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촌의 채식주의자 - 휘뚜루마뚜루 자유롭게 산다는 것
전범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낮에는 서점 주인, 밤에는 로큰롤 연주, 그리고 비거니즘과 동물해방

전방위적 '독립문화인'으로 살고 있는

전범선의 21세기 양반 라이프스타일

 

 

이 책을 읽고서야 전범선 이라는 청년이 꽤 유명한 사람인 줄 알았지 사실 나는 저자에 대한 관심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풀무질'!

내가 관심을 두게 된 이유는 저자가 '풀무질'이라는 서점을 인수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성균관대 앞의 사회과학전문독립서점 풀무질, 이제 서울에 단 두곳 남았다는 대학가의 사회과학전문독립서점 중 한 곳인 풀무질의 생명을 연장시켜준 멋진 사람이 누군지 왜인지 어떻게인지 알고 싶었다.

1991년 강원도 춘천 출생, 민사고 졸업, 미국 다트머스대학교와 영국 옥스포드대학원 졸업 후 로스쿨 대신 밴드'양반들' 보컬, 출판사 '두루미' 발행인, 책방 '풀무질' 대표로 살고있는 동물해방주의자 이자 채식주의자인 저자의 이력은 대단하고 화려하면서 독특했다. 그야말로 '자유' 그 자체 같아 보였다. 이 책의 부제로 적혀 있는 '휘뚜루마뚜루 자유롭게 산다는 것' 이 이력에서부터 이미 고스란히 보이는 듯 했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있다. 낮에는 선비질, 밤에는 한량질. 유유자적. 이름하야 21세기 양반 라이프스타일이다. (p. 9)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양반답게 사는 건 녹록지 않다. 내가 지주나 건물주가 아니라 더 그렇다. 월세 내고 월급 줄 생각하면 양반처럼 거드름 피울 수가 없다. 책방도 장사고, 음악도 장사고, 글쓰기도 장사다. 양반 행세를 하지만 결국 나도 상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논리나 사회의 통념에 끌려다니기는 싫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이고 싶다. 현실의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 나의 줏대를 세우고 싶다. 그래서 인문사회과학 서점을 운영하며 로큰롤을 연주한다. 전방위적 독립문화인으로 살고 있다. (p. 10)

진로 선택은 나에게 불행이냐, 불안이냐의 문제로 다가왔다. 안정된 삶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많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불안을 택했다. 그게 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라 믿었다.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아직 판단하기는 이르다. 이 책은 그 결정에 관한 성찰이자 변명이다. (p. 12)

머리말에서 밝히는 저자 본인에 대한 소회가 보기 좋았다. 젊은이의 솔직함과 단단함이 풍기는 그 에너지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비록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느끼는 것이긴 하지만 이런 생생한 에너지를 접하는 것이 대체 얼마만인건지... 반가웠다.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며 소심해지는 개인주의적 젊은 꼰대가 아니라 부유하면서도 뚜렷한 주관을 갖고 진지하게 삶의 방향을 모색하는 '청년'의 자유로움이, 사회를 회피하지 않고 공존하려는 책임감이 멋있었다. 안정된 불행보다 행복한 불안을 선택한 그 용기가 이 시대 다른 청년들에게도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책의 머리말부터 벌써 마음속에 움트려 했다.

책은 총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이 책을 쓰면서 저자가 새로 쓴 글이자 저자 본인에 대한 성장기로 볼 수 있고 2부와 3부는 이런저런 매체에 기고했던 글의 모음 같은데 글의 순서가 1부에서부터 이어지는 저자의 인생순서에 맞춰져 있어서 책 전체적으로는 저자가 지금의 삶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 짜임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공부잘하는 모범생에서 전도유망한 유학생을 거쳐 자유와 공존의 맥을 잇는 N잡러가 됐달까.

내가 자아를 찾는 과정은 주로 역사 연구의 형태를 띠었다. 경계인은 원래 정체성이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의 관점보다는 역사의 입장, 우주의 입장에서 나의 위치를 가늠하는 연습을 했다. (p. 20) 나는 영국에 가서야 비로소 자아정체성이 어느 정도 정립되었다고 느꼈다. 인격이 완성되었다는 게 아니다. 인격도 자아도 평생 변모한다. 단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믿는지, 진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꽤 확신이 들었다. 처음이었다. (p. 21)

