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설헌 -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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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의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태운 문학에의 열정, 종이와 붓이 있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명주실을 뽑아내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써내려갔던 그의 시는 영혼의 부르짖음이었다. - 작가의 말 中 -

허초희 라는 이름도 난설헌 이라는 호도 마음에 드는 단어들이었다. 단어에서 느껴지는 인물의 이미지가 이렇게 선명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시'라는 작품을 직접 읽기 전에 '시어'의 느낌이 온전히 전해지는 그런 이름같았달까... 조선시대의 '여류00'라는 수식어를 달만한 인물은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말고는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하지만 두 인물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큰 대조를 이룬다. 왜일까?

허난설헌에 대한 삶을 소설로 읽은것이 이 책이 처음은 아니었다. 예전에 읽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리커버 에디션'이라는 홍보문구를 흘려 읽고 순정만화 같은 표지에 홀려 집어든 소설을 읽다보니 드는 기시감... 뭐지? 싶어 그제야 검색해보니 아차차 '난설헌' 이라는 소설을 쓴 작가는 한 명뿐이었다. 읽었던 책을 제목이라도 메모에 남겨놓는 편이라 찾아보니 2013년에 읽었던 작품이었다. 작가이름을 기억해두지 않은 것이 실수였으려나;;; 같은 작품을 두번 읽게 되다니;;; 왠만해선 같은 책을 두번 읽지 않는 편인데 어쩌다보니 두번 읽게 된 소설... 이것도 인연이려나~

언뜻언뜻 줄거리와 분위기만 떠오를뿐 9년만에 다시 읽는 작품의 문체는 새롭게 다가왔다. 전에도 이랬던가 싶고 ^^;;;

다시 읽는 것을 알고 읽어서 그런지 이번엔 작품의 주요 서사 보다는 다른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그 스토리에 포옥 빠졌었던것 같은데 이번엔 그렇게 몰입이 되지 않는 것이 내가 변해서일까 기억의 문제일까 세월의 간극때문일까...

같은 또래들보다 몇 배나 트였고 조숙하다고 해도 시집가는 새색시의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운 건 당연한 일일터다. 초희가 초조해하는 심정을 우실은 십분 이해했다. 안동 김씨 집안은 첫손가락에 꼽히는 명문가다. 그러나 시댁의 높은 지체나 문벌보다 결혼의 당사자인 신랑 김성립에 대한 이런저런 헛소문에 신경을 안 끄려야 한 쓸 수가 없다. 게다가 초희의 시어머니 될 송씨가 워낙에 앙칼져 종년들 벌주기로 간장독에 구겨 박는다는 소문까지 들었다. 우실은 공연한 입질이겠거니 애써 밀쳐냈다. (p. 72)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너만 조심하고 또 조신하면 되지 않겠니" (p. 73)

난설헌의 허씨 집안은 당대의 문장가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딸에게도 책을 읽히고 시를 짓게 하는 것을 즐기는 가풍이었다. 그렇게 고이 기른 딸을 열다섯에 시집보낸 집안은 당대의 명문가 안동김씨 일족이라는 것 말고는 볼게 없는 집이었다. 가세도 허씨집안 보다 못했고 남편감은 몇년째 과거에 떨어지면서도 기방출입 소문이 끊이지 않는 인물인데다가 시어머니될 사람에 대한 평가는 더욱 박했다. 그런 집안과 남편감이 딸에게 정녕 어울린다고 생각했을까? 딸의 지적 능력을 제대로 인정했다면 (당시 조선사회가 여성으로서의 활동이 어려운 시대였다 했을지라도) 사람대 사람으로 딸의 인생을 엮어주었어야 옳았다. 집안대 집안으로 딸을 옭아맬 것이 아니라. 하지만 결국 난설헌의 아버지는 딸을 집안의 여자로서만 소유물로서만 여겼던 셈이다. 소설에서는 내내 시어머니 송씨와 남편 김성립에 대해 책임을 전가하고 있지만 애초에 그런집에 시집을 보낸 아비 허엽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지 않은지. 딸의 숨통을 트이게 키워놓고는 갑자기 목줄을 걸어 그 목줄을 사나운 주인에게 건네준 것이니 그 목줄이 어찌 숨통을 조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천재란 필연적으로 자신이 속한 시대와 불화하기 십상이라, 이걸 명심함이 좋을 듯 하이 (p. 226)

허난설헌에게 한 대사는 아니지만 허초희에게도 해당하는 대사였다. 허엽의 첫째부인 자손 말고 둘째부인의 자손인 허봉, 허초희, 허균 삼남매는 셋다 그 시대의 천재라 여겨질만한 출중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셋다 비운의 명으로 스러졌다. 특히나 억압받던 여성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없었던 허초희의의 삶은 더욱 극적인 비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난설헌은 허초희 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신사임당의 이름이 '인선'이라는 설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없다고 한다. 이름도 없이 호 라도 전해진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하려나... 여성이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어렸을때 호적등본인가 하는 서류에서 할머니 성명란에 '한氏'라고만 기재되어 있어 성씨말고 이름은 무엇인지 물어봤었는데 집안 어른 중 누구도 대답하지 못해서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분명 결혼전에 불리던 호칭이 명칭이 이름이 있었을텐데 왜 아무도 모르는 건가;;; 족보에도 그저 '한씨' 였다...

