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 팜
조앤 라모스 지음, 김희용 옮김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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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은 수익성 좋은 비즈니스다, 당신이 규칙을 따르기만 한다면.

비밀 대리모 시설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본격 임신·출산·육아 스릴러

 

 

베이비팜, 제목을 본 순간 '시녀이야기'가 안 떠오를 수가 없었다. 여성이 임신을 할 수 있는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펼쳐지는 디스토피아.

'멋진 신세계' 에서는 아기를 아예 시험관에서 종류별로 키워냈는데 '시녀 이야기' 에선 특별한 계급만 번식의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시녀를 통해서. 그 시녀는 걸어다니는 자궁일뿐 인격체가 아니었다. 그런데 최고급 리조트 시설에서 지내는 대리모들의 이야기라... 비록 소설 제목이 THE FARM 이긴 하지만 과연 농장이라고 치부하고 넘길 수 있을까? 리조트 라고 볼 수 없는 이유를 찾아낼 수 있을까? 이 시대 양극화된 자본주의와 연결된 임신은 좀 다른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었다.

합숙소에는 늘 누군가가 있다. 야간근무 전에 쉬고 있거나 주말 휴무 중이거나 새 직장을 기다리는 이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필리핀 사람들이고, 그중에서도 상당수는 고향에 자식을 남겨두고 온 어머니들이다. 다들 세입자 중 유일한 아기인 아말리아를 애지중지한다. 자식을 데리고 와 그들 사이에서 살 만큼 필사적인 어머니를 둔 이 유일한 아기를 말이다. (p. 21)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거의 다 여자들이다. 그리고 어머니들이다. 누군가의 어머니. 그중에서도 미국땅에서 가정부나 유모로 일하는 필리핀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저자는 필리핀 출신이다. 비록 자수성가한 부모의 고난을 아는 2세대가 아니라 내내 잘 살아온 계층인데도 조국의 여성들이 이국땅에서 겪어내는 일들에 항상 귀를 열어두고 있었던 듯 하다.

아테는 필리핀 여성들의 하숙집 비슷한 퀸스의 합숙소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베테랑 이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열심히 노동하고 돈을 벌어 필리핀으로 보내고 있는 중이다. 아테는 신생아 보모이다. 최상위층의 아기들만 전문으로 돌보는 신생아 보모. 잠시 몸이 불편해졌을때 아테는 합숙소에서 갓태어난 딸 아말리아와 함께 지내는 제인에게 자신의 일을 맡아줄 것을 부탁한다.

그들에게 시간이 별로 없기에, 아테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다급한 목소리로 제인에게 일러준다. 반드시 유니폼을 입어야 해.(중략) 설령 그애가 낮잠을 자고 있더라도 너는 바쁘게 일해야 해. 그러지 않으면 게을러 보일 테니까.(중략) 섬 출신 육아도우미들이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지켜보지 않고 휴대전화만 보는거 알지?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마. 그러라고 두배나 되는 급료를 주는 게 아니야.(중략) 영어만 사용해. 부모가 다른 방에 있더라도 타갈로그어는 쓰지 마. 그들이 불편해하니까.(중략) 아마 자기들은 '케이트와 테드'라고 부르라고 할 거야. 완전히 미구식으로 동등하게 말이지. 하지만 항상 '선생님' 과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해. 그들은 또 네게 '자기집처럼 편히 있어요'라고 할 거야. 하지만 정말로 네가 자기 집처럼 편히 있는 걸 원하는 건 아니야! 그곳은 네 집이 아니라 그들 집이고, 그들은 네 친구가 아니니까. 그들은 의뢰인이야. 그뿐이야. (중략) 만약 부인이 아기를 보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그땐 괜찮아. 단, 아기가 젖을 충분히 먹어서 배가 부르고 이미 트림도 해서 만족스러운 상태여야 해. 배고프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고, 울음을 터뜨릴 기미도 없어야 한다고. (중략) 이 공책에 (중략) 도표를 만들어 기록해둬. 의뢰인들은 도표를 좋아해. (중략) 제인, 이런 유형의 부모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해. 그들은 상황을 통제하는 데 익숙해. 돈 덕분이지. 하지만 갓 태어난 아기가 있으면 (중략) 통제불능이야! 제인, 제발 잘 들어. 중요한 얘기니까. 아마 가장 중요한 얘기일 꺼야. 최고의 신생아 보모가 되려면 아기 부모한테 네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걸보여줘야 해. (중략) 이 공책은 그냥 공책이 아니야. 알아들었어? 아기 부모에게 이 공책은 질서를 의미해. 세상이 마구잡이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제인, 이 공책 덕에 그 부모가 널 믿게 될 거야. (p. 44~49)

