 물질이 만들어지는데 유럽연합,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싱가포르에서는 세미카바자이드를 약한 발암물질로 간주해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다르다. 언제나(뭔가를 금지하는 일에) 신중한 FDA는 소량만 사용할 경우 세미카바자이드가 안전하다고 간주한다. (p. 65)

영국 학자들의 책은 특유의 반어법적 위트가 있는 것 같다. 영국식 유머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살짝 비트는 문장들에 웃음이 나올때가 있다. 특히나 미국에 대한 평가를 할때 그런 문장들이 빛을 발한다. 미국 FDA 와 맥도널드에 대한 비판은 책속에 자주 등장하는데 이또한 영국 특유의 미국에 대한 감정이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팔레오 다이어트를 뒷받침하는 이론에는 또 하나의 제법 큰 허점이 있다. '석기 시대 인간'이라는 표현 자체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잘못된 용어라는 것이다. 원시 시대 집단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지역에 따라 구할 수 있는 식물과 동물의 종류가 달랐기 때문에 먹는 음식도 천차만별이었다. 물론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살코기가 주요 영양 공급원이었겠지만, 어떤 지역에서는 생선을 주로 먹었을 것이고 또 어떤 지역에서는 과일과 견과류를 중심으로 채식에 가까운 식사를 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가 채소를 먹는 방법은 옛날과 다르다. 이 사실은 우리의 소화 기관이 수백만 년 전에 만들어진 진화론적 틀에 고정되어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된다. 인간은 단 한 장의 청사진으로 결정되는 융통성 없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으며 항상 적응한다. (p. 86, 87)

저자는 다양한 다이어트에 대한 내용도 많이 다루고 있다. 석기시대 식단을 먹음으로써 다이어트를 한다는 팔레오 다이어트 를 대표적으로 언급하면서 인류의 신체가 얼마나 다양한 적응을 거쳐왔는지 생각해볼 것을 지적한다. 뭐든 한 가지 음식만 고집하는 다이어트는 효과적이지 않다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항상 고기에 집착했다. 특히 그는 샤퀴테리를 좋아했고 갖가지 햄과 소시지에서 영감과 기력을 얻었다. '초인'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창시한 악명 높은 철학자 니체는 잠시 채식을 해보기도 했지만 식생활에서는 건강보다 쾌락을 우선시하기로 마음먹었다. (p. 115)

데이비드 흄도 먹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특히 고기를) 말년엔 몸집이 너무 불어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된 나머지 짓궂은 풍자만화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는데 프리드리히 니체 또한 과일과 채소가 지성의 적들이 선호하는 음식이라며 음식에 대해서만큼은 예외적 사고방식을 따랐다고 한다. 덕분에 편두통과 소화불량과 이른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렀다고;;;

루소는 유아에게 모유를 먹이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모유 수유가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유대를 형성함으로써 가족 전체의 조화에 기여한다고 주장했다. 루소가 살던 시대에 이것은 아주 참신하고 급진적인 사고방식이었다. 당시 중산층 여성들은 자신이 낳은 아기에게 직접 모유 수유를 하는 일이 드물었고 아기를 양육하는 일에도 별로 관여하지 않았다. 18세기는 유모의 전성시대였다. 처음에는 왕실에서만 유모를 썼지만, 곧 모유 수유를 하는 사람에게 좋지 않은 낙인이 찍혔다. (p. 128)

다양한 분야에 급진적 관심을 갖고 활발한 저술활동을 했던 루소가 관심이 많았던 음식은 우유와 유제품이었다. 자신의 아이를 고아원에 맡겼다는 것으로 비난을 받기도 한 루소이지만 그가 했던 생각들은 지금 봐도 공감가는 부분이 참 많은 것 같다. 그러니 당시에는 얼마나 급진적이었겠는가.

이누이트(에스키모)는 동물성 지방을 아주 많이 섭취하고 채소는 거의 먹지 않는데 어떻게 오늘날 곡물, 과일, 채소, 고기, 달걀, 유제품으로 균형 잡힌 식단을 짜서 충실히 따르는 사람들보다 건강할까? (p. 132)

생화학자이자 에스키도 영양학 전문가인 해럴드 드레이퍼는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이 확실한 이누이트족의 식단이야말로 우리가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은 없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필수 음식이란 없고 필수 영양소만 있다. 그리고 필수 영양소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섭취할 수 있다. (p. 135)

'이누이트의 역설'은 지방이 해롭다는 기존의 상식을 편견으로 뒤바꾼다. 편식이 좀 있는 편인 나는 '골고루 먹어라' 는 말을 안좋아하는데 '필수 음식이란 없고 필수 영양소만 있다' 는 문장에 확 와닿았다. 나는 골고루 먹지 않지만 아주 건강하다. ㅎㅎ

당신은 왜 하루에 세 번 식사를 하는지, 그리고 서양의 전통적인 식사가 왜 세 가지 코스로 이뤄지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는가? 이 질문의 답은 영양과는 거의 무관하고 상식과는 더욱 무관하며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철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무엇보다 그 답은 역사상 가장 유명하면서도 칭찬은 가장 적게 받는 철학자들 중 한 명인 피타고라스가 숫자 3에 부여한 의미와 관련이 있다. (p. 142)

와우. 하루 세번의 식사가 피타고라스와 연관이 있을 줄이야. 농경사회인 우리나라에서 농경의 생활방식에 따라 삼시세끼가 관습으로 굳어진 것이겠거니 했는데, 서양에서는 피타고라스와 연결시킬 수도 있구나~

채소 위주의 요리는 왜 널리 유행하는 식사법이 되지 못했을까? 아쉽게도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구운 쇠고기 같은 음식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따. 그리고 그는 관찰을 통해서도 그렇고 첫 번째 원칙을 따르더라도 동물들은(그는 여자들도 동물로 분류했다!) 순전히 남자들에게 유용하게 쓰이기 위해 존재한다고 추론했다. 여러 문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성경과 코란에 담긴 가르침과 일치하기 때문에 그의 철학은 항상 우리에게 가장 많이 '주입되는' 철학 중 하나였다. (p. 160)

채소를 열정적으로 옹호하고 고기를 먹는 걸 전쟁을 일으키는 일과 비슷하게 취급하던 플라톤은 그의 위대한 선배인 피타고라스의 식단을 따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니었다. 그리고 중세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었다. 서양식탁에 채식이 아닌 육식이 위주가 된 것이 철학자들의 영향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처음 깨달은 것이었다. 하긴 먹고사는 것이 삶이고 삶에 대한 생각이 철학일테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ㅎㅎ

인간의 미뢰를 표시한 것으로 알려진 '혀 지도'에서는 '신맛과 짠맛을 감지하는' 영역이 더 넓고 설탕과 단맛을 감지하는 부분은 혀끝의 좁은 영역이라고 돼 있지만, 음식 평론가 마이클 모스가 지적한 대로 혀 지도는 1901년에 독일의 어느 대학원생이 만든 것이고 실제로는 '입안 전체가 설탕을 간절히 원한다'고 알려졌다. '입안에 있는 1만 개의 미뢰는 모두 단맛을 수용하는 특별한 미각 수용체를 가지고 있다. 그 수용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뇌의 쾌락 영역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모스의 설명이다. 간단히 말해서 설탕이 들어간 음식은 거부할 수가 없다. (p. 169)

'혀 지도' 는 나도 학교다닐 때 배웠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과학적이지 않았다니;;; 왜 교과서에 업데이트가 안된 걸까?? 여하튼 지방에 대한 오해와 설탕에 대한 오해는 저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있어 흥미롭게 읽힌다.