작품 뒤에는 '혼불문학상 심사평'이 있다. 이 소설은 혼불문학상 1회 수상작이다. 그런데 그 수상년도는 2011년 이고 그래서인지 '작가의 말'도 2011년 버전이다. 리커버 판에 굳이 예전의 혼불문학상에서 떨어진 작품들과 비교한 심사평을 그대로 실었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 수상에 대한 작가의 소회가 아닌 리커버판에 대한 새로운 '작가의 말'을 실을 수는 없었는지 아쉽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 소설이라 그런지 중간중간 끊어지는 맥이 도드라져 보이고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린 서술이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설헌'은 소설적으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분명 픽션이지만 마치 역사처럼 읽히는 이 소설이 주는 처연하고 처연하고 또 처연한 난설헌의 삶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슴저려하며 읽어가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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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란 무엇인가
테리 이글턴 지음, 이강선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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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담론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 권에 꿰뚫는다

현존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비평가 테리 이글턴 문화비평의 결정판

책날개에 쓰여있는 저자의 약력 첫줄이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화비평가이자 문학평론가'라고 되어 있다. 저자에 대한 이 소개는 이 책을 규정하는 가장 명확한 특징이기도 하다. 외국의 경우 '마르크스주의적'이라는 수식어가 불경이라던가 불법이라던가 하는 것으로 연결되진 않을텐데 우리나라의 경우 본인을 마르크스주의학자 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가 단 한사람이라도 있을까? 학문적으로 연구범위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문화비평을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적으로 풀어내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국내 학문토양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도 할수 있을텐데 하지만 우리는 할수 없겠지 싶어서... 여하튼, 문화란 무엇인지 사전적 답을 요구하는듯한 한국어판 제목과 달리 이 책의 원제는 그냥 Culture 이고, 질문이 없기에 답도 없었다. 어쩌면 비평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이려나.

문화는 일종의 사회적 무의식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데, 이를 염두에 두고 그런 생각을 주창한 두 주요 인물의 작업을 살펴볼 것이다. 한 사람은 정치철학자 에드먼드 버크로, 그의 글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문화 개념과 연관지어 논의되는 일은 흔치 않다. 다른 한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로, 문화적 문제들에 대한 그의 사유는 놀라울 정도로 독창적이지만 그에 어울리는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 또한 T.S엘리엇과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글에 나오는 사회적 무의식으로서의 문화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덧붙일 것이다. 이 두 사상가에게 문화는 극히 중요한 개념이지만, 이들이 문화를 보는 정치적 입장은 극명히 대립한다. 이들에 이어 아주 대담하면서도 쾌활한 문화비평가 오스카 와일드를 다룬다. (중략)이 책의 결론은 문화가 일부 옹호자들이 상상하듯 현대사회에서 결코 핵심적이지 않다는 것으로,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된 이유를 다수 제시한다. 명민한 독자들은 스위프트, 버크, 와일드에서 아일랜드의 반식민주의 저치에 이르기까지 아일랜드의 모티프가 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p. 8~9) - 머리말 中 -

두 페이지에 요약된 이 책의 '머리말'은 이 책을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동시에 간단하다는듯 정리하고 있지만, 이백 여 페이지의 이 짧은 책은 너무나 광범위하고 전방위적이서 '명민한' 독자가 아닌 나로서는 읽는 내내 헤매고 또 헤맬수 밖에 없었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이자 문화비평가이자 문학비평가로서 영국의 다양한 작가들과 작품들을 언급하는데 그 작품들에 대한 지식이 얕으니 이해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화' 와 '문명'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주었기에 나름 의미있는 책이었다.

'문화'는 유난히 복합적인 단어로, 누군가는 이보다 복합적인 단어는 한두 개밖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단어에는 네 개의 주요한 의미가 두드러진다. 문화는 (1)예술적이고 지적인 작업들 전체 (2) 정신적이고 지적인 발전 과정 (3) 사람들이 살아가며 따르는 가치, 관습, 신념, 상징적 실천들 (4) 총체적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p. 13)

'문화'라는 단어는 굉장히 자주 쓰이는 단어이지만 꼼꼼이 따져보면 이 단어의 정의를 내리기는 쉽지 않다. 때로는 예술이기도 하고 때로는 삶의 방식이기도 한 이 '문화'라는 것은 좁혀졌다 늘려졌다 하면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우리가 문화라고 알고 있던 것이 때로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했으며 우리가 문화라고 알고 있던 것이 때로는 산업이기도 했다. 가장 헤깔리게 사용될때의 문화는 '문명'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문화'와 '문명'은 원래 거의 동일한 의미였으나, 근대에 들어서는 이 둘이 구별될 뿐 아니라 실제로는 반대말로 여겨진다. (중략) 대략 말하자면, 우편함은 문명의 일부고, 우편함을 무슨 색으로 칠하느냐는 문화의 문제다. (p. 17) 산업화 이전 시대의 노동 형태는 전반적으로 훨씬 더 극악했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더불어 그러한 문명에 대한 열띤 저항이 나타났고, 이 문명은 이제 전체가 정신적으로 파산한 것으로 보인다. (중략) 이제 문명은 사실의 문제가 된 반면, 문화는 가치의 문제가 된 것이다. (중력) 그러므로 문화 개념을 탄생시킨 조력자 역할을 한 것은 산업 문명이다. (p. 23)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문화'라는 단어는 광범위하게 유통되기 시작했다. (p. 24)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소설책이 필요하고, 소설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제지 공장과 인쇄소가 필요하다. 문명은 문화의 전제조건인 것이다. (p. 25)

