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미터O
이준영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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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방사능으로 뒤덮이자,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작은 생존시설에서 살아남는다. 하지만 방사능이 남긴 후유증으로 인해 인류는 종의 최후를 맞이할 운명에 처한다. 그 즈음 시설 밖에서 자의식을 가진 기계종 하나가 발견되고, 자신을 '이브'라고 밝힌 기계종은 생존자들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오는데, 인류와 기계문명에 대한 저자의 깊이있는 통찰과 신화적 상상력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SF 서사극

 

파라미터 가 무슨 뜻일까? 국어사전을 검색해보면,

1. 두 개 이상의 변수 사이의 함수 관계를 간접적으로 표시할 때 사용하는 변수.

2. 사용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자료가 처리되도록 하기 위하여 명령어를 입력할 때 추가하거나 변경하는 수치 정보.

라고 나온다. 간단히 매개변수 라고 생각하면 된다. O 는 무엇일까 했는데, 읽고나니 공란 이라는 것을 알았다. 파라미터 라는 함수 뒤에 00 이라는 어떤 매개 지시어가 들어갈 자리라는 의미다.

이 공란이 이 O 가 이 책을 관통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당신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소녀의 출생은 소녀의 책임이 아니다. 그녀는 그냥 '태어남을 당했다' 태어나 보니 그 시기가 하필 종족의 마지막이었고, 그 장소가 하필 종족의 무덤이었을 뿐이다. 소녀는 인류의 마지막 세대였다. 선조들의 원죄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으로 태어난 저주받은 세대. 매정한 어른들은 소녀를 비롯한 어린아이들을 작은 방에 가축처럼 몰아넣고, 기계 시종들에게 목동 역할을 맡겼다. (p. 9~10)

소설의 시대와 장소를 안내하려는 듯 '프롤로그'에서는 임의의 한 소녀를 통해 인류의 마지막 시기 마지막 세대 를 묘사한다. 방사능이 강한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최후의 인류 수십명이 지내는 시설에서 벌어지는 일이 이 작품의 주요 줄거리다. 인류가 종족 번식의 기능을 잃은 셈이라 이 시설은 곧 마지막 인류의 무덤이 될 것이다.

"너도 고생 그만하고 쾌감기를 써보지 그러냐"

"전 그렇게 삶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요"

"허비한다는 말은 본래 목적에 맞지 않게 헛되이 쓴다는 뜻이지. 그럼, 삶의 본래 목적이 대체 뭐냐?"

"삶의 본래 목적이요?"

"그래. 어떤 인생을 살아야 삶을 '허비하지' 않는 건데? 헛된 꿈을 좇는 것? 행복을 추구하는 것? 아니면 저기 저 게이브처럼 신의 뜻에 따르는 것?"

" …… "

"우리 삶에 본래 목적이라는 게 정해져 있긴 한 거냐? 조슈. 넌 어떤 삶이 허비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무것도 못 하고 죽은 낸시는 삶을 허비한 거냐?" (p. 29)

미래가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시설의 유일한 엔지니어 조슈는 자신이 맡은 책임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면서도 왜 그렇게 자신이 열심히 하는건지 치열하게 고민한다. 시설을 탈출하여 결국 죽음으로 돌아온 소녀 낸시를 구조하다가 낸시가 들고 있던 전파신호기를 손에 넣게 되면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누군가는 헛된 꿈이라도 꾸고 누군가는 신의 뜻이라며 고집스런 외길을 가고 누군가는 행복을 추구하려 노력한다. 그런 사람들 누구도 자신의 삶을 허비한다는 생각은 안하지 않을까... 하지만 삶의 목적을 고민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슈말고는.

"글쎄, 사람마다 저마다의 목적이 있었겠지. 아주 먼 옛날 동물처럼 살던 조상들에게는 생존 내지는 번식이었을 테고. 문명이 생긴 후에는 누군가는 왕의 명령이나 신의 목소리에 목숨을 걸기도 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순히 밥벌이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걸세. 삶의 의미 같은 것도 물질적 풍요가 뒷받침되어야 고민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럼 풍요로운 시대의 선조들은 어땠을까요?"

"재산을 늘리는 일이나 깨달음을 얻는 것, 개인의 행복이나 정신적인 평온 등 각자 자기가 믿는 대로 살지 않겠는가? 아, 아마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삶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들도 있었을 테지, 나처럼 말이네" (p. 31)

조슈는 살아갈 이유를 찾고 싶었다. 그리고 엄마도 찾고 싶었다. 이 시설 곳곳에 남아있는 엄마의 연구흔적들을 느낄때마다 절실하게.

시설 내 다수의 사람들은 할일도 해야할 일도 없이 무력하게 쾌감기에 머리를 박거나 수면실에 박혀 지내곤 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나마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시설을 관리하는 것이 엔지니어인 조슈가 하는일 해야할 일이었다. 왜그러고들 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여하튼 살아있으니까. 그러다 태풍으로 시설에 위험이 닥친다.

"두 분 모두 진정하세요. 이렇게 의견 충돌이 심하다면, 쾌감기 사용 제한에 대해 합의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쾌감기 말고, 다른 제안을 하실 분은 없습니까?" (p. 68)

"씨앗 탱크에는 선조들의 건강한 유전자가 보관되고 있어요. 그걸 꺼버리면,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멀쩡한 인간 유전자는 이 지구상에 단 하나도 남지 않을 거라고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모릅니까? 멸종입니다. 멸종!" (p. 71)

엔지니어인 내 의견은 참고할 거리도 되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일 죽더라도 오늘은 쾌감기를 쓰고 싶은 하루살이들을 데리고 민주주의를 시도한 자체가 웃기는 일이었다. (p. 75)

씨앗 탱크에 대한 논쟁은 곧 누굴 더 희생해서 입을 줄일지에 대한 미치광이 토론으로 이어졌다. (p. 173)

시설 내 전력위기가 닥치자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익만을 고수하려 하는 민낯을 드러낸다. 그리고 시설내 가장 많은 전력을 소모하는 씨앗탱크에 전력을 끊자고 한다. 하지만 이 시설은 애초에 씨앗탱크를 위해 세워진 것이었다. 그 시설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는 일종의 더부살이였다. 씨앗탱크는 인류가 남긴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런데 단 며칠을 더 살고자 멸종을 언급할만큼 사람들은 후안무치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잠시만 시간을 주시면, 제 친구를 추모하고 뒤따르겠습니다"

"뭐? 기계종이 친구를 추모한다고?"

이브는 이미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자신의 '친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녀석은 시설에 있는 기계종들과는 전혀 달랐다. (p. 91)

"그 말씀조차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왜 저는 창조주님의 논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지요?"

그러게 말이다. 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든 거야. (p. 109)

"이 녀석은 초기 세팅값 같은 건 없어. 일일이 가르쳐 줘야 해. 사람처럼" (p. 111)

어찌어찌 전력난을 해소하고 엄마의 흔적을 추적하던 중 조슈는 벌판에서 처음 보는 기계종 '이브'를 만난다. 시설에 인간을 돕는 기계종들이 있었기에 낯설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이브'라고 소개한 이 기계종은 조슈를 창조주님 이라고 부르며 질문들을 퍼부었다. 모든 것에 '의미'를 이해하려 했다. 이브를 시설로 데려와 살펴보던 조슈는 이브를 활동하게 하는 것이 '파라미터O:' 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공란에 조슈가 무엇을 입력해야 할까. 누가 만든 것일까 이 희한한 기계종은. 왜 이렇게 만든 것일까.

"창조는 하나님의, 하나님만의 권능입니다. 그 피조물인 우리가 그 권능에 도전하는 건 신에 대한 모독이에요. 우리를 창조주라고 숭배하는 기계를 만들고, 거기에 이브라는 이름까지 붙이다니, 정말 불순하기 짝이 없군요! 이건 악마의 인형이에여! 당장 폐기해 버리세요!" (p. 121)

시설내 목사인 게이브목사는 이브를 보자마자 불같이 화를 낸다. 마지막 남은 인류에게 맹목적인 광신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확인하게 해주는 존재인 게이브목사, 그가 하는 일마다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화가날 지경이라 욕이라고 퍼부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잘됐네. 넌, 언젠가 엄마가 되고 싶어 했잖아" (p. 125)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법한 이 한 문장이 왜 그토록 내게는 오래남은 문장이었을까... 아마도 조슈의 파라미터O는 '엄마' 였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자신의 엄마를 찾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이브와 함께 하게 되면서 조슈에게 엄마의 의미는 변화해 간다.

이브의 날카로움은 종종 이런 식으로 허를 찌르곤 했다. (p. 139)

생명체의 출산과 다를 바 없는, 경건하기까지 한 광경에 나는 말을 잃었다. (중략) "주인님, 오셨군요. 생산이 완료되었습니다" (p. 142)

"저희 고유의 언어를 통해서, 제 자손에게 여러 지식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p. 143)

이브는 스스로 생각하는 인공지능 기계종이다. 게다가 자체 생산능력과 자체 고유언어도 갖고 있었다. 이브를 알면 알수록 이브는 놀라운 존재였다. 또다시 닥친 시설의 전력위험에 이브의 도움이 결정적이게 되면서 이브는 종족을 늘리게 된다. 하지만 또 미친 목사의 등장이다.

"이전과 같은 기계종들이었다면 나도 아무 말 안 했을 겁니다. 그 정도의 인공지능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이 녀석들은 우릴 창조주라고 숭배하고, 이제는 한술 더 떠서 번식까지 합니다. 어떤 이유로든, 더 이상 주님의 권능에 도전하는 건 그냥 두지 않겠어요!" (p. 149)

모든 것이 신의 뜻대로. 신의 뜻이 인류멸망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받아들이며 가만히 앉아 천국에 갈 기도나 하며 지내는 것이 유일한 삶의 이유라는 사고방식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언젠가 엄마를 찾아내 시설로 당당히 데려오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그래, 어쩌면 내 머릿속의 파라미터O는 정말로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엄마의 어두운 과거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 이후의 좋았던 기억이, 미움을 희석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용서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엄마를 놓아주기로 마음먹었다. (p. 169)

게이브목사와 지호아저씨의 언쟁을 통해 조슈는 엄마의 죽음(혹은 탈출)에 얽힌 내막을 조금 알게 된다. 지호아저씨는 시설내 유일한 의사이자 엄마와 조슈를 연결해주는 매개자였지만 쾌감기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권하는 조슈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여하튼, 시설의 위기를 이브족들로 넘기게 되면서 이브족들의 활동범위는 점점 더 넓어지게 된다.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지나 싶더니 조슈에게 새로운 국면이 다가온다.

"노예라고?"

노예가 있다는 것은 곧 기계종들이 계급 사회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네, 그렇습니다. 아스족에게 바칠 제물이라 합니다."

