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읽는 말 - 4가지 상징으로 풀어내는 대화의 심리학
로런스 앨리슨 외 지음, 김두완 옮김 / 흐름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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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네 가지 방식으로 대화한다

대립의 티라노사우루스, 순응의 쥐, 통제의 사자, 협력의 원숭이

당신은 그리고 상대는 어떤 동물처럼 소통하는가

 

 

 

범죄심리학자 부부가 미국 정보기관의 의뢰로 완성한, 상대를 읽어내고 움직이는 심리 대화법이라니 궁금했다. 관계를 잘 맺는 것은 결국 대화를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인데 이런저런 처세술 책들이 많긴 하지만 범죄를 밝혀내는 심리대화법 만큼 믿을만한 기술이 또 있을까 싶었다. 감추고 싶은 자신의 죄를 털어놓게 할만한 대화법이라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갈등정도야 손쉽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갖게 했다.

라포르는 자주 쓰면서도 정의하기 힘든 용어다. (중략) 성공적인 대인관계의 바탕에는 대부분 라포르가 있다. (p. 11) 재차 강조하지만, 고문은 필요악이 아니라 완벽한 무용지물임을 연구를 통해 확인했다. (p. 15)

저자들은 라포르가 타인의 마음을 여는 열쇠라고 말한다.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와 관타나모 수용소 캠프 엑스레이의 고문사건으로 인해 '고강도 신문 기법' 같은 혹독한 기법은 거센 비난에 처했다. 효과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고문은 효과가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게 당연한 수순이고 그렇게 핵심에 자리잡게 된 것이 '라포르' 형성이었다. 미국정보기관 에서는 저자들이 그동안 연구해온 라포르 전략에 관심을 갖게 됐고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분야에 이용되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는 라포르 형성에서 중요한 두 가지 측면을 다룬다. 1부에서는 솔직함, 공감, 자율성, 복기 등 라포르 전략의 네 가지 기본 원칙(HEAR 대화 원칙)을 소개한다. HEAR 대화 원칙은 타인과의 소통 능력을 키우고 자신이 바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늘려준다. 2부에서는 의사소통 유형 네 가지를 다룬다. 우리는 각각의 의사소통 유형을 이를 상징하는 각 동물에 대입해 설명한다. (p. 17)

저자들은 라포르의 다양한 활용 범위를 확인할 수 있었고 이를 범죄에서의 신문기술로서 뿐만 아니라 더 넓혀서 일상에서도 적용할 수 있으리라 여기며 이 책에서 그 활용법을 정리하고 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지고 다양한 사례와 함께 각 장마다 뒷부분에 핵심요약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술술 읽히면서도 깔끔한 책이었다.

라포르 전략이란 당신이 자리를 뜨자마자 사라지는 겉만 멀쩡한 단기성 속임수가 아니다. 상대방과 진정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렇다고 테러리스트와 친구가 되란 뜻은 아니다)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는지와 상관없이 존중, 존엄, 동정을 보일 때 진정한 라포르가 형성된다. (p. 20)

라포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종종 있었지만 자주 만나고 마음을 터놓고 그렇게 쌓인 친분 관계를 통해 범죄자의 신뢰를 얻은 후 자백을 받아내는 기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라포르가 형성된다고 해서 그것이 친해졌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진정한 관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친밀한 사이인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일상에서 적용하려면 범죄자와의 사이에서 형성되는 라포르 보다는 친밀한 라포르가 형성되는 경우가 대다수 이긴 하지만 여하튼 좀 달랐다.

누군가와 라포르를 형성하는 것은 속임수가 아니다. 라포르는 정직과 공감에 기반한 의미 있는 관계를 뜻한다. 제대로 라포르를 형성한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했는지 사실 그대로 솔직하게 말할 것이다. 그게 아무리 끔찍한 일이더라도 말이다. (p. 34)

'당신 말에 집중하고 있어요!' 중요한건 상대방에 대한 존중 이었다. 의외로 사람들은 자신의 말만 하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일이 드물다. 하지만 집중해서 경청하고 있다는 것을 신뢰감 있는 태도로 보여주기만 해도 상대가 범죄자이든 사이나쁜 친구이든 간에 그 태도만으로도 대화의 물꼬가 트인다.

라포르는 다음 네 가지 핵심 기초 위에서 형성된다. 우리는 이를 HEAR 대화 원칙 이라고 부른다.

HEAR 대화 원칙

솔직함 Honesty 의도나 느낌을 객관적이고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공감 Empathy 상대방의 신념과 가치를 이해한다.

자율성 Autonomy 상대방의 자유 의지와 선택을 보장한다.

복기 Reflection 대화가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중요하고 유의미하고 전략적인 요소를 확인하고 되짚는다. (p. 49~50)

사실 나는 이 책의 실전전략인 2부의 4가지 동물로 표현한 대화법보다 기초원리라고 할 수 있는 1부의 4가지 원칙들이 더 유용하게 다가왔다. 저자들은 상황이 얼마나 적대적이건 불편하건 상관없이 이 4가지 원칙을 반드시 지키기만 하면 아무리 어그러지고 부정적인 관계일지라도 강하고 긍정적인 관계처럼 동일하게 이 원칙이 작동하게 될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말 뜻 그대로가 아닌 좀더 융통성 있는 활용법들을 추천한다. 솔직하지만 예의없지 않게 공감하지만 동정하지 않게 자율성을 주면서도 내권리를 인정받고 복기하는 것이 단순동어반복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공감은 다정하고 친근하게 대하는 것과 별개다. 이건 공감이 아니다. 우리가 논의한 것처럼,진심어린 공감을 보이려면 상대방과 그 사람이 신경쓰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상대가 이슬람 국가 테러리스트든, 무장 강도든, 성범죄자든 상관없다. 다만 누군가의 동기, 가치, 행동을 이해한다는 게 꼭 그것들에 동의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의 입장에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판단이나 의견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진심 어린 관심을 보여야 한다. (p. 85)

솔직함, 공감, 자율성, 복기 라는 4가지 원칙은 사실 경청의 기본토대다. 집중해서 듣고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 이 기본적인 태도가 생각보다 잘 이루어지지 않기에 일상에서도 수시로 관계트러블이 생기곤 한다. 무조건 수용도 아니고 무조건 거부도 아닌 그렇다고 완전히 공감하는 것도 완전히 반대하는 것도 아닌 적절함, 이런 태도는 굉장히 오랜 노력이 필요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저자들은 좀더 쉽게 적용할 수 있도록 타인을 4가지 타입으로 분류하여 파악해봄으로써 적절한 응용법을 적용시킬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른바 애니멀 서클이다.

이 도식은 인간의 상호작용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일종의 공식으로 활용하면 특정한 의사소통방식을 빠르게 떠올릴 수 있다. 모든 대인 관계는 대략 수직적 '권력' 과 수평적 '친밀감'에 기반한 규칙을 따른다. 사자의 지배적인 행동은 다른 사람을 순종적인 쥐처럼 행동하도록 부추긴다. (중략) 이와 달리 순종적인 쥐의 행동은 지배적인 사자의 행동을 부추긴다. (p. 149) 수평축에서는 티라노사우루스의 의사소통은 역효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p. 150) 비슷하게,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강력하게, 원숭이 행동을 부른다. 협조적이고 다정하며 친근한 태도는 다른 사람에게서 본능적으로 같은 행동을 끌어낸다. (중략) 인간은 관계를 맺을 때 대부분 이 네 가지 의사소통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한다. 상호작용을 이끌거나(사자) 따른다(쥐). 협조하거나(원숭이) 갈등을 겪는다(티라노사우르스). (중략) 권력의 역학을 파악하고 나면 서클 모델을 활용해서 상대가 원하는 당신의 서클상의 위치를 예측할 수 있다. (p. 151)

어떤 상대냐에 따라서 적절한 나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실전활용서에 가깝다. 148p. 에 있는 '인간의 상호작용에 관한 애니멀 서클 모델' 은 간단하면서도 그럴 법 하다. 수직축 위에는 통제-사자 아래에는 순응-쥐 수평축에는 갈등-티라노사우르스 와 협력-원숭이 이렇게 십자 모양의 위아래 좌우로 간략하게 그려진 이 도표들을 보면서 상대방이 정확하게 이 4가지 타입으로 구분되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4가지 유형의 사이 어딘가 있으면서 변하기도 한다. 따라서 나또한 그때그때 적절하고 융통성있게 대응해줘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모든 타입에 대처 가능한가? 그또한 그렇지 않다. 그러니 일단 나의 상징적 동물을 파악해보는 것이 필요할텐데 171p. 에 '나의 서클'을 해석할 수 있는 설문과 점수에 따른 해석이 있으니 한번 해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아무리 좋은 방법이라도 내가 할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내가 할수있는 '정도'를 파악한다는 건 늘 필요한 법이다.

