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단호한 행복 - 삶의 주도권을 지키는 간결한 철학 연습
마시모 피글리우치 지음, 방진이 옮김 / 다른 / 2020년 11월
평점 :
절판


2년쯤 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을 읽었었다. 그땐 로마사에 한창 빠져들려 했던 때라 오현제 중의 마지막 황제가 남긴 책이라는 것 때문에 관심이 생겨 읽게 된 책이었다. 읽으면서 거대한 로마제국의 황제가 이렇게까지 자아성찰을 하다니 대단하다 싶긴 했지만 솔직히 좀 재미가 없긴 했다. 그래서 본문이 끝나고 뒷부분에 있던 에픽테토스의 명언집을 음~ 명언이네~ 하며 그냥 흘려읽었더랬다. 그 뒤로 이런저런 로마사책들을 읽고 나서 이 책을 접하니 이제야 [명상록]을 제대로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쉽다. 책도 읽는 시기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다가오는지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책을 읽고 에픽테토스의 철학을 접하고 조만간 세네카를 읽을 예정이니 후기스토아철학을 거꾸로 읽어가게 된 셈이다. 그 사이에 보에티우스와 키케로의 책도 읽은 것이 있으니... 뭐 뒤죽박죽이 되긴 했다;;; 하지만 이제라도 스토아철학의 일면을 보게 된 것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토아철학을 세운 제논의 책을 읽을 수 없는 바에야 에픽테토스의 책이 가장 스토아철학적 일것 같아서. 스토아철학을 읽고나면 로마제정초기의 철학자들의 사고와 기독교에의 금욕적 영향과 나중에 스피노자까지 이어지는 범신론의 경향을 미루어 짐작하는데 유용할 듯 하다. 하지만 주의할 점은 이 책은 에픽테토스의 철학서 원문번역서는 아니다.

저자는 철학과 교수이자 유전학 및 진화생물학의 박사이며 다양한 글을 기고하는 학자인데 철학을 현대인의 삶에 맞춰 실용적으로 다듬는 일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이 책도 그런 연장선에 있는 철학실용서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에픽테토스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그의 진짜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다. '에픽테토스'는 그리스어로 '구매된 것'을 뜻한다. 에픽테토스는 노예였기 때문이다. 그는 기원후 35년 즈음에 히에라폴리스에서 태어났고, 네로 황제의 비서관을 지낸 부유한 자유 시민 에파프로디토스에게 팔렸다. 이후 로마로 온 에픽테토스는 당시 가장 훌륭한 스승으로 꼽히던 무소니우스 루프스의 제자가 되어 스토아철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p. 12) 선배 스토아주의자들처럼 그도 곧잘 권력에 진실을 말하는 위험한 행동을 했다. 93년에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그를 로마에서 추방했다. 에픽테토스는 굴하지 않고 그리스 북서부에 있는 니코폴리스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 학교를 세웠다. 에픽테토스의 학교는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철학 학교로 명성을 날렸다. 훗날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 학교에 들러 유명한 스승인 에픽테토스에게 존경을 표했다. 에픽테토스는 자신의 롤모델인 소크라테스처럼 아무것도 글로 남기지 않았다. 대신 수많은 제자를 가르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 집중했다. 다행히도 그 제자 중 한 명이 니코메디아의 아리아노스였다. 아리아노스는 훗날 공무원, 장군, 역사가, 철학자를 지냈다.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는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은 아리아노스가 기록한 [담화문] 네권(원래 여덟 권인데 안타깝게도 절반은 유실되었다) 과 이를 요약한 [엥케이리디온]이라고 불리는 짧은 지침서 한 권이다. (p. 14)

철학을 전공한 저자가 대학원 철학 수업에서조차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던 에픽테토스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당연히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저자는 에픽테토스의 철학을 처음 접했을 때 세네카와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학파 철학자들로 유명한데 왜 에픽테토스는 그정도로 알려지지 않은건지 충격을 받을 정도로 놀랐다고 한다. 에픽테토스의 글과 가르침 특히 [엥케이리디온] 은 로마의 마지막 스토아학파 철학자로 불리는 아우렐리우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데 [명상록]은 유명해도 [엥케이리디온]은 그렇지 못하다. 나도 [명상록]을 읽으면서야 에픽테토스에 대해 알게 됐었던 것 같다.

저자에 따르면 [엥케이리디온]은 중세 기독교 수도사의 영성 수련 지침서로 활용됐고 르네상스시대와 계몽시대에도 인기를 누렸으며 셰익스피어의 [햄릿] 이나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에서도 표현될 만큼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게다가 현대의 심리 치료 기법 중 가장 성곡적이라고 인정받는 인지행동 치료요법의 태동에서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이 활용됐다고 하니 스토아철학은 은근히 2천년의 세월 내내 우리 곁에 있어온 셈이다. 그런 스토아주의의 실용성에 초점을 두고 [엥케이리디온]을 현대인의 삶에 맞게 수정하고 더불어 스토아주의 철학 전체를 보완하고자 시도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법' 이라는 글을 통해 이 책을 '실전 지침서'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2부라고 하고 있는데,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을 원문 그대로가 아닌 현대어로 현대생활에 맞게 각색한 내용이자 이 책의 본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아무리 철학자이자 학자라고 해도 고대 철학자의 가르침을 임의적으로 마음데로수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점을 저자는 충분히 인정하며 3부에서 그 문제점들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 [부록]으로 에픽테토스의 가르침 원전과 저자가 수정한 내용을 비교하여 표로 정리한 것을 덧붙이고 있어서 원전을 읽는 이들에게 자신의 해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점이 돋보였다.

견유학파는 키니코스학파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cynic'이라는 단어는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냉소주의자를 뜻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스토아주의자드를 가리키는 'stoic'라는 단어도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금욕주의자를 가리키지 않았다) 견유학파는 매우 소박한 삶을 추구하면서 도덕적 인격을 수련하는 데 헌신하는 학파였다. 제논은 크라테스를 비롯한 몇몇 철학자 밑에서 공부했고, 기원전 300년 경에는 직접 철학을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일부러 아테네의 대표 광장 아고라 근처에 있는 기둥으로 둘러싸인 열린 공간을 골랐다. 당시 사람들은 이 장소를 색칠한 포치(지붕이 있는 현관)를 뜻하는 '스토아 포이킬레'로 불렀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까지도 사용되는 '스토아주의'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p. 25) 제논의 새로운 철학은 우리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중략) 인간의 본성을 진지하게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중략) 인간으로서 좋은 삶이란, 즉 고대 그리스인이 말한 에우다이모니아란, 이성을 통해 사회가 더 나은 곳이 되도록 기여하는 삶이다. 그래서 스토아주의자는 세계시민으로서 인류 전체를 하나의 큰 혈족으로 여겼다. (p. 26) 스토아주의자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한 가지 방법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4대 기본 덕목을 도덕적 나침반으로 삼는 것이다. 4대 기본 덕목이란 실천적 지혜, 용기, 정의, 절제다. (p. 27)

책의 앞부분에서 에픽테토스와 스토아주의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는 부분이 굉장히 도움이 되었다. 본문에 앞선 이런 안내는 고대그리스철학을 모르더라도 아니 철학 자체에 부담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작고 얇은 이 책을 큰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엥케이리디온]의 첫 구절에서 통제의 이분법에 대해 설명한다.

어떤 것은 우리 뜻대로 할 수 있고, 어떤 것은 우리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생각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의견, 동기, 욕구, 반감 등 우리 자신이 하는 것들입니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은 몸, 재산, 평판, 직장 등 우리 자신이 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p. 32)

'나의 뜻대로 할수 있는 것' 과 '나의 뜻대로 할수 없는 것'을 구분하려 노력하는 태도 그것이 스토아주의의 핵심이었다. 이것을 제대로 구분할 줄 알게 되면 그 어떤 결과에 대해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되고 궁극적으로 스토아철학이 추구하는 이상적 삶에 가까워지게 된다. '선택'은 하되 '갈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2부를 읽으면 에피테토스의 현대화된 가르침을 담은 명언들이 쏟아진다.