"아스족이라고 그건 또 뭐야?" (p. 190)

지상의 모든 것들이 쓸려나간 이 행성 위에서 기계종들이 자연적으로 발생했을 리는 없다. 분명히 그들을 만든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누군가의 정체와 목적이었다. 우리처럼 전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기엔, 이런 식으로 기계종들끼리 전쟁놀이를 시킬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기계종들이 동남쪽으로 가지 못하도록한 걸 보면 우리 시설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호적이라면 다행이지만, 만에 하나 적대적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p. 202)

이브족들이 늘어나고 시설이 안정되면서 그동안은 어려웠던 시설 밖 세계를 탐험하게 된 조슈는 시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브족들과 흡사한 기계종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 기계종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그들 각자가 이루고 있는 사회는 저마다의 특징이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상황인걸까. 새로운 기계종들의 사회를 알면알수록 점점더 점입가경이었다.

"마치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처럼, xxx 설계한 인공지능의 기저에는 스스로 여러 가치를 비교하고 우선권을 정하는 알고리즘이 있었어. 하지만 그 겨로가 녀석들은 마치 짐승처럼 자신의 욕구만을 최우선으로 추구하게 되었지. 보다 인간적이고 통제가 가능한 기계종을 만들기 위해서, xxx 다른 어떤 가치 보다 우선하는 '최종목표'만큼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게 수정했어. 그게 바로 파라미터O야. 그러니까, 네가 고민하는 삶의 목적과는 근본부터 다른 개념이지"

"그게 그거죠"

"내 말을 뭐로 들은 거냐? 그건 그냥 일개 변수일 뿐이야" (p. 278)

파라마티O 와 삶의 목적이 정말 다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브족들에게 입력하는 사명과 인간이 추구하는 사명이 과연 무엇이 다른 것일까? 소설을 읽으면 읽을 수록 질문의 무게감은 더해지는 기분이었다. SF 소설이 보여주는 미래가 반드시 디스토피아일 필요는 없지만 대부분 디스토피아인것은 우리가 만들고 있는 미래에 대한 경고일 것이다. SF가 던지는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혼자서 삶의 의미를 질문하고 찾아다니느라 버거웠따. 내 삶에 목적이 있다는 착각이 낳은 압박감, 최후의 인류로서, 선조들을 대표해 마지막 발자취라고 할 만한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는 근거 없는 망상, 그 족쇄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세대의 절망감과 뒤섞여, 이 외진 곳까지 나를 끌고 왔다. 이제 곧 그 꿈에서 께어날 것이다. 모든 것을 마무리할 시간이 마침내 다가오고 있었다. (p. 356)

뒤로 갈수록 반전을 거듭하는 이 소설은 천천히 진행되오던 전개가 막판에 휙휙 뒤집어지는 느낌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전의 연속이었다. 앞서 진중하게 다가왔던 질문들이 긴박한 속도감에 잠시 멈칫한 사이 인간의 무지가 폭발해버렸다.

"…… 조슈 님은, 삶의 목적을 찾으셨군요" (p. 384)

내가 사람의 몸으로 듣지 못했을 뿐이다. 이브는 울수 있었다. (p. 385)

요즘 SF에서 자주 보이는 뇌스캔과 싱귤래리티 까지 활용되면서 새로운 종족에 대한 미래상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인류에겐 디스토피아일수 있지만 새로운 종족에겐 유토피아일수도 있는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소설이었다. 처음부터 건넨 질문은 마지막장을 덮고나서 더 진하게 되묻고 있다.

당신의 파라미터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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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팜
조앤 라모스 지음, 김희용 옮김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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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은 수익성 좋은 비즈니스다, 당신이 규칙을 따르기만 한다면.

비밀 대리모 시설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본격 임신·출산·육아 스릴러

 

 

베이비팜, 제목을 본 순간 '시녀이야기'가 안 떠오를 수가 없었다. 여성이 임신을 할 수 있는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펼쳐지는 디스토피아.

'멋진 신세계' 에서는 아기를 아예 시험관에서 종류별로 키워냈는데 '시녀 이야기' 에선 특별한 계급만 번식의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시녀를 통해서. 그 시녀는 걸어다니는 자궁일뿐 인격체가 아니었다. 그런데 최고급 리조트 시설에서 지내는 대리모들의 이야기라... 비록 소설 제목이 THE FARM 이긴 하지만 과연 농장이라고 치부하고 넘길 수 있을까? 리조트 라고 볼 수 없는 이유를 찾아낼 수 있을까? 이 시대 양극화된 자본주의와 연결된 임신은 좀 다른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었다.

합숙소에는 늘 누군가가 있다. 야간근무 전에 쉬고 있거나 주말 휴무 중이거나 새 직장을 기다리는 이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필리핀 사람들이고, 그중에서도 상당수는 고향에 자식을 남겨두고 온 어머니들이다. 다들 세입자 중 유일한 아기인 아말리아를 애지중지한다. 자식을 데리고 와 그들 사이에서 살 만큼 필사적인 어머니를 둔 이 유일한 아기를 말이다. (p. 21)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거의 다 여자들이다. 그리고 어머니들이다. 누군가의 어머니. 그중에서도 미국땅에서 가정부나 유모로 일하는 필리핀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저자는 필리핀 출신이다. 비록 자수성가한 부모의 고난을 아는 2세대가 아니라 내내 잘 살아온 계층인데도 조국의 여성들이 이국땅에서 겪어내는 일들에 항상 귀를 열어두고 있었던 듯 하다.

아테는 필리핀 여성들의 하숙집 비슷한 퀸스의 합숙소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베테랑 이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열심히 노동하고 돈을 벌어 필리핀으로 보내고 있는 중이다. 아테는 신생아 보모이다. 최상위층의 아기들만 전문으로 돌보는 신생아 보모. 잠시 몸이 불편해졌을때 아테는 합숙소에서 갓태어난 딸 아말리아와 함께 지내는 제인에게 자신의 일을 맡아줄 것을 부탁한다.

그들에게 시간이 별로 없기에, 아테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다급한 목소리로 제인에게 일러준다. 반드시 유니폼을 입어야 해.(중략) 설령 그애가 낮잠을 자고 있더라도 너는 바쁘게 일해야 해. 그러지 않으면 게을러 보일 테니까.(중략) 섬 출신 육아도우미들이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지켜보지 않고 휴대전화만 보는거 알지?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마. 그러라고 두배나 되는 급료를 주는 게 아니야.(중략) 영어만 사용해. 부모가 다른 방에 있더라도 타갈로그어는 쓰지 마. 그들이 불편해하니까.(중략) 아마 자기들은 '케이트와 테드'라고 부르라고 할 거야. 완전히 미구식으로 동등하게 말이지. 하지만 항상 '선생님' 과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해. 그들은 또 네게 '자기집처럼 편히 있어요'라고 할 거야. 하지만 정말로 네가 자기 집처럼 편히 있는 걸 원하는 건 아니야! 그곳은 네 집이 아니라 그들 집이고, 그들은 네 친구가 아니니까. 그들은 의뢰인이야. 그뿐이야. (중략) 만약 부인이 아기를 보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그땐 괜찮아. 단, 아기가 젖을 충분히 먹어서 배가 부르고 이미 트림도 해서 만족스러운 상태여야 해. 배고프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고, 울음을 터뜨릴 기미도 없어야 한다고. (중략) 이 공책에 (중략) 도표를 만들어 기록해둬. 의뢰인들은 도표를 좋아해. (중략) 제인, 이런 유형의 부모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해. 그들은 상황을 통제하는 데 익숙해. 돈 덕분이지. 하지만 갓 태어난 아기가 있으면 (중략) 통제불능이야! 제인, 제발 잘 들어. 중요한 얘기니까. 아마 가장 중요한 얘기일 꺼야. 최고의 신생아 보모가 되려면 아기 부모한테 네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걸보여줘야 해. (중략) 이 공책은 그냥 공책이 아니야. 알아들었어? 아기 부모에게 이 공책은 질서를 의미해. 세상이 마구잡이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제인, 이 공책 덕에 그 부모가 널 믿게 될 거야. (p. 44~49)

3장에 걸쳐 강조되는 아테가 제인에게 이르는 당부사항들이 번역자는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고 했다. 소설에서 한 사람이 얘기한 것 중에선 가장 긴 대사였을 이 내용들은 아테의 경력이 그냥 쌓인 것이 아님을 알려주는 동시에 그 필사의 생존법 사이사이 숨어있는 부자들의 행태를 넌즈시 고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읽어나갈수록 대리모 이야기라기 보다도 자본주의의 속살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몇주 동안 제인은 그 의사가 그랬듯 세상이 카터 부부의 집으로 제 발로 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p. 53) 그곳이 자급자족적인 세계라는 것을, 다시 말해 삶의 충격과 폭풍을 견뎌낼 수 있게 만들어진 세계라는 것을 제인은 몇주에 걸쳐 깨달았다. 그녀와 아말리아, 그리고 그녀가 정말로 잘 아는 모든 사람이 사는 세상과는 몹시 동떨어진 세계였다. (중략) 제인은 은행 직원에거 '이율'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그는 계산기를 꺼내더니, 그것이 그녀가 은행에 맡긴 돈이 늘어나는 비율이라고 설명해주었다. (p. 54) 돈이 저절로 늘어날 것이라는 사실은 제인에게 일종의 계시였다. 마치 그 전까지 꼭 닫혀 있던 문이 이제는 좁은 틈이나마 열린 것 같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그 문안으로 들어가는 걸 그려볼 수 있었다. (중략) 그녀가 조심만 한다면 그 큰돈이 차츰 불어서 일종의 요새가 되어 줄 터였다. (p. 55)

제인은 필리핀에서 태어났다. 자신을 키워주던 할머니의 죽음이후 오래전 미군을 따라 자신을 버리고 미국으로 간 어머니를 찾아왔다. 하지만 수시로 바뀌는 어머니 애인들의 끈적한 눈길을 피해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남자친구와 도망쳤다. 그리고 이제 막 성인이 된 나이에 제인은 돈한푼 없는 미혼모 신세였다. 그때 아테가 세상 사는 법들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 세상에서 절감한 것은 돈의 위력이었다. 자신과 이웃들이 온몸으로 맞서도 무릎을 꺽게 하는 세상이 부자들에게는 스스로 걸어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인은 그 첫 도전에서 실패했다. 아테가 넘겨준 신생아보모자리에서 해고당하고 말았다. 그 다음 기회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인에게는 지키고 살려야 할 딸 아말리아가 있었다.

'호스트(host)'에는 일반적인 '주인' '숙주'라는 의미 외에도, '이식받는 사람' '수용자' 라는 의학적 의미가 있다. 이 소설에서는 골든 오크스에서 배아를 이식받는 대리모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p. 71 의 주석)

메이는 골든 오크스의 총 책임자이다. 30대중반에 이만큼 올라오기까지의 여정은 쉽지 않았다. 미국인 어머니와 중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메이는 어떤 상황에서든 사태파악이 빨랐다. 그래서 지금의 '부'를 누릴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사랑하는 남자와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대리모 전용 최고급 리조트인 골든 오크스는 그녀에게 엄청난 기회를 가져다 줄 사업이었다. 골든 오크스에 머무는 대리모들은 '호스트'라고 불렸다.