얼마전 '천하대혼돈'이라는 책으로 내머리를 대혼돈에 빠뜨렸던 슬라보이 지제크에게 '문제는 자연이 불변하는 게 아니라 지나치게 변덕스럽다는 것'(p. 29) 이었다하고 <서구의 몰락>이라는 책으로 유명하다는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모든 문화가 궁극적으로는 문명으로 굳어지는 쪽으로 향한다고 주장'(p. 29)했다고 하는데 여하튼 저자의 표현처럼 '현대의 문화기술들이 도래하기 전까지 문명은 문화보다 더 지구적인 현상(p. 29)'이었음은 맞는 것 같다. 과거에 '문화는 지역적'(p. 29) 이었다. 역사적으로 문명은 늘 문화보다는 큰 범주였다. 문명은 발달이나 진보로 표현되고 문화는 문명의 표현방식의 하나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문명'이라는 단어는 별로 쓰지 않는다. 온갖 '문화'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 '현대'라는 단일한 문명속에서 '다양성'이 난무하는 문화에 둘러싸여 있다고나 할까. 저자는 문화와 문명을 구분하기 위해 옛시간을 잠시 소급하지만 그 구분이 명확해지기도 전에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가버린다.

다양성은 위계와 완벽하게 공존한다. (p. 49)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연대 개념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고 더불어 통합의 모든 형태를 '본질주의적'이라고 여기는 미숙한 추정이 있는데, 이는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에 탈혁명적 성격이 있다는 분명한 표지다. 종족이라는 면에서 말한다면 다양성은 긍정적인 가치관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소비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다양성이 하는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포스트모던의 다원성 사도들은 다원성의 개념에 대해 더욱 더 다원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p. 50) 모든 획일성이 다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단일성이나 의견 일치가 '본질주의'로 악마화될 일도 아니다. 반대로 단일성이나 의견 일치가 훨씬 더 많을수록 전적으로 환영받을 수도 있다. (p. 52)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자신의 정치적 역사가 혹은 오히려 정치적 역사 부재가 정치적 관점을 얼마나 깊이 형성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다원성, 차이, 다양성, 주변성에 대한 관심은 귀중한 성과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더 물질적인 다양한 이슈에서 관심을 돌리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어떤 영역에서 문화는 자본주의를 말하지 않는 방식이 되었다. (p. 55)

문명과 문화를 역사적으로 잠시 고찰한 다음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온 이유가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성'이다. 그러나 이 산만한 다양성은 핵심을 가리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문화연구 담론은 그 자체가 놀랄 만큼 배타적으로, 대체로 섹슈얼리티는 다루지만 사회주의는 다루지 않고, 위반은 다루지만 혁명은 다루지 않는다. 차이는 다루지만 정의는 다루지 않고, 정체성은 다루지만 빈곤의 문화는 다루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학생들은 인종주의자와 동성애 혐오자가 대학에서 발언하는 것을 금지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지만, 저임금노동 착취자들이나 노조 폐기론을 주창하는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별달리 힘을 쏟지 않는다.(p. 54)' 근대까지만 해도 문화에는 사회담론의 중심을 이루는 문화에는 분명 정치적인 이념적인 철학적인 사상적인 문화들이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다양한 담론들에는 그러한 이슈들은 빠져있다.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들은 문화적인 이슈에서 밀려나거나 가볍게 치부하거나 무시하고 넘기는 '문화'가 생성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문화에서 빠져있던 핵심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문화보다 더욱 심층적인 것이 있으니, 곧 문화를 가능하게 하게 필연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는 물질적 조건이 그것이다. (p. 63) 이데올로기는 문화와 동일하지 않다. (p. 77) 문화가 항상 권력의 매개체는 아니다. (p. 79) '문화비평'은 정치에서 문화를 분리시키는데, 사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문화정치는 하나(정치)가 다른 하나(문화)로 축소될 위험에 놓여 있다. (p. 101) 사회주의의 목표는 개인주의다. (중략) 요컨대 사회주의는 노동이 아니라 여가에 관한 것이다. (p. 140) 산업사회는 인간의 힘이 가진 조화로운 총체성으로 이해된 '문화'의 이름으로 판단된다. (p. 149) 문화는 소중히 여겨지는 어떤 가치들이라는 의미에서 이제 공유된 생활 방식이라는 의미로 널리 퍼지게 될 것이었다. (p. 151) 물질적 구체화가 없는 문화의 관념은 추상적이고 학술적인 것으로 남겨지게 된다. (p. 158) 문화는 시민사회를 변환하는 수단이기보다는 시민사회에서의 도피처가 된다. (중략) 문화와 정치의 연결 고리는 점차 침식되어 간다. (p. 159)

다양한 작가들 특히 아일랜드 출신 작가들과 세계대전을 전후한 식민지배에서의 '문화'만 해도 혼란스러울지언정 여전히 사회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20세기이후 '문화산업'이 탄생하면서 문화는 '문화 생산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변화(p. 179)'를 거치게 되고 대중문화가 전면에 부상하면서 '문화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기반시설에 속(p. 179)'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과거보다 더욱 그 관계는 깨닫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다. 저자는 이 '물질적 조건'을 환기시킨다.

