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 The Old Man and the Sea 원서 전문 수록 한정판 새움 세계문학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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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쓴 서술 구조 그대로의 직역으로 다시 태어났다.

바른 번역으로 끌어올린 [노인과 바다]의 진정한 감동

나의 사춘기 시절은 헤세와 헤밍웨이의 작품과 함께였다. 그래서인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았어도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와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는 늘 내게 추억어린 정감이 함께하는 소설들이었다. 그 작품들이 생각날때마다 동시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그때 만약 [위대한 개츠비] 와 [호밀밭의 파수꾼] 을 읽었었다면 피츠제럴드와 셀린느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해할수 없더라도 어른이 되어 추억어린 좋은 이미지로 다시 읽어볼 수 있었을까... 하는...

여하튼, 헤밍웨이의 작품 중 좋아하던 작품이 [노인과 바다]는 아니었다. 읽었었는데 이미지조차 흐릿한 걸 보니 헤밍웨이 최고의 작품이라는 찬사가 나의 개인적 호감도와는 상관이 없었던 듯 하다. 게다가 왠지 [모비딕]과 늘 헤깔리곤 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읽었으니 안 헤깔릴 것이다. ㅎ

'이정서 번역' 에 대한 기사였나 소개였나 여하튼 '번역'에 대한 역자의 의견을 담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유명한 작품이고 고전에 속하는 작품들임에도 의외로 오역과 왜곡된 번역이 많다며 자신이 원문 그대로의 직역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던 글이었다. 그렇게 몇 작품을 다시 번역한 것을 알고 있었던지라 궁금하던 차에 이정서 작가의 새번역으로 나온 [노인과 바다]를 읽게 됐다.

눈 말고는 모든 것이 노쇠했는데, 그것들은 바다 같은 색깔에 불패의 생기를 띠고 있었다.

"산티아고 할아버지" 그들이 돛단배를 정박하고 기숡을 오르고 있을 때 소년이 그에게 말했다. "나 할아버지와 함께 다시 갈 수 있어요. 얼마간 논을 벌었거든요" (p. 12)

새번역에서 역자가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소년'의 나이였다. 기존의 번역본에서는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 소년으로 번역했으나 헤밍웨이의 원문은 그렇지 않다며 소년의 나이를 유추할 수 있는 구절들을 골라 뽑아 증거로 들며 결과적으로 고등학생 정도의 소년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소년은 5살때부터 산티아고의 배를 타며 고기잡이를 배웠으나 지금은 다른 배롤 타고 있는 중이다.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84일간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정밀하게 지킬 테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단지 나는 최근에 운이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누가 알겠나? 어쩌면 오늘은 다를지. 매일매일은 새로운 날이지. 운이 따른다면 더 좋을 테지만 나는 차라리 정확히 할 테다. 그러면 운이 찾아왔을 때 준비가 되어 있을 테니. (p. 35)

고기를 못 잡은지 85일째 되던날도 노인은 늘 하던 대로 바다에 나갔다. 지금까지는 운이 없었지만 언제 그 운이 오더라도 잡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며.

바다에서는 불필요하게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고, 노인은 항상 그렇게 여겼으므로 그것을 존중했다. 그러나 이제 화를 낼 사람이 아무도 없어진 이후, 그는 자신의 생각을 소리 내어 몇 번이고 말했다. (p. 42)

노인은 혼자이지만 소리내여 자기자신과 대화를 나눈다. 혼자 노를 젓고 혼자 낚시줄을 드리우고 혼자 키를 잡고 있지만 끊임없이 이야기를 한다. 이 작품은 노인의 독백인 셈이다. 그러다 고기가 걸렸다. 그것도 아주 큰 놈같다.

이것이 녀석을 죽일 거야. 노인은 생각했다. 녀석은 영원히 이러고 있을 수는 없을 테니. 그러나 네 시간 후에도 물고기는 여전히 바다 멀리로 계속해서 헤엄치고 있었고, 돛단배는 끌려가고 있었으며, 노인은 낚싯줄을 등에 가로지른 상태로 단단히 버티고 있었다. (p. 48)

노인은 굉장한 물고기를 많이 보아 왔다. 천 파운드가 더 나가는 것들도 많이 봐 왔고 살면서 그 크기의 고기를 두 마리 잡아 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혼자 한 건 아니었다. 지금은 혼자로, 육지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지금껏 봐 오고, 지금껏 들어본 중에 가장 큰 물고기에 단단히 매달려 있는 중이었는데, 그의 왼손은 여전히 오그라진 독수리의 발톱처럼 뻑뻑한 상태였다. (p. 67)

낚싯줄에 고기가 걸렸을때 무겁고 큰 놈이란건 알았지만 물밖으로 나오지 않아 크기를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물고기는 노인의 배를 점점 더 먼바다로 끌고 갔다. 하지만 노인은 다른 모든 낚시줄을 이어 그 물고기와 연결된 줄에 이어붙이고 자신의 온 몸으로 그 줄을 지탱하면서 결코 그 줄을 끊지 않았다.

네가 나를 죽이겠구나, 물고기야, 노인은 생각했다. 그래, 너는 그럴 자격을 가지고 있지. 결코 나는 지금까지 너보다 더 거대하거나, 더 멋지거나, 혹은 침착하거나 더 당당한 것을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형제야, 어서 와서 나를 죽이렴. 나는 누가 누굴 죽이건 개의치 않는단다. (p. 97)

그는 물고기가 공격당하고 있을 때 마치 자신이 공격당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 물고기를 공격하는 상어를 죽인 게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p. 108)

믈고기에 계속 끌려가면서 그 물고기의 실체를 확인 한 후 노인은 자신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물고기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며칠 간의 사투 끝에 물고기를 배에 묶을 수 있었지만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진정한 사투는 어쩌면 이제 시작이었다. 커다란 물고기의 피냄새를 맡고 상어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노인은 첫번째 상어를 물리쳤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반쪽 물고기야" 그는 말했다. "너였던 물고기야, 미안하다. 내가 도를 넘어서 유감이구나. 나는 우리 둘 다를 망가뜨렸구나. 그렇지만 우리는 많은 상어를 죽여왔지. 너와 나는, 그리고 많은 다른 것들을 망가뜨렸지. 너는 이제까지 얼마나 많이 죽였니, 늙은 물고기야? 네 머리의 창을 쓸데없이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닐 테니 말이야" (p. 120)

상어는 물리쳐도 새로운 놈이 또 몰려왔고 그렇게 잡아묶은 물고기의 살점들은 먹혀가고 배도 망가져가고 노인의 몸엔 부상이 쌓여갔다. 하지만 노인은 포기하지 않았고 드디어 마을의 항구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무엇이 자네를 이긴 거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그는 소리내어 말했다. "나는 너무 멀리 나갔던 것뿐이야" (p. 125)

며칠간의 사투끝에 집에 다시 돌아왔다. 소년은 노인을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노인의 배에 묶여 있는 커다란 뼈를 보았다. 소년은 울었다.

