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살인 2
베르나르 미니에 지음, 성귀수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그날의 사건, 다 잊어도 그들은 잊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 그들은 하나가 되었다."

용의자는 많은데 결정적인 단서가 없다. 배후에서 수사를 흔드는 자는 누구인가?

세르바즈 형사는 여교사 살해 현장에 남아 있던 용의자 위고와 주변 인물, 치료감호소에서 사라진 연쇄살인마 쥘리앙 이르트만, 피해자와 은밀한 만남을 해온 국회의원 폴 라카즈를 중심으로 수사를 펼친다. 저마다 혐의점이 있지만 결정적인 단서가 드러나지 않는다. 범인은 거짓 단서를 흘려 수사를 혼란에 빠뜨리는 한편 더욱 대담한 살인 행각을 벌인다. 용의자들을 중심으로 전개해오던 수사는 끝내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면서 점점 더 짙은 안갯속으로 빠져든다. (표지 中)

1권에서 잔혹한 여교사 살인사건으로 시작한 이 소설은 2권에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과거사건이 드러나면서 수사의 파편들이 끼워맞춰지기 시작한다. 세르바즈 형사의 심리에 몰입되면 될수록 나도 모르게 숨죽이며 스릴러의 분위기에 빠져들게 된다.

정체모를 남자가 천신만고끝에 프랑스땅에 발딛게 된 말리남자에게 접근한다. 이 말리출신 이주민은 한 건물의 청소부다. 정체모를 남자는 USB를 건네며 거액을 제시한다. 프랑스에 자리잡고 싶은 이주민에게는 이미 앞서 그를 위해 했던일이 발목을 잡고 그가 내미는 거액의 돈이 너무나 필요하다.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며 결국 이렇게 말한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p. 19)

1권에서 그냥 평범한? 범죄자로 조사받았던 엘비스는 알고 보니 살해사건과 뜻밖의 연결고리가 있었다. 그가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다른 존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말이야, 머잖아 겁이 날걸"

목소리 속에 어떤 것이 엘비스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저 확신, 저 침착함 그리고 차가움, 놈들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베란다 바닥에 투명한 주방용 랩을 펼치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필사적으로 출구를 찾는 새장 속 새 한마리처럼 가슴 속에서 파닥거렸다. (p. 46)

 

마르고는 여전히 학교안에서 수상쩍은 움직임을 뒤쫓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아뿔사 들켜버렸다. "발칙한 년, 우리를 염탐하고 있었어?" (p. 35)

세르바즈는 마리안과 재회 이후 수사를 하면 할 수록 옛 친구 프랑시스에 대해 자신이 너무 몰랐다는 것을 깨닫는다. 엘비스가 목숨걸고 남긴 힌트를 보고나니 더더욱 프랑시스가 의심스럽다.

고교 시절보다 더 오래된 추억. 프랑시스와 세르바즈. 열두 살에서 열세 살 무렵이었다. 프랑시스가 그에게 도마뱀 한 마리를 보여주었는데 벽에 달라붙어 햇볕을 쬐고 있는 녀석이었다. "잘봐" 별안간 프랑시스가 삽인지 녹슨 칼인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무언가로 그 도마뱀의 꼬리를 절단했다. 잘려나간 꼬리는 마치 그 자체로 살아있는 듯 게속 움직였꼬, 도마뱀은 깜짝 놀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르탱이 몸체에서 떨어져나간 채 살아 움직이는 꼬리를 신기해서 들여다보는 사이 프랑시스는 도마뱀이 구멍으로 사라지기 직전 녀석의 대가리를 큼직한 돌로 내리쳐 박살냈다. (p. 54)

하지만 프랑시스의 진면모를 알게 된 이후 세르바즈는 오히려 더 고통스러워졌을 뿐이었다. 마리안에 대해서도 역시나 그는 너무 몰랐었다.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서 서로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게 되는 것일까? 부부사이라 해도 서로를 모르기 쉬웠다. 유력한 용의자인 라카즈 부부만 봐도 그렇다.

"쉬잔 라카즈입니다"

"제 남편에 관한 얘기입니다"

"지난번 저녁에 그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알리바이와 관련해서요" (p. 91)

 

쉬잔이 세르바즈에게 털어놓은 것은 라카즈와 쉬잔의 부부사이를 정리하는데 결정적이었을 뿐 정치인의 속셈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뿐 살인범을 추적하는데는 큰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그는 여전히 유력한 용의자였다.

엘비스, 라카즈, 프랑시스, 이르트만. 드라마의 등장인물 네 명은 지금 형사를 가운데 두고 마치 술래잡기를 하듯 원무를 추고 있는 셈이었다. 눈을 가린 술래는 두 팔을 뻗은 채 대책 없이 더듬거리며 살인마를 찾고 있었다. (p. 113)

독특한 여교사 살인사건이 세르바즈 자신과 이토록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지 그는 처음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사건을 파고들면 들수록 자신과 주변사람들에 대한 의혹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되는 현실이 버겁도록 힘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딸 마르고를 지켜야 했다. 그 마르고가 사건의 중요한 힌트를 알아낸다.

다시 서클이 그려졌다. 매년, 같은 날이었다. 6월17일, 각자의 몸뚱어리에 새겨진 날짜였다. 10. 그것은 머릿수. 딱 떨어지는 수였고, 글자그대로 서클이었다. 희생자가 17명이었고, 생존자가 10명이었다. 6월 17일. 신, 우연 혹은 운명의 뜻이었다. 그들은 눈을 감은 채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억에 자신들을 내맡겼다. (p. 236)

매년 6월이면 일어났던 사고 혹은 실종으로 처리되었던 사건들은 개별적이고 평범한 사건이 아니었다. 숨어있던 그들이 여교사 살인사건에선 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냈는가? 연결성이 분명히 있으면서도 뚝뚝 끊어지는 지점들이 세르바즈를 갈수록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이르트만의 망령이 그를 찾아오곤 했다. 그리고 마르삭...

마르삭.... 과거는 한번 솟구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솟구쳤다가는 영영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마치 배가 가라앉기 직전, 수직으로 꼿꼿이 일어선 선체와 유사했다. 그가 믿었던 모든 것,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젊음의 추억, 존재 깊숙이 자리한 그 모든 향수는 다름 아닌 환상이었던 것. 그동안 거짓을 토대로 인생을 구축해온 셈이었다. (p. 244)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것은 자신의 과거를 새롭게 돌이켜보는 과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헌병대장 이렌의 도움으로 하나하나 단서를 추가로 모아가면서 세르바즈는 마침내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트라우마... 그는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방식은 잘못된 거였다. 그래서인지 사건이 해결되려던 마지막에 새로운 비극이 탄생하고 만다.

"그녀는 자네의 신의와 사랑을 배신했네, 마르탱. 벌을 받아 마땅했어" (p. 458)

이르트만, 그가 나타났다.

1권부터 2권까지 본 내용의 사이사이 등장하던 이르트만과 그의 범죄대상은 사건수사와 동일한 시간대가 아니었다.

이르트만은 트라우마 따위 상관없는 진정한 싸이코였다. 그런 그가 마르탱을 자신의 분신처럼 의식하기 시작한다. 이르트만과 세르바즈가 만났던 그 단한번의 만남이 어쩌면 이미 또다른 사건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 둘은 반드시 다시 만나야 할 것 처럼...

주변이 온통 삶의 에너지로 들끓고 있었다. 경제위기에 관한 그 모든 잡설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세상에 대해 어설픈 통계나 수치를 들먹이며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기자들이 생각났다. 아울러 모든 은행가들, 경제학자들, 탐욕스러운 투기꾼들, 부패한 금융가들, 앞 못 보는 정치꾼들도 떠올랐다. 그들은 반드시 이곳에 와 깨우쳐야 했다. 여기,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살기를 원하고 있었다. 일하고 존재하기를. 단지 연명하는 것만은 아니기를... 바로 너처럼 말이다. 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p. 467)

사건은 해결됐지만 세르바즈는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벼랑끝에 서서 자꾸 아래로 향하는 시선을 겨우겨우 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혼자 숨어있듯이 머물던 곳에 마르고가 찾아왔다. 그제야 그는 다시 벼랑끝에 올라가지 않게 되었다.

평화롭고 단순하며 이상적인 날들은 그렇게 흘렀다. 정녕 어떤 계획도, 어떤 계산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아침, 동트기 조금 전, 그는 아주 평온한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고, 샤워를 한 다음 가방을 쌌다. 간밤에 그녀의 꿈을 꾼 것이었다. 어딘가에서 그녀는 그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르트만이 이미 그녀를 살해했다면 놈은 어떻게든 그걸 알려왔을 터였다. 그는 방을 나섰다. (p. 472)

사건이 해결됐으나 또다른 사건이 시작되는 기분으로 끝나는 마지막장을 보며 이 소설이 시리즈의 일부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저자 베르나르 미니에는 마르탱 세르바즈 라는 인물을 페르소나로 내세워 총 다섯 작품 '눈의 살인' '물의 살인' '불 끄지 마' '밤' '자매' 를 발표한 상태라고 한다. 뭐랄까 프랑스적인 고전문학적 사고방식과 깐느영화제에 출품됐음직한 영화 한편을 보는 듯 펼쳐지는 장면묘사들이 아 이것이 프랑스풍 스릴러 소설이구나 싶었다.

원제는 '서클' 이었다는데 '물의 살인' 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소설 속 중요사건이 물에서 시작되었고 소설 시작에서의 사건 현장묘사가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매년 제물처럼 물에 바쳐져야 했던 사건들의 연결고리는 남은 서클 이라기 보다는 물 이었다. 그래서인지 여름에 읽으면 더욱 등골 서늘해질 추리소설 '물의 살인' 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이아, 숨어 있는 생명의 기원
엘리자베스 M. 토마스 지음, 정진관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생물은 일련의 협력관계에서 진화한다.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특별하지 않고, 자연계에 살고 있는 아주 작은 미물도 모든 생명체와 연관이 있다.

표지 뒷날개 中

 

가이아

신화속에서 대지의 여신 이름인 가이아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를 의미하곤 한다. 가이아이론 혹은 가이아학설은 지구를 하나의 커다란 (생명적)유기체로 보고 따라서 모든 것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조화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화속 여신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지구 또한 인간의 눈에 담기엔 너무나 거대한 존재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이 남긴 흔적을 쫓아 지구라는 유기체의 기원을 탐구하고 가이아가 숨겨놓은 생명력을 얼추 찾아내오고 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Hidden Life of Life - A walk Through the Reaches of Time 삶의 숨겨진 삶 - 시간의 범위를 걷는 것> 이다.

'기원'을 찾는다는 것은 간단히 생각했을때 두 가지 방향에서 가능할 것이다. 현재에서 출발하여 과거로 가는것 아니면 태초에서 시작하여 현재로 오는 것.

이 책은 과거에서 현재로 오고 있는데 생명의 흐름을 따라 전개되다 보니 읽다보면 내가 마치 가이아가 된 것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그리고 내가 가이아라고 여기며 생명을 하나하나 살펴보다보면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까지 애정의 눈으로 보게 되고 그렇게 지구라는 유기체를 더욱 가까이 느끼게 된다.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모든 생명체는 공통의 조상을 공유하고 서로 하나로 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 나는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추적하려고 한다. (p. 12)

유기적 연관을 중요시 한다는 것을 첫장부터 강조함으로써 이 책의 방향성은 뚜렷한 셈이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미생물과도.