3장에 걸쳐 강조되는 아테가 제인에게 이르는 당부사항들이 번역자는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고 했다. 소설에서 한 사람이 얘기한 것 중에선 가장 긴 대사였을 이 내용들은 아테의 경력이 그냥 쌓인 것이 아님을 알려주는 동시에 그 필사의 생존법 사이사이 숨어있는 부자들의 행태를 넌즈시 고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읽어나갈수록 대리모 이야기라기 보다도 자본주의의 속살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몇주 동안 제인은 그 의사가 그랬듯 세상이 카터 부부의 집으로 제 발로 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p. 53) 그곳이 자급자족적인 세계라는 것을, 다시 말해 삶의 충격과 폭풍을 견뎌낼 수 있게 만들어진 세계라는 것을 제인은 몇주에 걸쳐 깨달았다. 그녀와 아말리아, 그리고 그녀가 정말로 잘 아는 모든 사람이 사는 세상과는 몹시 동떨어진 세계였다. (중략) 제인은 은행 직원에거 '이율'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그는 계산기를 꺼내더니, 그것이 그녀가 은행에 맡긴 돈이 늘어나는 비율이라고 설명해주었다. (p. 54) 돈이 저절로 늘어날 것이라는 사실은 제인에게 일종의 계시였다. 마치 그 전까지 꼭 닫혀 있던 문이 이제는 좁은 틈이나마 열린 것 같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그 문안으로 들어가는 걸 그려볼 수 있었다. (중략) 그녀가 조심만 한다면 그 큰돈이 차츰 불어서 일종의 요새가 되어 줄 터였다. (p. 55)

제인은 필리핀에서 태어났다. 자신을 키워주던 할머니의 죽음이후 오래전 미군을 따라 자신을 버리고 미국으로 간 어머니를 찾아왔다. 하지만 수시로 바뀌는 어머니 애인들의 끈적한 눈길을 피해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남자친구와 도망쳤다. 그리고 이제 막 성인이 된 나이에 제인은 돈한푼 없는 미혼모 신세였다. 그때 아테가 세상 사는 법들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 세상에서 절감한 것은 돈의 위력이었다. 자신과 이웃들이 온몸으로 맞서도 무릎을 꺽게 하는 세상이 부자들에게는 스스로 걸어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인은 그 첫 도전에서 실패했다. 아테가 넘겨준 신생아보모자리에서 해고당하고 말았다. 그 다음 기회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인에게는 지키고 살려야 할 딸 아말리아가 있었다.

'호스트(host)'에는 일반적인 '주인' '숙주'라는 의미 외에도, '이식받는 사람' '수용자' 라는 의학적 의미가 있다. 이 소설에서는 골든 오크스에서 배아를 이식받는 대리모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p. 71 의 주석)

메이는 골든 오크스의 총 책임자이다. 30대중반에 이만큼 올라오기까지의 여정은 쉽지 않았다. 미국인 어머니와 중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메이는 어떤 상황에서든 사태파악이 빨랐다. 그래서 지금의 '부'를 누릴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사랑하는 남자와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대리모 전용 최고급 리조트인 골든 오크스는 그녀에게 엄청난 기회를 가져다 줄 사업이었다. 골든 오크스에 머무는 대리모들은 '호스트'라고 불렸다.

