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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단호한 행복 - 삶의 주도권을 지키는 간결한 철학 연습
마시모 피글리우치 지음, 방진이 옮김 / 다른 / 2020년 11월
평점 :
절판
2년쯤 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을 읽었었다. 그땐 로마사에 한창 빠져들려 했던 때라 오현제 중의 마지막 황제가 남긴 책이라는 것 때문에 관심이 생겨 읽게 된 책이었다. 읽으면서 거대한 로마제국의 황제가 이렇게까지 자아성찰을 하다니 대단하다 싶긴 했지만 솔직히 좀 재미가 없긴 했다. 그래서 본문이 끝나고 뒷부분에 있던 에픽테토스의 명언집을 음~ 명언이네~ 하며 그냥 흘려읽었더랬다. 그 뒤로 이런저런 로마사책들을 읽고 나서 이 책을 접하니 이제야 [명상록]을 제대로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쉽다. 책도 읽는 시기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다가오는지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책을 읽고 에픽테토스의 철학을 접하고 조만간 세네카를 읽을 예정이니 후기스토아철학을 거꾸로 읽어가게 된 셈이다. 그 사이에 보에티우스와 키케로의 책도 읽은 것이 있으니... 뭐 뒤죽박죽이 되긴 했다;;; 하지만 이제라도 스토아철학의 일면을 보게 된 것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토아철학을 세운 제논의 책을 읽을 수 없는 바에야 에픽테토스의 책이 가장 스토아철학적 일것 같아서. 스토아철학을 읽고나면 로마제정초기의 철학자들의 사고와 기독교에의 금욕적 영향과 나중에 스피노자까지 이어지는 범신론의 경향을 미루어 짐작하는데 유용할 듯 하다. 하지만 주의할 점은 이 책은 에픽테토스의 철학서 원문번역서는 아니다.
저자는 철학과 교수이자 유전학 및 진화생물학의 박사이며 다양한 글을 기고하는 학자인데 철학을 현대인의 삶에 맞춰 실용적으로 다듬는 일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이 책도 그런 연장선에 있는 철학실용서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에픽테토스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그의 진짜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다. '에픽테토스'는 그리스어로 '구매된 것'을 뜻한다. 에픽테토스는 노예였기 때문이다. 그는 기원후 35년 즈음에 히에라폴리스에서 태어났고, 네로 황제의 비서관을 지낸 부유한 자유 시민 에파프로디토스에게 팔렸다. 이후 로마로 온 에픽테토스는 당시 가장 훌륭한 스승으로 꼽히던 무소니우스 루프스의 제자가 되어 스토아철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p. 12) 선배 스토아주의자들처럼 그도 곧잘 권력에 진실을 말하는 위험한 행동을 했다. 93년에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그를 로마에서 추방했다. 에픽테토스는 굴하지 않고 그리스 북서부에 있는 니코폴리스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 학교를 세웠다. 에픽테토스의 학교는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철학 학교로 명성을 날렸다. 훗날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 학교에 들러 유명한 스승인 에픽테토스에게 존경을 표했다. 에픽테토스는 자신의 롤모델인 소크라테스처럼 아무것도 글로 남기지 않았다. 대신 수많은 제자를 가르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 집중했다. 다행히도 그 제자 중 한 명이 니코메디아의 아리아노스였다. 아리아노스는 훗날 공무원, 장군, 역사가, 철학자를 지냈다.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는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은 아리아노스가 기록한 [담화문] 네권(원래 여덟 권인데 안타깝게도 절반은 유실되었다) 과 이를 요약한 [엥케이리디온]이라고 불리는 짧은 지침서 한 권이다. (p. 14)
철학을 전공한 저자가 대학원 철학 수업에서조차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던 에픽테토스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당연히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저자는 에픽테토스의 철학을 처음 접했을 때 세네카와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학파 철학자들로 유명한데 왜 에픽테토스는 그정도로 알려지지 않은건지 충격을 받을 정도로 놀랐다고 한다. 에픽테토스의 글과 가르침 특히 [엥케이리디온] 은 로마의 마지막 스토아학파 철학자로 불리는 아우렐리우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데 [명상록]은 유명해도 [엥케이리디온]은 그렇지 못하다. 나도 [명상록]을 읽으면서야 에픽테토스에 대해 알게 됐었던 것 같다.