우리에게 유익한 미생물은 우리와 함게 거주할 뿐만 아니라 진핵생물 속의 세포보다 그 수가 10배 더 많다. 우리는 그들이 무엇이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며, 그들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는다. 사실 우리는 승객들로 가득 차 있는 초만원 기차처럼 빽빽하고 밀도 높은 생태계 속에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을 독립적이고 외로운 유기체라고 생각한다. (p. 26)

미생물의 중요성은 아무리 과장해서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구상에서 생명체 형태의 기본적인 분류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식물과 동물 분류가 아니라 원핵생물과 진핵생물의 분류다. 지구가 생성된 후 처음 20억 년 동안, 원핵생물은 지구의 표면과 대기를 지속적으로 변화시켜 왔다. (p. 44)

태초의 지구에 지금 우리가 생명체라고 여길만한 존재가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의 모든 생명체는 결국 같은 곳에서 나온 것이고 당연하게도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미생물은 새로운 세포를 만드는 데 20억 년이나 걸렸다. 사람들은 왜 20억 년이나 걸렸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20억년 동안에도 그들은 새로운 종류의 미생물을 만들고 있었다는 뜻일까? 사실 미생물은 종류가 많아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고, 그 시간 동안 심지어 미생물도 진핵생물도 아닌 진핵생물과 같은 종류 또는 어떤 생명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지구는 초기에 화산이 분출하고 유성과 충돌하여 힘든 시간을 보냈다. 따라서 미생물이, 다르고 알 수 없는 유기체를 생산했다면, 그들은 화석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을 것이다. (p. 47, 48)

인간이 알수 없는 시간에 대해 알아내는 방법은 과거가 남겨놓은 것들이다. 대표적으로 화석. 그런데 나는 아마도 모든 과거가 화석에 남아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화석으로 남지 않은 (화석이 된 생명체 이전의) 생명체가 있었다는 문장에 아차 싶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 그 긴 시간 동안 아무 생명체도 없다가 갑자기 화석에 남은 그런 생명체들이 등장했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인건데, 지구가 수차례의 생명체 멸종을 경험했고 남은 것보다 남지 않은 생명체들이 많았을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해본 듯 하다. 지구는 정말로 쉬지 않고 생명체를 만들고 있었다. 갑자기 신비로운 기분이 들 정도다.

흥미롭게도, 지구상의 거의 모든 곰팡이, 동물 또는 식물은 원생생물과 관련이 있다. 우리와 관련된 것은, 엄청나게 복잡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열대열원충말라리아다. (p. 54)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균류를 모든 종류의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진화했다. (p. 68) 진균류로 발달하는 원생생물은 사람으로 발달하기도 한다. (p. 74)

어떤 물질에서 세포에서 균에서 생물에서 (사람을 포함한) 동물로의 변화는 길었던 과정의 시간대비 책에서는 빠르게 진행된다. 그 길고 길었던 시간의 변화에 대해 지금의 우리가 알수도 없을 뿐더러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파악하는 것도 버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생명체들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다.

우리가 '고등'동물이라고 생각하는 종류에 대해서는 앞으로 추가로 언급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고등'존재는 우리 자신의 정의에 의해서만 '고등'인 것이다. 우리가 '하등'한 것으로 보는 다른 것과 비교할 때만 분명하기 때문이다. (p. 74)

인간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인간외의 모든 것에 대해 인간과 비교하여 차별적으로 생각하곤 한다. 인간이 지적이면 다른 생명체는 무지하고 인간이 고등이면 다른 생명체는 하등이다. 하지만 가이아적 입장에서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지각판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원래의 판게아는 적절한 시기에 갈라져서 더 작은 대륙이 되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바다는 어디에서나 접근할 수 있다. 판게아를 제외한 건조한 대지는 그렇지 않았다. 생명체가 대륙과 섬에서 살기 시작한 후, 그들은 날지 않는 한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이동할 수 없었고, 지구의 흥미로운 존재는 대부분 날지 못했다. 이런 고립은 중요하다. 고립은 많은 생명체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고, 공기와 햇빛으로 당을 만들고 산소가 자유롭게 떠다니게 할 수 있는 생명체가 없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다. (p. 92, 93, 94)

진화에서 고립은 중요했다. 너르고 너른 한덩어리로 있었을 때보다 작게 갈라지고 쪼개져 환경이 제한적이 되었을때 진화가 더 빠르게 가능했으리라는 생각도 이제야 해본다. 그냥 그대로 살 수 있으면 진화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있던 대로 살 수 없었기에 진화해야만 했을 것이다.

공기와 햇빛으로 당을 만들고 산소가 자유롭게 떠다니게 할 수 있는 생명체, 저자는 식물을 등장시킴에 있어 가장 먼저 지의류에서 출발한다. 지의류 라는 단어가 생소하여 검색해봤다. <지의류 - 균류와 조류의 공생체. 균류는 조류를 싸서 보호하고 수분을 공급하며, 조류는 동화 작용을 하여 양분을 균류에 공급한다. 나무껍질이나 바위에 붙어서 자라는데 열대, 온대, 남북극으로부터 고산 지대까지 널리 분포한다>

참나무는 어디서나 이처럼 단체 행동을 한다고 한다. (p. 114) 지능을 가졌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식물은 또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p. 119)

도토리를 먹는 동물이 너무 많아져서 땅에 심어져 싹을 틔울 도토리가 부족해 졌을때 참나무들은 서로 소통하고 다음해 단체로 도토리 열매를 맺지 않는다. 그러면 도토리를 먹지 못한 동물개체수가 줄고 그 다음해에 참나무는 다시 도토리를 맺는다. 나무들의 의사소통에 관해 최근 읽은 책에서도 나왔었는데 식물의 대화라니 여전히 신기할 따름이다. 지능은 동물만 가지고 있다고 하기에 애매해진것이 식물의 대화뿐만 아니라 식물의 기억력때문이기도 하다. 예를들어 미모사는 갑자기 물이 잎에 떨어졌을때 잎을 접지만 그 물방울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엔 다음번 물방울부터는 잎을 접지 않는다. 동물과 식물의 구분도 그동안 너무 획일적으로 판단해온 것이 아닐까.

그게 바로 우리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실수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일을 의식적으로 생각하면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 몸은 따로 작동하고 있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심장을 더 빨리 뛰게 하거나, 콧물이 나오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없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심장은 뛰고 콩팥은 물질을 걸러내고 폐는 공기를 주입힌다. 우리의 생각은 나중에 작동한다. (p. 119, 120)

우리가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우리의 신체능력을 조절해주진 못한다. 퓨마를 만났을때 자동적으로 소름이 돋지만 도망가야겠다는 행동은 그 다음에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식물은 생각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지는 않을 지언정 느끼고 기억하고 바로 자신의 능력을 조절한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동물과 식물의 사고체계가 다르다고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식물은 건조한 대지를 살 수 있는 땅으로 만들었고, 그곳에 다음 동물이 도착했는데 그들이 바로 절지동물이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다양한 동물문으로 최초로 물을 떠난 동물이다. (p. 127) 오늘날 절지동물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 그 수가 많다. 그들은 널리 퍼져 나갔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은 분류학적으로 우성인 구성원이나 훗날의 척추동물이 하는 일을 했다. 즉, 체구가 매우 커진 것이다. (p. 130) 척추동물은 절지동물만큼 많이 번식하지 않았다. 우리의 조상은 해면동물이나 산호충처럼 바다 밑 지대에 붙어 있는, 미삭동물이나 미삭동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수생 생명체인 멍게였다고 여겨진다. (p. 132)

가이아 라는 명칭이 신화적 의미로 생명의 어머니라고 불린다면 바다는 실질적인 의미로 생명의 어머니로 불리는 것 같다. 생명체의 시작은 바다였다. 그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조상이 멍게였다니 ㅍㅎㅎㅎ 신선하다!

척수의 이름을 따서 우리는 척삭동물문이다. 오늘날 달 위를 걷는 우주 비행사와 바다 밑 바다에 박혀 있는 멸종된 여과섭생을 하던 멍게류와 닮은 점이 없어 보이지만 우리의 조상의 업적을 명예롭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척삭동물문에 멍게를 포함시킨다. 그래서 척수가 있어 책을 읽고, 차를 운전하고, 전쟁을 하고, 현미경을 통해 멍게류이 화석을 관찰한다. (p. 134)

어려울 수 있는 자연과학적 이론을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방법으로 서양사람들은 의외의 위트나 은유를 사용하는 것 같다. 그들의 위트가 항상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멍게는 내게도 통했다. ㅎㅎ

물고기가 공기호흡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영양분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많고 기온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며 위아래 어느 방향으로도 이동할 수 있는 3차원 생태계인 바다가 있는데, 왜 물고기들은 육지에서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을까? 물론 아무도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포식자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초기 척추동물로 추측되는 많은 것은 다른 수생동물에 비해 몸이 작아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 흥미롭다. (p. 140)

멍게와 물고기를 거쳐 양서류로 왔다. 지구는 육지보다 바다가 훨씬 넓은 면적을 차지한다. 하지만 육지의 생태계는 더 급속하고 다양하게 진화되어 왔다. 평온해 보이는 바다가 생태계적 입장에서는 더 살기 어려웠던 것 같기도 하고 진화해야만 하는 육지의 생태계가 더 살기 어려웠던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가이아는 한 순간도 쉬지 않아 온듯 하다.

양서류는 6500만 년 동안 육지에서 번성한 절지동물보다 늦게 나타나서 식물에 의해 조성된 생태계를 차지할 정도로 적응했다. 절지동물은 새로 나타난 양서류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양서류 성체는 오늘날에도 절지동물외 다른 동물은 먹지 않는다. 절지동물은 양서류에게는 유일무이한 식량자원이다. 양서류는 시간제 육상동물이 된 이후 절지동물이 했던 일을 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항상 젖어 있거나 촉촉한 다른 종류의 생태계에 적응하는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다양한 모양과 크기로 발전했다. (p. 142) 그들은 모든 단점을 잘 극복했고, 모든 절지동물을 먹으며 5000만 년 동안 지구를 통치했다. 양서류가 그렇게 오랫동안 지구를 지배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5000만 년은 50만 세기다. (p. 144)

50만 세기라...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그긴 시간동안 지구의 육지가 양서류 세상이었구나.... 하지만 지구에 대규모 멸종상황이 발생했고 많은 양서류가 멸종할때 절지동물과 곤충은 거의 영향받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그냥 벌레라고 퉁쳐서 지칭하는 그 생명체들은 정말... 위대하구나;;; 여하튼, 이 양서류에서 양막류가 나왔고 이 양막류는 크게 두 방향으로 진화했는데 한쪽은 포유류 다른 한쪽은 공룡,익룡, 현대의 파충류와 조류로 진화했다고 한다. 그리고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에서 알이 먼저다. ㅎㅎ(이 결론은 얼마전 읽은 다른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공룡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며 믿기 어렵겠지만 우리는 이들이 나타나기 오래전부터 있었다. 이것은 우리 계보의 초기 구성원이 적어도 항상 크지는 않았지만 외관상으로는 무섭게 생긴 공룡으로 오인될 수 있기 때문에 믿기지 않는다. 모두가 알고 있는 '공룡'이라는 이름과 달리 우리 조상의 이름은 박사 과정의 연구과제가 될 정도다. 그 이름은 '단궁류'다. '융합된 아치(궁형)'를 의미하며, 당신의 관자놀이 옆에 있는 얼굴 측면에서 시작하고 광대뼈와 위턱뼈로 구성된 뼈의 다리를 의미한다. (p. 151) 발자국을 남긴 발은 똑바른 다리의 것이다. 따라서 우리를 포함한 많은 오늘날의 포유류의 것과 같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손이 단궁류의 패턴을 유지하고 있고 단궁류가 오늘날의 보행 방법을 발명했음을 의미한다. (p. 154) 단궁류에는 아마도 비늘이 없었겠지만, 피부도 화석이 되지 않기 때문에 피부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p. 155) 단궁류는 8000만 년 동안 지구를 지배한 후에, 여러 종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수로 줄어들었다. 살았던 것 중에는 우리 조상이 된 오리너구리 타입이 있다. (p. 157)

인류의 기원을 세포나 멍게로 얘기할 때만해도 아주아주 먼 옛날 이야기구나 싶어 현실감이 없었다. 그런데 공룡시대의 조상이라... 구체적으로 오리너구리 타입이라니;;; 유인원을 넘어선 인류의 조상을 생각하는 것은 뜻밖의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단궁류' 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봤지만 진화에 있어 중요한 획을 그은 단어인 것 같다. 하지만 늘 유의해야 할 것이 중요한 핵심단어가 등장했다고 해서 주변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단궁류의 오랜 통치기간 동안 다른 타입의 파충류가 진화하고 있었고 외부적으로 봤을때 그들이 지배파충류였다. 바로 공룡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공룡 종의 무리는 '새' 다.