지금껏 메이가 몇번이나 제안한 방침인데, 왜냐하면 그녀는 호스트들이 서로를 감시할 수 있게끔 자기들끼리 짝을 지어줘야 한다고 굳게 믿는데다가, 침실당 더 많은 호스트가 머문다는 것은 그만큼 이익률이 상승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p. 77)

몇몇 의뢰인은 정말로 건강한 자궁을 가진 호스트를 선택하는 데만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그런 의뢰인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의뢰인은 자신들이 선택하는 호스트가 곧 태어날 아기들을 품을 보관소인 동시에 몸속에 착상될 존재에 거는 그들의 높은 기대의 표상이라 여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예뻐 보이는, 혹은 '말솜씨가 좋거나' '친절하거나' '현명하거나' 심지어 교육가지 잘 받은 듯 보이는 호스트에게 끌리고, 기꺼이 프리미엄을 지불한다. 처음에 메이는 이 마지막 조건에 깜짝 놀랐다. 마치 태아가 포도당, 단백질, 산소, 비타민 뿐 아니라 값비싼 교육을 통해 획득한 지식과 하늘을 찌를 듯 높은 SAT점수를 흡수하기라도 하는 양, 프린스턴이나 스탠퍼드나 UVA를 졸업한 여자의 자궁에 엄청난 프리미엄을 기꺼이 지불하려 한다니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 (p. 80)

'시녀이야기'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 부분에서 '아주머니' 와 메이를 연결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녀들을 가르치고 감시했던 '아주머니' 라는 존재와 최고급 시설 골든 오크스를 경영하는 메이는 비슷한듯 다르다. '아주머니'들은 직접적으로 시녀들위에 군림했지만 메이는 간접적으로 '호스트'들의 상황을 통제한다. '아주머니'들은 권력으로 메이는 '돈'으로 임신이라는 생물학적 특성을 이용한다. 시녀가 호스트가 되는 사이 사회가 그만큼 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사회는 민주주의보다 자본주의에 더 휘둘린다.

레이건을 골든 오크스에 소개한 것은 대학 시절 그녀의 난자를 채취한 클리닉이었다. 그녀는 아마 그때도 자신이 이타심에서 그런 행동을 한다고, 돈은 난자를 기증하기로 한 자신의 결정에 있어 부차적인 요소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메이는 왜 사람들이, 더구나 레이건이나 케이티 같은 특권층 사람들이 돈을 원하는 데 무언가 수치스러운 면이 있다고 고집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일찍이 어떤 이민자도 더 멋진 삶을 원한다는 이유로 사과한 적은 없지 않은가. (p. 90)

메이는 레이건을 '호스트'로 영입하는데 공을 들인다. 부유하게 자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백인 여성인 레이건 같은 조건의 '호스트'는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는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수요는 많고 공급은 희박한 특별함때문에 자신의 가치가 돈으로 엄청난 금액으로 환산된다는 것을 레이건 본인은 몰랐겠지만.

그리고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신들의 난자와 정자로 배양한 태아를 대리모의 자궁에 착상시켰을 뿐인데 대리모의 무엇이 태아에게 전해진다고 그렇게 대리모의 조건을 따지는 건지. 하지만 이러한 웃기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가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다.

당신이 겪는 모든 문제는 당신 잘못이다.

제인은 빌리를, 카터 부인을 떠올리며 매우 동의함을 클릭했다.

많은 일에 있어서, 나는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사람보다 훌륭하다.

이 문장에 제인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전혀 동의하지 않음

나는 무언가를 하라는 지시를 들어도 기분 나쁘지 않다.

동의함.

몇주 후, 제인은 골든 오크스 농장의 전무이사인 메이 유 로부터 '경쟁률이 매우 높은' 호스트 선정 과정의 첫 두 단계를 통과했음을 알리는 이메일을 받았다. (p. 100)

미즈 유가 제인에게 말한다. "당연히 우리는 유모, 노인돌보미, 심지어 신생아 보모 같은 여타 대안적인 일보다 매력적인 금액으로 급여를 책정해요. 우리 의뢰인들은 자신들의 호스트가 좋은 대우를 받기를 원하거든요. 하지만 이 일의 동기부여 요소가 돈이 다는 아닌 것 같아요. 자질이 있어야 하죠. 소명 의식도 있어야 하고요"

"제가 그래요" 제인은 아말리아를 생각하며, 그리고 이 일을 얻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아말리아에게 해줄 수 있고 아말리아가 겪지 않게 해줄 수 있는 모든 일을 떠올리며 말한다. "저한테는 소명의식이 있어요" (p. 122)

제인이 골든 오크스에 들어가기 위해 받았던 테스트들 중 일부 문항을 보며 '호스트'로서의 조건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다. 레이건 같은 특별한 호스트는 아마도 이런 테스트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인 같은 필리핀 출신 호스트가 거치는 테스트들은 그 이상의 조건을 요구하고 있었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여기서도 통한다. 제인같은 여성은 수요보다 공급이 많다.

제인은 '호스트' 가 되었다. 아말리아는 아테가 당분간 맡아 키워주기로 했다. 아테의 신생아보모 자리를 제인이 날린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차피 더이상 할 수 없는 몸상태였다. 아테는 제인에게서 일정수익을 받기로 했음에도 필리핀에 있는 아들 로이를 생각하면 그냥 있을순 없었다. 제인이 골든 오크스에 들어가고 나서 아테는 다른 사업을 구상한다.

리사가 말을 잇는다. "첫째, 코디네이터가 항상 당신 꽁무니를 바짝 따라다니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테이블에 엎드리지 말아요. 둘째, 더 중요한 얘긴데, 당신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이해해야만 해요, 여기는 공장이고 당신은 상품이에요. 당신은 의뢰인을 당신 편으로 만들어야 해요. 코디네이터들이나 미즈 유가 아니라요. 나는 지금 그 부모들, 특히 어머니를 말하는 거예요" (p. 138)

골든 오크스에서 만난 호스트들 중 리사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대부분 유색인 사이에서 두드러지는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랬지만 험한 말버릇과 호스트로서의 이점을 최대한 누릴 줄 아는, 벌써 3번째 대리모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제인과 룸메이트인 레이건은 유일한 말벗인 리사가 불편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더 힘들었기에 리사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다. 리사를 통해 벌어지는 사건들은 제인과 레이건의 '호스트' 생활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게 된다.

"그거 대리출산이잖아! 그런 식의 대리출산은 상품화고, 인간 생명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야! 신성한 모든게 외부에 위탁되어 일괄적으로 거래되고, 결국 최고가 입찰자에게 팔려 나가는 거라고!"

"참 쉽게도 말하는 구나. 넌 은행에서 일하잖아! 난 아빠한테 기대 사는 인생이 지긋지긋해. 누군가를 도와서 아이를 갖게 해주--"

"넌 어떤 낯선 부자가 널 이용하게 내버려두고 있는 거야. 삶의 근원적인 무언가에 가격표를 붙이고 있는 거라고"

"입주 유모, 신생아 보모, 젖어머니, 혈액 기증자, 신장 기증자, 골수 기증자, 정자 기증자, 대리모, 난자 기증자... 너 [더 크로니클]에 실린 난자 기증자 찾던 광고 기억나?" (p. 147)

"그냥 좀... 허무하네. 난자를 파는 게 여느 상거래나 마찬가지라는 게. 어쨌든 그건 네 난자였잖아"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어" 레이건이 발끈하며 설명했다. 난자는 몸속에서 성숙해졌다가, 결국 잘라낸 발톱이나 미용실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카락처럼 매달 버려질 뿐이라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도 있는데, 왜 쓸모없이 낭비되게 놔둬야 하냐고. (p. 151)

레이건이 절친 메이시와 이런 대화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레이건에게 난자든 대리모든 그건 수단이었다. 돈을 벌기 위한 일이라는 속내를 감추고 누군가를 돕기 위한 일이었다고 의미부여를 하기 위한 수단. 누리는 것이 당연하게 살아온 레이건이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과정은 제인의 생존을 위한 삶의 축과 분명 다른 축이었다. 하지만 그 둘이 만나게 되는 지점은 결국 '돈' 이었다.

그녀가 호스트가 되기로 결정한 것은 이 일이 갤러리에서 하는 시시한 일에서, 또 아빠에게서 벗어나는 도피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이 일은 더 많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중략) 다시 말해, 대학 시절 이후로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진에 대한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감정, 자유의 기분을 미리 맛보게 된 것이다. 돈이 아니라 자유, 중요한 건 바로 그것이다. 무언가 참되고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p. 169)

사진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레이건에게 경영대학원을 권유하는 아빠는 재정지원자이자 꿈파괴자였다. 레이건의 혼란은 쉽게 멈출 것 같지 않지만, 그냥 배부른 소리 라고 치부하기엔 레이건 같은 존재가 이 사회에 필요하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레이건 또한 돈걱정을 안하기에 그런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라는 점도 우리는 안다. 제인과 레이건 사이에서 어느 한 편에 쉽사리 설 수가 없다. 그것은 리사와 메이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들이 뭘 모르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 상위 1퍼센트에 분개하는 것은 그들에게 공감할 만한 속사정이 없을 때, 샴페인 욕조에서 헤엄치는 정체 모를 뚱보 고양이로 희화화 될 때만이다. 하지만 어떤 억만장자에게 그럴듯한 정보를 가미하면? 그러면 미국인들은 황홀해한다! 어린 시절 마음의 상처를 입었고 다이어트 요요 현상까지 겨은 오프라, 혹은 불운과 비극미로 점철된 케네디가, 혹은 부끄러움 많은 매력꾼 워런 버핏을 생각해보라. 인기 영화 배우, 사교계 명사, 프로 운동선수, 첨단기술 업계의 거물들을 생각해보라. 성공에 공감할 수 있을 때, 미국인들은 그 성공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들은 가족을 사랑한다. (p. 206)

세상쓸데없는 일이 잘 사는 사람들 걱정하는 거다. 방송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럭셔리한 삶이 그들의 고민으로 퉁쳐진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인간적이라며 그들이 누리는 부에 대해 눈감아주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하지만 일반 시청자들은 결코 단 한번도 그들의 부를 누릴 수 없을 것인데 누가 누구 걱정을 한단 말인가.

카터 부인은 신문과 인터넷을 통해서만 필리핀을 알고 있엇다. (중략) 카터부인에게 필리핀은 모든 것이 무너져내릴 수 있고, 실제로도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부패와 위험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하지만 미국도 모든 사람에게 믿음직한 곳은 아니다. 카터 부인은 이 사실을 몰랐다. 그녀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미국에서는 부자가 아니라면 튼튼하거나 젊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녀는 이해하지 못한다. 늙고 병약한 사람들은 제인이 전에 일했던 곳 같은 시설에 숨겨져 있다. (p. 229)

그들만의 세상.

그것은 위아래를 막론하고 존재한다.

우리는 저마다 우리만의 세상에 산다. 서로 다른 세상을 넘나드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세상은 살기 더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레이건은 제인의 세상을 살펴보며 자신의 세상에서 살고 제인은 레이건의 세상을 꿈꾸며 자신의 세상에서 산다. 그럼에도 둘의 세상은 연결되기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정도는 깨닫게 된다. 호스트들의 세상 골든 오크스에서.

