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미드나이트
릴리 브룩스돌턴 지음, 이수영 옮김 / 시공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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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해도

이 먼 길을 돌아와 결국 죽게 된다고 해도"

 

 

 

SF소설도 좋고 우주이야기도 좋다. 표지를 감싸는 띠지에 쓰여진 '조지클루니 영화화 확정'도 눈길을 끈다. 그래도 가장 마음이 끌렸던 것은 '별빛' 이었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이 작품이 품고있는 별빛이 칼 세이건의 '콘택트'를 추억하게 만들었다. 나는 '콘택트'가 전해주는 아름다움이 너무 좋았었다.

장밋빛 광채가 지평선 위로 흘러나오며 푸르스름한 얼음의 동토 지대 속으로 스며들어, 온통 눈뿐인 풍광 위롤 쪽빛 그늘을 드리웠다. 새벽은 굶주린 불길처럼 타고 올라와, 섬세한 분홍빛이 주황색으로, 다시 자홍색으로 깊어지며 두꺼운 구름층을 하나씩 삼켜나가다가, 하늘 전체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p. 11)

요즘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고 있는 중이라서 그런지 첫 페이지이 등장하는 이 묘사에서 [일리아스]의 표현이 떠올랐다.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

ㅎㅎ 첫페이지부터 서양작가들은 역시 호메로스의 영향을 여전히 많이 받고 있구나를 느꼈다면 오버이려나...

하지만 이곳은 북극 천문대

하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만족한 적이 없었고 안주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어거스틴이 갈구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었다. 명성도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였다. (p. 13) 시간의 동틀 녘까지 거슬러 올라가 태초의 시작을 잠시라도 엿보고 싶었다. 어거스틴은 길이길이 기억되길 바랐다. 하지만 여기 어거스틴은 일흔 여덟 살에, 북극 제도 어느 산꼭대기, 문명의 바깥 지대에서 전 생애를 바친 과업의 종착역을 앞두고 있으며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무지의 황량한 얼굴을 빤히 응시하는 것뿐이었다. (p. 14)

노천문학자이자 현재 북극천문대에 있는 어거스틴과 젊은우주학자이자 현재 목성탐사중인 우주선에 있는 설리가 교차되며 서술되는 이 작품은 별로 시작해서 별로 끝나는 것 같지만 실은 지구에서 시작해서 지구로 끝나는 소설이다. 다만 그 사이에 아득한 별들이 있다고나 할까...

어거스틴이 머물고 있는 천문대에 전원 철수 명령이 떨어진다. 모두들 급하게 떠나지만 그들의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지만 어거스틴은 홀로 천문대에 남기로 결정한다. 그에겐 딱히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앞에 어린 소녀가 갑자기 나타난다.

그를 미치지 않도록 지켜주었던 것은 그일, 쓸모와 중요성이라는 얇은 막뿐이었다. 익숙한 일과에 맞춰 계속 바쁘게 몸을 움직이려 고군분투했다. 문명이 종말을 맞이했다는 막막함이 어거스틴의 마음을 짓눌렀다. 광대함을 받아들이는 훈련이 된 그의 머리로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이전에 고민해본 그 어떤 문제보다도 낯설로 압도적인 사건이었다. 인류의 끝, 전 생애를 바친 작업의 소멸, 자신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재조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대신 어거스틴은 우주에서 계속 밀려들어오는 데이터들에 전념했다. 천문대 밖 세상은 침묵뿐이었지만 우주는 그렇지 않았다. (p. 34~35)

소녀를 보내기 위해서라도 세상에 다시 연락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누구도 연락되는 이가 없었다. 전화도 인터넷도 무선신호조차 아무 반응이 없었다. 세상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어거스틴은 북극천문대에 고립되었다. 이유는 알수 없었다. 다만 어거스틴 혼자 아니 소녀와 단 둘만 남았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등 조절기가 천천히 지구의 동틀 녘을 재현했다. 단계에 따라 완벽하게 구분되는 새벽의 밝기는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제공하는 몇 안 되는 설비였다. 설리는 매일 아침 그 과정을 꼭 지켜보았다. 하지만 빛은 하얀색뿐이었다. 제작 기술자들이 약간의 분홍색이나 주황색을 더해놓지 않은 건 불만이었다. (p. 42)

목성탐사우주선 에테르호의 첫 장면도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 으로 시작한다. ^^ 다만 우주선에서 조명으로 볼 수 있는 색은 그저 환한 빛 일 뿐이었다.