하루의 절반인 열두 시간(간의 글리코겐 수치가 중요한데,그 수치는 열두 시간 동안 굶어야 떨어지기 때문이다) 동안만 혈관에 영양분이 공급되지 않으면 인체는 몸속의 죽은 세포나 손상된 세포를 대체 에너지원으로 삼아 영양분을 얻는다. 이것이 이른바 '자가 포식'이다. (p. 183)

간헐적 단식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그냥 끼니를 줄이면 되겠거니 했었는데 아니었다. 시간차가 중요한 거였다. 다음에 간헐적 단식을 하게 된다면 최소 열두 시간은 지나야 체지방이 분해되기 시작할 거라는 걸 기억하고 있어야 겠다.

히틀러는 그가 열렬히 찬양했던 철학자 니체와 마찬가지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그가 니체와 똑같은 질환에 시달렸기 때문에 찬양했던 것은 아니다) 위경련, 과민성 대장 증후군, 복부 팽만으로 고생했다. 애초에 히틀러의 위에 문제가 생긴 이유는 그가 모든 채소를 삶아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채소에 있는 좋은 박테리아가 다 죽었던 것이다. (p 193)

히틀러는 채식주의자였지만 가리는 음식이 많았고 다양한 질병이 있어서 이런저런 약물에 수시로 의존했는데 나중엔 약물중독 증세가 나타나기도 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히틀러가 먹기전 먼저 먹어보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그 속에서 여자들은 전쟁상황 대비 잘먹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책의 저자는 히틀러가 삶은채소곤죽을 주로 먹었다니... 흠;;; 하여튼 히틀러는 먹는 것도 희한했나 보다.

다른 음식들과 마찬가지로 대두는 지지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는 음식이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콩이 정말로 그렇게 나쁜 거라면 정부에서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정부는 이미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 노력이 건강보다 돈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라서 문제지만 말이다. 아이들아, 미안하다! 거의 모든 선진국의 정부들은 사람들에게 단 것을 먹지 말고 운동을 더 많이 하라고 훈계하는 와중에도 지난 50년 동안 공적 기금으로 농업에 보조금을 열심히 쏟아부어 왔다. 그 결과 채소와 과일 같은 진짜 음식들의 가격이 40퍼센트 상승하는 동안 대두와 옥수수의 가격은 3분의 1정도 하락했다. (p. 239)

음식 문제에 있어서도 결국 정치문제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이 있다. 비싸지는 좋은 음식과 값싸지는 안좋은 음식중에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더 먹겠느냐 말이다.

미국에서만 가소제인 비스페놀A가 매년 30억 킬로그램이나 음식 사슬에 들어오며, 그 결과 현재 미국 국민의 93퍼센트에게서 비스페놀A가 검출된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비스페놀A는 우리의 배가 꽉 찼을 때 그 사실을 몸에 알려 주는 호르몬을 교란한다는 것이다. (p. 311)

미국에서의 비만 문제는 국가적으로 심각한 문제다. 플라스틱 용기에서 가장 크게 홍보하는 부분이 비스페놀프리 라는 단어던데... 미국의 문화와 FDA의 통과여부를 중요시하는 우리나라를 보며 과연 앞으로도 계속 미국뒤만 쫓아가야할지... 그래도 될지... 좀더 합리적이고 안전한 규정을 만들어 가야 하는 건 아닐지...

나중에 유럽인들이 아즈텍의 웅장한 축제에 초대받아 축제를 참관했을 때, 아즈텍 사람들의 삶에서 코코아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이 비로소 명백하게 밝혀졌다. 아즈텍 사람들에게 초콜릿은 국가의 가장 큰 집단 치유 의식이었던 것이다! (p. 370)

당시 공공장소에서 초콜릿을 마시는 것은 세련되고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징표로 간주됐고, 앤 여왕 시대에 유명했던 폴몰거리의 '코코아트리'라는 이름의 초콜릿하우스는 도박과 정치 토론의 중심지가 됐다가 나중에는 문학클럽으로 자리 잡았다. 이 문학 클럽의 회원들 중에는 '로마제국쇠망사'를 쓴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과 시인이었던 조지 바이런이 있었다. (p. 374)

코코아 즉 토콜릿은 중남미에서 전해졌다. 17세기 후반 아메리카를 침략해간 유럽인들은 처음엔 그 가치를 몰랐으나 금세 필수적인 음식으로 초콜릿은 자리매김했다. 얼마전에 읽은 '더 클럽' 이라는 책에 나왔던 클럽 멤버 중에 에드워드 기번이 있었는데... 기번은 다른 문학클럽 활동도 했었나 보다. 17세기에서 18세기는 살롱이던 펍이던 커피하우스던 여하튼 클럽이 문화적 소통의 중심이었으니 당시 지성인들은 각자 다양한 여러 클럽에서 활동했을수도...

이 책의 대부분은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자는 내용이고, 논리와 주장은 양념으로 조금만 곁들여진다. 불행히도 영양학은 부패한 과학과 위험한 교리로 채워져 있다. (p. 399)

건강한 식습관과 다이어트에 관해 지금까지 들은 모든 것을 '의심스럽고' '입증되지 않은' 사실로 받아들이고 잊어버리자. 다음 단계는 도저히 의심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몇 가지 사실을 토대로 당신만의 접근법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우리가 무엇을 먹을지, 가게까지 걸어갈지, 아니면 운전을 해서 갈지를 잘못 선택할지라도, 적어도 우리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에 관해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기계가 아닌 인간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p. 400)

철학자가 쓴 책이지만 사실 위주로 주장은 조금만 들어간 이 책은 '음식'에 대해서도 철학이 필요한 시대임을 깨닫게 한다. 과거의 위대한 지성이라 일컬어지던 철학자들도 음식문제에 직면했었고 자신들의 철학만큼 완벽한 해법은 제시하지도 실천하지도 못했다. 그들을 고심하게 했던 음식들에 대해 우리는 지금 더 많이 알게 됐고 마음만 먹으면 더 자세히 알아낼 수 있다. 철학까지는 아니더라도 음식에서만큼은 위대한 철학자들보다 더나은 생각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ㅎㅎ

500여 페이지의 꽤 두꺼운 편이지만 쉽게 읽히는 책이었는데, 본편이 400페이지 정도이고 나머지 부분은 부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철학자들과 연구자들에 대해 한명한명 이야기해주는 '포크를 든 철학자들' 은 철학자들의 색다른 면모를 알 수 있게 하고

그 뒤에 진짜 '부록' 에는 '모앙먄으로 효능을 알 수 있는 음식들' 이 소개되는데 하나하나 아주 흥미롭다. 예를 들면, 토마토는 심장모양, 호두는 뇌, 당근은 눈, 강낭콩은 신장, 고구마는 췌장, 셀러리는 뼈, 아보카도는 자궁, 오렌지/레몬/자몽 은 유방, 무화과는 고환, 버섯은 귀, 포도는 폐 의 모양과 닮았다고 하는데 그 효능들까지 읽고 나면 아~! 하게 된다. 뒤이어 '간식을 대체할 수 있는 음식들' 도 소개하는데 소금간이 된 피스타치오, 건조 토마토, 견과류와 건포도, 사과, 잣, 절인 청어, 달걀, 버섯, 베이크드 빈, 통조림 채소 등 나중에 한번 먹어봐야지 하고 적어둬 본다.