"무언가 옳다고 믿는다고 해서, 꼭 그대로 행동할 필요는 없잖아!" (p. 438)

부자들이 실제 인간들에게 대접받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자신에겐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로봇은 결코 골든 오크스를 운영하지 못할 것이다. (p. 440)

사업으로만 생각했던 골든 오크스를 통해 메이의 사고방식도 변화되는 부분이 있었다. 메이의 절친 케이티는 사회공익사업을 하느라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들 대부분을 내려놓았다. 그런 케이티와 케이티 비슷한 사고관을 가진 레이건을 보면서 메이는 그들을 이해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눈감아버리지도 못하는 사람이 됐다. 하지만 그녀는 더더더 성공하고 싶다.

그녀의 배 속 아기는 어떤 애일까? (중략) 하지만 레이건이 정말로 알고 있는 게 뭐라도 있기는 있는 걸까? (중략) 더 이상은 알아낼 방도가 없다. 왜냐하면 리사는 떠났고, 레이건은 제인 외에는 농장의 어느 누구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p. 460) 판단을 내리는 동안 레이건의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진다. 기대감이 둥둥 울려 퍼지는 소리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제 무엇이 옳은 일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p. 464) 머리가 아플 정도로 열심히 고민하면서, 아빠가 옳은 게 아닐까, 그러니까 자신이 추상적인 의미에서 인류애를 들먹일 뿐 실재하는 개인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유형의 사람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빠는 항상 그녀에게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며, 그들을 돕는 것과는 더더욱 다른 얘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는 노력한다. 적어도 신경을 쓰기는 한다. (p. 467)

아테, 메이, 제인, 레이건 4명의 여성이 돌아가며 화자가 되는 이 소설을 읽다보면 4명 각각이 추구하는 방향이 무척 다르면서도 모두에게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모두 다 돈이 필요하지만 그 돈이 필요한 목적이 다르다. 하지만 적어도 3명은 돈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레이건의 이상추구는 때론 답답하면서도 자꾸 마음이 끌리는 일종의 미련처럼 떨쳐내버리지도 못하고 붙잡지도 못하는 그런 어떤 것으로 내게 여운을 남기곤 했다.

"우리가 갈 차례라고!" 메이가 화가 나서 외친다. 운전사가 백미러를 통해 사과하듯 살짝 미소짓는다. 메이도 마주 웃어보인다. 이 남자는 어떻게 날이면 날마다 이걸 견디는 걸까? 끝없는 차량 행렬, 마구 밀어붙이는 운전자들, 무분별한 보행자들, 조급한 승객들, 형편없는 보수, 안 좋은 공기, 주차 위반 딱지, 청구서, 자식들, 그의 외모로 미루어 어쩌면 손주들까지도. 어떻게 폭발하지 않는 거지? (p. 497)

이 책에 등장하는 장면들은 무척 현실적이다. 상류층이건 하류층이건 그 실제 삶이 어떨지 몇 글자만으로도 머릿속에 이미 그려지는 그런 장면들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디스토피아 소설은 아니다. 현실이 아닌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그 현실을 담은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를 찾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그런 구분보다 중요한건 적절한 현실감이다.

"당신은 그런 일을 당해야 할 사람이 아니에요, 제인. 늘 주고 또 주고, 퍼주기만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언제나 받아야 할 걸 못 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돼요.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p. 559)

아테라면(중략) 그녀는 부모가 자식에게 저지르는 최악의 일은 아이를 오냐오냐 키우는 것이라고 항상 말했었다. 세상은 각박하니까. 하지만 제인은 잘 모르겠다. 세상이 자기들 소유인 양 살아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또 세상도 그들의 요구에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p. 580)

의외의 반전이 있는 결말이었다. 심리 스릴러 정도라고 할만큼의 심장쫄깃함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결말에 담으려 했던 희망감을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그들에게만 걸어올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 아말리아에게도 걸어올 수 있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제인은 배웠다.

그들의 삶과 장래성, 그리고 나의 삶과 장래성 간의 격차는 현격하다. 그 격차를 메운다는 게 과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능한 일인지 나는 자주 생각해보곤 한다. 그리고 평생 수없이 들었던, 내가 '아메리칸드림'의 전형이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모든 공적이 그렇듯 이 간극 역시 행운과 우연에 크게 기대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많은 면에서, [베이비 팜]은 지난 25년 동안 내가 나 자신과 나눠온 오랜 대화, 즉 인과응보와 행운, 동화와 타자성, 계급과 가족과 희생에 관한 대화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 이 소설을 쓰지 않았다. 그 답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나 자신을 위해, 또한 바라건대 이 책의 독자들을위해,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에 대한 질문들을 살펴보고자 이 책을 썼다. 독자들이 어느 곳에서 이런 경계에 다가가든, [베이비 팜]이 그 경계의 '반대편'으로 가는 창구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p. 603) - 작가의 말 中 -

이 작품은 야누스적으로 읽힐 수 있는 책이다. 저자의 말처럼 '경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그 어느 것에 대한 정의도 내리지 않고 그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은 이 소설은 그저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한 면을, 그리고 질문을 던지게 한다. 나는?

저자의 첫 소설이라는데 저자의 의도를 완벽하게 표현한 이 작품을 읽으며 저자의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저절로 올라간다. 어느 한쪽으로 명확한 것보다 불분명하게 다가오는 소설들을 읽을때마다 시대의 혼잡성을 새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 혼란감이 요구하는 책임감에 대해 더이상 뒤로 물러나지만은 않아야 하는 게 아닐까. 읽는 이마다 감상은 제각각이겠지만, 나는 지금 이 시대 읽어야 할 사회소설이자 여성소설로 이 작품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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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 그들은 왜 칼 대신 책을 들었나 서가명강 시리즈 14
박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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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맞서 필사의 도약을 감행한 메이지유신의 혁명가들!

'서울대를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라는 서가명강 시리즈의 14권인 이 책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통해 지금의 일본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는 책이다. 일본역사를 다 알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메이지유신은 알아둘 필요성이 있다는 저자의 의견에 처음엔 갸우뚱 했지만 읽어가면서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게 됐다.

일본을 상대하고 경쟁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를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 또 전략적이어야 한다. 세계에서 일본을 무시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뿐이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서양인들은 일본 사회를 조금 이상하게 보기는 해도 무시하지는 않으며, 중국인들은 꽤 미워하지만 그렇다고 깔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무시하고 본다. 꼭 알아야 할 지점에서 눈을 그냥 감아버린다. 그래서는 안 된다. 혹여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일본을 무시한다 해도 우리만큼은 일본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일본을 존경한다 해도 우리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다. (중략) 근대 일본을 아는 첫걸음은 메이지유신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중략) 메이지유신이 깔아놓은 레일 위를 근대 일본은 달려왔고, 현재도 그 레일을 크게 벗어났다고 하기 어렵다. 이 책은 근대 일본의 레일을 깐 네 명의 급진개화파에 대한 얘기다. 그들의 이야기가 일본 역사와 친해지는 데, 나아가 일본의 현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길 바란다. (p. 16 ~ 17)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1부에서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고 2~4부에서는 사무라이 1명씩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한다. 역사는 역시 인물이야기로 읽을때 재미가 월등한 것 같다. 소설이 아님에도 소설처럼 읽히는 인물의 이야기들은 드라마틱함이 느껴질때마다 더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라는 4명의 인물이야기를 통해 메이지유신을 전후한 일본사회를 들여다보는 시간들은 재밌기도 했지만 일본역사에서 메이지유신이 가져온 의미와 더불어 지금의 일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흔히 우리는 일본이 옛날에는 우리보다 못했고 가난했는데 근대에 들어와서 서양 문물을 빨리 받아들이는 통에 우리를 앞서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임진왜란 이후에 수립된 도쿠가와 막부 치하에서 일본은 급속히 발전했다. 이때 이미 무시할 수 없는 강국이 되었고 부자나라가 되었다. 문화적으로도 세련된 수준에 이르러 다도, 가부키, 기모노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전통문화는 대개 이때 형성되었다. (p. 22)

도카가와 시대 일본에서는 상업과 화폐경제가 놀랄 정도로 발달했다. 이게 조선과 가장 다른 점이다. 조선도 농업 생산력이 높은 나라였다. (중략) 이게 조선사의 흥미로운 점이다. 왜 조선은 이웃인 청이나 일본과는 달리 상업이 발전하지 않았는가 (p. 23) 조선의 위정자들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빈부격차였다. 한 사회에 엄청난 부가 쌓이고 상품, 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면 그 혜택을 골고루 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빈부격차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하향평준화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억제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빈부격차는 반드시 사회불안을 낳기 때문이다. (p. 24)

역사를 읽는 데 있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왜곡과 편향된 관점이다. 그렇기에 역사를 읽으면서 기분이 좋아질 때는 바로 그런 왜곡과 편향을 깨닫고 새로운 가르침을 얻을 때다. 무시했던 일본은 앞서가고 있었고 답답했던 조선은 (비록 하향평준이 될지라도) 평화와 평등을 고수하려 노력했다. 역사를 다르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은 늘 반갑다. 게다가 이 책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대한 책이지만 일본과 당시 조선의 이런저런 부수적인 이야기들도 자주 나와서 읽는 재미를 더욱 돋워주고 있었다.

경제성장의 혜택을 입지 못한 계층은 정작 지배층인 사무라이였다. 도쿠가와 시대 사무라이들은 주군인 대명에게서 봉록으로 쌀을 받아 생활하는 봉급생활자였다. (p. 26) 물가상승은 임노동자들인 이들에게는 재앙이었다. 이처럼 사회변화에 따라 과실과 손해가 생기게 되면 주로 손해를 보는 층이 사회를 바꾸려 할 것이다. 그런데 사회변혁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 정보, 조직 등 어느 정도의 사회적 자원이 갖춰져야 한다. 빈민, 빈농 보다는 하급 사무라이가 나서게 된 이유다. (p. 27) 19세기 사무라이는 검술만 훈련한 게 아니라 '독서하는 사무라이' 였다. (중략) 유학에 접한 사무라이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전투 대신, 천하대사의 정치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p. 29)

전에 일본역사책을 읽으면서도 절감했었지만 일본은 우리와 정말 너무너무 다르다. 신분제 사회였으나 우리에게 익숙한 신분제와 다르다보니 사회문화도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사무라이 하면 그냥 무사 내지는 용병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막부체제가 안정된 시기의 전쟁없는 평화가 사무라이들에겐 생존의 위협을 가져왔다. 사무라이들은 돌파구를 찾기 위해 책을 들었고 섬나라에 출현한 외국배들을 보며 세계적 변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사무라이들은 사회변혁의 중심세력이 되어갔다.

사무라이들이 변혁운동을 전개해나갈 때 농촌 부르주아들이 부분적으로 그에 가담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주도권은 사무라이층에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 농민들은 변혁 과정에서 관망적인 태도를 취했다. (중략) 상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경제력에 상응하는 정치권력 보유에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중략) 그들은 변혁 과정에서 승산이 있어 보이는 쪽에 줄대기에 바빴다. (p. 44) 메이지유신은 지배층은 사무라이층 내부의 다툼과 그 파장으로 일어난 것이고, 그 속에서 급진개혁파가 주도권을 잡아 이뤄낸 변혁이었다. 이런 메이지유신의 성격은 일본 사회에 보수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중략) 그러니 변혁이 진행되어도 사회질서가 총체적으로 붕괴되는 일 없이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일본 대중은 정치참여에 관심이 덜하다. 정치란 어차피 특정 사람들이 하는 것이란 생각이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다. 또 그만큼 가만히 있어도 지배층이 점진적 개혁을 진행해주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일본의 위기는 이 패턴이 작동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p. 45)

지금 일본이 위기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 여전히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한 국력을 가진 나라를 걱정할 만큼 우리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라서. 여하튼 일본 국민성의 독특함을 설명해주는 부분들이 나올때마다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그랬구나 싶었다. 일본인들은 너무나 오랜 세월을 너무나 같은 곳에서 너무나 같은 신분으로 너무나 같은 일을 하며 너무나 오래오래 살아온 것이 문제라면 문제랄까. 혁명이 없는 나라가 가진 조용함이 나 라면 견디기 힘들 것 같은데...