"우리 이제 다시 함께 고기를 잡아요"

"안 된다. 나는 운이 없다. 나는 더 이상 운이 없어"

"운 따윈 상관없어요" 소년이 말했다. "운이라면 제가 가져올게요" (p. 130)

커다란 물고기를 잡았던 그때 그순간엔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는데, 멀고 먼 길을 오는 동안 상어에게 다 먹히고 뼈만 남아있게 상황에서 과연 노인에겐 운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없었따고 있다고 해야할까 없다고 해야 할까...

"저게 뭐죠?" 그녀는 웨이터에게 물었고 이제 막 밀물에 쓸려 쓰레기로 떠내려가길 기다리고 있는 거대한 물고기의 긴 등뼈를 가리켰다. "티뷰론이요" 웨이터가 말했다. "상어죠"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나름 성의를 다하고 있었다. "나는 상어가 저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꼬리를 가졌는지 몰랐는데" (p. 132)

주둥이에 길다란 창이 달린 물고기 커다란 물고기 그 바다에서 주로 잡히는 그렇게 생긴 커다란 물고기는 청새치 라고 한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관광객의 질문에 카페 웨이터는 티뷰론이라고 대답한다. 티뷰론은 상어라는데... 웨이터는 왜 상어라고 한 것일까? 역자는 청새치임이 분명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어렸을 때 읽은 기억에도 노인이 잡은 물고기는 상어였었다. 헤밍웨이는 왜 이런 마무리를 한 것일까...

[노인과 바다]가 출간되었던 1952년, 헤밍웨이는 10년 넘도록 의미 있는 문학작품을 쓰지 못한 상태였다. (p. 246) 이 소설의 우화 같은 구조는 이야기가 상징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알레고리로서 [노인과 바다]를 보는 이유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그 모든 것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혹은 적어도, 그렇게 말했다. "거기에는 어떤 상징주의도 없다" 고. (중략) 헤밍웨이는 자신의 편집자 월리스 마이어에게 원고를 보내면서 말했었다. "나는 이 소설이 내 인생을 통틀어 쓸 수 있었던 최고라는 것을 알고 있다네. 내 생각에, 또한 이것과 나란히 놓이는 것으로 멋지고 훌륭한 작품이 해를 입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고" 그러고 나서 그는 그것이 "내가 작가로서 통과해야 하는 비평 집단을 제거하는'계기가 되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p. 249)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의 마지막 소설이다. 우화적으로 읽히지만 그런 상징따위 없다며 비평가들을 조롱하면서 자신에게 최고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온통 상징적으로 읽히게 써놓고 상징따위 없다고 비평가들의 상징주의적 분석따위 의미없다고 일갈하는 헤밍웨이의 삐딱함이 눈에 그려지는 듯 하다. 단순하게 읽으면 노인이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았으나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는 이야기다. 이 단순한 서사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이 단순한 서사로 자신의 최고작품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던 이유는 단순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스스로 알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일까?

비교적 짧은 작품인데다 번역에 대한 역자의 자신감때문에라도 이 책은 한글본과 영문본이 함께 실려있고 저자의 강조을 담은 역자해설도 붙여져 있다. 영어를 모르니 번역에 대한 바름의 정도는 일단 건너뛸 수밖에 없는데 그런 후에도 왠지 추억속의 작품과 느낌이 다르다. 늙은 어부의 삶이 좀더 생생하게 느껴기는 하는데 '상징'을 뺀다면 무엇을 남겨야 할지는 좀더 막막해지는 기분이다.

85일째에서야 잡은 커다란 물고기... 그동안 없던 운이 횡재가 될수도 있었으나... 고기에게 끌려가는 작은배... 그럼에도 노련하게 낚시줄을 당겼다풀었다 하며 고기를 기어코 잡은 노인... 상어들의 연이은 공격... 살점하나 남지 않은 물고기... 몸 여기저기 다치고 또 다쳐서 성한데 한곳 없이 빈손으로 돌아오게 된 노인... 다시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탈 수 있을지없을지 모르는 상태... 청새치를 잡았으나 상어를 더 여러마리 해치웠으니 그 뼈만 남은 물고기는 청새치가 아니라 상어라고 불러야 하는걸까... 운이 없어도 고기를 못잡아도 늘 준비하고 일상을 하루도 빠짐없이 채웠던 노인에게 그 물고기는 운이었을까 아니었을까... 노인에게 바다란 무엇이었을까... 그런 노인을 바라보며 어부가 된 소년에게 바다는 무엇이 될까...

겉표지를 벗겨내면 보이는 하드커버에 그려진 삽화에 한참 눈길을 두게 된다. 저 작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배보다 큰 물고기를 오직 낚시줄로 잡은 노인의 노고에 대해 그저 한참 먹먹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그 막막함을 조금이나마 줄여본다. 바다란 늘 그렇게 그저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삶도 그런 것이려나...

-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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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바두르 오스카르손 지음, 권루시안 옮김 / 진선아이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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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저편, 미지의 세상이 궁금한 두 친구의

순수한 호기심과 엉뚱한 상상을 담은 이야기

그림책은 어린아이들만 읽는 책일까?

그렇지 않다. 어른에게도 때론 그림책이 필요하다. 어른만을 위한 그림책을 소개한 책을 읽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램책은 온전히 한권의 그림책으로 만나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가끔 일부러 그림책을 찾아 보곤 한다. 그 짧은 시간이 주는 느낌이 참... 좋다.

북유럽아동청소년문학상, 화이트레이븐상, 북서유럽아동청소년문학상 등 책을 감싸고 있는 띠지에 메달처럼 박혀있는 도장들이 이 책을 빛나게 해주는듯 하지만 이런 금빛도장들이 찍혀있는 책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읽고나면 사실 그러한 홍보문구들은 의미없어진다. 그런 문구들이 없어도 책한권의 온전한 가치는 마지막장을 덮었을때 독자에게 나름의 가치를 부여해준다.

하지만 솔직히 이런 금도장들은 아이를 둔 부모들에게 톡톡한 효과를 발휘한다. 좋은 그림책을 보여주고픈 부모라면 아이에게 기왕이면 어디선가 인정받았다는 기왕이면 누군가에게 검증되었다는 그런 책을 보여주고싶지 않겠는가. 그냥 어른인 내가 읽으려해도 그런 금도장들에 눈길이 가는데 ㅎㅎ

저자는 북유럽의 작은 나라 페로 제도에서 태어나 어린이 잡지의 삽화작가로 활동하다가 그림책을 내게 됐는데, 만화 일러스트레이션 처럼 한눈에 명확하게 파악이 되는 특징의 그림책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이 <나무> 라는 그림책만 해도 단순한 그림체이지만 다양한 상을 받았다.

