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걷는 여자들 - 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을 만나다
로런 엘킨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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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을 만나다

겉표지 사진 속 여성을 보며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도시는 누가보더라도 파리!

뒤표지의 파리 에펠탑 사진이 당연한 구성으로 느껴지는 이 책은 저자가 파리라는 도시에 대해 바치는 오마주이자 저자 개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문학일기이다.

내가 플라뇌르(flâneur, 산보자)라는 단어, 아치가 얹힌 â에 구불거리는 외르(eur)라는 발음까지 붙은 독특하고 우아한 프랑스 단어를 처음 만난 게 어디에서 였을까? 1990년대 파리에서 공부할 때 처음 접했겠지만 책에서 본 것 같지는 않다.

프랑스어 동사 flâner 에서 파생되었고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플라뇌르 라는 단어는 19세기 초반 유리와 강철로 덮인 파라의 사사주(passages, 아케이드)에서 탄생했다.

나는 영문학 전공이기 때문에 사실 원래는 런던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절차상 문제 때문에 어쩌다 보니 파리에 오게 되었다. 파리에 오고 한 달만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파리의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우리를 나누어놓은 운명의 가는 선을 따라 걷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내가 본능적으로 한 일을 다른 사람들도 많이 했으며 그래서 그걸 가리키는 이름이 이미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플라뇌르 였다. 아니, 프랑스어를 배웠으므로 나는 남성 명사를 여성형으로 바꾸었다. 나는 플라뇌즈다.

플라뇌즈(flâneuse), 명사, 프랑스어에서 논 말. 보통 도시에서 발견되는 한량, 빈둥거리는 구경꾼을 가리키는 단어 플라뇌르의 여성형. 이건 가상의 정의다. 플라뇌즈 라는 단어가 등재된 프랑스어 사전은 찾아보기 힘들다. "'플라뇌즈'라는 여성 명사를 만들 이유가 없었다. 19세기의 성별 분화 때문에 그런 인물은 존재할 수가 없다고 간주되었다. 플라뇌르라는 전형적 남성 인물에 대응하는 여성형은 없다. 여성형인 플라뇌즈는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었다. 도시의 관찰자는 오직 남성인물로 여겨졌다." "플라네리를 할 기회나 플라네리 활동은 대체로 부유한 남성의 특권이었고 따라서 '현대적 삶을 그린 예술가'는 필연적으로 부르주아 남성이었다"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소요하는 철학자, 플라뇌르, 등산가들"로부터 고개를 돌려 "왜 여자들은 나와서 걸어 다니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거리에 나온 여자는 말 그대로 '거리의 여자', 성매매 여성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비평가들은 말한다.

플라뇌즈가 도시 산보의 역사에서 삭제된 까닭은 물론, '플로뇌르'의 개념이 확고히 자리잡은 19세기에 여성이 처한 사회적 조건 때문이었다. 플라뇌르라는 단어가 처음 나타난 것은 1585년인데 아마 스칸디나비아어 명사 flana, 즉 방랑자에서 빌려온 말이었을 것이다. 원래 이 단어는 성이 없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말이 유행했는데 이때에는 성별이 부여되었다.

19세기 여성들이 자기 삶에 대해 쓴 글을 보면 당시 부르주아 여성은 집 밖에 나오는 순간 평판을 망치고 정숙함이 손상될 온갖 위험에 처하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 말 이전까지 마리 바시키르체프와 같은 계급에 속하는 여자는 주로 가정과 동일시되었고 가정 영역에 국한되었으나 중간계급이나 하층계급 여자는 거리에 나올 일이 많았다. 놀러 가려고 나오기도 하고, 가게 점원, 자선 활동, 하녀, 재봉사, 세탁부 등등의 일을 하기 위해서도 집을 나섰다.

19세기 말이 되자 계급과 상관없이 모든 여자들이 런던, 파리, 뉴욕 등 도시의 공공장소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1850년대 와 1860년대에 백화점이 생겨나 여자들의 외출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870년대부터 런던 안내책자에는 '숙녀들이 신사를 동반하지 않고 쇼핑을 하러 시내에 왔을 때 편안하게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소개되기 시작했다.