공룡은 평생 성장하지만, 아기는 일정 연령에 도달하면 자라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세계에 사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공룡은 대부분 완전히 성숙할 때까지 살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 또한 단정짓기 어렵다. (p. 170) 새의 호흡은 동물 호흡 중 가장 효율적인 형태며, 아마 공룡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것은 자가 가온의 징후일 수 있는데, 태양 가온보다 산소가 더 많이 필요하다.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를 포함한 많안 공룡은 깃털이나 솜털이 있었는데, 솜털은 아마도 어릴때에만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역시 자가 가온의 징후다. (p. 171) 그리고 익룡이 생겨났다. 또 다른 조룡이다. 익룡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공룡과 공존하는 전설적인 동물이고 자가 가온 동물이다. (p. 173)

거대한 크기의 공룡화석을 보며 그것이 성체가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공룡의 골격에서는 성장을 멈췄다는 증거인 뼈층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평생 자라거나 내부 장기가 너무 커서 그들을 지지할 수 없을때까지 자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잔혹한 생태계에서 그렇게 자라다가 먹고먹히게 되는 것이다. 더 클수 있었다니;;; 온혈과 냉혈 동물의 구분이 생기기 전에 이런저런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체온을 유지한다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진화였던 것 같다. 여하튼 티라노사우루스에게 깃털이 있었다는 내용을 작년에 처음 읽었을 때는 생소했지만 이제는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ㅎ 하지만 새를 보면서 공룡을 연상하는 것은 여전히 잘 되지 않는다. ㅎㅎ

일부 익룡은 거대했고 모두 날 수 있었다. 그들은 공룡시대에 살았으며 처음에는 공룡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들은 독특한 형태의 파충류였고, 공룡보다 더 흥미로웠다. (p. 186) 익룡은 온혈동물이었던 것 같다. (p. 194) 우리는 석탄기와 백악기 사이의 시간을 생각하고 있다. 약 1억 5000만 년의 기간이다. 그 기간동안 공룡과 익룡 뿐 아니라 돛이 있거나 없는 다양한 크기의 광범위한 단궁류의 집합체인 우리 원시 포유류 조상들이 살았다. 지금까지 언급하지 않은 이 시대에 속하는 유일한 큰 동물은 악어 타입, 즉 앨리게이터, 가비알, 카이만을 포함하는 그룹이다. (p. 197)

공룡으로 다 뭉뚱그려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익룡도 악어도 공룡과 달랐다. 악어들은 공룡과는 별도로 지배파충류의 조상에게서 분리되어 나왔다고 한다. 이 악어타입은 육지동물인 공룡에서 진화되어 나왔지만 다시 물로 되돌아갔다. 악어외에도 수달, 오리너구리, 고래, 돌고래도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진화의 방향은 역시 직선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또다시 느낀다.

6600만 년 전, 세계는 백악기~제3기 대멸종을 경험했다. 대멸종이 없었다면 지구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가지 이론은 멸종기간은 짧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발생했으며 혹독했다는 것이다. 식물, 육상동물, 해양생물, 즉 곤충을 제외한 모든 생물체의 75%가 사라졌다. (p. 203) 첫 번째 셍물체가 유성으로 인해 사라진다면 그들과 유사한 다른 생물체가 진화하여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가이아는 멸종으로 인해 실패했지만 아이디어 자체가 좋으면, 그녀는 종종 다시 시도한다. (p. 207)

대멸종이 발생할 때마다 지구상의 생명체는 확확 바뀌었다. 어쩌면 인간이 밝혀내지 못한 대멸종이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마다 생명체는 다른 모습으로 계속 등장했고 아마도 새 생명체가 등장하는 시간은 점점 빨라지지 않았을까? 한번 만들기를 했다가 부서뜨리고 새로 만들땐 더 빨리 만들 수 있는 것처럼...

가시두더지와 오리너구리는 단공류 동물로 알려져 있는데, 단공이란 그리스어에서 온 단어로 '하나의 구멍'을 의미하고 총배설강을 뜻한다. 그들은 대변이나 소변 그리고 분만을 위한 배출구가 따로 있는 우리와는 달리, 새나 파충류처럼 배출구가 하나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포유류보다 조류나 파충류와 더 비슷하다. (p. 216)

오리너구리는 생각보다 아주 고대적 동물이었다!

100만 년 동안 화석이 된 사람들은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에서 진화한 것이 틀림없지만, 그들의 새로운 분류학적 이름은 오로린 투게넨시스(투겐 출신의 토착민)이며 그들을 밀레니엄 맨 이라고 한다. '원시인' 과 '호모 사피엔스' 에서와 같이 모든 조상은 '남자' 또는 '호모'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가사일을 제외한 모든 주요한 일을 남성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번째 '남자' 화석인 '밀레니엄 맨'은 아주 공정한 명칭이다. (p. 231) 밀레니엄 맨은 약 580만 년 전에 사라졌는데, 이는 그 종류이 사람이 200만 년 동안 살아남았음을 의미한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은 멸실환, 즉 '미싱링크'로 인간과 유인원 사이로 보이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변형되었다. (p. 233)

조류와 포유류를 거쳐 유인원까지 왔다. '밀레니엄 맨' 이라... 이런 명칭이 있었구나... 하지만 사전에 검색하면 안나온다;;; 역시 호모어쩌구저쩌구 라는 학명이 우세한 것이겠지...

사람상과(우리를 포함한 유인원) 와 사람족(인간 형태의 우리 조상의 한 부류) 이 널리 흩어져 자신의 환경에 맞는 다양한 방식으로 변모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조상들을 한 번에 하나씩 등장하는 것처럼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유인원과는 (우리가 보면)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러 종류의 원시 인간이 함께 존재했을 것이다. 그래서 초기 인간형을 생각할 때에는 여러 종류의 동물이 있었고, 각각의 동물은 서로 다른 종을 가지고 있었고, 그중 많은 동물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기에 살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도움이 된다. (p. 238)

진화관련 책을 읽을 때마다 가장 크게 공감하는 것이 바로 이부분이다. 인류의 진화과정을 한장의 직선형 발달로 설명하는 그림은 떼어내야 한다. 인류는 작고 구부정한 모습에서 점점 허리가 펴지고 털이 없어지며 키가 커진 순서대로 그렇게 단 한가지 단 하나의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다. 동시대에 수많은 유인원이 함께 존재했다. 유일무이한 존재로 대를 이어 변모해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류의 진화에 대한 가장 커다란 왜곡이다.

호모에렉투스 와 네안데르탈인을 간략히 살펴보고 나서 저자는 부시먼으로 알려진 '산족' 에 정착한다. 아주 최근까지, 여구 6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바로 위의 조상이라고 '산족'을 표현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우리는 왜 우리가 보는 방식을 되돌아보는가'

그 사람들은 '접촉 이전', 즉 다시말해 그들은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기 좋아하는 것에 접촉하지 않았다는 뜻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른바 '선진 세계' 사람들이 감염되는 질병이 없었다. '접촉 이전'은 종종 단점으로 여겨지지만,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우리 종족처럼 적어도 10만 년 동안 살았으며, 그들의 문화는 이제까지 세계에 알려진 문화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문화일지도 모른다. (p. 259)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주환시라고 불렸다. 주환시는 '무해한 사람들'로 번역했다. Ju는 '사람'을 의미하고 hoan은 '깨끗하고 안전하며 유해하지 않다'라는 의미고 si는 복수형이다. (p. 263) 오늘날 산족은 나미비아인으로 시골에서 살고 있고, 그들의 이전 생활방식은 사라져 버렸다. (p. 266)

저자는 '주환시' 의 문화와 생활방식을 함께 지내며 보고 배웠다. 그들은 결코 미개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혜는 우리와 다를 뿐이었다. 그 환경 속에서는 그들의 지혜가 더 빛났다. 하지만 몇 년 후 다시 저자가 그곳을 찾아갔을 때,

바오바브나무 근처에 백인의 집이 있는 것을 보았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 샘물에 갔지만, 한 백인이 집에서 나와 샘물이 자신의 것이르모 물을 마실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접촉 이전의 주환시와 처음 만났을 때는 몇 분 만에 우리에게 물을 마시라고 초청했었따. 나는 시대가 변했음을 깨달았다. 바오바브나무는 일찍 죽었다. 백인이 잔디에 물을 주느라 샘물이 고갈되었기 때문인듯 했다. (p. 299)

저자가 처음 갔을때 적어도 200년은 된 거대한 바오바브나무옆 작은 샘 가까이에 주환시가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주환시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들은 빼앗은 것 없이 빼앗겼다.

산족은 자연세계에 사는 다른 모든 생명 형태와 같은 종류의 삶을 살았으며 우리와 가축의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서로 다른 종은 욕구도 문제해결 방식도 다르다는 점을 명심한다면, 산족은 이것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도 같은 방식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린채, 다른 종을, 지식은 가지고 태어났지만 본능에 의해 지배되는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우리 조상이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다른 모든 종이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 한, 다른 종도 관찰하고 배운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p. 274)

주환시 즉 산족의 생활방식은 굉장히 협력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식량을 구하고 삶을 지속하는 것이 '문명'사람들에게는 고난과 힘듦으로 보였지만 그들은 모든 면에서 굉장히 평화로웠다. 하지만 이미 접촉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그들을 과거의 생활모습으로 돌아가라고 강요할 순 없다고 했다.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평화로운가?

저자가 마무리짓는 현재와 미래는 암시적일뿐 (어쩌면 당연하게도) 어떤 결론을 내리고 있지는 않다. 그러니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생각할 수밖에 없다. 가이아로 이 책의 흐름을 읽어오면서 내가 가이아라면 지금의 현실과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는가?

얼마전 읽은 SF 소설에서 지구 환경이 파괴되고 인류의 생존이 불가능해지면서 육체를 버리고 정신만 로딩되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나라면 온전한 육체로 환경에 적응하며 정신을 육체와 함께 유지할 것인가 최신기술에 힘입어 육체를 버리고 정신만 떠도는 세계로 로딩될 것인가 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로딩을 거부하기로 결정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더욱 그런 마음이 견고해진다. 원래 갖고 있고 누리고 있던 것을 누리지 못하게 된 환경이 비참하여 육체를 버리고 싶어질 수도 있겠지만, 원래 라는 것 자체를 생각지 말고 주어진 환경에서 무엇을 할 수 있나를 해결해나가는 쪽이 나는 더 마음편하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매이지말고 가질 수 있는 것을 찾아가며 사는 것이 좀더 행복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자꾸 이런저런 곁다리로 빠지곤 했지만 쉽게 읽히는것에 비해 어려운 생각들을 심어주는 책이었다. 가볍게 생물학책으로 읽어도 좋겠고 진화의 흐름을 따라가보는 것에서 그쳐도 좋겠지만 궁극적으로 무엇을 고민해봐야 하는지 찾아가며 읽는다면 더 좋을 포괄적인 주제의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의 친구가 될 식물을 찾아 주는 식물 사진관 - 포토그래퍼의 반려식물도감
이정현 지음 / 아라크네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포토그래퍼의 반려식물도감

저자는 사진작가다. 사진을 찍고 사진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을 한다고 자기소개를 한다.

그런 저자의 눈에 식물이 들어온다. 새삼스럽게 관심이 가기 시작한다. 식물의 사진을 찍고 식물과 식물의 사진에 대해 글을 쓰다보니 어느덧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 책은 식물에 대한 이야기이자 식물사진전을 관람하고 나온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사진작품집이기도 했다.

자칭 '식물똥손'이라며 직접 기른 식물보다는 꽃집동생의 도움으로 잠시잠깐씩 빌려온 새로운 식물과 함께 하고 사진을 찍지만 식물을 보다보니 점점 더 알고 싶고 공부하게 되고 직접 키우게 되면서 식물에 대한 마음만큼은 '식물금손' 저리가라 할 만큼 풍성해진 저자이다.

50여가지가 넘는 다양한 식물들은 하나같이 생소하고 낯설었기에 식물도감이라 할만했고, 그 식물들의 특징과 주의점을 읽다보면 반려식물을 찾아주려는 저자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여 따듯했고, 포토그래퍼의 능력이 출중하게 발휘된 사진을 보다 보면 사진하나하나 작품을 감상하듯 그윽하게 보게 되고, 식물에 대한 저자의 감성을 읽다보면 한글자라도 놓치는 것이 미안하여 천천히 꼼꼼히 읽게 되는 진심 가득한 에세이였다.

