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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미터O
이준영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12월
평점 :
지구가 방사능으로 뒤덮이자,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작은 생존시설에서 살아남는다. 하지만 방사능이 남긴 후유증으로 인해 인류는 종의 최후를 맞이할 운명에 처한다. 그 즈음 시설 밖에서 자의식을 가진 기계종 하나가 발견되고, 자신을 '이브'라고 밝힌 기계종은 생존자들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오는데, 인류와 기계문명에 대한 저자의 깊이있는 통찰과 신화적 상상력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SF 서사극
파라미터 가 무슨 뜻일까? 국어사전을 검색해보면,
1. 두 개 이상의 변수 사이의 함수 관계를 간접적으로 표시할 때 사용하는 변수.
2. 사용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자료가 처리되도록 하기 위하여 명령어를 입력할 때 추가하거나 변경하는 수치 정보.
라고 나온다. 간단히 매개변수 라고 생각하면 된다. O 는 무엇일까 했는데, 읽고나니 공란 이라는 것을 알았다. 파라미터 라는 함수 뒤에 00 이라는 어떤 매개 지시어가 들어갈 자리라는 의미다.
이 공란이 이 O 가 이 책을 관통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당신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소녀의 출생은 소녀의 책임이 아니다. 그녀는 그냥 '태어남을 당했다' 태어나 보니 그 시기가 하필 종족의 마지막이었고, 그 장소가 하필 종족의 무덤이었을 뿐이다. 소녀는 인류의 마지막 세대였다. 선조들의 원죄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으로 태어난 저주받은 세대. 매정한 어른들은 소녀를 비롯한 어린아이들을 작은 방에 가축처럼 몰아넣고, 기계 시종들에게 목동 역할을 맡겼다. (p. 9~10)
소설의 시대와 장소를 안내하려는 듯 '프롤로그'에서는 임의의 한 소녀를 통해 인류의 마지막 시기 마지막 세대 를 묘사한다. 방사능이 강한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최후의 인류 수십명이 지내는 시설에서 벌어지는 일이 이 작품의 주요 줄거리다. 인류가 종족 번식의 기능을 잃은 셈이라 이 시설은 곧 마지막 인류의 무덤이 될 것이다.
"너도 고생 그만하고 쾌감기를 써보지 그러냐"
"전 그렇게 삶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요"
"허비한다는 말은 본래 목적에 맞지 않게 헛되이 쓴다는 뜻이지. 그럼, 삶의 본래 목적이 대체 뭐냐?"
"삶의 본래 목적이요?"
"그래. 어떤 인생을 살아야 삶을 '허비하지' 않는 건데? 헛된 꿈을 좇는 것? 행복을 추구하는 것? 아니면 저기 저 게이브처럼 신의 뜻에 따르는 것?"
" …… "
"우리 삶에 본래 목적이라는 게 정해져 있긴 한 거냐? 조슈. 넌 어떤 삶이 허비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무것도 못 하고 죽은 낸시는 삶을 허비한 거냐?" (p. 29)
미래가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시설의 유일한 엔지니어 조슈는 자신이 맡은 책임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면서도 왜 그렇게 자신이 열심히 하는건지 치열하게 고민한다. 시설을 탈출하여 결국 죽음으로 돌아온 소녀 낸시를 구조하다가 낸시가 들고 있던 전파신호기를 손에 넣게 되면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누군가는 헛된 꿈이라도 꾸고 누군가는 신의 뜻이라며 고집스런 외길을 가고 누군가는 행복을 추구하려 노력한다. 그런 사람들 누구도 자신의 삶을 허비한다는 생각은 안하지 않을까... 하지만 삶의 목적을 고민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슈말고는.
"글쎄, 사람마다 저마다의 목적이 있었겠지. 아주 먼 옛날 동물처럼 살던 조상들에게는 생존 내지는 번식이었을 테고. 문명이 생긴 후에는 누군가는 왕의 명령이나 신의 목소리에 목숨을 걸기도 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순히 밥벌이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걸세. 삶의 의미 같은 것도 물질적 풍요가 뒷받침되어야 고민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럼 풍요로운 시대의 선조들은 어땠을까요?"
"재산을 늘리는 일이나 깨달음을 얻는 것, 개인의 행복이나 정신적인 평온 등 각자 자기가 믿는 대로 살지 않겠는가? 아, 아마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삶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들도 있었을 테지, 나처럼 말이네" (p. 31)
조슈는 살아갈 이유를 찾고 싶었다. 그리고 엄마도 찾고 싶었다. 이 시설 곳곳에 남아있는 엄마의 연구흔적들을 느낄때마다 절실하게.
시설 내 다수의 사람들은 할일도 해야할 일도 없이 무력하게 쾌감기에 머리를 박거나 수면실에 박혀 지내곤 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나마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시설을 관리하는 것이 엔지니어인 조슈가 하는일 해야할 일이었다. 왜그러고들 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여하튼 살아있으니까. 그러다 태풍으로 시설에 위험이 닥친다.
