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읽는다 리스타트 한국사 도감 - 한국사를 다시 읽는 유성운의 역사정치 지도로 읽는다
유성운 지음 / 이다미디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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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 다시 읽는 유성운의 역사정치

역사에서 정치를 읽고, 정치에서 역사를 읽는다

역사관련 책을 읽으며 길치였던 내가 지도를 자주 보게 되었다. 여전히 길은 헤매곤 하지만 역사서를 볼때 지도의 필요성은 충분히 깨닫게 되었다. '지도로 읽는다' 시리즈는 제목으로 일단 끌리는 책이었다. 역사와 지도 라는 불가분의 관계를 도감으로 표현한 책이라니 두말할필요없이 호기심이 일었다. 게다가 전에 읽은 '지도로 읽는다' 시리즈의 한 책이 일본저자의 책인줄 모르고 읽었다가 적잖이 실망했었는데 이번책은 저자에 대한 안심이 다시 한번 이 시리즈에 손을 내밀게 했다.

저자는 국내 유명 신문사의 기자다. 역사를 전공했으나 정치부 기자가 되어 이 두 분야가 자연스럽게 융합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중앙일보' 지면과 온라인에 연재됐던 글들을 대폭 보강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을 좀 더 충실하게 다듬고 그래픽 지도와 도표도 보완했다고 한다. 칼럼을 묶은 대부분의 책들이 원래의 글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아 대부분 짧고 가벼운 경향이 있는데, 이 책은 내용을 보강하여 내실을 다진 성의가 확연히 티가 났다.

국내 역사서들이 대부분 조선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듯이 이 책도 한국사도감 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사라기 보다는 조선사에 치중한 책이다.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이 삼국시대, 2장이 고려시대 그리고 3장에서 6장이 조선시대이다. 애초에 칼럼식의 글이라 연대기식 서술이 아닌 주제에 따른 글의 모음이다보니 역사를 흐름으로 보기 보다는 중요한 포인트들을 상기시켜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다른 조각천을 이어붙인 한장의 조각보 이불 같달까. 하나하나 다른 조각천의 무늬처럼 제각각의 흥미로운 주제들이 툭툭 튀어나오니 굳이 아귀가 맞게 꿰어 맞추기 보다는 제각각의 이야기 자체만으로 재미있게 읽혀지는 책이었다.

우리는 흔히 단군의 자손이라고 말하지만, 삼국의 건국 시조 중 누구도 자신을 단군과 연결 지은 적이 없다. 왜 그럴까. 누구도 그런 의식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반도가 단일 세력이 아니라 토착민들이 석탈해처럼 외지에서 한반도에 들어온 여러 구성원과 함께 나라를 세우고 만들어갔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역사는 그런 다양성과 역동성 위에서 기초를 쌓아 올리면서 닻을 올렸다. (p. 29)

석탈해 설화와 시베리아 퉁구스족의 설화가 연결되고, 백제의 비류와 온조 건국 설화가 각각 다른 이유나 '왜' 라고 일컬어진 지역이 지금의 인식과는 다를 수 있다는 주장등 한반도에서 흥망성쇠를 이루었던 나라들의 발자취를 살피다 보면 우리의 시작이 얼마나 다양성을 포함하고 있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고보면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을 품은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우리는 왜 그런 환상?!을 품게 된 것일까...

당 태종이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연개소문의 숨은 지략 덕분일수도 있다는 것이나, 백제가 일본과 밀접한 관계라서 백제 멸망기에 일본원군이 왔던 것이 아니라 당시의 권력현황을 일본이 잘 파악했기 때문이라거나, 처용설화가 페르시아의 역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등 신문에 실렸던 기사였던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풍부해서 읽는 재미가 있었는데, 이 밖에도

김<金)씨를 '금'이 아닌 '김'씨라고 발음하게 된 것은 우리 역사에서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중 하나다. 분명 한자 '金'은 '쇠 금'이라고 배우고 있는데, 김씨 성에서만 유독 '김'이라고 발음하기 때문이다. (p. 90)

쇠금 자를 쓰면서 왜 성씨에서는 김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하는 의문 같은 역사적 상식을 흔드는 질문들 예를들어, 왕건의 훈요십조에서 호남차별을 유훈으로 남겼다고 볼 수 있을까, 서희가 정말 담판만으로 강동6주를 챙긴것일까, 일본이 고려를 신라와 마찬가지로 본 이유와, 세계를 재패한 몽골의 지배하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고려가 예외적으로 특별한 지위를 누리게 된 원인등 유명한 역사 이야기들이 당시의 배경을 알고 나면 전혀 다른 결론을 얻을 수 있다는 점들은 유익하기도 했다.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는 조선 국왕, 조선 사림, 임진왜란, 조선 사회 로 나누어 역사적 흥미를 유발하는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경복궁의 풍수를 둘러싼 맏아들 잔혹사와의 연관성, 자주국방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세종이 실제 행했던 사대외교가 현재 대통령 당선시 방미일정을 먼저 잡는 것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조선에서 개발된 연은개발법이 조선과 일본의 명운에 어떻게 상반된 영향을 주었는지, 금주령과 농업과의 관계, 이황의 자수성가로 부자된 스토리, 영화 남한산성에서의 역사왜곡 등 신선한 관점들이 흥미롭게 읽히면서도 사림파들의 논쟁점을 정리한 두 도표는 조선의 붕당을 깔끔하게 정리하여 알아두면 좋을 역사적 가치가 있었다.

'사칠논쟁' 과 '예송논쟁' 과 함께 조선 지성사의 3대 논쟁으로 꼽힌다는 '호락논쟁'의 결과에 따라 오랑캐라고 부르며 금수려 여긴 청나라에 대한 인식이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며 불필요한 논쟁인줄만 알았던 조선시대의 논쟁들이 새롭게 보이기도 하고, 양반이라는 단어가 처음엔 특권 계층이 아니라 그저 '관료집단'을 가리키는 대명사라서 대립개념은 무직자였을 뿐이었는데 후기로 들어오면서 변질된 배경이나 조총이 날아가는 새도 잡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 같은 내용을 읽으며 명사의 의미를 새로 알게 되기도 했다.

임진왜란의 이런저런 뒷얘기들을 읽으면서 새로 알게 되는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선조는 나쁜 임금인것 같다. 그 좋은 머리를 자신을 위해서만 쓰지 말고 임금답게 백성을 위해 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꼬.... 하긴 뭐 '만약에' 라는 가정을 역사에 세운다면 어디 한두군데 세우고 싶겠냐만은....

조선사의 비중이 크다보니 당연히 일본사에 대한 내용도 적지 않게 등장하는데, 최근 읽었던 '일본인 이야기' 가 생각나면서 예전보다는 좀더 일본의 역사적 이해관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일본은 우리와 너무나 달랐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었지만...