'추천자료' 에는 책에 소개된 자료와 주장들의 출처를 장별로 상세하게 정리해 놓았는데 읽어보면 유용할 듯한 책들을 다수 소개받을 수 있었다.

'각주 및 자료 출처' 도 어찌나 상세하게 정리해 놓았던지 감탄했더랬다. 특히나 { 피타고라스가 '콩을 먹지 말라'고 했던 것은 음식이 아니라 도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여러 가지 색깔의 콩 중에서 하나를 뽑는 방법으로 도박을 했기 때문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1947년 처음 출판된 '서양철학사'에서 콩에 대한 잘못된 편견(그리고 피타고라스에 관한 부정적인 견해들)을 의도적으로 강화했다. 그에게 넘어가지 마시라! (p. 495) } 부분은 꼭 기억해두기로 했다.

{ 내 생각에 위대한 철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사와 그들의 일상생활 습관 및 현실적인 관심사를 함께 논하는 책은 '철학적인 이야기들' 이 유일할 것 같다. (p. 517) } 이라고 본인의 책을 소개해 놓기도 했는데, 찾아보니 국내에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나 보다. 아쉽다...

철학자가 풀어놓는 음식에 대한 생각들은 의외로 과학적이었고 과거 위대한 철학자들의 식생활은 의외로 엉망?!이었지만 그랬기에 현실적으로 가깝게 느끼며 무겁지 않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양한 주제에 대해 다양한 생각들을 담아낸 책들이 자주 눈에 띄는 시대가 됐다. '음식' 에 대한 중요성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타당한 근거를 찾기 위해, '음식'에 대한 중요성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면 음식을 중요하게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혹은 '음식'에 대한 가벼운 철학적 접근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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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아이 백천수 씨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80
손서은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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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보이의 유쾌하고도 아슬아슬한 일탈

1만 킬로 떨어진 아프리카에서 보낸 뜨거운 여름

 

스펙을 쌓으라는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해외봉사 겸 영어연수 차 간 아프리카 케냐에서 살해사건에 휘말린 고등학생의 파란만장 스토리 라는 출판사의 책 소개글에 호기심이 확 일어났던 책이었다. 자주 왕래가 있던 나라도 아닌 아프리카에서 부모나 의지할 어른도 없는 고등학생이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된다면 얼마나 혼란스럽고 막막할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처질 정도다.

하지만 이 책은 청소년 소설이고 게다가 내가 예전에 무척 감동깊게 읽은 <컬러보이>의 손서은 작가의 작품이다. 무엇보다 '자음과 모음'의 청소년문학 작품들은 늘 나의 기대치를 충족시켜주었었기에 이번 작품에 대한 믿음도 남달랐다. 그리고 이 소설 역시 '자음과모음'사의 청소년문학은 역시 마음에 직접 와 꽂히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20xx년 8월 2일 나이로비 뉴스N

나이로비 근교의 한 펍에서 만취한 한국인 10대 두 명이 현지 경찰에 체포됐다. 국제 자원봉사 단체인 '아이러브 발룬티어'의 참가자들로 케냐를 방문한 이들은 카지아도현의 마사이 빌리지에서 어린이를 숨지게 한 후 차를 훔쳐 달아나던 중에 붙잡혔다. (p. 9)

자극적인 멘트의 나이로비 현지 기사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기사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라 헉 싶으면서 시작과 동시에 작품에 바로 빠져들게 한다.

공항 로비를 가득 메운 한국인 단체 티는 우리는 관광을 위해 케냐에 입성하지 않았노라 선언하고 있었으니 지저즈, 러브, 스탠바이갓 등등의 문구로 자신들의 신성한 임무를 드러냈다. 그 많은 인원이 이반 아셰프의 세련된 지프를 지나쳐서 한국인 선교사가 대절한 값싸고 구질구질한 버스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의 머리 한 귀퉁이가 찌릿했다. 세상에. 노다지가 따로 없었다. 저들의 고귀한 스피릿은 아이러브 발룬티어의 사명과 닮아 있었다. (p. 12)

이반 아셰프는 '아이러브 발룬티어' 라는 국제자원봉사단체를 만든 사람이지만 이 자원봉사단체는 비영리기구도 아니고 이 사람은 케냐 현지인도 아니다. 그에겐 여전히 아프리카 땅이 유럽인들의 땅이었다. 과거에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몰려와 책상에 지도를 펴고 자로 선을 죽죽 그어 자기들끼리 땅따먹기를 했던 그 시절이 물러간지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아프리카는 유럽인들의 여행지, 휴양지였고 그쪽에서 들어오는 돈 없이는 굴러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반 아셰프는 자신이 인류애에 기반한 관광사업을 운영한다고 여겼기에 가슴에 사랑이 새겨진 인류 전체가 그에게 고객이었다. 어느날 우연히 나이로비 공항에서 목도한 코레안단체팀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로 각인되었다.

"한국 시장을 노려 봐야겠어. 아이디어 좀 없나?"

"나이로비에 학원을 세우시든가"

"하건? 그게 뭔데?

"노노, 하건이 아니라 학원이라니깐. 학원은 영어로 대체가 안 되거든. 한국만의 독특한 교육문화라서. 학교 끝나면 뭘 배우러 가는 데야. 그게 다 학원이고. 그중에 제일은 영어 학원이지. 돈 벌고 싶어오? 영어 학원을 세워. 그러면 돼. 한국인들이 사교육비로 쓰는 돈이 연간 한 170억 달러쯤 되지, 아마"

"오! 자넨 천재야. 당장 프로그램을 짜게. 한국 학생들 좀 모아 보지 그래. 처음이니까 현지 숙박은 우리 쪽에서 지원해 주는 걸로 하자고. 단체 홍보도 할 겸. 자네 한국 네트워크를 이용하면 되겠구먼. 오랜만에 힘 좀 써봐" (p. 14, 16)

해리 백은 오래전 선교사로 케냐에 왔다. 하지만 잊지 못할 사건이 있었고 지금은 '아이러브 발룬티어'에서 일하고 있다. 이번 프로그램만 성공시키면 본부로 올라오게 해준다는 이반 아셰프의 말에 머리를 굴리던 그는 십여년 만에 형수에게 이메일을 띄운다.