온전히 개인의 몫인 것들에 집중하면 어떤 일이 닥쳐도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그 누구도 질시하지 않고, 우주의 섭리에 좌절하지 않고서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간을 들여 훈련하면 정말로 개인에게 달려 있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한 관심을 현명하게 배분하고 균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p. 49)

이 훈련을 정말 제대로 한 사람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였던 것임을 [명상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을 먼저 읽고 [명상록]을 읽었더라면 감회가 달랐을까...

우리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을 간절히 원합니다. 반대로 온전히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소홀히 합니다. 따라서 먼저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우선순위를 바꿔야 합니다. (p. 53)

어리석은 사람은 사물에 대한 자신의 판단의 결과를 두고 남 탓을 합니다. 어느 정도 현명해진 사람은 남 탓을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탓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조차도 탓하지 않습니다. (p. 60)

여관에 들른 나그네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그 무엇도 진정 우리 것이 아니라 우주에서 빌린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p. 68)

개인의 자유는 개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온전히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만을, 우리가 더 낫게 바꿀 수 있는 것만을 바라면 됩니다. (p. 75)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우주의 연결망이라고 할 수 있는 인과관계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연결망에서 우리는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없어서는 안 되는 점입니다. 따라서 신이나 다른 무언가를 탓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들에 관심을 집중하고 나머지 것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더 합리적입니다. (p. 106)

주변에 어떤 사람을 둘지도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데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에는 초대받았다고 해서 응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 자리가 당신에게 이롭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그 무리에 휩쓸려 그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중략) 우리가 어울리는 무리는 좋을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우리의 영혼을 물들입니다. 그런데 굳이 나서서 자신의 영혼을 검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p. 114)

읽다보면 저절로 명상을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불교분위기나 요가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존감을 세우는 근래의 심리서나 힐링서들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아서 수월하게 읽히면서도 수긍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에픽테토스는 1세기 말부터 2세기 초까지 살았다. 그는 전지전능하지 않았다. 에픽테토스도 우리처럼 자신이 사닌 시대와 장소의 영향을 받는 인간이었다. 그의 철학이 중요한 이유는 그의 가르침이 인간 본성에 대한 보편적 이론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가 로마제국 시대를 사는 시민이어서 지지하거나 당연하다고 여긴 특수한 관념들은 부수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시간적·장소적 한계야말고 우리가 에픽테토스가 제시한 사례의 일부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p 185)

고전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원문 의미 그대로 해석하지 않는 것이라고,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인물적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맞추어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해오던 나로서는 저자의 기본태도에 많은 공감이 갔다. 그래서 저자는 에픽테토스를 현대적으로 봤을때 범신론자 이자 유물론자 이자 평등·평화주의자로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픽테토스가 아리아노스에게 가르침을 전한 뒤 지금까지 2,000년이나 흘렀다. 이 책은 에픽테토스에 대한 헌사인 동시에 그의 지혜를 새로운 세대에게 소개하는 개정판이다. 이 책을 통해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사람들이 히에라폴리스의 현자인 에픽테토스, 더 넓게는 스토아주의의 지혜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이 나의 원대한 꿈이다. (p. 195)

내가 스토아주의자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돌이켜보니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은 내가 살고 있는 방식에서 구현되는 부분들이 상당히 있었다. 내 마음이 편해지는 선택 혹은 내 자존감이 지켜지는 선택을 하는데 있어 에픽테토스의 명언을 현대적으로 되살려낸 이 책은 최근의 심리서 나 힐링서들이 전해주는 것과 또다른 평안을 준다. 아마 고대부터 이어져 온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신뢰가 더 가서 그런것 같다. 이 오래된 지혜가 여전히 활용될 수 있기를 바라는 저자의 꿈을 나역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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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의 채식주의자 - 휘뚜루마뚜루 자유롭게 산다는 것
전범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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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서점 주인, 밤에는 로큰롤 연주, 그리고 비거니즘과 동물해방

전방위적 '독립문화인'으로 살고 있는

전범선의 21세기 양반 라이프스타일

 

 

이 책을 읽고서야 전범선 이라는 청년이 꽤 유명한 사람인 줄 알았지 사실 나는 저자에 대한 관심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풀무질'!

내가 관심을 두게 된 이유는 저자가 '풀무질'이라는 서점을 인수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성균관대 앞의 사회과학전문독립서점 풀무질, 이제 서울에 단 두곳 남았다는 대학가의 사회과학전문독립서점 중 한 곳인 풀무질의 생명을 연장시켜준 멋진 사람이 누군지 왜인지 어떻게인지 알고 싶었다.

1991년 강원도 춘천 출생, 민사고 졸업, 미국 다트머스대학교와 영국 옥스포드대학원 졸업 후 로스쿨 대신 밴드'양반들' 보컬, 출판사 '두루미' 발행인, 책방 '풀무질' 대표로 살고있는 동물해방주의자 이자 채식주의자인 저자의 이력은 대단하고 화려하면서 독특했다. 그야말로 '자유' 그 자체 같아 보였다. 이 책의 부제로 적혀 있는 '휘뚜루마뚜루 자유롭게 산다는 것' 이 이력에서부터 이미 고스란히 보이는 듯 했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있다. 낮에는 선비질, 밤에는 한량질. 유유자적. 이름하야 21세기 양반 라이프스타일이다. (p. 9)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양반답게 사는 건 녹록지 않다. 내가 지주나 건물주가 아니라 더 그렇다. 월세 내고 월급 줄 생각하면 양반처럼 거드름 피울 수가 없다. 책방도 장사고, 음악도 장사고, 글쓰기도 장사다. 양반 행세를 하지만 결국 나도 상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논리나 사회의 통념에 끌려다니기는 싫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이고 싶다. 현실의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 나의 줏대를 세우고 싶다. 그래서 인문사회과학 서점을 운영하며 로큰롤을 연주한다. 전방위적 독립문화인으로 살고 있다. (p. 10)

진로 선택은 나에게 불행이냐, 불안이냐의 문제로 다가왔다. 안정된 삶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많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불안을 택했다. 그게 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라 믿었다.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아직 판단하기는 이르다. 이 책은 그 결정에 관한 성찰이자 변명이다. (p. 12)

머리말에서 밝히는 저자 본인에 대한 소회가 보기 좋았다. 젊은이의 솔직함과 단단함이 풍기는 그 에너지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비록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느끼는 것이긴 하지만 이런 생생한 에너지를 접하는 것이 대체 얼마만인건지... 반가웠다.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며 소심해지는 개인주의적 젊은 꼰대가 아니라 부유하면서도 뚜렷한 주관을 갖고 진지하게 삶의 방향을 모색하는 '청년'의 자유로움이, 사회를 회피하지 않고 공존하려는 책임감이 멋있었다. 안정된 불행보다 행복한 불안을 선택한 그 용기가 이 시대 다른 청년들에게도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책의 머리말부터 벌써 마음속에 움트려 했다.

책은 총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이 책을 쓰면서 저자가 새로 쓴 글이자 저자 본인에 대한 성장기로 볼 수 있고 2부와 3부는 이런저런 매체에 기고했던 글의 모음 같은데 글의 순서가 1부에서부터 이어지는 저자의 인생순서에 맞춰져 있어서 책 전체적으로는 저자가 지금의 삶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 짜임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공부잘하는 모범생에서 전도유망한 유학생을 거쳐 자유와 공존의 맥을 잇는 N잡러가 됐달까.