흥미로운 주제들에 대해 기자다운 글빨로 쉽게 풀어진 이야기들은 재미있게 읽히면서도 현실정치를 생각나게 했다. 저자가 직접적으로 현실정치와 연결지은 문장들을 보면서 그럴때도 있지만 꼭 그런 문장들이 아니어도 역사라는게 워낙 현실을 반추하게 만들다보니... 예전엔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현실을 보며 한숨만 짓곤 했는데, 역사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한숨뒤에 안심 혹은 기대가 생기곤 한다. 역사에서 하나도 배우지 못한것 같지만 아니다, 지금은 과거와 분명 다르다. 나는 언제부턴가 역사가 늘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역시 역사서는 꾸준히 읽어야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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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SF #2
정세랑 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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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지금 이곳 너머를 말하는 장르이지만

SF라는 장르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이 현재성이 갖는 가능성을 깊이 고민하여

오늘날 한국 SF를 가능한 한 모든 방향에서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책을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표지 뒷면 내용-

 

 

SF를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국내 SF작가들에 대해 내가 너무 무지했었구나를 알았다. 외국작가들의 SF소설에 빠져서 그 작가들의 상상력을 선망하면서 간혹 읽을 기회가 있었던 국내 SF작가들의 소설 몇 편들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응원의 박수를 쳤던 것이 어쩌면 그런 나의 무지가 저지른 오해였을 수도 있겠다. 우리의 SF는 아직 이라는 그런 오해?!

국내 유일의 SF 무크지 라는 타이틀을 보면서 정작 나의 눈길을 잡았던 것은 정세랑 이라는 이름 석자 였다. 최근 읽었던 '피프티피플' 소설에서 작가에게 홀딱 반해있던 터라 이런 작가가 편집위원인 잡지라면 믿고볼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인트로 글에서 역시나 그런 믿음을 다질 수 있었다.

읽으면서 보니 이 책은 무척 다양한 장점을 갖고 있었는데 그러한 장점들이 모두 SF로 연결되어 있었다. SF잡지이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는데 그 다양한 시도들이 책이 아니라 '잡지'라서 가능했겠구나 싶어서 '오늘의 SF'의 필요성이 자연스레 느껴졌다. 다양한 글자크기의 변형, 흑뱅의 조화 같은 편집틀의 신선함부터 소설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에세이, 작가론, 인터뷰, 칼럼, 리뷰 등 국내 SF를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형식의 글까지 모두 '미래적' SF 의 '지금'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어 뜻깊었다.

꽉 찼지만 한 손에 쥐이는 이 잡지가 아직 오지 않은 더 나은 날들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배율 적절한 망원경이면 좋겠다. (p. 9)

인트로글 속 정세랑의 이 한 문장 만으로도 '오늘의 SF'의 가치는 충분히 표현되었다고 보지만, 이 무크지를 처음 읽어본 나의 느낌들을 기념하며 사족이겠으나 그래도 조금 남겨놓아 보려 한다.

에세이 는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전삼혜의 '위치스 딜리버리'와 함께하는 분당산책을 쓴 전혜진의 글은 북리뷰인듯 아닌듯 SF소설에서 현실공간이 줄 수 있는 묘미를 새롭게 깨닫게 해주었고, 'SF를 쓴다는 것, SF작가로 산다는 것'을 쓴 박문영의 글은 수줍고 소심하지만 SF소설가로 살아가고 있는 솔직한 마음의 표현들이 SF가 아니어도 소설가로서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 많은 작가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틱 코너에서는 '듀나론-모르는 사람 많은 유명인의 이야기' 라는 작가 듀나에 대한 작가론이 펼쳐지는데 글의 제목이 정말 적절하다 싶었다. '듀나' 라는 작가명은 나도 수차례 들어봤기에 유명작가는 맞는 것 같은데 정작 듀나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는 작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듀나론' 이라는 글을 쓰기 위해 예전에 모두 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작품 전체를 다시 읽는 데 꼬박 몇 달을 소요했어야 할만큼 듀나의 작품은 많았다. 지금까지 27년간 발표된 작품이 120편이니 앞으로 더 발표될 작품들까지 생각한다면 정말 대단한 작가이긴 한것 같다. 이름만 듣다가 이렇게 작가론까지 읽었는데 이제는 나도 듀나의 작품세계로 들어가봐야 하는 것이 맞는데... 현실적 시간의 제약이;;; 이 마음의 부채감을 어서 떨쳐낼 수 있기를!

인터뷰는 앞 뒤 로 두 편이 실렸는데 이다혜 기자가 만난 민규동 감독과 최지혜 편집자가 만난 김창규 작가의 대화이다. 민규동 감독이 늘 SF영화를 꿈꾸었다는 것을 알던 모르던 이다혜 기자의 인터뷰는 늘 맛깔나게 읽히는 재미와 톡쏘는 촌철살인 멘트가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김창규 작가의 작품들은 (미안하게도) 내가 몰랐던지라 읽어야할 책 목록을 더 두툼하게 채워놓는 것으로 미안함을 대신해본다.

이 책의 가운데 부분 두툼하게 검정종이로 인쇄된 부분들이 내가 고대하던 SF단편 들이 차지하는 곳이다. 검정바탕에 흰 글씨들이 SF라는 장르와 잘 어울리면서 생각보다 눈도 편안해서 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정소연 작가의 '수진' 은 여섯명의 수진을 만나게 되는 미정의 삶이 로봇 이라는 SF적 소재를 아무렇지 않게 여길만큼 삶의 현실감들이 돋보였다.

문이소 작가의 '이토록 좋은 날, 오늘의 주인공은' 은 가능할 것 같은 아니 가능해졌으면 싶은 SF적 장례문화를 제시함으로써 '상상이 현실로 된 순간'들을 다룬 책을 생각나게 했다. SF소설에서 등장한 기술들을 과학이 연구했을때 그 시너지가 얼마나 큰지 우리는 체감하지 못하지만 알고나면 놀랄 것들이 그동안 많았고 앞으로도 더 많을 것이니 개인적으로 이 소설속 기술이 어서 개발됐으면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고호관 작가의 '0에서 9까지' 는 인트로글에서 정세랑 작가의 소개를 보며 가장 기대했던 작품이었는데 역시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SF소설을 읽으면서 이렇게 박장대소 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해준 작품이었다.

"사람이 아무리 자기 의지가 있다고 해도 뇌도 모종의 알고리즘으로 작동하는 거라 패턴을 보여야 하거든요? 선배는 안 그래요. 선배는 보통 사람과 달리 뇌에 그런 알고리즘이 없나 봐요. 선배는 무슨 짓을 해도 진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인 거예요. 어쩌면 진정한 자유의지를 지닌 사람일지도 몰라요. 진정한 자유인" (p. 98)

다시 생각해봐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물론, 나름 비애가 있긴 하지만... 무겁게 읽히지 않아 더욱 좋았다. 앞선 웃음들이 읽는이에 따라 소소했다면 아마도 누구나 마지막 멘트에 가서는 그야말로 한번 크게 웃게 될 것이다.

"간단합니다. 0과 1 중에서 아무렇게나 하나를 골라서 계속 입력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p. 115)

김혜진 작가의 '프레퍼' 는 단편소설이 줄 수 있는 서사의 매력을 잘 전달해준 작품이었다.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본능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메세지까지도.

