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 글씨체로 밝혀낸 광개토태왕비의 진실
김병기 지음 / 학고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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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해파<渡海破)'가 아니라 '입공우(入貢于)'였다!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가야 신라를 쳐부순(渡海破)게 아니라

왜가 고구려의 신민이 되었다!

 

 

오랜만에 가슴뜨거워지는 역사서를 읽었다.

나는 역사를 좋아하지만 그래서 역사서를 자주 읽는 편이지만 국내역사서는 그닥 자주 읽지는 않는다. 국내 역사 관련 책들은 역사서라기보다는 흥미위주의 책들이 많고 게다가 한국의 역사가 조선사가 다인것마냥 조선사에 치중된 경향이 많아서 찾아 읽어야 할 필요성을 딱히 느껴보지 못했었다. 게다가 국내 역사를 다루면서도 학자다운 양심을 저버린 사람들도 꽤 많아 보이기에 그런 면면들을 대면하느니 그냥 안보고 모르고 지내는게 속편했달까... 그래서 나와 아무 상관없지만 재미도 있고 유익하기도 한 서양사 관련 책들을 찾아 읽고는 한다. 그런데... 이 책은 달랐다!

일러두기2.

그동안 우리는 습관적으로 '광개토대왕'이라고 불렀다. 일제가 그렇게 부른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그러나 비문에는 분명히 '광개토태왕'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태(太)'는 '대(大)'보다 훨씬 큰 개념이다. 비문의 기록을 좇아 응당 '광개토태왕'으로 호칭해야 하므로 증보판에서는 초판의 '광개토대왕'을 모두 '광개토태왕'으로 바로잡았다.

본문을 시작하기에 앞선 '일러두기'에서부터 이 책의 색깔을 명확하다. '비문'에 쓰여진 글자에 집중한다는 것.

중국의 동북공정 이니 일본의 임나본부설 이니 하는 말들은 이미 지나간 옛스럽고 무용한 그런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현재진행중이었고 미래를 내다본 주장들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중국에든 일본에든 어느 한쪽에 한국이 먹히고 말 상황이었다. 그저 헛된 역사논쟁이라고 치부하고 말 것이 아니었다. 그 핵심에 광개토태왕비문이 있었다.

그러한 연구를 토대로 일제는 조선을 당쟁을 일삼다가 망한 나라로 규정하면서 식민 지배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식민 사학의 틀을 세웠고, 병탄 후에는 우리에게 그런 식민 사학을 주입했다. 일제는 실증사학을 내세워 유물이야말로 객관성을 갖는다고 주장하면서 유물을 근거로 우리의 역사를 실증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면서 그들은 우리의 역사유물을 없애기도 하고 변조하기도 했다. 변조한 유물을 들어 실증을 강조하여 유물을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우리의 역사를 왜곡 날조하였다. (p. 12) 일제가 우리의 역사를 자기네들의 필요에 맞도록 혈안이 되어 왜곡하던 그 시기에 역사 왜곡의 제물이 되어버린 게 바로 광개토태왕비이다. (p. 13) 그런데도 왜 우리 학계는 이런 정황 증거는 외면하고 '일제가 설마 비를 변조까지 했겠어?'라는 태도를 보이면서 관대하기 이를데 없고,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광개토태왕 당시의 정황을 파악한 다음에 그 정황에 맞춰 광개토태왕비문을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은 왜 그토록 만연해 있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p. 14) 내 연구의 핵심은 글자의 변조를 증명하고 원래의 글자를 찾는 데에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핵심은 신묘년 기사에 나오는 '속민(屬民)'과 '신민(臣民)'이라는 어휘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밝힌 데에 있다. 속민과 신민의 분명한 의미 차이에 입각하여 신묘년 기사를 해석하면 고구려가 왜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문장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연구의 핵심내용인 것이다. (p. 16)