착한 여행이 유행하면서 미숙씨도 한때 아프리카 현지 여행사와 손을 잡고 이런 프로그램을 운영했던 적이 있다. 커피 농장 투어, 반일짜리 자원봉사, 빌리지 투어, 소똥집 짓기, 이런 것들은 빤한 관광에 걸린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여행 트렌드로 다가왔다. 많은 이들이 현지식, 지속가능성, 자립, 공정, 착한, 에코, 유기농 기타 등등의 단어에 사로잡혀서 그런 참여가 세상을 좋게 만든다고 착각한다. 미숙씨가 보기에 그들은 착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착한 건 현상을 어수룩하게 덮는 거다. 그래서 그런가, 요샌 다크 투어리즘이 새로이 떠올랐다. 지난 세기에 인류가 저지른 죄상을 덮지 않고, 들추어 찾아가서 보고 배우겠다는 것인데 이러나저러나 업계 사람이 보기에 궁극의 목적은 모도 돈으로 귀결되었으니 다르긴 뭐가 다르냐. (p. 19)

해리 백의 형수인 미숙씨는 대학 내내 가난한 배낭여행자로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닌 경험이 바탕이 되어 일찌감치 여행사에 취업, 여행지에서 진화한 생활 영어와 발로 뛰는 영업으로 높은 실적을 올렸고, 여행 업계에서 아이디어와 기획이 뛰어나다는 정평을 일찌감치 얻었다. 저가 항공이 막 태동하던 시기에 과감히 회사를 나온 후 투자를 받아 동료들과 이지고를 창립하여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미숙씨는 직원들에게 근엄한 간부가 아니라 현실적인 멘토이자 돈 잘 쓰는 선배였으며, 학부모 세계에서는 쿨한 맘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미숙씨는 자신의 아들과 서로 간섭안하는 쿨한 사이라며 아들을 천수씨라 부르는 동거인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백천수씨는 그녀의 영원한 '마이넘버원' 이었고 마음에 차지 않는 아들이었다.

미숙 씨의 마이 넘버원 백천수는 밖에서 점심을 먹을 경우 또와 분식집을 이용했는데 그곳 말고 다른 음식점은 안 갔다. 천수는 가는 데만 가고 입는 옷만 입고 먹는 음식만 먹었다. 다른 곳은 낯설고 불편해했다. 호기심도 모험심도 없었다. 식욕 같은 거라도 있으면 메뉴별로 밥집을 훑으며 돌아다닐 텐데 그런 것도 없었다. (p. 21)

여행사를 운영하는 베테랑인 미숙씨가 '아이러브 발룬티어'의 정체가 선진국 사람들의 아프리카 판타지에 자원활동과 빌리지체험을 얹은 전문 여행사 정도로 정의 내리는 데는 타당한 근거가 차고 넘쳤다. 남이 되어 연락끊고 지낸지 십여년만에 받은 시동생의 메일내용은 코웃음치고 바로 휴지통으로 직행했다. 하지만 단 한가지, 천수가 그런 프로그램이라도 체험하면 친구도 사귀고 자신감도 좀 갖게 되지 않을까 싶은 기대가 자꾸만 커져갔다. 미숙씨의 마음이 통했던 것은 아니지만 방학이 오기만 하면 가출하고 싶었던 천수에게도 그 프로그램은 방학이면 더 빡빡해질 학원프로그램을 탈출할 희망처로 보였고 스스로 지원서를 제출했다.

"야, 백천수씨. 그런 건 엄마가 할게. 넌 힐링이나 마저 하셔"

거실 소파에 앉은 엄마는 유명한 스님이 쓴 에세이를 읽으며 구멍 난 마음을 힐링했고, 천수는 구멍 난 학습을 힐링했다. 천수는 대한민국에 힐링이라는 외래종 단어를 처음 들여온 사람을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깟 힐링이 문제가 아니었다. 바야흐로 회복기가 오고 있었으니 여름방학이었다. 방학은 자잘한 상처를 치유하기보다 문제의 근원을 잡아내여 수술하기 좋은 때였다. 학습에 병약한 천수를 위해 미숙씨는 대수술을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p. 33)

 

이 시대 학업과 학원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이 읽으면 공감할 대목이 아닐까. 학교 보다는 학원에서 더 많이 배우고 더 먼저 배우는게 언제부터 일상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방학이면 휴가가 아니라 풀타임으로 짜여진 학원계획표를 짜는 것이 평범해진게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공부하라고 하지 힐링하라고 책상에 내모는 미숙씨에게 천수는 한마디 대꾸도 못하곤 했다.

미숙씨는 아들의 처진 눈커풀과 갉아먹은 손톱을 볼때마다 가슴이 따끔거렸다. 어쩌다 저런 못난 자식을 키우게 됐을까. 저걸 스파르타식 학원에 감금한다고 뼛속에 박힌 맹한 기운을 다 뽑아낼 수 있는 건가 말이다. 미숙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고뇌했다.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모두가 단 하나의 트랙 위에서 단 하나의 목표점을 향해 달려간다. 천수 같은 아이도 살아갈 다른 길이 분명히 있어야 했다. 그러나 미숙씨가 알기로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막차라도 잡아타고 끝까지 쫓아가야 했다. 그런 미숙씨에게 난데없이 해리가 괴상한 제안을 한 것이다. (p. 34)

해리 백은 미숙씨의 남편의 쌍둥이 동생이다. 천수가 일곱살일때 헤어진 그 집안 사람들을 생각하면 화가 날 뿐이지만 천수의 앞날을 생각하자니 그 프로그램에 자꾸만 마음이 갔고 결국 자신의 여행사 홈페이지에 대대적인 홍보글을 올렸다. 어차피 천수는 그 프로그램의 수혜를 받기로 내정되 있었지만 그런 내막을 모르는 천수는 스스로 지원했고 홈페이지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이 게시된 순간 예상외로 뿌듯했고 그때부터 이미 없던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빠를 싫어해. 나는 아빠를 닮았어. 엄마는 나도 싫어해. 억지로 키우는 것뿐이야. 그래서 노력했다. 아빠를 닮지 않으려고. 엄마 마음에 들려고. 착한 아들이 되려고. 그러나 결국 그 세계는 터져 버렸다. 빵꾸 났다. 너덜너덜했다. (p. 59~60)

여행 전날 처음으로 크게 엄마와 다툰 천수는 홀로 집을 나와 홀로 공항버스를 타고 홀로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는 내내 뒤를 수시로 돌아보았지만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혼자 외국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리스 서밋에서 마거릿 패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마거릿은 사교성이 좋아서 사람을 보면 먼저 말을 거는 스타일이었고, 일단 대화를 시작하면 쉽게 끝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가, 몇몇 사람들은 마거릿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잽싸게 내뺐다.

마거릿은 특히 아이들을 아꼈다. 마트에서 우는 아이가 있으면 (아이 엄마가 원하건 원치 않건) 자기 돈으로 사탕을 사서 아이의 손에 들려 주었고, 쇼핑몰에서 길을 잃은 아이를 보면 아이 손을 덥석 잡고 아이스크림 가게로 데렸다. 아이를 찾던 부모가 감사의 말대신 마거릿을 신고한 경우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경비가 부모를 뜯어말리며 하는 소리가 패리 여사는 종종 그런다는 것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불행한 10대 아이들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마거릿은 지폐 몇 장을 건네주고 가던 길을 가는 무심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 아이들을 맥도날드에 데려가 마음껏 먹도록 해 주었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엄청난 굉음을 내며 때로 달려오는 모터바이크가 마거릿의 차를 둘러싸고는 배가 고프다고 징징거렸다. 빅맥을 해치운 아이들은 입술에 립스틱을 칠하고 꽉 끼는 셔츠 안에 패드를 넣고 젤 바른 머리를 한껏 치켜올린 다음 모터바이크에 엉덩이를 붙였다.