에테르 호의 대원 여섯 명은 지구에서의 삶이라는 사소하고 하찮은 꿈으로부터 깨어난 기분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개인사에, 사적인 추억들에 얽매일 수 없었다. 그들이 목성에 도착했을 때 의식의 낯선 층 하나가 깨어나 넘쳐흘렀다. 어두웠던 방에 불이 켜진 듯, 선회하는 전구 아래 벌거벗고 앉아 있는 무한의 당당한 실체가 드러난 듯했다. (p. 44) 다들 말없이,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들이 해낸 막중한 경험, 그들이 배우고 앞으로도 계속 밝혀낼 진리들에는 더 큰 규모의 청중이 필요했다. 에테르 호의 대원들은 자기들만을 위해 그 여정을 감내한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를 위한 일이었다. 지구에서 그들이 추동했던야망은 이곳 깊은 암흑 속에서는 한갓 허무한 허영에 지나지 않았다. (p. 47)

목성을 우주선안에서 직접 본다는 것은 엄청난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 감격도 잠시.. 지구와 통신이 두절되었다. 급작스러웠고 사전징후도 아무것도 없었다. 우주선은 예정에 따라 지구로 귀환하는 중이었고 내내 지구로부터는 아무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목성에 대한 흥분이 지구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영원의 감격이 찰나의 충격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광활한 우주에서 지구에서 한참 떨어진 그 곳에서 말이다. 설리는 문득 딸의 사진을 한장밖에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지금 상황에서 일을 계속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컴퓨터로 밀려드는 데이터들에 더 이상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 모든 새로운 정보들에서 끌어낼 수 있는 신기원을 이룰 결론들도, 손끝만 까딱하면 되는 세상을 뒤흔들 발견들도 마찬가지였다. 중력 작동 구역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중력의 힘이 그녀를 계속 잡아주었으면 했다. (p. 69)

고립된 북극에서 별을 보며 버티고 고립된 우주에서 중력을 느끼며 버티는 것은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어거스틴과 설리는 우주를 건너 서로에게 연결되기 시작한 셈이었다. 비록 그 연결이 돌고돌아 한참후에 이루어진다해도...

늘 그랬듯이 저 별들이 그의 내부에서 차오르는 막막한 감정들을 하찮게 만들어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되지 않았다. 어거스틴은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었고 별들은 그저 차갑게, 밝게, 멀리서 무정하게 눈짓할 뿐이었다. (p. 80)

설리는 바 스툴에서 미끄러져 내려가 사람들 틈새를 뚫고 지나가며, 노래 <스페이스 오디티>에 맞춰 밀쳐지고 흔들리고 휘말리면서, 잠시, 이것이 그들 둘만을 위한 노래라고 생각했다. 우리 노래, 데이비드 보위의 목소리가 술집을 가득 채우고 하퍼는 설리를 데리고 댄플로어로, 데비에게로 갔다. (p. 99)

고립된 곳에서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 진정한 고립이 아니게 느껴지도록 해주는 존재, 그건 결국 사람이었다. 가족같은. 어거스틴은 아이리스에게 설리는 동료대원들에게 동거인 이상의 의미를 주고 있었음을 고립되고 나서야 절절이 느끼게 된다. 그리고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도 스치듯 울려퍼진다. 그리고 또 빠질 수 없는 것, 책과 CQ!