내가 이 책에서 그리는 초상은 플라뇌즈가 단순히 플라뇌르의 여성형이 아니고, 플라뇌즈라는 자체의 개념으로 인지하고 그로부터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플라뇌즈는 밖으로 여행을 떠나고 가서는 안 되는 곳으로 간다. 가정이나 소속 같은 단어가 그간 여성에게 불리하게 사용되었음을 의식하게 한다. 플라뇌즈는 도시의 창조적 잠재성과 걷기가 주는 해방 가능성에 긴밀하게 주파수가 맞추어진, 재능과 확신이 있는 여성이다. 플라뇌즈는 존재한다. 우리가 앞에 놓인 길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영역을 밝혀나갈 때마다 존재한다.

프롤로그 <여성이 도시를 걷는다는 것> p. 17~44 내용 발췌요약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길게 플라뇌즈에 대한 개념과 역사적 과정을 설명한다. 표지에서 멋진 여성이 도시에서 걷다가 무심코 뒤돌아보는 컷이 자연스럽게 혹은 여전히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멋지게 보이게 된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그저 '산책자' 일뿐인데 여성이 도시에서 하릴없이 걸아다닌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게 된지가 얼마되지 않았다는 것을 긴 프롤로그를 읽으며 새삼 깨닫는다. 이 책의 원제는 flâneuse : women walk the city in Paris, New York, Tokyo, Venice, and London 이다. 그리고 이 도시들중 핵심은 단연코 Paris 이다.

저자는 머물게 되는 도시들마다 산책자로서의 삶을 추구했고 그렇게 걷는 길에 다양한 여성예술가들을 연상하여 동반했으며 그렇게 걷다가 자신의 삶과 가장 잘 맞는 도시에서 안정을 찾았다. 저자가 길을 떠날때마다 다시 돌아오게 되는 곳은 태어난 뉴욕이 아닌 이방인으로 살았던 파리였다. 하지만 저자가 플라뇌즈가 되기 전 살았던 뉴욕이 이 책의 출발도시다.

도시에서 교외로의 이주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던 집단에서 나와서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살게 된 과정이다. 교외에 사는 사람들은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고 단독주택에서 생활하며 낯설로 이질적인 존재들과 섞이지 않고 살 수 있는데, 도시를 한 가지 용도로만 쓸 수 있는 지역으로 구분해놓은 토지사용제한법 때문이기도 하다. 주거지역, 상업지역, 산업지역을 나누어놓았기 때문에 직장과 집을 오가고 쇼핑이나 여가활동을 하려면 항상 차를 타야 한다. (p. 50)

교외 동네에는 인도가 아예 없는 곳이 많다. 교외에서 차가 없는 사람은 기묘한 최하층 계급, 불가촉천민에 속하게 된다. 누구나 차를 타고 다니는 길 가장자리에서 걸어가며 위화감을 조성할 때에만 눈에 뜨이는 존재다. (p. 53)

내가 어릴때 걸어서 어딘가에 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우리 동네에는 친구들과 모여 놀 만한 곳도 없고 시내나 중심가 같은 것도 없었다. (p. 59)

우리는 단절되어 사는 느낌이었다. (p. 60) 교외의 구조는 여자의 활동 반경을 제한한다. (p. 64) 공정한 세상을 만들 최선의 기회를 구할 수 있는 곳도 도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움직임의 자유가 반드시 필요하다. (p. 65)

저자가 태어나 자란곳은 슬럼화된 도시를 떠나 '괜찮은'주거 지역으로 여겨지던 교외지역이었다. 티비나 매체에서 많이 볼수 있던 잔디마당과 뒷뜰을 갖춘 비슷비슷한 단독주택들이 모여있는 미국의 거주전용 마을. 그런 곳이 우리네의 전원주택 같아 보이고 부유하고 평온하고 멋져보였는데 알고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나 보다. 뭐라도 하려면 꼭 차를 타고 나가야 할만큼 집주변엔 정말 집 밖에 없었고 따라서 집을 (걸어서)벗어나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러니 산책은 왠말. 날이 어두워지기라도 하면 현관출입조차 꺼려져 집안에서만 지내야 하는 생활. 저자는 가족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뉴욕에서의 생활이 저자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해서야 처음 가보게 된 도시문화는 교외지역과 너무나 달랐고 대학교육을 통해 길러진 비판적 관점은 도시와 여성의 활동성에 대해 새로운 자각을 하게 해주었다. 저자는 걷기 시작했고 뉴욕보다 걷기 좋은 다른 도시로 떠나기를 갈망했다.