"근데 왜 웃어? 당신도 저럴 때가 있었겠지. 근데 봐요. 우린 나이들었어. 순식이었잖아. 저때 누군가 얘기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p. 76, 77, 78, 80, 81)

 

마거릿은 자신의 착한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지쳤고 자신을 꼰대라 부르며 놀리던 10대아이들 처럼 일탈을 해보고 싶어졌다. 그때 봉사와 여행이 결합된 '아이러브 발룬티어'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고 남편 존과 함께 케냐로 왔다. 그리고 천수와 (천수가 보기에 엄청난 능력이 있는 아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여고생 고승아 와 한 팀이 된다. 사실 승아는 아기때 외할머니에게 버려졌고 여름방학때 외할머니의 애인과 단칸방에서 지낼 수는 없어서 잘곳을 찾다가 여행사 직원의 호객행위에 이끌려 지원서를 낸 것이 발탁된 경우였다.

"안녕하세요, 리디아에요. 엔젤스 스쿨 1학급 담임입니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패리 여사께서는 오늘 저희 반을 맡으실 거예요. 여기서 가장 어린 학생들이죠"

"다른 학급의 선생님들도 제 수업을 참관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이래 봬도 미국 사람이잖아요. 영어 교육은 케냐에서도 물론 중요하겠죠" 뭐, 세계 공용어니까요. 제가 어떤 식으로 강의를 하는지 다른 선생님들도 보고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해서요" (p. 102, 103)

"그럼 따라 해 볼까? 에이, 애플. 비, 버내너"

아이들은 색연필을 던져 가며 왁자지껄 떠들었다. 종이를 북 찢어서 비행기를 접기도 했다. 마거릿의 얼굴이 점점 뜨거워졌다. 도통 통제가 안 되는 군.

"쟤들 파닉스 다 떼지 않았어?"

해리가 리디아에게 속삭였다.

"영어로 일기도 써요" (p. 104)

 

아프리카 아이들은 그저 못먹고 못배우고 불쌍할 것이라는 그래서 선진국에서 봉사를 가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과연 착하기만 한 생각일까??

앙벵야는 아이러브 발룬티어를 찾는 서양인들에게 민박을 제공하고 돈을 벌었다. 그쪽 사람들은 자신들의 편리한 생활에 주기적으로 염증을 느낀다고 하면서 아프리카를 찾았는데, 이곳에 와서 물도 떠다 주고 염소도 대신 치며 여러 가지 자잘한 일들을 거들다가 2~3일이 지나면 떠났다. 그렇게 앙벵야는 자기 집에서 한 발짝도 더 나가는 수고 없이 저절로 앉아서 돈을 벌었다. 더욱 기막히게 좋은 것은 자원봉사자들이 지어준 마냐타로 이듬해 또 다른 여행객들을 상대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거였다. 앙벵야는 해리의 영어 실력과 인터넷 운용 능력을 빌려 홈스테이로 비즈니스를 확장했다. 매년 여름이 되면 여행객들은 앙벵야의 개인 사이트에 접속해 서로 마냐타에서 자겠다고 경합을 벌였다. (p. 116)

마사이 마을의 대모격인 앙벵야는 해리 백이 처음 케냐에 와서 선교활동을 할때 만났던 인연이었다. 둘의 인연은 이제 상처의 기억으로 얼룩졌지만 여하튼 여전히 둘은 사업적으로 훌륭한 파트너였다. 소똥으로 지은 전통집 맨땅바닥에서 불편한 잠을 자겠다고 오는 서양인들을 앙벵야는 수도없이 봐왔다.

하지만 동네 어린 소녀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았고 그 원인 제공자가 해리가 데려온 4명의 이방인들 중에 있음을 알게 되자 앙벵야는 움직인다.

메리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외국인들, 살인자들, 맞은편 소파에 앉아 기삿거리를 찾던 수습기자의 귀가 크게 열렸다. 뭔가 조합이 마음에 든다.

사냥감을 문 젊은 기자의 두 눈이 빛났다. 기자는 메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상상력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메리가 가고 난 후 그는 심드렁한 경찰들을 부추겼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잖아. 당신들 모두를 승진시켜 줄 큰 사건, 살인이다. 범인은 나왔고 당신들은 그저 시늉만 해라. 기사는 내가 잘 써 줄게. 케냐 경찰이 얼마나 기동성 있게 사건에 대응했는지 전 국민에게 알려 주마. 마침 손톱 때를 다 벗긴 경찰이 곤봉을 들고 일어섰다. 그래? 그럼 슬슬 한번 가볼까. (p. 172)

 

존에게 두둑한 후원금을 받은 이반은 마거릿 부부를 미국으로 안전하게 돌려보냈고 한국아이 두 명은 케냐경찰에게 붙잡혔다. 케냐 언론은 점점 더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냈고 국제사회에도 알려지게 된다. 미국으로 돌아간 마거릿은 길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를 집에 데려와 보살피다가 유괴범으로 몰려 유치장에 갇혔다. 케냐의 유치장에는 천수와 승아가 미국의 유치장에는 마거릿이 갇혀 있는 상황에서 상관 없을 듯한 이 두 사건은 '알리스'라는 한 사람으로 인해 연결되게 된다. ('알리스' 라는 존재는 생각지 않았던 성적 자아정체성 문제까지 생각해보게 만든다.)

브라운 서장은 무조건 자기 아이 편을 들고 자기 아이가 옳다고 주장하는 부모를 여럿 보았다. 학교 폭력으로 고발당한 아이들의 부모는 대다수 비슷한 패턴을 가졌는데 원래 자기 아이들은 순하고 좋은 아이란다. 그들은 어떻게든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고 빠져나가는 데만 혈안이었다. 뭐니뭐니 해도 그들에게 일관된 공통점은 "그래서 피해자 아이는 좀 어때요? 괜찮을까요?"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관심사는 오직 내아이, 내 아이의 미래였다. (p. 180)

마거릿이 데려온 아이 라몬은 자신이 가정폭력으로 도망나왔다고 했다. 열여섯 이라는 나이를 속이고 펍에 가도 될 나이라고 했다. 라몬의 부모는 한달전부터 대대적으로 유괴범을 찾는 중이었다. 그 라몬이 마거릿과 함께 펍에 있을 때 경찰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말해 봐. 그 잘난 혀로 지껄이라고. 여기 온 목적을 달성해야지? 라몬, 네가 저지른 일들을 난 다 이해하고 용서한단다. 우우. 네 본성은 원래 착하잖니. 라몬, 누구나 실수는 하잖니. 다 거기서 거기야. 나도 그랬는데, 뭐 그러니까 너도 그만 널 용서하렴. 밖에서 기다리는 어머니 생각도 해야지. 널 얼마나 사랑한다고, 우우. 빌어먹을 사랑은! 그 얼굴을 보면 다 긁어주고 다 뭉개 버리고 싶어져. 알아? 미친! 당신이 뭘 안다고! 웃겨, 당신은 몰라" (p. 213)

착하다는 것이 무엇일까? 착한 마음이란 무엇일까?

악하기만 사람도 있지 않을까? 이기적이기만 한 사람도 있지 않을까?

나의 선의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상대방을 통제하고 인정받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상대가 아닌 나를 위해서 였던 것이 아닐까?