지금껏 메이가 몇번이나 제안한 방침인데, 왜냐하면 그녀는 호스트들이 서로를 감시할 수 있게끔 자기들끼리 짝을 지어줘야 한다고 굳게 믿는데다가, 침실당 더 많은 호스트가 머문다는 것은 그만큼 이익률이 상승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p. 77)

몇몇 의뢰인은 정말로 건강한 자궁을 가진 호스트를 선택하는 데만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그런 의뢰인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의뢰인은 자신들이 선택하는 호스트가 곧 태어날 아기들을 품을 보관소인 동시에 몸속에 착상될 존재에 거는 그들의 높은 기대의 표상이라 여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예뻐 보이는, 혹은 '말솜씨가 좋거나' '친절하거나' '현명하거나' 심지어 교육가지 잘 받은 듯 보이는 호스트에게 끌리고, 기꺼이 프리미엄을 지불한다. 처음에 메이는 이 마지막 조건에 깜짝 놀랐다. 마치 태아가 포도당, 단백질, 산소, 비타민 뿐 아니라 값비싼 교육을 통해 획득한 지식과 하늘을 찌를 듯 높은 SAT점수를 흡수하기라도 하는 양, 프린스턴이나 스탠퍼드나 UVA를 졸업한 여자의 자궁에 엄청난 프리미엄을 기꺼이 지불하려 한다니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 (p. 80)

'시녀이야기'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 부분에서 '아주머니' 와 메이를 연결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녀들을 가르치고 감시했던 '아주머니' 라는 존재와 최고급 시설 골든 오크스를 경영하는 메이는 비슷한듯 다르다. '아주머니'들은 직접적으로 시녀들위에 군림했지만 메이는 간접적으로 '호스트'들의 상황을 통제한다. '아주머니'들은 권력으로 메이는 '돈'으로 임신이라는 생물학적 특성을 이용한다. 시녀가 호스트가 되는 사이 사회가 그만큼 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사회는 민주주의보다 자본주의에 더 휘둘린다.

레이건을 골든 오크스에 소개한 것은 대학 시절 그녀의 난자를 채취한 클리닉이었다. 그녀는 아마 그때도 자신이 이타심에서 그런 행동을 한다고, 돈은 난자를 기증하기로 한 자신의 결정에 있어 부차적인 요소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메이는 왜 사람들이, 더구나 레이건이나 케이티 같은 특권층 사람들이 돈을 원하는 데 무언가 수치스러운 면이 있다고 고집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일찍이 어떤 이민자도 더 멋진 삶을 원한다는 이유로 사과한 적은 없지 않은가. (p. 90)

메이는 레이건을 '호스트'로 영입하는데 공을 들인다. 부유하게 자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백인 여성인 레이건 같은 조건의 '호스트'는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는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수요는 많고 공급은 희박한 특별함때문에 자신의 가치가 돈으로 엄청난 금액으로 환산된다는 것을 레이건 본인은 몰랐겠지만.

그리고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신들의 난자와 정자로 배양한 태아를 대리모의 자궁에 착상시켰을 뿐인데 대리모의 무엇이 태아에게 전해진다고 그렇게 대리모의 조건을 따지는 건지. 하지만 이러한 웃기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가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다.

당신이 겪는 모든 문제는 당신 잘못이다.

제인은 빌리를, 카터 부인을 떠올리며 매우 동의함을 클릭했다.

많은 일에 있어서, 나는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사람보다 훌륭하다.

이 문장에 제인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전혀 동의하지 않음

나는 무언가를 하라는 지시를 들어도 기분 나쁘지 않다.

동의함.

몇주 후, 제인은 골든 오크스 농장의 전무이사인 메이 유 로부터 '경쟁률이 매우 높은' 호스트 선정 과정의 첫 두 단계를 통과했음을 알리는 이메일을 받았다. (p. 100)

미즈 유가 제인에게 말한다. "당연히 우리는 유모, 노인돌보미, 심지어 신생아 보모 같은 여타 대안적인 일보다 매력적인 금액으로 급여를 책정해요. 우리 의뢰인들은 자신들의 호스트가 좋은 대우를 받기를 원하거든요. 하지만 이 일의 동기부여 요소가 돈이 다는 아닌 것 같아요. 자질이 있어야 하죠. 소명 의식도 있어야 하고요"

"제가 그래요" 제인은 아말리아를 생각하며, 그리고 이 일을 얻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아말리아에게 해줄 수 있고 아말리아가 겪지 않게 해줄 수 있는 모든 일을 떠올리며 말한다. "저한테는 소명의식이 있어요" (p. 122)

제인이 골든 오크스에 들어가기 위해 받았던 테스트들 중 일부 문항을 보며 '호스트'로서의 조건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다. 레이건 같은 특별한 호스트는 아마도 이런 테스트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인 같은 필리핀 출신 호스트가 거치는 테스트들은 그 이상의 조건을 요구하고 있었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여기서도 통한다. 제인같은 여성은 수요보다 공급이 많다.