강원도 춘천에서 전교1등을 놓치지 않다가 대치동 유학을 거쳐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졸업후 미국에 유학을 가고 미국에서 로스쿨 지망생들이 사학과를 많이 택하듯이 저자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하게 된다. 물론 이 전공의 배경에는 로스쿨의 진학이라는 실용적 목표도 있었지만 민족사관고 시절에도 가장 잘하고 가장 좋아했던 과목이 역사였다는 개인적 취향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그 엘리트 코스에서 잘 배운 덕에 저자는 해방촌의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잘 배웠다는 것의 의미가 제대로 체현된 사람이 저자라는 것에 대해 저자의 이력만 간단히 본 사람이라면 혹은 저자의 지금의 모습만 슬쩍 본 사람이라면 의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고 저자가 정말 제대로 잘 배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사고가 민족과 국가라는 고민을 내 가슴 깊이 심었다면, 다트머스는 정체성 정치와 소수자 해방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p. 55) 자아를 성찰하고 뿌리는 찾아가는 과정은 곧 내가 가진 특권을 인정하고 비판하는 일이었다. 특권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을수록 나는 자가당착과 자기부정의 늪에 빠졌다. (p. 57) 나는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을 읽고 삶의 좌표를 얻었다. 일종의 종교적 안정감을 느꼈다. 무의미한 세상에서 나름의 의미를 설정하고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가장 근본적이고 정치적인 원동력을 갖게 되었다. (p. 69) 논문을 제출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옥스퍼드에서 나에게 너무나도 중요했던 가치들이 얼마나 현실과 괴리됐는지 통감했다. (p. 75) 내가 앞으로 100만명 앞에서 공연할 날이 또 올까. (중략) 물론 광화문 앞에 모인 사람들이 나를 보러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만한 관중 앞에 서는 것은 매우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예술가로 살기로 결심했다. (p. 80, 81) 주어진 문제를 잘 풀어서, 좋은 학교에 입학해서 칭찬받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성취감이었다. 세상에 없었던 나만의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남들과 교류하면서, 잠재된 가능성이었던 나의 본질을 구현한다. '자아실현'을 이해했다. (p. 83)

공부로 우열을 다투던 학생들이 모인 민사고에서 한복을 입고 영어로 수업을 들으며 저자는 민족사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 민족사관의 모순이 해외 유학생활에서 깨지는 동안 다트머스 대학교의 플랫문화를 보며 백인남성우월주의 문화의 민낯을 경험하고 옥스포드 대학원에서 진정한 자아성찰을 경험한 이후 돌아온 한국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때 촛불혁명이 터졌다. 그 혁명은 저자 본인에게도 혁명적 선택을 유도했다. 혁명이란 그런것이다. 생각지도 않게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을 수 있는 것.

"그러나 예술가의 위치는 공격받기 쉽다. 성공한 예술가만 그의 독창성 또는 자발성이 존경받기 때문이다. 예술을 판매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면, 동시대 사람들에게 그저 괴짜, '신경증 환자'로 남는다. 이 점에서 예술가는 역사를 통틀어 혁명가와 비슷한 위치에 있다. 성공한 혁명가는 정치가고, 실패한 자는 범죄자다" 결국 성공한 예술가, 혁명가로 사는 것이 자유로우면서도 존경받는 법이다. (p. 92)

저자가 인용한 에리히 프롬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문득 학창시절에 읽었던 책들이 떠오른다. 나의 중학교 시절을 사로잡았던 책들은 헤세와 헤밍웨이와 에리히 프롬이었다. 자아성찰의 욕구는 자유를 욕망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그때의 내게 자유란 꿈 같은 것이었다. 소설 '갈매기'를 수차례 읽으며 나도 그렇게 날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다;;; 여하튼, 예술가와 혁명가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래서 예술가로 살고 있는 저자가 내눈에는 혁명가로 비춰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알았지만 야곱이 영어로 제이컵이고 야고보는 제임스란다. 더 이상 성당도 안 다녀서 야고보라는 이름에 대한 애착도 없어졌다. 내가 왜 수천 년 전에 죽은 중동의 어느 인간의 이름을 달고 다녀야 하나. (p. 99)

ㅍㅎㅎㅎ 시원스런 문장이다. 서양사를 읽을 때마다 그 사람들은 어찌나 이름을 자꾸 같은 걸 돌려쓰는 건지 당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손자가 다 같은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는 문화라니 대체 왜 그런 걸까;;; 그렇게 대를 잇는 이름의 정체성은 생각해보면 굉장히 보수적인 면이 있다. 주체적이라기 보다는 연속성과 자신이 속한 집단성을 저절로 갖게 되니까. 여하튼, 어려서부터 엘리트 교육과정에서 영어로 교육받던 저자가 영어이름이 필요했던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 영어이름에 대한 에피소드를 읽으며 저자가 내린 결론이 어찌나 속시원하던지.