내가 만난 파리는 인정받지 못하는 문명 세계의 중심 같은 느낌이었다. 강가 노점에서 중고 문고본 책을 싼 값에 사거나 글자가 빽빽한(연예계 소식이 아니라 뉴스를 전하는)신문을 사서 카페에 몇 시간이고 앉아 읽을 수 있는 곳, 어떤 서점을 가든(사방에 서점이 수백개는 있었다) 데리다, 푸코, 들뢰즈 같은 이름이 박힌 책이 앞쪽 테이블 위에 놓인 도시에 오게 되었다니 나로서는 믿을 수 없이 운 좋은 일이었다. 파리는 그림처럼 멋들어진 장소에서 여러 사상의 지적 혼합물을 정신없이 흡수할 수 있는 곳이었다. (p. 83)

관광도시로서의 파리가 아니라 책과 서점의 도시 파리를 연상하니 파리에 가고 싶어진다. 물론 불어를 못해서 저자가 감동해마지 않는 그런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수는 없겠지만 카페에서 신문의 냄새를 맡고 어디에 눈을 돌려도 서점이 보이는 곳에서 산책하는 기분은 어떤 것일지...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저자는 각 도시마다 여성 예술인 한 명을 주요 화두로 삼는데 '진 리스' (1890~1979)라는 여성 소설가의 작품을 통해 저자가 파리에서 시작했던 새로운 삶을 풀어낸다.

포드는 리스가 계속해서 찾아 헤맨, 믿음직하고 의지할 수 있는 타입의 남자 중 하나였다. 그때 쓰던 엘라 렝글릿이라는 이름 대신 진 리스라는 이름을 쓰게 한 사람이 포드이니 말 그대로 포드가 진 리스를 만들어낸 셈이다. 더 중요한 것은, 포드는 리스가 작가가 되도록 거들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작가로 보게 했다는 점이다. 리스는 몇 시간 동안 방에 틀어박혀 종이에 글을 쓰는 직업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문학적 감식력은 포드에게서 베운 것이었다. (p. 88)

포드는 소설가가 "관찰을 하기 위해서는 군중 속에서 눈에 뜨이지 않고 다닐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소설가가 무엇보다도 먼저 반드시 배워야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지우는 것이다. 가장 먼저 그리고 언제나" 소설가는 이렇게 군중 속의 일원이자 군중을 관찰하는 자인 플라뇌르와 겹쳐진다. 리스 같은 여자, 그리고 리스가 만들어낸 여자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p. 100)

파리의 이곳저곳의 거리를 걸으며 저자는 리스의 작품속 주인공들을 생각하고 리스의 삶을 생각한다. 리스의 인물은 자기가 조롱당한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느끼며 도시를 돌아다니고 그들은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 절박하게 애쓴다. 거리를 걷는 여자를 보는 남자의 시선은 여자가 플라뇌르가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여자 스스로도 남자에게서 독립하지 못한다. 저자가 파리에서 처음 만났던 연인과의 시간은 리스의 소설과 닮아있었다.