'이게 내 방식이야. 상대방이 알아서 대처해야 할 거야' 하고 마음먹어 버리면, 인간관계에서 최선의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을 제한하는 셈이 된다. 기술을 더 확장할 수록 이점도 더 많아진다. 대인 유연성은 정서지능과 공감력과도 관련이 있다. (p. 304)

저자들은 4가지 동물타입별 사례들을 풀어놓으면서 이 네가지 동물 유형을 자유자재로 쓰려면 유능성, 민감성, 융통성 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그리고 이런저런 가정을 통해 실전연습을 해볼 것을 제안한다. 나를 알고 상대를 알면 사실 대화가 안될래야 안될수가 없다. 중요한건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으로 우리는 모두에게 뭔가를 주었으면 한다. 당신이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고 하건 기존 관계를 더 깊이 하려고 하건, 이 책이 당신이 라포르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 이 책으로 우리는 대인 기술의 기준을 세우고, 우리 모두가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 혹은 -현실과 가상 모두의 - 공동체 안에서 이 원칙을 지키길 바란다. (p. 332) 애니멀 서클을 이해하면 나쁜 행동을 피하고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쓸 수 있는 긍정적인 기술을 발전시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p. 333) 이 모든 걸 항상, 그리고 상호작용을 하는 모든 경우에 기억할 수 있을까? 절대 아니다. (중략) 그 과정에서 차질이 생길 수도 있고, 예전 버릇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라. 계속 노력하면 거기에 맞는 보상을 얻을 뿐만 아니라 실천도 더 쉬워지고 덜 수고스러울 것이다. 명심하라. 당신이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알고 있는 것과 함께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p. 336)

아는만큼 행동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몰라서 못하는 것보다야 일단 알아놓기라도 하는게 좋다는 건 아니까 이런저런 것들을 알아내며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저자들의 기법은 응용하자고 들면 거의 모든 대화에 응용할 수도 있고, 읽고 넘기자면 그렇고그런 대화법으로 지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의 대화법을 잘 활용하면 '이 세상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든다. 그건 분명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다' 라는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여운을 남긴다. 우리는 누구나 다 더 살기 좋은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을까? 나의 대화법이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다면 한번 시도해볼법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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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심리학으로 말하다 3
게리 W. 우드 지음, 한혜림 옮김 / 돌배나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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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심리학으로 말하다]는 '심리학으로 말하다' 시리즈의 한 편으로, 일상적인 이해, 대중심리학, 학술 저서 사이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 저술된 비판적 입문서이다. (p. 8) 이 책에서 젠더라는 개념에 숨겨진 중요한 가정들을 다루고, 몇 가지 질문에 해답을 제시하며, 독자가 스스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도록 돕고 더 많은 탐구를 할 수 있도록 안내할 것이다. (p. 9)

이 책은 '심리학으로 말하다' 시리즈의 3번째 책이라고 한다. 음모론을 시작으로 신뢰, 젠더, 섹스, 다이어트, 패션, 학교폭력, 일터, 퍼포먼스, 은퇴, 셀러브리티, 음악, 애도, 중독, 운전 이렇게 15가지 주제가 번역 혹은 번역될 예정인 듯 하다. 책 사이즈가 작고 얇은 편인데다 '입문서' 라고 하니 가벼운 마음으로 그리고 심리학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심리학 책인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이 이 세계에서 우리가 하는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성姓과 젠더는 정체성의 근본 구성단위로서 우리의 관점을 형성하고, 이러한 관점을 통해 세상과 교류하는 사이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고 세상의 일부인 우리 자신을 경험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p. 14) '젠더'는 생물학적 성을 사회문화적 그리고 심리학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즉,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생물학적 특징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말한다.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 구별이며, '남성적'과 '여성적'은 젠더에 따른 구별이다. (p. 15)

세상을 살아가며 다양한 상황에서 판단을 내릴 때 각자가 지닌 가치관, 세계관 등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한 개인들의 소신에 가장 큰 영향을 미는 것이 아마도 '심리' 아닐까. 그런데 '심리'는 타고나는 부분과 자라면서 변화및발달 하는 부분이 있을텐데 '젠더' 구분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저자는 성별이 보는 사람의 생각에 달린 것이라고 말한다.

'X정자'는 XX(여자), 'Y정자'는 XY(남자)를 만들어낸다. Y 염색체의 일부 유전자는 X 염색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남자가 더 유전병에 걸리기 쉽다. 여자의 경우에는 비정형 유전자를 양쪽 부모 모두에게서 물려받아야만 X 염색체 두 개가 모두 영향을 받아 질병에 걸리지만, 남자의 경우에는 영향을 받게 되는 X염색체가 한 개밖에 없다. 따라서 염색체 측면에서 본다면 '남자'는 더 취약한 성이며, 이는 전통적인 남성중심적 관점과 상충한다. (P. 29) 배아는 자연스럽게 여성 생식계통으로 발달한다. 생물학적 작용에 의해 남자를 만들라는 지시가 없는한 여자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학자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음경은 음핵이 확대된 것으로 묘사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P. 31) 생물학적 성을 비교해보면, 호르몬은 유형보다는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나며, 남성과 여성이 분비하는 호르몬의 숫자와 범위는 사실상 동일하다. (P. 32)

생물학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뚜렷이 구분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눈에 보이니까. 하지만 그렇지도 않은가보다. 생각보다 높은 비율로 육안으로 구분할 수 없는 생물학적 구분이 되지 않는 성의 탄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전통적 심리학에서 여자는 남자에 비해 결핍과 부족의 존재로 묘사되어 왔다. 하지만 염색체측면에서 남성은 여성보다 취약하고 성기구분에 있어 남성의 성기가 여성에게 없는 것이 아니며 호르몬에 있어서도 구성에는 차이가 없었다. 호르몬에 성적 구성의 차이가 없다는 것은 결국 두 성으로의 구분보다는 개개인별 호르몬의 정도가 다 다르다는 다양성으로 성의 구분을 확장시킬 수밖에 없게 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정치가 가시적인 전문 용어 싸움처럼 되어버렸다. 모든 정체성과 성 소수자 단체를 포함할 수 있는 포괄적인 용어나, 더 중요하게는, 모두가 동의하는 용어는 아직까지 만들어지지 않았다. (P. 50)

이 책도 초반에 '젠더'란 무엇인가로 시작했듯이 어떤 분야이든 가장 기초는 '정의' 내리는 것이다. 따라서 용어 합의 문제는 간단하지가 않다. 트랜스젠더, 입소젠더, 에이젠더, 젠더퀴어, 시스젠더... 그 어떤 용어도 아직 서로가 만족할 만한 합의지점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에 성의 다양성은 더 많은 측면에서 확인되어지고 있는 듯 하다. 아직 용어도 없는데 가짓수는 자꾸 늘어가는 형편이랄까. 나와 다른 성에 대해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불러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고정불변의 구성체가 아닌 '불분명한 근사치'와 모호함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젠더는 명확하지 않은 발판을 토대로 하므로 다양한 변이와 해석이 가능하다. 자기 정체성을 나타내는 명칭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젠더가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개념에서, 사회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정체성에 대한 개념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P. 63)