별다른 채색도 없이 내내 거의 무채색으로 간단하게 그려진 펜화인듯한 그림은 그 단순함때문에라도 캐릭터에 집중하며 보게 된다.

'저 나무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커다란 당근을 끌고 가는 토끼 한마리가 등장한다. 문득 멈춰선 자리에서 보이는 것은 저 멀리 나무 한그루뿐. '밥'이라는 이름의 토끼는 생각한다. '저 나무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밥은 한번도 저 나무 너머에 가본적이 없었다. 그때 친구 힐버트를 만난다.

"난 전 세계를 돌아다녔거든"

힐버트는 자신만만하게 나무 너머의 세상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하지만 힐버트는 밥의 주변을 떠난적이 없다. 제 여행을 한 걸까? 그것도 전 세계를?

"난 날 수 있거든. 그래서 다닐 때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아"

심지어 힐버트는 사실 자신이 날아다닌다고 이야기 한다. 힐버트는 '개'인데.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ㅎㅎ

과연 밥은 나무 너머로 가보게 될까?

정말 힐버트는 날아서 나무 너머의 세상을 여행하고 온 것일까?

여백이 많다는 것은 읽는이에게 그만큼 넓은 상상력의 세계를 펼치게 한다.

나는 이미 저 나무 뿐만 아나라 그 뒤의 산 그 아래의 바다까지 다 돌고돌아온 어른이지만

그림책을 보며 아이때 그렇게 커보이고 그렇게 멀어보이던 나무 너머의 세상에 대해 잠시 되돌아가볼 수 있었다. 세상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을 반짝거리던 그때로...

어린 자녀가 있어 이 그림책을 아이에게 읽어주었을 때 그 아이는 어떤 질문을 하게 될까? 생각만으로도 흐뭇해진다.

그림책의 순수함은 역시 어른에게도 좋은 것 같다. 지금 내 앞엔 어떤 나무가 서있는것일까? 그 나무 너머의 세상에 대해 내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조금은 순수해지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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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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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함축성과 소설의 서사성을 갖춘

천 개의 시어가 빚어낸 한 편의 아름다운 소설

<달에 울다> 와 <조롱(鳥籠)을 높이 매달고> 라는 두 편의 작품이 실린 이 책의 작가는 마루야마 겐지 다. 개인적 취향상 일본소설을 좋아하지 않지만 '시적인 소설'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문학의 길이 곧 구도의 길이라며 등단 직후 고향에 틀어박혀 고고(孤高)의 작가가 되었다는 저자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두 편의 작품으로 충분히 작가만의 색깔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달에 울다>

봄 병풍에 그려진 그림은 중천에 걸려 있는 흐릿한 달, 동풍에 흔들리는 강변의 갈대, 그리고 걸식하는 법사다. 휘늘어진 버드나무 둥치에 털썩 주저앉은 법사는 달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비파를 타고 있다. 두 눈이 멀어 광대한 강변 일대에 쏟아지는 푸른 달빛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때가 꼬질꼬질한 그의 오체는 삼라만상을 그대로 포착하고 무궁한 시간과 공간에 녹아들어있다. 팽팽한 현의 떨림은 미적지근한 밤기운을 자극하여 봄을 증폭시키고, 병풍 옆의 초라한 이불 속에 기어들어가있는 소년의 아직 두부처럼 여린 영혼에도 깊이 스며든다. 볏짚을 채운 요와 고이노보리를 부수어 만든 이불 속 아이는 바로 30년 전, 이제 막 열살이 된 나다. (p. 9)

대륙에서 전쟁을 겪고 다리를 다쳐 돌아온 소년의 아버지는 괴상해져 돌아왔다. 소년이 보기엔 그랬다. 그 괴상함은 잔인함과 폭력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촌장네 헛간을 털려던 마을주민을 몰아세우는 추격전속에서 아버지는 가장 활기차 보였다. 그렇게 야에코의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야에코와 어머니는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여름 병풍에 그려진 그림은 산기슭에 걸린 초승달, 천지에 무성한 초록 풀, 그리고 거지 법사다. 높다란 바위 머리에 앉은 법사는 흠집 많은 비파를 여인처럼 끌어안고 격렬하게 술대를 치며 은은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그 음향은 후텁지근한 밤기운에 눌리어 멀리까지 가닿지는 못한다. 눈곱이 잔뜩 낀 법사의 눈은 앞이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여러 쌍의 남녀가 교합하는 모습을 한꺼번에 여기저기서 생생하게 포착한다. 바짝 마른 풀은 강렬한 기운을 쏟아내고 시든 뇌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환영을 차례차례 만들어낸다. 그 힘은 가늠하지 못할 만큼 커서 병풍 밖까지 미친다. 얇은 이불 속에 드러두은 젊은 남자의 가슴속 깊이 스며들이 피보다 더 뜨거운 영혼을 크게 동요시킨다. 군데군데 솜이 삐져나온 요와 땀내나는 값싼 담요 사이에 끼어 있는 젊은이는 꼭 20년전, 갓 스무살이 된 나다. (p. 34)

남자는 사과밭에 열심이다. 부모가 그닥 신경쓰지 않는 농사의 한 종류일뿐이지만 오직 사과밭에만 열정을 쏟는다. 하지만 마을에서 텔레비전 없는 유일한 집이고 여전히 야에코네 사과가 훨씬 맛있다. 그리고 밤이면 밤마다 야에코와 몸을 섞었다.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야에코네가 왜 마을을 떠나지 않는 이해가 안가지만 아무일도 없었음에도 남자는 다른 젊은이들처럼 도시로 떠날 생각이 없다. 그저 사과밭을 돌볼 뿐이다. 그러다 병풍속에 들어가고 싶을 뿐이다. 그사이 마을은 마을사람들은 급격하고 변하고 있었다.