조선과 일본의 가족제도는 사뭇 다르다. 이렇기 때문에 일본 역사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형제지간, 부자지간에도 성이 다른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중략) 한 사람의 이름이 평생 여러 번 바뀌는 경우도 많다. (중략) 한 사람이 열 개 넘는 이름을 갖는 경우도 있다. (중략) 이런 사정이니 우리가 일본인에게 기분 나쁘다고 '이런 성을 갈 놈'이라고 해봤자 상대는 태연할 것이며 '이 약속을 깨면 내가 성을 갈겠다' 고 한들 믿어주지 않는다. (p. 53, 54)

일본의 신분제는 그나마 유럽식 봉건제와 닮아 있어서 비슷하게 이해되긴 하는데 이름 문화는 그야말로 신기할 따름이다. 유럽에선 같은 이름을 아들 손자 대대로 돌려쓰는 것이 헤깔리더니 일본에선 한 사람이 자꾸 이름을 바꿔대니 이역시 헤깔리는 것이다. 성씨가 곧 가문인 문화에서 일본의 이름문화는 정말 이상하다;;;

여하튼, 이제 4명의 사무라이들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보기 시작한다.

메이지유신의 스승이라 불리는 요시다 쇼인은 그야말로 정열적인 학자였다. 당시 해군이 전무한 상태인 일본사회에 해군이 필요성을 강조하고 몰려두는 제자들을 받기 위해 세운 송하촌숙에서의 학습방법은 회독 會讀 으로 신분도 나이도 상관없이 어디서든 읽고 토론하기를 즐겼다. 저자의 표현대로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었다.(p. 71)' 이런 쇼인의 해외팽창 구상엔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가 있기도 했다.

'조선을 옛날고 마찬가지로 공납하도록 촉구'하자는 말은 고대에서 진구황후가 신라를 정벌했다는 [일본서기]의 전설 같은 얘기에 기초한 것인데 당시에 크게 유행했었다. 쇼인도 물론 그런 유행의 한복판에 있었다. 이런 의식은 학문적으로도 '임나일본부설'을 낳으며 오랫동안 일본인의 조선의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여기까지도 황당무계하고 무모한 발상인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p. 74~75) 당시 일본에서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를 다케시마라고 했다. (p. 76) 울릉도는 그가 꿈꾸는 해외팽창의 발판이었다. (p. 78) 한반도 어딘가에 서양세력이 거점을 만드는 것은 근대 일본이 초지일관 반대해왔던 일이었는데, 그 원형을 여기서 볼 수 있다. (p. 80) 부국강병 노선의 출발이다. 나라는 위기에 빠졌고 이 위기를 구할 것은 강한 군대, 특히 해군밖에 없었다. 강군을 육성하려면 경제력이 있어야 하고 그건 무역이 아니면 안된다. (p. 82) 고메이 천황은 완강하게 칙허를 거부했다. 양이론자들에게는 이 이상의 명분이 없었다. 조약 체결에는 내심 찬성하지만 막부는 비판하고 싶었던 정치세력들은 이를 구실로 일제히 막부에 포문을 열었다. 천황의 허가 없이 조약을 체결했으니 도로 물리고 다시하자는 것이었다. (p. 85)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해지는 압력때문에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반대여론이 들끓자 천황의 입을 빌어 무마시키려 했으나 왠걸 천황이 반대의견을 냈다. 그것은 막부반대세력에게 정당한 구실을 준 셈이 되어버렸다.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양이세력에게도 막부체제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개혁세력에게도 천황의 칙허거부는 유용한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저러나 조선을 자기들의 발판처럼 생각했던 이들이 세력을 키워감에 따라 조선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일본의 밥이 되어 버렸다. 그러한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인식은 지금까지도 유효해 보인다.

옥중에서도 활발한 학문활동을 하던 요시다 쇼인은 초망굴기론을 세워 신분에 관계없이 뜻있는 사람 누구나 일어서서 사회를 바꾸기를 주장한다. 그리고 '몸은 비록 무사시 벌판에 썩어가더라도 남겨놓은 것은 야마토 다마시이(일본혼)' 라는 말을 남기고 처형된다. 그가 남긴 '일본혼'은 그의 제자세대인 사무라이들에 의해서 메이지유신이 되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일본사회에 깃들어 있는 듯 하다.

메이지유신의 아이콘은 사카모토 료마 라고 한다. 비록 메이지유신의 성공을 눈으로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것을 가능케 한 주역이 바로 사카모토 료마 라고 한다. 메이지유신은 사카모토 료마가 이끌어낸 '대정봉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역사상 유명인물이란 것은 특정 시기에, 특정 세력에 의해, 특정한 이유로 현창된 것이 쌓여 우리 앞에 제시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자체가 '역사적 산물' 인 것이다. 그러니 그 평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또 변할 것이다. (p. 105) 그러니 어떤 시대에 어떤 인물들이 교과서나 위인전에 실리고 동상과 지폐초상으로 등장하는가는 그 사회의 사상과 지향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지점이다. 그분들이 훌륭한 건 분명하지만, 그 많고 많은 위인들 중 하필 그분들인 것은 우리 사회의 열망이 그들을 불러낸 까닭이다. (p. 106)

사카모토 료마 라는 인물이 일본 대중에게 유명해진 계기는 일본의 국민작가가 쓴 소설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 때문이라고 한다. 지나간 과거속에 있던 인물이 급부상하게 된 배경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라는 저자의 말이 긴 여운을 남겼다. 위인은 어떻게 위인이 되는가...

도쿠가와 시대 사람들에게 '국가'는 일본 저네가 아니라 자기 번 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국가의 틀을 넘어, 천하로 인식되던 일본을 '새로운, 유일한 국가'로 창출해가는 것, 그리고 번주에 대한 충성을 천황에 대한 충성(존왕주의)로 전환해가는 것, 이것이 메이지유신의 과정이었다. (p. 111)

수백년간 지방 각각의 번들이 그 속민들에겐 국가였다. 수백개의 작은 국가들이 모인 사회가 당시의 일본섬이었다. 그런 수백의 국가들을 통일하여 하나의 일본이 되었으니 세계를 그처럼 하나로 통일하는 꿈을 꾸게 된것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을 떠난 사무라이를 낭인 이라 한다. 재수생이 일본말로 낭인이다. 로진,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것, 일본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상태다. 어딘가 하나에는 소속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맘이 놓인다. 이게 예나 지금이나 보통 일본 사람들의 정서다. 당시 번을 이탈했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거의 국적이탈에 해당하는 것이다. (p. 123)

외세와 결탁했다는 꼬리표는 그것을 능가하는 정치적 손실을 가져오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권력투쟁이 격렬해져도 외세와 결탁하는 것은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정치 엘레트 간에 암묵적으로 진행되어 있었다. (p. 132)

집단에의 소속감, 그러나 외세와 결탁은 안됨, 이러한 특성이 오랑캐를 쳐부수자는 양이론을 메이지유신으로 변화시켰다. 자국의 문제는 자국내에서 알아서 하고자 한다는 기본적 합의는 있었다는 점에서 지금의 우리와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씁슬하게도... 이렇게 소속감이 생명줄처렴 여겨지던 사회에서 사카모토 료마는 자신의 번을 떠났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중재와 협상을 통해 내분을 잠재우고 개혁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렇게 무력충돌 없이 천황 중심의 신정부 탄생의 기반을 닦았다.

앞에서도 말한 대로 일본은 조선이나 중국보다 훨씬 신분제가 강한 사회였다. 우리도 조선시대 때 신분제가 있기는 했지만 사실 양반과 상민과의 경계가 법제적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는 않았다. (중략) 조선의 양반은 법제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그 지역 사람들이 양반이라고 취급을 해주느냐, 안 해주느냐가 중요했다. 그러니 과거 합격과 중앙 관직 획득에 매달리게 되고 그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일본의 신분은 법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 신분에 따라 거주지역도 구분되었다. 그러니 사무라이는 사무라이대로, 상인은 상인대로, 농민은 농민대로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분은 대대로 물려주는 것이다. (중략) 도쿠가와 일본 사회는 가업이 기초가 되는 사회였다. 반면 조선은 유동성이 강한 사회였기 때문에 가업에 대한 생각이 약했다. (p. 138, 139) 심지어는 정치까지도 그렇다. 그러니 세습의원이 저토록 많은 것이다. (p. 141)

신분제라고 하면 양반과 노비의 구분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는 유동적이었다. 능력에 따라 신분상승의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신분제도는 그렇지 않았다. 태생적으로 정해졌다는 점에서 인도의 카스트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신분제를 위아래 상하계층구분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구분으로도 이렇게 오랫동안 존속하면 일종의 숙명처럼 받아들이게 되는건가 싶었다. 그러니 혁명이 일어날 수 없는 사회였다. 그러니 자신의 업이 아닌 다른 분야에 무관심 한 것이 자연스러웠다. 일본의 신분제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릴 필요가 없는 신분제였다.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세계에만 살고 있었다. 지도층이 어떤 야심을 품느냐에 따라 세계사에 남긴 족적이 달라졌을뿐.

'라스트 사무라이' 라고 일컬어지는 사이고 다카모리 는 메이지유신 시대의 어쩔 수 없는 희생양을 스스로 선택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성공한 지배층보다 사그라진 최후의 사무라이를 즐겨 추억하는 지도 모르겠다. 일본 역사인물 중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사람중 한명이라는 사이고 다카모리는 '최후의 사무라이' 이자 '근대 일본의 로망'으로 불린다고 한다.