매 식물마다 첫장에 식물의 전체컷과 식물의 학명을 비롯한 정보 그리고 빛, 물, 온도 등의 재배조건등을 정리해놓고 나면 다양한 각도에서의 식물사진과 그만큼 다양한 방면으로 퍼지는 저자의 생각을 읽게 되는데 식물 하나에 대해서도 이렇게 쓸 수 있구나 싶어 신선하고 무엇보다 감각적인 사진들이 보기에 너무 멋졌다.

제목에서부터 읽는이의 반려식물을 찾아주고파 하는 마음에 응답해보고자 식물하나하나 내게 맞는 반려식물을 무엇일까 고심하며 고른 끝에 나는 3가지를 고를 수 있었다. 회오리선인장, 장미허브, 필레아. 골라놓고 보니 둥글둥글한 식물에 지금 마음이 가고있구나를 깨달으며 뾰족한 잎들에게 땡기지 않는 내 마음에 대해 잠시 생각에 잠겨 보기도 했다.

선인장이나 다육에 별 애정이 없던 때에는 그저 둘이 서로 다른 종류의 식물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다육은 줄기나 잎에 수분을 비축하는 식물 모두를 뜻하는 말이고 선인장은 선인장과에 속하는 식물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인장과의 식물은 전부 줄기에 수분을 비축하니까 모든 선인장은 다육식물에 속합니다. 그러나 선인장과는 아니지만 다육의 특징을 가지는 식물은 수없이 많으므로 다육식물이 모두 선인장인것은 아니죠. 다육식물의 원산지는 전 대륙에 걸쳐 있지만, 선인장은 주로 아메리카 대륙이 원산지입니다. (p. 188)

선인장과 다육식물에 대해 나도 별다른 구분기준을 몰랐던 것 같다. 책속에는 다육식물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아무래도 실내에 두고 키우기 좋은 화분용 식물의 종류가 다육이가 많아서 그런가 싶다. 나도 다육이를 여럿 보내본 식물똥손인데;;; 뾰족한 가시의 선인장은 말라죽고 매번 과습으로 썩어버리곤 했던 다육이... 여전히 내게는 어렵기만 한 식물들이다. 그래도 여전히 나만의 식물을 찾아 늘상 꽃집앞을 기웃대는 걸 보면 반려식물이 필요한 것 같긴 한데;;;

관엽식물이라는 말은 다육만큼이나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단어였습니다. 찾아보니 잎(엽)을 관찰(관)하기 위한 식물이라는 뜻입니다. 꽃보다는 잎의 모양이나 색깔을 감상하기 위해 재배하는 식물을 일컫는다고 해요. 다육이나 선인장처럼 식물 자체의 특징을 한 이름이 아니라 식물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어떤 식물이든 잎을 관찰할 수 있으니 상당히 애매하긴 하지만, 특별히 잎 자체의 아름다움을 즐기게 되는 식물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p. 194)

몬스테라를 읽으며 관엽식물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다육이 종류외에는 몬스테라에 애정이 큰 것 같은데 나는 구멍이 숭숭 뚫리거나 잎 가장자리가 여기저기 갈라지는 몬스테라 잎이 감상하기 좋지 않은 것을 보면 다른 식물 종류를 좀더 배워야 할 것 같다.

에어 플랜트가 행잉 플랜트와 같은 뜻이 아니라는 것은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행잉 플랜트는 공중에 걸어 놓고 키우는 식물 전체를 부르는 말이지만, 에어 플랜트는 틸란드시아속에 속하는 식물을 지칭하는 말이었어요. 틸란드시아는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공기 중에서 수분과 영양소를 빨아들이며 살아 에어 플랜트라고 불리게 되었지요. 우리나라 말로는 공중 식물이나 공기 식물이라고 부릅니다. (p. 205)

수염이 길게 자란것 같은 틸란드시아나 틸란드시아와 짝꿍인듯 함께 구성된 이오난사가 언젠가부터 여기저기서 눈에 많이 띄었었다. 보면서도 참 신기하다 했었는데 책에서 다시보니 반가웠다. 이오난사는 여전히 애정이 가는 식물인데 울집에는 식물을 걸어둘 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는 핑계로 여전히 꽃집에서 구경만 하다 오곤 한다.

식물이 공기정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효과를 너무 확대해석하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기정화 효과를 제대로 보려면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많은 식물이 있어야 하니까요. 책상 위에 조막만한 화분을 하나 놓고 넓은 사무실이나 집 전체의 공기가 깨끗해졌으리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나사의 실험이 이상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진 것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3.3제곱미터(약1평)에 적어도 한 개 이상의 식물을 놓아야 효과가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p. 213)

식무에 따라 제거할 수 있는 유해 물질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야자류는 포름알데히드를 제거하고, 관음죽과 국화는 암모니아를 흡수해서 화장실에 놓으면 좋다고 해요. 스타티필룸은 벤젠 같은 휘발성 유기화합물을, 알로카시아는 사무기기에서 나오는 화학물질을, 아이비는 가정용품에서 나오는 화학물질을 흡수한다고 합니다. 식물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마법처럼 해결될 것같이 들리지만, 역시나 확실한 효과를 보려면 식물이 아주 많아야 하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p. 214)

공기정화식물이라고 수식어가 붙은 식물들이 아무래도 많이 팔리긴 한다. 일정기간 꽂아두었다가 버려야 하는 꽃다발과 달리 화분은 오래둘 것이고 오래둘 것이라면 장식성 보다는 편리와 가치를 따져보게 되기 때문이다. 기르기 쉽고 튼튼하고 오래 가는데 공기정화까지 된다면 그야말로 더 바랄 것이 없으므로 공기정화식물은 어느 집에나 한두개쯤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정말 공기정화 효과를 누리려면 정말정말 많은 화분이 집안에 있어야 한다. ㅎㅎ

우리가 스투키로 알고 있는 식물 대부분이 실은 산세베리아 실린드리카라는 것입니다. 둘은 거의 똑같이 생겼지만 스투키는 줄기 가운데에 깊은 홈이 파여 있습니다. 스투키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외양은 비슷하지만 성장 속도가 더 빠른 실란드리카를 판매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실린드리카는 한 뿌리에서 여러 줄기가 부채 모양으로 펼쳐지며 나오는데, 이 줄기를 잘라 스투키처럼 한 줄기씩 꽂아 판매하다고 합니다. 어차피 가까운 친척 사이이고 키우는 법도 비슷해 별일 아니라고 할수도 있지만, 스투키가 국민 식물의 명성을 누리고 있으니 실린드리카나 스투키 둘 다 억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p. 218)

스투키도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는 화분이다. 그런데 그게 스투키가 아니었다니. ㅎㅎ

저자는 식물의 학명과 본래 이름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어서 참 좋았다. 무엇이든 친구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 시작하기에 식물의 이름을 제대로 안다는 것이 식물과의 만남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가왔다.

저는 킬러급 식물 초보임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식물을 좋아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식물을 알게 되었다는 기쁨 때문입니다. 처음 듣는 음악을 친구들에게 들려줄 때의 뿌듯함과 비슷하지요. 음악도 사진도 대중적인 것뿐만아니라 소수의 취향에 맞는 것도 계속해서 생산되고 소개되어야 한다고 믿는 저는 식물도 그랬으면 합니다. 남들과 다른 나만의 취향이 소중하고, 무엇이든 하나라도 독특한 걸 추구한다면 식물도 그런 걸 키워 보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반대로 뭐든지 무난한 게 좋다면 식물에서만큼은 숨겨 왔던 개성을 드러내 보라고 바람을 넣고 싶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감추고 있는 의외의 면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p. 227)

나는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고를 때에도 가장 큰 기준은 무난함이다. 하지만 저자가 찍은 사진 속 식물들은 대부분 독특하다. 독특하지만 저자의 사진 속에서 자연스럽게 멋스러움을 뽑내다 보니 홀린듯이 쳐다보게 된다. 내가 그런 독특한 식물을 집에 들이는 날이 올까? 글쎄...

독특한 것과 평범한 것은 조화를 이룰 때가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평범한 일상이 계속되면 일탈을 꿈꾸게 되고, 독특한 일만 일어나면 이내 지쳐서 잔잔한 평범함이 그리워집니다. 어찌보면 독특함과 평범함은 저마다의 기준에 맞춰 마음대로 그어 놓은 아주 불분명한 선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요즘은 가장 평범한 것이 특별하게 느껴지고, 특별하다고 느꼈던 것의 평범한 모습을 발견할 때 더 감격하곤 합니다. 평범하게만 느꼈던 식물의 특별함을 날마다 발견하면서 일어난 변화인 듯 합니다. (p. 230)

모든 것은 조화로울 때 가장 편안할 것이다. 독특함도 평범함도 어느 한쪽이 튀게 되면 사실 불편해진다. 평범했던 일상을 그리워하게 된 요즘 저자의 독특한 식물들이 멋있어도 딱히 반려식물로 들이고 싶어지지 않는 것은 평범한 식물이라도 보면서 지금의 독특한 일상을 잊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 마스크 벗고 다닐날은 과연 언제쯤 온단 말인가...

글을 잘 쓰려면 그저 참신한 글거리를 찾아 매끈한 문장으로 만들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살면서 일어나는 일을 예민하게 관찰하고 그것이 마음속에서 흩어지지 않고 잘 내려앉아 어떤 의미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붙들어 두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느끼게 해 주었죠. (p. 249)

사진찍는 모든 이가 글까지 다 잘 쓴다면 불공평하지 않겠는가 ㅎㅎ 저자도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자신감도 없었다 한다. 하지만 친구의 도움으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생각과 성장이 가능했다고 한다. 저자처럼 초보작가라 할만한 이의 글을 읽다보면 마음에 닿는 글이 있고 아닌 글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솔직함이다. 얼마나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풀어 쓸 수 있느냐가 읽는이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곤 한다.

저도 어디에서나 잘 어울리는 성격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런 날은 집에 돌아오면 한라산 등정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영혼이 나갑니다. 잠들기 전에는 오늘 내가 실수한 것은 없는지, 사람들이 내게 한 말이 과연 무슨 의미였는지 사골국 끓이듯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곤 합니다. 다들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일이 나한테는 유독 힘들다고 느껴지거나 별거 아닌 일에 심한 내상을 입는, 예민한 오십령옥이 된 것 같은 순간이 저에게는 많습니다. 식물로 치면 그렇게 탱탱하고 강인한 식물은 못 되는 거죠. 열악한 환경에서도 꿋꿋이 힘을 내어 씩씩하게 잘 자라고 새끼도 치고 번성하는 식물도 있지만, 영 활개를 치지 못하는 식물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민한 식물도 살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나름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예민함도 그 식물의 중요한 성격입니다. 식물도 최선을 다하고, 키우는 사람도 최선을 다해 보는 거죠. 그렇게 수많은 작은 성공과 실패 끝에 조금 더 적응하고 조금 더 강해지겠지요. (p. 286)

나의 반려식물 후보로 3가지를 골라놓긴 했지만 사실 가장 우선 순위는 오십령옥 이라는 다육이였다. 하지만 식물깨나 키워본 사람도 선뜻 키우기 쉽다고 말하지 못한다는 식물인 오십령옥의 그 예민함을 내가 잘 보듬어줄 자신이 없다. 그저 저자가 표현하는 사람이든 식물이든 남들과 다르게 좀더 예민한 그 성정을 공감해볼 뿐이다. 전에는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 집에 오자마자 쇼파에 뻗곤 했는데 요즘은 원래 알던 환경과 원래 알던 사람들을 만나고 나도 집에 오면 일단 쇼파에 뻗는 나를 보면서 이 예민함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고민이다. 오십령옥을 키우면서 깨달음을 얻어봐야 하려나...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반듯하고 정상적인 모양의 식물보다 어딘가 이상하게 제멋대로 자라난 식물이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는 환경에 맞게 자기만의 모양새를 갖춘 식물의 아름다움은 쉽게 설명하기 힘듭니다. 오랜 세월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옛날이야기처럼 전해주는 사람에 따라 이야기는 조금씩 바뀌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죠. 내 식물은 나에게, 나는 내 식물에게 서로 적응해서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식물을 키우는 사람 모두가 꿈꾸는 바가 아닌가 합니다. (p. 293)

표지에 있는 식물의 이름은 리틀장미다. 제멋대로 뻗어나간 그 자유를 보며 저자는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나도 겉표지를 보자마자 '멋지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식물사진들은 하나같이 굉장히 모던하면서도 감각적이다. 하여튼 멋지다!

