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코트를 입은 남자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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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폐적이고 광적이고 자기도취적이었던 벨 에포크 시대

어디에도 속박당하지 않고 늘 역사의 '옳은 편'에 섰던 보통의 영웅,

사뮈엘 포치

 

거울속을 보듯 액자안을 보듯 예쁘게 뚫린 겉표지속에 빨간 옷과 레이스소매 그리고 가늘고 긴 손이 보인다. 남자라고?

겉지를 벗겨낸 겉표지를 봐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빨갓옷과 하얀 레이스 그리고 가늘고 긴 손... 남자라고??

하지만 표지그림과 제목이 불러일으키는 이 의혹은 몇 페이지넘기면 바로 해결된다. 15페이지, 존 싱어 사전트 가 그린 <집에 있는 닥터 포치(1881)> 그림.

나는 왜 이 책이 소설이라고 생각했을까?;;;

책을 받아보고 표지에서 벌써 논픽션이고 한 인물에 대한 에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표지가 주는 감상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실존인물에 대한 전기적 스토리가 소설처럼 펼쳐지는 책이지 않을까 예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산문적으로 코트에서 시작할 수도 있겠다. 다만 코트보다는 실내 가운이라고 묘사하는 게 낫다. 빨간색... 아니, 더 정확하게는 주홍색...에 목부터 발까지 내려오는 표준형이고, 손목과 목에 주름장식이 있는 하얀 리넨이 약간 드러나 있다. 아래쪽의 양단 슬리퍼 한 짝이 이 구상에 노란색과 파란색을 살짝 보태준다.

코트 안의 남자가 아니라 코트에서 시작하는 것은 부당할까? 하지만 코트, 아니 코트의 묘사가 오늘날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기억을 하기는 한다면. 그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안도했을까, 재미있어했을까, 약간 모욕을 느꼈을까? 그것은 이제 이렇게 멀어진 거리에서 우리가 그리는 인물을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 있다. (p. 10~11)

작가는 2015년 미국에서 임대하여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 걸린 모습으로 표지를 장식한 그 그림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빠져들었다. 그 그림에, 그림속 인물인 포치에게, 그 인물이 살았던 '벨 에포크' 시대에.

작가가 풀어낸 포치 라는 인물과 벨 에포크 시대 이야기를 읽다보면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에 대해 점점 더 머리를 갸우뚱 하게 된다. 작가는 재미로 쓴 것인가? 약간 모욕을 주려고 쓴 것인가? 혹은 벨 에포크 시대로 풍자된 프랑스 에 비교하여 영국의 문화에 안도한 것일까?

그래, 1885년 여름의 그 런던 방문에서 시작하자.

왕자는 에드몽 드 폴리냐크.

백작은 로베르 드 몽테스키우-페젠사크.

이탈리아계 성을 가진 평민은 닥터 사뮈엘 장 포치. (p. 14)

잠시 런던을 방문했던 이 세명의 일행이 이 책의 주요 인물이긴 하나, 이 인물들의 이야기는 산발적으로 펼쳐지면서 이들과 그닥 관계없어 보이는 타인들의 이야기에 묻혀서 결국 이들이 누구인지 읽으면 읽을수록 잘 모르게 된다. 작가가 '벨 에포크' 시대를 표현하기 위해 골라낸 이 세명의 프랑스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왕자는 어느 가문의 왕자인지 모르겠고 백작은 그 유명한 (이름이 비슷해서 헤깔렸던) 몽테스키외 백작이 아니었고 포치는 결국 프랑스인이 아닌셈이라는 것은 이 세명이 살았던 시대를 향한 칭송인가 모욕인가.

1884년 6월 조리스-카를 위스망스는 스물아홉 살의 귀족 장 플로레서 데제생트 공작을 주인공으로 삼은 여섯 번째 소설 [거꾸로]를 발표했다. 위스망스의 이전 다섯 소설은 졸라류의 사실주의를 구사했으나, 이번에는 그것을 모두 내던졌다.[거꾸로]는 데카당스의 성서로, 꿈을 꾸듯 명상적이었다. 데제생트는 댄디에 유미주의자였으며, 지나친 근친교배로 병약했고, 집안 혈통의 맨 마지막 인물이었으며, 이상하고 타락한 취향의 소유자로 의복, 장신구, 향수, 진귀한 책, 훌륭한 장정을 사랑했다. (p. 20~21)

[거꾸로] 라는 소설과 데제생트 라는 인물이 자주 언급된다. 작가가 보기엔 앞서 말한 세 인물의 시대가 소설로 표현된다면 가장 적절했을 작품이 아마도 이 소설이었던 것 같다. '데제생트' 라는 인물명이 소설과 상관없이도 하도 자주 등장해서 실존인물인가 싶을 정도였다. 내가 모르는 소설이라서 더 낯설게 다가왔다. 소설이라는 허구와 실존인물들의 일상이 뒤섞인 표현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갈피를 못잡겠고 머리속을 뒤엉켜 놓기 일쑤였다.

'즐거운 영국', '황금시대', '벨 에포크'. 이런 빛나는 상표명은 늘 회고적으로 만들어진다. 1895년이나 1900년에 파리에 살던 누구도 서로 '우리는 '벨 에포크'시대를 살고 있으니 한껏 즐기는 게 좋아' 하고 말한 적이 없다. 1870~1871년 프랑스의 파국적 패배와 1914~1918년 프랑스의 파국적 승리 사이 평화의 시기를 묘사하는 이 말은 1940~1941년, 프랑스가 다시 한번 패배하고 나서야 언어에 등장했다. 이것은 생방송 뮤지컬 쇼로 바뀌어 나간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의 제목이었다. 기분 좋은 조어이자 기분 좋은 오락물이었으며, 동시에 오-라-라, 캉-캉 프랑스라는 독일의 어떤 선입관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벨 에포크'-평화와 쾌락의 고전적 표현, 퇴폐미가 상당히 섞인 매력, 예술의 마지막 개화, 정착된 상류사회의 마지막 개화. 이 부드러운 환상은 뒤늦게 금속적이고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20세기에 의해 날아가버렸다. (p. 42)

왕조는 그 왕조가 멸하고 난 다음에야 이름붙여지기 마련이고, 시대는 그 시대가 지나고 난 다음에야 별칭이 생기기 마련이다. '벨 에포크' 나는 이 명칭이 나올때마다 헤깔리곤 했다. 왜 이런 이름을 굳이 붙인 걸까? 백년도 안되는 고작 수십년의 기간동안의 프랑스 파리 라는 국한된 지역에서의 문화풍조에 이 이름을 붙은 것은 좋은 의미인가? 안좋은 의미인가? 나는 여전히 '벨 에포크' 시대라는 명칭이 모호하고 낯설지만 영국인 작가의 관점에서 이 명칭은 현학적으로 비틀고 싶은 명칭인가 보다.

100여 년마다 망명자들의 새로운 물결이 해협의 여러 항구에 이르렀다. 위그노, 혁명의 도망자, 코뮌 지지자, 무정부주의자, 또 국가수반 네명이 잇따라(루이 18세, 샤를5세, 루이 필리프, 나폴레옹3세) 안전을 찾아 영국으로 왔다. 볼테르, 프레보, 샤토, 브리앙, 기조, 빅토르 위고도 마찬가지였다. 모네, 피사로, 랭보, 베를렌, 졸라도 의심을 받을 때는 모두 잉글랜드로 향했다.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정치적 교통량은 이에 비하면 미미했다. 그런 불균형을 보면서 영국인은 당연히 자신의 역사적·정치적 자유에 자족감을 느꼈다. 브리튼 사람이 프랑스에 망명하려 하는 주된 이유는 추문을 피하려는(그래서 계속 추문이 날 만한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것이었다. 이곳은 상층계급 파산자, 중혼자, 카드놀이 사기꾼, 동성애자가 가는 곳이었다. 프랑스인이 영국인에게 추방당한 지도자와 위험안 혁명가를 보냈다면, 영국인은 프랑스인에게 멋이나 부리는 인간쓰레기를 보냈다. (p. 52)

저자에 의하면 '벨 에포크' 시대는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닌 듯 하다. 영국이 버린 '인간쓰레기' 들이 모여사는 곳이 '벨 에포크' 시대의 프랑스였다.