여기가 바로 울프가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블룸즈버리 스퀘어다. 대부분 소설이 여기에서 쓰였다. 나는 그 주위를 계속 빙빙 돌지만 울프가 살았던 건물을 찾을 수가 없었다. 주소가 52번지라는 게 기억이 났고 전쟁 중에 집이 무너졌다는 건 알았는데 그 지역이 지금 타비스톡 호텔이 들어선 자리라는 것은 몰랐다. 타비스톡 호텔은 근대적인 벽돌 건물로 겉보기에는 공공기관이나 병원처럼 보인다. 텍스처 없이 매끈하게 벽돌로 덮인 건물을 보며 생각에 잠기자 울프의 삶의 수백만 가지 순간이 머릿속에 밀려들어왔다. (p. 116)

로저 프라이, 존 메이너드 케인스, E.M.포스터 등이 들어가는 블룸즈버리 그룹은 격식없는 모임이었고, 울프가 자유를 발견하는 데에 이 모임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p. 120) 1905년 겨울, 블룸즈버리의 지리적 경계를 따라 걸으면서 버지니아는 자유에 형태를 부여했다. 훨씬 더 나이를 먹은 뒤에, 울프는 델러웨이 부인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낸다. 20세기 문학에서 최고의 플라뇌즈라 할 인물이다. 댈러웨이 부인이 소설에서 가장 처음으로 하는 대사가 이렇다. "전 런던 거리를 걷는 게 좋아요" 댈러웨이 부인이 말했다. '시골길을 걷는 것보다 훨씬 좋아요' 울프에게 혼자 도시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상상해보지 못한 자유였고, 울프가 본격적으로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계기가 이사였다면 글쓰기의 소재를 제공해준 것은 산보였다. 거리에는 울프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p. 127)

울프가 자기 자신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자기 혼자 혹은 언니와 함께 독립적인 여성이 되어 도시를 돌아다니면서부터다. 그런 것이 어른의 삶이었다. 독립이었다. (p. 131) 거리에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우리자신'이 아니고 '도시 풍경의 기능'이 된다. 전에는 시선의 대상이었지만 거리 산보자가 되면 섹스나 젠더에서 벗어난 관찰하는 주체가 된다. 우리는 익명성의 외투를 두르고 종종 알 수 없는 도시처럼 우리도 알 수 없는 존재가 된다. (p. 137)

저자는 런던에 가서 울프와 함께 걷는다. 울프의 작품들을 통해 울프의 생각에 공감하고 울프가 걷던 길을 따라 걸으며 울프의 자유를 느낀다. 진 리스가 걷던 파리 거리에서 여자는 관음의 대상이었으나 버지니아 울프가 걷던 런던 거리에서는 서서히 여성도 거리에서 익명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혼자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른이 되고 독립적 성인이 되며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 지금은 과연 얼마나 달라졌나 생각해본다. 여성이 사람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파리 거리에서 시간의 표식, 혁명과 격변이 남긴 흉터를 찾는 나는 파리 시민들이 자기들에게 지워진 것에 저항했으며 삶을 평온하게만 유지하려고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찾아본다. (p. 158)

파리는 역사적으로 혁명의 도시다. 처음 만났던 파리와 다르게 다시 만난 파리는 좀더 깊숙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돌아온 파리에서 저자는 조르주 상드를 생각한다. 이제 청춘을 함께했던 진 리스 는 과거형이 되었다.

조르주 상드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남자 옷을 입고, 시가를 물고, 여러 애인을 만나고, 소설을 아주, 아주 많이 쓴 작가. 상드의 신화는 우리의 문화적 의식에 뚜렷이 새겨져 있지만, 사실 요즘에는 상드의 작품을 그다지 많이 논의하지 않는다. 영어로 번역된 작품이 많지 않기도 하고, 번역된 작품을 접한 독자들도 소설이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실망하기 쉽기 때문이기도 하다. (p. 160) 당시 페미니스트 집단에서 상드에게 입회를 권유하였으나 상드는 자신은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p. 162)

조르주 상드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상드의 입장은 굉장히 선구적이었다고 보여진다. 당시로서는 남성에 비해 너무 뒤처진 여성의 처우를 개선시키는 일이 급했으니 여성만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을 지 모르나 지금의 페미니즘을 여성학과 동일시하는 것은 편협한 관점이다. 진정한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을 아우른 함께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학 이라는 어느 여성학자의 말을 나는 늘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다.