하지만 멋진 식물보다는 건조한 겨울철에 비염이 있는 사람에게 좋다는 '실버레이디' 라는 고사리과 식물을 사고 싶어지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 식물에 대한 애정이 모자란것 같다;;;

집안에 갇혀있다시피 지내는 요즈음 책으로나마 안구정화해보려 읽게 된 이 책이 이렇게 다양한 멋을 느끼게 해줄줄은 몰랐다. 식물사진을 보며 자연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달랠 수 있겠거니 예상했는데 식물사진이 이렇게 도회적일 수 있는건지 감탄할 따름이었다. 사진과 글 모두에서 저자의 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지면서도 쏠쏠한 정보와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기분까지 느끼게 하는 이 책은 지금까지 읽었던 식물에세이들과 확연히 달랐다. 저자의 이 사진감각과 진정성 있는 글로 표현한 다른 식물책도 어서 펴내기를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시를 걷는 여자들 - 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을 만나다
로런 엘킨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을 만나다

겉표지 사진 속 여성을 보며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도시는 누가보더라도 파리!

뒤표지의 파리 에펠탑 사진이 당연한 구성으로 느껴지는 이 책은 저자가 파리라는 도시에 대해 바치는 오마주이자 저자 개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문학일기이다.

내가 플라뇌르(flâneur, 산보자)라는 단어, 아치가 얹힌 â에 구불거리는 외르(eur)라는 발음까지 붙은 독특하고 우아한 프랑스 단어를 처음 만난 게 어디에서 였을까? 1990년대 파리에서 공부할 때 처음 접했겠지만 책에서 본 것 같지는 않다.

프랑스어 동사 flâner 에서 파생되었고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플라뇌르 라는 단어는 19세기 초반 유리와 강철로 덮인 파라의 사사주(passages, 아케이드)에서 탄생했다.

나는 영문학 전공이기 때문에 사실 원래는 런던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절차상 문제 때문에 어쩌다 보니 파리에 오게 되었다. 파리에 오고 한 달만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파리의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우리를 나누어놓은 운명의 가는 선을 따라 걷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내가 본능적으로 한 일을 다른 사람들도 많이 했으며 그래서 그걸 가리키는 이름이 이미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플라뇌르 였다. 아니, 프랑스어를 배웠으므로 나는 남성 명사를 여성형으로 바꾸었다. 나는 플라뇌즈다.

플라뇌즈(flâneuse), 명사, 프랑스어에서 논 말. 보통 도시에서 발견되는 한량, 빈둥거리는 구경꾼을 가리키는 단어 플라뇌르의 여성형. 이건 가상의 정의다. 플라뇌즈 라는 단어가 등재된 프랑스어 사전은 찾아보기 힘들다. "'플라뇌즈'라는 여성 명사를 만들 이유가 없었다. 19세기의 성별 분화 때문에 그런 인물은 존재할 수가 없다고 간주되었다. 플라뇌르라는 전형적 남성 인물에 대응하는 여성형은 없다. 여성형인 플라뇌즈는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었다. 도시의 관찰자는 오직 남성인물로 여겨졌다." "플라네리를 할 기회나 플라네리 활동은 대체로 부유한 남성의 특권이었고 따라서 '현대적 삶을 그린 예술가'는 필연적으로 부르주아 남성이었다"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소요하는 철학자, 플라뇌르, 등산가들"로부터 고개를 돌려 "왜 여자들은 나와서 걸어 다니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거리에 나온 여자는 말 그대로 '거리의 여자', 성매매 여성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비평가들은 말한다.

플라뇌즈가 도시 산보의 역사에서 삭제된 까닭은 물론, '플로뇌르'의 개념이 확고히 자리잡은 19세기에 여성이 처한 사회적 조건 때문이었다. 플라뇌르라는 단어가 처음 나타난 것은 1585년인데 아마 스칸디나비아어 명사 flana, 즉 방랑자에서 빌려온 말이었을 것이다. 원래 이 단어는 성이 없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말이 유행했는데 이때에는 성별이 부여되었다.

19세기 여성들이 자기 삶에 대해 쓴 글을 보면 당시 부르주아 여성은 집 밖에 나오는 순간 평판을 망치고 정숙함이 손상될 온갖 위험에 처하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 말 이전까지 마리 바시키르체프와 같은 계급에 속하는 여자는 주로 가정과 동일시되었고 가정 영역에 국한되었으나 중간계급이나 하층계급 여자는 거리에 나올 일이 많았다. 놀러 가려고 나오기도 하고, 가게 점원, 자선 활동, 하녀, 재봉사, 세탁부 등등의 일을 하기 위해서도 집을 나섰다.

19세기 말이 되자 계급과 상관없이 모든 여자들이 런던, 파리, 뉴욕 등 도시의 공공장소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1850년대 와 1860년대에 백화점이 생겨나 여자들의 외출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870년대부터 런던 안내책자에는 '숙녀들이 신사를 동반하지 않고 쇼핑을 하러 시내에 왔을 때 편안하게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소개되기 시작했다.

내가 이 책에서 그리는 초상은 플라뇌즈가 단순히 플라뇌르의 여성형이 아니고, 플라뇌즈라는 자체의 개념으로 인지하고 그로부터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플라뇌즈는 밖으로 여행을 떠나고 가서는 안 되는 곳으로 간다. 가정이나 소속 같은 단어가 그간 여성에게 불리하게 사용되었음을 의식하게 한다. 플라뇌즈는 도시의 창조적 잠재성과 걷기가 주는 해방 가능성에 긴밀하게 주파수가 맞추어진, 재능과 확신이 있는 여성이다. 플라뇌즈는 존재한다. 우리가 앞에 놓인 길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영역을 밝혀나갈 때마다 존재한다.

프롤로그 <여성이 도시를 걷는다는 것> p. 17~44 내용 발췌요약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길게 플라뇌즈에 대한 개념과 역사적 과정을 설명한다. 표지에서 멋진 여성이 도시에서 걷다가 무심코 뒤돌아보는 컷이 자연스럽게 혹은 여전히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멋지게 보이게 된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그저 '산책자' 일뿐인데 여성이 도시에서 하릴없이 걸아다닌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게 된지가 얼마되지 않았다는 것을 긴 프롤로그를 읽으며 새삼 깨닫는다. 이 책의 원제는 flâneuse : women walk the city in Paris, New York, Tokyo, Venice, and London 이다. 그리고 이 도시들중 핵심은 단연코 Paris 이다.

저자는 머물게 되는 도시들마다 산책자로서의 삶을 추구했고 그렇게 걷는 길에 다양한 여성예술가들을 연상하여 동반했으며 그렇게 걷다가 자신의 삶과 가장 잘 맞는 도시에서 안정을 찾았다. 저자가 길을 떠날때마다 다시 돌아오게 되는 곳은 태어난 뉴욕이 아닌 이방인으로 살았던 파리였다. 하지만 저자가 플라뇌즈가 되기 전 살았던 뉴욕이 이 책의 출발도시다.

도시에서 교외로의 이주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던 집단에서 나와서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살게 된 과정이다. 교외에 사는 사람들은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고 단독주택에서 생활하며 낯설로 이질적인 존재들과 섞이지 않고 살 수 있는데, 도시를 한 가지 용도로만 쓸 수 있는 지역으로 구분해놓은 토지사용제한법 때문이기도 하다. 주거지역, 상업지역, 산업지역을 나누어놓았기 때문에 직장과 집을 오가고 쇼핑이나 여가활동을 하려면 항상 차를 타야 한다. (p. 50)

교외 동네에는 인도가 아예 없는 곳이 많다. 교외에서 차가 없는 사람은 기묘한 최하층 계급, 불가촉천민에 속하게 된다. 누구나 차를 타고 다니는 길 가장자리에서 걸어가며 위화감을 조성할 때에만 눈에 뜨이는 존재다. (p. 53)

내가 어릴때 걸어서 어딘가에 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우리 동네에는 친구들과 모여 놀 만한 곳도 없고 시내나 중심가 같은 것도 없었다. (p. 59)

우리는 단절되어 사는 느낌이었다. (p. 60) 교외의 구조는 여자의 활동 반경을 제한한다. (p. 64) 공정한 세상을 만들 최선의 기회를 구할 수 있는 곳도 도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움직임의 자유가 반드시 필요하다. (p. 65)

저자가 태어나 자란곳은 슬럼화된 도시를 떠나 '괜찮은'주거 지역으로 여겨지던 교외지역이었다. 티비나 매체에서 많이 볼수 있던 잔디마당과 뒷뜰을 갖춘 비슷비슷한 단독주택들이 모여있는 미국의 거주전용 마을. 그런 곳이 우리네의 전원주택 같아 보이고 부유하고 평온하고 멋져보였는데 알고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나 보다. 뭐라도 하려면 꼭 차를 타고 나가야 할만큼 집주변엔 정말 집 밖에 없었고 따라서 집을 (걸어서)벗어나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러니 산책은 왠말. 날이 어두워지기라도 하면 현관출입조차 꺼려져 집안에서만 지내야 하는 생활. 저자는 가족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뉴욕에서의 생활이 저자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해서야 처음 가보게 된 도시문화는 교외지역과 너무나 달랐고 대학교육을 통해 길러진 비판적 관점은 도시와 여성의 활동성에 대해 새로운 자각을 하게 해주었다. 저자는 걷기 시작했고 뉴욕보다 걷기 좋은 다른 도시로 떠나기를 갈망했다.

내가 만난 파리는 인정받지 못하는 문명 세계의 중심 같은 느낌이었다. 강가 노점에서 중고 문고본 책을 싼 값에 사거나 글자가 빽빽한(연예계 소식이 아니라 뉴스를 전하는)신문을 사서 카페에 몇 시간이고 앉아 읽을 수 있는 곳, 어떤 서점을 가든(사방에 서점이 수백개는 있었다) 데리다, 푸코, 들뢰즈 같은 이름이 박힌 책이 앞쪽 테이블 위에 놓인 도시에 오게 되었다니 나로서는 믿을 수 없이 운 좋은 일이었다. 파리는 그림처럼 멋들어진 장소에서 여러 사상의 지적 혼합물을 정신없이 흡수할 수 있는 곳이었다. (p. 83)

관광도시로서의 파리가 아니라 책과 서점의 도시 파리를 연상하니 파리에 가고 싶어진다. 물론 불어를 못해서 저자가 감동해마지 않는 그런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수는 없겠지만 카페에서 신문의 냄새를 맡고 어디에 눈을 돌려도 서점이 보이는 곳에서 산책하는 기분은 어떤 것일지...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저자는 각 도시마다 여성 예술인 한 명을 주요 화두로 삼는데 '진 리스' (1890~1979)라는 여성 소설가의 작품을 통해 저자가 파리에서 시작했던 새로운 삶을 풀어낸다.

포드는 리스가 계속해서 찾아 헤맨, 믿음직하고 의지할 수 있는 타입의 남자 중 하나였다. 그때 쓰던 엘라 렝글릿이라는 이름 대신 진 리스라는 이름을 쓰게 한 사람이 포드이니 말 그대로 포드가 진 리스를 만들어낸 셈이다. 더 중요한 것은, 포드는 리스가 작가가 되도록 거들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작가로 보게 했다는 점이다. 리스는 몇 시간 동안 방에 틀어박혀 종이에 글을 쓰는 직업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문학적 감식력은 포드에게서 베운 것이었다. (p. 88)

포드는 소설가가 "관찰을 하기 위해서는 군중 속에서 눈에 뜨이지 않고 다닐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소설가가 무엇보다도 먼저 반드시 배워야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지우는 것이다. 가장 먼저 그리고 언제나" 소설가는 이렇게 군중 속의 일원이자 군중을 관찰하는 자인 플라뇌르와 겹쳐진다. 리스 같은 여자, 그리고 리스가 만들어낸 여자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p. 100)

파리의 이곳저곳의 거리를 걸으며 저자는 리스의 작품속 주인공들을 생각하고 리스의 삶을 생각한다. 리스의 인물은 자기가 조롱당한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느끼며 도시를 돌아다니고 그들은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 절박하게 애쓴다. 거리를 걷는 여자를 보는 남자의 시선은 여자가 플라뇌르가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여자 스스로도 남자에게서 독립하지 못한다. 저자가 파리에서 처음 만났던 연인과의 시간은 리스의 소설과 닮아있었다.

