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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살인 2
베르나르 미니에 지음, 성귀수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그날의 사건, 다 잊어도 그들은 잊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 그들은 하나가 되었다."
용의자는 많은데 결정적인 단서가 없다. 배후에서 수사를 흔드는 자는 누구인가?
세르바즈 형사는 여교사 살해 현장에 남아 있던 용의자 위고와 주변 인물, 치료감호소에서 사라진 연쇄살인마 쥘리앙 이르트만, 피해자와 은밀한 만남을 해온 국회의원 폴 라카즈를 중심으로 수사를 펼친다. 저마다 혐의점이 있지만 결정적인 단서가 드러나지 않는다. 범인은 거짓 단서를 흘려 수사를 혼란에 빠뜨리는 한편 더욱 대담한 살인 행각을 벌인다. 용의자들을 중심으로 전개해오던 수사는 끝내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면서 점점 더 짙은 안갯속으로 빠져든다. (표지 中)
1권에서 잔혹한 여교사 살인사건으로 시작한 이 소설은 2권에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과거사건이 드러나면서 수사의 파편들이 끼워맞춰지기 시작한다. 세르바즈 형사의 심리에 몰입되면 될수록 나도 모르게 숨죽이며 스릴러의 분위기에 빠져들게 된다.
정체모를 남자가 천신만고끝에 프랑스땅에 발딛게 된 말리남자에게 접근한다. 이 말리출신 이주민은 한 건물의 청소부다. 정체모를 남자는 USB를 건네며 거액을 제시한다. 프랑스에 자리잡고 싶은 이주민에게는 이미 앞서 그를 위해 했던일이 발목을 잡고 그가 내미는 거액의 돈이 너무나 필요하다.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며 결국 이렇게 말한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p. 19)
1권에서 그냥 평범한? 범죄자로 조사받았던 엘비스는 알고 보니 살해사건과 뜻밖의 연결고리가 있었다. 그가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다른 존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말이야, 머잖아 겁이 날걸"
목소리 속에 어떤 것이 엘비스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저 확신, 저 침착함 그리고 차가움, 놈들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베란다 바닥에 투명한 주방용 랩을 펼치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필사적으로 출구를 찾는 새장 속 새 한마리처럼 가슴 속에서 파닥거렸다. (p. 46)
마르고는 여전히 학교안에서 수상쩍은 움직임을 뒤쫓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아뿔사 들켜버렸다. "발칙한 년, 우리를 염탐하고 있었어?" (p. 35)
세르바즈는 마리안과 재회 이후 수사를 하면 할 수록 옛 친구 프랑시스에 대해 자신이 너무 몰랐다는 것을 깨닫는다. 엘비스가 목숨걸고 남긴 힌트를 보고나니 더더욱 프랑시스가 의심스럽다.
고교 시절보다 더 오래된 추억. 프랑시스와 세르바즈. 열두 살에서 열세 살 무렵이었다. 프랑시스가 그에게 도마뱀 한 마리를 보여주었는데 벽에 달라붙어 햇볕을 쬐고 있는 녀석이었다. "잘봐" 별안간 프랑시스가 삽인지 녹슨 칼인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무언가로 그 도마뱀의 꼬리를 절단했다. 잘려나간 꼬리는 마치 그 자체로 살아있는 듯 게속 움직였꼬, 도마뱀은 깜짝 놀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르탱이 몸체에서 떨어져나간 채 살아 움직이는 꼬리를 신기해서 들여다보는 사이 프랑시스는 도마뱀이 구멍으로 사라지기 직전 녀석의 대가리를 큼직한 돌로 내리쳐 박살냈다. (p. 54)
하지만 프랑시스의 진면모를 알게 된 이후 세르바즈는 오히려 더 고통스러워졌을 뿐이었다. 마리안에 대해서도 역시나 그는 너무 몰랐었다.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서 서로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게 되는 것일까? 부부사이라 해도 서로를 모르기 쉬웠다. 유력한 용의자인 라카즈 부부만 봐도 그렇다.
"쉬잔 라카즈입니다"
"제 남편에 관한 얘기입니다"
"지난번 저녁에 그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알리바이와 관련해서요" (p. 91)
쉬잔이 세르바즈에게 털어놓은 것은 라카즈와 쉬잔의 부부사이를 정리하는데 결정적이었을 뿐 정치인의 속셈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뿐 살인범을 추적하는데는 큰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그는 여전히 유력한 용의자였다.
엘비스, 라카즈, 프랑시스, 이르트만. 드라마의 등장인물 네 명은 지금 형사를 가운데 두고 마치 술래잡기를 하듯 원무를 추고 있는 셈이었다. 눈을 가린 술래는 두 팔을 뻗은 채 대책 없이 더듬거리며 살인마를 찾고 있었다. (p. 113)
독특한 여교사 살인사건이 세르바즈 자신과 이토록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지 그는 처음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사건을 파고들면 들수록 자신과 주변사람들에 대한 의혹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되는 현실이 버겁도록 힘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딸 마르고를 지켜야 했다. 그 마르고가 사건의 중요한 힌트를 알아낸다.