손지상 작가의 '인터디펜던트 바로크' 와 배명훈 작가의 '임시조종사' 는 그야말로 실험적인 작품이란 무엇인가를 알게 해준 작품들이었다. 한번 읽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지만, 나름의 독특한 뭔가 있어보이긴 하기에 다시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다시 읽게 될지 어쩔지는;;; 이 또한 무크지 라는 잡지의 매력이 아닐까. 골라 읽는 재미! ^^

황모과 작가의 '스위트 솔티' 는 SF가 미래사회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재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자연파괴나 우주이주 같은 미래적 요소가 있긴 하지만 '난민' 이라는 현실적 주체들이 중심이 된 서사가 결코 미래적으로만 읽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름과 언어의 다양성이 주는 자아의 개념에 대한 생각꺼리들은 SF소설을 읽으면서 지금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바다위에서 태어난 내게 사람들은 늘 출신을 물었다.

나는 배 위에서 태어났고 엄마와도 세 살 때 헤어졌으므로 출신은 바다거품나라도 어디도 아니고 바로 이 배라고.

엄마가 배 위에서 몸을 풀었고 나는 진주 라는 뜻의 '무티아라'라는 이름을 얻었다. (p. 173)

그녀가 나를 솔티라고 부르며 불평했다. 솔티라는 말 속에 바다 냄새가 묻어 있는 것 같았다.

매일 창고에 드나들면서 린다는 솔티라는 호칭 앞에 스위트를 붙이기 시작했다. 스위트 솔티. 그게 나의 새로운 이름이 되었다. (p. 188)

 

한민족의 등장과 부산이라는 현실공간이 한국을 연상케하면서 SF와 현실이 섞인 묘한 재미를 주고 있었는데 그런 현실감과 연결된 고향에 유달리 애착을 갖는 인간의 본능?!에 대해 되묻게 되는 것이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내게 남기는 메세지였다.

고향이 어디든 우리는 떠나온 존재였다. 언제든, 결국엔 떠나야 했다. 그리하여 또 다른 삶을 이어 붙여야 한다. (p. 197)

다양한 단편 소설들에 이어진 '칼럼' 도 다들 너무 괜찮은 글들이었다. 특히나 '한국 SF의 또 하나의 줄기, 순정만화' 라는 글은 그야말로 공감 백퍼!

한국의 SF는 1920년대부터 시작되어 1960년데 한낙원을 중심으로 여러 작가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창작되었으며, 최초의 SF 작가 단체인 'SF작가클럽'이 1969년에 결성된 것만 보더라도 한국 SF의 역사가 짧다는 이야기는 하기 어려울 것이다. (p. 275)

PC통신 이라는 신물물이 등장한 시대부터 아마 본격적인 문학변동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만 보더라도 1988 과 1994 시리즈의 햇수는 불과 6년이지만 드라마가 보여주는 문화의 격차는 굉장히 크다. 그 중심에 PC통신이 있었다. SF라는 장르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

한국 순정만화 작가들에게도 SF에 대한 역량과 열망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강경옥의 '별빛속에'(1987~1990)가 대성공을 거두었다. (p. 276)

'별빛속에'의 성공 이후 작가들의 열망과 시장성을 확인한 출판계의 수요, 그리고 순정만화 전문 잡지안 '르네상스'의 창간(1988)이 맞물리며, 한국 순정만화계에서는 SF걸작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신일숙의 '1999년생' , 김진의 '푸른 포에닉스' , 김혜린의 '아라크노아' , 황미나의 '레드문' 등 순정만화의 거장으로 꼽히는 작가들이 줄지어 SF장편을 발표했다.

한국SF 순정만화에서는 역사와 왕권, 국가의 운명이나 반역, 전쟁과 같은 선 굵은 고전 영웅 서사의 형태로 변주되었다. 이들은 SF는 남성의 이야기라는 당대의 편견을 넘어, 적극적으로 여성 주인공들을 선 굵은 영웅의 운명으로 밀어 넣었다. (p. 277)

만화 평론에서 한국 순정만화 SF에 대해 적극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바로 이 시기, 이 작가들에 국한해서다. 마치 일부 거장만이 순정만화 속에 SF를 담아냈으며, 그것이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는 듯이.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순정만화는 당시 대학강서 주목받던 여성학,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아 여성들이 창작하고 여성들이 향유하는 매체로서 그 깊이를 더해 간다. (p. 278)

순정만화는 여성의 장르로서 만화계 내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평단에서는 순정만화의 성취를 종종 무시했고, 출판사들은 여성작가와 남성작가의 원고료를 차별했다. 순정만화계에서 꾸준히 다양한 소재와 형태를 갖춘 SF작품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SF는 남성의 장르' 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갖고 있던 일부 팬들은 '순정만화치고는' , 'SF의 탈을 쓴' 같은 경멸적인 수식어와 함께 '진정한 SF가 아닌 것 같다'라는 말로 깎아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순정만화는 SF를 통해서 차별받는 이들의 이야기에 먼저 주목했다. (p. 279)

일단, 이 칼럼을 쓴 전혜진 작가에게 박수를!

구구절절 어찌나 옳은 말이던지 ㅎㅎ 최근 순정만화 컬러링북을 통해 추억에 빠져있던 내게 다시한번 순정만화의 가치를 상기시켜준 글이었다. 강경옥의 '별빛속에' 는 내 책장 한켠에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순정만화 소장본세트 중 하나다. 르네상스 뿐만 아니라 댕기, 화이트 까지 만화잡지를 손꼽아 기다리던 시절, 강경옥을 비롯한 신일숙, 김진, 김혜린, 황미나 등의 작품들을 얼마나 즐겨 읽었던가. 만화방에 가면 으례 순정만화코너가 여성전용자리 인것처렴 여겨지곤 했다. 수많은 무협지들과 챔프만화들 속에서 작게나마 마련되있던 순정만화코너가 어찌나 좋았던지 지금도 가끔 만화카페에 가게되면 순정만화 코너를 찾아보곤 한다. 여하튼, 나를 SF의 세계로 입문시켜준 것은 순정만화였다.

SF소설을 즐기는 이라면 한번쯤 언급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스타워즈' 시리즈를 생각나게 하는 'SF와 과학기술 그리고 우주개발' 이라는 유만선의 칼럼 과 'SF와 여성의 몸, 모호함을 선명하게 그려내다' 라는 이은희의 칼럼도 인상적이었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았던 글은 전혜진의 칼럼이었다. ㅎㅎ

도대체 아이를 낳아 기를 일이 없는 로봇들이 여성형이라는 이유로 자록한 허리와 넓은 골반을 가진 형태로 디자인될 이유가 무엇이며, 볼링공처럼 커다란 가슴을 매달고 있을 이유는 또 무엇일까. 많은 SF영화와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남성형 로봇들이 꽤나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는 것과는 달리, 여성형 로봇들은 둥글고 부풀어 오른 가슴과 엉덩이의 로봇들을 굳이 성적이형을 닮도록 따로따로 디자인하는 것 자체가 쓸데없는 자원 낭비에 가까움에도, 굳이 여성형에게만 전형적인 신체적 특징을 부여하는 것은 무슨 심보일까. 남성형 로봇에게서 남성 신체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인 외부 성기는 굳이 감추어 평평하게 만들면서 여성 신체의 특징을 한껏 적나라하게 드러낸 여성형 로봇의 몸을 만들고, 로봇이라는 이유로 더욱 거리낌없이 그 융기들을 드러내게 한다.