"두 분 모두 진정하세요. 이렇게 의견 충돌이 심하다면, 쾌감기 사용 제한에 대해 합의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쾌감기 말고, 다른 제안을 하실 분은 없습니까?" (p. 68)
"씨앗 탱크에는 선조들의 건강한 유전자가 보관되고 있어요. 그걸 꺼버리면,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멀쩡한 인간 유전자는 이 지구상에 단 하나도 남지 않을 거라고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모릅니까? 멸종입니다. 멸종!" (p. 71)
엔지니어인 내 의견은 참고할 거리도 되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일 죽더라도 오늘은 쾌감기를 쓰고 싶은 하루살이들을 데리고 민주주의를 시도한 자체가 웃기는 일이었다. (p. 75)
씨앗 탱크에 대한 논쟁은 곧 누굴 더 희생해서 입을 줄일지에 대한 미치광이 토론으로 이어졌다. (p. 173)
시설 내 전력위기가 닥치자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익만을 고수하려 하는 민낯을 드러낸다. 그리고 시설내 가장 많은 전력을 소모하는 씨앗탱크에 전력을 끊자고 한다. 하지만 이 시설은 애초에 씨앗탱크를 위해 세워진 것이었다. 그 시설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는 일종의 더부살이였다. 씨앗탱크는 인류가 남긴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런데 단 며칠을 더 살고자 멸종을 언급할만큼 사람들은 후안무치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잠시만 시간을 주시면, 제 친구를 추모하고 뒤따르겠습니다"
"뭐? 기계종이 친구를 추모한다고?"
이브는 이미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자신의 '친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녀석은 시설에 있는 기계종들과는 전혀 달랐다. (p. 91)
"그 말씀조차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왜 저는 창조주님의 논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지요?"
그러게 말이다. 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든 거야. (p. 109)
"이 녀석은 초기 세팅값 같은 건 없어. 일일이 가르쳐 줘야 해. 사람처럼" (p. 111)
어찌어찌 전력난을 해소하고 엄마의 흔적을 추적하던 중 조슈는 벌판에서 처음 보는 기계종 '이브'를 만난다. 시설에 인간을 돕는 기계종들이 있었기에 낯설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이브'라고 소개한 이 기계종은 조슈를 창조주님 이라고 부르며 질문들을 퍼부었다. 모든 것에 '의미'를 이해하려 했다. 이브를 시설로 데려와 살펴보던 조슈는 이브를 활동하게 하는 것이 '파라미터O:' 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공란에 조슈가 무엇을 입력해야 할까. 누가 만든 것일까 이 희한한 기계종은. 왜 이렇게 만든 것일까.
"창조는 하나님의, 하나님만의 권능입니다. 그 피조물인 우리가 그 권능에 도전하는 건 신에 대한 모독이에요. 우리를 창조주라고 숭배하는 기계를 만들고, 거기에 이브라는 이름까지 붙이다니, 정말 불순하기 짝이 없군요! 이건 악마의 인형이에여! 당장 폐기해 버리세요!" (p. 121)
시설내 목사인 게이브목사는 이브를 보자마자 불같이 화를 낸다. 마지막 남은 인류에게 맹목적인 광신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확인하게 해주는 존재인 게이브목사, 그가 하는 일마다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화가날 지경이라 욕이라고 퍼부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잘됐네. 넌, 언젠가 엄마가 되고 싶어 했잖아" (p. 125)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법한 이 한 문장이 왜 그토록 내게는 오래남은 문장이었을까... 아마도 조슈의 파라미터O는 '엄마' 였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자신의 엄마를 찾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이브와 함께 하게 되면서 조슈에게 엄마의 의미는 변화해 간다.
이브의 날카로움은 종종 이런 식으로 허를 찌르곤 했다. (p. 139)
생명체의 출산과 다를 바 없는, 경건하기까지 한 광경에 나는 말을 잃었다. (중략) "주인님, 오셨군요. 생산이 완료되었습니다" (p. 142)
"저희 고유의 언어를 통해서, 제 자손에게 여러 지식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p. 143)
이브는 스스로 생각하는 인공지능 기계종이다. 게다가 자체 생산능력과 자체 고유언어도 갖고 있었다. 이브를 알면 알수록 이브는 놀라운 존재였다. 또다시 닥친 시설의 전력위험에 이브의 도움이 결정적이게 되면서 이브는 종족을 늘리게 된다. 하지만 또 미친 목사의 등장이다.