세상은 이분법으로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객관식이 4지선다에서 5지선다로 그리고 그 이상으로 늘어가다가 모든 문제가 다 주관식으로 풀어야할 상황이 되버린듯 하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어떤 조사를 할때 남성인지 여성인지 의 두가지 선택란에서 골라 체크를 하곤 한다. 심리학 책들도 많은 경우 남성의 뇌와 여성의 뇌가 뚜렷이 다르다는 식으로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대중 심리학 서적들은 젠더 역할 고정관념을 확고하게 고수한다. (P. 78) 우선 지나치게 단순화딘 '두 개의 두뇌'라는 용어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우리의 두뇌는 한 개이고, 일부 특수화딘 두 개의 반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반구와 좌반구는 광범위하게 상호 교류한다. 자기공명영상을 이용한 최근 연구에서는 엄격하게 편향된 두뇌 유형에 대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연구 결과는 머리기사에 실리지 않았다. 젠더에 관한 연구도 마찬가지이다. 대중 미디어에서 최신 이론과 연구는 고정관념에 부합하고 '쉽게 이해될 수 있는'것에 미려 무시된다. (P. 79) 증거를 바탕으로 '성별 전쟁'에 이의를 제기하는 연구는 종종 '정치적 올바름이 도를 지나쳤다'라는 명목으로 조소당하고 일축된다. (P. 80)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성에 대한 고정관념들이다. 남자는 이럴때 이렇고, 여자는 저럴때 저렇고. 이런 식의 분석은 두 성의 차이점을 연구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왔었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할수록 이러한 양분법의 기준이 될만한 근거들은 찾을 수 없었다. 염색체에서도 호르몬에서도 뇌연구에서도 확실하게 존재하리라고 믿었던 차이점 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동안의 고정관념들을 고수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남자 뇌에만 있는 기능이 있고 여자 뇌에만 있는 기능이 있다면 성적 이형화 개념이 성립한다. 연구팀은 남성성-여성성의 스펙트럼에서 양극단에 위치한, 일관되게 나타나는 뇌의 특징은 거의 없다고 밝혔다. 인간의 뇌는 남성 뇌와 여성 뇌의 뚜렷한 두 개의 범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뇌의 대부분은 독자저긴 기능이 '모자이크'를 이루며 구성된다. 거침없는 비평가로 잘 알려진 인지 신경과학자 지나리폰은 남자와 여자가 다른 행성에서 왔다는 접근법을 '신경학계의 쓰레기'라고 표현했다. (P. 102) 연구결과들은 생물학적 본질주의의 관점에 이의를 제기한다. 남자와 여자는 차이점보다 유사성이 더 많다. 게다가 그 차이점은 질적인 것이 아닌 양적인 것에 있는 경우가 더 많다. (P. 111)

생물학적으로 가장 뚜렷하게 남성과 여성이 구분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생물학적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분은 누구에게 왜 필요했던 것일까 라는 점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세계는 남성의 관점에서 이해되며 그런 점에서 힘의 불균형이 존재한다. (중략) 젠더 역할 고정관념과 불평등을 이해하려면 권력 구조 관계의 체계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P. 127) 젠더 고정관념이 세상을 구조화하는 방법일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중략) 모두 아울러 짧게 고찰한 결과들은 우리가 이분법 체계에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생물학적 필연성만으로는 젠더에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들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사회적 역할과 요인을 더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P. 138)

뚜렷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눈 체계는 결국 상하로 나누기 위함이었다. 누군가는 위에 있고 누군가는 아래 있어야 했다. 수직적 관계에서는 뚜렷한 구분이 당연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수직체계에 의문을 제기하자고 이 책은 말한다. 우리 모두는 똑같은 인간이다 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사실 그동안 모두 똑같은 인간은 아니어왔고 지금도 그러하기에 여기저기서 사회적 문제들이 이러한 차별과 불평등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중이다. 수평적 관계는 사실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인류는 다신론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들에는 흥미로운 자취가 남아 있다. 성서의 창조론 이야기에서 하나님God은 '엘로힘Elohim'이라는 단어에서 번역된 것인데 이 단어는 사실 남성 명사의 복수형이다. '엘로힘'은 문자 그대로 '신들gods'을 뜻하며, 신들, 여신들, 그리고 여타 신성시되는 존재를 포함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는 인간 창조에 관해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중략) 이 이야기는 원래 인간이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양성이거나 간성이었다는 점을 내포한다. (p. 149) 첫째, 아담은 인간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로 '붉은 땅'을 뜻한다. 둘째, '쎌라tsela'라는 단어는 이 부분에서만 '갈비뼈'로 번역이 되었다. 성경에서는 '쎌라'라는 동일한 단어가 40번 사용되었는데 모두 '한쪽 면'으로 번역이 되었다. 따라서 갈비뼈가 아니라 '한쪽 면'이라는 뜻으로 번역하면, 신들은 최초의 인간을 절반으로 나누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로써 더 평등주의적인 창조 신화가 만들어진다. (p. 150)

아담의 갈비뼈에서 이브가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오역이라는 것은 수메르신화를 읽을때부터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같은 단어를 딱 한곳에서만 다르게 번역했다는 것을 읽고나니 그 저의가 짐작이 되어 다시금 마음이 어두워진다. 본래의 뜻 그 의미 그대로만 전해졌어도 얼마나 좋았을까... 오역.. 왜곡이란 참...

하지만 '만약 모든 것이 유동적이라면, 우리가 새로운 남자, 새로운 여자, 새로운 관계들로 구성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젠더가 미치는 더 큰 영향들은 무엇일까? (p. 161)

점점 더 기존의 상식들이 흔들리고 점점 더 다양성이 다변화되는 가운데 용어조차 아직 정립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모든 것이 유동적이라면 우리가 무엇을 정리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정리가 필요하긴 한 것일까? 연구가 생각이 가능하긴 한 것일까?

우리는 젠더라는 이야기에 맞춰 태어난다. 젠더는 '그냥 원래 그런 거야' 라는 이야기이다. 젠더는 상향식이면서 하향식이다. 생물학의 사회적 해석이며 가치의 사회적 표현, 즉 '자연계의 질서'이다. 생물학적 본질주의, 남성중심주의, 권력 이 모두가 제한된 자원을 두고 벌어지는 제로섬 게임이라는 이데올로기 안에서 작용한다.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시스템에 대한 도전은 조롱을 당하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불길하게 들리겠지만,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 (p. 171) 새로운 젠더 심리학은 개인적, 사회적, 심리적 편견을 배제한 젠더화되지 않은 용어를 사용해 인간의 특성과 특징을 재평가하고, 계층적이고 남성중심적인 관점을 넘어설 다른 방안을 고찰할 것이다. (p. 183)

기존에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비정상인 것이었다며 원래의 태초의 정상적인 것들로 재정립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일리는 있지만 너무 포괄적이라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과연 가능할것인가...

이분법의 부정적 측면은, 세상을 내집단과 외집단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다르지만 평등한 관점'은 지나친 포부일까? 우리는 현실적으로 낡은 체계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새로운 체계, 새로운 패러다임은 어떨까?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젠더 체계의 변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대중 심리학적 자기 계발서는 젠더 체계가 불가피하다고 선언한다. 그러면 우리는 삶의 부조리를 비웃으며 현 상황을 고수해야 할까?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제로섬 게임에 갇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젠더 역할 고정관념의 포로인가? (p. 187) 젠더는 되는 것이자 속하는 것이다. 젠더는 개인의 정체성이면서 사회와의 관계이다. 따라서 젠더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우리는 사회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재평가하고 재협상하고 재천명해야 하며,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같은 작업을 해야 한다. (p. 188)

'심리학으로 말하다 - 젠더' 라는 책 제목을 봤을땐 그저 여성과 남성의 심리를 각각 이해할 수 있는 팁을 주는 그런 심리학대중서 겠거니 예상했었다. 그러나 오히려 정반대의 책이었다. 이분법적 구분 자체를 문제시삼는 것으로 시작하는 책이었다. 기존 질서에 대한 모든 것에 물음표를 던지게 하는 책이었다. 하지만 그어떤 뚜렷한 지침이나 안내는 없는 책이었다. 유일한 해법 제시격인 결말 역시 호기심과 관심 그리고 결국 질문으로 끝나는 책이었다. 이 책이 과연 그동안 쌓아져 온 남녀구분적 심리학의 토대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인가....