상드가 남자 옷을 입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밖에 나가 활동하려면 여성임을 드러내는 옷은 제약이 많았다. 남자 옷을 입고 상드는 플라뇌르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작가가 될 수 있었다. 도시에서 총과 대포소리가 들리던 피비린내 나는 혁명의 파리에서 살았던 상드는 남자든 여자든 삶에서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 희망이 지금의 파리에서 얼마나 이루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전히 플라뇌즈라는 단어는 프랑스어 사전에 없다는데 말이다.(저자에 의하면 플라뇌즈 를 프랑스어 사전에서 찾으면 '안락의자의 일종' 이라는 뜻으로 나온다고 함)

저자는 영문학 대학원생이었지만 소설을 쓰고 싶은 소망이 있었고 '물 위의 도시' 라는 제목부터 붙여놓았었기에 소설의 자료를 모으기 위해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 간다. 베네치아에서 저자가 떠올린 여성 예술가는 '소피 칼'이다. 소피 칼은 사진작가 이자 개념미술가라고 하는데 저자가 설명하는 소피 칼의 작품 특징은 무작위적인 대상을 일방적으로 추적하면서 그 대상의 동선에 따라 찍은 사진이나 영상이 작품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예술가를 길에서 만나게 된다면 나는 좀 무서울것 같은데;;;

소문에 따르면 파리 생탄 병원에는 파리에 크게 실망해 긴장증을 일으킨 일본인 관광객들을 수용하는 정신병동이 있다고 한다. 크루아상과 마카롱과 샤넬 넘버 파이브 향기를 기대하고 왔는데 실제로 마주한 파리가 너무 더럽고 시끄럽고 거칠어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란다. 이런 증상을 '파리 증후군'이라고 부르는데, 스탕달이 피렌체 여행을 하며 묘사한 것과 비슷한 신체 증상이 나타난다. '베를린에서는 그런 것을 '신경증'이라고 부른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고 주저앉을까 봐 두려워하며 걸었다'. 하지만 도쿄에는 도쿄의 끔찍함에 정신줄을 놓은 파리 사람들을 수용하는 정신병원은 없다. (p. 229)

도시 전체를 지배하는 미학이 순수한 기능주의였다. 내가 뭘 기대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왜 실망했는지 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무언가 다른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 무언가 덜 산업적인 것. 잠깐 동안이라도 여기가 집이라고 느낄 수 있는 도시. 내가 늘 그렇게 하듯이 걸어서 탐사할 수 있는 도시. 그렇지만 도쿄는 걸을 수 있는 도시가 아니다. 너무 크다. (p. 230)

저자의 각 도시별 경험은 저자의 연애사와 함께 하는데 도시를 옮길 때마다 남자친구가 바뀐다고나 할까;;; 베네치아에서 돌아온 파리에서 만난 남자친구가 도쿄지점으로 발령이 나면서 저자도 됴코로 거주지를 옮기게 된다. 새로운 도시에서의 산책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지만 도쿄는 산책하기에 좋은 도시가 아니었다. 너무 깨끗하고 너무 거대하고 너무 화려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동양에 한번도 가본적 없는 동양에 대해 서양인들이 갖는 로망은 그네들의 선진문물의 손이 닿지 않은, 좋은 말로 하면 향수적이고 안좋은 말로 하면 발전이 덜된 뭐 그런 이미지를 연상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일본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아 도쿄에서 여자로 산다는 게, 특히 일본인이 아닌 여자로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명백하게 느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거나 (남자들이 길에서 나를 치고 지나가거나 아니면 스타벅스에서 내 테이블 위에 있는 종이를 코트자락으로 쓸어 떨어뜨리곤 했다) 아니면 확연히 부정적인 시선을 받았다. (p. 260)

도쿄라는 배경이 외국에 나온 미국인이라는 익숙한 이야기를 더욱 극단적으로 만들고 영화에 현대적인 느낌을 부여한다. 파리가 19세기의 수도이고 뉴욕이 20세기의 수도라면 도쿄는 21세기의 수도다. 그러나 그 현대성이 소외감을 준다. (p. 263)