이제는 안다. 인간을 인간이 아닌, 여성이라는 성별의 한 부류로만 바라볼 때, 얼마만큼 인격을 거세하고 존재 가치를 유린할 수 있는지 말이다. 이렇게 여성의 몸에 덧씌워진 지나친 생식주의적 관점은 나아가 재생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성적인 행동을 모두 불결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시키며, 이러한 행동을 하는 여성의 몸 역시도 그와 비슷하게 가치 없는 것으로 대우해도 상관없다고 여기게 한다. (p. 294)

이 무크지를 읽기전 가장 기대했던 코너는 단편소설들이었지만,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고 읽고나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칼럼의 글들이었다. SF분야는 그야말로 이루어지지 않은 가상의 세계를 다루기에 현실에서 문제라고 여겨지던 것들을 고칠수 있는 세계이자 미래에서 있었으면 싶은 것들을 이루어내는 세계이다. 따라서 어쩌면 가장 지금의 현실을 가장 잘 표현해줄 수 있는 것이 SF소설이 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봇의 여성형 신체에 대한 생각은 그동안 너무나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여왔구나 싶어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어슐러 르 귄 의 '어둠의 왼손' 에서 처럼 무성의 존재를 로봇 형태로 생산하지 않았던 지난 시간들은 결국 권력때문이었던 것일까...

가장 마지막 코너인 '리뷰'는 5편의 신작SF에 대한 서평들인데, 책을 읽고 서평쓰기를 즐겨하는 내게 전문적인 '북리뷰'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듯 했다. 그리고 역시나 찾아온 깨달음, 내가 갈길이 멀구나;;;

비정기적 무크지 이기에 '오늘의 SF' #3 이 언제 나올지는 알수 없다. 하지만 SF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무크지를 차례 한장만 봐도 한코너만 읽어도 그 소중함을 충분히 알게 될 것 같다. 소설을 읽는 재미뿐만이 아니라 SF의 다양한 모든 면들을 두루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글을 통해 잡지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는 이 무크지가 앞으로도 꾸준히 발행될 수 있기를 마음으로 열렬히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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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강갑생 지음 / 팜파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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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의 길을 다니는 비행기, 자동차, 기차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재미있는 교통 이야기

 

 

운전면허는 커녕 자전거도 제대로 못타는 나로서는 교통수단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하지만 과학적 관점에서 교통수단의 발달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영역이다. 그러던차에 교통전문 기자가 쓴 책이라고 하니 가독성은 보장된다고 볼수 있어 관심이 생긴 책이다.

저자는 사회부기자로 신문사에 첫 발을 내디뎠다. 건설교통부에 출입하는 기자들은 두 가지 분야로 나뉘는데, 건설은 경제부에서 교통은 사회부에서 맡는다고 한다. 기자를 꿈꾸던 시절 사회부나 정치부 기자를 그리던 저자가 교통분야로 발령받았던 순간은 뜻밖이었지만 하면할수록 교통분야에 빠져들어 교통관련 대학원공부까지 하고 지금은 명실상부한 교통전문 기자로 불리게 되었다. 관련 공부를 하면서 동시에 발로 뛰며 취재를 하던 저자가 '바퀴와 날개' 라는 연재 칼럼을 쓰게 됐고 그런 기사들이 쌓여 이렇게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왔다.

바퀴와 날개 라는 제목에서 연상되듯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교통수단들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비행기와 철도와 자동차 이다. 칼럼식 글의 모음이라서 한편한편 독립적인 글들은 교통수단의 발달사를 돌아보기도 하고 미처 몰랐던 속사정을 알려 주기도 하고 미래를 위해 고민해야할 지점들을 일깨우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호기심을 유발하는 통통 튀는 주제들이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다.

기내식에도 자본주의 논리가 극명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 다른 직업들도 그랬겠지만 승무원도 남성이 최초였다는 것, 활주로의 폐기물이 엄청나고 처리과정은 더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것, 수하물이 나오는 순서는 그야말로 복불복 이라는 것, 항공기 탑승 후 하기 를 처벌하는 개정안이 20대국회에서 임기 만료로 폐기되었다는 것, 항공유를 피치 못하게 공중에서 버려야 하는 경우가 발생해도 기화되기 때문에 환경오염을 일으키지는 않는다는 것 등 비행기 관련해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버드 스트라이크 관련한 내용이었다.

사실 얼핏 생각해보면 엄청난 크기의 항공기가 자그마한 새와 부딪친다고 무슨 충격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요. 연구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무게 1.8kg 짜리 새가 시속 960km로 날고 있는 항공기와 부딪치면 64톤 무게의 충격을 주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흉기로 변한다는 의미인데요. 다행히 순항 중인 경우에는 고도가 높아 버드 스트라이크가 일어날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p. 33)

막상 하늘을 날때는 괜찮은데 이착륙시 새와 부딪칠 확률이 높아 공항주변에 새들을 쫓기 위한 방법이 정말 다양하게 필요하겠구나 라는 공감도 그렇지만 그 충격이 저렇게 어마어마한줄은 몰랐다. 종다리 같은 작은 새 한마리가 수십톤의 충격을 줄 수 있다니... 하늘길을 새와 나누어 써야하는 비행기 입장에서 앞으로도 계속 고민스러울 것 같다.

철도이야기는 거의 기차의 역사를 읽는 기분이었는데 특히나 기찻길이 북한을 통과하게 되면 시베리아횡단열차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한 언급이 자주 있어서 이 책이 신문기사에서 바탕한 것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철도에 대한 다양한 전문적 상식을 많이 배울 수 있어 좋기도 하고 우리나라 철도의 시작이 일제시대때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때의 상흔을 알면서도 계속 이용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했다.

의외로 자동차에 대한 분량이 가장 적었는데 아마도 가장 많이 사용되는 교통수단이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으리라 예상되어서 그런것 같다. 하지만 역시나 전문가다운 속얘기를 많이 풀어놓아 주어서 대부분 신선하게 읽히는 내용들이었다.

외국에는 비보호 좌회전이 흔하지만,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많이 활용되지는 않는 듯합니다. 그런데 4색 신호등은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교통신호의 통일성을 규정하는 비엔나협약(1968년)과 맞지 않는다는 점인데요. (p. 253) 국제적으로 가장 많이 활용하는 게 3색 신호등이라면 우리도 통일의 필요성을 고려해볼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p. 254)

우리나라 신호체계가 외국과 다르다는 점은 몰랐는데 그밖에도 고속도로 대부분을 관할하는 한국도로공사에서 드론을 띄워 교통법규 위반 차량을 적발하고 있다는 것이나 직진과 우회전 차량이 맨 바깥쪽 차로를 함께 쓰는 도로에서 적색 신호에 정지해 있는 직진 차량의 뒤에서 우회전 차량이 경적을 울리며 비켜달라고 할때 직진 차량이 정지선을 넘어서 움직이면 신호위반으로 벌금을 물게 된다는 것등의 다양한 내용들은 운전자들이 알아두면 유익할 내용들이기도 하지만 비운전자인 내가 알아두어도 좋을 내용들이었다.

자동차 관련 미래문제는 아무래도 자율주행차 와 스마트 톨링 같은 첨단 기술의 현실적용 방안이었다. 비행기나 기차에 비해 변화의 체감이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자동차관련 고민거리들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논쟁이 필요해 보인다.