계속해서 질문하고 계속해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계속해서 귀를 기울여라.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 (p. 190)

축하인지 아닐지는 읽는 이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이 마지막 문장이 좀 후덜덜했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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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미드나이트
릴리 브룩스돌턴 지음, 이수영 옮김 / 시공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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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해도

이 먼 길을 돌아와 결국 죽게 된다고 해도"

 

 

 

SF소설도 좋고 우주이야기도 좋다. 표지를 감싸는 띠지에 쓰여진 '조지클루니 영화화 확정'도 눈길을 끈다. 그래도 가장 마음이 끌렸던 것은 '별빛' 이었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이 작품이 품고있는 별빛이 칼 세이건의 '콘택트'를 추억하게 만들었다. 나는 '콘택트'가 전해주는 아름다움이 너무 좋았었다.

장밋빛 광채가 지평선 위로 흘러나오며 푸르스름한 얼음의 동토 지대 속으로 스며들어, 온통 눈뿐인 풍광 위롤 쪽빛 그늘을 드리웠다. 새벽은 굶주린 불길처럼 타고 올라와, 섬세한 분홍빛이 주황색으로, 다시 자홍색으로 깊어지며 두꺼운 구름층을 하나씩 삼켜나가다가, 하늘 전체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p. 11)

요즘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고 있는 중이라서 그런지 첫 페이지이 등장하는 이 묘사에서 [일리아스]의 표현이 떠올랐다.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

ㅎㅎ 첫페이지부터 서양작가들은 역시 호메로스의 영향을 여전히 많이 받고 있구나를 느꼈다면 오버이려나...

하지만 이곳은 북극 천문대

하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만족한 적이 없었고 안주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어거스틴이 갈구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었다. 명성도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였다. (p. 13) 시간의 동틀 녘까지 거슬러 올라가 태초의 시작을 잠시라도 엿보고 싶었다. 어거스틴은 길이길이 기억되길 바랐다. 하지만 여기 어거스틴은 일흔 여덟 살에, 북극 제도 어느 산꼭대기, 문명의 바깥 지대에서 전 생애를 바친 과업의 종착역을 앞두고 있으며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무지의 황량한 얼굴을 빤히 응시하는 것뿐이었다. (p. 14)

노천문학자이자 현재 북극천문대에 있는 어거스틴과 젊은우주학자이자 현재 목성탐사중인 우주선에 있는 설리가 교차되며 서술되는 이 작품은 별로 시작해서 별로 끝나는 것 같지만 실은 지구에서 시작해서 지구로 끝나는 소설이다. 다만 그 사이에 아득한 별들이 있다고나 할까...

어거스틴이 머물고 있는 천문대에 전원 철수 명령이 떨어진다. 모두들 급하게 떠나지만 그들의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지만 어거스틴은 홀로 천문대에 남기로 결정한다. 그에겐 딱히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앞에 어린 소녀가 갑자기 나타난다.

그를 미치지 않도록 지켜주었던 것은 그일, 쓸모와 중요성이라는 얇은 막뿐이었다. 익숙한 일과에 맞춰 계속 바쁘게 몸을 움직이려 고군분투했다. 문명이 종말을 맞이했다는 막막함이 어거스틴의 마음을 짓눌렀다. 광대함을 받아들이는 훈련이 된 그의 머리로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이전에 고민해본 그 어떤 문제보다도 낯설로 압도적인 사건이었다. 인류의 끝, 전 생애를 바친 작업의 소멸, 자신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재조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대신 어거스틴은 우주에서 계속 밀려들어오는 데이터들에 전념했다. 천문대 밖 세상은 침묵뿐이었지만 우주는 그렇지 않았다. (p. 34~35)

소녀를 보내기 위해서라도 세상에 다시 연락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누구도 연락되는 이가 없었다. 전화도 인터넷도 무선신호조차 아무 반응이 없었다. 세상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어거스틴은 북극천문대에 고립되었다. 이유는 알수 없었다. 다만 어거스틴 혼자 아니 소녀와 단 둘만 남았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등 조절기가 천천히 지구의 동틀 녘을 재현했다. 단계에 따라 완벽하게 구분되는 새벽의 밝기는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제공하는 몇 안 되는 설비였다. 설리는 매일 아침 그 과정을 꼭 지켜보았다. 하지만 빛은 하얀색뿐이었다. 제작 기술자들이 약간의 분홍색이나 주황색을 더해놓지 않은 건 불만이었다. (p. 42)

목성탐사우주선 에테르호의 첫 장면도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 으로 시작한다. ^^ 다만 우주선에서 조명으로 볼 수 있는 색은 그저 환한 빛 일 뿐이었다.

에테르 호의 대원 여섯 명은 지구에서의 삶이라는 사소하고 하찮은 꿈으로부터 깨어난 기분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개인사에, 사적인 추억들에 얽매일 수 없었다. 그들이 목성에 도착했을 때 의식의 낯선 층 하나가 깨어나 넘쳐흘렀다. 어두웠던 방에 불이 켜진 듯, 선회하는 전구 아래 벌거벗고 앉아 있는 무한의 당당한 실체가 드러난 듯했다. (p. 44) 다들 말없이,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들이 해낸 막중한 경험, 그들이 배우고 앞으로도 계속 밝혀낼 진리들에는 더 큰 규모의 청중이 필요했다. 에테르 호의 대원들은 자기들만을 위해 그 여정을 감내한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를 위한 일이었다. 지구에서 그들이 추동했던야망은 이곳 깊은 암흑 속에서는 한갓 허무한 허영에 지나지 않았다. (p. 47)

목성을 우주선안에서 직접 본다는 것은 엄청난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 감격도 잠시.. 지구와 통신이 두절되었다. 급작스러웠고 사전징후도 아무것도 없었다. 우주선은 예정에 따라 지구로 귀환하는 중이었고 내내 지구로부터는 아무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목성에 대한 흥분이 지구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영원의 감격이 찰나의 충격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광활한 우주에서 지구에서 한참 떨어진 그 곳에서 말이다. 설리는 문득 딸의 사진을 한장밖에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지금 상황에서 일을 계속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컴퓨터로 밀려드는 데이터들에 더 이상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 모든 새로운 정보들에서 끌어낼 수 있는 신기원을 이룰 결론들도, 손끝만 까딱하면 되는 세상을 뒤흔들 발견들도 마찬가지였다. 중력 작동 구역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중력의 힘이 그녀를 계속 잡아주었으면 했다. (p. 69)

고립된 북극에서 별을 보며 버티고 고립된 우주에서 중력을 느끼며 버티는 것은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어거스틴과 설리는 우주를 건너 서로에게 연결되기 시작한 셈이었다. 비록 그 연결이 돌고돌아 한참후에 이루어진다해도...

늘 그랬듯이 저 별들이 그의 내부에서 차오르는 막막한 감정들을 하찮게 만들어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되지 않았다. 어거스틴은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었고 별들은 그저 차갑게, 밝게, 멀리서 무정하게 눈짓할 뿐이었다. (p. 80)

설리는 바 스툴에서 미끄러져 내려가 사람들 틈새를 뚫고 지나가며, 노래 <스페이스 오디티>에 맞춰 밀쳐지고 흔들리고 휘말리면서, 잠시, 이것이 그들 둘만을 위한 노래라고 생각했다. 우리 노래, 데이비드 보위의 목소리가 술집을 가득 채우고 하퍼는 설리를 데리고 댄플로어로, 데비에게로 갔다. (p. 99)

고립된 곳에서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 진정한 고립이 아니게 느껴지도록 해주는 존재, 그건 결국 사람이었다. 가족같은. 어거스틴은 아이리스에게 설리는 동료대원들에게 동거인 이상의 의미를 주고 있었음을 고립되고 나서야 절절이 느끼게 된다. 그리고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도 스치듯 울려퍼진다. 그리고 또 빠질 수 없는 것, 책과 CQ!