저자는 오랜세월 서예를 학문적으로 연구해온 서예가이자 서예학자이다. 엣 역사는 한자로 전해지고 있으니 서예학은 그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는 학문이다. 그런데 국내 대표적인 서예학자의 연구를 국내 사학계에서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는 상황이 저자의 답답함 못지 않게 나도 답답해 졌다. 신라와 백제의 역사 관련해서는 국내에 전해지는 역사서들을 바탕으로 분석하려고 하면서도 '광개토태왕비문'해석에 있어서는 '일본서기'라는 고서의 정황에 맞춰 해석하는 걸로 보이는데, '일본서기'는 일본에서나 고대역사 관련 책으로 애지중지하는 책이지 당시의 한반도역사와 중국역사와 비교해보면 거의 위서에 가까운 책이라는 것은 조금만 검색해봐도 바로 나온다. '광개토태왕비문'의 변조관련 주장은 100여년에 가깝게 이어지고 있다는데 국내 사학계는 이 주장에 전혀 개입하지 않아온 듯 보인다. 왜 일본이 제시한 증거들의 변조가능성을 검토하지 않는가? 그러는 사이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고 일본은 한반도 남부의 역사에 임나본부설을 주입시켰다. 왜 한국 사학계는 이런 편입과 주입을 저지하지 못했는가? 그동안 한국 사학계는 대체 무엇을 연구해왔단 말인가? '어차피 사실이 아닌데' 하며 안일한 태도로 수수방관하고 제대로 된 반박거리를 준비하지 않는 동안 중국과 일본은 탄탄히 논리를 만들고 증거까지도 만.들.어.왔다. 한국사학계는 중국과 일본의 들러리인가?

마침내 광개토태왕비 앞에 섰을 때 나는 뜻 모를 비감에 사로잡혔다. 1600년 고령을 용캐도 견뎌왔건만 이제는 지쳤다는 듯, 비면에는 많은 상처가 나 있었다. 게다가 만주 벌판에 늠름하게 우뚝 서 있어야 할 광개토태왕비는 중국이 만들어놓은 방탄 유리창 속에 갇혀 있었다. 그 옛날 요동 벌판을 호령하던 광개토태왕도 갇혀 있었다. 아니, 고구려 역사 전부가 옹색한 유리창 속에 갇혀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유리 감옥에 갇힌 광개토태왕비를 지키고 있는 것은 검둥 개 두 마리였다. 개 두 마리, 이 것은 은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광개토태왕비 각의 사방에 놓인 네 개의 개집. 그중 두개의 개집에는 개가 들어앉아 감시라도 하듯 내방객들을 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p. 34 ~ 35)

네 개의 개집. 검둥 개 두 마리. 하아...

2004년 저자가 직접 보았던 그 모습이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모습으로 있던 어차피 국내 사학계의 외면은 마찬가지 상황이 아닌가... 그야말로 할많하않...

광개토태왕비! 서기 414년에 세운 이 비석은 높이가 6.39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자연석으로 만들었다. 위와 아래 면이 약간 넓고 허리가 약간 좁아서 보기에 따라서는 잘록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밑면의 너비는 제1면(동남방향)이 1.48미터이고, 제2면(서남방향)이 1.35미터 이며, 제3면(서북방향)은 2미터이고, 제4면(동북방향)은 1.46미터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한 이 거대한 비석은 화강암으로 된 좌대위에 세워졌다. 비석의 각 면에는 탄본에서 본 것처럼 행의 줄을 맞추기 위한 사잇줄(계선)이 쳐져 있다. 이 사잇줄에 맞춰서 1행에 보통 41자씩, 네 면을 돌아가며 모두 44행에 글씨가 새겨졌다. 음각한 비문의 글자가 모두 1,775자에 이른다. 중국 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이 중에서 이미 풍화되고 훼손되어 판독이 힘든 글자가 141자라 한다. 글자 하나의 크기는 가로나 세로가 보통 12센티미터 정도로 접시만 하며, 큰 글자는 한 변이 16센티미터에 이른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제1부에는 고구려 건국 신화와 광개토태왕의 행적을 간단히 적었다. 제2부에는 광개토태왕이 비려와 백제를 토벌하고 신라를 구했으며 왜구를 패주하게 하고 동부여 등을 토벌한 사실과 함께 획득한 성 및 촌락과 인마의 규모와 수를 적었다. 제 3부에는 광개토태왕이 생전에 내린 교언에 근거하여 광개토태왕릉을 지키는 책임을 다할 백성들의 출신과 가구 수 등을 적었다. (p. 36)

광개토태왕비의 탁본을 일제가 취득한 정황도 탁본 자체의 신뢰성도 비문의 자의적 해석도 모두가 미심쩍었지만 저자의 말처럼 광개토태왕의 행적을 기리는 비문에 왜의 승전을 기록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저자가 구현한 변조의 앞과 뒤가 딱딱 들어맞아서 대체 이 변조를 왜 한국 사학계가 인정하고 뒷받침해주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시 정통 사학계가 밝혀내지 못한 것을 이른바 재야 사학자가 밝혀낸 것이라서?