교통수단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흥미용으로, 교통문제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생각용으로, 교통시스템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이해용으로 등등 다양한 호기심들이 충족될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바퀴와 날개' 에 대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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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의 취약성 - 왜 백인은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토록 어려워하는가
로빈 디앤젤로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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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플로이드 과잉진압 사망사건 이후

불타오른 반인종주의 물결의 횃불이 된 책

유색인의 짐이자 그들 문화의 쟁점이던 인종주의 논의에서

완전히 새로운 접근으로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문제작

 

 

다양성, 다문화 이런 단어들이 활발하게 사용된지는 따져보니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다. 아직 적응중인 이 단어들에 대해 우리는 이미 너무 익숙하다고 쉽게 판단내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식은 아직 다양성을 충분이 인지하지 못하고 다문화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지 못함을 최근 읽은 사회관련 책들에서 기존의 안일함을 깨우치게 되곤 했다. 언론의 개소리에 대해서 한일관계의 쓴소리에 대해서 느낀바가 많았었는데 이번 책은 인종주의에 대한 편견 깨뜨리기다.

~의 라고 하면 소유격으로 이해된다. 백인의 취약성 이라고 하면 백인이 가지고 있는 약점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취약성'은 좀 다르다. 원제도 그냥 WHITE FRAGILITY 백인취약성인데, 원제처럼 그냥 백인취약성 이라고 불러야 할 백인들이 주로 갖고 있는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의 취약하다라는 의미는 약함보다는 무지나 왜곡으로 인한 편견이나 고집에 좀더 가깝다고 보여지므로 소유격으로 이해하면 좀 곤란하지 싶다. '백인취약성'은 미국내 인종갈등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백인들의 특성이라서, 이 특성은 백인들의 약함이 아닌 강함을 강화시켜 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디앤젤로는 양심을 흔드는 외침으로 중요한 반인종주의 백인 사상가들의 대열에 합류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녀가 같은 백인 형제와 자매의 양심을 흔든다는 것이다. WHITE FRAGILITY 은 진정으로 생산적인 개념이다. 우리로 하여금 백인이 그들 자신의 백인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백인성이 아주 오랫동안 인종 탐지기에 걸리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달라는 요구에 그들이 얼마나 방어적으로 반응하는지를 더 깊게 생각하도록 자극하는 결정적인 개념이다. (p. 11)

디앤젤로는 백인의 정체성이 미국인의 정체성이 되어가는 흐름-인종주의적 신념이 국가적 신념이 되어가는 흐름-에 정면으로 맞서 미국인이라는 것이 곧 백인이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적어도 완전히 그런 의미는 아니고 주로 그런 의미인 것도 아니라며 목청껏 주장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해 보인다. (p. 12)

저자는 백인성 연구 및 다문화교육을 전공하고 가르치고 있는 학자이자 강사이다. 이 책은 인종주의 편견에 물들어있는 미국내 백인을 독자층으로 겨냥하고 쓴 책이라서 추천사를 쓴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여하튼 추천사에서 표현하듯이 미국인들이 외면해왔던 자신들의 치부를 끄집어내고 흔들어대는 것을 목적으로 한 책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당선 이후 영미권에서 나온 사회문제 관련 책들은 용감하다고 느껴질 만큼 직설적으로 읽힌다. 그들의 문제의식이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려나 의구심이 들수도 있지만 막상 책을 읽어보면 우리의 현실과도 닿아있음이 절실히 느껴지기에 국내에서 잘 발견하기 힘든 이런 용감한 책들이 나는 늘 반갑곤 하다.

장벽에 부딪힌 집단을 거명하지 않는다면 이미 투표권을 가진 집단에게 유리할 뿐이다. 투표권을 통제하는 집단이 누리는 권리를 보편적인 권리로 가정하는 셈이다. 권리를 가진 사람들과 갖지 못한 사람들을 거명하는 행위는 불의에 도전하는 우리의 노력을 인도하는 지침이다. (p. 17)

나의 바람은 여러분이 스스로를 백인으로 의식하는 사람들이 인종을 주제로 대화하는 것을 그토록 어려워하는 이유에 대한 통찰 그리고/또는 일상 생활에서 요동치는 인종의 바다를 항해할 때 여러분 자신이 어떤 인종적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는 것이다. (p. 21)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었을때 여성들이 자신들도 동등한 인간이라고 주장하며 여성이라는 집단을 거명하고 나서야 남성지배집단은 투표권을 부여했다. 장벽에 부딪힌 집단이 있을때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흑인과 인종주의 라는 단어를 미화하고 덮어두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이름짓고 직시하는 것이 출발점이라는 저자의 말은 다른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듯 싶다. 따라서 저자가 알려주는 통찰을 위한 여정을 읽어나가는 과정은 우리 사회의 소외집단에 대한 통찰을 시작하는것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백인의 취약성을 촉발하는 것은 불편함과 불안이지만, 이것을 낳는 것은 백인이 우월하고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의식이다. 백인의 취약성은 그 자체로는 약점이 아니다. 실은 인종을 통제하고 백인의 이점을 보호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p. 24) 유색인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수많은 백인을 보면서 우리가 유색인보다 더 많은 권리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이로운 체제에 투자하는 우리의 모습도 보았다. 또 우리가 이 모든 점을 부인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이런 역학이 거명될 때면 얼마나 방어적으로 나오는지를 보았다. 요컨대 나는 우리의 방어적 태도가 어떻게 현재 인종 상황을 유지하는지를 보았다. (p. 27) 실제로 우리는 인종에 대해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려 시도할 때 걸핏하면 침묵, 방어적 태도, 논박, 확신과 같은 반발의 여러 형태로 백인의 취약성을 금세 드러내곤 한다. 이런 반발은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니라 사회적 구속력이다. 이 사회적 구속력은 한층 생산적으로 관여하는 데 필요한 인종 지식을 얻지 못하게 막는 한편 인종 위계를 강력하게 유지하려는 기능을 한다. (p. 33) 인종주의의 구속력을 저지하는 것은 평생 지속해야 하는 일인데, 인종주의적 준거틀로 우리를 길들이려는 구속력이 항상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학습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p 34)

저자는 사회학자로서 끊임없이 분석한다. 자신이 미국에서 백인으로 살아오면서 경험했고 자신에게도 강하게 존재했던 인종주의에 대해 되짚어보고 사람들에게 강의하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반발과 수시로 논쟁하면서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지치지 않는 열정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백인은 우리의 인종 프레임에 관해 숙고하기를 유독 힘들어하는데, 인종적 관점을 갖는 것은 곧 편향되는 것이라고 배우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믿음은 우리의 편향을 보호할 뿐인데, 우리에게 편향이 있음을 부인함으로써 결국 그런 편향을 검증하거나 바로잡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p. 38)

백인성은 근본적인 한 가지의 전제에 의존한다. 바로 백인은 인류의 기준 또는 표준이고 유색인은 그런 기준에서 벗어난다는 규정이다. 백인은 백인성을 인정하기 않거니와, 백인의 준거점을 보편적인 준거점으로 상정하고 누구에게나 강요한다. 백인은 누군가의 삶과 인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특정한 상태로서의 백인성에 관해 생각하기를 아주 힘들어한다. (p. 61)

보편적이라고 일반적이라고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가치들에 대한 숙고,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지적을 받고 생각하기를 권유받았을 때의 불편한 마음, 이런 마음들에 대해 우리도 종종 경험해오지 않았던가? 일단, 이 책의 주제인 백인성에 대해서만 국한시켜 보더라도 우리는 백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백인의 시각으로 외국인들을 판단하는 것에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백인들이 보면 우리도 유색인인데!