테베스는 <어둠의 왼손> 의 한 귀퉁이를 접고 책을 덮어 탁자 위에 놓았다. (중략) "어떻게 계속 이러고 있을 수가 있어? 어떻게 조각조각 부서지지 않고 멀쩡한 모습일 수가 있지? (p. 104)

그러고 있자니 지하실에서 보내던 날들이 기억났다. 기계를 켜고 처음 불특정 호출 신호인 'CQ' 를 보내던 날, 송신은 단순하고 직설적인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p. 132)

테베스는 고집을 부려 가지고 탄 또 다른 종이책을 읽고 있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이었다. 테베스가 종이책을 가져가겠다고 하자 처음에는 난리가 났었다. 테베스는 그래 봐야 얼마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렸고, 테베스가 고집을 부리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탐사 감독 위원회에서 개입해 반대론자들을 막아주었다. 위원회에서 '심리학적 필요 장비'로 추가해 화물을 승인해 주었다. (p. 138)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 과 로봇의 창시인 셈인 아이작 아시모프 또한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소품일 것이다. 더구나 '심리학적 필요 장비' 라는 면에서 사람이 무언가 읽는 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곤 한다. 어거스틴도 작은 소녀 아이리스도 무언가 읽고 또 읽었다. 역시 책은 꼭 필요하다! ㅎㅎ

그리고 CQ... <콘텍트> 에서 어린 소녀가 밤마다 신호를 보내며 시작하던 말 CQ... 그렇게 보내던 신호에 대한 응답이 우주에서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상황이 <콘택트> 이야기 였다. 그리고 우주를 건너 만난 외계존재는 뜻밖의 부녀상봉을 선사했더랬다. 읽을 수록 <굿모닝 미드나이트> 라는 이 작품이 <콘택트> 오마주인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신화도 비슷했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은 가족을 돌보는 일보다 크고 중요했다. 설리가 아버지에 대해 물을 때마다 진은 대단한 남자였다고 말해주었다. 너무 똑똑하고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가족을 위해 마음 쓸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진은 설이에게 아버지의 소명의식을 자랑스러워하라고 말했다. 가족보다는 세상이 더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설리에게 아버지가 없는 거라고. (p. 254)

어거스틴이 딱 한번 진짜 사랑에 빠졌을때 만난 여자가 '진' 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어거스틴과 설리와의 관계는 작품 초반에 드러난다. 하지만 둘은 서로를 전혀 모른다. 어쩌면 이 소설이 끝날때까지도. 하지만 둘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아니 너무나 닮아있었다.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아예 아무것도 발견 못 할지 알 수 없었다. 간신히 마련한 새로 찾은 행복을 위협할 수도 있는 일을 서둘러 행동에 옮길 이유가 없었다. 처음으로 어거스틴은 무지에 만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목소리를 찾는 일은 어거스틴을 위한 게 아니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었다. (p. 289)

그가 북극곰 발자국을 발견한 이야기를 할 때, 설리는 그에 대해 뭔가 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완고한 고독이었다. 그는 지금 세상의 끝에 와서조차, 자신이 외롭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듯했다. 어떻게 얻어내야 할지는 모르면서도 관계 맺음에 갈급하며, 발자국 하나를 발견하고, 다른 존쟁 대한 최소한의 증거만 보고도 동반 의식을 느꼈다. 현재의 고립 상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늘 그래왔던 사람이 아닐까, 설리는 짐작했다. 사람으로 가득한 곳에서도, 분주한 도시에서도, 심지어 연인의 품에 안겨서도 혼자였을 사람이었다. 설리도 그랬기에 그의 내면을 알아보았다. 설리가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연결이 끊어졌다. 그 준비가 언제 될지는 늘 알수 없었지만 말이다. (p. 328)

사실 가족을 가진다는 것이 가족을 잃는 것보다 더욱 힘들었다. 정말 그랬다. (p. 343) 늘 뭔가 결핍되어 있었고, 지금에서야, 이 모든 시간이 지나고 이렇게 멀리 떠나와서야, 설리는 그게 무엇이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온기, 그리고 열림. 한 번도 자라날 기회를 얻지 못했던 무언가의 뿌리들이었다. (p. 344)

전 세계적 아니 전 우주적 발견을 하길 희망했으나 아니 어느 정도는 성취했으나 고립된 순간에 그런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마지막 순간에 원하는 건 단 한 사람의 인정이면 충분했다. 결국 돌고돌아 서로에게 와야 했다.

복닥이며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이 지구를 우주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누구나 먼지같은 존재들이다. 먼지같은 존재가 하늘을 바라보면 먼지처럼 흩뿌려져 있는 별들이 찬란하게 빛나보이지만 그 별빛들은 결국 허상이다. 손에 닿을 수 없는 먼 우주보다 손만 내밀면 닿을 수 있는 바로 옆을 바라보게 하는 이 작품은 SF라기 보다는 실존적 소설이었다. 스페이스 오페라의 화려함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삶의 가치를 전달받았다면 만족할 수도 있을 이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 보고싶어졌다. 아니 조만간 꼭 봐야 겠다. 영화는 항상 원작보다 못하기 마련이지만 <콘택트> 영화의 감동을 다시 한번 기대해볼 만한 원작이었기에 오랜만에 영화감상타임을 기대해보련다.

"아이리스, 당신이 와서 기뻐"

"나도 기뻐" (p. 358)

ps. '옮긴이의 말' 에서 이 소설의 제목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이 소설의 원제인 '굿모닝, 미드나이트'는 낮을 떠나보내고 밤을 맞이하는 인간의 절망적인 기쁨을 노래한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20세기 초의 소설가 진 리스가 먼저 자신의 작품 제목으로 차용한 바 있다. 진 리스의 동명 소설은 역사 작가인 헨리 밀러와 이혼한 후 인간관계에 대한 절망과 외로움으로 써내려간 작품인데, 릴리 브룩스돌턴은 그 소설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고 한다. 고립과 관계라는 주제를 묵직하고 솜씨 좋게 파고든 선대의 두 작품을 계승하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 뛰어넘고자 한 의도로 에밀리 디킨슨의 시 제목을 이어받은 다음, 진 리스의 소설에서 이 책의 책머리에 제사를 인용했다고 한다. (p. 371)

나는 무거운 몸을 힘겹게 일으켜

어둠에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빠져나왔다.

그리고 거기에 내가, 그리고 그 남자가 있었다. - 진 리스

 

어느 책에서 '진 리스' 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버지니아 울프 와는 또다른 여성작가로서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는 작가였다. 진 리스 와 에밀리 디킨슨 이라... 그러고 보니 <굿모닝 미드나이트> 의 작가가 여성이었나 보다. 작가 사진이 없어서 이름만 보고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의 시 '굿모닝 미드나이트'(한밤이여 안녕) 를 찾아보았다.

한밤이여, 안녕!

나 이제 집으로 돌아가요.

낮은 내게 싫증이 났다지만,

내가 어찌

낮에게 싫증을 느끼겠어요?

태양빛이 너무나 안온해서

나 거기서 살고 싶었지만,

아침은 나를 원치 않는대요. 지금은.

그러니

낮이여, 잘 자요!

Good morning, Midnight!

I'm coming home,

Day got tired of me –

How could I of him?

Sunshine was a sweet place,

I liked to stay –

But Morn didn't want me – now –

So good night, Day!

그런데... 왜 '한밤이여 안녕' 이라고 했을까... 굿모닝은 아침에 하는 인사 그러니까 시작하는 인사가 아닌가? 그렇다면 헤어질때 하는 인사처럼 '한밤이여 잘가라' 는 듯이 '한밤이여 안녕' 이라가 보다는 '안녕, 한밤!' 이 맞지 않을까? '반가워 한밤' 이라는 듯이...