저자에 따르면 [엥케이리디온]은 중세 기독교 수도사의 영성 수련 지침서로 활용됐고 르네상스시대와 계몽시대에도 인기를 누렸으며 셰익스피어의 [햄릿] 이나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에서도 표현될 만큼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게다가 현대의 심리 치료 기법 중 가장 성곡적이라고 인정받는 인지행동 치료요법의 태동에서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이 활용됐다고 하니 스토아철학은 은근히 2천년의 세월 내내 우리 곁에 있어온 셈이다. 그런 스토아주의의 실용성에 초점을 두고 [엥케이리디온]을 현대인의 삶에 맞게 수정하고 더불어 스토아주의 철학 전체를 보완하고자 시도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법' 이라는 글을 통해 이 책을 '실전 지침서'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2부라고 하고 있는데,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을 원문 그대로가 아닌 현대어로 현대생활에 맞게 각색한 내용이자 이 책의 본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아무리 철학자이자 학자라고 해도 고대 철학자의 가르침을 임의적으로 마음데로수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점을 저자는 충분히 인정하며 3부에서 그 문제점들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 [부록]으로 에픽테토스의 가르침 원전과 저자가 수정한 내용을 비교하여 표로 정리한 것을 덧붙이고 있어서 원전을 읽는 이들에게 자신의 해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점이 돋보였다.
견유학파는 키니코스학파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cynic'이라는 단어는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냉소주의자를 뜻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스토아주의자드를 가리키는 'stoic'라는 단어도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금욕주의자를 가리키지 않았다) 견유학파는 매우 소박한 삶을 추구하면서 도덕적 인격을 수련하는 데 헌신하는 학파였다. 제논은 크라테스를 비롯한 몇몇 철학자 밑에서 공부했고, 기원전 300년 경에는 직접 철학을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일부러 아테네의 대표 광장 아고라 근처에 있는 기둥으로 둘러싸인 열린 공간을 골랐다. 당시 사람들은 이 장소를 색칠한 포치(지붕이 있는 현관)를 뜻하는 '스토아 포이킬레'로 불렀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까지도 사용되는 '스토아주의'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p. 25) 제논의 새로운 철학은 우리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중략) 인간의 본성을 진지하게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중략) 인간으로서 좋은 삶이란, 즉 고대 그리스인이 말한 에우다이모니아란, 이성을 통해 사회가 더 나은 곳이 되도록 기여하는 삶이다. 그래서 스토아주의자는 세계시민으로서 인류 전체를 하나의 큰 혈족으로 여겼다. (p. 26) 스토아주의자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한 가지 방법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4대 기본 덕목을 도덕적 나침반으로 삼는 것이다. 4대 기본 덕목이란 실천적 지혜, 용기, 정의, 절제다. (p. 27)
책의 앞부분에서 에픽테토스와 스토아주의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는 부분이 굉장히 도움이 되었다. 본문에 앞선 이런 안내는 고대그리스철학을 모르더라도 아니 철학 자체에 부담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작고 얇은 이 책을 큰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엥케이리디온]의 첫 구절에서 통제의 이분법에 대해 설명한다.
어떤 것은 우리 뜻대로 할 수 있고, 어떤 것은 우리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생각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의견, 동기, 욕구, 반감 등 우리 자신이 하는 것들입니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은 몸, 재산, 평판, 직장 등 우리 자신이 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p. 32)
'나의 뜻대로 할수 있는 것' 과 '나의 뜻대로 할수 없는 것'을 구분하려 노력하는 태도 그것이 스토아주의의 핵심이었다. 이것을 제대로 구분할 줄 알게 되면 그 어떤 결과에 대해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되고 궁극적으로 스토아철학이 추구하는 이상적 삶에 가까워지게 된다. '선택'은 하되 '갈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2부를 읽으면 에피테토스의 현대화된 가르침을 담은 명언들이 쏟아진다.