내가 자아를 찾는 과정은 주로 역사 연구의 형태를 띠었다. 경계인은 원래 정체성이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의 관점보다는 역사의 입장, 우주의 입장에서 나의 위치를 가늠하는 연습을 했다. (p. 20) 나는 영국에 가서야 비로소 자아정체성이 어느 정도 정립되었다고 느꼈다. 인격이 완성되었다는 게 아니다. 인격도 자아도 평생 변모한다. 단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믿는지, 진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꽤 확신이 들었다. 처음이었다. (p. 21)

강원도 춘천에서 전교1등을 놓치지 않다가 대치동 유학을 거쳐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졸업후 미국에 유학을 가고 미국에서 로스쿨 지망생들이 사학과를 많이 택하듯이 저자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하게 된다. 물론 이 전공의 배경에는 로스쿨의 진학이라는 실용적 목표도 있었지만 민족사관고 시절에도 가장 잘하고 가장 좋아했던 과목이 역사였다는 개인적 취향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그 엘리트 코스에서 잘 배운 덕에 저자는 해방촌의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잘 배웠다는 것의 의미가 제대로 체현된 사람이 저자라는 것에 대해 저자의 이력만 간단히 본 사람이라면 혹은 저자의 지금의 모습만 슬쩍 본 사람이라면 의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고 저자가 정말 제대로 잘 배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사고가 민족과 국가라는 고민을 내 가슴 깊이 심었다면, 다트머스는 정체성 정치와 소수자 해방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p. 55) 자아를 성찰하고 뿌리는 찾아가는 과정은 곧 내가 가진 특권을 인정하고 비판하는 일이었다. 특권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을수록 나는 자가당착과 자기부정의 늪에 빠졌다. (p. 57) 나는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을 읽고 삶의 좌표를 얻었다. 일종의 종교적 안정감을 느꼈다. 무의미한 세상에서 나름의 의미를 설정하고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가장 근본적이고 정치적인 원동력을 갖게 되었다. (p. 69) 논문을 제출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옥스퍼드에서 나에게 너무나도 중요했던 가치들이 얼마나 현실과 괴리됐는지 통감했다. (p. 75) 내가 앞으로 100만명 앞에서 공연할 날이 또 올까. (중략) 물론 광화문 앞에 모인 사람들이 나를 보러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만한 관중 앞에 서는 것은 매우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예술가로 살기로 결심했다. (p. 80, 81) 주어진 문제를 잘 풀어서, 좋은 학교에 입학해서 칭찬받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성취감이었다. 세상에 없었던 나만의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남들과 교류하면서, 잠재된 가능성이었던 나의 본질을 구현한다. '자아실현'을 이해했다. (p. 83)

공부로 우열을 다투던 학생들이 모인 민사고에서 한복을 입고 영어로 수업을 들으며 저자는 민족사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 민족사관의 모순이 해외 유학생활에서 깨지는 동안 다트머스 대학교의 플랫문화를 보며 백인남성우월주의 문화의 민낯을 경험하고 옥스포드 대학원에서 진정한 자아성찰을 경험한 이후 돌아온 한국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때 촛불혁명이 터졌다. 그 혁명은 저자 본인에게도 혁명적 선택을 유도했다. 혁명이란 그런것이다. 생각지도 않게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을 수 있는 것.

"그러나 예술가의 위치는 공격받기 쉽다. 성공한 예술가만 그의 독창성 또는 자발성이 존경받기 때문이다. 예술을 판매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면, 동시대 사람들에게 그저 괴짜, '신경증 환자'로 남는다. 이 점에서 예술가는 역사를 통틀어 혁명가와 비슷한 위치에 있다. 성공한 혁명가는 정치가고, 실패한 자는 범죄자다" 결국 성공한 예술가, 혁명가로 사는 것이 자유로우면서도 존경받는 법이다. (p. 92)

저자가 인용한 에리히 프롬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문득 학창시절에 읽었던 책들이 떠오른다. 나의 중학교 시절을 사로잡았던 책들은 헤세와 헤밍웨이와 에리히 프롬이었다. 자아성찰의 욕구는 자유를 욕망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그때의 내게 자유란 꿈 같은 것이었다. 소설 '갈매기'를 수차례 읽으며 나도 그렇게 날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다;;; 여하튼, 예술가와 혁명가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래서 예술가로 살고 있는 저자가 내눈에는 혁명가로 비춰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알았지만 야곱이 영어로 제이컵이고 야고보는 제임스란다. 더 이상 성당도 안 다녀서 야고보라는 이름에 대한 애착도 없어졌다. 내가 왜 수천 년 전에 죽은 중동의 어느 인간의 이름을 달고 다녀야 하나. (p. 99)

ㅍㅎㅎㅎ 시원스런 문장이다. 서양사를 읽을 때마다 그 사람들은 어찌나 이름을 자꾸 같은 걸 돌려쓰는 건지 당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손자가 다 같은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는 문화라니 대체 왜 그런 걸까;;; 그렇게 대를 잇는 이름의 정체성은 생각해보면 굉장히 보수적인 면이 있다. 주체적이라기 보다는 연속성과 자신이 속한 집단성을 저절로 갖게 되니까. 여하튼, 어려서부터 엘리트 교육과정에서 영어로 교육받던 저자가 영어이름이 필요했던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 영어이름에 대한 에피소드를 읽으며 저자가 내린 결론이 어찌나 속시원하던지.

서울에 딱 두곳 남았다. 서울대 앞 '그날이 오면'도 축소 이전하여 겨우 명맥을 지키고 있다. (p. 110) 풀무질도 '판올림'이 필요하다. 오늘날 인문사회과학 서점의 역할은 무엇일까. (p. 113) 과거에는 모든 압제의 주체이자 투쟁의 대상이 독재정권으로 환원되었다면, 지금은 가부장제부터 공장식 축산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담론은 분산되었고, 정체성은 세분화되었다. (p. 114) 변화의 기저에는 여전히 책이 있다. 아무리 영상매체가 발달하고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한 교류가 활발해도, 가장 근본적인 연구와 심도 있는 대화는 책으로 이뤄진다. (p. 115)

내가 자주 가던 학교앞의 사회과학서점도 문을 닫은지 오래다. 후원사업도 있었고 이런저런 노력이 있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그렇게 서울안에 사회과학서점은 두곳 남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책은 중요하다. 다른 매체가 아무리 발달해도 최소 수십년간은 종이책의 깊이를 따라올 매체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계발서나 실용서들도 중요하지만 사회문화의 깊이는 서점의 깊이와 닿아있다. 인문사회과학서점을 살리고 논쟁의 깊이를 더해갈때 새로운 미래를 탄탄하게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한국사회는 부유해졌지만 청년 세대는 부유하고 있다. 각자 조각배처럼 둥둥 떠서 목적없이 흐르고 있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중략) 이것은 실존의 문제다. 누군가는 이로 인해 '탈조선'하고 누군가는 아예 세상을 등진다. 하지만 '생존'의 문제와 싸워온 윗세대에게 '실존'의 문제는 가소롭다. 전쟁과 가난과 독재를 겪은 이들에게 정체성과 다양성과 주체성의 문제는 사치다. 20세기 한국인의 지상과제는 부유해지는 것, 즉 근대화의 수면 위로 떠올라 가쁜 숨을 들이쉬는 것이었다. 덕분에 21세기 한국인은 유유히 떠다니고 있다. 다만 왜, 어디로 나아갈지 모를 뿐이다. (p. 129) 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 제각각 발버둥 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발길질이 모든 경계를 깨부수고 있다. 성 정체성, 민족 주체성, 종교 신앙 따위의 관념들이 허물어지고 있다. 별난 인물들이 많이 나와서 이상한 일을 계속 꾸미고 있다. 그래서 요즘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이 아주 흥미롭다. (p. 131)

생존의 문제에서 실존의 문제로 넘어오게 해준 세대에게 감사할 것은 감사해야 겠지만 그렇다고 후세대를 빚쟁이로 보는 관점은 곤란하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은 의무이자 책임이지만 그 과정이 기쁨이고 행복이기도 하다. 성인이 된 자식에게 그동안의 키운값을 내라는 부모가 있는 가정은 결국 불행해지고 만다. 성인이 된 자식은 자유롭게 독립시켜야 한다. 그래야 부모도 자식도 행복해진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붕 떠있는 것 같아보이지만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물위에 유유자적 떠있는 오리도 물아래에서는 열심히 발을 휘젓고 있는 것처럼.