벨 에포크는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거대한 부의 시기, 귀족에게는 사회적 권력의 시기, 통제할 수 없는 복잡한 속물근성의 시기, 무모한 식민 야망의 시기, 예술 후원의 시기, 폭력의 규모를 볼 때 손상된 명예보다는 개인의 급한 성미를 반영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결투의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좋게 말할 만한 것이 별로 없지만, 적어도 이런 것을 많이 쓸어 가기는 했다. (p. 177)

이런 시대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인물이 사뮈엘 장 포치였다. 듣도보도못한 그는 누구인가?

나는 사전트가 그린 엄청난 이미지의 형태로 닥터 포치를 처음 만났다. 벽에 붙은 설명은 그가 부인과 의사라고 말해주었다. 그전에 19세기 프랑스 독서에서는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미술잡지에서 그가 '프랑스 부인과학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여성 환자를 유혹하려 한 확인된 성 중독자'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분명한 역설에 흥미를 느꼈다. 여자들을 돕는 동시에 착취하는 의사, 정신과 육체의 고통을 덜어주고 편안함을 주고, 혁신과 기술로 여자들의 생명을 구하고, 환자 수로 볼 때 부자보다 빈자를 많이 도왔지만, 사생활에서는 세련된 프랑스 남자의 희화화된 표본처럼 행동한 과학자.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시작하자. 평생에 걸쳐 포치의 이름에는 스캔들이 따라붙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의 행동은 이성애적이고, 합법적이고, 동의에 기초한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파트너들의 분별과 요령에 의존하기도 했다. 언제 어디서 그가 밀회를 했는지, 관계는 얼마나 오래갔는지, 그 관계들이 겹쳤는지, 겹쳤다면 얼마나 자주 그랬는지 분명하지가 않다. 하지만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만한 여성의 불평은 단 하나도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호색가 포치에 관심을 잃고, 걱정하는 가족적 남자 포치, 늘 호기심을 잃지 않는 의사 포치, 여행자 포치, 도회풍 인물 포치, 국제주의자, 합리주의자, 다윈주의자, 과학자, 모더니스트 포치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절대 친구를 잃지 않는 남자 포치, 미친 시대에 제정신을 잃지 않은 사람 포치. (p. 216, 217, 219 발췌)

작가가 표현하고 있는 포치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이라는 건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 든다. 포치를 모욕하고 있는가? 칭찬하고 있는가? 작가는 포치의 일생만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포치와 별 상관 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주 내용을 이루고 있다. 글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 느낌인데 작가는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다. 소통이 되지 않는 글이란 독자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포치가 왜 반드레퓌스파, 반유대주의자, 왕당파, 이민 배척주의자, 가톨릭 우파의 자연스러운 표적이 되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그의 성이 인정하듯이, 그는 '사실은 프랑스인이 아니었다' 그는 전혀 가톨릭이 아니었고, 프로테스탄트였다가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는 알려진 자유사상가인데도 상원에서 의석을 차지할 만큼 뻔뻔스러웠다. 그는 헌신적인 드레퓌스파로 렌에서 열린 재심에서는 기록을 하며 일주일을 보냈다. 혈연과 지연에 집착하는 애국자들에게 '거룩한 히스테리'라는 세월의 최종 결과는 결코 '정의를 위한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유대인을 위한 승리'였다. 포치 자신은 얼마든지 '뿌리없는 코스모폴리탄'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는 유대인 색정광 사라 베르나르와 오래 연애를 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정기적으로 선한 프랑스 가톨릭 부인과 딸들의 가리지 않은 음부를 맨손으로 검사하는 남자로, 모두가 알다시피 그 가운데 일부를 유혹하기도 했다. 이런 인민의 적에 관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p. 275, 276 발췌)

'벨 에포크' 시대를 검색하면 과거의 '좋은 시대' 라는 의미라고 대충 이해되는 설명이 나온다. 포치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벨 에포크' 시대가 과연 좋은 시대로 보이는가?

내가 이 책을 1년 정도 썼을 때 영국은 착각에 빠져 마조히즘적으로 유럽연합에서 나왔다. 그럼에도 나는 비관적이기를 거부한다. 멀고, 퇴폐적이고, 광적이고, 폭력적이고, 자기도취적이고, 신경증적인 벨 에포크에서 보낸 시간이 나를 명랑하게 만들어주었다. 주로 사뮈엘 장 포치라는 인물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의학, 예술, 책, 여행, 사교, 정치, 가능한 한 많은 섹스로 채웠다. 그는 고맙게도 결함이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일종의 영웅으로 내세우고 싶다. (p. 338~340 발췌)

뒷표지의 '어디에도 속박당하지 않고 늘 역사의 '옳은 편'에 섰던 보통의 영웅, 사뮈엘 포치' 라는 홍보문구가 눈에 걸린다. 작가가 포치를 역사의 옳은 편에 섰던 보통의 영웅으로 묘사한 것 같은지 이 홍보문구를 쓴 이에게 물어보고 싶다. 대체 이 책의 어느 구절에서 포치가 역사의 옳은 편에 섰고 영웅적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일종의 영웅' 으로 내세우고 싶다는 저자의 마지막 문장이 '벨 에포크'시대를 향한 모욕인지 칭찬인지, 직설인지 반어인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확실한 입장을 정리할 수가 없다.

처음 포치의 생애에 관해 읽었을 때, 오래된 것이든 최근 것이든 모든 자료에 그가 '미치광이에게 암살당했다' 라고 나와 있었다. '그 자신의 환자에게' 라고 나오지 않았다. 마쉬는 까다로운 환자였다. (하긴 음낭 수술을 하는데 그렇지 않은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가 한동안 성적으로 활발하지 않았던 것, 사실상 무능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마쉬에게는 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의 호주머니에서는 포치에 대한 불만을 자세히 기록한 메모가 발견되었는데, '그는 환자의 바람을 존중하지 않는 의사들에 대한 경고로 그를 죽일 계획이었다'. 자신의 무능을 치료해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남자에게 총에 맞아 죽은 돈 후안. 이 무슨 도덕적 이야기인가? 픽션에서라면 귀엽게 맞아 들어갈 것 같다. 그러나 논픽션은 말만 그럴듯하고 있을 법하지 않은 도덕주의적인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용해야만하는 곳이다. (p. 330~331 발췌)

이 책은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이다.

벨 에포크 시대에 대해 작가가 풀어낸 퇴폐적이고 향락적이고 반도덕적인 이야기의 결말로 논픽션다운 도덕적 결말을 맞은 포치를 주요인물로 내세운 것은 '착각에 빠져 유럽연합을 탈퇴한' 영국에 대해 하고 싶었던 말일까? 영국의 숙적 프랑스가 가진 '좋은 시대'에 대해 하고 싶었던 말일까?

작가 '줄리언 반스' 에 대해 검색을 하면 N지식백과에서 이런 구절이 나온다.

반스의 산문은 우아하고 재치와 유머가 넘치며, 종종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 자의식적 언어 스타일, 여러 형식의 이야기들의 혼합)을 활용한다. 이러한 그의 기법은 그가 문학적 창작 과정, 경험과 언어의 차이, 그리고 ‘사실’과 ‘현실’의 주관성을 중요시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언어, 스타일과 형식에 대한 재미있는 실험에도 불구하고 반스의 소설은 심리적 사실주의에 기반해 있으며, 그 주제는 심각하고, 가슴 아프며 진심 어리다. 그는 자주 사랑의 본질에 대해 다루면서 진정한 사랑에 관한 지속적인 추구와 더불어 특히나 인간의 질투, 집착, 그리고 배신이 어디까지 다다르는지 탐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줄리언 반스 [Julian Barnes] (현대영국작가사전, 영국문화원 문학 본부, 위키미디어 커먼즈)

작가의 소설을 읽어본 적 없으니 뭐라 할말이 없지만, 적어도 이 책(산문)은 가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이라 할만 하다. 그러니 뒤샹의 변기작품 '샘'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 에세이가 내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 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얀 레이스 셔츠를 받쳐입고 전신을 빨간 코트(가운)으로 감싼 남자 포치 만큼이나 줄리언 반스의 에세이는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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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블랙독 - 내 안의 우울과 이별하기
매튜 존스톤 지음, 채정호 옮김 / 생각속의집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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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하는 편안한 심리그림책

내 안의 우울과 이별하기

책 제목을 들어본 적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밀리고 잊혀졌던 책이었다. 이번에 읽을 기회가 생겼을때 그 표지를 다시 보니 반가웠다.