가을 병풍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그림자 하나 없는 명월, 가을바람에 굽이치는 초원, 그리고 거지 법사다. 흠집투성이 비파를 등에 맨 장님 법사는 회오리바람이 휘청이며 삭막한 황야를 헤매고 있다. 어디에도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짐승의 기척조차 없다. 그러나 비쩍 마른 그의 몸은 추억으로 가득 차,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행복했던 나날들을 생생하게 기억해낸다. 교교한 보름달의 독기 서린 빛이 등골까지 스며들어 골수를 파먹고 있지만 법사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다. 강풍이 쏟아내는 대지의 비통한 절규는 어딘지 비파소리를 닮았다. 그 소리는 병풍 옆에 깔린 호사스러운 이불 속에 들어가 있는 청년을 압도하고 영혼까지 마비시킨다. 방에 어울리지 않는 거위털 이불과 양털 요 사이에 끼어 있는 그 사내는 꼭 10년 전, 서른 살 때의 나다. (p. 67)

남자는 효자는 아니다. 텔레비전을 보며 멍청하게 웃고 있는 부모에 대해 그닥 애정이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여자였던 야에코와 결혼할 수 없었다. 그저 사과밭을 돌보며 병풍에 그려진 묵화만 바라보며 여전히 '마을주민'으로 살아갈 뿐이었다. 모두가 변해갔고 야에코도 그랬다. 그녀의 네번째 남자까지는 알았는데 그뒤로는 알려하지도 않았고 알게되어도 화가나지 않았다. 하지만 야에코가 사생아를 낳고 그 아기를 키우던 야에코의 어머니가 죽자 야에코가 마을을 떠났을때 남자는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겨울 병풍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잘 닦인 겨울 달, 얼음과 가루눈에 갇힌 산정호수, 그리고 거지 법사다. 자신이 파낸 볼품없는 눈 동굴 속에 앉아 있는 법사는 얇은 누더기를 걸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낮에도 여전히 팽창을 계속하는 얼음의 비명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비파를 타고 싶어도 손이 곱았고, 노래를 부르고 싶어도 열 때문에 목이 부어 있다. 그러나 얄팍한 늑골과 마른 살에 덮인 빈약한 가슴 속에서는 풍요로운 선율과 끝없는 낱말이 끓어올라, 파도처럼 바람처럼 되풀이되고 있다. 흐느낌 같기도 한, 호수의 얼음이 삐걱거리는 소리는 맑디맑은 한기를 자극하여 시간의 흐름까지도 얼어붙게 하고, 병풍 곁의 낡은 이불에 기어들어가 있는 중년 남자의 패기 한 조각 없는 회색빛 영혼을 마비시키고 있다. 전기담요와 전기요 사이에 끼어있는 그 사내는 40년하고 10개월을 산, 현재의 나다. (p. 92)

여전히 병풍없이 잠들지 못하고 여전히 사과밭을 돌보며 여전히 마을주민으로 살고 있는 남자는 이제 혼자다. 백구는 떠난지 오래되었고 야에코도 진즉 떠났었고 부모도 저세상으로 떠났다. 완전히 혼자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살던데로 그냥 살고 있다. 하지만 눈이 엄청나게 많이 오던 겨울 어느날 병풍속의 법사가 죽었다.

나를 대신해 법사가 방랑했다. 40년간 떠돌아다녔지만 사과밭 골짜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허나 법사는 마음껏 살았다. 야에코 또한 후회없이 살았다. 그녀의 40년은 나의 시시한 40년과는 비교하지 못할 만큼 빨갛게 농익어 있다. 야에코는 제 뜻대로 이 세상을 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대로 살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특히 마을을 나가서 다시 마을에 돌아올 때까지의 10년은 상상을 초월하는 나날이었으리라. (p. 109)

사람들은 잘 때마다 쇠약해진다.

해줄 만한 일은 다 해주었다. (p. 112)

눈 무게 때문에 사과나무 가지가 휘청거린다. (p. 113)

굵은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p. 114)

조금 전까지 마을 하늘에 떠 있던 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p. 115)

사계절의 병품 그림속에 남자의 인생이 모두 들어있었다. 한걸음 떨어져 병풍을 바라보듯 그렇게 자신의 인생도 떨어져 바라보며 살았다. 자신의 사과밭을 돌보면서도 가보지못한 골짜기 사과밭을 생각하며 살았다. 거지법사의 가난한 삶은 남자의 가난한 마음과 닿아있고 거지법사의 방랑은 마을을 떠나지못하는 남자의 삶과 닿아있고 거지법사의 스러져가는 비파소리는 남자의 사랑과 닿아있었다. 그렇게 야에코가 마을에 돌아왔을때 거지법사는 죽었다.

<조롱(鳥籠)을 높이 매달고>

어느새 내 '전반기'는 끝나 있었다. 과연 내가 42년이라는 세월을 헤쳐온 사내일까? 확실한 증거라도 있는 걸까? (p. 121) 20년을 일하고, 자존심까지 바치고, 결국에는 머릿속까지 의심받고서 손에 남은 건 바로 그 돈이었다. 또한 폐차 직전의 승용차와 말라빠진 늙은 개, 그 무거운 피로감과 될 대로 되라는 마음뿐이었다. (p. 122)

"나지도 않는 소리가 들리거나 있지도 않은 사물이 보이면, 이미 우리 병원의 훌륭한 환자입니다" (p. 119) 라는 의사의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는 그동안 자신이 속해왔던 곳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M마을을 떠난지 30년이 지났지만 그동안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내쳐졌다. 그리고 나지도 않는 소리가 들리고 보이지도 않는 사물을 보았다. 남자는 M마을로 향한다. 이제 더이상 아무도 살지않는다는 그 작은 마을로.

피리새 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한두 마리 지저귀는 소리가 아니다. 대부분의 집 처마 아래에는 대나무로 만든 조롱(鳥籠)이 하나씩 매달려 있다. 키우는 새는 수컷으로 정해져 있다. 그 새들은 회색 들깨와 파릇파릇한 별꽃을 번갈아 쪼아 먹고, 찬물을 마시고, 분홍빛 목을 떨어 절묘하게 지저귄다. 그 소리는 바람 소리나 파도 소리, 갓난아기의 웃음소리와도 조화를 이룬다. (p. 141)

가난에 찌든 삶이었지만 자신의 어린시절 10년이 오롯이 담긴 곳, M마을은 그에게 고향인 셈이다. 어려운 형편의 삶들이었지만 그래도 M마을에서는 누구나 조롱 하나쯤은 걸고 살았다. 다만 남자의 토막집에만 그 조롱이 걸리지 않았던 듯 하다. 그마저도 힘든 집이 남자의 집이었다. 그래도 피리새의 소리는 어디서든 들을 수 있었다. 피리새의 소리를 쫓아 돌아온 M마을, 폐가만이 몇 채 남아있는 그곳에서 남자가 처음 본 것은 모래위에 흩어져 있는 말발굽 자국이었다. 400여년전 외딴 섬에 버림받았다는 세명의 무사들이 탔을 그 말들이 남긴 흔적이었다. 남자가 어렸을땐 1년에 몇번 보았던 그들을 30년이 지나고 돌아온 후에는 수시로 볼수 있었다. 남자는 들리지 않는 피리새의 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기마무사들을 보며 M마을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생각해보면 겁에 질려 살아온 40여년 이었다. 잃는 게 두려워 분투했음에도 나는 차례차례 잃어만 갔다. 그러나 나는 많은 것을 잃었기에 나 자신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 내 주위에는 나 밖에 없다. 나는 그런 나에게 눌리어 숨이 막혔다.(p. 151)

오두막 처마에는 대나무 조롱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저귀는 새는 틀림없는 피리새였다. (p. 162)

멀쩡해보이는 폐가 하나를 골라 임시거처를 만든 남자는 버려진 마을에서 혼자 고립을 자초하며 살다가 어느날 외딴 곳에서 오두막을 발견한다. 그 오두막에는 노인이 피리새 조롱을 걸어놓고 살고 있었다. 강제로 뺏다시피 억지로 돈을 쥐어주고 조롱을 가져왔지만 며칠 후 조롱은 다시 노인의 오두막에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노인에게는 시내에서 일하는 빨간구두를 신은 딸이 있음도 알게 된다. 중년의 나이에 거리에서 몸을 팔며 늙은 아비를 보살피는 빨간구두를 신은 딸이 있음을...