내게 평화주의와 생태주의는 같은 말이다. 평화란 단순히 전쟁의 부재가 아니다. (중략) 적극적 평화란, 전쟁이 사라시고 정의가 구현된상태다. 이 땅의 모든 동물을 위한 생태주의적 고려가 있기 전까지 평화도 없다. (p. 141)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 개인들이 모여 살면서 느슨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공동체, 나에게는 그게 해방촌이지만, 누구에게는 연남동이나 성수동일 수도 있고, 양양이나 제주일 수도 있다. 동네가 미래다. (p. 153) 비건 운동가는 번아웃할 위험이 크다. 명절에 묀 가족과의 식사에서도, 직장 회식자리에서도, 처음 만난 사람의 구스다운 재킷에서도 폭력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 신념과 행동의 부조화를 인정할 용기가 필요하다. 절대적인 기준은 고수하되, 때에 따라 타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동물해방운동은 동물이 느끼는 고통의 총량을 줄이기 위한 것이지 비건의 도덕적 숭고함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나의 신념과 행동 간의 일관성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는 동물들이다. (p. 157)

저자는 역사를 심도있게 연구해 보았고 철학을 의미있게 고민해온 사람이다. 그런 그가 기후변화를 염려하고 생태주의를 넘어 동물해방을 통한 평화와 공존을 주장하는 청년이자 로큰롤을 노래하는 예술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즐거웠다. 가볍지 않은 주제를 가볍게 풀어내고 무거울 수 있는 선택을 자유롭게 하는 이 젊은이의 선택이 앞으로도 불안을 가뿐히 뛰어넘는 행복한 삶으로 구현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해 본다.

"눈치 보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게 많다.

나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고, 적당히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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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 개정판 프로이트 전집 (개정판) 7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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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원전에 의한 새로운 번역!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책 중 하나"

 

 

나는 새로운 음식보다 먹던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장소보다 가던 곳을 좋아하고 새로운 옷보다 입던 옷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책만큼은 새 책이 좋다. 거기에 새번역이라면 금상첨화다. 고전에 대한 새번역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설레고 반갑다. 국내 유일의 프로이트 전집이라는 15권 중 이번에 새번역으로 나온 것은 단 2권, 그중 한 권이 바로 이 책이다.

프로이트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크게 정신분석, 무의식, 성적 해석 정도가 아닐까? 사실 이것들도 서로 섞여 있는 개념인것 같긴 한데... 이 책은 그 중에서도 가장 민감하면서 가장 적나라하면서 가장 궁금하지만 실은 가장 모르는 척 하고 싶은 욕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했던 최초의 시도들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가 주 본문을 이루며 이 논문을 보충할 수 있는 짧은 논문들이 다수 묶여 있는 책이다. 그리고 왠지 편치않은 마음으로 첫 장을 열게 되는 것이 무색하게 굉장히 과학적이고 분석적으로 읽히는 책이라 딱히 거부감도 들지 않았고 나름 고개끄덕여가며 읽게 되는 부분도 많았던 책이었다. 거의 백여년 전의 사고방식이다 보니 그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고 읽으면, 프로이트의 논리적 사고에 감탄하고 (그 시대로서는 흔치않은) 보편적 인간애를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한 주제에 대한 책이긴 하나 프로이트의 논문들을 모은 책이다보니 전체적 흐름이라던가 줄거리를 정리할 수는 없고 각 논문별로 요약하는 것도 너무 방대한 일이 될 것 같아서 인상적인 문장들을 중심으로 한 감상만 조금 남겨놓아 보려 한다.

이 책이 어서 빨리 시대에 뒤떨어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한때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제법 쓸모가 있던 이 책의 새로운 점들을 비롯해 부족한 부분까지 더 훌륭한 연구들이 나와 대체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p. 11)

1909년 제2판 서문에 쓴 저자의 문장이 저자의 연구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비슷한 표현들이 책 속에 붙여진 주석에서 여러 차례 확인되는데 자신의 이론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열린 태도를 평생 유지하며 연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프로이트는 꽤 매력적인 인물이다. 물론, 자신의 이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기에 다른 학자들의 반론에 대한 강력한 논쟁을 서슴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것은 과학적 토론일뿐 상대 학자에 대한 비난 비하 거기에 연결될 자신의 편집 아집 이 아니라서 보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자신이 기초를 세운 정신분석학에 대한 활발한 활동을 기대하고 반가워하는 애정어린 모습으로 보여질 따름이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논문의 일부 내용, 즉 인간의 모든 성취에서 성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나 성욕의 개념을 확대하려는 시도 같은 것이 오래전부터 정신분석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동기기 되었다는 사실이다. 급기야 사람들은 좀 더 선명한 구호로 비난하려는 의도에서 정신분석의 <범섹슈얼리티>라는 말을 만들어 냈을 뿐 아니라 정신분석이 <모든 것>을 성으로 설명하려 한다는 터무니없는 질책까지 서슴지 않았다. (중략) <성>이라는 개념의 확대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어린아이와 이른바 성도착자로 불리는 사람들을 분석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는데, 좀 더 고상한 관점에서 정신분석을 경멸적으로 내려다 보는 사람은 정신분석의 확대된 성이 신성한 플라톤의 에로스와 얼마나 가까운지 기억해야 할 것이다. (p. 16, 17 - 제4판 서문 中)

나도 오해를 했었다. 프로이트는 모든 것을 성적으로만 분석한다고. 쥐뿔도 아는 것도 없이 그냥 흘려들은 이야기들로만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알거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 책 한 권 읽었다고 제대로 알게 됐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기존의 선입견들을 상당부분 내려놓고 오해했던 부분들을 상당부분 다시 알게 될 수 있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적 에너지를 탐구했고 어린이에게도 그런 에너지가 있으며 성인들 중 신경증 환자의 치료나 당시 성도착자들로 분류되던 동성애자들에 대한 이해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모든 것을 성적으로 분석했다기보다는 성적으로 분석했을때 이해가능한 범주를 만들어나가던 학자였다.

건강한 사람치고 정상적인 성 목표 외에 성도착으로 간주될 수 있는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보편성을 감안하면 성도착이라는 말을 비난의 뜻으로 사용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만일 우리가 성생활의 영역에서 우리의 심리적 범주 안에 있는 단순한 변형들을 병적인 증상과 명확하게 구분하려고 하면 그 즉시 현재로선 해결할 수 없는 특별한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중략)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그들을 확실한 예단을 갖고 정신병자나 다른 종류의 심각한 비정상으로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도 우리는 평소엔 정상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조차 모든 본능 중에서도 가장 통제할 수 없는 본능의 지배를 받는 성생활의 영역에서는 환자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어왔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반면에 삶의 다른 영역에서 명확하게 비정상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예외없이 성적으로도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곤 한다. (p. 48)

다만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건 무의식적 성도착의 경향은 어디서건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그게 특히 남성 히스테리를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p. 54)

내가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라는 논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당시 '절대적 성도착자'로 분류된 동성애자에 대해 혐오나 무시와 차별이 아닌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이해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던 학자적 노력이었다. 동성애가 성도착증이 아닌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요즘에서야 그런 분석들이 일면 쓸모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노력은 읽을수록 보편적 인간애로 다가와서 프로이트에 대한 시니컬한 선입견이 누그러지는 듯 했다. 그에 비하면 여성에 대한 입장은 아쉬운 부분이 좀 있었지만 백년전 사람인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껏 서술한 내용으로 성도착증의 기원을 만족스럽게 설명했다고 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연구로 상기 과제의 해결보다 더 중요한 인식을 얻은 것 같기는 하다. 즉 우리는 지금까지 성 충동과 성적 대상 사이의 관계를 실제보다 훨씬 더 밀접한 관계로 상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례들을 조사한 결과 그들의 경우 성 충동과 성 대상 사이에 하나의 땜질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성 충동에 이어 성 대상이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라고 믿는 정상인들의 획일적 사고에서는 간과할 위험이 큰 땜질이다. 따라서 우리의 머릿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성 충동과 성 대상 사이의 단단한 매듭을 조금 느슨하게 풀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선 성 충동은 그 대상과 무관할 가능성이 크고 그 기원도 성 대상의 매력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p. 33~34)