이 책은 그림책이다. 그림책이라고 해서 아이들만 보는 책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최근 읽었던 상빼의 그림책들을 통해 어른들만을 위한 그림책도 있어야겠구나 하는 걸 여실히 느꼈더랬다. 그래서 이 심리그림책에 다시 손이 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번엔 이 책을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굿바이 블랙독' 이라는 제목 자체만으로도 마음에 와닿는 뭔가가 있었는데 책을 읽으려고 보니 옮긴이가 채정호 님이다. 채정호 박사의 '옵티미스트' 라는 책은 내가 읽었던 심리서들 중에서 주변에 추천하는 책으로 (내 맘속에선) 상위에 링크되 있는 책이다. 첫장부터 마음에 든다.

블랙독(Black Dog)에 대하여

영국 전 수상 윈스턴 처칠을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우울증.

그는 자신의 지독한 우울증을 '블랙독'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를 계기로 블랙독이라는 표현은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우울증을 뜻하는 별칭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이 블랙독은 끊임없이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게 만들며, 사람들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처럼 블랙독이 우리 삶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이 책에서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 속표지 中 )

우울증과 블랙독을 처음으로 연관 지은 작가는 새뮤얼 존슨이었다고 한다. 이 책의 첫머리에 추천사를 쓴 '블랙독 연구소 소장' 은 이 비유에서 자신이 일하고 있는 연구소의 이름도 따오게 되었다고 설명하며 블랙독의 이미지가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어져 왔고 이 책의 접근방식 또한 여러가지 영감을 불러일으켜서 감동적인 메세지를 전달해주고 있으니 읽어볼 것을 권하고 있다.

새뮤얼 존슨의 우울증에 대해서는 얼마전 읽은 다른 책을 통해서도 확인한 바 있었다. 존슨이나 처질 외에도 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이들중에서 의외로 우울증을 갖고 살았던 사람이 많다. 우울증 때문에 굳이 요절하지 않았더라도 평생 내적고난에 시달리며 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크던작던 많은 사람들이 블랙독 한마리쯤 다들 키우고 살았다는 의미가 아닐까.

감기처럼 흔하다고 해서 요샌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 라고 표현하기도 하던데, 나는 이 표현이 너무 가벼운 것 같아서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우울증을 갖고 있는 사람의 주변인들은 감기처럼 우울증이 약 며칠 먹고 잠 며칠 푹자고 훌훌 털어버렸으면 하는 생각에 그렇게 가볍게 표현하는 것이 편하겠지만, 당사자는 그렇게 가볍게 취급되는 자신의 마음이 더 힘들게 되지 않을까? 가까운 사람이 어둠에 휩싸여 있다고 해서 굳이 서둘러 환하게 불을 켜주려고 하기 보다는 어둠이 점점 흐려지고 밝음이 잔잔하게 스며들 수 있도록 천천히 공감해주고 천천히 기다려주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섣부른 위로의 말보다는 가만히 옆에 함께 앉아있어 주는 것이 때론 더 큰 위안이 되는 것처럼.

몸이 추우면 감기가 들듯이 마음이 추우면 감기가 드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마음은 감기에 걸린다기 보다는 구멍이 뻥 뚫리는 셈이기 때문에 메꿔질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그 커다란 구멍을 블랙독이라는 형체로 그려냄으로써 좀더 편안하게 우울증에 젖어든 심리상태를 그림으로나마 직면하게 해준다. 자신의 경험을 고스란히 담은 그림들은 친근하게 다가온다. 블랙독은 무섭지 않고 때론 친구처럼 가족처럼 일상을 함께 한다. 하지만 함께 하면할수록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나'는 블랙독과 천천이 이별하는 노력을 시작한다.

글줄이 많지 않은 그림책이므로 마음만 먹으면 십분도 안되서 휘리릭 볼 수 있는 책이지만, 그림책이란 것이 늘 그렇듯 그림 한장한장 생각하고 넘기다보면 한참을 붙잡고 있게 되는 책이기도 한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블랙독과 함께 사는 청년의 일상을 보며 때론 블랙독에게 눈길이 가고 때론 청년에게 눈길이 갈 것이다. 읽을때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 또한 이런 심리그림책의 매력이다.

중요한 것은 공감과 이해이다. 이 책이 선사하는 편안함과 응원이 이 책을 곁에 두고 가끔씩 꺼내볼 독자들에게 심심찮은 위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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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만지다 - 삶이 물리학을 만나는 순간들
권재술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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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물리학을 만나는 순간들

"평생을 물리 교육에 투신하신 노학자의 아름다운 물리 에세이이자 첫 시집.

물리를 공부하면 이렇게 작가가 되고 시인이 되는 모양이다" - 김상욱

 

 

김상욱 교수의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과학자의 글이라기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표현력을 지니고 있어서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지 생각했었는데 일단 추천사를 쓴 책을 먼저 읽어보게 되었다. 추천사 문장 그대로 딱 그런 책이었다.

글마다 중첩되는 부분이 있어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다 읽고 저자의 '감사의 말' 부분을 보니 타매체에 기고했던 칼럼을 모은 책이었다. 칼럼모음집은 아무래도 칼럼마다 앞내용이 반복되기 마련이다. 소설연재 같지 않고 매 칼럼마다 독립적인 글이다 보니 같은 주제라면 항상 사전안내가 필요하고 그 사전안내는 비슷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이 책은 문학책인가 싶을 정도로 편안하게 읽히는 물리학자가 쓴 물리적인 에세이이자 시집이었다.

우리가 사물을 본다는 것은 매우 복잡한 정신작용의 결과이다. 사실 눈은 단지 보는 도구일 뿐, 정말로 보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다. 시력이 좋다고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조금 알면 조금 보이고 많이 알면 많이 보인다. 더 많이 알면 더 많이 보인다. 우리가 과학자들만큼 볼 수는 없겠지만, 그리고 그들이 경험한 감동을 그대로 체험할 수는 없겠지만, 이 책을 통해 그들이 무엇을 보고 느끼는지, 그들의 감동이 어떤 것인지, 그 일부만이라도 느껴볼 수 있으면 좋겠다. (p. 8, 9)

과학자들이 왜 그렇게 어려운 주제를 그토록 오랜 기간 연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일반인들은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연구내용이 뭔지 방법이 뭔지 모르더라도 그 마음과 그 감동을 조금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의 글을 읽고나면. 과학은 생각보다 참.. 아름다운 학문이다. ㅎ

인류의 문명은 별을 보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도 별을 보면서 시작되었다. 어디 과학뿐이랴. 어쩌면 모든 철학도 별을 보면서 생겼고, 종교도 별을 보면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이렇듯 별은 저 멀리서 빛나고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사화복과 연결되어 있다. (p. 19)

과학자들이 망원경으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이 모두 탐구하기 위함은 아니다.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어떤 충동 때문이기도 하다. 별을 보는 것, 그것은 또 다른 방랑이다. (p. 25)

그런것 같다. 인류의 문명은 별을 보면서 시작된 것 같다. 인간에게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 때 가장 자극적으로 다가온 것은 아마도 만질 수 없고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반짝이는 멀고먼 별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별을 본다는 것 자체가 참 시적이지 않은가. 별을 따라 이별저별 떠돌아다니는 방랑자들이 과학자들이기도 하다. 그러니 별을 연구하는 과학도 어찌보면 참 시적인 분야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매 글마다 말미에 시 한편씩을 지어 놓았다. 그래서 이 책은 시집이기도 하다.

우리가 보는 밤하늘의 달은 지금의 달이 아니다. 1.3초 전의 달이다. 우리가 보는 태양은 8분 전의 태양이다. 태양계의 가장자리라고 하는 오르트 구름대는 1년 전의 모습,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 프로시마 센타우리는 4년 전의 모습, 북극성은 400년 전의 모습, 안드로메다 은하는 230만년 전의 모습이다. 그렇다. 망원경으로 우리가 보는 것은 모두 과거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 어떤 별은 1000년 전, 어떤 별은 1만년 전, 어떤 별은 수억 년 전의 별이다. 밤하늘의 별을 본다는 것은 우주의 역사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p. 28)

우리가 현재 라고 하는 지금 이순간도 엄밀히 말하면 지금 이순간이 아니다. 지금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지금이라던 시간은 지나갔다. 우리는 그저 과거를 보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시간이란 참 철학적이다. 별에게 있어서의 시간은 더 광활해진다. 우리가 보는 저 별은 지금의 별이 아니다. 우리는 늘 과거의 별을 보고 있다. 그러니 별을 보는 것만으로도 과학은 참 철학적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역시 별은 참 시적이다.