나는 불행의 밑바닥에 있다. 쓸데없는 걸 발견했다는 후회는 곧바로 반성으로 이어졌다. 나는 자신을 속이고 있다.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결국 나는 이대로 살다가 죽겠지. 틀림없다. 추락할 대로 추락해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남자, 그게 바로 나였따. 아내와 자식에게 내쫓기고, 직장도 잃고, 돌팔이 의사에게 머리가 이상하다는 얘기를 듣고, 사람보다 믿던 개는 죽어버리고, 겨우 손에 넣은 피리새마저 빼앗긴 40대 남자. 그게 바로 나였다. 틀림없이 M마을보다 내가 훨씬 빨리 풍화하고 있다. (p. 226)

남자는 분노한다. 빨간구두의 여자에게 그 여자의 아비인 노인에게 혼자 밑바닥으로 추락한 자신에게 분노한다. 그 분노를 노인에게 퍼붓던 날 노인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자에게 말한다. "자넨 마음이 가난하고 비열해!" (p. 245) 그리고 얼마후 피리새 조롱이 남자의 머무는 폐가의 현관에 놓여져 있었다.

느릅나무에 기어올라가 조롱을 높이 매달았다. 느릅나무는 잎사귀가 난 부분에 연한 노란색을 띤 작은 꽃을 담뿍 달고 있었다. 하늘에는 수많은 잠자리가 날고 있었다. 나는 조롱에 달린 문을 올려서 열어젖히고, 그것이 내려오지 못하게 고무줄로 꽉 묶었따. 피리새는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조롱 안에서만 지저귀었다. 피리새는 내가 언덕을 내려가고 나서 한참 후에야 바람 속으로 날아갔을 것이다. 적어도 먹이가 떨어질 때쯤에는 날아갔으리라. 설마 그대로 조롱 안에서 죽어버리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사 그랬다 해도 내 책임은 아니다. 피리새 스스로의 선택이니까. (p. 263~264)

M마을을 떠나며 남자는 마지막이었을 피리새 조롱을 마을 언덕 높은 나무에 걸고 문을 열어놓는다. M마을은 이제 정말로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마을이 되었다. 그리고 남자는 이제 정말로 아무도 없는 고고(孤高)한 혼자가 되었다.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한 고독을 그린 수작' 이라고 했다. 문단의 이단아, 반항적인 삶, 아나키스트 기질, 엄격한 문학적 구도자 등등의 작가라고 했다. '수작'인지는 모르겠으나 '차갑고 단단한 고독'은 느낄 수 있었다. '문학적 구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구도적 문학'을 추구한다는 것은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선호하는 작가들은 작품에 작가가 작가의 삶이 온전히 투영된 글을 쓰는 작가들이다. 소설은 분명 허구이지만 그래도 작가의 진심과 마음이 담긴 글들은 전해져오는 무언가가 있다. 그저 상상으로만 그저 거짓으로만 써낸 작품과는 분명 차별적인 무언가가 있곤 했다. 나는 그런 '무언가'에 늘 마음이 끌리곤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저자의 삶이 저자 본인이 온전히 투영된 작가만의 '무언가가' 잘 담긴 작품들이었다. 다만 그 삶의 방식이 그 추구하는 방향이 나와는 좀 달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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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 개정판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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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 성장통과 함께 써내려간, 고통에 관한 고백

 

 

 

권여선 작가의 팬이 된 것은 [안녕, 주정뱅이] 라는 소설집을 읽고 난 후였다. 단편집을 그닥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집은 단편하나하나 마음에 닿는 듯 했다. 특유의 알콜릭한 분위기가 취한듯 아닌듯 인물한명한명에 숨을 불어넣고 있었다. [레몬]이라는 작품은 처음부터 온전히 읽었으면 좋았을껄 출판사에서 일부 발췌한 가제본부터 읽었더니 스릴러로 짜깁기한 발췌가제본과 작가 특유의 느린 호흡의 본편이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온전한 맛을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 그리고 이 작품 [토우의 집] 을 만났다.

우리는 삼악동에 삽니다.

삼벌레고개요?

아뇨, 삼악동이요, 삼악동.

그러니까 삼벌레고개요.

경사를 끼고 형성된 모든 동네가 그렇듯 삼벌레고개에서도 재산의 등급과 등고선의 높이는 반비례했다. (p. 10~11)

익숙한 동네 전경이 아닐 수 없다. 이름하여 산동네 라면 다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동네 이름이 있어도 특유의 별칭으로 불리는 그런곳, 아랫동네와 윗동네가 확연히 구분되는 그런곳, 비탈을 올라가야 집이 나오는 그런곳...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엔 이런 산동네가 참 많았는데... 언제부턴가 그 비탈진 경사에도 아파드들이 들어서는걸 보면 새삼 격세지감을 느끼곤 한다.

우물집 안주인인 순분은 살짝 하자가 있는 식모를 싼값에 알차게 부리는 재주 외에도 집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세놓아먹는 재주도 겸비하고 있었다.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는 우물집엔 무려 네 가구가 살았는데 크든 작든 머릿수만 헤아리면 도합 열세 식구나 되었다. (p. 12)

산동네 집은 작은 면적일수록 많은 인원이 사는 묘한 곳이다. 부엌이 따로 있어 원래 세를 놓을 수 있게끔 되어있는 곳도 있지만 방하나만 세를 놓을 수도 있는 곳이 그동네 집이었다. 대문 하나 열고 들어가면 방마다 다른 가족이 살고 있달까... 이또한 예전엔 참 흔한 풍경이었는데...

삼벌레고개에서 행해지는 모험의 등급도 고갯길의 등고선에 따라 나뉘었다. 아랫동네 소년들은 집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았고 부모 몰래 불량 냉차를 사 먹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축이었다. 반대로 윗동네 소년들은 극히 불온하고 위험해, 모험이라기보다 범죄에 가까운 짓거리에 물들어 있었다. 결국 소년다운 모험은 삼벌레고개 중턱 소년들의 몫이었다. '높이의 모험' 과 '넓이의 모험'은 중턱 소년들이 즐기는 모험의 씨실과 날실이었다. 높이의 모험은 윗동에 꼭대기에서 이루어졌고, 넓이의 모험은 아랫동네 개천가에서 이루어졌다. (p. 13)

사는 곳이 다르면 노는 물도 다르기 마련이었다. 산동네 중간즈음에 위치한 우물집은 집앞에 오래된 이제는 안쓰는 말라버린 우물이 있어서 우물집이라고 불렸다. 이 우물집의 안주인인 순분에게는 금철과 은철이라는 형제가 있다. 어느날 새로 세들어온 새댁네 식구는 영이와 원이 라는 자매가 있었다.