여기가 바로 울프가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블룸즈버리 스퀘어다. 대부분 소설이 여기에서 쓰였다. 나는 그 주위를 계속 빙빙 돌지만 울프가 살았던 건물을 찾을 수가 없었다. 주소가 52번지라는 게 기억이 났고 전쟁 중에 집이 무너졌다는 건 알았는데 그 지역이 지금 타비스톡 호텔이 들어선 자리라는 것은 몰랐다. 타비스톡 호텔은 근대적인 벽돌 건물로 겉보기에는 공공기관이나 병원처럼 보인다. 텍스처 없이 매끈하게 벽돌로 덮인 건물을 보며 생각에 잠기자 울프의 삶의 수백만 가지 순간이 머릿속에 밀려들어왔다. (p. 116)

로저 프라이, 존 메이너드 케인스, E.M.포스터 등이 들어가는 블룸즈버리 그룹은 격식없는 모임이었고, 울프가 자유를 발견하는 데에 이 모임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p. 120) 1905년 겨울, 블룸즈버리의 지리적 경계를 따라 걸으면서 버지니아는 자유에 형태를 부여했다. 훨씬 더 나이를 먹은 뒤에, 울프는 델러웨이 부인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낸다. 20세기 문학에서 최고의 플라뇌즈라 할 인물이다. 댈러웨이 부인이 소설에서 가장 처음으로 하는 대사가 이렇다. "전 런던 거리를 걷는 게 좋아요" 댈러웨이 부인이 말했다. '시골길을 걷는 것보다 훨씬 좋아요' 울프에게 혼자 도시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상상해보지 못한 자유였고, 울프가 본격적으로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계기가 이사였다면 글쓰기의 소재를 제공해준 것은 산보였다. 거리에는 울프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p. 127)

울프가 자기 자신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자기 혼자 혹은 언니와 함께 독립적인 여성이 되어 도시를 돌아다니면서부터다. 그런 것이 어른의 삶이었다. 독립이었다. (p. 131) 거리에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우리자신'이 아니고 '도시 풍경의 기능'이 된다. 전에는 시선의 대상이었지만 거리 산보자가 되면 섹스나 젠더에서 벗어난 관찰하는 주체가 된다. 우리는 익명성의 외투를 두르고 종종 알 수 없는 도시처럼 우리도 알 수 없는 존재가 된다. (p. 137)

저자는 런던에 가서 울프와 함께 걷는다. 울프의 작품들을 통해 울프의 생각에 공감하고 울프가 걷던 길을 따라 걸으며 울프의 자유를 느낀다. 진 리스가 걷던 파리 거리에서 여자는 관음의 대상이었으나 버지니아 울프가 걷던 런던 거리에서는 서서히 여성도 거리에서 익명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혼자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른이 되고 독립적 성인이 되며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 지금은 과연 얼마나 달라졌나 생각해본다. 여성이 사람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파리 거리에서 시간의 표식, 혁명과 격변이 남긴 흉터를 찾는 나는 파리 시민들이 자기들에게 지워진 것에 저항했으며 삶을 평온하게만 유지하려고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찾아본다. (p. 158)

파리는 역사적으로 혁명의 도시다. 처음 만났던 파리와 다르게 다시 만난 파리는 좀더 깊숙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돌아온 파리에서 저자는 조르주 상드를 생각한다. 이제 청춘을 함께했던 진 리스 는 과거형이 되었다.

조르주 상드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남자 옷을 입고, 시가를 물고, 여러 애인을 만나고, 소설을 아주, 아주 많이 쓴 작가. 상드의 신화는 우리의 문화적 의식에 뚜렷이 새겨져 있지만, 사실 요즘에는 상드의 작품을 그다지 많이 논의하지 않는다. 영어로 번역된 작품이 많지 않기도 하고, 번역된 작품을 접한 독자들도 소설이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실망하기 쉽기 때문이기도 하다. (p. 160) 당시 페미니스트 집단에서 상드에게 입회를 권유하였으나 상드는 자신은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p. 162)

조르주 상드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상드의 입장은 굉장히 선구적이었다고 보여진다. 당시로서는 남성에 비해 너무 뒤처진 여성의 처우를 개선시키는 일이 급했으니 여성만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을 지 모르나 지금의 페미니즘을 여성학과 동일시하는 것은 편협한 관점이다. 진정한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을 아우른 함께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학 이라는 어느 여성학자의 말을 나는 늘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다.

상드가 남자 옷을 입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밖에 나가 활동하려면 여성임을 드러내는 옷은 제약이 많았다. 남자 옷을 입고 상드는 플라뇌르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작가가 될 수 있었다. 도시에서 총과 대포소리가 들리던 피비린내 나는 혁명의 파리에서 살았던 상드는 남자든 여자든 삶에서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 희망이 지금의 파리에서 얼마나 이루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전히 플라뇌즈라는 단어는 프랑스어 사전에 없다는데 말이다.(저자에 의하면 플라뇌즈 를 프랑스어 사전에서 찾으면 '안락의자의 일종' 이라는 뜻으로 나온다고 함)

저자는 영문학 대학원생이었지만 소설을 쓰고 싶은 소망이 있었고 '물 위의 도시' 라는 제목부터 붙여놓았었기에 소설의 자료를 모으기 위해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 간다. 베네치아에서 저자가 떠올린 여성 예술가는 '소피 칼'이다. 소피 칼은 사진작가 이자 개념미술가라고 하는데 저자가 설명하는 소피 칼의 작품 특징은 무작위적인 대상을 일방적으로 추적하면서 그 대상의 동선에 따라 찍은 사진이나 영상이 작품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예술가를 길에서 만나게 된다면 나는 좀 무서울것 같은데;;;

소문에 따르면 파리 생탄 병원에는 파리에 크게 실망해 긴장증을 일으킨 일본인 관광객들을 수용하는 정신병동이 있다고 한다. 크루아상과 마카롱과 샤넬 넘버 파이브 향기를 기대하고 왔는데 실제로 마주한 파리가 너무 더럽고 시끄럽고 거칠어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란다. 이런 증상을 '파리 증후군'이라고 부르는데, 스탕달이 피렌체 여행을 하며 묘사한 것과 비슷한 신체 증상이 나타난다. '베를린에서는 그런 것을 '신경증'이라고 부른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고 주저앉을까 봐 두려워하며 걸었다'. 하지만 도쿄에는 도쿄의 끔찍함에 정신줄을 놓은 파리 사람들을 수용하는 정신병원은 없다. (p. 229)

도시 전체를 지배하는 미학이 순수한 기능주의였다. 내가 뭘 기대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왜 실망했는지 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무언가 다른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 무언가 덜 산업적인 것. 잠깐 동안이라도 여기가 집이라고 느낄 수 있는 도시. 내가 늘 그렇게 하듯이 걸어서 탐사할 수 있는 도시. 그렇지만 도쿄는 걸을 수 있는 도시가 아니다. 너무 크다. (p. 230)

저자의 각 도시별 경험은 저자의 연애사와 함께 하는데 도시를 옮길 때마다 남자친구가 바뀐다고나 할까;;; 베네치아에서 돌아온 파리에서 만난 남자친구가 도쿄지점으로 발령이 나면서 저자도 됴코로 거주지를 옮기게 된다. 새로운 도시에서의 산책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지만 도쿄는 산책하기에 좋은 도시가 아니었다. 너무 깨끗하고 너무 거대하고 너무 화려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동양에 한번도 가본적 없는 동양에 대해 서양인들이 갖는 로망은 그네들의 선진문물의 손이 닿지 않은, 좋은 말로 하면 향수적이고 안좋은 말로 하면 발전이 덜된 뭐 그런 이미지를 연상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일본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아 도쿄에서 여자로 산다는 게, 특히 일본인이 아닌 여자로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명백하게 느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거나 (남자들이 길에서 나를 치고 지나가거나 아니면 스타벅스에서 내 테이블 위에 있는 종이를 코트자락으로 쓸어 떨어뜨리곤 했다) 아니면 확연히 부정적인 시선을 받았다. (p. 260)

도쿄라는 배경이 외국에 나온 미국인이라는 익숙한 이야기를 더욱 극단적으로 만들고 영화에 현대적인 느낌을 부여한다. 파리가 19세기의 수도이고 뉴욕이 20세기의 수도라면 도쿄는 21세기의 수도다. 그러나 그 현대성이 소외감을 준다. (p. 263)

우울했던 도쿄생활에서 저자는 소피아 코폴라 의 2003년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를 떠올린다. 그 영화속 샬럿이라는 인물에 동질감을 느낀다. 하지만 샬럿과는 또다른 비동질감을 느꼈던 저자는 다른 영화들을 통해서도 도쿄를 산책해보려 하지만

나는 지층에서 도시를 발견하려고 했지만 그곳에서는 도시가 없었다 도쿄에서 플라뇌징을 할 때에는 계단을 올라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다리를 올라 위로, 혹은 꼭대기로 가야 내가 찾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아름다움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그냥 무작정 거리를 돌아다닐 수는 없다. 파리가 아니니까. 수줍은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 곳이다. '가와이'를 추구하면서 내성적인 척하고 안짱다리로 서 있다가는 도시의 가장 좋은 면을 놓치기 딱 좋다. (p. 270)

도쿄와의 비교감은 연인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끼쳤고 파리에 돌아온 뒤 저자는 연인과 관계를 끝냈다. 한 도시당 한 건의 연애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저자는 이국적인 외모와 이질적인 태도를 지닌 본인이 도쿄에서 당했던 경험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럴수록 더욱 파리를 그리워할 뿐이었다. 하지만 저자가 베네치아 성당에서 짧은 치마를 지적당하고 안식일 예배에 카메라와 핸드폰을 외부에 맡겨놓고 가야 하는 불편을 겪을 때 저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지하철에서 연인 무릎에 앉아 가다가 일본 남성에게 허벅지를 철썩 맞고(주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여자 허벅지에 손을 대고 지나갔다는 것은 아주 몰예의적 몰상식적 행동이었다고 보여지지만 여하튼 남자 무릎에 앉아가는 것도 좀;;;) 식당에서 다른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을 잘못됐다고 지적할때 저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저 파리를 그리워할 뿐이었다.

저자의 플라뇌즈 적 삶은 파리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 여성의 플라뇌즈 적 삶을 이야기하는 것과 연결성이 떨어지곤 해서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부분이었다.

여하튼 그렇게 다시 저자는 파리로 돌아온다. 어쩌면 저자에게는 당연하게도.

사회 문제에 맞서 일어나는 시위에는 진지한 면과 스스로를 신화화하는 면이 분명히 공존한다. 그러나 파리 사람들이 일어서서 행군하고 권력에 진지하게 맞서고 반대 의견을 밝히는 것을 보면 나는 늘 깊은 인상을 받는다. 내가 이곳에 살고 싶어진 이유 가운데 하나도 그것이었다. 나도 신화화하려는 욕망에서 자유롭다고 말할수는 없겠다. 그러나 그게 위험하다는 것은 안다. (p. 280)

나도 모르는 새에 뉴욕에서 내가 되지 않으려고 했던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용보다 의식(儀式)에 더 관심 있는 사람, 그것도 너무 쉽게 그렇게 되어버렸다. 군중 소에서 함께 걷는 행위에는 무언가 야만적인 힘이 있다. 폭력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 무리에 속하게 되자 불안해졌다. 어디인지 모르는 곳으로,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 의해, 무엇인지 모르는 일을 하게 이끌려가기가 너무나 쉬웠다. (p. 290)

저자가 파리로 올때마다 파리에서 저자는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이번 파리는 저항의 도시이다. 혁명의 기운은 현대의 파리 도심에 시위의 모습으로 자주 발현되곤 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고민과 의지 없이 휩쓸리게 된 시위는 그저 순간적이고 위험할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의식적이고 주체적으로 행동했던 상드를 다시 떠올린다.