우주탐험? 우주 탐험의 종착점은 우주가 아니다. 그 종착점은 바로 지구다. 인간에게 우주 탐험은 바로 지구 탐험이다. 지구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지구를 떠나는 것이다. (p. 52)

여행을 떠나는 목적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다 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우주탐험도 그와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저자의 문장을 읽고서야 알았다. 우주탐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그저 먼 미지의 세계로의 모험 같은 걸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말 우주탐험을 하고 싶은 이유는 우주에 나가봐야 지구의 소중함을 더욱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가진 것은 잃어봐야 머문 곳은 떠나봐야 그 소중함을 아는 법이다.

1974년 푸에르토리코에 있는 아레시보 천문대를 통해서 우리도 외계인에게 전파를 발사했다. 약2만5천광년 떨어진 헤르쿨레스 자리 구상성단의 M13을 향해서. 하지만 그 회신을 우리가 받으려면 무려 5만 년을 기다려야 한다! 5만년 뒤에 받을 편지를, 그것도 받는다는 보장도 없는 편지를, 받는다고 해도 해독할 가능성도 별로 없는 편지를 보내는 과학자들! 이 과학자들의 마음이, 받지도 못할 편지를 애인에게 보내는 사람의 마음과 같을까? 가장 합리적이라고 하는 과학자들이 왜 시인들이나 할 법한 일을 하고 있을까? (p. 78)

기다림... 오지 않을 답장을 기다리는 애틋한 마음... 이렇게 보면 과학자들의 마음은 참 로맨틱한 것 같기도. ㅎㅎ

우주로 갈 것도 없이 지구에 있는 우리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가 외계인과 평화롭게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무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인류 역사상 한 민족이 자기의 영역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다른 민족들을 어떻게 했던가? 같은 음식을 먹고, 서로 섹스도 할 수 있고 공통의 자손을 퍼트릴 수도 있는 사이인 다른 민족간에도 잔인한 인종청소가 일어나지 않았던가? 유사성이 전혀 없는 외계인과 평화롭게 만날 것이라고? 서로 사랑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우리가 죽이든지 죽임을 당하든지 둘 중의 하나뿐이다. 협상이나 타협은 존재할 수 없다. (p. 82)

이렇게 충격적일수가 ㅎ 하지만 맞는 말이다. 인류의 역사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도 모를 외계인은 지구인보다 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허황된 기대 아닐까? 하지만 이 구절만으로 우주탐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생각만 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굉장히 평화적이고 아름다운 내용들인지라 다 읽고 나면 저자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느껴지는 것이 있다. 여하튼 저 속시원한 표현들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도둑은 제발 저려야 할 것. ㅎㅎ

엔트로피를 정의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하지만 쉽게 말하면 무질서한 정도를 말한다. 가지런한 상태는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이고 어지러운 상태는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이다. 자연현상은 언제나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에서 높은 상태로 변한다. 모든 변화는 비평형상태에서 평형상태로 가는 과정이다. 자연에서만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현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연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고, 인간의 활동은 엔트로피를 감소시킨다. 인류의 문명은 엔트로피를 감소시킨 결과이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라' 고 할때, 물리학자는 '엔트로피를 줄여라' 라고 말한다. (p. 140~144 발췌)

물리학자의 책이다 보니 이런저런 과학적인 내용들도 많이 나온다. 상식으로 재미있게 알아둘 것들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엔트로피 부분은 좀 어려웠다. 여하튼 우주적인 차원에서 봤을때 엔트로피의 흐름은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저자는 '그대들은 알지 못하는가 / 평생에 하는 일이 모두 헛수고였음을 / 부질없는 인간들이여' 라고 읊는다.

우주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 말고도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라는 새로운 물질이 더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우주에서 우리가 아는 물질은 겨우 5퍼센트 정도이고, 25퍼센트는 암흑물질, 70퍼센트는 암흑에너지라고 한다. 보이는 세상보다 보이지 않는 세상이 더 많다. 더 많은 정도가 아니라 세상보다 보이지 않는 세상이 더 많다. 더 많은 정도가 아니라 우주는 거의 대부분 보이지 않는 물질로 되어 있고 아주 조금 보이는 물질이 있다. (p. 149)

물리학에서는 빛을 반사하지 않고 완전히 흡수하는 물체를 흑체라고 부른다. 가장 좋은 흑체는 텅 빈 공간이다. 그런데 이 구멍이 언제가 까많게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모든 물체는 온도가 있다. 온도가 높으면 빛을 내게 되어 있다. 태양은 아주 좋은 흑체다. 왜냐하면 태양에 빛을 보내면 빛을 완전히 흡수해 버리기 때문이다. (p. 291, 292 )

인간이 알아낸 것보다 알아내지 못한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5퍼센트라니... 암흑물질, 암흑에너지, 흑체... 보이지 않는 것 알아낼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어둠으로 이름 붙였다. 미지의 것은 대부분 어둡게 상상하곤 한다. 그런데 굳이 그렇게 양분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선과 악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일 뿐이듯이, 입자와 파동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가공적인 관념이다. 세상에는 악인도 없고 선인도 없듯이 자연에는 입자도 없고 파동도 없다. 인간은 선인도 악인도 아니다. 그냥 인간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빛은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다. 그냥 빛은 빛일 뿐이다. (p. 157)

선과 악이든 빛과 어둠이든 입자와 파동이든 다 인간이 이해하기 쉽도록 인간이 이름붙인 것을 뿐이다. 인간의 이해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해서 굳이 부정적인 뉘앙스를 이름에 넣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이분법적인 마인드를 버리면 세상을 좀더 편안하게 받아들일수 있지 않을까... 너와 내 가 아니라 그냥 우리로...

철학에서 가장 큰 난제가 무(無)라면, 수학의 난제는 영(0)이고 과학에서 가장 큰 난제는 진공이다. 무, 영, 공 은 같은 근원을 갖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노자가 한 유명한 말,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 라는 말이 있듯이 무를 무라고 하면 벌써 무가 아니다. '없는 것이 있다'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기 때문이다. (p. 214)

미시세계를 연구하여 끝없이 작아지는 세계를 연구하는 것도 거시세계를 연구하여 끝없이 커지는 세계를 연구하는 것도 그렇게 0으로 수렴되던 무한으로 확장되던 과학은 어느새 철학적 난제와 닿아 있는 것 같다. 우주라는 공간 자체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공간이기는 하다.

299792458 , 이 숫자는 아마도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가 될 것이다. 이 우주에 이보다 더 확고하고 불변인 숫자는 없다. 왜냐하면 이 값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빛은 우주에서 참으로 특별한 존재다. 태초에 가장 먼저 창조된 것이 빛이다. [창세기]1장에 나오는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의 바로 그 빛이 만물의 표준이 된 것이다. (p. 230)

과학은 온갖 기준 단위들이 꼭 필요한 학문이다. 그래서 세계 공용으로 만들어놓은 표준원기 들이 있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물질은 가감되기 마련이다. 이때 변하지 않을 기준이 될 만한 것으로 빛의 속력이 제안되었다. 진공 속에서 빛의 속력은 어떤 관찰자가 보더라도 같다고 한다. 영구불변한 표준이 될만 것은 빛의 속력이 가장 좋겠다고 1960년 국제도량혈 협회 과학자들이 정했고 초속 299792458 미터 가 기준이 되었다고 한다. 299792458 ! 외워둬야지! ㅎㅎ

시간여행, 얼마나 멋진 여행인가? 과거로 가서 잘못된 모든 것을 바로잡고, 미래로 가서 내 모든 꿈을 실현하고, 이렇게 된다면 인생은 또 얼마나 가벼운 것이 될까? 언제나 바꾸어 버릴 수 있는 인생, 가볍다 못해 아주 무의미해져 버리지나 않을까? (p. 259)