인종적 예외 사례에 대한 서사는 백인의 제도적 통제력이 유지되는 동시에 개인주의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강화되고 있는 현실을 가린다. (p. 63) 이런 서사에 기대어 우리는 사회의 제도 안에서 이루어내는 우리의 성공을 자축하고, 성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다른 집단들을 비난한다. (p. 65)

인종뿐만이 아니라 소외집단이 인정을 받았을 때는 대부분 개인적 능력으로 인정받게 마련이고 예외적인 성공담으로 회고되기 마련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경험을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했을때 뉴스화되고 특별한 경우로 회지되는 것 이것은 결국 그 특별한 경험의 사례자가 그동안 소외되어 왔다는 것에 대한 반증인 셈이다. 저자가 사례로 든 것처럼 백인 남성이 야구선수가 되는 것은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흑인 남성이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면 뉴스거리가 된다. 나아가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소외집단을 망각시키고 개인적 능력주의로 문제점을 환원시키고 축소시키게 된다. 소외되는 계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능력껏 하면 된다는 식으로 간단히 치부해버리고 말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차별을 감추어버리고 모른척해버리곤 나는 편견이 없는 사람이에요 말하게 된다. 하지만 출발선이 달라도 너무 다름을 알아야 한다.

1963년 마틴 루서 킹 박사가 일자리와 자유를 위해 워싱턴으로 행진하던 중에 행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에 포함된 문장 - 언젠가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평가받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문장-이 특히 백인 대중의 이목을 끌었는데, 킹의 표현이 인종 갈등 문제에 간단하고도 즉각적인 해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바로 인종을 보지 않는 척하는 방법으로 인종주의를 끝내는 해법이었다. 그리아혀 '색맹'이 인종주의의 해결책으로 홍보되었고, 백인은 자신이 인종을 보지 않는다고, 설령 보더라도 자신에게 인종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우기기에 이르렀다. 분명 시민권 운동은 인종주의를 끝내지 못했다. (p. 86, 87)

이런 방어적 태도는 인종차별은 고의로만 저자른다는, 그릇되지만 만연한 믿음에 뿌리박고 있다. 이렇게 내면화된 암묵적 편향을 이해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결국 회피적 인종주의에 이르게 된다. (p. 89)

인종색맹주의, 기막힌 표현이었다. 저자는 트럼프처럼 직접적으로 백인우월주의를 표방하는 계층에게 이 책을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쪽에게 이 책을 읽기를 권하고 있다. 나름 진보적이라 생각하고 인종주의가 나쁘다고 생각하며 자신은 인종을 보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말 그런 것 같냐고 되묻고 있다. 저자의 질문에 no 라고 답했던 사람들일지라도 이 책을 읽어나갈수록 점점 마음이 불편해지다가 급기야 화를 낼지도 모른다. 뜨끔하고 찔리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인종 색맹이라는 이상에 더 헌신하면서 인종 문제를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문제로 남겨두고, 인종 간 불평등을 줄이는 조치에 반대한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백인 밀레니얼 세대의 41퍼센트가 정부가 소수집단에 지나치에 신경을 쓴다고 생각하고, 48퍼센트가 백인에 대한 차별이 유색인에 대한 차별만큼이나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p. 97)

지금의 미국내 혼란의 주된 갈등축은 백인노동자계급의 분노라고, 그동안의 역차별에 대한 저항이라고 표현되는 것을 자주 보았다. 하지만 저자는 다양한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반박한다. 그런 수치들을 보고 있노라면 역시나 몰라서 당하는 것이 참 많은 세상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낀다. 무엇보다도 어린 세대의 보수화가 세계적이구나 싶었다. 자신들의 피해가 누구로 인해 왜 생긴 것인지 제대로 파악해야 할텐데...

백인 노동계급은 블루칼라 분야에서 언제나 꼭대기 위치(감독관, 노동조합 간부, 소방서장과 경찰서장)를 지켜왔다. 그리고 세계화와 노동자 권리 약화로 인해 백인 노동계급이 심대한 타격을 입었음에도, 백인 엘리트층은 백인의 취약성을 이용해 백인 노동계급의 분노를 유색인에게로 돌릴 수 있었다. 그 분노는 분명히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데, 경제를 통제하여 인류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소수(백인)에게 많은 부를 집중시키고 있는 주역은 백인 엘리트층이기 때문이다. (p. 117)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라는 구호(트럼프의 대선 슬로건)는 당시 백인 노동계급의 처지와 관련해 비난의 화살을 백인 엘리트층에게서 여러 유색인에게로 돌림으로써 백인을 겨냥한 인종적 조작의 효과를 대폭 높였다. (p. 118) 소수집단 우대 정책은 적격한 소수집단 지원자에게 백인 지원자와 동등한 구직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방편이다. 이 정책은 융통성 있는 프로그램이다. 흔히들 생각하는 할당 인원수나 요구조건은 없다. 더욱이 초기에 이 프로그램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소수집단 우대 정책의 최대 수혜자는 백인 여성이다. (p. 165)

실체없는 분노였던 것이다. 소수집단 우대정책의 수혜자가 누구인지 아니 있긴 했었는지 확인한 바도 없으면서 역차별을 당했다고 분노한 셈이다. 상위1%의 부를 더욱 부풀려준 것도 모르고 하위계층이 자신들이 가져야 할 것을 빼앗아갔다고 오해한 것이다. 늘 그랬듯 다수가 소수에게 이용당한 것이라고나 할까.

인종주의를 개별적·개인적·의도적·악의적 행위로 축소하는 지배적 패러다임은 백인이 자신의 행위를 인종주의로 인정할 가능성을 낮춘다. (p. 141)

인종주의처럼 민감한 무언가와 관련해 이것 아니면 저것 이분법으로 질문할 경우 우리는 결코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나는 '이 주장은 대화에서 어떻게 기능합니까?'라고 묻는다. (p. 144)

우리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라는 말을 들을 수 있고 실제로 자주 듣지만,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는 데 성공할 수는 없다. 인간은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기를 원하지 않을 텐데, 사람마다 욕구가 다르고 우리와 맺는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게 대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 주변에 유포되어 우리로 하여금 사람에 따라 불공평하게 대하도록 만드는 그릇된 정보다. (p. 147)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할 수도 없다. 누구나 똑같이 대한다고 공언하는 사람은 자신이 믿는 가치를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실은 반성할 여지를 닫아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p. 150)

저자는 그동안 미처 생각지 못했던 '역지사지'의 관점을 다양하게 알려준다. 인종주의자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나 행위에 대해 인종주의적 견해인가 아닌가 따져보라는 질문이나, 인간은 애초에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할 수 없다라는 문장이 뒷통수를 한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게 하면서 시원스럽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는 흑인을 위험한 사람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이 나라가 건국된 이래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 실제로 오간 폭력의 방향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런 묘사는 흑인에 대한 혐오감과 적대감을 유발하고 우리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게 하지만, 이 가운데 우리가 도덕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감정은 없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지금 백인의 집단의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p. 164) 요컨대 백인 정체성은 특히 열등성을 흑인에게 투사하는 행위와 백인 집단이 보기에 이런 열등한 지위에 의해 정당화되는 억압 행위에 의존한다. (p. 171)

흑인이 노예로 아메리카에 발을 딛게 된 이후 폭력의 방향은 분명 백인이 흑인에게로 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흑인이라면 무조건 폭력적일거라는 편견이 압도적으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흑인이 백인을 노예처럼 부려먹은 적은 단 한번도 없는데도. 이러한 프레임이 누구의 지위를 더 돈독하게 해주었던가 생각해보면 이 프레임이 왜 인종주의적인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문제는 당연시 되는 이러한 시각이 누구도 문제라고 생각지 못해왔다는 점이다.