돕는 다는 것이 착한 행동일까? 사람이 사람을 도와주고 변화시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긴 한걸까?

내가 아닌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까? 부모자식 혹은 부부 라는 가족관계 안에서 이해의 범위는 오히려 좁아지는 것이 아닐까?

착하다 vs 착하지않다 로 양분되는 입장이 될 수 없는 많은 질문들을 품은채 가볍게 빠져 읽은 책에서 무겁게 나오는 중이다.

착한 아이 백천수씨의 일탈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만한 커다란 사건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난 지금 천수가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눈도 못 마주치던 엄마와도 얼굴도 희미한 아버지라는 존재와도 왠지 이제껏 하지 못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착한아이 백천수씨가 멋진어른 백천수씨가 될 것을 믿으며 이시대 모든 (착한아이)백천수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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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희순 - 노래로, 총으로 싸운 조선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정용연.권숯돌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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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람 의병단'을 이끈 조선 최초의, 유일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따뜻하고 감동적인 그래픽노블로 만나다!

 

윤희순.

낯선 이름이다.

게다가 독립군도 아니고 의병장 이라...

조선말 의병들의 활동에서 여성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어지러운 나라안팎의 위기속에서 분연히 일어나 목숨 걸고 싸웠던 수많은 의병들 중에서 독립군으로 이어진 사람들은 숱하게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자신의 이름을 남긴 여성은 아마도 많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조선 최초의 여성 의병장' 이라는 타이틀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1961년 서울 변두리 판자촌에서 넝마주이 소년 둘이 재활용품을 수집하고 있다. 거리의 사람들은 흘끔흘끔 쳐다보고 남루한 소년들을 피한다.

"와! 이런 집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 사는 걸까?

"적어도 독립운동가 후손은 아니겠지" (p. 14)

우범자로 신고되어 잡혀간 경찰서에서 인적사항을 대라는 경찰의 말에 독립군집안이라는 동생의 말은 무시당하는 것을 넘어 비웃음을 산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은 무시당해도 친일파의 후손은 떵떵거리고 살던 대한민국이었다. 그렇게 소년의 억울한 눈빛을 뒤로 하고 1935년 과거로 넘어간다.

"어머니, 이리 곡기를 끊으시면 어떡합니까? 아범이 떠난지 벌써 수일이 지났습니다. 압니다. 어머니 마음. 저도 자식을 키우니까요. 하지만 이제 뭐라도 드시고 기운을 차리셔야죠" (p. 54)

왜경에게 큰아들을 잃고 노구의 어미는 붓을 들어 찬찬이 그동안의 일들을 되짚어보기 시작한다. '고흥 유씨 항재 처 패형 윤씨 가정록' 줄여서 '일생록' 이라고도 하는 한글일기를 남기고 있는 이 할머니가 바로 윤희순 의사 이시다. 일기속에서 시간은 다시 거슬러 1868년으로 올라간다. 서양과 일본이 동시에 조선을 넘보던 때였고 아직 중국을 제외한 국제정세를 모르던 조선이었다.

"말이 되는 소립니까? 공맹의 도리를 모르는 자들과 화친이라니요. 그들이 정말 화친을 하자는 것일까요?"

"그들의 꿍꿍이가 무엇이든 이 난관을 헤쳐나가려면 다시 오륜을 세우고 민력을 키우는 수밖에요"

"옳은 말씀입니다. 허나, 어떻게 말입니까?"

"준비를 해야겠지. 우리 유생들도 붓 대신 칼을 들어야 할 때가 올 테니." (p. 62, 63)

윤희순의 집안은 대대로 뼈대있는 유생들을 배출시켜왔고 난국의 상황에 통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에 못지 않게 올곧은 뚝심을 가졌던 윤익상의 아들과 1875년 윤희순은 혼례를 치룬다. 그렇게 한양에서 강원도 춘천까지 오게 되자마자 시아버지는 뜻있는 활동을 하느라 남편은 못다한 공부를 하느라 바빠 넉넉지 않은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은 오로지 윤희순의 몫이었다.

"아~ 우리 팔도 동포들은 차마 망해가는 나라를 내버려두려 하는가!

국모의 원수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는데,

임금마저 머리를 깎이고 의관을 찢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팔도 백성 역시 외세에 의해 몰살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우리 의병은 국가와 자신을 위한 의리와 복수로 마땅히 떨쳐 일어서야 할 것이다.

국가와 대도의 존망 앞에 고하노니 제야의 선비, 산촌의 필부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 함께 일어서자.

능욕 앞에 싸우지 못하면 장차 천하 만세의 입을 어찌 막을 것인가!

거적 위에서 잠자고 창을 베개 삼으면서 모두 끓는 물과 불 속으로 나아갈지어다.

그리하여 기어코 온 세상이 재건되어 하늘이 다시 밝아지는 것을 볼 터이니... 부디 정성을 다해 함께 대의를 펼치자!" (p. 118, 119, 120)

힘없는 나라 안에서 외세가 충돌하고 일본이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선다. 하지만... 너무도 허망할 정도로 의병활동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너무 일찍 가장 아닌 가장이 되어야 했던 첫째 돈상이, 아이다운 투정도 호사였던 민상이, 그리고 곧 몰아닥칠 힘든 시기의 기억밖에 가지지 못할 셋째 교상이.

그때는 할미도 미처 알지 못했다. 자식에 대한 애잔함도 허락지 않을 시간이 오고 있다는 것을. (p. 177)

홀로 세 아들을 건사하며 마을을 지나가던 의병 패잔병들을 보살피던 윤희순은 상황이 더욱 어려워질 수록 자신이 할 수 있는 몫을 일부러 찾아 힘을 보탰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며 하나둘씩 마음을 합쳐나갔다.

"지금은 나라의 존망이 을미년 때보다 더 위태로워졌습니다. 더는 남녀유별이란 병풍 뒤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지요"

"그래서 자네 생각은 뭔가?"

"안사람 의병단을 만들 것입니다." (p. 218)

남자들의 의병활동도 처참히 무너져가던 때 윤희순은 아낙들을 모아 안사람 의병단을 만든다. 뜻을 세웠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해를 시킴으로써 마음을 모았고 총술 훈련에도 앞장섰으며 무기제작에도 힘을 보탰다. 그렇게 다시한번 일어선 의병들은 1907년 도성을 향하지만 역시나 역부족이었다.

갑오년에는 동학도들의 시신으로 뒤덮였던 남도의 들판이 1909년 기유년에는 의병과 그 가족, 이웃의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p. 266)

조선말 의병의 주축은 동학이었던 걸로 알았는데, 이 책에서 의병활동은 동학과의 연관이 불분명하다. 윤희순의 시아버지가 가담한 의병은 종교와는 관련이 없는 걸로 보여지고 당시 혼란스런 나라안에서 다양한 원인으로 일어선 의병활동이 있었겠지만 그 갈래를 설명해주지 않은 것은 좀 아쉬웠다.

여하튼 그렇게 무너져내린 의병활동으로 살아남은 이들은 좌절했지만,

"아버님! 제발 칼을 거두어주십시오"

"말리지 말거라. 선영들께 더는 대죄를 지으며 구차히 살 수 없다.