그리스신화를 읽다보면 불멸의 신과 필멸의 인간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자꾸 비교하며 생각해 보게된다. 종교적 숭배를 받는 신의 가벼움과 신의 조종을 받는 인간의 진중함을 보면서 생각이 복잡해질 때도 있었다. 시간여행에 대한 저자의 표현을 읽으며 불멸이기에 가벼울 수 있고 필멸이기에 진지할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다시한번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과거로의 시간여행 이라는 판타지를 인간은 늘 꿈꾸어 왔지만 나는 별로 그 여행이 하고 싶지 않다. '벤자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라는 영화를 보면서도 느꼈던건데, 소중한 사람들과 다른 시간대를 산다는 것은 결코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현대 과학이라고 하면 상대론, 양자론, 진화론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 세 이론은 지동설과 뉴턴의 고전역학 이래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과학 이론이다. 상대론은 절대적인 시공간을 부정한 이론이고, 양자론은 결정론적인 우주관을 부정한 이론이고, 진화론은 모든 생명을 신이 창조했다는 창조설을 부정한 이론이다. 모든 위대한 사상은 언제나 강한 반대에 부딪히고 온갖 오해를 받기 마련이다. (p. 273)

상대성 이론이 주장하는 바는 진리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진리는 누가 보아도 언제나 진리라는 것이다. 진리는 절대적이지만 보이는 현상은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이 상대성 이론의 핵심이다. (p. 275) 상대성 이론의 상대성이라는 말은 잘못된 말이다. 오히려 절대성 이론이라고 하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생각에 가깝다. 변하지 않는 무엇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허무할까? 불확실성과 가치 혼란의 시대에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상대성 이론은 우리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가! (p. 276)

불확정성의 원리와 상대성의 원리는 과학을 무용하게 느껴지게 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더욱 탐구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게 하기도 하는 것 같다. 무엇을 발견하던 확정할 수 없고 무엇을 보든 상대적일 수 있다는 막연함에 일반인인 나로서는 맞붙을 엄두가 나지 않는데 과학자들은 연구하고 또 연구하고 탐구하고 또 탐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용기있는 사람들 같기도 하다. 진리는 늘 엄청난 진통 속에 발견되는 모양이다.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로 이루어진 물질 세계를 설명하는 이론이 바로 물리학이다. 이렇게 말하면 화학이나 천문학은 무엇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화학도 원자나 분자와 같은 물질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물리학이다. 천체들도 물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천문학도 본질적으로 물리학이다. 그러면 생물학도 물리학이냐, 라고 물을 수 있지만 생물도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물리학이다. 물질을 다루는 물리학은 본질적으로 양자론과 일반 상대론이다. 모든 자연과학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만 생물학의 진화론은 양자론이나 상대론과는 전혀 다른 자연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자연과학은 본질적으로 양자론, 상대론, 진화론 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들 이론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통합되어야 할 것이다. (p. 317)

모든 과학은 결국 물리학이었다. 물라학자다운 자신감으로 봐야 하나 정말 과학이 그런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학교다닐때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중에서 물리가 가장 어려웠는데 이렇게 과학이 전부다 물리 라는 것을 알았으면 그나마 덜 어렵게 느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인간이 보고 느끼고 알수 있는 세상은 결국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이다. 그러한 물질을 연구하는 학문이 물리학이니 어쩌면 물리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인류 모두에게 꼭 필요한 학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물리학이 저자의 글처럼 시적으로 전달되고 배울 수 있다면 용기내여 볼텐데... ^^

과학책을 읽다보면 '슈뢰딩거의 고양이' 가 정말 자주 언급된다. 책 속에 다양한 시가 있었지만 과학과 재미가 동시에 느껴지면서 이 시 한편으로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은 다 표현되었다 싶었기에 시 전문을 옮겨보는 것으로 책에 대한 소감을 마무리해본다. 우주를 만져보지 못하더라도 물리학을 조금은 만져볼 수 있게 해주어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자 속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고

반은 죽었고 반은 살아 있소

문을 열면 고양이는 죽었거나 살아 있소

문을 1000번 열면 500번은 죽어 있고 500번은 살아 있소

499번 죽어 있고 501번 살아 있기도 하오

그 반대일 때도 있소

수학자는 재미있다 하오

물리학자는 아름답다 하오

사람들은 웃긴다 하오

철학자는 그냥 웃어요

슈뢰딩거 선생,

시방 날 가지고 뭐 하는 겁니까?

미안하네, 고양이 양반

개로 하려고 했는데

그건 너무 개 같아서~

(p. 179 ~ 1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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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상징
칼 구스타프 융 외 지음, 설영환 옮김 / 글로벌콘텐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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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 관련 학자 이름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프로이트 와 융 을 말할 것이다. 학설을 자세히 모르더라도 이름은 일단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도 그렇다. 그나마 프로이트 관련해서는 대중서가 꽤 있는 것 같은데 융 에 대해서는 눈에 띄는 것이 없었기에 이 책을 보고 관심이 생겼더랬다.

융은 난해하기로 중평이 난 그의 이론을 일반 교양인들의 이해를 위하여 풀어 설명하기로 하고 세심한 정성을 기울이며 작업에 착수했다. 출판인들의 청탁을 받고, 융은 이 책이 임상이나 학술상의 연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일반 교양인의 이해를 위하여 엮어진다는 조건으로 청탁을 수락했다. 또 융 자신의 단독 저술이 아니라 그의 후진 학자들과의 공동 저술로 책이 엮어져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리고 융 자신이 네 사람의 공동 저자를 선발했다. 융의 말년은 바로 이 책에 바쳐졌다. 1961년 6월 융이 서거했을 때 융의 원고는 마무리되었고, 공저자들의 원고는 초고 상태에서 융 자신의 마지막 정성 어린 감수와 승인을 받아둔 상태였다. (p. 5~7 발췌)

융은 자신의 연구를 일반대중화할 의도가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 그것이 성공할 가능성도 없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다 TV 인터뷰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고 타계 10일전에 집필을 끝냈었다고 하니 이 책의 초판은 1961년도 인 셈이다. 학술서는 부담스러워 손도 못댈것 같아서 대중서를 선택한 것인데 읽으면서 갸우뚱해지는 것이 5~60년대의 대중들과 내가 달라서일까 하는 생각도 종종 하게되곤 했다.

어떤 기구를 사용하더라도, 인간의 지각은 곧 정확성의 한계에 도달하고, 이 한계는 의식적인 지식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p. 18)

우리는 물질 그 자체의 궁극적 성질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구체적 사물은 항상 어떤 측면에서 미지의 것임이 당연하고, 한편 우리의 경험 자체마저도 무수히 불가해한 요소를 가지고 있어, 이 미지성을 더해 주고 있는 것이다. (p. 19)

인간은 문명시대에 도달하기까지 무한히 장구한 세월 동안 부단한 노고를 통해 의식을 서서히 확립해 왔다. 그러나 이 진화는 아직도 완전한 것이 아니다. 인간 정신의 대부분은 아직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의식 및 그 내용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p. 20)

진화라고 했을 때 대부분 육체적인 진화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기다가 걷다가 허리가 펴지고 머리가 커지고 하는 것 등이 진화라고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 도 진화의 영역이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지능 과 의식 은 좀 다르게 다가온다. 지능의 발달이라고 했을때도 진화의 측면에서 아~!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의식 에 대해서는 그동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인간의 의식도 진화해 왔고 여전히 진화중이라는 의견에 고개끄덕여 진다.

프로이트는 꿈을 자유연상 과정의 출발점으로서 특히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것은 무의식이 수면 중에 산출한 풍부한 공상에 대한 해석으로는 불충분한 것이며, 부적절한 것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p. 25) 나는 꿈 자체에 대한 연상에 집중하는 방법을 택했다. 즉, 꿈은 무의식이 말하고자 하는 어떤 특별한 것을 표현한다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꿈에 대한 나의 태도의 이러한 변화에는 방법의 변화도 수반되었다. 즉, 새로운 기법은 꿈의 다양한, 보다 광범한 측면들을 총체적으로 고려하는 것으로 되었다. (p. 27) 나는 명백하게 눈에 띄는 부분인, 꿈의 소재만을 해석에 사용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꿈은 그 자신의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런데 '자유 연상'의 방법은 꿈의 소재로부터 지그재그 선을 그리면서 점점 더 멀어지는 방향으로 우리의 사고를 유인해 간다. (p. 29)

프로이트 와 융은 무의식 이나 꿈 관련해서 쌍둥이처럼 엮어진 이름 한쌍으로 여겨지지만 이 두 학자는 나중에 다른 학설로 갈라선 것으로 알고 있다. 융은 프로이트와 자신의 학설이 왜 갈라서게 되었는지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뒤로 갈수록 프로이트의 학설을 비판하는 경향이 보이기도 한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프로이트는 꿈을 현실을 반추하는 상징으로만 보기 때문에 상징적 요소들에 집중하는 반면 융은 꿈 자체를 분석함으로써 현실과의 의미와 함께 꿈 자체의 의미도 분석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 같다. 여하튼 꿈은 상징의 집합이긴 한듯.