그렇다면 광개토태왕비를 어떻게 구해낼 것인가? 무엇보다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혹자는 '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고 하지만, 나는 '역사는 이긴 자의 것이 아니라 아는 자의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알아야 한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지킬 수 있다. 광개토태왕비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 그것이 세 번의 죽음에서 광개토태왕비를, 그리고 고구려를 살려내는 길이고 나아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살리는 길이다. 일본은 정부가 나서서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나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고,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의 역사 왜곡 사업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마당이다. 우리라고 제대로 역사를 보고 제대로 알자고 하는 취지의 역사 교육을 강화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p. 42)

공감한다. 알아야 한다. 그것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러니 읽어야 한다. 많이 읽어야 한다. 그래야 책 중에서도 옥석을 가릴 수 있고 누구의 주장이 더 타당한지 판단할 수 있다. 한쪽에만 매몰되지 않기 위해 바르게 읽고 제대로 알아야 한다. 역사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현재를 반추하는 거울이자 미래를 엿보게 해주는 망원경이다.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 역사에 늘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과거와 현재를 모르고 세운 미래는 사상누각일 뿐이다.

일본은 구석기 시대의 유물을 조작하는 세계적 역사왜곡도 서슴치 않았던 전적이 있고 역사교과서 왜곡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들의 역사를 창조하려 한다. 중국은 고구려 역사와 유적을 유네스코에 등재시키며 자신들의 역사속으로 교묘히 고구려역사와 앞으로의 북한땅까지 복속시키려는 의도를 찬찬이 진행중에 있다. 그 틈바구니에서 한국의 역사는 그저 속절없이 잘려나가고 말 것인지...

사마천은 이런 설명을 통해 역사는 과거에 대한 기록임과 동시에 현재를 비추는 거울로서 현재에도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설파하였다. 이런 점에서 사마천의 역사관은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고 한 역사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의 역사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레오폴트 랑케를 대표로 하는 실증사학자들은 역사를 사회과학으로 인식하여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역사가의 견해를 철저히 배제하고 역사적 사실만을 규명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실증사학은 증거에 기초한 사실의 기술에 전력을 다했다는 점에서 근대 역사 연구에 기여한 바가 크다. 그런가 하면, 크로체나 E.H.카등은 역사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해석의 문제로 파악하려고 했다. 크로체가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고 말한 것도 역사적인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그 역사를 해석하는 시점의 사회 분위기나 학문적 연구 동향 등에 따라 다른 조명과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E.H.카 또한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간의 계속적인 상호작용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함으로써 역사적 사실 자체보다는 그것을 탐구하는 역사가의 관점을 더 중요시하였다. (p. 312)

역사가의 태도에는 두 극단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역사의 교훈을 전하기 위해 깎을 것은 깎고 보탤 것은 보탠 공자의 '춘추필법'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 그 자체가 말하게 함으로써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보여준다는 '랑케필법'이다. 춘추필법은 2천년 동안 중국 문명권의 역사 서술을 지배했고, 랑케필법은 100년 동안 서구 역사학계에서 유행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이 둘 사이 어딘가에 있다는데, 중국의 춘추필법 다운 동북공정과 일본의 (변조한 증거까지도 사실이라고 바탕에 깔고 시작하는) 랑케필법다운 임나일본부설 사이에서 한국의 사학자들은 역사적 사실의 무엇을 검증하고 그런 역사와 어떤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무엇보다도 국가적 역사교육사업이 대입시험에 한국사필수로 그친것을 넘어 중국과 일본처럼 국가적 무언가를 좀 했으면 싶다.

한국 역사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독도 문제 만큼이나 광개토태왕비문 이 중요한 문제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어서 버려진 역사를 빼앗기고 나중에 땅을 치며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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