제인은 '호스트' 가 되었다. 아말리아는 아테가 당분간 맡아 키워주기로 했다. 아테의 신생아보모 자리를 제인이 날린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차피 더이상 할 수 없는 몸상태였다. 아테는 제인에게서 일정수익을 받기로 했음에도 필리핀에 있는 아들 로이를 생각하면 그냥 있을순 없었다. 제인이 골든 오크스에 들어가고 나서 아테는 다른 사업을 구상한다.

리사가 말을 잇는다. "첫째, 코디네이터가 항상 당신 꽁무니를 바짝 따라다니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테이블에 엎드리지 말아요. 둘째, 더 중요한 얘긴데, 당신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이해해야만 해요, 여기는 공장이고 당신은 상품이에요. 당신은 의뢰인을 당신 편으로 만들어야 해요. 코디네이터들이나 미즈 유가 아니라요. 나는 지금 그 부모들, 특히 어머니를 말하는 거예요" (p. 138)

골든 오크스에서 만난 호스트들 중 리사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대부분 유색인 사이에서 두드러지는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랬지만 험한 말버릇과 호스트로서의 이점을 최대한 누릴 줄 아는, 벌써 3번째 대리모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제인과 룸메이트인 레이건은 유일한 말벗인 리사가 불편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더 힘들었기에 리사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다. 리사를 통해 벌어지는 사건들은 제인과 레이건의 '호스트' 생활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게 된다.

"그거 대리출산이잖아! 그런 식의 대리출산은 상품화고, 인간 생명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야! 신성한 모든게 외부에 위탁되어 일괄적으로 거래되고, 결국 최고가 입찰자에게 팔려 나가는 거라고!"

"참 쉽게도 말하는 구나. 넌 은행에서 일하잖아! 난 아빠한테 기대 사는 인생이 지긋지긋해. 누군가를 도와서 아이를 갖게 해주--"

"넌 어떤 낯선 부자가 널 이용하게 내버려두고 있는 거야. 삶의 근원적인 무언가에 가격표를 붙이고 있는 거라고"

"입주 유모, 신생아 보모, 젖어머니, 혈액 기증자, 신장 기증자, 골수 기증자, 정자 기증자, 대리모, 난자 기증자... 너 [더 크로니클]에 실린 난자 기증자 찾던 광고 기억나?" (p. 147)

"그냥 좀... 허무하네. 난자를 파는 게 여느 상거래나 마찬가지라는 게. 어쨌든 그건 네 난자였잖아"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어" 레이건이 발끈하며 설명했다. 난자는 몸속에서 성숙해졌다가, 결국 잘라낸 발톱이나 미용실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카락처럼 매달 버려질 뿐이라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도 있는데, 왜 쓸모없이 낭비되게 놔둬야 하냐고. (p. 151)

레이건이 절친 메이시와 이런 대화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레이건에게 난자든 대리모든 그건 수단이었다. 돈을 벌기 위한 일이라는 속내를 감추고 누군가를 돕기 위한 일이었다고 의미부여를 하기 위한 수단. 누리는 것이 당연하게 살아온 레이건이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과정은 제인의 생존을 위한 삶의 축과 분명 다른 축이었다. 하지만 그 둘이 만나게 되는 지점은 결국 '돈' 이었다.