'망각' 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고 또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의식 속에 새로운 인상이나 관념이 들어설 수 있는 자리가 제공되기 때문이다. 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의 경험 모두가 의식 영역 속에 빽빽이 들어서서 우리의 마음은 갈피를 못 잡고 혼란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의식의 내용이 무의식 속으로 소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내용이 무의식으로부터 분출되는 일이 있다. (p. 41)

살면서 모든 것을 다 기억하며 산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고된 일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많은 것을 잊어버리며 산다. 기억했던 것을 잊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스쳐셔 의식하지 못했던 순간들도 망각의 데이터속에는 쌓여있게 되기도 한다. 삶에 망각이 필요하다는 것은 무의식 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 같기도 하다.

우리가 듣거나 경험하는 것들은 모두 잠재적으로 되기-즉,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기-때문이다. 우리가 의식 속에 보존시키고 의지에 의해 재생시킬 수 있는 것들조차 무의식 이라는 바탕색을 띠게 되며, 관념은 머릿속에 떠오를 때마다 그 바탕색으로 채색된다. 실제로 우리의 의식적인 인상은 심리적으로 중요한 무의식의 의미 요소를 받아들이지만, 우리는 이 잠재적 의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나, 그것이 일반적인 의미를 확장시키고 혼란시킨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 심적 바탕색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p. 44)

융의 학설을 잘 모르지만 어렵다고하는 이유가 워낙 개개인별 사례 해석이 다르다보니 일반화하기 어려워서인 것 같다. 누구든 00에 대한 꿈을 꾸면 00는**다 라고 해석되는 것은 쉽게 받아들여져도 누군가에겐 00는** 이고 누군가에겐 00는@@라고 한다면 어렵기 마련이다. 여하튼, 무의식이 꿈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개개인별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가 된다. 그래서 또 어렵게 된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심리적 바탕색은 다 다르므로.

꿈의 일반적 기능은 미묘한 방법으로 마음 전체의 평형성을 바로잡을 만한 꿈의 재료를 산출함으로써, 심리적인 평형을 회복시키려는 시도인 것이다. (p. 53)

우리가 의식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건은 종종 무의식에 의해 감지된다. 무의식은 그 정보를 꿈을 통해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p. 55)

기호는 항상 그것이 대표하고 있는 개념 이하의 것이지만, 상징은 그 명백하고 직접적인 의미 이상의 그 무엇인가를 나타내고 있다. 더욱이 상징은 그 자연에서 무작위한 산물이다. 꿈은 상징에 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의 주된 원천이다. 그러나 상징은 모든 종류의 마음의 표현에서 생겨난다. 상징적인 사고나 감정, 상징적인 행동이나 장면이 존재한다. (p. 61)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꿈이 심리적 평형회복을 위한 것이라는 문장이 신선했다.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심리가 불안할때 오히려 꿈은 더 자주 더 많이 꾸게 되지 않던가? 그것이 내 스스로가 심리회복을 위한 무의식적 기능이 작동해서 그런거였다니.. 역시 인체는 신비롭다.

기호와 상징의 구분도 아하~! 싶었다. 일상생활에 무수한 기호들을 사용하지만 기호 자체로 존재하는 것과 기호 이상의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들이 있다. 상징은 인간의 상상력을 동반해야 만들 수 있는 것이므로 어쩌면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 혹은 능력 이라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프로이트와의 다툼을 통해서, 인간 및 그 마음에 대한 일반적 이론을 확립하기 전에 우리들이 다루지 않으면 안되는 실제의 생생한 인간에 대해, 충분히 연구해야 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개인이야말로, 바로 유일한 현실이다. 그 개인으로부터 동떨어진 인류라는 추상적 관념으로 몰입하면 할수록, 우리가 실패에 빠질 가능성은 높아진다. 현재와 같은 사회적인 동란이나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 있어서는, 개인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일들이 개인의 정신적 혹은 도덕적 자질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바른 시각에 서서 사물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현재뿐 아니라 과거의 인간에 대해서도 알아야만 한다. 때문에 신화나 상징에 대한 이해가 본질적으로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p. 67)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이론으로 퉁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인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현대적인 시각이라고 느껴졌다. 지금의 정신의학은 융의 이론을 따르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하고... 이런 개별적 특성 때문에 환자와 의사가 정신상담을 할때도 각각의 성향 차이로 인해 다른 효과가 생겨날 수 있다. 상담도 결국 두명의 사람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 두사람은 결코 한사람이 될 수 없는 거니까. 당연하게도. 그러니 정신의학상담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생물학자가 비교해부학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이 심리학자도 '심리에 관한 비교해부학' 없이는 일을 할 수가 없다. 바꿔 말한다면, 실제 면에서는 심리학자는 꿈과 기타의 무의식적인 활동의 산물에 관한 충분한 경험뿐 아니라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신화에 대해서도 지식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욕 없이는 중요한 유사성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p. 85)

꿈으로부터 알 수 있는 바로는, 무의식의 사고는 본능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논리적인 분석은 의식의 특권이다. 결국 우리들은 이성과 지식에 의해 선택한다. 그런데 무의식은 주로 본능적인 경향, 그것에 상응하는 사고형태-결국 원형에 의해 표상되는 경향에 이끌린다고 생각된다. (p. 99)

꿈이나 상징의 해석은 지성을 필요로 한다. 그것을 기계적인 시스템으로 치환하여 상상력이 없는 머리 속에 밀어넣을 수는 없다. 꿈을 꾼 사람의 개성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해석자 측의 자기 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p. 117)

AI 시대가 되면 없어질 직업군 중에 의사도 있었다. 지금도 세밀한 수술은 로봇이 하고 있다며. 하지만 의사 분야 중에서도 정신의학과는 로봇으로 대체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빅데이터를 돌려도 일반화할 수 없는 인간의 특성과 연관된 상담은 결국 인간밖에 못할 테니까. 심리학자들과 정신분석학자들 그리고 정신의학관련 연구자들의 건투를 빈다.

불교도는 무의식적인 공상을 무용한 환상으로서 제거시켜 버리고, 그리스도교도들은 교회외 그 '성서'를 자신과 자신의 무의식 속에 끼워넣고 있다. 그리고 합리적이고 지적인 사람은 자신의 의식이 곧 마음 전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직도 알지 못한다. 70년 이상 걸쳐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기본적인 과학적 개념이며, 무엇인가 중요한 심리학적 연구에 빠져서는 안된다고 하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무지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p. 135)

융의 생존시대에는 그러한 무지가 계속되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어떠한지??

나는 자연의 상징에 관한 연구로 반세기 이상을 보내왔다. 그리고 꿈과 그 상징은 터무니없는 것도 아니고 무의미한 것도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차라리 반대로 꿈은 그 상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있어서는 가장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p. 137) 프로이트의 생각은 사람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마음에 대한 경멸을 확고하게 해버렸다. 프로이트 이전에 있어서 마음은 단지 간과되고 무시되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늘날 그것은 도덕적인 거부로 사장되어 버렸다. 이와같은 근대적인 관점은 분명히 일방적이고 부당한 것이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과 일치하지도 않는다. 무의식은 인간의 성질의 모든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집단적ㅇ니 면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측면에서도 상징에 관한 연구는 큰일이며 아직 달성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어서 그 단서를 마련한 초기의 결과는 희망적인 것이며 그러한 것들은 현재의 인류에게 아직까지 해결될 수 없었던 많은 의문에 대해 해결점을 제시해 줄 것이다. (p. 138)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성적 의미와 대부분 연결시킴으로써 후대로 갈수록 비판을 많이 받았다고 들은적이 있다. 초기 성과는 분명 위대한 업적이지만 고치고 수정되어야 그또한 과학의 성질이므로 당연한 수순일 수 있다. 융이 강조하는 개인별 무의의 중요성은 알겠다. 다만 중요하구나~ 를 알았다는 것에서 그칠 수 밖에 없다는 점이 이 책에 대한 아쉬움이랄까...