이 책을 읽어나감에 있어서 프로이트의 논리가 맞다 틀리다를 판단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다. 나는 그저 그럴 수 있구나 이건 좀 이상한데 정도의 생각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소심한 판단을 하는 내게 '획일적 사고'를 벗어나 '단단한 매듭을 조금 느슨하게 풀'게 해주는 프로이트의 논리전개방식은 당시 획기적이었을 사고방식이자 용기있는 학자의 자신감으로 읽혀지곤 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여전히 프로이트를 읽어야 할 이유가 조금씩 느껴지기도 했다.

어린아이 때는 성 충동이 존재하지 않고 사춘기가 되어서야 일깨워진다는 것이 성 충동에 관한 세간의 통념이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순진하면서도 파장이 큰 심각한 오류다. 현재 우리가 성생활의 근본적인 상황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주로 이 오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 시기의 성적 현상을 철저히 연구하면 성 충동의 본질적인 특성이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고, 그것의 발달 과정이 폭로되고, 그 충동이 여러 원천으로 조립되어 있음이 밝혀질 것이다. (p. 61)

이 책에서의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은 어린아이 시기의 성충동에 대한 분석이다. 첫번째 에세이에서 성도착증(대표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분석이 시대착오적이라 여겨질 수도 있지만 두번째 에세이부터는 여전히 프로이트 연구에 주목해야 할 논리들이 등장한다. 앞서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나의 오해에서 말했던 것을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어린아이들을 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시기의 행동들을 성충동의 관점에서 분석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은 교육과도 연결될 수 밖에 없기에 여전히 그 의미가 있어 보였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6세에서 8세 이전의 시기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런 기억 상실에 대해 우리는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중략)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잊어버린 바로 그 인상들이 우리의 정신생활에 아주 깊은 흔적을 남겼고 이후의 모든 발달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가정해야 한다. 아니, 다른 심리학 연구들을 그 근거로 그게 사실이라고 확신해도 좋다. (p. 63, 64)

이제 나는 모든 개인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마치 아득한 선사시대처럼 만들고, 성생활의 단서들을 은폐하는 소아기의 기억상실이, 실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어린 시기의 성적 발달 과정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데 그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생겨난 우리 기억 속의 공백을 관찰자 한 사람이 메워 줄 수는 없다. 다만 나는 1896년에 이미 성생활과 관련한 몇 가지 중요한 현상의 기원을 탐구하면서 어린아이 시절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이후에도 섹슈얼리티에서 어린아이 시기의 요소를 전면에 배치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 (p. 65)

항상 고독하게 수행되는 소아기의 성적 탐구는 아이들이 세상에서 자기 길을 찾아 나서는 첫걸음이자, 이전에는 완벽한 신뢰를 부여했던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강력한 거리두기를 의미한다. (p. 87)

얼마전 읽은 SF소설이 생각난다. 그 소설에서 유아기의 부분기억상실이 외계인연관설로 펼쳐졌었는데 ㅎㅎ 뜬금없지만 유아기의 부분기억상실이란 현상이 다양한 문학적 상상력과 새로운 과학적 가정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여하튼, 프로이트의 이 '성 에세이'에서 강조한 것은 어린아이 시기의 행동들이 그때 받았던 경험들이 성인시기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린시절이 중요하다는 것! 성교육에 있어서도 프로이트는 사춘기 이전에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모호함과 무지로 감추어진 영역에 대한 호기심이 어떤 신경증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예시들로 그러한 강조를 힘을 보태고 있다.

사춘기가 되면 소아기의 성생활을 최종적이고 정상적인 형태로 만들어주는 변화들이 나타난다. 주로 자기 성애에 빠져 있던 성 충동은 이제 성 대상을 발견한다. 소아기 성 충동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서로 분리된 채 각각 유일한 성 목표로서 모종의 쾌락을 추구해 온 개별 충동과 성감대였다. (중략) 정상적인 성생활은 오직 성 대상과 성 목표로 향하는 두 흐름, 즉 애정적 흐름과 관능적 흐름의 정확한 결합을 통해서만 달성되는데, 이는 마치 양쪽에서 터널을 뚫는 것과 같다. (p. 99)

유기체 내에서 새로운 연결과 조합이 복잡한 매커니즘으로 자리 잡는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새 질서가 구축되지 않으면 병적 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 성생활의 모든 병적 장애는 발달 억제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p. 100)

성 충동을 다른 충동들과 구분하고, 그로써 리비도 개념을 성 충동의 영역으로만 국한해야 한다는 주장은 앞서 논구한, 성 기능에 특별한 화학 작용이 존재한다는 가정에 의해 강력하게 뒷받침된다. (p. 111)

나는 양성의 영역을 알게 된 뒤로 이 양성적인 속성을 기준점으로 삼게 되었고, 또 양성성을 고려하지 않고는 남자와 여자에게서 실제로 관찰되는 성적 표현을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p. 112)

세번째 에세이 에서는 '사춘기의 변화들'을 다루고 있다. 소아기때의 성에너지가 성인시기에 간접적 영향력을 남긴다면 사춘기때의 성에너지는 성인시기에 직접적 영향력을 남긴다고 볼 수 있다. 소아기때보다는 신체적으로 두드러진 변화가 눈에 보이다 보니 관찰과 분석이 더 용이한 때이기도 하다. 정신분석영역 뿐만이 아니라 생물학적 및 화학적 작용이 무언가가 있으리라고 유추하는 프로이트의 개방성은, 성호르몬이 언제 발견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분석학의 토대를 구축하면서 동시에 다른 영역과의 관계성도 미루어 짐작한 그의 방대한 지적 호기심이 돋보이게 했다. 무엇보다 양성성에 대한 논리는 흥미롭게 읽히는 부분이었다.

인간성 발달의 싹이 두 단계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 즉 발달 과정이 잠복기로 중단된다는 사실은 특별한 관심을 가질 만하다. 이는 고도의 문명을 위해 인간이 갖추어야 할 하나의 조건인 동시에 신경증적 경향의 조건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아는 한 다른 영장류에서는 이와 유사한 일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런 인간적 특성의 기원은 인간종의 선사시대에서 찾아야 할 듯 하다. (p. 126)

성생활의 장애에 관한 이 연구에서 나오는 결론은 불충분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현재 우리의 단편적인 지식만으로는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조건에 관한 이론을 세울 수 있을 만큼 성욕의 본질을 이루는 생물학적 과정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p. 136)