거의소청도 실패하고 이제 남은 길은 자정치명 밖에 없질 않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님. 거지수구의 길도 아직 남아있습니다"

"부질없는 말이다"

"목숨을 끊기는 쉽습니다. 멋모르는 열여섯에 시집 온 뒤로 아버님이 저를 키워주셨습니다. 아니, 의병운동으로 부재 중인 아버님의 빈자리가 늘 저를 가르쳤습니다. 빈자리는 빈자리가 아니었지요. 늘 꽉 차 있었습니다. 아버님, 저를 위해 한번만 더 어렵고 혹독한 길을 가주십시오." (p. 292, 293)

목에 칼을 댄 시아버지를 만류하며 윤희순은 다시한번 뜻을 세워주시길 간청한다. 윤희순과 가족들은 다시한번 의지를 다지며 중국땅으로 향한다.

할미는 배움이 짧아 조선이 망국에 이른 복잡한 정세는 미처 알지 못한다.

허나 이것만은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너희 조상 모두가 금전과 권력에 어둡고 제 한목숨 부지하기 급급한 건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p. 306)

천신만고 끝에 만주땅에 자리잡은 가족들은 거친 땅을 일구며 중국 현지인들에게도 진심을 다했고 힘든 타국살이에서도 독립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조선에서는 안사람 의병을 길러내던 당신이 중국 땅에선 독립운동가를 기르는 교장이 되었구려" (p. 326)

인재를 기르던 학교도 4년만에 문을 닫아야 했고 그 사이 시아버지와 남편도 저세상으로 떠났다. 하지만 윤희순은 다시 굳건하게 일어섰다.

 

사람들이 찾아와 모일 학교가 없어졌다면 뜻을 품은 자가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일으키면 되는 것.

나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p. 342)

할미라고 왜 없었겠느냐. 슬픔과 동무 되어 오래도록 주저앉고 싶을 때가.

무쇠같이 단단한 마음도 모래처럼 부서지고 무너질 때가 왜 없었겠느냐.

그러나 할미에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다. (p. 351, 352)

아직 어린 세 아들을 데리고 윤희순은 흩어진 간도땅의 동지들을 찾아나섰다. 그렇게 1920년경 다시 조선독리단을 만들고 독립단 학교를 세웠다.

하지만 나날이 악랄해져 가는 일본군에 의해 큰아들을 잃고 나서 노구의 어머니는 더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그리고 1996년 어느날의 서울.

"무덤을 찾았다구요?"

"그래. 그럼 공항에서 보기로 하자"

"평생 숙원을 이루신 거네요"

"그러게 말이다. 대접은 고사하고 멸시를 받을 땐 독립운동가 후손이란 게 원망스러웠다만 버틴 세월이 헛되진 않았나 보구나" (p. 382, 383)

윤희순의 손자, 손녀는 중국 땅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 찾기를 희망했던 할머니의 묘를 찾았다. 다행히도 그 묘는 동네사람들에 의해 대대로 보살펴지고 있었다. 현지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저희 부모님이 늘 말씀하셨지요. 이 동네 사람치고 윤 할머니 덕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요." (p. 385) 나라는 보살피지 않았지만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은 1935년 일생록을 마무리하던 즈음의 날로 되돌아간다.

용서하거라.

죽음보다 어려운 삶을 너희에게만 떠안긴 채 혼자 떠나는 것을.

나라 잃은 백성으로 내 어찌 자식 잃은 슬픔을 혼자만 겪은 듯 유난스레 굴까마는, 이제는 정말 기력이 소하고 고단하여 쉬고 싶구나.

한 번도 나만을위해 살아보지 못한 할미에게 마지막 이기심을 허락해다오.

할미가 다 마치지 못한 일기는 광복된 세상에서 너희가 채워주기 바란다.

그리고 부디 기억해다오.

좋은 옷, 기름진 음식, 푹신한 잠자리에 입히고 먹이고 누이진 못했으나 우리는 너희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는 것을.

무엇을 지키려 했냐고? 글쎄다.

때로 그것은 누군가에겐 가족이었고 누군가에겐 이름이었고 목숨이었고 땅이었고 하늘이었고 자존이었고 독립이었을 테지.

그러나 내 대답은 좀 미뤄두기로 하자.

우리가 그토록 처절히 지키려 한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는 훗날 너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겠느냐?

너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이다. (p. 411 ~ 414)

향년 76세 였다.

일생동안 힘든 길을 마다하지 않았으면서도 미안하다며 무겁게 생을 마쳤다.

당신이 그토록 어렵게 지켜낸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고 자랑스럽게 대답할 만한 무엇을 우리는 지금 갖고 있는가? 여전히 지키고 있는가?

역사가 알아주지 않는 민초의 삶은 늘 더 깊은 묵직함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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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혁명가 김원봉
허영만 지음 / 가디언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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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치하 독립운동사에서 '김원봉'의 이름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굵직한 만화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해온 만화가 허영만에 의해 독립운동가 아니 독립혁명가 김원봉을 접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듯 눈에 생생한 만화를 다 보고 나면 마음 한켠이 묵직해지면서 당시의 고통과 고뇌가 조금은 전해져 오는 것만 같다.

3·1 운동 대표 33이는 군중이 모여 시위가 폭동으로 변할까 봐 모임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요릿집 태화관으로 바꾸고 독립선언식을 치른 뒤 일본 경찰에 통보하고 자기 발로 잡혀 들어갔답니다. '민족이 당면한 문제는 민족 스스로 해결해야 하며 미국은 그런 민족을 돕겠다'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얘기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만세 운동을 일으키면 미국이 일본한테 한국에서 물러가라고 할 것이다? 미국의 민족자결주의가우리나라에도 해당된다면 파리평화회의에서 김규식이 연설할 때 돕는다고 나왔어야히죠. 우리가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겼던 을사년에 가장 먼저 공사관을 철수한 나라가 미국이었어요.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는 것을 일본이 눈감아주는 조건으로 일본의 조선 강탈을 도와줬다고요. (p. 13 ~ 14)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에 내재된 민족과 국가 개념은 미국을 위시한 서방 강대국들을 위한 논리였지 결코 당시 주권을 빼앗긴 약소국들을 위한 논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 약소국들 중에 대한민국은 아예 끼어있지도 않은 국가 취급도 받지 못하는 일본의 식민지일 뿐이었다.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당대 지식인들의 한계를 김원봉은 꿰뚫어 보았다.

저는 3·1 독립선언서보다 대한 독립선언서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지만 강한 방법으로 일본과 싸우겠습니다! 정의로운 열혈 지사를 모집해 단체를 만들겠습니다! (p. 18, 19)

당시엔 좀더 효과적이고 충격적 효과를 줄 만한 방법이 필요했다. 평화적인 협상을 통해 독립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 김원봉의 무력투쟁 결심은 그의 성격상 당연한 결론이었다.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재정을 틀어쥐고 돈을 내어놓지 않으니 다른 독립 단체를 지원할 수 없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세울 예정이던 비행학교 사업도 중단했다. 마흔다섯 유부남이었던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모인 돈으로 스물도 안 된 처녀와 고급 호텔을 이용하며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p. 20)

먼 거리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소통도 어려웠던 때에 미국에서 스스로 한국의 대통령이된 사람을 저지할 방법도 여력도 없었다. 중국과 국내 상황은 점점 어려워져 갔고 그 상황을 돌파할 방법을 찾는 것만도 어려웠던 때였다.

