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코트를 입은 남자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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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폐적이고 광적이고 자기도취적이었던 벨 에포크 시대

어디에도 속박당하지 않고 늘 역사의 '옳은 편'에 섰던 보통의 영웅,

사뮈엘 포치

 

거울속을 보듯 액자안을 보듯 예쁘게 뚫린 겉표지속에 빨간 옷과 레이스소매 그리고 가늘고 긴 손이 보인다. 남자라고?

겉지를 벗겨낸 겉표지를 봐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빨갓옷과 하얀 레이스 그리고 가늘고 긴 손... 남자라고??

하지만 표지그림과 제목이 불러일으키는 이 의혹은 몇 페이지넘기면 바로 해결된다. 15페이지, 존 싱어 사전트 가 그린 <집에 있는 닥터 포치(1881)> 그림.

나는 왜 이 책이 소설이라고 생각했을까?;;;

책을 받아보고 표지에서 벌써 논픽션이고 한 인물에 대한 에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표지가 주는 감상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실존인물에 대한 전기적 스토리가 소설처럼 펼쳐지는 책이지 않을까 예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산문적으로 코트에서 시작할 수도 있겠다. 다만 코트보다는 실내 가운이라고 묘사하는 게 낫다. 빨간색... 아니, 더 정확하게는 주홍색...에 목부터 발까지 내려오는 표준형이고, 손목과 목에 주름장식이 있는 하얀 리넨이 약간 드러나 있다. 아래쪽의 양단 슬리퍼 한 짝이 이 구상에 노란색과 파란색을 살짝 보태준다.

코트 안의 남자가 아니라 코트에서 시작하는 것은 부당할까? 하지만 코트, 아니 코트의 묘사가 오늘날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기억을 하기는 한다면. 그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안도했을까, 재미있어했을까, 약간 모욕을 느꼈을까? 그것은 이제 이렇게 멀어진 거리에서 우리가 그리는 인물을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 있다. (p. 10~11)

작가는 2015년 미국에서 임대하여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 걸린 모습으로 표지를 장식한 그 그림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빠져들었다. 그 그림에, 그림속 인물인 포치에게, 그 인물이 살았던 '벨 에포크' 시대에.

작가가 풀어낸 포치 라는 인물과 벨 에포크 시대 이야기를 읽다보면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에 대해 점점 더 머리를 갸우뚱 하게 된다. 작가는 재미로 쓴 것인가? 약간 모욕을 주려고 쓴 것인가? 혹은 벨 에포크 시대로 풍자된 프랑스 에 비교하여 영국의 문화에 안도한 것일까?

그래, 1885년 여름의 그 런던 방문에서 시작하자.

왕자는 에드몽 드 폴리냐크.

백작은 로베르 드 몽테스키우-페젠사크.

이탈리아계 성을 가진 평민은 닥터 사뮈엘 장 포치. (p. 14)

잠시 런던을 방문했던 이 세명의 일행이 이 책의 주요 인물이긴 하나, 이 인물들의 이야기는 산발적으로 펼쳐지면서 이들과 그닥 관계없어 보이는 타인들의 이야기에 묻혀서 결국 이들이 누구인지 읽으면 읽을수록 잘 모르게 된다. 작가가 '벨 에포크' 시대를 표현하기 위해 골라낸 이 세명의 프랑스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왕자는 어느 가문의 왕자인지 모르겠고 백작은 그 유명한 (이름이 비슷해서 헤깔렸던) 몽테스키외 백작이 아니었고 포치는 결국 프랑스인이 아닌셈이라는 것은 이 세명이 살았던 시대를 향한 칭송인가 모욕인가.