서울에 딱 두곳 남았다. 서울대 앞 '그날이 오면'도 축소 이전하여 겨우 명맥을 지키고 있다. (p. 110) 풀무질도 '판올림'이 필요하다. 오늘날 인문사회과학 서점의 역할은 무엇일까. (p. 113) 과거에는 모든 압제의 주체이자 투쟁의 대상이 독재정권으로 환원되었다면, 지금은 가부장제부터 공장식 축산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담론은 분산되었고, 정체성은 세분화되었다. (p. 114) 변화의 기저에는 여전히 책이 있다. 아무리 영상매체가 발달하고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한 교류가 활발해도, 가장 근본적인 연구와 심도 있는 대화는 책으로 이뤄진다. (p. 115)

내가 자주 가던 학교앞의 사회과학서점도 문을 닫은지 오래다. 후원사업도 있었고 이런저런 노력이 있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그렇게 서울안에 사회과학서점은 두곳 남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책은 중요하다. 다른 매체가 아무리 발달해도 최소 수십년간은 종이책의 깊이를 따라올 매체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계발서나 실용서들도 중요하지만 사회문화의 깊이는 서점의 깊이와 닿아있다. 인문사회과학서점을 살리고 논쟁의 깊이를 더해갈때 새로운 미래를 탄탄하게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한국사회는 부유해졌지만 청년 세대는 부유하고 있다. 각자 조각배처럼 둥둥 떠서 목적없이 흐르고 있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중략) 이것은 실존의 문제다. 누군가는 이로 인해 '탈조선'하고 누군가는 아예 세상을 등진다. 하지만 '생존'의 문제와 싸워온 윗세대에게 '실존'의 문제는 가소롭다. 전쟁과 가난과 독재를 겪은 이들에게 정체성과 다양성과 주체성의 문제는 사치다. 20세기 한국인의 지상과제는 부유해지는 것, 즉 근대화의 수면 위로 떠올라 가쁜 숨을 들이쉬는 것이었다. 덕분에 21세기 한국인은 유유히 떠다니고 있다. 다만 왜, 어디로 나아갈지 모를 뿐이다. (p. 129) 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 제각각 발버둥 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발길질이 모든 경계를 깨부수고 있다. 성 정체성, 민족 주체성, 종교 신앙 따위의 관념들이 허물어지고 있다. 별난 인물들이 많이 나와서 이상한 일을 계속 꾸미고 있다. 그래서 요즘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이 아주 흥미롭다. (p. 131)

생존의 문제에서 실존의 문제로 넘어오게 해준 세대에게 감사할 것은 감사해야 겠지만 그렇다고 후세대를 빚쟁이로 보는 관점은 곤란하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은 의무이자 책임이지만 그 과정이 기쁨이고 행복이기도 하다. 성인이 된 자식에게 그동안의 키운값을 내라는 부모가 있는 가정은 결국 불행해지고 만다. 성인이 된 자식은 자유롭게 독립시켜야 한다. 그래야 부모도 자식도 행복해진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붕 떠있는 것 같아보이지만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물위에 유유자적 떠있는 오리도 물아래에서는 열심히 발을 휘젓고 있는 것처럼.

내게 평화주의와 생태주의는 같은 말이다. 평화란 단순히 전쟁의 부재가 아니다. (중략) 적극적 평화란, 전쟁이 사라시고 정의가 구현된상태다. 이 땅의 모든 동물을 위한 생태주의적 고려가 있기 전까지 평화도 없다. (p. 141)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 개인들이 모여 살면서 느슨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공동체, 나에게는 그게 해방촌이지만, 누구에게는 연남동이나 성수동일 수도 있고, 양양이나 제주일 수도 있다. 동네가 미래다. (p. 153) 비건 운동가는 번아웃할 위험이 크다. 명절에 묀 가족과의 식사에서도, 직장 회식자리에서도, 처음 만난 사람의 구스다운 재킷에서도 폭력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 신념과 행동의 부조화를 인정할 용기가 필요하다. 절대적인 기준은 고수하되, 때에 따라 타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동물해방운동은 동물이 느끼는 고통의 총량을 줄이기 위한 것이지 비건의 도덕적 숭고함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나의 신념과 행동 간의 일관성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는 동물들이다. (p. 157)

저자는 역사를 심도있게 연구해 보았고 철학을 의미있게 고민해온 사람이다. 그런 그가 기후변화를 염려하고 생태주의를 넘어 동물해방을 통한 평화와 공존을 주장하는 청년이자 로큰롤을 노래하는 예술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즐거웠다. 가볍지 않은 주제를 가볍게 풀어내고 무거울 수 있는 선택을 자유롭게 하는 이 젊은이의 선택이 앞으로도 불안을 가뿐히 뛰어넘는 행복한 삶으로 구현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해 본다.

"눈치 보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게 많다.

나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고, 적당히 불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