뒤에 이어지는 융 학파 4명의 내용은 각각 다른 주제들에 대한 내용이고 다양한 사례 중심으로 풀고 있긴 한데 그 사례들이 대부분 다른 사람이 꾼 꿈이다 보니 꿈이란 것의 특성상 온통 모호하고 비정상적인 상징들이라서 내용에 몰입되지가 않았다.

가장 기대가 컸던 '고대 신화와 현대인' 의 경우 몇몇의 신화들을 예로 영웅, 미녀와 야수, 초월 등에 대한 상징을 분석하지만 어려운 풀이대비 솔직히 새로울 것은 없었다. 영웅신화에서의 성장과 미녀와 야수신화에서의 교육과 초월신화 에서의 목적도달을 위한 노력 등 신화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느낄 수 있던 것들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없었다.

이니시에이션은 본질적으로 순종의 의식으로 시작해서 억압의 시기를 거쳐서 다음에 해방의 의식으로 나가는 과정이다. 그리하여 어떠한 개인이라도 그 인격의 모순된 요소를 화해시킬 수가 있다. 즉, 진실로 그를 인간으로 만들고, 진실로 그를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만들어 주는 평형에 이르는 것이다. (p. 216)

이 책의 아쉬운 점 중의 하나는 용어설명이나 해제 부록 같은 것이 없다는 점이다. 본문을 읽으며 궁금해진 것들을 찾아볼 그 어떤 자료도 덧붙여져 있지 않다. 나는 여전히 이니시에이션이 뭔지 모른다.

융은 대단히 많은 사람을 관찰하고, 그 꿈을 연구함으로써, 모든 꿈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꿈을 꾼 당사자의 삶에 관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꿈은 심리적 요인의 하나의 커다란 조직의 전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또 대체로 꿈이 하나의 배열이나 양식에 따르는 것 같다는 걸 알았다. 융은 그 양식을 '개성화 과정' 이라고 한다. (p. 219)

지금 읽으면 당연해 보이는 이러한 꿈에 대한 분석입장이 당시에는 차별성이 있었나 보다. 1961년에 나온 책이니 아무래도 세월의 흐름에 따른 격차가 있을 것...

현대 미술을 교회에서 받아들인 것은 교회 측의 관대한 것 이상의 뜻이 있다. 현대 미술이 그리스도교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역할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것이다. (p. 337) 앞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상반성의 합작이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것인지, 또는 상상할 수도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예술가는 무의식 중에 적개심을 야기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표현할 수가 있다. 그런데 심리학자가 그것들을 나타내면 반발을 일으킨다. 이것은 미술보다도 문학에서 더욱 결정적으로 나타나는 사실이다. 심리학자가 평하면 사람들은 도전당한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그러나 예술가가 이야기하는 것들은 특히 이 세기에 있어서는 개인을 초월한 영역에 속한다. 그래도 좀더 전체성이 있고, 따라서 좀더 인간적인 표현의 양식에 대한 암시가 우리 시대에 이르러 눈에 띄게 된 사실은 매우 중요한 것 같다. (p. 338)

'시각예술에 있어서의 상징성' 도 기대했던 장 이었는데 가장 내용이 짧았고 구체적 작품을 예로 들어 풀이하는 것이 아니라서 미술에서의 상징성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미술사 책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될듯... 여하튼, 지금은 저 글을 쓸때보다 심리학자에 대한 반발심이 누그러진 것 같은데... 학자들의 입장은 어떤지 모르겠다.

'개인분석에 있어서의 상징' 에서는 특정인의 꿈을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내용전개를 해주고 있는데 그러한 개인분석을 읽으며 이내용을 어떤 이론으로 이해해야 하는 건지 사례로 이해해야 하는건지 어떤 의미가 있는건지 잘 공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정신의 자기 조정의 기능이 (과도한 합리적 해석이나 분석에 의해 방해되지 않을 때) 정신의 발달과정까지 뒷받침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p. 402)

라는 결론은 굳이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지금은 인정하고 이해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마무리였다고 할 수 있달까.

우리는 무의식적인 것들이나 원형-정신의 역동적인 핵-을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아직도 요원하다고 하겠다.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그 원형들이 개인에게 있어서 막강한 힘을 행사하여 그 사람의 정감이나 윤리관이나 정신적 관념을 제한하고, 타인들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이렇게 해서 그 사람의 운명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p. 404) 만일 독자들이 무의식에 대한 연구나 무의식의 동화의 문제에 관하여 보다 더 탐구해보고자 하는 의욕이 일었다면-그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에 의해서 시작되는데-이 입문서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 것이리라. (p. 420)

호기심을 일으키고자 하는 입문서였구나... 융의 학설에 대한 대중적 안내서인줄 알았는데;;; 그렇다면 책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긴 했다. 이 책을 다 읽고났음에도 융의 학설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다른 책을 더 읽어봐야 겠구나 하는 필요성을 느꼈으니 ^^;;;

ps. 이 책에 대한 가장 큰 아쉬움은 오타가 너무 많았다는 점이다. 거의 매 페이지마다 있었던듯... 그리고 책의 본문이 끝나자마자 정말 바로 끝. 뭐랄까... 책구성상의 안정감이랄까 미적요소랄까 싶은 그 어떤 페이지도 없이 바로 속지로 끝나는 편집이 좀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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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킹 오레오 새소설 7
김홍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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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총이다. 당신의 손에 닿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지금 가고 있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총기 사건이 일어난다면?

어느 날 게임 참여를 독려하는 메일이 청계천 공구 상가로 날아든다. 총을 만든다. 쏜다. 그러면 얻는 건 엄청난 보너스. 참가자들에게는 소총의 완벽한 설계도면이 제공된다. 시내 곳곳에서 총이 터지고 사람들은 죽어나가기 시작하는데... (표지 中)

'대한민국 서울에서 총기 사건이 일어난다면?' 이라는 문장이 눈길을 끌었다. 해볼법한 가정이다.

미국에서 총기난사 관련 사건 뉴스를 들을때마다 총기소지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나라는 안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한편으론, 우리나라에서 총기소지가 자유롭게 된다면? 이라는 가정아래 쓰여진 소설이 의외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소설' 시리즈 인만큼 신선한 발상이 이번 작품에서도 돋보이는 듯 했다. 앞서 자음과모음 의 새소설 시리즈 중 '밤의 행방' 과 '빛의 마녀' 를 읽었었는데 이 시리즈의 특징 중 하나는 '참신성' 같았다. 좋은 시리즈다.

책 뒤표지에서 대략 알려주고 있듯이 어느날 특정 집단에게 발신자를 알 수 없는 메일이 도착한다. 총을 만들고 그 총이 성공적으로 발사 되면 상금을 주겠다며 설계도와 지원비를 제시한다. 청계천에서 잔뼈가 굵은 크리에이터들은 그동안 만들어보지 못했던 것(=총)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그 유혹에 빠져든다. 하지만 뒤표지의 문구에서 이 작품의 중요한 포인트가 은근히 제시되어 있다. 총은 터.진.다.

그는 손으로 만지고 때론 부숴버릴 수도 있는 물성 있는 것의 질감에 집착했다. 도면은 태블릿에 저장하지만 책만큼은 이북 대신 종이책을 읽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책은 손으로 만져질 때 완전해지는 물질이었다. 오레오를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혀를 통해 전달되는 양각된 오레오 겉면의 문양을 머리로 그려내곤 했다. (p. 47)

이 소설의 초반에 작품의 줄거리와 관계없이 내가 헤깔렸던 부분은 인칭대명사 였다. 지칭하는 대상이 여자건 남자건 3인칭대명사는 '그' 로 통일되어 있다. 그 또는 그녀 가 아니라. 이또한 그동안의 한국소설에서는 없던 새로운 시도일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익숙하지 않아서 좀 헤깔리긴 했다. 이름이 여자인데 그 라고 하니 남자야 여자야 하며 자꾸 따져보게 되서;;; 하지만 사실 그런 구분이 굳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는데도 나도 모르게 그런 구분을 확실히 해야 자연스럽게 책장이 넘어간다는 것을 느끼며 개인적으로 살짝 나 자신에 대해 당혹스럽기도 했다.