갓 결혼한 것도 아니고 딸도 둘이나 있고 나이도 많았지만, 잘난 체하는 새댁은 그 후로도 쭉 새댁이라 불렸다. 새댁의 말투와 몸짓에는 새댁만이 가지고 있을법한 야릇한 급진성이 깃들어 있었다. 삼벌레고개 중턱에서는 애들을 격일제로 두들겨 패지 않고 남편을 몹시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새댁스러울 수 있었다. 세상에 그런 어이없는 참을성과 별난 열정을 짧은 새댁 시절 말고 누가 계속 지니고 있을 수 있겠는가. (p. 19)

그런게 있다. 영원히 '새'라는 접두어가 붙는 존재가. 예를들어 결혼하면 불리곤 하는 '새언니' 는 할망구가 되어도 새언니다. 그에 반해 아가씨는 영원히 아가씨이고. 그렇게 낯선 존재로 영원히 한 가족으로 묶여 사는 그런 호칭들이 있다. 여기서 '새댁'은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한집에 살지만 결코 같아질 수 없는 존재 하지만 한 공동체로 묶인 낯설지만은 않은 존재. 여하튼 여기서 새댁은 아마도 영원히 새댁일 것이다.

소설의 문체가 참 향토스러웠달까 전원스러웠달까... 가끔 '얼쑤' 하고 추임새를 넣어주고 싶을만큼 이 작품 속 작가의 문체는 묘하게 옛날틱했다. 흥이 나는 민요같기도 하고 한이 서린 판소리같기도 하고 묘한 리듬감이 읽는 내내 마음을 절절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우리가 스파이라는 거 안 잊어먹었지?"

"안 잊어먹었어"

"이제 활동을 시작해야 해"

"알았어"

"내일 아침 먹고 우물로 나와"

"응"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우물 뒤에 숨어 있어"

"걱정 마" (p. 45)

일곱살 동갑내기 은철과 원이는 단박에 친해진다. 매일 붙어다니며 이런저런 놀이를 했는데, 원이가 어디선가 알게된 '스파이'라는 단어를 은철에게 알려주면서 둘은 '스파이 놀이?!'를 하게 된다. 두 꼬맹이는 마을사람들의 정보를 캐묻거나 귀동냥하며 둘만의 스파이활동을 이어나간다. 꼬맹이들이 어른들에게 묻는 첫 질문은 항상 '이름' 이 뭐냐는 것이었다.

동창이 의례적이고 소극적으로 말부리를 따면 새댁은 가능한 한 길고 장황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말을 먼저 꺼내는 쪽은 언제나 동창이었고 새댁은 침묵을 감내하며 동창이 어떤 화제든 먼저 꺼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너덧 명의 동창 이름을 들먹거리며 지루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동안 원은 얌전히 앉아 있었다.

"나 사는 게 이렇다, 효경아"

"문숙이 네가 나보다는 형편이 나을 줄 알았는데. 상호씨 직장이 안정적이라"

"직장이 있으면 뭐 하니? 여기저기 뜯기는 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 뜯겨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런 사정 모를 거야"

"뜯기는 구나"

"뜯기지. 뜯겨도 이만저만 뜯겨야 말이지"

"애들은 점점 커가는데"

"그래. 애들은 커가지" (p. 82, 83)

새댁은 오랜만에 시내에 있는 동창의 집에 갔더랬다. 그리고 본론은 꺼내지 못한채 빙빙 돌며 말을 하고 동창 또한 모르는 척 빙빙 돌며 말을 하고 그렇게 대화인지 아닌지 모를 대화를 했다. 단칸방에 네식구가 살면서 새댁이 처음으로 궁한 소리를 하러 동창네를 찾은 것 같은데, 새댁은 동창에게서 조금도 '뜯어낼' 수 없었다. 애초에 그럴 마음도 없었는데...

"내가 그놈 안 보고 산 지가 얼만에 이런 얘길 어디서 듣는 줄 아세요? 저쪽에서 벌써 녀석 근황을 다 꿰고서 나한테 연락을 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게 무슨 뜻이겠어요. 제수씨?"

"애들 고모님을 생각해보세요, 아주버니"

"내 말이 그말입니다. 누님은 천재였어요. 그렇게 재주가 많던 우리 누님이 왜 그렇게 됐습니까? 제수씨야말로 생각을 좀 해보세요"

"고모님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 생각을 해보세요, 아주버니"

"제수씨, 세상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때가 어느 땐데요. 제수씨가 잘 몰라서 그렇지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제수씨도 계속 교편을 잡았어야 했어요" (p. 94, 95)

남편 모르게 처음 찾은 시아주버님 이었다. 원이에게 처음 인사시킨 큰아버지였다. 하지만 ...

"너도 잘했고 나도 잘했으니 사백 번 잘했다. 느이 아버지도 뭐라고는 못 하실 거다. 그런 위험한 일을 그렇게 허술한 데서들...... 그래. 이번일 가지고 그이도 더는 뭐라고 못 하겠지. 이제 다시는 안 갈거니까.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뜯어낸 거니까" (p. 109)

꽤 오래전 이야기인것 같긴한데 소설은 처음부터 시간적 배경을 바로 알려주지 않는다. 이런저런 상황 설명을 보면 분명 현대는 아닌데... 소설의 1/3쯤 가서야 어림짐작으로 시간적 배경을 알게 된다. 육이오가 터지고 전후상황이 안정되었으나 사회적불안요소가 많았던 시절... 대략 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 초반즈음 같다. 새댁과 남편은 지식인층이었다. 남편이 하고 있는 일은 아마도 반사회적 활동 같다. 생활은 점점 더 궁핍해져갔고 아주버님은 양복점을 크게 하고 있었지만 남편과 연락을 하지 않고 있던 사이였다. 그곳을 찾아갔던 것이다. 새댁은. 원이를 데리고.

그럴 때면 가슴속 유리 상자에 쫙쫙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달리면 달릴 수록 그의 마음은 심하게 베었지만, 파란호스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로 항상 질척거리는 창자처럼 깊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은철은 온통 신발에 진흙을 튕기며 달리고 또 달려갔다. 아 시시하다, 시시해. 칫칫! (p. 173)

하루가 멀다하고 은철은 새댁네로 가서 원이와 놀곤 했다. 새댁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도 좋고 원이와 함께 하는 소꿉놀이도 좋았다. 그러던 어느날 손님들이 오실때는 오지말라고 새댁이 하는 말을 은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마음에 그 하루 오지말라는 소리가 무척 서운했다보다. 은철은 그후로 아예 발길을 끊고 원이도 아는채 안하고 형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하지만 새댁이 부르거나 원이가 부를때면 마음이 아팠다. 어린 마음에 유리 같은 마음에 금이 가는 것 같았다...