그녀가 호스트가 되기로 결정한 것은 이 일이 갤러리에서 하는 시시한 일에서, 또 아빠에게서 벗어나는 도피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이 일은 더 많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중략) 다시 말해, 대학 시절 이후로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진에 대한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감정, 자유의 기분을 미리 맛보게 된 것이다. 돈이 아니라 자유, 중요한 건 바로 그것이다. 무언가 참되고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p. 169)

사진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레이건에게 경영대학원을 권유하는 아빠는 재정지원자이자 꿈파괴자였다. 레이건의 혼란은 쉽게 멈출 것 같지 않지만, 그냥 배부른 소리 라고 치부하기엔 레이건 같은 존재가 이 사회에 필요하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레이건 또한 돈걱정을 안하기에 그런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라는 점도 우리는 안다. 제인과 레이건 사이에서 어느 한 편에 쉽사리 설 수가 없다. 그것은 리사와 메이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들이 뭘 모르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 상위 1퍼센트에 분개하는 것은 그들에게 공감할 만한 속사정이 없을 때, 샴페인 욕조에서 헤엄치는 정체 모를 뚱보 고양이로 희화화 될 때만이다. 하지만 어떤 억만장자에게 그럴듯한 정보를 가미하면? 그러면 미국인들은 황홀해한다! 어린 시절 마음의 상처를 입었고 다이어트 요요 현상까지 겨은 오프라, 혹은 불운과 비극미로 점철된 케네디가, 혹은 부끄러움 많은 매력꾼 워런 버핏을 생각해보라. 인기 영화 배우, 사교계 명사, 프로 운동선수, 첨단기술 업계의 거물들을 생각해보라. 성공에 공감할 수 있을 때, 미국인들은 그 성공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들은 가족을 사랑한다. (p. 206)

세상쓸데없는 일이 잘 사는 사람들 걱정하는 거다. 방송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럭셔리한 삶이 그들의 고민으로 퉁쳐진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인간적이라며 그들이 누리는 부에 대해 눈감아주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하지만 일반 시청자들은 결코 단 한번도 그들의 부를 누릴 수 없을 것인데 누가 누구 걱정을 한단 말인가.

카터 부인은 신문과 인터넷을 통해서만 필리핀을 알고 있엇다. (중략) 카터부인에게 필리핀은 모든 것이 무너져내릴 수 있고, 실제로도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부패와 위험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하지만 미국도 모든 사람에게 믿음직한 곳은 아니다. 카터 부인은 이 사실을 몰랐다. 그녀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미국에서는 부자가 아니라면 튼튼하거나 젊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녀는 이해하지 못한다. 늙고 병약한 사람들은 제인이 전에 일했던 곳 같은 시설에 숨겨져 있다. (p. 229)

그들만의 세상.

그것은 위아래를 막론하고 존재한다.

우리는 저마다 우리만의 세상에 산다. 서로 다른 세상을 넘나드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세상은 살기 더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레이건은 제인의 세상을 살펴보며 자신의 세상에서 살고 제인은 레이건의 세상을 꿈꾸며 자신의 세상에서 산다. 그럼에도 둘의 세상은 연결되기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정도는 깨닫게 된다. 호스트들의 세상 골든 오크스에서.

"무언가 옳다고 믿는다고 해서, 꼭 그대로 행동할 필요는 없잖아!" (p. 438)

부자들이 실제 인간들에게 대접받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자신에겐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로봇은 결코 골든 오크스를 운영하지 못할 것이다. (p. 440)

사업으로만 생각했던 골든 오크스를 통해 메이의 사고방식도 변화되는 부분이 있었다. 메이의 절친 케이티는 사회공익사업을 하느라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들 대부분을 내려놓았다. 그런 케이티와 케이티 비슷한 사고관을 가진 레이건을 보면서 메이는 그들을 이해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눈감아버리지도 못하는 사람이 됐다. 하지만 그녀는 더더더 성공하고 싶다.

그녀의 배 속 아기는 어떤 애일까? (중략) 하지만 레이건이 정말로 알고 있는 게 뭐라도 있기는 있는 걸까? (중략) 더 이상은 알아낼 방도가 없다. 왜냐하면 리사는 떠났고, 레이건은 제인 외에는 농장의 어느 누구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p. 460) 판단을 내리는 동안 레이건의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진다. 기대감이 둥둥 울려 퍼지는 소리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제 무엇이 옳은 일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p. 464) 머리가 아플 정도로 열심히 고민하면서, 아빠가 옳은 게 아닐까, 그러니까 자신이 추상적인 의미에서 인류애를 들먹일 뿐 실재하는 개인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유형의 사람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빠는 항상 그녀에게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며, 그들을 돕는 것과는 더더욱 다른 얘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는 노력한다. 적어도 신경을 쓰기는 한다. (p. 467)