테베스는 <어둠의 왼손> 의 한 귀퉁이를 접고 책을 덮어 탁자 위에 놓았다. (중략) "어떻게 계속 이러고 있을 수가 있어? 어떻게 조각조각 부서지지 않고 멀쩡한 모습일 수가 있지? (p. 104)

그러고 있자니 지하실에서 보내던 날들이 기억났다. 기계를 켜고 처음 불특정 호출 신호인 'CQ' 를 보내던 날, 송신은 단순하고 직설적인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p. 132)

테베스는 고집을 부려 가지고 탄 또 다른 종이책을 읽고 있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이었다. 테베스가 종이책을 가져가겠다고 하자 처음에는 난리가 났었다. 테베스는 그래 봐야 얼마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렸고, 테베스가 고집을 부리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탐사 감독 위원회에서 개입해 반대론자들을 막아주었다. 위원회에서 '심리학적 필요 장비'로 추가해 화물을 승인해 주었다. (p. 138)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 과 로봇의 창시인 셈인 아이작 아시모프 또한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소품일 것이다. 더구나 '심리학적 필요 장비' 라는 면에서 사람이 무언가 읽는 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곤 한다. 어거스틴도 작은 소녀 아이리스도 무언가 읽고 또 읽었다. 역시 책은 꼭 필요하다! ㅎㅎ

그리고 CQ... <콘텍트> 에서 어린 소녀가 밤마다 신호를 보내며 시작하던 말 CQ... 그렇게 보내던 신호에 대한 응답이 우주에서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상황이 <콘택트> 이야기 였다. 그리고 우주를 건너 만난 외계존재는 뜻밖의 부녀상봉을 선사했더랬다. 읽을 수록 <굿모닝 미드나이트> 라는 이 작품이 <콘택트> 오마주인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신화도 비슷했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은 가족을 돌보는 일보다 크고 중요했다. 설리가 아버지에 대해 물을 때마다 진은 대단한 남자였다고 말해주었다. 너무 똑똑하고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가족을 위해 마음 쓸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진은 설이에게 아버지의 소명의식을 자랑스러워하라고 말했다. 가족보다는 세상이 더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설리에게 아버지가 없는 거라고. (p. 254)

어거스틴이 딱 한번 진짜 사랑에 빠졌을때 만난 여자가 '진' 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어거스틴과 설리와의 관계는 작품 초반에 드러난다. 하지만 둘은 서로를 전혀 모른다. 어쩌면 이 소설이 끝날때까지도. 하지만 둘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아니 너무나 닮아있었다.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아예 아무것도 발견 못 할지 알 수 없었다. 간신히 마련한 새로 찾은 행복을 위협할 수도 있는 일을 서둘러 행동에 옮길 이유가 없었다. 처음으로 어거스틴은 무지에 만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목소리를 찾는 일은 어거스틴을 위한 게 아니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었다. (p. 289)

그가 북극곰 발자국을 발견한 이야기를 할 때, 설리는 그에 대해 뭔가 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완고한 고독이었다. 그는 지금 세상의 끝에 와서조차, 자신이 외롭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듯했다. 어떻게 얻어내야 할지는 모르면서도 관계 맺음에 갈급하며, 발자국 하나를 발견하고, 다른 존쟁 대한 최소한의 증거만 보고도 동반 의식을 느꼈다. 현재의 고립 상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늘 그래왔던 사람이 아닐까, 설리는 짐작했다. 사람으로 가득한 곳에서도, 분주한 도시에서도, 심지어 연인의 품에 안겨서도 혼자였을 사람이었다. 설리도 그랬기에 그의 내면을 알아보았다. 설리가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연결이 끊어졌다. 그 준비가 언제 될지는 늘 알수 없었지만 말이다. (p. 328)

사실 가족을 가진다는 것이 가족을 잃는 것보다 더욱 힘들었다. 정말 그랬다. (p. 343) 늘 뭔가 결핍되어 있었고, 지금에서야, 이 모든 시간이 지나고 이렇게 멀리 떠나와서야, 설리는 그게 무엇이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온기, 그리고 열림. 한 번도 자라날 기회를 얻지 못했던 무언가의 뿌리들이었다. (p. 344)

전 세계적 아니 전 우주적 발견을 하길 희망했으나 아니 어느 정도는 성취했으나 고립된 순간에 그런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마지막 순간에 원하는 건 단 한 사람의 인정이면 충분했다. 결국 돌고돌아 서로에게 와야 했다.