상드는 여성참정권을 하루아침에 도입하기에는 무리이고 단계적으로 획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드는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만 여성이 권력으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일단 가정에서 평등을 획득한 다음에 바깥세상에서 평등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드가 옹호한 것은 프랑스,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있는 사회주의적 프랑스였다. 그렇지만 상드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일어선 곳, 다른 사람들도 스스로 일어서는 것을 본 곳은 파리라는 도시였다. (p. 293)

상드가 코뮌을 싫어한 까닭은 코뮌이 '시민이 돌아오고 보행자가 쇠퇴'함을 의미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코뮈나르(코뮌 지지자)보다도 더 위험하게 여겨진 것은 여성 혁명가의 등장이었다. 플라뇌르에게는 거리가 '탈정치공간'이었을 수 있으나, 플라뇌즈에게 탈정치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p. 295)

상드가 경험했던 혁명의 시대 속 파리는 가능성과 희망이 보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알게 됐다. 새시대의 가능성과 희망은 남성들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을. 하지만 여전히 파리는 시위와 바리케이드가 자연스러운 곳이고 그런 파리를 보며 저자는 여전한 저항의 힘을 느낀다. 파리만의 저항성. 그 저항성이 잔인한 내용의 국가, 저자 표현에 따르면 국가중에서도 가장 유혈이 낭자한 노래인 '마르세예즈'에 남아있는한 어쩌면 파리의 이런 모습은 지속될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파리는 그 어떤 모습을 가졌건 저자가 가장 살고 싶은 도시이다. 삶의 현장으로서의 파리에서 저자가 가장 매력을 느끼는 부분은 '이웃'이다. 저자가 열렬한 팬심을 갖고 있따는 아녜스 바르다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라는 영화를 따라가며 저자는 파리를 또다르게 묘사해낸다.

이 영화는 특히 여자는 스펙터클, 구경거리이기 때문에 남자처럼 익명으로, 주위를 구경하면서 거리를 걸어다닐 수 없다는 생각에 도전한다. 보이기만 하지 않고 스스로 본다는 것은 도시에서 여성의 자유가 시작된다는 신호다. (p. 326)

고다르가 한 이런 말이 유명하다. "영화는 여자 한 명과 권총 한 자루만 있으면 만들 수 있다" 바르다는 여자 한 명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입증했다. (p. 350)

바르다는 페미니스트의 첫 번째 행위는 바라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시선의 대상이지만 또 나는 볼 수 있다" 바르다의 영화가 하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세상과 세상 안의 우리 자리를 비스듬한 눈으로 보는 것, 우리는 이삭 줍는 사람, 플라뇌즈, 방랑자, 이웃이다. 객관성 따위는 없다. (p. 357)

사람들 말이 파리는 천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래도 동네마다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도시는 심리적 분위기가 뚜렷이 다른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어떤 공동체적인 느낌이 있다. (p. 329)

'정착하고 싶어하는 방랑자'로 스스로를 칭하며 파리에서 저자는 바르다의 영화속 시선을 통해 파리를 또 산책해본다. 그렇게 영화속 클레오가 되어 파리를 걷고 나면 저자는 파리에서 자유롭게 방랑하고 있음을 느끼고 파리에 정착한 이웃으로 환영받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파리는 그 둘이 모두 가능한 도시라고 저자가 말하는 듯 하다.

자유롭게 방랑하고 글을 쓰는 여성으로 저자는 마사 겔혼을 등장시킨다. 유명한 종군기자이자 헤밍웨이의 첫번째 아내였던 겔혼.

계속 집을 만들려고 하지만 언제나 집이 없었던 사람, 소설가, 도망자, 이혼녀, 자신만만하고 건방진 기자, 집 나온 계집. (p. 362)

도시 한가운데에 전선이 있어 걸어서 전선에 갈 수 있는 마드리드에서 겔혼은 날마다 포위된 수도를 돌아다니며 전쟁이 도시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일상적 영향을 생생하게 보도했다. 겔혼은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떤 기분인지, 어떤 일들을 하는지, 어떻게 버티는지 알고 싶었다. 겔혼은 나중에 자신의 전쟁 보도가 '연대의 몸짓'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전쟁이 벌어지는 현장에 가기 위해 겔혼은 가정생활로부터 멀어져야 할 때가 많았다. (p. 365) 겔혼은 여행과 플라네리가 같은 충동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겔혼은 홀로 동떨어져 있는 고독한 플라뇌르의 이미지를 버리고 플라뇌르를 어떤 목표, 깨달음, 본 것을 기록하고 나누는 방법을 지향하는 존재로 재정의한다. 겔혼은 불행을 드러내는 데에 몰두하면서 플라네리를 '증언'으로 바꾸었다. (p. 366)

겔혼의 삶을 통해 저자는 플라뇌즈의 개념을 확장시킨다. 여성이 산책을 할 수 있게 된 순간, 여성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된 순간 산책은 산책을 넘어선 그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음을 그 하나의 예로 겔혼의 여정을 저자는 제시한다.

저자는 파리로 돌아가려 했으나 비자는 만료됐고 일하던 직장에서 계약도 만료됐고 시민권 면접에서는 잘했지만 수입이 많지 않아 거절당하면서 재입국이 거부되었다. 그렇게 예기치 않게 뉴욕으로 돌아가게 된다. 고향인 뉴욕.

나는 뉴욕에서 부동산 개발업자인 남자 친구와 같이 살았었는데 그가 차를 샀다. 그게 우리 사이가 끝나는 계기가 됐다. 남자친구는 시속60마일로 미래를 향해 달려가려 했다. 나는 걷고 싶었다. (p. 398) 여러 해 동안 낯선 유럽 도시에서 길을 잃고 돌아온 나는 여기, 내 도시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p. 403)

파리에서 나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고 나만의 맥락에서 삶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러시아, 이란, 인도, 독일 ,브라질 등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독립심을 느꼈다. 내가 원하는 곳 어디에라도 살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프랑스에서 사는 게 좋았다. (p. 405) 다만 그게 사실이 아니었따. 알고 보니, 미국인은 돈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긴 하지만, 그곳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p. 406)

미국인들은 실상 대부분 다른 곳에서 왔는데도 미국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상 세상의 모든 나라는 누가 땅을 차지하느냐의 싸움을 통해 형성되지 않았나?인간의 역사는 이주와 정복의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난민이다. 그러나 그렇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깊게 의식하느 사람들도 있다. (p. 407)

내가 미국에서 유럽과 아시아을 돌아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며 방랑벽을 충족시키는 동안 거의 아무 저항도 맞닥뜨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특권 덕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뿌리 내린 곳을 박차고 나오고 장소가 우리를 지켜주지 않음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공간 덕임도 알게 되었다. 뿌리를 경계하라. 순수함을 경계하라. 고정성을 경계하라. 어딘가에 소속되었다는 느낌을 경계하라. 유동성, 비순수성, 혼합을 받아들이라. (p. 409)

저자는 파리로의 입국이 거부되는 경험을 해보고 나서야 자신이 그동안 누렸던 것과 자신이 그동안 갇혔던 틀을 인식하고 이해하게 된다. 삶에서 경험만큼 큰 깨달음을 주는 것은 없다. 하지만 저자가 파리에 다시 신청한 시민권이 수락되고 나서 저자는 다시 파리에 소속되기를 바라며 파리로 간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을 저자의 생각을 통해 읽고 내가 보지 않은 영화를 저자의 생각을 통해 보면서 저자가 처음에 심어주었던 '플라뇌즈'라는 여성형 명사에 대한 기대감은 줄어들었지만 저자 개인의 인생흐름을 통해 저자와 함께 성장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프롤로그에서만 여성예술가들의 플라뇌즈적 면모가 돋보이고 막상 본문에서는 저자 개인의 일기처럼 좁혀진 관점이 아쉽긴 했어도 '여성이 도시를 걷는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한번 되새겨볼 수 있는 책이었다.

중성적은 눈으로 도시를 받아들이고 싶든,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육체가 되고 싶든, 그 사이의 무수한 무엇이 되고 싶든, 정서적 풍경의 미묘한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함으로써 도시에 우리 자신을 통합할 수 있다고 울프는 말한다. 도시 안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인식해야만 그것에 도전할 수 있다. 여성의 플라네리, 즉 플라뇌세리(flâneuseris)는 우리가 공간 안에서 움직이는 방식을 바꾸고 공간의 조직에도 개입한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공간의 평화를 흩뜨리고 공간을 관찰하고(혹은 관찰하지 않고) 차지하고(혹은 차지하지 않고) 조직할(혹은 조직을 와해할) 권리를 주장한다. (p. 4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스티튜트 2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악에 맞서는 아이들의 이야기

2권으로 구성된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아이들이다. 그냥 아이들이 아니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이들. TP(텔레파시) 와 TK(염력)

그 아이들이 아무도 모르게 시설에 갇혔고 테러에 이용된다. 하지만 사소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았던 루크라는 소년에 의해 거대한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녀와 이 시설과 1955년부터 자금을 대며 비밀리에 이곳을 운영 중인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실이 있다면 BDNF 수치가 높은 아이들에게는 일종의 패키지처럼 초능력이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TK 아니면 TP, (드물긴 하지만) 양쪽 모두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대개는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어떨 때는 아이들조차 자기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줄 몰랐다. 아는 아이들은 가끔 유용하게 활용했지만 그 외에는 무시하고 지냈다. 거의 모든 신생아가 BDNF 검사를 받았다. (p. 11)

신생아때 으레히 받는 기초 검사 중의 하나가 이렇게 이용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이 검사의 수치로 인해 태어나면서 부터 아이들은 추적관찰되었고 때가되면 납치되었다. 그렇게 잡혀온 루크는 시설의 청소부 모린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탈출하고 모린은 암으로 얼마 남지 않아있던 자신의 생명을 좀 더 빨리 끝낸다. 그리고 그 현장에 시설 관계자들이 볼 수 있도록 분명하게 메세지를 남겼다.

지옥이 기다리고 있어. 내가 먼저 가서 너희들을 맞아 줄게. (p. 16)

이 시설은 역사가 60년이 넘지만, 60년이 훨씬 넘지만, 그동안 정체가 누설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숲 속의 이 시설을 두고 인접한 마을에서는 이런저런 소문이 떠돌기는 했다. 핵미사일기지 라던가 세균전 혹은 화학전과 연관이 있는 건물이라던가... 이런 소문은 거짓이었지만 진실도 조금은 품고 있었다. 즉, 평소 범인들과는 상관없는 무기시설일 것이라는 추측. 그리고 이 추측은 일면 맞는 것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곧 무기였던 셈이니. 아무도 모르는. 하지만 엄청난.

그들은 전국 각지에 정보원이 있었다. 자가용 비행기가 항시 대기중이었다. 직원들은 보수를 많이 받았고 다양한 직책마다 온갖 부수적인 혜택이 수반됐다. 그럼에도 이 시설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 쇼핑몰의 염가 할인 매장을 점점 닮아갔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바꿔야 했다. 바뀌어야 했다. (p. 24)

이 시설은 그녀의 인생이 되었고 그녀는 거기에 불만이 없었다. 대부분의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그들은 군인 아니면 블랙워터나 토마호크 글로벌처럼 까다로운 기업의 보안요원 아니면 경찰이었다. 선발 배치됐을 때는 시설이 그들의 인생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그렇게 됐다. 보수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부수적인 혜택이나 퇴직 프로그램 때문도 아니었다. 수면처럼 익숙해진 일종의 생활 패턴 때문이었다. 시설은 소규모 군사기지와 같았다. (p. 26)

하지만 다들 항상 되돌아오기 마련이지. 다들 되돌아오기 마련이고 이 시설이 어떤 면에서 아무리 느슨해졌다 한들 그걸 떠벌이고 다니지는 않아.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절대 느슨해지지 않지. 우리가 여기서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우리 손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파괴되었는지 밝혀지면 단체로 재판을 받고 처형을 당할 테니까. (p. 27)

이런 시설이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시설을 인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직 군인이나 경찰 중에서 온갖 잔인했던 경험들로 인해 싸이코패스에 가까운 정신을 지닌 사람들은 이런 시설에서 오히려 마음껏 폭력을 휘두를 수 있어 좋았다. 설령 대상이 어린 아이들이었다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이런 시설이 필요했고 보안은 저절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점점 신규인력 충원이 어려워졌고 그렇게 관리자들은 늙어가고 시설은 오래되고 낡아져 갔지만 보안 때문에 유지보수가 어려웠다. 그런 노후된 시설에서조차 겁에 질린 아이들은 감히 도망갈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천재적 지능의 소유자였던 루크는 다른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런 루크로 인해 다른 아이들도 용기를 내어 변화하기 시작했다.