소설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열린결말' 로 끝나는 이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는 동성애를 질병으로 보고 따라서 치유의 관점에서 해석하며 당대의 교육관과 여성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앞뒤를 연결하는 논리가 탄탄하여 읽다보면 '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어' 하고 저절로 머리끄덕여 지는 부분들이 많았다. 아마도 자신이 세운 논리에 대한 열정적인 프로이트의 탐구력이 그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는 신경증 환자들이 변성적 소질을 타고난 특별한 부류여서 그들의 어린 시절 삶에서 정상인의 모습을 유추해 낼 수는 없다고 반박하는사람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신경증 환자도 남들과 똑같은 사람이다. 정상인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도 없으며, 또 그들의 어린 시절도 나중에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어린 시절과 항상 쉽게 구분되는 것도 아니다. 신경증이 그 사람들만의 특유한 정신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카를 구스타프 융의 지적처럼 우리 건강한 사람들도 똑같이 겪는 콤플렉스에서 유발된 질병이라는 사실은 우리 정신분석 연구가 일구어낸 가장 값진 성과 중 하나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건강한 사람들은 실생활에서 눈에 띄는 큰 피해 없이 이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방법을 아는 반면에 신경증 환자들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서야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p. 152~153)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순종 및 사고의 중단과 연결된 의견은 지배적 의식이 되는 반면에 아이들이 계속되는 탐구 노력으로 찾아냈지만 어른들에게 인정받을 수 없는 새 증거들에 기반한 다른 의견은 억압받는 <무의식>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경증의 핵심 콤플렉스가 생겨난다. (p. 156)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신경증의 발병원인이나 치료나 분석이나 그런 중요한 내용들은 차치하고 내가 공감이 갔던 부분은 프로이트가 표현하는 그 대상들에 대한 존중이다. '정신병' 이른바 미쳤다고 표현되는 병들이 그동안 얼마나 비하되어 왔는가? 조현병으로 이름이 바뀌고 '마음의 감기'라며 정신과 상담이 그리 이상하지 않게 된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당시 무시되던 동성애자나 여성히스테리환자나 아이들의 이상행동에 대해 과학자적인 태도로 객관적으로 동등하게 마주했다. 그리고 그들이 비정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한 태도가 발기부전이니 처녀성이니 항문성애니 남근선망이니 페티시즘이니 하는 등의 그 어떤 자극적인 연구내용들보다도 나는 더 인상깊게 남았다.

'세편의 에세이'에 이어지는 논문들은 비교적 짧은 것들로 주로 소아기의 성충동 분석이 대부분인데 뒤로 갈수록 해부학이라던가 여성의 성욕 같은 다양한 주제로 확장되어 가는 것에 비해 내용이 간략하여 아쉬웠다. 1900년 꿈의 해석으로 프로이트 만의 독창석 관점이 제시된 이후 1905년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로 유아기의 성적 본능에 관심을 두었다가 1912년 '토템과 터부'로 정신분석학을 인류학에 적용해보고 1923년 '자아와 이드'로 종전의 이론을 크게 수정한 이후 암투병 중에도 다양한 영역에 여전히 왕성한 호기심을 보여주었던 프로이트의 연구들은 그저 지나간 학설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여전한 현재적 유의미성을 가지고 있는 부분들이 많아 보인다. 그러한 부분들에 대해서 이후의 연구들이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지금 굳이 읽을 필요성이 있을까 싶었었는데 이 한권을 읽고나니 '프로이트 전집'의 다른 책들에도 호기심이 생긴다. '라스트 세션' 이라는 연극에서 노학자로 등장한 프로이트도 참 멋있었는데, 책으로 접한 프로이트의 논리도 무척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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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밖 인문학 콘서트 - 10만 명이 함께한 서울시교육청 인문학 강좌 교실밖 인문학 콘서트 1
백상경제연구원 지음 / 스마트북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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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야말로 첫 번째 교양이다!

신화, 철학, 문학, 미술, 영화, 환경, 역사, 미래까지

10만명이 함께한 서울시 교육청 인문학 강좌

 

 

[교실밖 인문학 콘서트]는 청소년과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서울시교육청 인문학 아카데미 '고인돌2.0(고전 인문학이 돌아오다)'중에서 고른 열가지 주제에 대해 다양한 강사진의 풍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교실밖' 이라고 해서 청소년용줄 알았더니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이 읽어도 충분한 깊이가 있는 교양서였다.

1장 유럽 신화, 완전 첫 걸음] 에서는 신화란 무엇이고 신화라는 단어를 들었을때 떠올렸을 법한 유럽신화에 대한 기초내용을 개괄해준다.

신화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기원(origin)에 관한 오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p. 17) 신화는 우리가 왜 태어났는지, 왜 죽는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준다. 즉, '근원적인 철학적 사고'를 하게 한다. 인간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다른 동물이나 식물과는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신화는 은유나 상징, 알레고리라는 신화만의 방식을 통해 이러한 것들에 대해 말해왔다. (p. 19) 신화가 늘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라는 생각은 신화가 가진 한쪽 면만을 보는 것이다. 국가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신화나 미디어의 조작으로 형성되는 신화는 경계해야 한다. 신화는 양날의 검으로써 기능할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p. 24) 신화는 종교나 역사와 관련이 있지만, 유익하고 풍부한 상상력의 보고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수천 년을 인류와 함께 살아남은 강력한 이야기인 신화를 아는 것은, 모든 대중문화 콘텐츠로 통하는 지름길이라고 해도 틀린말은 아니다. (p. 25)

인문학의 3대 큰 줄기를 문사철이라 부르곤 한다. 문학, 역사, 철학이 그것이다. 이 세가지 모두 다 좋아하는 영역이다 보니 이런저런 책을 읽다보면 신화는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문학도 역사도 철학도 그 첫 시작은 신화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인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신화를 빼고 그냥 지나갈 순 없을 것이다. 다만, 원전번역서로 시작하길 권한다. 신화 자체가 사실이라기 보다는 상징과 은유로 풀어지는 이야기인데 중역이나 축약같은 다양한 변화를 거친 책들은 그 본연의 의미를 전달하기 어렵기 마련이다. 원전 번역이라해도 사실 완전한 원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남아있는 이야기들 자체가 이미 유구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다양한 변이를 거쳤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더욱 신화는 줄거리를 아는 것보다 원전 자체의 상징을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알려주는 신화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들을 통해 더욱 친숙하게 다가온다. 켈트신화가 해리포터에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북유럽신화가 어벤저스시리즈와 반지의 제왕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등 신화가 여전히 우리의 문화에 다양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한국의 저승관과는 어떻게 닮아있는지 읽다보면 재미에 폭 빠져읽었음에도 새로이 알게되는 것들과 더 알고싶은 것들이 남아 지적호기심을 자극한다.

2장과 3장은 철학이다. 2장 살면서 갖고 싶은 다섯 가지] 에서는 일상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철학적 사고를 돕고 3장 철학하는 삶이란] 에서는 변화된 시대에 앞으로 어떤 철학적 질문을 가져봄직한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4장~7장은 문학과 예술이다. 때로는 소설로 때로는 영화로 때로는 미술로 풀어지는 이야기들은 다양한 작품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만큼 가장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부분이기도 하다.

4장 자아의 발견] 은 청소년에게 추천할만한 다양한 소설들과 함께 '자아'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데 백세시대가 될수록 어른이 되는 나이가 늦어지고 있다 보니 사실 '자아의 발견'은 청소년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서 혼란스러운 젊은 나이에 읽기에 좋은 내용이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 로이르 로이의 '기억전달자' ,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과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핀의 모험' 소설의 내용을 따라가며 주인공의 성장과 함께 읽는이의 성장에 조언을 해주는데 해당 문학 작품들을 읽었다면 따듯한 충고처럼 다가오고 읽지않았다면 읽고싶은 마음이 들게 될 이야기들이었다.

5장 원작과 함께 영화 읽기] 또한 소설보다 오히려 더 접하기 쉬울 영화라는 장르로 인해 더욱 재미있게 읽게 되는 부분이었다. '위대한 개츠비' , '작은 아씨들' , '엠마' , ' 레미제라블' , '허삼관매혈기' 에 대해 원작 소설과 영화를 함께 다룸으로써 장르를 넘나드는 이해와 시대를 넘나드는 해석을 통해 원작과 영화를 세트로 함께 보면 재밌겠구나 싶어 바로 찾아보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 부분이었다.

6장 필환경 시대, 문학에서 길을 찾다] 는 다양한 장르의 문학을 통해 변해가는 환경 속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문학이 먼저 던진 질문들을 되새겨보게 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자연을 생각하게 하는 시들과 에세이 '월든' 의 소박함과 '멋진 신세계' 와 '오릭스와 크레이크' 라는 소설이 미리 보여주는 디스토피아등을 통해 환경과 인간의 관계를 무겁지 않으면서도 진지하게 접근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듯 했다.