"빨리 먹어! 씹어 먹으라고! 이거 사람이 먹는 거라고!" (p. 176)

새댁이 해주는 음식들은 은철 입에 꼭 맞았다. 하지만 은철의 집에서는 내장탕이니 닭발볶음이니 생간 같은 것이 식탁에 올라왔다. 원이를 멀리할수록 은철의 마음은 옹색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날 은철에게 반갑게 인사하던 원이에게 은철은 우악스럽게 생닭발을 입에 욱여넣어버렸다. 원이는 기절했다.

순분은 불구가 될지 모르는 작은아들의 시련과 괴로움, 그리고 그 강도와 길이에 상응하여 큰아들이 지고 가야 할 자책과 죄의식에 깊은 동정을 느꼈다. 그렇게 매를 때리기 좋아하던 순분이 이제 아들들에게 내릴 평생의 매는 다 내렸다고 결정한 순간, 빗자루나 막대자 연탄집게 같이 매질에 동원되었던 모든 도구는 제본성을 되찾고 바닥을 쓸거나 눈금을 재거나 연탄을 집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되었다. (p. 202)

분명 짠한 장면인데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야말로 웃픈 표현이었다고나 할까. 꼰대같은 말이지만 예전엔 정말 그랬다. 손에 잡히는 데로 집어들어 패곤 했다. 집에서는 빗자루며 먼지떨이총체로 맞고 학교에서는 대걸레자루며 지시봉으로 맞았다. 그것들 모두 본연의 임무가 있었을텐데 말이다.

"정말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짓을 할까요? 난 믿을 수가 없어요, 여보"

"저들이 보기에 말도 안 되는 건 우리니까요" (p. 220)

"얘기는 가면서 합시다. 여긴 아무래도 댁이니까" (p. 248)

뚜벅이할매가 죽고 똥순할매가 사라진 뒤 기력을 잃고 비실대던 박가는 산삼이라도 달여 먹은 듯 예전의 성질과 기세를 단박에 회복했다. 우물집 앞에 형사 둘이 불침번을 서게 된 후부터 박가는 통장으로서의 사명감에 불타올라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p. 264) 통장집도 틈만 나면 남편으로부터 반공 교육을 받아 꽤 유식한 소리를 떠들어댈 줄 알게 되었다. 그 아슬아슬한 소문의 가로장을 밟고 오르다 보면 삼벌레고개 전체에 파다하게 퍼진 흉흉한 소문의 오케스트라를 들을 수 있었다. (p. 265)

설마설마 했는데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남편은 붙잡혀가고 새댁대가 세들어사는 우물집앞엔 형사들이 지키고 섰다.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말은 가장 무서운 말은 '빨갱이'였다.

"무서운데 멈출 수가 없어요, 저놈들이 멈추지 않으면 우리도 멈출 수가 없어요" (p. 269)

원은 가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 친구들에게 간첩 중에는 좋은 간첩도 있고 나쁜 간첩도 있는데 좋은 간첩을 스파이라고 한다고 큰소리로 얘기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데 간첩은 그렇다치고 빨갱이는... 알 수 없었다. 담임선생님은 짝의 귀를 물어뜯은 원을 야단치는 대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했다. (p. 278)

그래도 새댁네는 다행이었다. 집주인 순분은 새댁에게 죽을 쑤어먹였고 이제막 1학년으로 입학한 원의 담임선생님은 원을 혼내지 않았다.

은철은 차창에 다가가 정면을 보고 앉아 있는 원의 옆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원은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은철은 알았다. 자기가 병실에서 느꼈던 것처럼, 원도 날카로운 고통이 사방에 철창을 두른 작은 방 속에 갇혀버렸다는 것을.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그 방에 원 혼자 갇혔다는 것을. (p. 327)

우물집 식구들은 하나둘 떠나가고 마지막으로 순분네와 새댁네도 떠나게 된다. 집은 새주인을 맞을 것이고 그렇게 새삶의 터전이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떠났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의 기억속에 우물집은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토우를 묻은 무덤처럼 그렇게...

나는 그들의 고통은 물론이고, 내 몸에서 나온, 그 어린 고통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고통 앞에서 내 언어는 늘 실패하고 정지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 어린 고통이 세상의 커다란 고통의 품에 안기는 그 순간의 온기를 위해 이제껏 글을 써왔다는 걸. 그리하여 오늘도 미완의 다리 앞에서 직녀처럼 당신을 기다린다는 걸. (p. 331) -작가의 말 中-

다른 책에서 말하길 작가의 말을 쓰기 싫다고 했었다. 내키지 않는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멋지게 쓰는 걸. 나는 앞으로도 권여선 작가의 '작가의 말'을 기다리지 않을 수가 없다.

오래전 이곳에 삼악산이 있었지

북쪽은 험하고 아득해 모르네

남쪽은 사람이 토우가 되어 묻히고

토우가 사람 집에 들어가 산다네

그래봤자 토우의 집은 캄캄한 무덤 (p. 329)

집이 무덤같고 사람이 토우 같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흘러간다.

그 시간을 이렇게 따듯하게 품어주는 작품이 계속 나오는한 아마도 생은 살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통의 품에 안길지라도 온기를 느낄 수 있게하는 글이 있고 그런 글을 이렇게 읽을 수 있다면 아마도 삶은 살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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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잉게 숄 지음, 송용구 옮김 / 평단(평단문화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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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나치의 폭압에 죽음으로 맞선 '백장미'

우리가 몰랐던 독일인의 저항 정신을 소설로 읽는다!

 

 

 

모든 독일인이 나치주의자는 아니었고 나치와 싸우다 죽어간 수많은 피가 있었으며 나치만큼이나 지독했던 민주화와 자유를 향한 독일인의 의지를 대표하는 인물로 한스 숄과 소피 숄이 있다고 한다. 이름에서 느껴지겠지만 둘은 남매다. 그리고 저자는 이 남매의 누나이자 언니인 잉게 숄이다. 두 동생에 대한 실명글이자 실화인데 왜 소설이라고 하는건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숄 남매는 나치에 저항한 뮌헨대학교 대학생들이 주축을 이뤘던 '백장미단'의 주동자였다. 두 남매는 단두대형에 처해졌고 가족들은 옥고를 치루긴 했으나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렇게 두 남매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전하는데 평생 노력했다.