우울했던 도쿄생활에서 저자는 소피아 코폴라 의 2003년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를 떠올린다. 그 영화속 샬럿이라는 인물에 동질감을 느낀다. 하지만 샬럿과는 또다른 비동질감을 느꼈던 저자는 다른 영화들을 통해서도 도쿄를 산책해보려 하지만

나는 지층에서 도시를 발견하려고 했지만 그곳에서는 도시가 없었다 도쿄에서 플라뇌징을 할 때에는 계단을 올라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다리를 올라 위로, 혹은 꼭대기로 가야 내가 찾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아름다움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그냥 무작정 거리를 돌아다닐 수는 없다. 파리가 아니니까. 수줍은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 곳이다. '가와이'를 추구하면서 내성적인 척하고 안짱다리로 서 있다가는 도시의 가장 좋은 면을 놓치기 딱 좋다. (p. 270)

도쿄와의 비교감은 연인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끼쳤고 파리에 돌아온 뒤 저자는 연인과 관계를 끝냈다. 한 도시당 한 건의 연애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저자는 이국적인 외모와 이질적인 태도를 지닌 본인이 도쿄에서 당했던 경험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럴수록 더욱 파리를 그리워할 뿐이었다. 하지만 저자가 베네치아 성당에서 짧은 치마를 지적당하고 안식일 예배에 카메라와 핸드폰을 외부에 맡겨놓고 가야 하는 불편을 겪을 때 저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지하철에서 연인 무릎에 앉아 가다가 일본 남성에게 허벅지를 철썩 맞고(주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여자 허벅지에 손을 대고 지나갔다는 것은 아주 몰예의적 몰상식적 행동이었다고 보여지지만 여하튼 남자 무릎에 앉아가는 것도 좀;;;) 식당에서 다른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을 잘못됐다고 지적할때 저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저 파리를 그리워할 뿐이었다.

저자의 플라뇌즈 적 삶은 파리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 여성의 플라뇌즈 적 삶을 이야기하는 것과 연결성이 떨어지곤 해서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부분이었다.

여하튼 그렇게 다시 저자는 파리로 돌아온다. 어쩌면 저자에게는 당연하게도.

사회 문제에 맞서 일어나는 시위에는 진지한 면과 스스로를 신화화하는 면이 분명히 공존한다. 그러나 파리 사람들이 일어서서 행군하고 권력에 진지하게 맞서고 반대 의견을 밝히는 것을 보면 나는 늘 깊은 인상을 받는다. 내가 이곳에 살고 싶어진 이유 가운데 하나도 그것이었다. 나도 신화화하려는 욕망에서 자유롭다고 말할수는 없겠다. 그러나 그게 위험하다는 것은 안다. (p. 280)

나도 모르는 새에 뉴욕에서 내가 되지 않으려고 했던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용보다 의식(儀式)에 더 관심 있는 사람, 그것도 너무 쉽게 그렇게 되어버렸다. 군중 소에서 함께 걷는 행위에는 무언가 야만적인 힘이 있다. 폭력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 무리에 속하게 되자 불안해졌다. 어디인지 모르는 곳으로,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 의해, 무엇인지 모르는 일을 하게 이끌려가기가 너무나 쉬웠다. (p. 290)

저자가 파리로 올때마다 파리에서 저자는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이번 파리는 저항의 도시이다. 혁명의 기운은 현대의 파리 도심에 시위의 모습으로 자주 발현되곤 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고민과 의지 없이 휩쓸리게 된 시위는 그저 순간적이고 위험할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의식적이고 주체적으로 행동했던 상드를 다시 떠올린다.