온전히 개인의 몫인 것들에 집중하면 어떤 일이 닥쳐도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그 누구도 질시하지 않고, 우주의 섭리에 좌절하지 않고서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간을 들여 훈련하면 정말로 개인에게 달려 있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한 관심을 현명하게 배분하고 균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p. 49)
이 훈련을 정말 제대로 한 사람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였던 것임을 [명상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을 먼저 읽고 [명상록]을 읽었더라면 감회가 달랐을까...
우리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을 간절히 원합니다. 반대로 온전히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소홀히 합니다. 따라서 먼저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우선순위를 바꿔야 합니다. (p. 53)
어리석은 사람은 사물에 대한 자신의 판단의 결과를 두고 남 탓을 합니다. 어느 정도 현명해진 사람은 남 탓을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탓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조차도 탓하지 않습니다. (p. 60)
여관에 들른 나그네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그 무엇도 진정 우리 것이 아니라 우주에서 빌린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p. 68)
개인의 자유는 개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온전히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만을, 우리가 더 낫게 바꿀 수 있는 것만을 바라면 됩니다. (p. 75)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우주의 연결망이라고 할 수 있는 인과관계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연결망에서 우리는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없어서는 안 되는 점입니다. 따라서 신이나 다른 무언가를 탓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들에 관심을 집중하고 나머지 것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더 합리적입니다. (p. 106)
주변에 어떤 사람을 둘지도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데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에는 초대받았다고 해서 응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 자리가 당신에게 이롭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그 무리에 휩쓸려 그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중략) 우리가 어울리는 무리는 좋을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우리의 영혼을 물들입니다. 그런데 굳이 나서서 자신의 영혼을 검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p. 114)
읽다보면 저절로 명상을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불교분위기나 요가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존감을 세우는 근래의 심리서나 힐링서들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아서 수월하게 읽히면서도 수긍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에픽테토스는 1세기 말부터 2세기 초까지 살았다. 그는 전지전능하지 않았다. 에픽테토스도 우리처럼 자신이 사닌 시대와 장소의 영향을 받는 인간이었다. 그의 철학이 중요한 이유는 그의 가르침이 인간 본성에 대한 보편적 이론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가 로마제국 시대를 사는 시민이어서 지지하거나 당연하다고 여긴 특수한 관념들은 부수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시간적·장소적 한계야말고 우리가 에픽테토스가 제시한 사례의 일부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p 185)
고전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원문 의미 그대로 해석하지 않는 것이라고,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인물적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맞추어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해오던 나로서는 저자의 기본태도에 많은 공감이 갔다. 그래서 저자는 에픽테토스를 현대적으로 봤을때 범신론자 이자 유물론자 이자 평등·평화주의자로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픽테토스가 아리아노스에게 가르침을 전한 뒤 지금까지 2,000년이나 흘렀다. 이 책은 에픽테토스에 대한 헌사인 동시에 그의 지혜를 새로운 세대에게 소개하는 개정판이다. 이 책을 통해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사람들이 히에라폴리스의 현자인 에픽테토스, 더 넓게는 스토아주의의 지혜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이 나의 원대한 꿈이다. (p. 195)
내가 스토아주의자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돌이켜보니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은 내가 살고 있는 방식에서 구현되는 부분들이 상당히 있었다. 내 마음이 편해지는 선택 혹은 내 자존감이 지켜지는 선택을 하는데 있어 에픽테토스의 명언을 현대적으로 되살려낸 이 책은 최근의 심리서 나 힐링서들이 전해주는 것과 또다른 평안을 준다. 아마 고대부터 이어져 온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신뢰가 더 가서 그런것 같다. 이 오래된 지혜가 여전히 활용될 수 있기를 바라는 저자의 꿈을 나역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