1884년 6월 조리스-카를 위스망스는 스물아홉 살의 귀족 장 플로레서 데제생트 공작을 주인공으로 삼은 여섯 번째 소설 [거꾸로]를 발표했다. 위스망스의 이전 다섯 소설은 졸라류의 사실주의를 구사했으나, 이번에는 그것을 모두 내던졌다.[거꾸로]는 데카당스의 성서로, 꿈을 꾸듯 명상적이었다. 데제생트는 댄디에 유미주의자였으며, 지나친 근친교배로 병약했고, 집안 혈통의 맨 마지막 인물이었으며, 이상하고 타락한 취향의 소유자로 의복, 장신구, 향수, 진귀한 책, 훌륭한 장정을 사랑했다. (p. 20~21)

[거꾸로] 라는 소설과 데제생트 라는 인물이 자주 언급된다. 작가가 보기엔 앞서 말한 세 인물의 시대가 소설로 표현된다면 가장 적절했을 작품이 아마도 이 소설이었던 것 같다. '데제생트' 라는 인물명이 소설과 상관없이도 하도 자주 등장해서 실존인물인가 싶을 정도였다. 내가 모르는 소설이라서 더 낯설게 다가왔다. 소설이라는 허구와 실존인물들의 일상이 뒤섞인 표현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갈피를 못잡겠고 머리속을 뒤엉켜 놓기 일쑤였다.

'즐거운 영국', '황금시대', '벨 에포크'. 이런 빛나는 상표명은 늘 회고적으로 만들어진다. 1895년이나 1900년에 파리에 살던 누구도 서로 '우리는 '벨 에포크'시대를 살고 있으니 한껏 즐기는 게 좋아' 하고 말한 적이 없다. 1870~1871년 프랑스의 파국적 패배와 1914~1918년 프랑스의 파국적 승리 사이 평화의 시기를 묘사하는 이 말은 1940~1941년, 프랑스가 다시 한번 패배하고 나서야 언어에 등장했다. 이것은 생방송 뮤지컬 쇼로 바뀌어 나간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의 제목이었다. 기분 좋은 조어이자 기분 좋은 오락물이었으며, 동시에 오-라-라, 캉-캉 프랑스라는 독일의 어떤 선입관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벨 에포크'-평화와 쾌락의 고전적 표현, 퇴폐미가 상당히 섞인 매력, 예술의 마지막 개화, 정착된 상류사회의 마지막 개화. 이 부드러운 환상은 뒤늦게 금속적이고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20세기에 의해 날아가버렸다. (p. 42)

왕조는 그 왕조가 멸하고 난 다음에야 이름붙여지기 마련이고, 시대는 그 시대가 지나고 난 다음에야 별칭이 생기기 마련이다. '벨 에포크' 나는 이 명칭이 나올때마다 헤깔리곤 했다. 왜 이런 이름을 굳이 붙인 걸까? 백년도 안되는 고작 수십년의 기간동안의 프랑스 파리 라는 국한된 지역에서의 문화풍조에 이 이름을 붙은 것은 좋은 의미인가? 안좋은 의미인가? 나는 여전히 '벨 에포크' 시대라는 명칭이 모호하고 낯설지만 영국인 작가의 관점에서 이 명칭은 현학적으로 비틀고 싶은 명칭인가 보다.

100여 년마다 망명자들의 새로운 물결이 해협의 여러 항구에 이르렀다. 위그노, 혁명의 도망자, 코뮌 지지자, 무정부주의자, 또 국가수반 네명이 잇따라(루이 18세, 샤를5세, 루이 필리프, 나폴레옹3세) 안전을 찾아 영국으로 왔다. 볼테르, 프레보, 샤토, 브리앙, 기조, 빅토르 위고도 마찬가지였다. 모네, 피사로, 랭보, 베를렌, 졸라도 의심을 받을 때는 모두 잉글랜드로 향했다.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정치적 교통량은 이에 비하면 미미했다. 그런 불균형을 보면서 영국인은 당연히 자신의 역사적·정치적 자유에 자족감을 느꼈다. 브리튼 사람이 프랑스에 망명하려 하는 주된 이유는 추문을 피하려는(그래서 계속 추문이 날 만한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것이었다. 이곳은 상층계급 파산자, 중혼자, 카드놀이 사기꾼, 동성애자가 가는 곳이었다. 프랑스인이 영국인에게 추방당한 지도자와 위험안 혁명가를 보냈다면, 영국인은 프랑스인에게 멋이나 부리는 인간쓰레기를 보냈다. (p. 52)

저자에 의하면 '벨 에포크' 시대는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닌 듯 하다. 영국이 버린 '인간쓰레기' 들이 모여사는 곳이 '벨 에포크' 시대의 프랑스였다.