분명히 말해두건대 '백인의 취약성'은 아주 구체적인 백인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고안한 용어다. 백인의 취약성은 단순히 방어적 태도를 보이거나 우는 소리를 하는 정도를 훌쩍 넘어선다. 이것은 지배의 사회학으로 개념화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백인의 취약성은 백인의 우월의식과 이 우월의식을 보호하고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법을 내면화하는 사회화 과정의 결과다. 이 용어는 불만을 토로하는 집단이나 그 밖에 다른 까다로운 집단에는 적용되지 않는다.(예컨대 '학생의 취약성'은 성립하지 않는다.) (p. 198)

다시 말해 백인의 취약성은 백인의 약점이 아니다. 따라서 저자가 예를 든 것처럼 학생의 약함을 빗댄 '학생의 취약성' 으로 같은 취약성 이라는 용어를 쓸수는 없다. 백인의 취약성은 백인의 지배도구이고 사회화 개념이었다. 그리고 저자는 이것을 흔들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인종적 사회화로 인해 각자의 의도나 자아상이 어떻든 간에 인종주의적 행위를 반복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인종주의가 드러나는지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계속해서 자문하는 것이다. (p. 238)

나의 마지막 조언은 이렇다. "당신 스스로 주도해서 찾으세요" 백인성의 길들임-인종주의와 무관심하게 만들고 인종주의를 지지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게 하는 길들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백인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는 훌륭한 조언이 너무나 많다. 그런 조언을 찾아라. 백인성의 무관심과 결별하고 당신이 노력을 기울일 정도로 신경을 쓴다는 것을 입증하라. (p. 247)

백인의 취약성에 집중하긴 했지만 크게 보면 '백인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동안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들은 많았다. 유태인에 대한 박해나 흑인을 비하하면서 어떤 (백인대비 모자란)고유한 특성이 있는 것 같은 표현들이나 서양에 비해 동양이 미개하다는 식의 어떤 종족에 대한 편견들... 하지만 백인만이 지니고 있는 '백인성'에 대한 분석은 그동안 접해보지 못한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특별하다. 비록 내가사는 나라가 비교적 동일한 인종들이 사는 곳이기에 미국처럼 흑백갈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배집단의 고유한 성질과 백인성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에 다양하게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는 책이었다.

유색인이 보기에 백인의 취약성은 백인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인종주의에 도전하지 않도록 하는 인종적 악순환을 유지하는 기능을 해왔다. 결국 백인의 인종주의에 도전하지 않는 것은 곧 인종 질서와 그 질서 내에서 백인이 차지하는 위치를 지탱하는 것이다. 현행 체재의 기본 설정은 인종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p. 262)

인종주의를 저지하려면 용기와 지향성이 필요하다. 저지한다는 것은 그 정의상 순종하거나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우리의 학습이 끝났다고 우리 스스로 생각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이다. (p. 263)

끊임없이 질문하고 돌아보면서 바른 지향점을 찾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안주하고 싶고 모르는 척 하는 게 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사회가 얼마나 살기 힘든 사회가 되버리곤 했는지 역사는 늘 교훈을 보여주곤 한다. 그러니 지금의 우리보다도 앞으로의 후대를 위해서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가야할 지는 분명하지 않겠는가.

ps. 읽는 내내 '선량한 차별주의자' 라는 책이 자꾸 떠올랐다. 선량함과 차별이 공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 충격받으며 읽었던 책인데, 결국 차별과 맞닿아 있는 '백인의 취약성'을 읽으면서는 그저 고개끄덕이며 읽게 된 것을 보면 그 사이 차별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가 어느정도 진척되 온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물론, 차별의 대상이 좀 다르긴 하지만 이런 주제의 책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무적이라고 희망적으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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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일월드 그래비티 픽션 Gravity Fiction, GF 시리즈 17
엄정진 지음 / 그래비티북스 / 2020년 11월
평점 :
절판


과학과 사변으로 무장한 첨단 스페이스 오페라의 개막!

 

SF 소설 시리즈가 있다는 건 볼때마다 참 반가운 일이다. GF시리즈에서 만나는 새로운 SF소설들은 늘 내게 국내 SF작가들에게 눈을 뜨는 시간을 선사해주곤 했는데 이 작품 또한 그러했다. 이번엔 하드SF 다.

방금 '인간'이라고 말했지만, 지구에 번성했던 호모 사피엔스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은 아득히 오래 전 멸종했으니까. 앞으로 내가 인간이나 사람이라고 말할 때는 나와 동등한 존재, 즉 은하 연방에 소속되거나 그에 준하는 고등 지성체를 가리키는 보편적인 호칭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연방은 출신을 따지지 않고 모든 은하계의 지성체를 평등하게 받아들였다. 신분은 오직 두 가지로 나뉠 뿐이다. 나와 같이 각 행성에서 생명체로 태어난 후 연방에 소속된 <내추럴>과 연방에서 직접 만들어낸 인공지능. 능력은 인공지능이 뛰어난 경우가 많아도 생물로 살았던 경험과 풍부한 감각을 가진 내추럴을 연방에서는 소중한 자원으로 여겼다. 그래서 신분차는 없어도 내추럴이 지휘를 맡고 인공지능이 보조하는 역할을 주로 부여받는다. (p. 13)

'싱귤래리티'를 다룬 SF소설집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서 주로 다뤘던 소재는 지구생태계의 파괴와 인간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육체는 버리되 지능만 업로드할 수 있게 된 세상을 상상하며 그 과정에서 고민될 법한 생각들을 다루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이미 그 세상이 도래한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지구 뿐만이 아니라 은하 전체적으로 지능이 업로드 되어 연맹을 이루고 있고 인공지능 또한 자연스럽게 각자의 역할을 부여받은 세상, 작은 우주선 임라나 호에 탑승한 두명은 한명은 내추럴 이자 선장이고 한명은 인공지능이자 부관이다. 은하의 이곳저곳을 오가며 측량, 탐사, 세금추심 등 허드렛일을 하던 이들의 우주행로 앞에 묘한 물체가 포착된다. 언뜻 봤을때 생명체들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그 파편 들속에서 온전한 신체를 유지한 생명체가 있었다.