그때 한스는 열다섯 살의 소년, 소피는 열두 살의 소녀였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조국, 동포애, 민족공동체, 향토애 따위의 말들을 귀에 익도록 들었씁니다. 이런 말들ㅇ느 우리를 감동하게 했고 학교에서나 길거리에서 이 말들이 들려올 때마다 열성적으로 귀를 기울였습니다. (중략) '조국'도 고향과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말을 사용하는 같은 민족이 사는 더 큰 고향이나 다름없지요. (p. 18) 10대에서 성인에 이르기까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업시 우리 모두는 존엄성을 인정받고 위대한 조직의 구성원이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온 국민이 창조해가는 하나의 과정과 하나의 운동에 우리가 동참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p. 21)

숄 남매들이 어렸을때 작은 고향마을에서도 애향심은 뜨거웠다. 큰 도시로 나와 살게 되면서 조국애로 그 마음은 확대되었고 그 당시 독일을 휩쓸었던 히틀러사상에 어른아이 할 것없이 빠져들었다. 모든 활동이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빠져들고 체험하면 할 수록 이상한 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진정한 자유를 열망하여 참여했으나 활동은 억압적이었다.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고 믿었었으나 실상은 불행에도 눈감아야 했다.

이럴 수가! 그때까지 한 점의 불꽃처럼 미미했던 의심이 마침내 깊은 슬픔으로 변하더니 결국 분노의 불길로 타오르고야 말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순수한 믿음의 세계가 산산이 부서져 조각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조국을 이런 모습으로 망가뜨렸단 말인가요? 자유도 거짓, 번영의 삶도 거짓, 조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발전과 행복도 거짓이었습니다. (p. 30)

실상을 깨닫게 되었을때 그 실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준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히틀러 독재의 모순과 오류를 지적하고 알려주면서 남매들에게 '시대가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나는 너희가 인생을 올바르고 자유롭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라고 응원해주었다. 남매들은 '청소년회'를 자체적으로 결성해서 자유롭게 가치관을 형성해 나아갔고 대학생이 되어 뮌헨에 갔을때 더욱 심도깊게 삶을 고민하고 성찰하게 된다.

"진실을 말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마침내 나타나고야 말았군" (p. 51)

1942년 우편함에서 발신인 없이 복사된 편지를 발견했는데 내용은 뮌스터의 신부가 미사에서 들려준 설교문의 내용을 옮긴 것이었다. 주교는 뮌스터 지역에서 벌어진 약자들에 대한 폭압적 행위들에 대해 고발하고 있었다. 이 편지와 교수들과의 대화와 친구들과의 토론을 통해 자극받고 성장한 남매와 친구들은 저항활동을 계획하게 된다.

나치를 비판하는 전단들이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떠돌아다닌 것이었습니다. 대량으로 복사해 퍼뜨린 전단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은 흥분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무언가를 해냈다는 승리감과 끓어오르는 열정, 역겨워하는 거부감과 치를 떠는 분노가 뒤섞여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p. 83)

모든 활동은 일단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야 뭐라도 시작해볼 수 있다. 숄남매와 친구들이 시작한 행동은 현실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지시키는 것이었다. 전단지 배포활동은 문구작성부터 배포까지 게슈타포의 감시를 피해 살떨리는 긴장속에서 진행되는 만큼 성취감도 남달랐다.

신문은 날마다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일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p. 113)

한스와 그의 친구들은 이런 생각에 젖어들었습니다. 대도시마다 그런 저항 단체가 하나둘씩 연이어 생겨난다면 그 단체들로부터 태어난 저항의 정신은 독일의 모든 장소로 확산할 것이라고. (p. 123)

언론이 침묵할수록 지하에 숨어든 지성인들은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그 중심에 대학생들이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나라의 70~80년대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세계2차대전 시기의 일제치하의 독립운동을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역사에서 그러했듯이 숄남매와 친구들은 결국 붙잡히고 사형선고를 받는다.

"우리의 행동을 통해 수천 명의 의식이 깨어나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내 죽음도 헛된 것은 아닐 거야" (p. 139)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살아야 해.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p. 145)

남매와 친구들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지만 역시나 이들의 죽음은 언론에서 배반자의 죽음으로 짧게 언급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마침내 수백만 명을 억누르는 실체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고 비판하는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엉터리 전설은 없애버리자"라고 독일인들에게 호소했던 헬무트 폰 몰트케를 비롯한 저항 운동가들이 저항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p. 163)

실패했다고 해서 그 활동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활동들이 있었기에 그렇게라도 독일인의 양심이 지켜졌기에 지금의 독일이 있게 됐을 것이다. 독일인 모두가 나치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독일총리가 유태인학살에 대해 말없이 무릎꿇고 사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보니 어떤 면에선 지금의 일본이 조금 이해되는 면도 있다. 폭압이 극심했을때조차 자성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그 폭압이 과거의 역사속으로 묻힌 현재에 와서 더더욱 그런 목소리가 생겨날 바탕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고... 결국 일본은 영원히 사죄라는 생각을 못하게 되는게 아닐까 하고...

짧은 본문이 끝나고 나면 부록으로 백장미단의 전단 들과 독일 저항운동 선언문 등이 실려있는데 그 절절함이 당대에 읽었으면 몹시 마음을 울렸을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 문장들 사이사이에 녹아있는 고전을 보며 교육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기도 했다. 이 책이 최근에 나온 신간이라서 그동안 나치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못나오다가 늦게 나온걸까 했었는데 아니었다.

잉게 숄의 실명소설 <백장미>는 한 명의 독문학자와 한 명의 번역가에 의해 각각 <백장미의 수기> ,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백장미의 수기>는 독문학자가 번역한 작품답지 않게 원문을 수십 군데 누락시켰고, 무수한 오역을 범했다. 인명, 지명, 학술 용어 들도 잘못 표기한 것이 많았다. 독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번역가가 옮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앞서 출간된 <백장미의 수기>를 거의 베끼다시피 했다. 그래서 누락된 부분, 오역된 부분, 인명, 지명, 학술 용어의 오기등이 대부분 일치한다. 이는 잇어서는 안될 불상사이며, 잉게 숄의 원작 소설을 모독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번역서에서 잉게 숄의 원작을 가능한 오역없이 번역하고, 원문을 누락시키지 않으며, 인명과 지명과 학술 용어의 정확성을 재생하는 윤리를 철저히 지키고자 최선을 다했다. (p. 226~227)

작고 아담한 사이즈에 본문이 20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글 임에도 불구하고 초판본에서 그렇게 오역과 누락이 많았다니 의외다. 여하튼 이렇게 자신있게 지적하고 수정했다니 다행이다 싶긴 하다.

실명과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수기'라고 하는게 맞을 것 같지만 수기라고 하기에도 차근차근 서술되는 건 아니었기에 소설로 보면 더더욱 맥락과 개연성이 뚝뚝 끊기는 글이었다. 하지만 독일인에게 숄 남매의 존재가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보는 의미있는 시간을 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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