벨 에포크는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거대한 부의 시기, 귀족에게는 사회적 권력의 시기, 통제할 수 없는 복잡한 속물근성의 시기, 무모한 식민 야망의 시기, 예술 후원의 시기, 폭력의 규모를 볼 때 손상된 명예보다는 개인의 급한 성미를 반영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결투의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좋게 말할 만한 것이 별로 없지만, 적어도 이런 것을 많이 쓸어 가기는 했다. (p. 177)

이런 시대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인물이 사뮈엘 장 포치였다. 듣도보도못한 그는 누구인가?

나는 사전트가 그린 엄청난 이미지의 형태로 닥터 포치를 처음 만났다. 벽에 붙은 설명은 그가 부인과 의사라고 말해주었다. 그전에 19세기 프랑스 독서에서는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미술잡지에서 그가 '프랑스 부인과학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여성 환자를 유혹하려 한 확인된 성 중독자'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분명한 역설에 흥미를 느꼈다. 여자들을 돕는 동시에 착취하는 의사, 정신과 육체의 고통을 덜어주고 편안함을 주고, 혁신과 기술로 여자들의 생명을 구하고, 환자 수로 볼 때 부자보다 빈자를 많이 도왔지만, 사생활에서는 세련된 프랑스 남자의 희화화된 표본처럼 행동한 과학자.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시작하자. 평생에 걸쳐 포치의 이름에는 스캔들이 따라붙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의 행동은 이성애적이고, 합법적이고, 동의에 기초한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파트너들의 분별과 요령에 의존하기도 했다. 언제 어디서 그가 밀회를 했는지, 관계는 얼마나 오래갔는지, 그 관계들이 겹쳤는지, 겹쳤다면 얼마나 자주 그랬는지 분명하지가 않다. 하지만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만한 여성의 불평은 단 하나도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호색가 포치에 관심을 잃고, 걱정하는 가족적 남자 포치, 늘 호기심을 잃지 않는 의사 포치, 여행자 포치, 도회풍 인물 포치, 국제주의자, 합리주의자, 다윈주의자, 과학자, 모더니스트 포치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절대 친구를 잃지 않는 남자 포치, 미친 시대에 제정신을 잃지 않은 사람 포치. (p. 216, 217, 219 발췌)

작가가 표현하고 있는 포치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이라는 건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 든다. 포치를 모욕하고 있는가? 칭찬하고 있는가? 작가는 포치의 일생만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포치와 별 상관 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주 내용을 이루고 있다. 글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 느낌인데 작가는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다. 소통이 되지 않는 글이란 독자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포치가 왜 반드레퓌스파, 반유대주의자, 왕당파, 이민 배척주의자, 가톨릭 우파의 자연스러운 표적이 되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그의 성이 인정하듯이, 그는 '사실은 프랑스인이 아니었다' 그는 전혀 가톨릭이 아니었고, 프로테스탄트였다가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는 알려진 자유사상가인데도 상원에서 의석을 차지할 만큼 뻔뻔스러웠다. 그는 헌신적인 드레퓌스파로 렌에서 열린 재심에서는 기록을 하며 일주일을 보냈다. 혈연과 지연에 집착하는 애국자들에게 '거룩한 히스테리'라는 세월의 최종 결과는 결코 '정의를 위한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유대인을 위한 승리'였다. 포치 자신은 얼마든지 '뿌리없는 코스모폴리탄'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는 유대인 색정광 사라 베르나르와 오래 연애를 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정기적으로 선한 프랑스 가톨릭 부인과 딸들의 가리지 않은 음부를 맨손으로 검사하는 남자로, 모두가 알다시피 그 가운데 일부를 유혹하기도 했다. 이런 인민의 적에 관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p. 275, 276 발췌)

'벨 에포크' 시대를 검색하면 과거의 '좋은 시대' 라는 의미라고 대충 이해되는 설명이 나온다. 포치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벨 에포크' 시대가 과연 좋은 시대로 보이는가?