상드는 여성참정권을 하루아침에 도입하기에는 무리이고 단계적으로 획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드는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만 여성이 권력으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일단 가정에서 평등을 획득한 다음에 바깥세상에서 평등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드가 옹호한 것은 프랑스,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있는 사회주의적 프랑스였다. 그렇지만 상드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일어선 곳, 다른 사람들도 스스로 일어서는 것을 본 곳은 파리라는 도시였다. (p. 293)

상드가 코뮌을 싫어한 까닭은 코뮌이 '시민이 돌아오고 보행자가 쇠퇴'함을 의미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코뮈나르(코뮌 지지자)보다도 더 위험하게 여겨진 것은 여성 혁명가의 등장이었다. 플라뇌르에게는 거리가 '탈정치공간'이었을 수 있으나, 플라뇌즈에게 탈정치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p. 295)

상드가 경험했던 혁명의 시대 속 파리는 가능성과 희망이 보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알게 됐다. 새시대의 가능성과 희망은 남성들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을. 하지만 여전히 파리는 시위와 바리케이드가 자연스러운 곳이고 그런 파리를 보며 저자는 여전한 저항의 힘을 느낀다. 파리만의 저항성. 그 저항성이 잔인한 내용의 국가, 저자 표현에 따르면 국가중에서도 가장 유혈이 낭자한 노래인 '마르세예즈'에 남아있는한 어쩌면 파리의 이런 모습은 지속될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파리는 그 어떤 모습을 가졌건 저자가 가장 살고 싶은 도시이다. 삶의 현장으로서의 파리에서 저자가 가장 매력을 느끼는 부분은 '이웃'이다. 저자가 열렬한 팬심을 갖고 있따는 아녜스 바르다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라는 영화를 따라가며 저자는 파리를 또다르게 묘사해낸다.

이 영화는 특히 여자는 스펙터클, 구경거리이기 때문에 남자처럼 익명으로, 주위를 구경하면서 거리를 걸어다닐 수 없다는 생각에 도전한다. 보이기만 하지 않고 스스로 본다는 것은 도시에서 여성의 자유가 시작된다는 신호다. (p. 326)

고다르가 한 이런 말이 유명하다. "영화는 여자 한 명과 권총 한 자루만 있으면 만들 수 있다" 바르다는 여자 한 명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입증했다. (p. 350)

바르다는 페미니스트의 첫 번째 행위는 바라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시선의 대상이지만 또 나는 볼 수 있다" 바르다의 영화가 하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세상과 세상 안의 우리 자리를 비스듬한 눈으로 보는 것, 우리는 이삭 줍는 사람, 플라뇌즈, 방랑자, 이웃이다. 객관성 따위는 없다. (p. 357)

사람들 말이 파리는 천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래도 동네마다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도시는 심리적 분위기가 뚜렷이 다른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어떤 공동체적인 느낌이 있다. (p. 329)

'정착하고 싶어하는 방랑자'로 스스로를 칭하며 파리에서 저자는 바르다의 영화속 시선을 통해 파리를 또 산책해본다. 그렇게 영화속 클레오가 되어 파리를 걷고 나면 저자는 파리에서 자유롭게 방랑하고 있음을 느끼고 파리에 정착한 이웃으로 환영받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파리는 그 둘이 모두 가능한 도시라고 저자가 말하는 듯 하다.

자유롭게 방랑하고 글을 쓰는 여성으로 저자는 마사 겔혼을 등장시킨다. 유명한 종군기자이자 헤밍웨이의 첫번째 아내였던 겔혼.

계속 집을 만들려고 하지만 언제나 집이 없었던 사람, 소설가, 도망자, 이혼녀, 자신만만하고 건방진 기자, 집 나온 계집. (p. 362)

도시 한가운데에 전선이 있어 걸어서 전선에 갈 수 있는 마드리드에서 겔혼은 날마다 포위된 수도를 돌아다니며 전쟁이 도시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일상적 영향을 생생하게 보도했다. 겔혼은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떤 기분인지, 어떤 일들을 하는지, 어떻게 버티는지 알고 싶었다. 겔혼은 나중에 자신의 전쟁 보도가 '연대의 몸짓'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전쟁이 벌어지는 현장에 가기 위해 겔혼은 가정생활로부터 멀어져야 할 때가 많았다. (p. 365) 겔혼은 여행과 플라네리가 같은 충동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겔혼은 홀로 동떨어져 있는 고독한 플라뇌르의 이미지를 버리고 플라뇌르를 어떤 목표, 깨달음, 본 것을 기록하고 나누는 방법을 지향하는 존재로 재정의한다. 겔혼은 불행을 드러내는 데에 몰두하면서 플라네리를 '증언'으로 바꾸었다. (p. 366)

겔혼의 삶을 통해 저자는 플라뇌즈의 개념을 확장시킨다. 여성이 산책을 할 수 있게 된 순간, 여성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된 순간 산책은 산책을 넘어선 그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음을 그 하나의 예로 겔혼의 여정을 저자는 제시한다.