문화는 위험할 정도로 열광적인 민족주의 브랜드에서 속했다가, 인종주의 인류학에 사로잡혔따가, 전반적 상품생산에 흡수되었다가, 정치적 갈등에 휩쓸렸다. 문화는 권력에 대한 해독제를 제공해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권력과 깊숙이 공모하고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문화는 우리를 구원해줄 수도 있는 위치에 놓이기보다 다시 제자리에 확실히 되돌려져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p. 185)

'문화'라는 미명 하에 다양한 '주의'들이 깊숙히 침투하곤 했다. 좁은 의미의 문화가 광범위해질수록 문화가 무엇인지 규정하기 어려워져갔다. 하지만 '문화'는 여전히 파워가 있는 무엇이다. 그러니 그 이면의 핵심동기를 파악한다면 문화에 휩쓸리기 전에 중심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념으로서의 문화는 완숙함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어떤 영역에서는 최고로 자리 잡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문화의 중요성을 실제보다 과장하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예컨대 '문화산업'이라는 용어의 모호성을 보자. 만약 '산업'이라는 단어가 문화 생산이 근대 문명을 관통하며 얼마나 멀리까지 영향력을 확장했는지를 보여주는 기준이라면, 이 단어는 또한 이런 일을 하기 위한 핵심 동기가 결코 문화적인 것이 아님을 환기하기도 한다. 제너럴 모터스 자동차 회사와 마찬가지로, 할리우드와 미디어가 으뜸으로 삼는 것은 회사 주주들의 이익이다. 바로 이윤 동기가 문화가 전 세계에 걸쳐 장악력을 펼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문화산업의 존재는 문화의 중심성보다는 한때 케냐와 필리핀을 식민화했던 것만큼이나 철저하게 판타지와 쾌락을 식민화하는 오늘늘 후기 자본주의 체제의 팽창주의적 야망을 증명해준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기이한 아이러니는 대중문화가 커지면 커질수록, 이를 문화 자체의 힘이 만든 현상으로 여기는 일도 더 늘어나지만 실제로 문화의 자율적인 영역은 더욱더 줄어든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의 영향력은 더 늘어날수록 문화는 그것이 가진 규범적 의미에서 대개는 문화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목표를 가진 글로벌 체제를 더 강화하게 된다. (p. 191)

저자는 이러한 문화의 위기를 확인할수 있는 것으로 '전 세계적인 현상인 대학의 쇠퇴야말로 자본주의가 한때 자신의 반대말('문화')로 여겨졌던 것을 자신에게 동화시키는데 전념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사례(p. 192)' 라고 말한다. 또한 '인문적 비판의 핵심부로서 수세기에 걸친 전통을 가진 대학은 현재 야만적일 만큼 속물적인 관리 이데올로기의 지배 아래 놓인 사이비 자본주의 기업으로 전환되면서 사라지는 중이다(p. 192)' 라고 하지만 저자는 당당히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 라고 내세우며 자신의 학문을 연구하고 이렇게 책도 써내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조차도 안되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여하튼 저자는 이 책의 결론에서 '문화의 자만심'을 지적한다.

자본주의 운영자들은 차이, 다양성, 정체성, 주변부 담론에 열광한 나머지, '착취'나 '혁명'은 말할 필요도 없고 수십 년 전부터 아예 '자본주의'라는 단어도 안 쓰기 시작한 일부 문화 좌파들까지 슬며시 따라잡는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계급투쟁의 언어들뿐 아니라 '다양성' 이나 '포용성' 같은 용어를 쓰는 것이다. (p. 194) 이 체재(자본주의)는 (중략) 가장 단호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상상했던 대로 국가라는 것이 속속들이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도구일 뿐이었음을 폭로해주었다. 결국 핵심은 이미지와 아이콘이 아니라 거대한 사기외 체계적인 약탈이었다. (p. 195) 진짜 깡패들과 아나키스트들은 세로줄무늬 정장을 입었고, 진짜 강도들은 은행을 터는 게 아니라 은행을 경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p. 196) 초국가적 자본주의는 세계시민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수많은 세계시민 주체들 사이에 편협성과 불안정을 야기하며 그들을 자신의 영향 아래 두는 경향이 있다. 이 불안정으로 인해 세계인들은 세계주의 카페가 아니라 인종주의와 국수주의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p. 200)

자본주의는 세계화 되었지만 인류는 세계시민이 되지 못했다. 문화산업은 인류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을 것처럼 양산되지만 결코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저 소비하고 소비하고 소비하게 할 따름이었다. 그 과정에서 비교와 갈등과 분열은 과거보다 더 불안정한 사회를 만들고 있다. 이와중에 문화비평이라니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라고 저자가 묻는 것 같다. 그 질문을 하기도 전에 저자는 대답부터 먼저 한다.

사실 새로운 천 년으로 진입해가고 있는 인류가 대면한 핵심 질문은 결코 문화적인 것이 아니다. 그 질문들은 문화적인 것보다 훨씬 더 현세적이며 물질적이다. 전쟁, 기아, 마약, 무기, 종족 학살, 질병, 생태적 재난-이런 주제들에 관한 모든 질문은 문화적 측면을 가지고는 있으되 문화가 핵심은 아니다. 문화를 말하는 이들이 문화 개념을 과정되게 부풀리지 않으면서도 핵심으로 만들어낼 능력이 없다면 입을 닫고 침묵을 지키는 편이 낫다. (p. 203)

책의 제목은 질문이었으나 책의 마지막 문장은 입을 닫으라 한다. 저자의 문화비평에서 핵심은 문화적인 것이 아니었다. 저자는 물질적인것, 자본주의적인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문화의 이면에 문화가 아닌 것이 있을 수 있고 문화적 측면을 가지고 있으되 문화의 핵심이 될 수 없는 주제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함부로 문화를 말하고 핵심을 벗어난 문화비평을 하는 이들의 허풍에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차리고 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문화비평은 솔직히 너무 어려웠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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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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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작가라면 소설작가가 아니라 글을 쓰는 이는 모두 작가라는 큰 범위에서 봐도 유발 하라리 밖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온갖 유수의 문학상을 타고 노벨문학상 후보자로도 자주 언급됐다던 '아모스 오즈'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이 작품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그런데 이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자 일생의 역작이라는 것은 내게 완결미를 줄까 늦었다는 아쉬움을 줄까...