라스트 사무라이, 사이고는 사후 우상화되었다. (p. 177) 거기에는 근대 일본인의 아이덴티티 문제가 관련되어 있다. 메이지유신은 엄청난 서구화 변혁이었다. 나라의 생존으르 위해서 열심히 서구화를 추구했지만 그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발생하는 민족적 상실감을 사이고를 통해서 만회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이고는 서양과 근대를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일본과 전통을 함께 껴안으려다 상징이 되었다. 그 상징을 통해 근대 일본인들은 허기를 채우려고 했다. (p. 178)

앞서 사카모토 료마가 이끌어낸 대정봉환(막부의 마지막 대장군이 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주겠다는 결정) 만으로 막부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왕정복고 쿠데타에서 사이고는 선두에 섰다. 뛰어난 전장이었으나 막부세력과의 다툼에서 무의미한 백성들의 죽음은 원치 않았다. 사이고는 내전없이 평화협상으로 막부세력을 물리쳤다. 하지만 개혁 정책에 있어서 모두의 입장이 동일할 수는 없었다. 사무라이 계층은 소외되기 시작했고 사이고는 그런 사무라이들에게 믿을만한 마지막 리더였다.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터트리기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을 주장했다. 사이고는 사무라이들의 허기를 정한론으로 채웠던 것이다. 조선을 침략하는 것으로 무사들의 불만을 폭발시켜 사태전환을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국력은 전쟁을 치룰만한 상태가 아니라는 반론때문에 결국 계획을 이루진 못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조선침략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정한론은 그냥 스쳐지나갈 방법은 아니었나 보다. 일본에서의 명분세우기는 항상 조선침략이라는 정한론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제일 편한 방법인 것인가... 어쨌든 사무라이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사이고는 그들의 생각과 방법에 동의하진 않았지만 그들과 함께 정부에 맞서 싸우다 사무라이들과 함께 죽었다. 그야말로 정말 최후의 사무라이 였던 것이다.

근대 일본의 철혈재상 이라 할 수 있는 오쿠보 도시미치 는 지금의 일본을 만든 사람이지만 인기는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억울하다. 천신만고 끝에 근대 일본의 초석을 놓은 건 그였지만, 살아생전에는 '사무라이의 배신자'로, 죽어서는 '냉혈한 독재자'로 비난받았기 때문이다. 역사드라마나 역사소설에서도 그는 거의 주인공이 돼본 적이 없다. 일을 많이 한 정치가는 인정은 받을지언정 사랑받지는 못하는 것인가. 이 책에서는 '로망'은 없었지만 근대 일본의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은 그의 역사적 위치를 정당하게 조명했다. (p. 234)

일본이 세계대전의 주축이 됐을 만큼 급속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걸출한 인물들이 있었던 것이다. 4명의 사무라이 한명한명 그 노력과 열정이 위인전에 기록될만한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일을 많이 한만큼 사랑받지 못한 오쿠도 도시미치 의 일화들은 앞선 3명의 사무라이들과 결이 다른 위업을 알려주었다.

메이지유신 당시에는 '일신'과 '유신'이라는 말이 경쟁하다 유신으로 정착되었다. 700년간 계속된 사무라이 지배를 무너뜨리고 신분제를 혁파하고 서양화를 추구했으니 혁명이라고도 할 만한데, 일본인들은 지금까지도 '일본혁명' 혹은 '메이지혁명' 이라 하지 않고 유신 이라고만 한다. 왜 그럴까? 혁명은 원래 '역성혁명'의 준말로 왕조를 교체한다는 뜻이다. (중략) 그런데 일본은 어떤가.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6세기 이후로는 한 번도 왕조가 바뀐 적이 없다. (p. 248) 메이지 유신 역시 막부는 쓰러뜨렸지만 무너진 것은 도쿠가와씨지 천황가문은 아니다. 무너지기는 커녕 유신으로 천황에게 대권이 다시 돌아왔다. 이러니 혁명이란 말을 쓸 수가 없다. (중략) 여담이지만 천황에겐 성이 없다. (중략) 이름만 있다. 그러니 사실 역성할래야 할 수도 없다. (p. 249)

혁명의 의미부여가 불가능한 혁명이 메이지유신이다. 일본인들은 이름을 자주 바꾼다는 것도 이상했는데 그래서 가족간에도 성씨가 다른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것도 희한했는데 천황은 아예 성이 없고 이름만 있다니... 인간이 아닌 존재로서 인간의 성씨를 갖지 않는 천황이라는 개념이 아무리 일본인들이 믿는 뭔가 의미가 있다해도 나는 그저 성씨도 없이 이천년세월을 유지한 왕가가 이상할 따름이었다;;;

여하튼, 왕정복고 이후 메이지유신 정부는 혼란스러웠다. 번과 번주들을 개혁하지 않는한 유신은 의미가 없었다. 그 모든 개혁 체계를 잡은 것이 오쿠보 도시미치였다. 외국에 나가 직접 보고들으며 배운 것들을 통해 일본의 현상황을 직시했던 오쿠보 도시미치는 일본을 유럽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의 일본을 위해 악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장봉기 세력은 그렇다 쳐도 일본의 초기 민주주의운동을 주창한 세력이 그 뿌리를 정한론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후 메이지 정치세력 중 중요한 한 부분인 민권파는 대내적으로 인민의 자유와 정치참여를 촉구했지만, 대외적으로는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침략적인 태도를 강하게 드러냈다. 오히려 메이지 정부가 이들의 강경한 주장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메이지 정부를 비롯한 국권파뿐만 아니라 이들도 공격적인 내셔널리즘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원래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부국강병을 좋게 보지 않는 편이었다. 부국하려면 세금을 많이 거둬야 하니 결국 백성을 괴롭히게 되고, 강병은 전쟁위기를 고조시키니 이 또한 민생에 위협적인 것이었다. 조선의 위정척사파들은 서양과 일본의 부국강병 정책에 끝까지 비판의 날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일찌감치 부국강병을 받아들였다. (p. 266~ 267)

오쿠보 도시미치가 서양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직접 보고 배운 것을 토대로 비스마르크 주도하의 독일을 모델로 삼은 것이 일본의 메이지유신 이후 정부체제가 제국주의로 갔던 이유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오쿠보 도시미치 가 살해당한 이후에도 정부는 오쿠보가 구상했던 대로 정책을 펼쳐나갔다. 그 중심에 그를 추종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고 한다. 간간이 등장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보면서 일제치하에서의 이토 히로부미와 또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물론, 그보다 부국강병이 결코 좋은 개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더 신선했다.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프랑스대혁명에서 찾는다. 미국인들은 국가의 나아갈 방향을 물을 때 독립혁명의 아버지들을 소환한다. 메이지유신은 일본에서 같은 의미를 갖는다. 일본인들은 근현대 일본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 메이지유신을 불러낸다. 그 방식은 당연히 일정하지 않다. (중략) 그러니 우리가 현대 일본의 유래와 현재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을 깊게 이해하려면 메이지유신에 대한 식견을 갖고 있어야 한다. 또 메이지유신은 그 자체로도 혁명사의 흥미로운 사례다. (중략) 한편으로 메이지유신은 일본의 한계와 약점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중략) 메이지유신을 존왕양이와 부국강병으로만 회상하는 것은 위험하다. 메이지유신의 또 하나의 목표였던 문명개화는,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에 관한 한, 아직도 미완성이다. (중략) 일본사회의 이해는 메이지유신부터다. (p. 286 ~288)

저자는 메이지유신의 다른 한 면이 아직 미완성이라고 하지만 그 미완성 부분은 영원히 그렇게 미완성일것 같다. 일본인들은 메이지유신을 존왕양이와 부국강병으로만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까? 그들이 미완성임을 느끼지 못하는데 외부에서 미완성이라고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연장선에서 저자가 한국의 빠른 발전으로 지금에서야 일본과 제대로 경쟁이 가능해진 시대가 됐다고 한 것에 대해서도 나는 의구심이 생긴다. 일본은 여전히 한국을 아래로 보는데 한국만 일본을 동등한 경쟁자로 생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여하튼, 일본사회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일본섬이 어디 멀리로 떠내려가지 않는한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앞으로도 계속 적군과 아군을 오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일본사회의 이해는 메이지유신부터라는 것에 어느정도 동의하게 됐다. 일본의 독특함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그 바탕이 된 일본의 메이지유신 전후를 알고 싶다면 이 책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런 생각 많은 시민들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는 더 건강해질 것이며 더 튼튼해질 거라는 점이다. 이 책이 그런 분들의 고민과 생각에 하나의 '거리'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p. 294) -나가는 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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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대혼돈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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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사회주의, 포퓰리즘, 인종차별, 문화권력, 디지털 정치, 기후위기…

전 지구적 이슈에 대한 지젝의 재기발랄하면서도 핵심을 꿰뚫는 통찰

 

 

슬라보예 지젝

지은이 소개글에 따르면 저자는 현대철학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자,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꼽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슬로베니아 출생으로 파리와 런던, 뉴욕 그리고 한국의 경희대학교를 오가며 종횡무진 활약한 저자는 급진적 정치이론, 정신분석학, 현대철학에서의 독창적인 통찰로 독보적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저자가 여러 언론 매체에 기고한 짧은 글들을 묶은 이 책은 그러한 지젝의 통찰을 살짝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사실 책의 제목이 된 '천하대혼돈'도 이런 바탕에서 나왔다. 이 표현은 세계를 끊임없는 모순의 충돌로 이해한 마오쩌둥의 사상을 응집한 것이기도 하다. 질서와 안정은 정치의 소멸을, 대혼돈은 정치의 출현을 의미한다. (중략) 이 책에서 지젝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의 귀환이자 또한 정치적 주체의 호명이다. (중략) 그 정치의 도래에서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용기이다. 제작의 말을 받아서 우리가 행동을 결정할 차례이다. (p. 7) -추천의 글 中-

하나의 주제에 대해 깊이있게 탐구한 책이 아닌 이런저런 글을 모은 책은 대부분 맥락을 파악하기가 좀 어려운 경우가 많다. 더구나 지젝이 사용하는 용어들은 철학을 좀 공부한 사람들만 알법한 전문개념들도 사용하고 있어서 더 현학적으로 다가오는 문장들로 인해 이해하는데 많이 버거웠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들을 굳이 다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고 대충 넘기면서 핵심만 파악해보면 지젝의 통찰은 제법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다.

자유주의적 서구가 다른 세계에 기준을 부과하는 일은 더는 허용되지 않는다. 모든 삶의 방식은 동등한 것으로 취급될 것이다. (p. 17) 이러한 새로운 '관용'을 뒷받침하는 슬픈 진실은 오늘날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더는 해방된 인류라는 긍정적 전망을 이데올로기적 꿈의 형태로도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중략) 포퓰리즘은 바로 이 실패의 증상, 그 헌팅턴식 질환이다. (p. 18)

과거에는 우월한 나라가 있고 그렇지 못한 나라가 있을때 우월한 나라가 열등한 나라를 도와주는 관용을 통해 세계적 평등을 추구했다면 지금은 저마다 모두 우월한 나라라고 자칭하며 동등하게 취급하는 대신에 서로에 대한 관용은 오히려 없어진 셈으로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인류의 해방에 대해 왜곡된 모습으로 자리잡아 버렸다. 세계적 평등을 추구하는 보편주의가 사라지고 저마다 자국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게 된 지금의 세계는 포퓰리즘이 득세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것을 저자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우리는 지금 정말로 난관에 처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모두 망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든 치명적 위험이 있다. 여기서 누가 결단을 내릴 것인가? 과연 누구에게 결단을 내릴 자격이 있나? 이 시점에는 직접적 이해득실을 따지기보다 거시적 안목에서 과학척 추론을 근거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우리가 이미 생태적 교란의 효과를 느끼고 체험하고 있다해도 우리의 일상생활은 아직 실제로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구온난화 탓으로 인간은 그 모든 정신적이고 실제적인 행위의 보편성에도 기본적 충위에서는 그저 지구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생물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략) 지구온난화의 교훈은 인류의 자유가 지구 생명체의 안정적인 자연적 변수를 바탕으로 해서만 가능했다는 점이다. (p. 21)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어도 우선순위를 똑바로 세우고, 전쟁으로 차지하려는 바로 그 지구가 위험에 처해 있는 참에 지정학적 전쟁 놀음을 벌이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인정하는 일이다. 국가 간 경쟁이라는 논리가 지극히 위험한 발상인 이유는 인류가 환경을 대하는 새로운 관계 양식의 변화를 정립해야 할 시급한 필요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p. 23)