"이전과 같은 기계종들이었다면 나도 아무 말 안 했을 겁니다. 그 정도의 인공지능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이 녀석들은 우릴 창조주라고 숭배하고, 이제는 한술 더 떠서 번식까지 합니다. 어떤 이유로든, 더 이상 주님의 권능에 도전하는 건 그냥 두지 않겠어요!" (p. 149)
모든 것이 신의 뜻대로. 신의 뜻이 인류멸망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받아들이며 가만히 앉아 천국에 갈 기도나 하며 지내는 것이 유일한 삶의 이유라는 사고방식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언젠가 엄마를 찾아내 시설로 당당히 데려오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그래, 어쩌면 내 머릿속의 파라미터O는 정말로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엄마의 어두운 과거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 이후의 좋았던 기억이, 미움을 희석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용서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엄마를 놓아주기로 마음먹었다. (p. 169)
게이브목사와 지호아저씨의 언쟁을 통해 조슈는 엄마의 죽음(혹은 탈출)에 얽힌 내막을 조금 알게 된다. 지호아저씨는 시설내 유일한 의사이자 엄마와 조슈를 연결해주는 매개자였지만 쾌감기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권하는 조슈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여하튼, 시설의 위기를 이브족들로 넘기게 되면서 이브족들의 활동범위는 점점 더 넓어지게 된다.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지나 싶더니 조슈에게 새로운 국면이 다가온다.
"노예라고?"
노예가 있다는 것은 곧 기계종들이 계급 사회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네, 그렇습니다. 아스족에게 바칠 제물이라 합니다."
"아스족이라고 그건 또 뭐야?" (p. 190)
지상의 모든 것들이 쓸려나간 이 행성 위에서 기계종들이 자연적으로 발생했을 리는 없다. 분명히 그들을 만든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누군가의 정체와 목적이었다. 우리처럼 전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기엔, 이런 식으로 기계종들끼리 전쟁놀이를 시킬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기계종들이 동남쪽으로 가지 못하도록한 걸 보면 우리 시설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호적이라면 다행이지만, 만에 하나 적대적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p. 202)
이브족들이 늘어나고 시설이 안정되면서 그동안은 어려웠던 시설 밖 세계를 탐험하게 된 조슈는 시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브족들과 흡사한 기계종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 기계종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그들 각자가 이루고 있는 사회는 저마다의 특징이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상황인걸까. 새로운 기계종들의 사회를 알면알수록 점점더 점입가경이었다.
"마치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처럼, xxx 설계한 인공지능의 기저에는 스스로 여러 가치를 비교하고 우선권을 정하는 알고리즘이 있었어. 하지만 그 겨로가 녀석들은 마치 짐승처럼 자신의 욕구만을 최우선으로 추구하게 되었지. 보다 인간적이고 통제가 가능한 기계종을 만들기 위해서, xxx 다른 어떤 가치 보다 우선하는 '최종목표'만큼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게 수정했어. 그게 바로 파라미터O야. 그러니까, 네가 고민하는 삶의 목적과는 근본부터 다른 개념이지"
"그게 그거죠"
"내 말을 뭐로 들은 거냐? 그건 그냥 일개 변수일 뿐이야" (p. 278)
파라마티O 와 삶의 목적이 정말 다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브족들에게 입력하는 사명과 인간이 추구하는 사명이 과연 무엇이 다른 것일까? 소설을 읽으면 읽을 수록 질문의 무게감은 더해지는 기분이었다. SF 소설이 보여주는 미래가 반드시 디스토피아일 필요는 없지만 대부분 디스토피아인것은 우리가 만들고 있는 미래에 대한 경고일 것이다. SF가 던지는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혼자서 삶의 의미를 질문하고 찾아다니느라 버거웠따. 내 삶에 목적이 있다는 착각이 낳은 압박감, 최후의 인류로서, 선조들을 대표해 마지막 발자취라고 할 만한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는 근거 없는 망상, 그 족쇄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세대의 절망감과 뒤섞여, 이 외진 곳까지 나를 끌고 왔다. 이제 곧 그 꿈에서 께어날 것이다. 모든 것을 마무리할 시간이 마침내 다가오고 있었다. (p. 356)
뒤로 갈수록 반전을 거듭하는 이 소설은 천천히 진행되오던 전개가 막판에 휙휙 뒤집어지는 느낌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전의 연속이었다. 앞서 진중하게 다가왔던 질문들이 긴박한 속도감에 잠시 멈칫한 사이 인간의 무지가 폭발해버렸다.
"…… 조슈 님은, 삶의 목적을 찾으셨군요" (p. 384)
내가 사람의 몸으로 듣지 못했을 뿐이다. 이브는 울수 있었다. (p. 385)
요즘 SF에서 자주 보이는 뇌스캔과 싱귤래리티 까지 활용되면서 새로운 종족에 대한 미래상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인류에겐 디스토피아일수 있지만 새로운 종족에겐 유토피아일수도 있는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소설이었다. 처음부터 건넨 질문은 마지막장을 덮고나서 더 진하게 되묻고 있다.
당신의 파라미터는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