작가는 이스라엘 건국후 히브리어로 교육받은 첫 세대이고 히브리어로 쓰여진 이 소설을 번역한 이는 번역 틈틈이 작가와 이메일로 소통하며 번역에 공을 들였다. 완역을 앞두고 작가가 유명을 달리하여 묻지 못한 질문들이 남았음을 역자는 안타까워했으나 왠만한 역사서 못지않게 충실하고 꼼꼼한 주석은 역자의 걱정을 내려놓게 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이 책의 원제는 <유다에 관한 복음> 이다. 종교에 대해 잘 모르는 편이라 '유다'라고 하면 기독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배신자 라는 이미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유다가 복음을? 책을 읽는 내내 '유대인에 눈에 비친 예수' 와 '유대인에게 유다는 어떤 존재인지' 탐구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흥미로운 주제였다. '아이디어 소설' 혹은 '철학 소설'의 진수를 맛보게 해준 이 작품은 눈을 부릅뜨고 머리를 싸매며 읽어야 했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소설이었다.

<< 1959년 말에서 1960년 초 겨울에 있었던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는 실수와 욕망, 실패한 사랑과 답 없이 여기 남겨진 어떤 종교적 문제가 담겨 있다. (p. 11) >> 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역자가 '옮긴이의 말' 첫줄에서 언급한 부분 이기도 하고, <유다>라는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 이기도 하며,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남게 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쉽고 간단하게 변형하자면 '유다는 정말 배신자인가? 아니다!' 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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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무엘은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라는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청년이었다. 그러나 애인이 전남친과 결혼하겠다고 떠나고 부친의 사업실패로 생활비가 끊기고 개별적으로 모이던 사회주의 개혁서클도 분열되어 흩어지자 실의에 빠져 논문준비도 중단한채 휴학을 한다. 머물던 예루살렘을 떠나 낯선 어딘가로 가볼까 싶어 얼마안되는 살림이나마 처분하려는 광고지를 붙이려던 순간 게시판에서 구인메모 하나를 발견한다.

마음맞는 분 구함

인문학을 공부하는 미혼 남학생, 역사를 잘 알고 있으며,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리는 세심한 대화가 가능한 분, 저녁마다 다섯 시간 정도 학식이 깊고 지적인 일흔 살 장애인 남성에게 말동무를 해주면 무료로 숙소를 제공하고 소액의 월급도 지급함. 이 장애인은 자력으로 생활할 수 있으며 도우미가 아닌 말동무가 필요함. 개인 면접을 보려면 일요일부터 목요일 오후 4~6시 사이에 샤아레이 헤세드 마을의 하라브 엘바즈 길 17번지로 오시면 됨(아탈리야를 찾으세요). 특별한 상황으로 인해 면접에 통과한 사람은 비밀 유지 서약서를 작성해야 함. (p. 26)

의욕도 없고 돈도 없고 머물곳도 없던 슈무엘에게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구인처였다. 단지, 경청을 의무로하는 말동무를 하기엔 슈무엘이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한다는 아주 큰?^^ 문제가 있었을 뿐. '그는 만연체로, 즐겁게, 재밌고 활기차게 말했다. 그러나 남들이 말을 시작하고 자기가 그들의 생각을 들어야 할 차례가 되면, 곧 참을성을 잃고 주의가 산만해지며 갑자기 피곤해지면서 눈이 감기고 헝클어진 머리가 텁수룩한 가슴을 향하곤 했다. (p. 15)' 이런 슈무엘이 찾아간 그 집은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된 곳 같았다. 적어도 그때 그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불현듯 그는 이 다락방에 들어가 살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는데, 이 안에서 책더미와 적포도주, 난로와 겨울 이불, 전축과 레코드판 몇 장을 끌어안고 웅크리고 앉아서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고 싶지 않았다. 강의도 필요 없고 논쟁도 필요 없고 연애도 필요 없다. 이 안에 처박혀서 절대로 나오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밖에 겨울이 머무는 동안에는. (p. 30)

샤무엘은 이 다락방에 들어가 살게 된다. 적어도 밖에 겨울이 머무는 동안에는.

하지만 강의도 듣고 논쟁도 열띠게 하며 연애도 빠져들게 된다. 그 집에서.