새로운 세계질서의 필요성은 정치적 혼란뿐만 아니라 전지구적 생명의 위협때문에라도 긴급히 필요하게 된 시점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법은 어느 한나라 또는 몇몇의 선두나라의 변화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정말 전지구적 협력이 필요하다. 자국우선주의가 심화될때 지구적 문제는 더욱 급속하게 심각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유럽은 미국-먼저, 러시아-먼저, 중국-먼저 라는 구호 사이에서 지배력을 경쟁하는 세계와 맞지 않다. 군대를 만들지 않으면 유럽은 이 거대 삼자 세력이 벌이는 지배 경쟁의 놀이터가 될 터이고,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p. 37) 초국가적 통일체인 유럽으로서, 작금의 도전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국민국가라는 제약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는 유럽이다. (중략)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적어도 유럽에서는 '주관적'사회민주주의에 맞선 '객관적' 사회민주주의다. (p. 40)

새로운 세계질서 구축방법의 하나로 저자는 유럽연대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고 있다. 유럽통합군대라는 실질적 방어조직과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념적 대안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 새로운 세계질서를 조금은 혁명적으로 꿈꾸고 있는 것도 같다.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투쟁과 이슬람혐오에 대항한 싸움은 동일한 투쟁의 두 측면으로 보아야만 한다. 오늘날에는 반유대주의가 좌파적이라는 주장이 종종 나온다. 이러한 몰이해에 반대하여 우리는 오늘날의 반유대주의가 포퓰리즘이라고 강조해야만 한다. 포퓰리즘은 언제나 국민의 화합을 위협하는 외부의 적을 필요로 한다. 그게 유대인이든 이주민이든 혹은 둘이 합쳐진 것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진정한 좌파는 결코 반유대주의적이지 않다. (p. 58)

오늘날 궁극의 '적'은 구체적인 사회적 행위자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시스템 그 자체, 행위자로 쉽사리 귀속할 수 없는 시스템의 어떤 작동 양상이다. (p. 86) 개인의 탐욕에 맞춰 점증하는 불평등을 도덕주의적 측면에서 접근하기보다 더는 '탐욕적'행위를 허용하거난 심지어 부추기는 일이 없게 시스템을 바꾸는 일이 우리의 임무이다. (p. 87)

오늘날 근본적 변화를 상상하기 힘든데도 왜 근본적 변화를 고집하는가? 왜냐하면 우리와 전 지구적 곤경이 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급진적 변화만이 생태적 파국과 유전공학의 위험 및 우리 삶의 디지털 통제 같은 전망에 대처하게 해줄 수 있다. 이 과제는 불가능하지만 그만큼 절실하다. (p. 97)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보스니아 등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포퓰리즘 적 정치사건들에 대해 저자는 쓴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건들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쉽사리 휩쓸리지 말고 그 사건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아채야 한다. 하지만 때론 그 주체가 불분명하기에 세계정세는 더욱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시스템적으로 교묘하게 이용되는 행위들이 더 교묘해지기전에 급진적 변화가 꼭 필요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진리로 회귀하는 유일한 길은 보편적 해방에 참여하는 입장으로부터 진리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역설은 보편적 진리와 당파성이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사회적 삶에서 보편적 진리는 해방을 향한 투쟁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질 수 있고, '객관적' 무관심의 태도를 견지하려는 사람에게는 닫혀 있다. (p. 106)

그러한 범죄와 싸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것들의 끔찍함을 그대로 드러내야 하고, 그것으로부터 충격을 받을 필요가 있다. <동물농장>의 서문에 조지 오웰은 자유가 어떤 의미를 지닌다면 이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말할 권리"를 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언론 미디어가 검열되고 규제될 때 우리는 바로 이 자유를 빼앗긴다. (p. 114)

트로츠키는 국가의 핵심이 정치적이고 행정적인 조직이 아니라 기술적 서비스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트로츠키가 우편, 전기, 철도 등을 지배하는 일이 권력의 혁명적 쟁취의 핵심 계기라고 보았던 것과 유사하게 국가와 자본의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디지털 망체계의 '점령'이 오늘날 다른 무엇보다도 결정적이지 않을까? (p. 138) 권력을 가진 자들이야말로 저항운동을 고립시키고 봉쇄하기 위해 디지털 망체계를 선별적으로 폐쇄하는 일에 스스럼이 없을 사람들이라는 것. 대중의 불만이 대규모로 폭발할 때 첫 번째 행동은 언제나 인터넷과 휴대폰의 차단이 될 것이다. (p. 139)

참여해야 바뀐다. 무관심은 곧 자발적 복종이 된다. 알아가는 과정에선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할 이야기들이 보고 싶지 않아도 보아야 할 장면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들에 대해 왜곡과 검열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과연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정치는 디지털세계에서 더욱 난해해지고 있다. 거짓뉴스가 판을 치게 된 세상에서 시끄러워도 너무 시끄러워진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자유를 추구해야 할까?

오늘날 삶이 어떻게 규제되는지 이해하고 이 규제가 어떻게 자유로 체험되는지 알려면 인류의 공유재를 통제하는 민간기업과 비밀 국가기관의 음험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는 중국이 아니라 그와 같은 규제를 받아들이는 스스로에 충격을 받아야 한다. 그 와중에 우리는 스스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으며 언론이 우리의 목표를 실현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믿고 있다. 반면 중국 사람들은 자신이 규제받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 새로운 인지적-군사적 복합체의 가장 큰 업적은 직접적이고 공공연한 억압이 더는 필요 없다는 점이다. 개인은 스스로 자기 삶의 자유롭고 자율적인 행위자라고 지속적으로 느낄 때 훨씬 더 잘 통제되며 바라던 방향에 '맞춰 들어'간다. 이러한 도착적 뒤틀림이 더 나아가면, 이제 통제와 검열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협적으로 가로막을 트라우마적 경험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방식의 하나로 정당화될 수 있다. (p. 184) 우리는 최근에 발흥하고 있는 새로운 학문인 '행복학'에 의문을 던져야 한다. 인생의 목표가 곧바로 행복으로 정의되는 때이자 정신화된 향락주의의 시대에 어째서 불안과 우울증은 폭발하고 있는 것인가? (p. 185)

우리는 통제받고 조종된다. 뿐만 아니라 '행복한' 사람들은 심지어 속으로는 그리고 위선적이게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조종받기를 요구한다. 진실과 행복은 함께 가지 않는다. 진실은 아프고, 불안을 가져오며, 우리 일상생활에 매끈한 흐름을 방해한다. 현실은 방향타 없는 공간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가르침이 바로 여기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직면해야 할 궁극적 선택은 둘 중 하나다. 행복하게 조종받길 원하는가, 아니면 진정한 창조성의 위험, 이 위험이 불러일으키는 지속적 불안에 자신을 과감히 드러낼 것인가? (p. 192)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느끼며 살고 있을때 그런 현실에 의문을 던지기는 쉽지 않다. 저자의 말처럼 '진실과 행복은 함께 가지 않'기 때문이다. 안정된 불행과 행복한 불안 중 선택해야 한다면 과연 '행복한 불안'을 선택하는 이들이 더 많을까?

현재까지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었따. 물론 때때로 노골적인 독재로 기운 적도 있었지만, 일이십 년이 지난 후에는 민주주의가 다시 세워졌다. 그러나 이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연결이 끊어졌다. 그래서 우리 미래의 모델을 중국식 자본주의적 사회주의로 삼게 될 가능성이 꽤 있다. 이는 우리가 꿈꾸어왔던 사회주의는 분명 아닐 것이다. (p. 220)

오늘날 중국에서 가장 위험한 일은 공식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믿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중략) 중국 공산당이 마르크스주의적 이념을 실질적으로 충실하게 따르지 못한다는 유감을 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이데올로기 자체에, 적어도 그 전통적 형태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p. 224)

트럼프는 기존 체제를 흔드는 불안정한 멍청이다. 그러나 자체로 그는 하나의 증상, 즉 기득권 체제 자체의 문제가 불거진 효과이다. 진짜 괴물은 트럼프의 행동으로 인해 충격을 받은 바로 그 기득권 체제이다. 트럼프의 행동에 대한 당혹한 반응은 그가 미국의 정치적 기성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손상하고 불안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p. 228)

정치적 올바름을 '문화적 마르크스주이'라고 지칭하는 일이 옳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통념과는 반대로, 정치적 올바름은 그 모든 사이비 급진성에도 마르크스주의 개념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자유주의의 최후 방어기제로서, '주요 모순'인 계급 투쟁을 혼탁하게 만들거나 추방해버린다. (p. 239)

저자는 전방위적으로 예민하게 날을 세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혹은 기득권 뿐만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와 좌파세력에 대해서도 무차별적 비판을 거듭한다.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고 잘못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그런 잘못된 부분들을 고치려는 사람들은 찾기 쉽지 않다. 있다해도 소수정예로 해결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천하대혼란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찌해야 할까?

우리는 지금 우리의 지배자(기술 관료들)를 신경질적으로 자극하는 와중에 있다. 이 자극은 한 걸음 더 나아간 조치로 이어져야만 한다. 시스템에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말고 시스템 자체의 '불가능한'변화를 요구하는 일, 그런 변화가 '불가능해'보이고 현 시스템의 좌표 내에서 생각하기 어렵지만, 이 변화는 분명 우리가 처한 생태주의적이고 사회적인 곤경이 요구하는 것이며 유일하게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공한다. (p. 246)

저자의 급진적 보편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세계시민 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민으로서 사회에 대한 관심과 책무를 게을리하지 않고 그 역할을 하나의 국가에 제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 모두가 이런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시스템적으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 그런 세계시민.

사실 세계시민 이란 단어는 최근 읽었던 에픽테토스의 철학책에서 읽었던 건데 스토아 철학자의 이 단어가 현대의 급진적 사상가가 촉구하는 변화에 대한 핵심용어로 이렇게 적합하게 될 줄이야.

저자는 '생존이 걸린 항해에 우리는 이제 막 나섰다'며 자신의 급진적 날선 비판들이 생존과 직결된 문제임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이 시대에 필요한 지적이었고 귀담아들을만한 통찰이었으나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들로 인해 많은 부분을 덮고 지나칠 수밖에 없어서 개인적으로 많은 아쉬움이 남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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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선 - 하드보일드 무비랜드
김시선 지음, 이동명 그림 / 자음과모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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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 없는 것이 반전인 김시선의 영화 생활

취미, 특기, 직업 모두가 영화 보기인 프로 영화 덕후 김시선의

영화와 함께하는 웃픈 일상

 

 

나는 요즘시대 분위기에 맞지 않게 여전히 영상매체와 그닥 친하지 않은 사람이다. 빠른 소통의 도구인 SNS도 하지 않는다.