유기생명체가 정보의식체로 재탄생하려면 두뇌를 스캔하여 담긴 정보를 홀로그램 데이터 포맷으로 만들고 저장장치에 담는 과정을 거쳐야 완성된다. 말했듯 두뇌를 잘라내야 함은 물론 강력한 전자파에 노출되어 뇌기능이 정지되므로 시술은 한 번밖에 못한다. 실패할 경우 원본의 기억은 영원히 소실된다. 복구는 불가능. (p. 33)

정보의식체가 된다는 말은 엄밀히 말해 기억과 정신을 옮겨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정보를 가진 복사본을 새로 만드는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유기체의 기준에서 볼 때는 본래 육체와 정신까지도-정신 혹은 영혼이라는 개념이 실존한다면- 완전히 파괴되고 사망한다. 따라서 동일한 기억이라는 정보량을 가진 정보의식체를 생전의 자신과 동일한 본인이라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은 오직 정보의식체 자신의 의지뿐이다. (p. 35)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시점을 말한다는 싱귤래리티 의 문제는 그렇게 인간의 육신이 없는 지능만 남은 존재가 여전히 인간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이 소설에서는 이미 모두가 다 정보의식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특이점이 던질법한 문제점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하드SF 라더니 소소한 개인적 고민들은 은하적 범주로의 확장속에 별로 고민되지 않고 넘어간다. 스페이스 오페라 라는 SF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이질감을 이 소설에서는 크게 느끼지 못한 것을 보면 국내작가의 작품이라서 문화적 이질감이 없었기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정도의 스페이스 오페라 라면 앞으로도 계속 관심이 갈 것 같다.

새로이 발견한 지성체 종족의 유일무이한 생존자. 그의 고향별을 찾아서 구체적인 현황을 파악하고 조사하는 임무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듯했다. 앞서 말했듯 새로운 납세자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니 정부 입장에서는 환영할 수밖에. 그래서 우리 셋은 다함게 임라나를 타고 처음 유옌을 발견했던 장소로 되돌아갔다. 여기서부터 실마리를 찾아 네모나고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유옌의 고향별을 찾는 우리의 모험을 시작하기로 했다. (p. 52)

온전히 살릴 방법이 없었기에 두뇌를 스캔하여 업로드한 새로운 생명체는 파충류과의 외형을 띤 외계종족이었다. 긴 이름을 줄여 유옌이라 부르기로 한 그 생명체는 자신의 고향별이 네모나고 평평하다고 했고 태양은 움직이지 않으며 자신들의 종족을 만든 신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존재하고 인구증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벌어진 전쟁 중 자신은 실종된 것이라고 했다. 은하 내부의 정보를 찾아봐도 알 수 없는 이 생명체와 그의 고향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임라나호는 세명으로 늘어난 탑승객을 태우고 모험을 떠나게 된다.

목격하고 있는 물체는 쉽게 말하자면.....

네모난 별이었다.

보면서도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다. (p. 74)

이곳은 그야말로 거대한 어항이라 할 수 있으니까. 네모낳고 폐쇄된 공간 안에 땅과 물을 적당히 넣어놓고 동식물의 씨앗을 뿌린 다음 내버려두면 오랜 세월 후에 만들어져 있을 법한 세상의 모습이다. (p. 92)

정말로 네모난 별이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별은 아니었다. 태양이라 여겨지는 행성을 둘러싼 거대한 레일이 있고 그 레일 위를 거대한 '네모난 별'이 달리고 있었다. 이 곳을 '레일 월드'라고 부르기로 한다.

귀하의 요청은 반려한다. 연방은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며, 향후의 추이에 따라 적절히 대응할 것이다. 귀하는 앞서 지시한 내용대로 임무를 계속 수행하라. 새로운 정보가 입수되면 다시 보고하라. 별도의 지침이 없는 한 귀하는 어디까지나 개인 자격으로 문명권과 접촉하도록 하라. (p. 152)

레일월드에는 크게 세 부족이 살고 있었다. 각자 다른 정체를 지닌 이 세 부족앞에 나타난 유옌은 오래전 있었다는 우주전쟁에서 살아돌아온 조상님이었다. 그 조상님이 외계인과 함께 고향에 왔는데, 이 외계인들은 자신들의 전쟁을 막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결방법을 찾아보자고 한다.

그런데 도움을 요청한 연방에서 온 답변은 이 행성에 개입을 반대하고 있었다. 뭔가 수상한 점이 느껴진다. 이 행성에는 분명 연방이 감추고자 하는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이다. 임라나호의 선장과 부관은 연방을 불신하게 되고 자체적으로 조사에 착수한다.

"무엇때문이죠?

우리와 대화를 나눈 외계인이 아닌 당신이 왜 굳이 우리를 도와주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있지요?" (p. 225)

연방국가체와 연합국가체와 독재군주제가 있는 레일월드에 생겨난 종교는 두 종류였다. 그중 한 교파의 대표를 만났을때 그는 자신들이 외계에서 메세지를 받고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자신들의 별이 더이상 생명체가 살 수 없을만큼 파괴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조상들이 했던 데로 전쟁이 곧 벌어질 것도 알고 있지만 또다른 방법이 있음을 믿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외계에서 온 존재들에게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총재님이야 너그러운 분이시니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우리 입장에서 당신이 얼마나 짜증나는지 알기나 해? 당신들은 제대로 된 종교단체도 아니야. 신도 모집도 안 하고 헌금도 안 받고 율법 강요도 없고 성지순례도 안 하고... 심지어 교당도 안 짓고 전 세계에 흩어진 신도가 각자 모여서 자발적으로 활동한다니, 이게 무슨 종교야? 순 점조직이지 (p. 271)

또다른 종교에서는 외계인의 존재가 몹시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러니 우여곡절끝에 성사된 대표단 회의에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어쩌면 뻔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레일 월드를 파악하고 이곳에 사는 생명체들의 문화를 알아갈수록 의문은 커져간다. 은하연방체의 기술과 다른 것이 보이지만 정작 이곳의 생명체들은 그것에 대해 모른다. 한 교파가 받았다던 메시지가 은하연방에서 보내진 것이 아님은 갈수록 확연해 보이고, 은하연방에 보고를 올릴 수록 뭔가 감추려는 태도도 뚜렷해 보였다. 이 레일월드를 만든 누군가가 있다. 누가? 왜? 무엇보다 이상한건 왜 파괴되도록 그대로 두려는 것인가?

집정관이라는 호칭부터 씨족과 가문과 자신의 이름까지 길게 이어지는 작명법부터 투표방식등 고대로마의 체제를 본뜻 정체를 우주공간에서 재현한 것도 흥미로웠고 광신도 종교집단의 태도로 비틀어 보여주는 모습들도 재미있게 읽혔다.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의 성격표현과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케 하는 것도 의미있었지만 무엇보다 새로웠던 것은 '전쟁'의 목적과 '생명존중'의 가치에 대한 확인이었다. 이렇듯 소설 한편으로 우주적 범주에서 개인의 존엄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SF만이 보여줄 수 있는 멋짐이 아닐까 ㅎㅎ

책의 말미에 작가의 후기에서 다양한 작품들에서 오마주했음을 밝힌 부분들도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2020 우주의 원더키디' 라는 예전 애니메이션 언급에서는 잠시 추억에 빠져들게 되기도 했다. 그랬지.. 그런 티비만화영화가 있었는데... 그 애니에 나왔던 주인공을 닮은 친구가 있어서 원키 라고 별명을 부르기도 했었는데... 그때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던 2020년이 지금이었네;;;

작가가 말하길, 소설안에 '2020 우주의 원더키디'를 패러디한 부분을 한군데 넣었다고 알아봐주는 독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어느 장면일꼬... 혹시 텬동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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