나사렛 예수는 따뜻하고 사랑을 발산하는 신적인 존재였으니, 그를 살해안 사람은 당연히 그보다 더 강하고 또 교활하고 역겨운 자였겠지. 이렇게 신을 살해하는 저주받은 자들은 권력과 악이라는 무시무시한 자원을 가졌을 대만 신을 죽이는 일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네. 그리고 유대인들을 미워하는 자들의 상상 지하실 속에서 유대인들은 항상 그런 모습이었지. 우리는 모두 갸롯 유다야. 거의 여든 세대가 지났지만 우리는 모두 갸롯 유다에 불과해. 그렇지만 진실은, 젊은 친구, 여기 이스라엘 땅 바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 참된 진실은 그게 아니지 않다. 예전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나고 자란 새로운 유대인들도 똑같이 전혀 강하지 못하고 악의적이지도 못하며 오히려 욕심 많고, 잔꾀만 부리고, 말만 많고 겁쟁이에다 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 그래, 하임 바이츠만이 언젠가 말했지. 절망스럽게, 유대 국가는 영원히 세워질 수 없으니 그 개념 안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라고. (p. 63)

슈무엘의 대화상대는 게르숌 발드 라는 노인으로 거동이 불편하지만 남의 손을 빌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며 해박한 역사적 종교적 지식으로 대화에 수시로 종교적고전을 인용하고 모든 논쟁에서 신랄한 비평을 가하는 보기드문 학자였다. 슈무엘은 발드의 말동무를 하고 어쩌다 아탈리야와 지나치며 아브라바넬의 행적을 쫓는 동안 이들이 무엇을 숨기려 하는지 비밀이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비밀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본인이 심취해 있던 '유다'와 연결되어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들이 왜 우리를 사랑하겠어요? 갑자기 다른 행성에서 온 것처럼 낯선 자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의 땅과 토지를, 농토와 마을과 도시를, 조상들의 묘지와 자식들이 물려받을 유산을 탈취해 갔는데, 아랍인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거기에 반대할 권리조차 없다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우리는 그저 이 땅에 집을 짓고 정착하려고 왔을 뿐이라고, 우리의 날들을 옛적같이 새롭게 할 뿐이라고, 우리 조상의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유산을 상속하려고 왔을 뿐이라고, 기타 등등 말하지만, 이 세상에 갑자기 외국인 수십만 명이 밀려드는 것을 두 팔 벌리고 환영할 민족이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또 외국인 수백만 명이, 멀리서부터 날아와서 자기들이 가져온 거룩한 책에 따르면 이 땅이 자기들 소유라고 이상한 주장을 해 댄다면요?" (p. 153)

시온주의에 대해 나는 종교인도 아니면서 조금은 낭만적으로 생각해왔었던 듯 하다. 하지만 유대인 작가가 알려주는 유대인의 진실은 그런 낭만과는 달랐다. 세계전쟁으로 살곳을 잃은 세계 곳곳의 유대인들을 위한 난민처로 필요했던 땅을 위해 그들은 종교를 내세웠다. 하지만 만일 그렇게 한 곳에 거대 난민촌을 세울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원래 살던 곳에 머물렀다면 그 땅에 살던 유목민들은 2차대전 후 각국이 그러했듯이 신생국가를 세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치와 권력의 세계는 보여지는 것보다 이면에 더 많은 의미들을 숨기고 있는 법임을 역사를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소설을 읽으면서도 이렇게 진하게 깨닫게 될 줄이야...

랍비 예후다 아리에가 강조하기를, 절대로 예수는 자기 자신을 신으로 소개하려 한 적이 없다. 신약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는 자신이 신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언급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p. 219) 이에 반해, 복음서에서 그는 수십 번도 넘게 자기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칭했다. (p. 220) 랍비 예후다 아리에는 어떻게 그리고 왜 예수가 '전략적으로' 자기 자신을 몇 번씩이나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묘사했는지 설명하는데, 이것은 교육적으로 필요해서, 더 많은 사람이 그를 따를 수 있도록 취한 방법이었지, 정말 자기가 하느님의 자손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p. 221)

슈무엘은 자신의 논문을 포기하고 었지만 게르숌 발드와의 대화에서 아탈리야의 아버지에 대한 자료에서 힌트를 얻어 오히려 그동안 자신이 파고들었던 것보다 더 심층적으로 '유다'에 대해 분석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읽혀지는 여러 다양한 유대자료들을 통해 그동안 몰랐던 유대교의 역사를 알 수 있기도 했다. 좁게 말하자면 유대교에서의 예수에 대한 역사에 대해서였다.