다시 서클이 그려졌다. 매년, 같은 날이었다. 6월17일, 각자의 몸뚱어리에 새겨진 날짜였다. 10. 그것은 머릿수. 딱 떨어지는 수였고, 글자그대로 서클이었다. 희생자가 17명이었고, 생존자가 10명이었다. 6월 17일. 신, 우연 혹은 운명의 뜻이었다. 그들은 눈을 감은 채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억에 자신들을 내맡겼다. (p. 236)
매년 6월이면 일어났던 사고 혹은 실종으로 처리되었던 사건들은 개별적이고 평범한 사건이 아니었다. 숨어있던 그들이 여교사 살인사건에선 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냈는가? 연결성이 분명히 있으면서도 뚝뚝 끊어지는 지점들이 세르바즈를 갈수록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이르트만의 망령이 그를 찾아오곤 했다. 그리고 마르삭...
마르삭.... 과거는 한번 솟구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솟구쳤다가는 영영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마치 배가 가라앉기 직전, 수직으로 꼿꼿이 일어선 선체와 유사했다. 그가 믿었던 모든 것,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젊음의 추억, 존재 깊숙이 자리한 그 모든 향수는 다름 아닌 환상이었던 것. 그동안 거짓을 토대로 인생을 구축해온 셈이었다. (p. 244)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것은 자신의 과거를 새롭게 돌이켜보는 과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헌병대장 이렌의 도움으로 하나하나 단서를 추가로 모아가면서 세르바즈는 마침내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트라우마... 그는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방식은 잘못된 거였다. 그래서인지 사건이 해결되려던 마지막에 새로운 비극이 탄생하고 만다.
"그녀는 자네의 신의와 사랑을 배신했네, 마르탱. 벌을 받아 마땅했어" (p. 458)
이르트만, 그가 나타났다.
1권부터 2권까지 본 내용의 사이사이 등장하던 이르트만과 그의 범죄대상은 사건수사와 동일한 시간대가 아니었다.
이르트만은 트라우마 따위 상관없는 진정한 싸이코였다. 그런 그가 마르탱을 자신의 분신처럼 의식하기 시작한다. 이르트만과 세르바즈가 만났던 그 단한번의 만남이 어쩌면 이미 또다른 사건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 둘은 반드시 다시 만나야 할 것 처럼...
주변이 온통 삶의 에너지로 들끓고 있었다. 경제위기에 관한 그 모든 잡설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세상에 대해 어설픈 통계나 수치를 들먹이며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기자들이 생각났다. 아울러 모든 은행가들, 경제학자들, 탐욕스러운 투기꾼들, 부패한 금융가들, 앞 못 보는 정치꾼들도 떠올랐다. 그들은 반드시 이곳에 와 깨우쳐야 했다. 여기,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살기를 원하고 있었다. 일하고 존재하기를. 단지 연명하는 것만은 아니기를... 바로 너처럼 말이다. 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p. 467)
사건은 해결됐지만 세르바즈는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벼랑끝에 서서 자꾸 아래로 향하는 시선을 겨우겨우 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혼자 숨어있듯이 머물던 곳에 마르고가 찾아왔다. 그제야 그는 다시 벼랑끝에 올라가지 않게 되었다.
평화롭고 단순하며 이상적인 날들은 그렇게 흘렀다. 정녕 어떤 계획도, 어떤 계산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아침, 동트기 조금 전, 그는 아주 평온한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고, 샤워를 한 다음 가방을 쌌다. 간밤에 그녀의 꿈을 꾼 것이었다. 어딘가에서 그녀는 그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르트만이 이미 그녀를 살해했다면 놈은 어떻게든 그걸 알려왔을 터였다. 그는 방을 나섰다. (p. 472)
사건이 해결됐으나 또다른 사건이 시작되는 기분으로 끝나는 마지막장을 보며 이 소설이 시리즈의 일부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저자 베르나르 미니에는 마르탱 세르바즈 라는 인물을 페르소나로 내세워 총 다섯 작품 '눈의 살인' '물의 살인' '불 끄지 마' '밤' '자매' 를 발표한 상태라고 한다. 뭐랄까 프랑스적인 고전문학적 사고방식과 깐느영화제에 출품됐음직한 영화 한편을 보는 듯 펼쳐지는 장면묘사들이 아 이것이 프랑스풍 스릴러 소설이구나 싶었다.
원제는 '서클' 이었다는데 '물의 살인' 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소설 속 중요사건이 물에서 시작되었고 소설 시작에서의 사건 현장묘사가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매년 제물처럼 물에 바쳐져야 했던 사건들의 연결고리는 남은 서클 이라기 보다는 물 이었다. 그래서인지 여름에 읽으면 더욱 등골 서늘해질 추리소설 '물의 살인'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