7장 단박에 읽는 서양 미술사] 는 소제목 그대로 서양 미술사롤 40여페이지에 압축해서 보여주는 놀라운 능력이 발휘된 장이다. 예술이란 무엇이며 고대부터 르네상스를 거쳐 인상주의를 지나 현대까지 굵직한 사조들을 빠짐없이 다루면서도 예술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무리없게 해주면서 예술 자체에 대한 질문까지 남겨주는 장이었다. 개인적으로 미술사 하면 곰브리치만 알았는데 단토의 책을 읽어야 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어서 특히나 인상적인 파트였다.

8장은 스토리 이고 9장과 10장은 역사와 미래 라는 토픽을 다루고 있다.

8장 이야기꾼 프로젝트]는 이야기를 직접 써보는 연습을 시켜주고 있는 듯한 장이었다. 이 장 또한 짦은 페이지로 스토리작법을 훈련시켜주기에 이정도라면 나도 한번 써볼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쉽고 알차게 스토리텔러연습을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9장 역사 속 뉴노멀의 현장을 가다] 에서는 세계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혁명들(네덜란드 독립, 영국내전, 미국 독립,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을 보면서 그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반추해보게 한다.

10장 새로운 접촉문명, 온택트 시대] 는 딱 지금 의 현실 모습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변화들이 미래에 더욱 어떤 모습이 될지 생각해보게 한다. 중요한 것은 언택트 가 아닌 온택트 라고나 할까.

이제 매뉴얼로 가능한 일들은 기계에 맡기면 되는 세상이 되었다. 전례가 많은 일들은 인공지능이나 기계자동화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반복적인 일처리 재주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이해하고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기민한 대응력이 중요하다. 인간은 매뉴얼에 없는 일들을 해결해야 한다. 매뉴얼에 없는 변화에 대처하고 새로운 매뉴얼을 만드는 힘이 필요한 사회가 21세기 선진사회다. (p. 416) 21세기 디지털 미래사회는 변화무쌍한 사회다. 어제의 패턴이 반복되지 않고 어떤 변화가 닥칠지 가늠하기 힘든 'VUCA사회'(VUCA는 휘발성Voi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 의 준말이다. VUCA사회란 미래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기 어렵고, 그 어느 때보다도 복잡하고, 모든 것이 선택의 문제로 모호한 세상을 의미한다)라고도 한다. 어제까지의 모범사례가 미래의 대책이 되지 않는 사회, 즉 미래를 개척하는 최고의 상상력이 요구되는 사회다. (p. 417)

무에서 유가 창조된 적은 없었다. 세상을 뒤집은 발견발명들도 갑작스러운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은 다 작지만 꾸준히 쌓이고 끊겼다가도 다시 이어지는 시간들이 쌓여 창조된 것들이었다. 누군가의 무엇이 없었다면 위인의 업적도 없었다. 아무리 미래사회가 VUCA사회라 해도 그런 미래조차 현재의 우리가 한 것들로 인해 다가올 사회다. 그러니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따라서 여전히 우리는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기왕이면 원전들을, 부담스럽다면 이런 교양서들로 시작해보면 어떨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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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 글씨체로 밝혀낸 광개토태왕비의 진실
김병기 지음 / 학고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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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해파<渡海破)'가 아니라 '입공우(入貢于)'였다!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가야 신라를 쳐부순(渡海破)게 아니라

왜가 고구려의 신민이 되었다!

 

 

오랜만에 가슴뜨거워지는 역사서를 읽었다.

나는 역사를 좋아하지만 그래서 역사서를 자주 읽는 편이지만 국내역사서는 그닥 자주 읽지는 않는다. 국내 역사 관련 책들은 역사서라기보다는 흥미위주의 책들이 많고 게다가 한국의 역사가 조선사가 다인것마냥 조선사에 치중된 경향이 많아서 찾아 읽어야 할 필요성을 딱히 느껴보지 못했었다. 게다가 국내 역사를 다루면서도 학자다운 양심을 저버린 사람들도 꽤 많아 보이기에 그런 면면들을 대면하느니 그냥 안보고 모르고 지내는게 속편했달까... 그래서 나와 아무 상관없지만 재미도 있고 유익하기도 한 서양사 관련 책들을 찾아 읽고는 한다. 그런데... 이 책은 달랐다!

일러두기2.

그동안 우리는 습관적으로 '광개토대왕'이라고 불렀다. 일제가 그렇게 부른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그러나 비문에는 분명히 '광개토태왕'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태(太)'는 '대(大)'보다 훨씬 큰 개념이다. 비문의 기록을 좇아 응당 '광개토태왕'으로 호칭해야 하므로 증보판에서는 초판의 '광개토대왕'을 모두 '광개토태왕'으로 바로잡았다.

본문을 시작하기에 앞선 '일러두기'에서부터 이 책의 색깔을 명확하다. '비문'에 쓰여진 글자에 집중한다는 것.

중국의 동북공정 이니 일본의 임나본부설 이니 하는 말들은 이미 지나간 옛스럽고 무용한 그런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현재진행중이었고 미래를 내다본 주장들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중국에든 일본에든 어느 한쪽에 한국이 먹히고 말 상황이었다. 그저 헛된 역사논쟁이라고 치부하고 말 것이 아니었다. 그 핵심에 광개토태왕비문이 있었다.

그러한 연구를 토대로 일제는 조선을 당쟁을 일삼다가 망한 나라로 규정하면서 식민 지배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식민 사학의 틀을 세웠고, 병탄 후에는 우리에게 그런 식민 사학을 주입했다. 일제는 실증사학을 내세워 유물이야말로 객관성을 갖는다고 주장하면서 유물을 근거로 우리의 역사를 실증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면서 그들은 우리의 역사유물을 없애기도 하고 변조하기도 했다. 변조한 유물을 들어 실증을 강조하여 유물을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우리의 역사를 왜곡 날조하였다. (p. 12) 일제가 우리의 역사를 자기네들의 필요에 맞도록 혈안이 되어 왜곡하던 그 시기에 역사 왜곡의 제물이 되어버린 게 바로 광개토태왕비이다. (p. 13) 그런데도 왜 우리 학계는 이런 정황 증거는 외면하고 '일제가 설마 비를 변조까지 했겠어?'라는 태도를 보이면서 관대하기 이를데 없고,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광개토태왕 당시의 정황을 파악한 다음에 그 정황에 맞춰 광개토태왕비문을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은 왜 그토록 만연해 있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p. 14) 내 연구의 핵심은 글자의 변조를 증명하고 원래의 글자를 찾는 데에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핵심은 신묘년 기사에 나오는 '속민(屬民)'과 '신민(臣民)'이라는 어휘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밝힌 데에 있다. 속민과 신민의 분명한 의미 차이에 입각하여 신묘년 기사를 해석하면 고구려가 왜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문장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연구의 핵심내용인 것이다. (p. 16)

저자는 오랜세월 서예를 학문적으로 연구해온 서예가이자 서예학자이다. 엣 역사는 한자로 전해지고 있으니 서예학은 그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는 학문이다. 그런데 국내 대표적인 서예학자의 연구를 국내 사학계에서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는 상황이 저자의 답답함 못지 않게 나도 답답해 졌다. 신라와 백제의 역사 관련해서는 국내에 전해지는 역사서들을 바탕으로 분석하려고 하면서도 '광개토태왕비문'해석에 있어서는 '일본서기'라는 고서의 정황에 맞춰 해석하는 걸로 보이는데, '일본서기'는 일본에서나 고대역사 관련 책으로 애지중지하는 책이지 당시의 한반도역사와 중국역사와 비교해보면 거의 위서에 가까운 책이라는 것은 조금만 검색해봐도 바로 나온다. '광개토태왕비문'의 변조관련 주장은 100여년에 가깝게 이어지고 있다는데 국내 사학계는 이 주장에 전혀 개입하지 않아온 듯 보인다. 왜 일본이 제시한 증거들의 변조가능성을 검토하지 않는가? 그러는 사이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고 일본은 한반도 남부의 역사에 임나본부설을 주입시켰다. 왜 한국 사학계는 이런 편입과 주입을 저지하지 못했는가? 그동안 한국 사학계는 대체 무엇을 연구해왔단 말인가? '어차피 사실이 아닌데' 하며 안일한 태도로 수수방관하고 제대로 된 반박거리를 준비하지 않는 동안 중국과 일본은 탄탄히 논리를 만들고 증거까지도 만.들.어.왔다. 한국사학계는 중국과 일본의 들러리인가?