자유와 독립은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의열단원이 선구자가 되어 민중을 각성시킵시다! (p. 27)

김원봉이 찾은 돌파구는 '의열단' 이었다.

단재 신채호는 임시정부가 생기기 전에 이미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당을 만들고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나, 이승만의 만행에 진저리를 치고 사퇴했다. 김원봉은 행동가이고 신채호는 사상가여서 그 성격은 달랐으나 조국 광복이라는 목표는 하나였다. (p. 158)

김원봉이 신채호를 만나 부탁한 '의열단 선언문'은 폭력성으로 매도되곤 했던 의열단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그렇게 나온 것이 '조선혁명선언'이었다.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에 새로운 활력과 투지를 심어주었다. 지금까지의 활동이 다소 즉흥적, 비체계적인 투쟁이었다면 조선혁명선언의 완성으로 의열단은 항일 투쟁 노선을 한층 정당화하고 이념적 지표를 갖게 되었다. 구체화된 민중혁명론은 의열단원 자신이 민중 직접 혁명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필연성을 제시했다. (p. 163)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과 폭탄을 함께 던져넣었던 의열단원들을 어쩔수 없다 생각하면서도 안타까워 했기에 김원봉은 당시 중국 정세에 따라 다양한 투쟁방법을 고심해야 했다. 당시 중국 내부는 외세의 침략과 왕권의 몰락과 새로운 사상투쟁으로 혼란 그 자체였다. 그 여파는 한국 내부에서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3·1 만세 운동 이후 일본은 문화 통치를 내세우며 사회단체를 자유로이 만들 수 있게 했으나 만세 운동을 이끈 개신교와 천도교 산하에는 제대로 된 조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국내의 조선공산당 지부는 남아 있었다. 조선공산당 강력은 조선혁명선언과 일맥상통했고 거사를 위한 새 조직을 만드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조선공산당과 의열단은 손을 잡았다. (p. 176, 177)

중국공산당과도 조선공산당지부와도 러시아공산당과도 그 어느 세력이 되었건 독립을 위해서라면 가능한 다양한 협력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상해임시정부는 사상의 차이에 분명히 선을 그었으나 김원봉은 오로지 '자주독립'을 목표로 삼았다.

중국이 좌우로 갈라져 유혈 투쟁을 하는 걸 본 의열단은 상해촉성회를 조직하고 동포들끼리 힘을 한곳으로 모아 일제와 싸우자고 했다. (p. 275)

하지만 임시정부는 끝내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 임시 정부는 좌파 성향의 단체와 손잡지 않습니다." (p. 301)

김원봉은 조선공산당 재건 동맹 참여와 레닌주의정치학교 운영으로 인해 우파로부터 공산주의자로 매도되었다. (p. 302)

임시정부는 1942년 4월 20일 28차 국무회의에서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의 합류를 결정했다. (p. 310)

중국내에서의 혼란과 중국내에 있는 독립단체들의 혼란이 섞여들면서 더욱 어려운 과정이긴 했지만 여하튼 '독립'을 목표로 힘을 합쳐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힘을 모아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건만, '독립'은 뜻하지 않게 갑작스럽게 이루어졌고 그 상황은 결코 반갑기만한 선물은 아니었다.

 

"약산! 일왕이 내일 연합군에 항복한다고 하오"

"우리가 쳐들어 갈 때까지 일본이 항복하면 안 돼요!"

"그렇소. 이렇게 되면 우리가 연합군에게 아무 요구도 할 수 없게 되었소" (p. 314)

결국 그렇게 갑작스럽게 외부 상황들로 인해 덩달아 이루어진 '독립'은 국내 상황을 더욱 복잡스럽게 만들고 말았다.

 

 

여러 갈래의 정치 운동이 펼쳐졌다.

여운형이 건국동맹조직을 확대했다.

일제강점기에 모진 탄압을 받아 지하에 잠적했던 박헌영 등 조선공산당 인사들도 부상했다.

일제제 협력했던 한민당 계열은 임시정부를 높이 받든다고 위장하고 나섰다.

가장 먼저 귀국한 이승만은 친일파와 악질 지주를 가리지 않고 세력을 키워나갔다.

김구 중심의 임시정부 요원들은 가장 유리한 위치에서 임시정부의 역할을 감당했다.

중국에 남아 있던 조선독립연맹은 현지에서 조선문지공화국을 만들었다. (p. 320, 321)

다양한 정치세력들은 신탁통치에 대한 왜곡된 이해로 더욱 분열을 가속화했고 그 진상을 파악했을 땐 이미 늦었다.

이 무렵 해방정국은 무법천지였다.

이념과 이해관계에 따라 정적을 납치, 구금, 테러하는 것은 물론 살해 행위도 속출했다. (p. 323)

중부경찰서에서 온갖 수모를 당한 뒤 풀려나 전 의열단원 유석현의 집에서 꼬박 3일간을 통곡했다. 평생을 조국 광복에 몸 바치고 민혁당 서기장을 거쳐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을 지낸 김원봉이 악질 왜경 앞잡이에게 수모를 당했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겠는가. (p. 337)

노덕술. 일본이름 마쓰우라 히로.

일제의 대표적 악질 경찰관이자 혹독한 고문으로 독립운동가를 잡아다 죽음에 이르게 하곤 했던 그가 해방이 되자 미 군정 경찰로 복직하고 수도청 수사과장이 되었으며 김원봉에게 누명을 씌워 잡아갈 만큼 당대는 혼돈과 폭력이 난무하던 시기였다. 일제에게도 잡히지 않았던 김원봉은 노덕술에게 잡혀 고문당했다.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원통해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미 군정 경찰이 된 노덕술은 일경 출신 경찰 간부들과 함께 반민족회의특별조사위원회 요원들의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948년 설립된 반민특위는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자행된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였다. 친일 부역자들을 끌어안고 있었던 미군정은 반민특위 설립을 반대했다. (p. 341)

그러나 반민특위가 애써 체포한 노덕술을 이승만이 석방시켜버렸고 되레 반민특위가 해체되는 계기가 되었다. (p. 349)

노덕술은 헌병으로 자리를 옮겼고, 육군 단장을 지내다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는 등 잘 먹고 잘 사다가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노덕술과 같은 인간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이 이승만 치하였고 그 이후로도 제대로 해결하지 않은 역사의 어두움은 항상 시대의 발목을 잡아오고 있다.

"정치적 구상이 다르다고 그것을 구실 삼아 민족의 지도자를 살해하는 이런 죄악은 천추에 용서받지 못할 짓이다. 그의 죽음은 민족국가의 부흥 발전에 큰 상처를 남겼다. "

여운형의 장례식 행사는 김원봉이 남한에서 활동한 마지막 공개 행사였다. (p. 355)

이후 김원봉은 월북했다. 이미 좌우의 분단이 뚜렷해진 상황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그가 가졌던 정치이념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국내 상황은 광복이전보다 그닥 낫다고 보기 힘들었다.

그는 결국 '자주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 안타까운 마음이 나또한 마지막 장을 무겁게 덮도록 만들었다. 지금의 현실상황들이 그 무거움을 가볍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지금은 과연 '자주독립' 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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