"됐다, 꼴통. 그 상자에 앉았을 때 너 봤어. 이제 나와도 돼" (p. 104)

피투성이가 되어 겨우 숨어든 기차에서 루크는 이대로 끝장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고 느낄 수 있게 하는 사람들이 간혹 존재했고 스쳐지나가는 인연이었을 매티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루크의 상처와 루크의 절실한 눈빛을 보며 처음 보는 소년의 말을 믿어주었다. 그리고 얼마만에 먹어보는 것인지 모를 음식봉지까지 던져넣어 주며 추적자들의 손에서 그 순간은 일단 벗어나게 해주었다. 행운을 빈다며. 그저 자신의 어릴적 가출이 절실했듯이 루크의 가출도 성공하기를 바란다며.

"도망치지 못하면 여길 장악하는 거야" (p. 152)

루크의 탈출을 도왔던 어린 소년 에이버리가 건물 앞동에서 건물 뒷동으로 이송되면서 뒷동에서 해후하게 된 친구들은 루크와 다른 방식으로 시설에 균열을 일으킬 만한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에이버리는 절박한 희망이 담긴 눈빛으로 칼리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송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눈빛이 모든 걸 얘기하고 있었다. 여기 조각들이 있어. 샤. 부족한 것 없이 다 있을 거야. 조립할 수 있게 도와줘. 당분간만이라도 우리가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성을 만들 수 있게 도와줘. 그녀는 엄마가 스바루 뒤 범퍼에 붙이고 다녔던, 오래돼 빛이 바랜 힐러리 클린턴 스티커를 떠올렸다. 거기에는 '함께 힘을 합쳐 더 강하게'라고 적혀 있었고 여기 이 뒤 건물에서는 그게 핵심이었다. (p. 166)

칼리샤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힘을 합하면 더 강력해졌지만 그래도 아직 모자랐다. 몇 년 전에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도 그렇지 않았던가. 그녀의 상대와 그 선거운동원들은 정치적으로 여기 관리인들의 전기봉에 맞먹는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p. 168)

한창 소설에 빠져들어 읽다가 웃음이 났다. 역시 스티븐 킹!

그는 위대한 이야기꾼 이기도 하지만 현실정치에 당당히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작가이기도 했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 문장을 만나게 되는데 그럴때면 멋지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여하튼,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어린아이 였지만 가장 뛰어난 TP능력을 가지고 있던 에이버리를 중심으로 뒷건물 아이들은 생각을 모았고 조금씩 조금씩 해결해 나갔다. 함께. 힘을 합쳐서.

모두들 겁에 질려서 우왕좌왕하는 지금이 기화였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 니키가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좋은 때가 없어. (p. 177)

맞아. 칼리샤는 생각했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복화술사의 무릎에 멍하니 앉아 있는 인형으로 지낼 필요는 없었다. 너무나 단순하지만 엄청난 깨달음이었다.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데서 힘이 생겼다. (p. 178)

루크에게는 또다른 멋진 남자 팀과의 만남이 운명처럼 주어졌고 팀은 따뜻하고도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해 나간다. 시설에서 파견된 추적자들은 팀과 루크가 있는 작은 마을의 경찰소를 습격하고 그 사이 시설에서는 시내 총격전 보다 더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올라? 메 에스쿠차스?" ('여보세요? 내 말 들려?' 라는 뜻의 스페인어)

"봉주르, 부 마탕데?" ('여보세요? 내 말 들려?' 라는 뜻의 프랑스어)

"스드라보, 수예 슬리 메?" ('여보세요? 내 말 들려?' 라는 뜻의 크로아티어어)

"할로, 후 어 예메?" ('여보세요? 내 말 들려?' 라는 뜻의 네덜란드어"

"챠오! 미 센티? 미 센티?" ('여보세요, 내 말 들려?' 라는 뜻의 이탈리어어)

"메 에스쿠차스? 회르스트 두 미흐?" (내 말 들리냐는 뜻의 독일어) (p. 315 ~ 319)

시설 속 아이들이 힘을 합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정신은 하나로 모이게 됐고 그 공통의 정신세계 속에 커다란 전화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세계 곳곳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 전화기를 받아야 하나? 받을 수 있을까? 받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루크는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메인에 있는 거기가 미국에 하나뿐인 시설일 수도 있고 서부에 하나 더 있을 수도 있어요. 마치 북엔드처럼. 하지만 영국... 러시아... 인도... 중국... 독일... 한국에도 하나씩 있을지 몰라요. 생각해 보면 말이 돼요"

"군비 경재잉 아니라 정신적인 경쟁이다. 네 말은 그거지?"

"경쟁은 아니라고 봐요. 모든 시설이 공조 관계일 거예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럴 것 같아요. 공동의 목표, 훌륭한 공동의 목표죠" (p. 331)

한국이 언급됐다. 선진국 대열에 당당히 서있음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해야 할까? ^^ 아니다. 선진국은 선진국이지만 제대로 알고 나면 마냥 기뻐할 수 없는 '한국'의 언급이었다.

"네 친구들을 구하러 거기로 가는 게 아니지?"

"네, 사태를 수습하러 가는 거예요" (p. 332)

열두살 소년 루크의 계획은 겉으로는 친구들을 탈출시키기 위함이었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루크 자신도 아직 모르고 있을 만큼의 커다란.

에이버리와 다른 아이들은 큰 전화기를 사이에 두고 동그랗게 서 있었다.

아령 모양의 수화기가 정글짐 위로 삐딱하게 얹혔다. 송화구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각기 다른 언어가 똑같은 걸 물었다. 여보세요, 내말 들려? 여보세요, 내말 듣고 있어?

응. 시설의 아이들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잘 들려! 지금이야!

스페인의 시에라네바다 국립공원에서 동그랗게 서 있던 아이들이 들었다. 디나르알프스 산맥에 갇혀어 동그랗게 서 있던 보스니아 아이들이 있었다. 암스테르담의 항구 입구를 지키는 팜푸스 섬에서 동그랗게 서 있던 네덜란드 아이들이 들었다. 바이에른 산림에서 동그랗게 서 있던 독일 아이들이 들었다. 이탈리아의 피에트라페르토사에서도. 한국의 남원에서도. 시베리아에서 1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체르스키라는 유령 도시에서도.

아이들은 들었고 대답했고 하나가 되었다. (p. 374, 375)

시설은 미국 메인주 한 곳이 아니었다. 시설에서 일하는 사람들들조차 몰랐지만 시설에 갇혀있던 아이들은 알아냈다. 서로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었다. 그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그걸 무슨 수로 덮었나요, 스미스씨? 궁금한데"

"계속 궁금한 채로 지내세요. 하지만 이거 하나만 알려드리자면 우리에게 뒤치다꺼리가 맡겨진 곳이 메인의 시설 한 군데만은 아니었어요. 전 세계적으로 시설이 스무 군데 더 있었는데 남은 곳이 하나도 없어요. 거의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이들에게 복종을 반복주입하는 나라에 있었던 두 군데는 이후에도 한 6주정도 버텼지만" (p. 407)

아이들이 일을 냈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일을.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아이들은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성장하고 있었다.

이런 시설이 있던 곳에 '한국' 이 언급됐던 것은 선진기술의 인정이자 원인미상의 테러가 일어나는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걸 기분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

시설의 운영방식과 목적을 알고 나면 자연스레 연상되기 마련일텐데 역시나 시작은 나치 였다.

"첫 번째 시설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긴 했지만, 나치 독일 치하에서만들어졌죠"

"그게 놀랍게 들리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당신은 그렇게 편견으로 가득한 이유가 뭘까요 나치는 미국보다 먼저 핵분열 현상을 발견했어요. 오늘날까지 쓰이는 항생제를 개발했고요. 현대 로켓공학도 그들이 창시한 거나 다름없어요. 독일의 몇몇 과학자들은 히틀러의 열정적인 후원 아래 ESP 실험을 진행하다가 재능이 있는 아이들을 동원하면 눈엣가시, 그러니까 진보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제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의 우연히 발견했어요. 하지만 이 아이들은 1944년에 고갈됐죠. 잠재되어 있는 초능력을 알아내는 가장 효과적인 검사 방법은 나중에 개발이 됐어요" (p. 408, 409)

스티븐 킹은 서양인이니까 온갖 잔인하고 인간이하의 실험들에 대해 나치를 생각했겠지만 그가 세계대전 중 일본이 벌인 실험들을 알았다면 나치보다 더 잔인하고 더 인간이하의 온갖 실험들을 알았다면 다른 소설적 구상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일본군들의 만행을 스티븐 킹이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만의 시원스런 스타일로 소설에서 확 까발렸으면 좋겠다.. 소설에서나마.. 소설로라도..

"이모는 트루먼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는 것도 알았어. 아무도 그 헛소리를 안 믿었지만"

"트럼프에 대해서도 아셨어요?"

"아, 그 골빈당이 등장하기 한참 전에 돌아가셨어" (p. 415)

최근 영미권 소설치고 트럼프 욕이 안나오는 경우가 없어보이던데 이번에도 역시 ^^ 멋지다! 스티븐 킹! 멋지다! 작가들~

"다만 저 사람이 아저씨한테 하지 않은 얘기가 하나 있어요. 아마 자기 입으로 얘기하기 싫어서 그랬을 거예요. 저 사람들 모두 그래요. 베트남 전쟁 때 누가 봐도 이길 방법이 없을 정도가 된 이후에도 장군들은 자기들 입으로 시인하기 싫어했던 것처럼" (p. 417)

"40년대 후반이나 50년대 초반에 맨 처음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는 잘 몰랐을 수 있지만 80년대부터는 알았을 거예요. 아니면 60년대 부터" (p. 420)

"너는 지금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어. 인간은 누구나 그렇지. 앨리스 군. 때가 되면 너도 그걸 알게 될 거다. 그리고 비통함을 느끼겠지" (p. 425)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있는 사람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었다. 그것도 아이들을 이용하는 아주 나쁜 어른들. 그래놓고 살아남은 아이들에게 일부러 찾아와서 공포와 죄책감을 심어놓으려 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다시 그런 시설들을 일으킬 거라고. 너희들을 계속 지켜보고 있다고.

하지만 이런 어른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너희 탓이 아니야. 너희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니야. 그남자가 오늘 찾아온 이유는 너희들한테 조용히 지내라고 경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 삶을 오염시키기 위해서였어. 그 남자의 수법에 넘어가지 마라. 너희들 모두 그러면 안돼. 우리 인간은 다른 어떤 것보다 한 가지를 우선시하도록 되어 있는데, 너희들은 그 본능을 따랐을 뿐이야. 너희는 살아남았어. 사랑과 기지를 동원했고 살아남았어. 이제 케이크 먹자" (p. 428)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고 믿어주고 손을 잡아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어른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아직 더 자라야 하고 그런 아이들을 지켜줄 어른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울때는 달달한 케이크가 필요하다. ㅎㅎ

스티븐 킹 답게 서서히 진행되다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커지면서 휘몰아치는 말미에 푹 빠져들어 읽었다. 매번 느끼지만 스릴러와 판타지의 경계에 있는 듯한 그의 이야기들은 묘한 설득력이 있다. 정말 현실에 있을 법한. 그리고 사건이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되면서 일단은 해피엔딩으로 보이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면 해피엔딩이 아닐수도 있다는 것이 뒤늦은 섬찟함을 느끼게 한다. 이런 맛이 역시 스릴러 아니겠는가. 여름에 읽는 스티븐 킹의 소설은 늘 멋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