여하튼, 나도 책은 역시 종이책 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라 저 문장이 좋았다. 그런 연장선으로 과자를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오레오를 사먹어봐야 겠다.

그에게는 케이퍼 무비의 동료들처럼 각자의 기술을 지닌 팀원들이 있었다. 일간지 기자 박창식 본인, 술을 잘 마시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국정원 직원 고민지, 간지나는 임무를 맡아본 적은 없지만 정보기관의 요원이라는 것 자체가 간지났다. 사회복자시 양은아, 6/45 동행 로또에 관한 음모론을 강하게 신봉하는 해커로, 틈나는 대로 농협 서버에 들어가는 게 취미였다. 기계공학과 학부생 임다인, 총 빼고는 뭐든지 만들 수 있었다. 만들려고 마음만 먹으면 총도 만들 수 있지만 총은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 말한 바 있다. 팀의 이름은 '반드시' 였다. 反-dessus. (p. 67, 68)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이후로 한 팀이 된 이 4명은 제각각의 개성이 범상치는 않은 캐릭터들이다. 4명이 만든 팀이 하고자 하는 일은? 도둑질이다!

"지금 청계천 공구 상가에 총 만들기 대회가 열렸어. 소총 도면이 쫙 깔리고 상금도 걸렸다고. 누가 뿌렸는지 왜 그런 건지는 몰라. 임다인이 귀뜀해줬는데 일단 지켜만 보고 있었거든. 그런데 오늘 사건 나고 'M4A1 MANIFESTO'라는 게 올라왔어. 우리 회사 서버에. 들어온 흔적도 없고 나간 흔적도 없어. 우리 회사 사장실 컴퓨터 바탕화면에 띄워놓고 간 거야. 누군가가"

"국정원장 업무 컴퓨터 바탕화면에? 그게 말이 돼?" (p. 72~73)

서울시 강남 한복판에서 총기사고가 발생했다. 여기서 색다른 점은 총기사고가 총을 발사시킨 본인을 죽게한다는 점이다. 누군가를 살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만 첫번째 사고에서는 총제작과 관련이 없는 2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한 여자는 죽었고 한 남자는 머리에 파편이 박힌채 살아났다. 그리고 국정원 컴퓨터에 누군가 침입했다.

사장이 뜻하지 않은 메일을 받은 것은 그즈음이었다.

-당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사장은 그제서야 확실히 알았다. 자신이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찾는 것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p. 110)

총기사고로 아내를 잃은 사장은 충격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불법돈세탁과 관련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거대한 돈의 흐름에 '총' 이 관련되어 있었다.

"이건 굉장히 특이한 선언문입니다. 어떤 입장을 드러내고 있기는 한데... 특정한 누군가의 입장이라고 보기는 힘들어요. 굳이 분석을 해보자면 이 매니페스토의 화자는 총입니다. 총의 입장에서 쓴 글이에요. 그렇게 보고나니 어쩐지... 사람이 썼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군요. 하지만 어떤 부분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마음을 울리는 부분이 있어요. (p. 122)

국정원 요인 고민지는 CIA요원 알렉스를 만난다. 알렉스는 국정원 원장 컴퓨터에 떠있던 의문의 문서 '매니페스토'를 갖고 있었다. 그는 고민지를 도와줄테니 자신의 요구 한가지를 들어달라고 한다.

"일단 이건... 문학이야. 존나 슬퍼. 내가 책이라면 질색하는 거 알지? [앵무새 죽이기] 이후로 읽은 책 한 권도 없다. 문화부 기자 할 때도 보도자료 받은 거 우라까이만 했지. 근데 이건 진짜...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 주인공이 총이야. 민지야 딱 생각해봐. 자, 니가 딱, 총이야. 딱총이라는 게 아니고, 딱, 가정을 해보라고. 자 이제, 생각해봐. 내가 총인에 입에서 파바밧 총알이 나가. 나 땜에 다 죽어. 근데 총은 그러기 싫은 거야. 그럼 막, 기분이 얼마나, 기분이 안 좋겠어. 속상하잖아. 그래서 얘는 이걸 쓴 거야. 자기는 총인데 이제 총이 되기 싫대" (p. 129~130)

매니페스토 라는 문건은 능력없는 기자 박창식을 감동시킨다. 그 문서를 쓴 존재는 누구인가? 아니, 무엇인가?

죽은 이들은 아무도 겨냥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같이 방아쇠를 당긴 자신의 총이 터져버려 죽었다.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도대체 어디서 자꾸만 총이 나타나는 건지. 왜 총알이 앞을 향해 나가지 않는 건지. 터져버리는 총을 왜 자꾸만 쏘아대는 건지. (p. 135~136)

총의 제작이라는 유혹에 빠진 창작쟁이들은 하나둘 총과 함께 터져나가고 있었다.

그사이 퇴원한 머리에 파편이 박힌 남자 오수안은 모든 음식에 대해 미각을 잃었지만 자신이 좋아하던 오레오과자를 먹으면 신체에 이상한 반응이 생긴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게임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반드시들이 들이닥쳤다. 고양이, 백곰, 뱀, 판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정 앞에 서 있었다. 임다인이 직접 사람들의 얼굴에 물감을 바르고 수염을 붙였다. 복면 대신 분장을 하자는 건 박창식의 제안이었다.

"복면 쓰면 왠지 나쁜 짓 하는 것 같잖아"

"그렇다고 좋은 짓은 아니잖아? 삥 뜯으러 가는 건데"

"안녕하세요, 저희는 도둑입니다" (p. 180, 181)

아내가 죽은 배경을 알아내고자 집안 서재에 틀어박혀 온갖 시도를 하던 사장의 집에 '반드시' 일당이 침입한다. 총기사건을 조사하던 중 거대한 자금의 흐름을 알게된 이들은 그 자금출처인 사장의 집에 막대한 돈이 쌓여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장은 알고 있었다는 듯 서재문을 열고 이들을 맞이한다. 그런데 반드시일당의 뒤를 이어 청년 한명이 집을 찾아온다.

"저는 총-오수안입니다. 이전까지의 오수안과는 다른 존재죠.

제가 총이고, 총이 접니다. 다들 서재로 들어가시죠. 이제 이 게임을 끝내야 할 때가 됐어요"

총-오수안은 오레오과자에 대한 자신의 신체적 반응을 확인하며 별의별 방법으로 오레오 과자를 흡입했다. 그냥 먹어도 보고 피부에 발라도 보고 끓여먹기도 하고... 그러다 가루로 부셔서 피워보기도 했다. 영화에서 봤던 마약쟁이들처럼 가루를 코로 들이마셔 보기도 했다.

"융햡은 불가역적이에요. 오수안은 이제 없습니다. 분리가 된다고 해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기도 하고요. 지금은 오레오를 피우고서 총-오수안이 된 거잖아요. 오수안에 대한 미련은 없어요. 저한테 지금 중요한 건 멍청한 게임이 끝나서 더 이상 아무도 죽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오레오가 죽여준다는 것뿐이죠"

"그렇게 죽여줘? 나도 한한 붜봐. 피워보게"

박창식이 총-오수안 앞에 놓여 있던 파이프를 가져와 불을 붙였다. 몇 모금을 빨더니 캑캑거리며 연기를 내뱉었다.

"이거 그냥 설탕 태운 맛인데, 목 아파. 뿅 가지도 않고"

"그거는요... 창식 씨가 아직 오레오를 제대로 몰라서 그런 거예요" *p. 225, 226)

황당무계하게 여겨질 수 있는 게임이 현실화되면서 펼쳐지는 상황들은 그 이후 더 황당무계한 방법들이 등장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정말 현실적으로 그런일이 생길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생각되어지는 지금의 현실이, 과거와 달라진 그런 지금의 현실이 자못 씁쓸하기도 하지만 소설은 전반적으로 발랄한 톤을 유지한다.

오레오는 먹는 것이 아니라 피우는 것이다. 적어도 총 에게는 그렇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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