가롯 유다는 기독교를 창시한 인물이다. 그는 유다 출신으로 부유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도들처럼, 갈릴리 시골 마을 출신의 어부나 농부가 아니었다. 예루살렘에 살던 제사장들은 어떤 괴짜가 갈릴리 지역에서 기적을 일으킨다는 이상한 소문을 들었는데 겐네사렛 호숫가 여기저기에서 잊힌 마을과 성읍들을 돌며 온갖 시골에 어울릴 이적들을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홀리고 있었지만, 그 사람과 비슷하게 예언자나 기적을 일으키는 자라고 흉내를 내는 수십 명의 사람이 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이 사기꾼이거나 정신나간 자이거나 정신나간 사기꾼이라는 것이다. (p. 221) 그런데 이 갈릴리 사람은 자기를 흉내내는 자들보다 좀 더 많은 신도를 끌어들이고 있었고, 그의 명성이 날로 높아 가고 있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은 유복하고, 지식인이며, 영리하고, 기록된 토라와 구전 토라에 모두 능통하며 바리사이인들과 제사장들과 가까이 지내던 가롯 유다를 선택했고, 그 갈릴리 남자를 따라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다니는 소수의 신도 사이에 잠입하라고 보냈으며, 그들 중 하나로 위장하여,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에게 이 괴짜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 사람이 특별히 위험한 인물인지 보고하도록 했다. (중략) 유다는 열두 제자의 일원이 되었다. 그들 중에서 갈릴리 사람이 아니고 가난한 농부나 어부가 아닌 유일한 사람이었다. (p. 222) 가롯 유다는 그 나사렛 사람을 따르는 가장 확실하고 죽음까지 무릅쓰는 헌신적인 제자로 변했다. (중략) 가롯 유다는 기독교인 유다가 되었다. 제자 중에서도 가장 열렬한, 더 나아가 그는 이 세상에서 예수가 신이라고 온 마음으로 믿었던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다. (p. 223) 그(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모든 백성과 온 세상 앞에서,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한 날부터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기적을 일으켜야 했다. (중략) 그러나 예수는 유다의 조언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할지 망설였다. (p. 224) 내가 정말 그 사람일까? 과연 내가 해낼까? (중략) 유다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당신은 메시아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중략) 당신은 십자가에서 온전히 살아서 내려오게 될 것이며, 온 예루살렘이 당신의 발 앞에 엎드릴 것입니다. (p. 225) 그런데 예수가 계속 두려워하고 의심하자, 가롯 유다는 스스로 십자가 사건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p. 226) 그가 은전 30세겔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다음 세대에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자들이 상징적으로 창작해 낸 것이다. (중략) 가롯 마을의 땅 부자에게 은전 30세겔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은전 30세겔은 그 당시 일반적인 노동자 한 사람의 임금 정도였다. (중략) 가롯 유다는 십자의 환상을 창조하고, 기획하고, 감독하고 제작한 자였다. (p. 227) 하느님이 그를 도우셔서 못을 빼내어 주시고, 기적을 일으켜서 온전한 몸으로 십자가에서 내려가게 해 주시리라 믿었다. (p. 228) 유다는, 자기 삶의 이유와 목적이 자기 눈앞에서 부서지는 것을 보면서, 자기 손으로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했던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유다는 , 그곳을 떠나 스스로 목을 메고 말았다. (중략) 그렇게 첫번째 기독교인이 죽었다. 마지막 기독교인이. 유일한 기독교인이. (p. 229)

슈무엘이 재구성한 유다의 일생은 놀라웠다. 유다는 예수를 밀고한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믿었기에 기적을 세상에 확인시켜 세상에 예수를 더 확고하고 돈독하게 세우려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기적을 확인하지 못했고, 사람으로 죽은 예수를 보며 따라 죽었다. 죽을때까지 예수를 진심으로 믿었던 유다라고 본다면 최초의 기독교인이자 마지막이고 유일한 기독교인이라는 슈무엘의 표현은 맞는 말이었다. 그렇게 유다는 '배신자'가 되었다.

"쉐일티엘 아브라바넬도요?"

"그렇지만 그는, 배신자였지요" (p. 256)

그리고 지금 또다른 이스라엘의 배신자로서 '아브라바넬'이 있었다. 아랍과 화해하고 땅을 공유하며 공생하자고 주장하는 그를 사람들은 배신자로 불렀다. 하지만 아브라바넬 자신은 스스로를 철저한 시온주의자라고 표현했다. 그가 돌아가고자 하는 곳은 그만의 이상향이었다. 그는 또다른 유다였다.

내가 장담하건데, 가롯 유다건 가롯 유다가 아니건, 이 세계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는 사라지지 않았을 걸세. 사라지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았을 거야. 유다가 있건 없건 간에, 유대인은 믿는 자들의 눈앞에서 계속해서 배신자 역할을 맡았을 걸세. 기독교인들은 한 세대가 가고 다음 세대가 와도 언제나 우리를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에 '그를 죽여라, 그를 죽여라, 그의 피 값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외치던 군중으로 기억할 걸세. (p. 378~379)

새로운 것은 늘 현재나 과거의 것을 비판하고 넘어서고 밟고 올라서기 마련이다. 예술도 그랬듯이 정치도 그렇듯이 새로운 종교의 탄생도 어떤 식으로든 기존의 종교와 다른 점이 부각되어야 하기 마련이다. 그 가장 쉬운 방법은 '다름'을 '틀림'으로 각인 시키는 것이다.

주석154.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롯 사람 유다와 나누신 계시에 대한 비밀스러운 이야기'로 시작되는 <유다복음서>는 예수와 가롯 유다 사이에서 이루어진 대화 형식으로 기록된 영지주의(육체와 정신을 나누는 급진적인 이원론으로, 인간이 어떤 신비로운 지식을 통해 육체를 벗어남으로써 신과 같은 영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종파) 복음서 중 하나이다. 이 책은 '유다의 예수 배반' 이 사실은 예수가 인류 구원이라는 지상 과업을 완성하기 위해 유다와 미리 모의한 것으로 쓰고 있다. <유다복음서>는 180년대에 이레나이우스 주교가 <이단논박>을 통해 이단서라고 경고한 바 있다. 현재 4세기에 쓰인 콥트어 문서로 남아 있는데, 이 사본은 1976년 이집트의 한 골동품 시장에서 발견되었으며, 2006년 전미지리학회에 의해 일부 복원되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세계 주요 언어로 동시에 공개되었다. (p. 481)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역사적 사실들은 실제 역사이기도 하다. 소설처럼 읽히는 역사서라고 볼수도 있는데, 역사서라기 보다는 소설로 읽힌다는 점에서 작가의 역량이 무척 뛰어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등장인물도 많지 않고 커다란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 소소한 일상 속에 쌓여가는 내적 성장의 깊이가 남다른 작품이라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자 놀라움 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일면 충격적이기도 했다.