나를 옛날사람이라 칭해도 어쩔 수 없지만 영상이라면 영화나 TV가 다일뿐 그외의 정보매체로서 나는 여전히 눈으로 보는 매체라면 인쇄된 것이 좋고 소통을 한다면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다. 아니 내겐 거의 유일한 방식이다.

그런 내가 영화 유투버인 김시선을 알리 없다. '김시선의 영화 생활' 이라는 부제에서 내 눈길이 갔던 것은 '영화' 라는 단어였는데 알고보니 이 책은 '생활'에 방점이 찍힌 책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좋았다. 영화를 사랑하는 그 진정성이 차고넘쳐 자연스럽게 읽는이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저자의 영상한번 본적 없는 내가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되다니... 역시 책이 좋다. ㅎㅎ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느낌은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준다는 것. 사랑하는 상대가 생기면 근거 없는 용기가 생긴다. 그 용기와 믿음은 다음 행동의 근거가 된다. (p. 11)

저자는 영화유투버 1세대 라고 한다. 사실 1세대 였기에 이 정도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성공이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유투버들의 세상은 그야말로 전쟁터가 아닐까 싶다. 유투브를 거의 안 보는 내가 이렇게 느낄 정도면... 무엇이든 1세대는 어쩌면 행운의 세대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 성공이 가능했다. 예를들어 인터넷세상의 1세대라 할수있는 PC통신 1세대들은 지금 게임업계의 리더에 포진해있다. 어떤 드라마에도 나오지 않았던가, 아이돌 1세대를 좋아하던 팬덤문화의 1세대는 그 열정으로 본인의 재능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면 뭐가 되든 되는 때가 있었다. 불과 몇십년 사이에... 지금은? 어느 분야에서든 그런 사람이 너무 많다...

시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느낌을 운율이 있는 언어뢰 압축하여 표현한 글이라는데, 내 생각에 그걸 영상으로 옮길 수 있는 감독은 오직 아바스 키아로스타미뿐이다. (p. 16)

영화 유투버의 책이라서 다양한 영화들에 대해 많이 알게 되는 책일줄 알았다. 보고싶은 영화들을 잔뜩 찾아낼 수 있을 것을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영화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저자의 생활을 담아낸 책이다. 생활속에 녹아들어 있는 장면에서 연결되는 영화들이 나오긴 하지만 영화 자체에 집중하는 글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영화에 관련된 다양한 활동들을 읽으면서 영화를 보고 엔딩크레딧이 끝나기전에 일어서버렸던 (엔딩크레딧에 올려진 이름들을 미처 다 읽지 않았던) 미안함을 조금 덜어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수천편의 영화를 본 저자가 인생영화로 꼽은 이란 감독의 <체리향기(1997)>라는 영화가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이내 보고싶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인생영화라는 것은 다분히 그 누군가의 굉장히 개인적인 사연이 엮인 의미가 부여된 영화다. 따라서 저자의 인생영화가 내 인생영화가 될 수는 없다. 큰상을 받고 엄청난 가치부여를 해가며 인생영화가 될법한 영화를 소개하는 글들을 읽고 그런 글들을 따라서 영화를 보고자 하는 것보다 저자의 솔직담백한 영화이야기가 주는 깨달음이 나만의 영화를 찾고 싶은 나만의 영화에 대한 애정을 움트게 했다. 그 어떤 영화소개글보다 더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까 싶었다.

총551분 동안 이어지는 변화를 하나하나 글로 적는 건 무의미하다. 그저 태어나 살다가 죽어가는 한 노인의 삶을 보듯 영화를 봐야 한다. 앞서 말했듯 러닝타임이 긴 영화들은 기억하는 것보다 느끼는 게 중요하다. 이 영화를 보고 내가 느낀 것은 '한때는 물건을 가득 실은 열차가 지나간 철로엔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구나. 우리 인생사도 그럴까?' 였다. (p. 45)

<철서구>(2003)이란 영화의 러닝타임은 총551분이라고 한다. 이 영화가 가장 긴 영화냐 하면 그렇지 않다. 773분짜리 영화도 있었고 어쩌면 그보다 더 긴 영화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긴 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그렇게 긴 영화일수록 스토리보다 느낌이 남는다는 저자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왠지 알것만 같았다. 저자는 긴영화의 특징을 표현하기 위해 그런 변화를 하나하나 글로 적는 건 무의미하다고 했지만 그런 변화를 하나하나 적은 글을 읽는 것도 영화못지 않은 섬세한 느낌을 전달해준다. 저자는 영화를 통해 그런 느낌을 받겠지만 나는 책을 통해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 더 좋다. 오히려 영상이 뚜렷이 보여주는 것보다 글로 상상해내는 장면들이 더 그런 긴 호흡을 느낌적인 느낌을 전달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리 힘들고 귀찮아도 써야만 한다. 한 문장이라도 써놔야만 매년 700편씩 쌓이는 영화를 몇 년이 지나도 기억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많은 영화를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나에게는 너무나 큰 숙제다. (p. 54)

저자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방법은 '에어테이블'이란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영상매체가 정보전달의 주류가 될지라도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글로 써야 한다. 오히려 영상매체의 전달방법이 변해갈때 '쓰여지는 글' 이라는 수단은 더 오랫동안 지속될 지도 모른다. 저자의 영화에 대한 애정을 읽으며 나의 책에 대한 애정을 자꾸 견주게 되곤 했다. 나는 역시 책이었다.

'영화 비평을 하는 최고의 방법은 인터뷰'란 생각이 없었다면, 이놈의 인터뷰는 진즉에 그만뒀을 것이다. 말은 이렇게 해도 다음에 누구를 인터뷰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설렌다. (p. 85)

온간 해석들이 넘쳐날 수 있는 영화에 대해서 결국 가장 잘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그 사람의 생각을 직접 듣는 방법이 인터뷰다. 감독의 생각이 정답은 아니듯이 관람객의 생각이 오답은 아니다. 그렇게 표현해도 저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원래의도를 안다는 것은 확실히 의미가 있다. 인터뷰는 결국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대면방식이다. 아무리 빠른 소통방식이 등장해도 대면과 대화가 주는 가치는 여전하다.

좋아하는 일을 해도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분명히 열심히 하고 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성과도 없을 때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나?'자책하기도 하고, 어쩌면 여기서 그만하는 게 나와 가족에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내가 믿고 가는 길에 대한 의심이 솟는 그 순간이 가장 힘들다. (p. 105)

그럴때, 그런 힘듦이 찾아왔을 때 다시 힘을 준 것도 역시 사람이었다. 자신처럼 영화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갖고 있는 지인을 보며 초심을 되새기곤 했다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나또한 그런 관계들을 떠올려본다. 진솔한 에세이는 이렇게 자꾸 나의 에세이를 속으로 쓰게 만드는 것 같다.

"<행복한 라짜로>가 후일 비평가 사이에 걸작이 될 수 있는 영화라면, <교실 안의 야크>는 누군가의 인생 영화가 될 수 있는 영화에요" (p. 138)

저자의 에세이 속에는 영화를 사랑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중 영화수입사업을 하시는 분의 이야기가 마음을 짠하게 했다. 영화를 보고 즐긴다는 것은 감상적으로 생각하면서 영화산업이라는 것은 그저 사업적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영화에 대한 다양한 진심들을 읽으면서 애정을 갖고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곤 했다. 여하튼, 박대표 아저씨 화이팅!

요즘엔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이 오간다. 그러나 영화는 빛과 어둠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빛은 너무 아름답지만, 어둠이 없다면 그 빛을 아무도 볼 수 없다. 망작이 있어야 걸작도 존재할 수 있다. 망작영화제를 통해 '걸작'이든 '망작'이든 사람들이 모든 영화를 사랑하고 응원했으면 좋겠다. (p. 146)

날마다 운이 좋으면 사실 그렇게 일상이 된 행운은 더이상 행운이 아니다. 어쩌다 한번 찾아왔을 때 행운의 가치는 빛나기 마련이다. 영화가 빛과 어둠의 산물이라는 것에 대해 정말 그렇구나 싶었다. 깜깜한 상영관에서 광고조차 끝나고 모든 불이 꺼지는 그 순간이 가장 설렌다. 곧 다가올 환하게 빛날 영화가 가장 기대되는 순간이다. 망작의 필요성도 공감 ㅎㅎ

우린 부모님의 바람에 따라 '주인공'으로 자란다. 친구들은 나를 중심으로 지나가고, 학교는 나를 중심으로 존재하며, 부모님은 내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산다. 그렇게 평생을 주인공으로 살고 싶지만, 이른바 '인생의 장애물'이라 불리는 허들에 몇 번씩 부딪히고 나면 어느새 주인공에서 멀어져간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나는 조연이었구나... 내가 조연이라니!' 처음엔어색하고 불안하지만, 첫 조연 데뷔를 잘 마치고 나면 그 배역에 익숙해진다. (p. 186) 그러니까 애초에 '영화 속 조연들은 조연이라도 행복할까?'라는 질문은 틀렸다. 조연도 얼마든지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남의 영화에선 조연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내 영화에선 내가 주인공이 되면 된다. 당신이 영화를 만들면, 당신은 반드시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 (p. 188)

그런가? 모두가 주인공으로 살다가 조연인 것을 깨달을때 좌절하는가... 요즘 세대는 확실히 그런것 같다. 하지만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평생 단 한번도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가져본적 없이 삶을 사는 것이 숙명처럼 받아들여지던 때가 있었다. 평생을 조연 그것도 아니면 엑스트라라는 것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과 주인공인줄 알았다가 조연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중 무엇이 더 힘들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껏 주인공으로 살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게 그렇게 아쉽거나 좌절스럽진 않다. 나는 내 배역이 무엇이건 충실하고 진심이었다는 자긍심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다.

나는 유투브 플랫폼이 모든 콘텐츠의 성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표현했듯이, 유투브는 그저 도구다. 못을 박으려면 망치가 필요하고, 종이를 자르려면 가위가 필요하다. 유투브는 망치가 될 수도 가위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일정 시기가 지나 모서리가 닳으면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유투브가 아니라, '글'보다 '영상'이라는 언어를 더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세대가 오고 있다는 점이다. (p. 228)

그럴까? 정말 그럴까? '글'보다 '영상'을 더 편하게 보고즐기는 시대가 되긴 했다. 편한 것을 더 익숙하게 받아들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글'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수천편의 영상을 보는 저자도 결국은 글로 기록해야 했다. 영상은 사라져도 글은 남는다. 유투브가 아닌 또다른 혁명적인 영상매체가 등장해도 여전히 글은 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마 그때에도 책을 읽고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성공한 내 이야기가 아니라 여전히 부족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실패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중략) 이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마음껏 '영화 보는 인간'으로 살고 있으니, 나름 성공한 인생이다. (p. 240) 요즘, 영화 보는 삶이 더 행복해졌다. 동시에 그만큼 배워야 할 것도 많아져서 두렵기도 하다. 혹시 내 주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줄까 봐. 하지만 항상 그랬듯이 일단 해볼 것이다.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멈춰 있으면 우연은 생기지 않는다. (p. 242)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오랜만에 포옥 빠져서 읽었던 에세이였다. 영화든 책이든 역시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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