내가 이 책을 1년 정도 썼을 때 영국은 착각에 빠져 마조히즘적으로 유럽연합에서 나왔다. 그럼에도 나는 비관적이기를 거부한다. 멀고, 퇴폐적이고, 광적이고, 폭력적이고, 자기도취적이고, 신경증적인 벨 에포크에서 보낸 시간이 나를 명랑하게 만들어주었다. 주로 사뮈엘 장 포치라는 인물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의학, 예술, 책, 여행, 사교, 정치, 가능한 한 많은 섹스로 채웠다. 그는 고맙게도 결함이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일종의 영웅으로 내세우고 싶다. (p. 338~340 발췌)

뒷표지의 '어디에도 속박당하지 않고 늘 역사의 '옳은 편'에 섰던 보통의 영웅, 사뮈엘 포치' 라는 홍보문구가 눈에 걸린다. 작가가 포치를 역사의 옳은 편에 섰던 보통의 영웅으로 묘사한 것 같은지 이 홍보문구를 쓴 이에게 물어보고 싶다. 대체 이 책의 어느 구절에서 포치가 역사의 옳은 편에 섰고 영웅적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일종의 영웅' 으로 내세우고 싶다는 저자의 마지막 문장이 '벨 에포크'시대를 향한 모욕인지 칭찬인지, 직설인지 반어인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확실한 입장을 정리할 수가 없다.

처음 포치의 생애에 관해 읽었을 때, 오래된 것이든 최근 것이든 모든 자료에 그가 '미치광이에게 암살당했다' 라고 나와 있었다. '그 자신의 환자에게' 라고 나오지 않았다. 마쉬는 까다로운 환자였다. (하긴 음낭 수술을 하는데 그렇지 않은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가 한동안 성적으로 활발하지 않았던 것, 사실상 무능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마쉬에게는 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의 호주머니에서는 포치에 대한 불만을 자세히 기록한 메모가 발견되었는데, '그는 환자의 바람을 존중하지 않는 의사들에 대한 경고로 그를 죽일 계획이었다'. 자신의 무능을 치료해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남자에게 총에 맞아 죽은 돈 후안. 이 무슨 도덕적 이야기인가? 픽션에서라면 귀엽게 맞아 들어갈 것 같다. 그러나 논픽션은 말만 그럴듯하고 있을 법하지 않은 도덕주의적인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용해야만하는 곳이다. (p. 330~331 발췌)

이 책은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이다.

벨 에포크 시대에 대해 작가가 풀어낸 퇴폐적이고 향락적이고 반도덕적인 이야기의 결말로 논픽션다운 도덕적 결말을 맞은 포치를 주요인물로 내세운 것은 '착각에 빠져 유럽연합을 탈퇴한' 영국에 대해 하고 싶었던 말일까? 영국의 숙적 프랑스가 가진 '좋은 시대'에 대해 하고 싶었던 말일까?

작가 '줄리언 반스' 에 대해 검색을 하면 N지식백과에서 이런 구절이 나온다.

반스의 산문은 우아하고 재치와 유머가 넘치며, 종종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 자의식적 언어 스타일, 여러 형식의 이야기들의 혼합)을 활용한다. 이러한 그의 기법은 그가 문학적 창작 과정, 경험과 언어의 차이, 그리고 ‘사실’과 ‘현실’의 주관성을 중요시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언어, 스타일과 형식에 대한 재미있는 실험에도 불구하고 반스의 소설은 심리적 사실주의에 기반해 있으며, 그 주제는 심각하고, 가슴 아프며 진심 어리다. 그는 자주 사랑의 본질에 대해 다루면서 진정한 사랑에 관한 지속적인 추구와 더불어 특히나 인간의 질투, 집착, 그리고 배신이 어디까지 다다르는지 탐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줄리언 반스 [Julian Barnes] (현대영국작가사전, 영국문화원 문학 본부, 위키미디어 커먼즈)

작가의 소설을 읽어본 적 없으니 뭐라 할말이 없지만, 적어도 이 책(산문)은 가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이라 할만 하다. 그러니 뒤샹의 변기작품 '샘'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 에세이가 내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 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얀 레이스 셔츠를 받쳐입고 전신을 빨간 코트(가운)으로 감싼 남자 포치 만큼이나 줄리언 반스의 에세이는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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