여하튼 보통 밤에 자고 낮에 활동하기 마련이지만 그런 낮에 잘자라 인사하고 밤에 굿모닝 인사를 하는 이 역설은 우주를 돌고돌아 이어지는 '관계' 에 대해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어거스틴과 설리에게는 잘 맞는 표현이다. 그리고 지구의 멸망을 배경으로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희망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두 주인공 입장에서는 해피엔딩이었던 작품이 아닐까 싶다. 비록 두 사람이 만나지 못했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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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와 소음 - 불확실성 시대, 미래를 포착하는 예측의 비밀, 개정판
네이트 실버 지음, 이경식 옮김 / 더퀘스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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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 시대 넘쳐나는 소음들 속에서 제대로 된 신호를 찾아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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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와 소음 - 불확실성 시대, 미래를 포착하는 예측의 비밀, 개정판
네이트 실버 지음, 이경식 옮김 / 더퀘스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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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시대, 미래를 포착하는 예측의 비밀

 

 

예측이 실패하는 이유는 데이터의 부족이 아니다. 정보가 많다고 해서 예측이 쉬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보가 하나둘 많아지면 오히려 불필요한 소음의 양도 늘어난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신호와 소음]은 넘치는 정보에서 쓸모 있는 정보 가려내기, '신호' 에서 '소음' 을 제거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p. 6) -추천사 中-

빅데이터라고 불리는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신호' 와 '소음' 을 구별해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하고 또 얼마나 필요한 능력인가. 중요성은 이미 충분히 그리고 대부분 체감했으리라 여겼다. 그래서 '신호' 에서 '소음' 을 제거하는 방법을 찾길 기대하며 책장을 펼쳤다.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은 어째서 전문가들의 예측이 그토록 자주 빗나가는지, 아울러 어떻게 하면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예측이 가능할지를 다룬다. 그러나2012년에 이 책의 초판이 출간된 뒤로도 전문가들이 상당히 높은 확률로 세상을 바꾸는 대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측했지만, 이런 예측들이 대체로 무시되거나 잘못 받아들여지는 사례의 수는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p. 13) 이 책 전체의 목적은 사회가 더 나은 예측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확실성 아래에서 해야 하는 더 나은 추정은 단순한 추측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어떤 의사결정권자가 현재 시점에서 동원할 수 있는 정보를 토대로 해서 믿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 이런 접근 방식이 그 사람이 신탁의 사제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보다는 더 나은 패러다임이다. (p. 28) -서문 中-

2012년의 초판을 읽은 것은 아니나 이번 개정판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다루고 있는 예시들에서 년도가 2012을 지난 것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최신 예시는 대부분 '트럼프' 관련 한 것들이었다. 아마도 트럼프 낙선 이후 제대로 트럼프 당선에 대한 비판을 하고자, '예측' 이 가장 크게 빗나갔던 사례를 다루고자 개정판을 낸 듯 싶다.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은 정보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현대 세상에 언제나 멋들어지게 적응하지는 않는다. 여러 편견을 알아차리려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새로 보태지는 정보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편익은 최소한에 머물거나 어쩌면 오히려 줄어들지도 모른다. (p. 62) 신호는 진리다. 소음은 우리가 진리에 다가서지 못하게끔 우리의 정신을 산만하게 한다. 이 책은 이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p. 69) -들어가며 中-

이 책이 신호에서 소음을 걸러내는 방법을 간명하게 알려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어마무지한 두께에서 내내 의미들만 설명되어졌다면 읽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인지 이책은 대부분 신호 보다는 소음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대충 걸러가며 읽게 되는 책이었다. 첫번째 소음은의 주제는 '금융위기'다.

과거의 데이터는 미국의 주택가격이 일제히 하락할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아무것도 얘기해주지 않는다. 주택가격 폭락은 표본 외 사건이었고, 신용평가사들이 운용하던 모델들은 이런 조건 아래에서 지급불능의 위험을 산정하는 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p. 114) 그들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는 당신이 쏜 총알이 과녁 한가운데에 적중하지 않았는데도 언제나 대체로 비슷한 지점을 맞혔다는 사실을 들어, 다시 말해 정확하지는 않지만 정밀하다는 점만 가지고서 자기가 명사수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p. 115)

소수점 둘째자리까지 정밀하게 한 예측지수는 표본 외 사건에 대해 아무런 예측을 해주지 못한 셈이 되었다. 즉 정밀한 수치이긴 했으나 정확하게 표적의 중심을 맞추진 못했다는 말이다. 그동안의 데이터로는 그동안 한번도 발생하지 않은 일에 대해 예측은 커녕 소음만 만들어냈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금융위기'가 터졌다. 금융위기는 정치권자들의 선택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고슴도치와 여우는 이사야 벌린이 러시아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에 대해 쓴 에세이 [고슴도치와 여우]에서 따온 표현이다.(벌린은 이 제목을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가 쓴 '여우는 사소한 것을 많이 알지만 고슴도치는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안다'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톨스토이나 아름다운 문장을 특별하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벌린의 에세이를 읽을 이렇다 할 이유는 없다. 벌린의 에세이가 담고 있는 기본 발상은, 작가와 사상가를 크게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p. 126)

미국에서 있었던 선거 결과를 바탕으로 저자는 '여우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론매체에는 대부분 한가지 주장을 과하게 열심히 하는 고슴도치적 전문가들이 득세하고 이들을 보다보면 여론은 이들이 주는 쓸데없는 소음을 신호처럼 받아들익 되기 쉽다. 그러니 여우처럼 의심하고 여우처럼 사소한 정보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서 여우처럼 자신만의 확률을 계산해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우처럼 저자 본인이 했던 직접적 경험담이 '야구'이야기인 셈이다. 저자는 메이저리그의 야구선수들 성적을 예측하는 프로그램으로 인생역전을 경험했다.

경쟁이 어떤 곳보다 치열한 프로스포츠 세계에서 예측을 가장 잘할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스스로 혁신가가 되어야 한다. (중략)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발상을 하기란 어렵다. 좋은 발상을 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좋은 발상을 했더라도 곧장 다른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걸 베끼기 때문이다. (p. 211) 훌륭한 혁신가는 일반적으로 매우 크게 생각하고 동시에 매우 작게 생각한다. 새로운 발상은 때로 문제의 가장 미세하고 구체적인 데서, 보통 사람들은 귀찮아서 피하려 드는 데서 생겨난다. (p. 212)

일상에서 보통사람들이 좋은 발상에 대해 경험해볼 수 있는 영역은 아마도 '기상예측' 이 아닐까. 폭설, 폭염, 폭우 같은 재난에 가까운 기상을 경험할때마다 우리는 기상청을 마구 힐난한다. 하지만 기상청은 분명 최대한 신호를 잡아내려 하고 있는 중이다.

기상 예측의 과학은 기상이 제기하는 온갖 복잡성이라는 어려움을 헤치고 나아가는 성공 스토리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겠지만, 예측에서 이 같은 경우들은 규칙들보다는 예외에 속한다. 그럼에도 미국 국립기상청은 종종 폄하될뿐더러 민간업체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 경쟁이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문제는 이 경쟁이 불공정하게 전개된다는 데 있다. (p. 245)

일기예보가 틀리고 기상청이 욕먹는 것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매한가지인가보다. 하지만 기상청 예보는 성공스토리라고 저자는 말한다. 기상예보는 점점 잘 맞고 있다.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는 체감할 수 있는 성공스토리이다. 심각한 위험은 기상보다는 오히려 '지진'에 있었다.