저자는 파리로 돌아가려 했으나 비자는 만료됐고 일하던 직장에서 계약도 만료됐고 시민권 면접에서는 잘했지만 수입이 많지 않아 거절당하면서 재입국이 거부되었다. 그렇게 예기치 않게 뉴욕으로 돌아가게 된다. 고향인 뉴욕.

나는 뉴욕에서 부동산 개발업자인 남자 친구와 같이 살았었는데 그가 차를 샀다. 그게 우리 사이가 끝나는 계기가 됐다. 남자친구는 시속60마일로 미래를 향해 달려가려 했다. 나는 걷고 싶었다. (p. 398) 여러 해 동안 낯선 유럽 도시에서 길을 잃고 돌아온 나는 여기, 내 도시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p. 403)

파리에서 나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고 나만의 맥락에서 삶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러시아, 이란, 인도, 독일 ,브라질 등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독립심을 느꼈다. 내가 원하는 곳 어디에라도 살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프랑스에서 사는 게 좋았다. (p. 405) 다만 그게 사실이 아니었따. 알고 보니, 미국인은 돈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긴 하지만, 그곳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p. 406)

미국인들은 실상 대부분 다른 곳에서 왔는데도 미국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상 세상의 모든 나라는 누가 땅을 차지하느냐의 싸움을 통해 형성되지 않았나?인간의 역사는 이주와 정복의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난민이다. 그러나 그렇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깊게 의식하느 사람들도 있다. (p. 407)

내가 미국에서 유럽과 아시아을 돌아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며 방랑벽을 충족시키는 동안 거의 아무 저항도 맞닥뜨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특권 덕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뿌리 내린 곳을 박차고 나오고 장소가 우리를 지켜주지 않음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공간 덕임도 알게 되었다. 뿌리를 경계하라. 순수함을 경계하라. 고정성을 경계하라. 어딘가에 소속되었다는 느낌을 경계하라. 유동성, 비순수성, 혼합을 받아들이라. (p. 409)

저자는 파리로의 입국이 거부되는 경험을 해보고 나서야 자신이 그동안 누렸던 것과 자신이 그동안 갇혔던 틀을 인식하고 이해하게 된다. 삶에서 경험만큼 큰 깨달음을 주는 것은 없다. 하지만 저자가 파리에 다시 신청한 시민권이 수락되고 나서 저자는 다시 파리에 소속되기를 바라며 파리로 간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을 저자의 생각을 통해 읽고 내가 보지 않은 영화를 저자의 생각을 통해 보면서 저자가 처음에 심어주었던 '플라뇌즈'라는 여성형 명사에 대한 기대감은 줄어들었지만 저자 개인의 인생흐름을 통해 저자와 함께 성장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프롤로그에서만 여성예술가들의 플라뇌즈적 면모가 돋보이고 막상 본문에서는 저자 개인의 일기처럼 좁혀진 관점이 아쉽긴 했어도 '여성이 도시를 걷는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한번 되새겨볼 수 있는 책이었다.

중성적은 눈으로 도시를 받아들이고 싶든,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육체가 되고 싶든, 그 사이의 무수한 무엇이 되고 싶든, 정서적 풍경의 미묘한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함으로써 도시에 우리 자신을 통합할 수 있다고 울프는 말한다. 도시 안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인식해야만 그것에 도전할 수 있다. 여성의 플라네리, 즉 플라뇌세리(flâneuseris)는 우리가 공간 안에서 움직이는 방식을 바꾸고 공간의 조직에도 개입한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공간의 평화를 흩뜨리고 공간을 관찰하고(혹은 관찰하지 않고) 차지하고(혹은 차지하지 않고) 조직할(혹은 조직을 와해할) 권리를 주장한다. (p.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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