슈무엘은 텅 빈 거리 한가운데 자기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그는 어깨에서 군용 배낭을 내렸다. 그는 그것을 먼지 앉은 아스팔트 위에 놓았다. 그 군용 배낭 위에 외투와 지팡이와 모자도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리고 서서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p. 456)

무엇을 물었을까?

소설을 읽는 동안 역사를 좋아하는 취향에 맞아서인지 빠져들어 읽었었는데, 읽으면서 새로운 역사들을 많이 배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유다라는 배신자 캐릭터에 대한 기존의 입장이 바뀌기까지 했는데, 지금도 어딘가 외로이 목소리를 내고 있을 유다를 생각해보게 되기도 했는데, 이렇게 끝나버리다니. '자신에게 물었다' 라니. 당황했다가... 이내 웃음이 났다. 그 물음을 책을 읽는 동안 이미 나 스스로에게 계속 하지 않았나?!

범인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추리하는 영화를 보는데 결말에 가서 '누구냐 넌' 이라고 끝났다고 생각해보자. 화가 날까? 웃음이 날까? 아니면.. 허탈해질까? 웃음이 날거 같다면 이 소설은 만족스러울 것이다. 만약 화가 난대도 허탈해진대도 역사를 좋아하고 종교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의 매력에 한번 빠져볼 것을 권하고 싶다. 새로운 프레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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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든 우리나라 역사지도 세트 - 지도의 형태로 담은 우리나라 5000년 역사 스팟
타블라라사 편집부 외 지음 / 타블라라사 / 202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큼지막한 우리나라 전도에 꼼꼼한 역사주석이 달려 있으니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뿌듯한데, 포장도 휴대용으로 알차서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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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든 우리나라 역사지도 세트 - 지도의 형태로 담은 우리나라 5000년 역사 스팟
타블라라사 편집부 외 지음 / 타블라라사 / 202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학교다닐때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과목이 '지리'였다. 방향감각이 없는 길치라서 약속을 잡을 때면 늘 내가 아는 곳 혹은 내가 찾아갈 수 있는 곳만 장소로 정하곤 했다. 그러던 나인데 어느새 지도가 눈에 익숙해졌다. 이유는 역사 덕분이다. 역사를 좋아하다보니 이런저런 역사책을 자주 읽는 편인데,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은근히 지리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역사책을 볼때면 해당내용에 관련된 지도를 펼쳐놓는 것이 익숙해졌을 정도다.

어쩌다보니 서양역사서를 주로 읽게되서 지중해지역이나 세계전도는 차라리 익숙해졌는데 오히려 우리나라 지도는 큰 모양만 알뿐 지역 곳곳에 대해 그 곳곳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어쩌다 한국사 관련 책을 읽어도 낯선 지명이 나오면 이곳이 경상도인지 전라도인지 헤깔리곤 했다. 물론 검색의 시대에 초록창에 물어보면 대뜸 답이 나올테지만, 종이책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지도도 종이지도가 왠지 보기에 편하다. 그러던차에 우리나라역사와 지도가 합쳐진 것이 나왔다니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에이든 지도'는 제주도 지도에서 무척 만족스러웠었던지라 기대가 됐는데, 우리나라 역사지도 또한 마음에 쏙 들었다. 일단 포장부터 내 스타일이다.ㅎ이다. 요즘 유행하는 언박싱 하듯 살펴보자면 일단 겉 포장은 '제주도 지도'때와 같다. 종이상자에 실로 묶여진 포장이 왠지 뭔가 있어보이는 것이 소장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역사관련 내용이 덧붙여진 만큼 지도에 그 내용을 다 담을 수는 없었을 터, 따로 역사 내용이 정리된 자료집은 상자와 따로 패키지되어 있다. 일종의 역사 요약본으로 휘리릭 가볍게 읽기 좋다.



상자에서 내용물을 꺼내보면, 지도가 두 장인데 지역별로 깨알같이 역사정보가 수록된 역사지도와 백지도가 각각 한장씩이다. 역사와 관련된 장소를 여행하며 백지도에 기입하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다. 이때 사용할 만한 스티커와 메모지도 함께 들어있다. 여기서 은근 중요한 물건이 '카드형 미니 돋보기'다. 역사지도에 촘촘이 쓰여진 글자들을 읽는데 아주 유용하다.



지도를 촤락 펼치면 A1 사이즈다. 접으면 A5 사이즈로 단추상자에 쏘옥 들어간다. 종이가 방수종이라고 되어 있긴 한데, 일반종이보다 두께도 있고 금방 젖을 정도의 종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닐코팅된 정도는 아니라서 오래두고 보려면 조심히 다루는 게 좋을 것 같다.



1000여곳의 역사 여행스팟이 담겼다는 이 지도 한장 가진 걸로 왠지 역사지식이 벌써 늘어난것만 같은 뿌듯함이 느껴진다. 나처럼 방향감각 없는 길치도 지도와 역사가 함께 연결됐을 때 더 잘 기억나는데 하물며 나보다 지리적 감각이 좋은 사람들이 활용하면 더욱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참, 미니책자에서 독도가 조선영토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고지도가 몇장 실려 있었는데 우리나라 영토에 대한 애정을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어서 역사지도를 보는 또다른 즐거움이었다.

추운 겨울이 길다 싶었는데 어느새 봄바람 살랑이는 계절이 되고보니 지도한장 들고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일렁일렁한다. 하지만 아직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때는 아닌지라... 언젠가 이 지도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기다려본다.

-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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