통계학에서는 소음을 신호로 잘못 인식하는 행위를 가리켜 '과적합'이라고 부른다. (p. 298) 과적합은 '엎친데 덮치는' 격이다. 과적합 모델은 연구논문에서는 '더 나은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더 나쁜' 성적을 거둔다. 그리고 후자의 특성 때문에 실제 현실에서는 예측하는 데 동원될 경우 호된 대가를 치른다. (p. 304) 지진은 기본적으로 '복잡한' 현상이다. (p. 310) 그 과정은 너무 복잡한 나머지 특정 수준을 넘어서서 예측할 길이 없다. 그런데 복잡한 과정들은 충분히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질서와 아름다움을 낳는다. 나는 이 책에서 신호와 소음이라는 표현을 매우 느슨하게 사용하지만, 사실 두 단어는 전자공학에서 나온 용어다. (p. 311)

지진에서 '과적합' 사례를 찾는 것은 역사속에서 엄청난 대지진을 찾아보면 된다. 지진은 예측불가능한 영역같아 보였고 실수들만 차곡차곡 쌓아오는 분야 같았다. 하지만 저자는 '기술은 퇴보하는 일 없이 언제나 발전'한다며 그러한 실패들 속에서도 분명 '신호'를 지진 신호를 찾아낼 날이 올것이라 희망한다. 과적합 실패담이 어디 지진에서 뿐이겠는가 실생활에서 더 심각하게 체감되는 분야는 '경제 예측' 이다.

경제 예측가들은 하치하우스가 그렇듯 세 가지 근본적 문제에 부닥친다. 첫째, 경제 통계안으로 인과관계를 결정하기란 매우어렵다. 둘째, 경제는 항상 움직이기 때문에 지금의 경제 주기에서 유효한 경제 행위가 미래의 경제 주기에서는 전혀 효과가 없을 수 있다. 셋째, 경제 전문가들의 예측이 형편없었던 것 만큼이나 이들이 다루어야 하는 데이터 역시 썩 훌륭하지 않다. (p. 328) 설령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도 경제 전문가들에게는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고정되지 않고 움직이는 표적을 맞혀야 하는 문제다.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경제는 항상 진화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경제변수 사이의 관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계속해서 바뀔 수 있다. (p. 334)

빅데이터 시대에 소음은 엄청나게 경제분야를 물들인다고 하면서도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계적 추론은 이론으로 뒷받침될 때, 또는 적어도 근본 원인에 대한 좀 더 깊은 생각으로 뒷받침될 때 훨씬 더 강력해진다고 말한다. 다만 지나친 자신감은 금물, 예측가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잠복해 있는 온갖 위험을 온전하게 그리고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못할 정도로 위축감을 느낄 때 위험은 음험한 모습을 드러낼거라고 저자는 당부한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음험한 위험은 바로 '전염병' 아닐까.

예측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예컨대 예측은 모든 과학에서 가설 검증에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통계학자 조지 박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모델은 빗나간다. 그러나 몇몇 모델은 유용하다" 모든 모델은 우주의 미니어처이며, 당연히 그래야 한다. (p. 395) 좋은 모델은 설령 빗나간 예측을 내놓는다 해도 유용할 수 있다. 오조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예측은 빗나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얼마나 빗나갔는지, 빗나갔을 때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이해하고 빗나갔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예측과 관련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p. 396)

빗나간 예측도 사후수습으로 유용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코로나' 사태로 절절이 체감하는 중이다. 비록 빗나갈 지라도 "예측'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예측은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저자는 '베이즈 정리' 를 강조한다.

토머스 베이즈는 1701(또는 1702)년에 태어난 영국의 목사다. 베이즈는 통계학의 전 영역에 이름을 남기고 저 유명한 불멸의 정리에도 이름이 아로새겨져 있지만, 정작 그의 삶은 거의 알려져있지 않다.(중략) 베이즈는 불리한 출신 배경과 부족한 저술 경력에도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아마도 왕립학회의 토론회에서 내부 비평가나 조정자 역할을 한 듯싶다. (중략) 베이즈는 신이 진정으로 자비심이 넘치는 존재라면 어떻게 이 세상에 고통과 사악함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하는 오래된 질문을 탐구했다. 그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신의 불완전성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p. 414) 베이즈는 신의 완벽함과 무결성을 믿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연은 일정하고 예측할 수 있는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말하는 아이작 뉴턴의 저작도 신봉했다. (p. 415) 베이즈주의적 관점은 합리성을 '개연성(확률)'과 관련된 문제로 본다. (중략) 베이즈는 인간이 결점투성이라고 해서 이를 신이 실수한 것이거나 실패한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고 했다.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는 말이다. (p. 416) 확률과 예측, 그리고 과학적 진보의 밀접한 연관성은 이처럼 18세기들어 베이즈와 라플라스 덕분에 온전히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p. 417) 베이즈 정리의 철학적 토대는 놀라우리만큼 풍부한 데 비해 그 수학적 형식은 굉장히 간단하다. (중략) 베이즈 정리는 조건부확률과 관련이 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전제 아래 이론이나 가설이 참이나 거짓일 확률을 따진다는 말이다. (p. 418)

'베이즈 정리'에 대해서는 다른 수학책이나 통계관련 책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하지만 그때도 이해하지 못한 정리였듯이 이번에도 이해하긴 어려웠다. 다만 베이즈 정리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보니 '미국식' 사고방식을 좀더 뚜렷이 느끼게 되었다. 서양의 추론 방식은 대부분 '연역식' 이다. 주제를 먼저 세우고 입증해나가는 방식이다. 따라서 예측 이라는 방식으로 학문이 발전해온 셈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예측엔 '종교적 믿음' 이 깔려 있기 쉬웠다. 그래서 '시크릿' 이라는 자기계발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겠구나 하는 그책을 읽은지 몇년만의 깨달음이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베이즈 정리' 의 주관적 확률에 대해 도무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지 모르겠다.

베이즈 정리는 또한 우리 주변 세상에 대해, 특히 사람들이 확률이나 가능성의 문제로 좀처럼 생각지 않는 문제들까지 확률적으로 생각하라고 요구한다. (중략) 기본적으로 베이즈 정리는 '인식론적' 불확실성, 곧 우리 지식의 한계를 다룬다. (p. 426) 피셔와 그의 동시대 사람들은 '베이즈 정리'자체에 대해서는 별문제를 느끼지 않았다. '베이즈 정리'는 그저 단순한 수학적 실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피셔를 비롯한 그들이 두려워한 건 '베이즈 정리'가 적용되는 방식이었다. 특히 그들은 베이즈주의의 사전확률이라는 발상을 문제 삼았다. 그들이 보기에는 사전확률이 지나치게 주관적이었다. '실험 전에 어떤 것이 발생할 가능성을 미리 정해둬야 한다니, 그것도 주관적으로! 이런 설정이 과학의 객관성을 어떻게 훼손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피셔와 그의 동시대인들이 바라보던 사전확률의 문제였다. (p. 431)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사전확률' 이라고 하지만 사실 확률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예상하는 기대수치인 셈이었다. 그런 주관적 수치를 어떻게 확률 이라고 할 수있는걸까... 그런 주관적 수치로 임의적으로 설정한 사전확률을 바탕으로 계산한 예측이 어떻게 확실하게 맞다고 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베이즈정리는 여전히 내게 이해가 안가는 확률통계처리 방법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피셔의 통계 철학이었다. 그의 통계방식은 실험의 객관적 순수성을 강조한다. 모든 가설은 데이터만 충분하게 주어진다면 완벽한 결론으로 검증될 수 있다는 게 이 방식의 가정이다. 하지만 이런 순수성을 확보하려면 베이즈주의적 사전확률의 발상이나 뒤죽박죽인 실제 세상의 온갖 맥락에 대한 필요성을 부정해야만 한다. 이 방법론은 우리가 설정한 가설의 타당성에 대해 우리에게 생각하도록 권장하지도 않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p. 436)

데이터들만을 바탕으로 한 통계만 신뢰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AI에게 언어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인터넷세상에서 스스로 학습하도록 시켰더니 올바른 언어보다 욕지거리들만 잔뜩 배워서 인공지능의 언어능력은 스스로학습이 아닌 올바른 언어를 입력해주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데이터들이 많다고 해서 그 많은 데이터들이 맞는 것은 아니다. 진짜보다 가짜가 많으면 통계는 가짜를 진리로 계산해낸다. 따라서 단순한 통계는 오히려 신뢰성이 없다. 나는 통계도 베이즈정리도 다 믿을 수가 없게 되버리고 말았다.