마침내 광개토태왕비 앞에 섰을 때 나는 뜻 모를 비감에 사로잡혔다. 1600년 고령을 용캐도 견뎌왔건만 이제는 지쳤다는 듯, 비면에는 많은 상처가 나 있었다. 게다가 만주 벌판에 늠름하게 우뚝 서 있어야 할 광개토태왕비는 중국이 만들어놓은 방탄 유리창 속에 갇혀 있었다. 그 옛날 요동 벌판을 호령하던 광개토태왕도 갇혀 있었다. 아니, 고구려 역사 전부가 옹색한 유리창 속에 갇혀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유리 감옥에 갇힌 광개토태왕비를 지키고 있는 것은 검둥 개 두 마리였다. 개 두 마리, 이 것은 은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광개토태왕비 각의 사방에 놓인 네 개의 개집. 그중 두개의 개집에는 개가 들어앉아 감시라도 하듯 내방객들을 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p. 34 ~ 35)

네 개의 개집. 검둥 개 두 마리. 하아...

2004년 저자가 직접 보았던 그 모습이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모습으로 있던 어차피 국내 사학계의 외면은 마찬가지 상황이 아닌가... 그야말로 할많하않...

광개토태왕비! 서기 414년에 세운 이 비석은 높이가 6.39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자연석으로 만들었다. 위와 아래 면이 약간 넓고 허리가 약간 좁아서 보기에 따라서는 잘록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밑면의 너비는 제1면(동남방향)이 1.48미터이고, 제2면(서남방향)이 1.35미터 이며, 제3면(서북방향)은 2미터이고, 제4면(동북방향)은 1.46미터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한 이 거대한 비석은 화강암으로 된 좌대위에 세워졌다. 비석의 각 면에는 탄본에서 본 것처럼 행의 줄을 맞추기 위한 사잇줄(계선)이 쳐져 있다. 이 사잇줄에 맞춰서 1행에 보통 41자씩, 네 면을 돌아가며 모두 44행에 글씨가 새겨졌다. 음각한 비문의 글자가 모두 1,775자에 이른다. 중국 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이 중에서 이미 풍화되고 훼손되어 판독이 힘든 글자가 141자라 한다. 글자 하나의 크기는 가로나 세로가 보통 12센티미터 정도로 접시만 하며, 큰 글자는 한 변이 16센티미터에 이른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제1부에는 고구려 건국 신화와 광개토태왕의 행적을 간단히 적었다. 제2부에는 광개토태왕이 비려와 백제를 토벌하고 신라를 구했으며 왜구를 패주하게 하고 동부여 등을 토벌한 사실과 함께 획득한 성 및 촌락과 인마의 규모와 수를 적었다. 제 3부에는 광개토태왕이 생전에 내린 교언에 근거하여 광개토태왕릉을 지키는 책임을 다할 백성들의 출신과 가구 수 등을 적었다. (p. 36)

광개토태왕비의 탁본을 일제가 취득한 정황도 탁본 자체의 신뢰성도 비문의 자의적 해석도 모두가 미심쩍었지만 저자의 말처럼 광개토태왕의 행적을 기리는 비문에 왜의 승전을 기록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저자가 구현한 변조의 앞과 뒤가 딱딱 들어맞아서 대체 이 변조를 왜 한국 사학계가 인정하고 뒷받침해주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시 정통 사학계가 밝혀내지 못한 것을 이른바 재야 사학자가 밝혀낸 것이라서?

그렇다면 광개토태왕비를 어떻게 구해낼 것인가? 무엇보다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혹자는 '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고 하지만, 나는 '역사는 이긴 자의 것이 아니라 아는 자의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알아야 한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지킬 수 있다. 광개토태왕비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 그것이 세 번의 죽음에서 광개토태왕비를, 그리고 고구려를 살려내는 길이고 나아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살리는 길이다. 일본은 정부가 나서서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나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고,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의 역사 왜곡 사업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마당이다. 우리라고 제대로 역사를 보고 제대로 알자고 하는 취지의 역사 교육을 강화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p. 42)

공감한다. 알아야 한다. 그것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러니 읽어야 한다. 많이 읽어야 한다. 그래야 책 중에서도 옥석을 가릴 수 있고 누구의 주장이 더 타당한지 판단할 수 있다. 한쪽에만 매몰되지 않기 위해 바르게 읽고 제대로 알아야 한다. 역사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현재를 반추하는 거울이자 미래를 엿보게 해주는 망원경이다.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 역사에 늘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과거와 현재를 모르고 세운 미래는 사상누각일 뿐이다.

일본은 구석기 시대의 유물을 조작하는 세계적 역사왜곡도 서슴치 않았던 전적이 있고 역사교과서 왜곡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들의 역사를 창조하려 한다. 중국은 고구려 역사와 유적을 유네스코에 등재시키며 자신들의 역사속으로 교묘히 고구려역사와 앞으로의 북한땅까지 복속시키려는 의도를 찬찬이 진행중에 있다. 그 틈바구니에서 한국의 역사는 그저 속절없이 잘려나가고 말 것인지...

사마천은 이런 설명을 통해 역사는 과거에 대한 기록임과 동시에 현재를 비추는 거울로서 현재에도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설파하였다. 이런 점에서 사마천의 역사관은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고 한 역사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의 역사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레오폴트 랑케를 대표로 하는 실증사학자들은 역사를 사회과학으로 인식하여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역사가의 견해를 철저히 배제하고 역사적 사실만을 규명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실증사학은 증거에 기초한 사실의 기술에 전력을 다했다는 점에서 근대 역사 연구에 기여한 바가 크다. 그런가 하면, 크로체나 E.H.카등은 역사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해석의 문제로 파악하려고 했다. 크로체가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고 말한 것도 역사적인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그 역사를 해석하는 시점의 사회 분위기나 학문적 연구 동향 등에 따라 다른 조명과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E.H.카 또한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간의 계속적인 상호작용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함으로써 역사적 사실 자체보다는 그것을 탐구하는 역사가의 관점을 더 중요시하였다. (p. 312)

역사가의 태도에는 두 극단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역사의 교훈을 전하기 위해 깎을 것은 깎고 보탤 것은 보탠 공자의 '춘추필법'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 그 자체가 말하게 함으로써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보여준다는 '랑케필법'이다. 춘추필법은 2천년 동안 중국 문명권의 역사 서술을 지배했고, 랑케필법은 100년 동안 서구 역사학계에서 유행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이 둘 사이 어딘가에 있다는데, 중국의 춘추필법 다운 동북공정과 일본의 (변조한 증거까지도 사실이라고 바탕에 깔고 시작하는) 랑케필법다운 임나일본부설 사이에서 한국의 사학자들은 역사적 사실의 무엇을 검증하고 그런 역사와 어떤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무엇보다도 국가적 역사교육사업이 대입시험에 한국사필수로 그친것을 넘어 중국과 일본처럼 국가적 무언가를 좀 했으면 싶다.

한국 역사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독도 문제 만큼이나 광개토태왕비문 이 중요한 문제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어서 버려진 역사를 빼앗기고 나중에 땅을 치며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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