아테, 메이, 제인, 레이건 4명의 여성이 돌아가며 화자가 되는 이 소설을 읽다보면 4명 각각이 추구하는 방향이 무척 다르면서도 모두에게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모두 다 돈이 필요하지만 그 돈이 필요한 목적이 다르다. 하지만 적어도 3명은 돈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레이건의 이상추구는 때론 답답하면서도 자꾸 마음이 끌리는 일종의 미련처럼 떨쳐내버리지도 못하고 붙잡지도 못하는 그런 어떤 것으로 내게 여운을 남기곤 했다.

"우리가 갈 차례라고!" 메이가 화가 나서 외친다. 운전사가 백미러를 통해 사과하듯 살짝 미소짓는다. 메이도 마주 웃어보인다. 이 남자는 어떻게 날이면 날마다 이걸 견디는 걸까? 끝없는 차량 행렬, 마구 밀어붙이는 운전자들, 무분별한 보행자들, 조급한 승객들, 형편없는 보수, 안 좋은 공기, 주차 위반 딱지, 청구서, 자식들, 그의 외모로 미루어 어쩌면 손주들까지도. 어떻게 폭발하지 않는 거지? (p. 497)

이 책에 등장하는 장면들은 무척 현실적이다. 상류층이건 하류층이건 그 실제 삶이 어떨지 몇 글자만으로도 머릿속에 이미 그려지는 그런 장면들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디스토피아 소설은 아니다. 현실이 아닌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그 현실을 담은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를 찾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그런 구분보다 중요한건 적절한 현실감이다.

"당신은 그런 일을 당해야 할 사람이 아니에요, 제인. 늘 주고 또 주고, 퍼주기만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언제나 받아야 할 걸 못 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돼요.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p. 559)

아테라면(중략) 그녀는 부모가 자식에게 저지르는 최악의 일은 아이를 오냐오냐 키우는 것이라고 항상 말했었다. 세상은 각박하니까. 하지만 제인은 잘 모르겠다. 세상이 자기들 소유인 양 살아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또 세상도 그들의 요구에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p. 580)

의외의 반전이 있는 결말이었다. 심리 스릴러 정도라고 할만큼의 심장쫄깃함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결말에 담으려 했던 희망감을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그들에게만 걸어올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 아말리아에게도 걸어올 수 있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제인은 배웠다.

그들의 삶과 장래성, 그리고 나의 삶과 장래성 간의 격차는 현격하다. 그 격차를 메운다는 게 과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능한 일인지 나는 자주 생각해보곤 한다. 그리고 평생 수없이 들었던, 내가 '아메리칸드림'의 전형이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모든 공적이 그렇듯 이 간극 역시 행운과 우연에 크게 기대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많은 면에서, [베이비 팜]은 지난 25년 동안 내가 나 자신과 나눠온 오랜 대화, 즉 인과응보와 행운, 동화와 타자성, 계급과 가족과 희생에 관한 대화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 이 소설을 쓰지 않았다. 그 답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나 자신을 위해, 또한 바라건대 이 책의 독자들을위해,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에 대한 질문들을 살펴보고자 이 책을 썼다. 독자들이 어느 곳에서 이런 경계에 다가가든, [베이비 팜]이 그 경계의 '반대편'으로 가는 창구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p. 603) - 작가의 말 中 -

이 작품은 야누스적으로 읽힐 수 있는 책이다. 저자의 말처럼 '경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그 어느 것에 대한 정의도 내리지 않고 그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은 이 소설은 그저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한 면을, 그리고 질문을 던지게 한다. 나는?

저자의 첫 소설이라는데 저자의 의도를 완벽하게 표현한 이 작품을 읽으며 저자의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저절로 올라간다. 어느 한쪽으로 명확한 것보다 불분명하게 다가오는 소설들을 읽을때마다 시대의 혼잡성을 새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 혼란감이 요구하는 책임감에 대해 더이상 뒤로 물러나지만은 않아야 하는 게 아닐까. 읽는 이마다 감상은 제각각이겠지만, 나는 지금 이 시대 읽어야 할 사회소설이자 여성소설로 이 작품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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