복닥이며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이 지구를 우주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누구나 먼지같은 존재들이다. 먼지같은 존재가 하늘을 바라보면 먼지처럼 흩뿌려져 있는 별들이 찬란하게 빛나보이지만 그 별빛들은 결국 허상이다. 손에 닿을 수 없는 먼 우주보다 손만 내밀면 닿을 수 있는 바로 옆을 바라보게 하는 이 작품은 SF라기 보다는 실존적 소설이었다. 스페이스 오페라의 화려함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삶의 가치를 전달받았다면 만족할 수도 있을 이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 보고싶어졌다. 아니 조만간 꼭 봐야 겠다. 영화는 항상 원작보다 못하기 마련이지만 <콘택트> 영화의 감동을 다시 한번 기대해볼 만한 원작이었기에 오랜만에 영화감상타임을 기대해보련다.

"아이리스, 당신이 와서 기뻐"

"나도 기뻐" (p. 358)

ps. '옮긴이의 말' 에서 이 소설의 제목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이 소설의 원제인 '굿모닝, 미드나이트'는 낮을 떠나보내고 밤을 맞이하는 인간의 절망적인 기쁨을 노래한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20세기 초의 소설가 진 리스가 먼저 자신의 작품 제목으로 차용한 바 있다. 진 리스의 동명 소설은 역사 작가인 헨리 밀러와 이혼한 후 인간관계에 대한 절망과 외로움으로 써내려간 작품인데, 릴리 브룩스돌턴은 그 소설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고 한다. 고립과 관계라는 주제를 묵직하고 솜씨 좋게 파고든 선대의 두 작품을 계승하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 뛰어넘고자 한 의도로 에밀리 디킨슨의 시 제목을 이어받은 다음, 진 리스의 소설에서 이 책의 책머리에 제사를 인용했다고 한다. (p. 371)

나는 무거운 몸을 힘겹게 일으켜

어둠에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빠져나왔다.

그리고 거기에 내가, 그리고 그 남자가 있었다. - 진 리스

 

어느 책에서 '진 리스' 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버지니아 울프 와는 또다른 여성작가로서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는 작가였다. 진 리스 와 에밀리 디킨슨 이라... 그러고 보니 <굿모닝 미드나이트> 의 작가가 여성이었나 보다. 작가 사진이 없어서 이름만 보고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의 시 '굿모닝 미드나이트'(한밤이여 안녕) 를 찾아보았다.

한밤이여, 안녕!

나 이제 집으로 돌아가요.

낮은 내게 싫증이 났다지만,

내가 어찌

낮에게 싫증을 느끼겠어요?

태양빛이 너무나 안온해서

나 거기서 살고 싶었지만,

아침은 나를 원치 않는대요. 지금은.

그러니

낮이여, 잘 자요!

Good morning, Midnight!

I'm coming home,

Day got tired of me –

How could I of him?

Sunshine was a sweet place,

I liked to stay –

But Morn didn't want me – now –

So good night, Day!

그런데... 왜 '한밤이여 안녕' 이라고 했을까... 굿모닝은 아침에 하는 인사 그러니까 시작하는 인사가 아닌가? 그렇다면 헤어질때 하는 인사처럼 '한밤이여 잘가라' 는 듯이 '한밤이여 안녕' 이라가 보다는 '안녕, 한밤!' 이 맞지 않을까? '반가워 한밤' 이라는 듯이...

여하튼 보통 밤에 자고 낮에 활동하기 마련이지만 그런 낮에 잘자라 인사하고 밤에 굿모닝 인사를 하는 이 역설은 우주를 돌고돌아 이어지는 '관계' 에 대해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어거스틴과 설리에게는 잘 맞는 표현이다. 그리고 지구의 멸망을 배경으로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희망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두 주인공 입장에서는 해피엔딩이었던 작품이 아닐까 싶다. 비록 두 사람이 만나지 못했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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