사실 베이즈주의의 한 가지 특성은 우리에게 더 많은 증거와 데이터가 주어지면 우리가 가진 믿음들은 저절로 진리를 향해 수렴한다고 보는 데 있다. (p. 442) 내가 피셔의 통계적 접근법의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이 같은 내용은 신기한 게 아니다. (중략) 그런데 최근 들어 존경받는 통계학자들이 빈도주의 통계학을 학부에서 더 이상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중략) 나는 (중략) 결국 베이즈주의자가 승리할 것으로 예측한다. (p. 444)

결국 '믿음' 의 문제였다. 믿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시크릿' 이라는 책의 확률적 정리가 '베이즈정리'인 셈이다. 답이 없어 보이는 한계에 다다른 기분이다. 그 돌파구를 찾기 위해 저자는 최신 기법을 예로 들기 시작한다. 첫번째 예시는 인공지능과 인간과의 '체스'경기다. 그 다음은 포커 였다.

컴퓨터 체스 프로그램들은 이런 방식으로 체스를 둔다. 가능한 거의 모든 수를 최소한의 깊이로 검토하다가 가장 유망한 수에 자원을 집중한다. 이 방식은 매우 베이즈주의적이다. (p. 489) 포커를 할 때 우리는 자신의 의사결정 과정을 제어하지만 어떤 카드가 내 손에 들어오게 하거나 바닥에 깔리게 제어하지는 못한다. (p. 547) 결과에 초점을 덜 맞출수록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p. 548) 해결책에 가장 가까운 것은 신호와 소음 모두 이 우주에서 뺄 수 없는 요소임을 깨닫고서 이들에 대해 전혀 흔들림 없는 마음의 평정 상태를 유지하며, 각각의 실체를 파악하고 평가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이다. (p. 548)

예측을 하는 구체적 방법에 있어서 통계를 지나 믿음의 문제로 가버렸다. 구체적 예시들은 또다시 베이즈정리의 주관적 확률을 지지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저자는 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좀더 큰 예시들을 제시한다. 바로 '보이지 않는 손' 이다.

사실 자본주의와 베이즈 정리는 같은 지적 전통 속에서 나타났다. 애덤 스미스와 토머스 베이즈는 같은 시대를 살았으며, 두 사람 다 스코틀랜드에서 교육을 받았고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영향을 받았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도 베이즈주의적 과정이라 생각할 수 있다.(중략) 우리 믿음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면서 점검 개선하고, 사람들 사이에 그 믿음에 이견이 있을 때는 내기를 한다는 점에서 서로 같기 때문이다. 이 둘은 기본적으로 '대중의 지혜'의 강점을 취하는 합의 추구 과정이다. 따라서 시장은 이런저런 예측을 하는 데 특히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주식시장이 그렇다. (p. 554) '거품이 왜 생기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시장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걸 모든 사람이 바라기 때문입니다' (p. 591) 그런데 분명한 것은 만약 우리가 '시장은 오류 없이 무결점으로 돌아가며 시장의 가격은 언제나 옳다'는 가정을 갖고 있다면 결코 거품을 탐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p. 611)

'보이지 않는 손' 이라는 시장경제의 기본 원리를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의 믿음이 바탕이 된 '베이즈주의' 를 보여줄 수 있는 예시로 '주식시장'은 적절하다. 코로나 사태로 경제가 침체될때 개미들이 주식시장에서 어떤 움직임을 보여주었는지 생각해보면 정말로 아주 적절한 사례다. 그리고 또한번 절감할 수 있다. 시장의 가격은 항상 옳지는 않았다. '보이즈 않는 손' 이 시장에서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다음 예시는 '지구 온난화' 문제다.

인과관계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있다면 지구온난화를 둘러싼 여러 주장을 의심할 근거는 충분하다. (중략) 그러나 예측은 현상 뒤에 숨은 원인을 온전하게 이해할 때 훨씬 더 강력해진다. 우리는 지구온난화의 원인을 상당한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원인은 바로 온실효과다. (p. 616) 불확실실은 예측의 본질적 요소로, 타협이 불가능하다. (p. 662) 그러나 불확실성을 조심스럽고도 명시적으로 계량화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과학적 진보에는 특히 베이즈 정리를 전제한다면이것이 필수다. (p. 663) 고장난 정치제도는 미국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p. 670) 내가 아이디어들의 건강한 토너먼트와 철창 속에서 치러지는 정치라는 격투기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는 빤하다. 특히 내가 올바른 예측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더더욱 그렇다. (p. 671)

지구온난화 문제는 비교적 정확한 과학적 토대들로 확실한 지향점을 보여주지만 정치적 합의는 불확실성에 미래를 걸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 불확실성에 건 정치적 합의는 때론 '테러'로 돌아오기도 했다.

진주만 공습과 9.11테러 - 신호는 있었지만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p. 675) 테러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먼저 테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테러를 정의하기란 매우 까다롭다. 블라드미르 레닌은 '테러의 목적은 공포를 조장하는 데 있다' 라고 말했다. 이 발언에는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테러리스트들은 최대한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다. 이들은 공포를 극대화해서 대중을 조종하려 한다. 파괴와 살인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p. 694) 테러리스트와 사회 사이에는 일종의 균형이 있을 수 있다. 자유와 보안 사이의 어느 지점에 놓여 있는 균형이며, 균형의 무게중심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달라질 수 있다. (p. 712) 테러를 사전에 포착하지 못한 실패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상상력의 부족이다. 예측을 할 때는 호기심과 회의론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취할 필요가 있다. (p. 718)

결국 '예측' 은 상상력이 필요한 영역이었다. 따라서 주관적 가설확률을 토대로 한 베이즈정리는 또다시 실용성을 획득한다. 저자는 '완벽한 예측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 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앎으로써 좀 더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다' 고 책을 마무리 한다. 700페이지가 넘는 이 두껍고 거대한 책을 통해 얻은 결론은 결국 '신호와 소음'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아냈다기 보다는, '신호와 소음'을 구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는 것이다. 이 결론을 설마 이 두꺼운 책을 읽기 전에 몰랐을까?;;;

정보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유용한 정보는 상대적으로 적다. 다시 말해 소음에 대한 신호의 비율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는 것' 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것과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의 차이' 다. 이 책은 지금까지 이 둘 사이의 간극을 좁힐 수 있는 방법을 제안했다. 처음에는 도약을 크게 하고 그다음부터는 작은 발걸음을 부지런히 놀려라. '큰 도약' 이란 바로 예측과 확률에 대해 베이즈주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p. 721) 베이즈주의 원칙을 가장 쉽게 적용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은 예측을 하는 것이다. (p. 727) 베이즈정리 아래서는 누구든 자기 견해나 믿음을 더 많이 검증하려들 것이고,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위에 열거한 문제점들을 더빠르게 극복하고 실수를 통해 배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p. 729) -나가며 中-

정말이지 두꺼워도 너무 두꺼웠던 이 양장본의 커다랗고 두꺼운 책의 결론은 어쩌면 서문에 이미 다 나와 있는 셈이었다.

나는 [신호와 소음]이라는 이 책의 내용을 자동차에 붙이는 스티커에 들어갈 정도로 압축한다면 무엇이 될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그리고 '확률적으로 생각하라' 가 가장 적절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거기에다 스티커 하나를 더 추가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스티커의 내용은 이렇다. "속도를 늦추고 의심하라" (p. 38) -서문 中-

결국 '신호' 와 '소음' 을 구별해내는 특별한 비법 같은 건 없었다. 각자가 꾸준히 생각하고 의심하고 예측해보는 실수와 실패를 통해 경험치가 상승한다는 것뿐.

- 리뷰어스클럽에서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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