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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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작가라면 소설작가가 아니라 글을 쓰는 이는 모두 작가라는 큰 범위에서 봐도 유발 하라리 밖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온갖 유수의 문학상을 타고 노벨문학상 후보자로도 자주 언급됐다던 '아모스 오즈'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이 작품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그런데 이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자 일생의 역작이라는 것은 내게 완결미를 줄까 늦었다는 아쉬움을 줄까...

작가는 이스라엘 건국후 히브리어로 교육받은 첫 세대이고 히브리어로 쓰여진 이 소설을 번역한 이는 번역 틈틈이 작가와 이메일로 소통하며 번역에 공을 들였다. 완역을 앞두고 작가가 유명을 달리하여 묻지 못한 질문들이 남았음을 역자는 안타까워했으나 왠만한 역사서 못지않게 충실하고 꼼꼼한 주석은 역자의 걱정을 내려놓게 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이 책의 원제는 <유다에 관한 복음> 이다. 종교에 대해 잘 모르는 편이라 '유다'라고 하면 기독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배신자 라는 이미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유다가 복음을? 책을 읽는 내내 '유대인에 눈에 비친 예수' 와 '유대인에게 유다는 어떤 존재인지' 탐구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흥미로운 주제였다. '아이디어 소설' 혹은 '철학 소설'의 진수를 맛보게 해준 이 작품은 눈을 부릅뜨고 머리를 싸매며 읽어야 했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소설이었다.

<< 1959년 말에서 1960년 초 겨울에 있었던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는 실수와 욕망, 실패한 사랑과 답 없이 여기 남겨진 어떤 종교적 문제가 담겨 있다. (p. 11) >> 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역자가 '옮긴이의 말' 첫줄에서 언급한 부분 이기도 하고, <유다>라는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 이기도 하며,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남게 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쉽고 간단하게 변형하자면 '유다는 정말 배신자인가? 아니다!' 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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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무엘은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라는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청년이었다. 그러나 애인이 전남친과 결혼하겠다고 떠나고 부친의 사업실패로 생활비가 끊기고 개별적으로 모이던 사회주의 개혁서클도 분열되어 흩어지자 실의에 빠져 논문준비도 중단한채 휴학을 한다. 머물던 예루살렘을 떠나 낯선 어딘가로 가볼까 싶어 얼마안되는 살림이나마 처분하려는 광고지를 붙이려던 순간 게시판에서 구인메모 하나를 발견한다.

마음맞는 분 구함

인문학을 공부하는 미혼 남학생, 역사를 잘 알고 있으며,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리는 세심한 대화가 가능한 분, 저녁마다 다섯 시간 정도 학식이 깊고 지적인 일흔 살 장애인 남성에게 말동무를 해주면 무료로 숙소를 제공하고 소액의 월급도 지급함. 이 장애인은 자력으로 생활할 수 있으며 도우미가 아닌 말동무가 필요함. 개인 면접을 보려면 일요일부터 목요일 오후 4~6시 사이에 샤아레이 헤세드 마을의 하라브 엘바즈 길 17번지로 오시면 됨(아탈리야를 찾으세요). 특별한 상황으로 인해 면접에 통과한 사람은 비밀 유지 서약서를 작성해야 함. (p. 26)

의욕도 없고 돈도 없고 머물곳도 없던 슈무엘에게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구인처였다. 단지, 경청을 의무로하는 말동무를 하기엔 슈무엘이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한다는 아주 큰?^^ 문제가 있었을 뿐. '그는 만연체로, 즐겁게, 재밌고 활기차게 말했다. 그러나 남들이 말을 시작하고 자기가 그들의 생각을 들어야 할 차례가 되면, 곧 참을성을 잃고 주의가 산만해지며 갑자기 피곤해지면서 눈이 감기고 헝클어진 머리가 텁수룩한 가슴을 향하곤 했다. (p. 15)' 이런 슈무엘이 찾아간 그 집은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된 곳 같았다. 적어도 그때 그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불현듯 그는 이 다락방에 들어가 살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는데, 이 안에서 책더미와 적포도주, 난로와 겨울 이불, 전축과 레코드판 몇 장을 끌어안고 웅크리고 앉아서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고 싶지 않았다. 강의도 필요 없고 논쟁도 필요 없고 연애도 필요 없다. 이 안에 처박혀서 절대로 나오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밖에 겨울이 머무는 동안에는. (p. 30)

샤무엘은 이 다락방에 들어가 살게 된다. 적어도 밖에 겨울이 머무는 동안에는.

하지만 강의도 듣고 논쟁도 열띠게 하며 연애도 빠져들게 된다. 그 집에서.

나사렛 예수는 따뜻하고 사랑을 발산하는 신적인 존재였으니, 그를 살해안 사람은 당연히 그보다 더 강하고 또 교활하고 역겨운 자였겠지. 이렇게 신을 살해하는 저주받은 자들은 권력과 악이라는 무시무시한 자원을 가졌을 대만 신을 죽이는 일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네. 그리고 유대인들을 미워하는 자들의 상상 지하실 속에서 유대인들은 항상 그런 모습이었지. 우리는 모두 갸롯 유다야. 거의 여든 세대가 지났지만 우리는 모두 갸롯 유다에 불과해. 그렇지만 진실은, 젊은 친구, 여기 이스라엘 땅 바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 참된 진실은 그게 아니지 않다. 예전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나고 자란 새로운 유대인들도 똑같이 전혀 강하지 못하고 악의적이지도 못하며 오히려 욕심 많고, 잔꾀만 부리고, 말만 많고 겁쟁이에다 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 그래, 하임 바이츠만이 언젠가 말했지. 절망스럽게, 유대 국가는 영원히 세워질 수 없으니 그 개념 안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라고. (p. 63)

슈무엘의 대화상대는 게르숌 발드 라는 노인으로 거동이 불편하지만 남의 손을 빌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며 해박한 역사적 종교적 지식으로 대화에 수시로 종교적고전을 인용하고 모든 논쟁에서 신랄한 비평을 가하는 보기드문 학자였다. 슈무엘은 발드의 말동무를 하고 어쩌다 아탈리야와 지나치며 아브라바넬의 행적을 쫓는 동안 이들이 무엇을 숨기려 하는지 비밀이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비밀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본인이 심취해 있던 '유다'와 연결되어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들이 왜 우리를 사랑하겠어요? 갑자기 다른 행성에서 온 것처럼 낯선 자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의 땅과 토지를, 농토와 마을과 도시를, 조상들의 묘지와 자식들이 물려받을 유산을 탈취해 갔는데, 아랍인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거기에 반대할 권리조차 없다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우리는 그저 이 땅에 집을 짓고 정착하려고 왔을 뿐이라고, 우리의 날들을 옛적같이 새롭게 할 뿐이라고, 우리 조상의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유산을 상속하려고 왔을 뿐이라고, 기타 등등 말하지만, 이 세상에 갑자기 외국인 수십만 명이 밀려드는 것을 두 팔 벌리고 환영할 민족이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또 외국인 수백만 명이, 멀리서부터 날아와서 자기들이 가져온 거룩한 책에 따르면 이 땅이 자기들 소유라고 이상한 주장을 해 댄다면요?" (p. 153)

시온주의에 대해 나는 종교인도 아니면서 조금은 낭만적으로 생각해왔었던 듯 하다. 하지만 유대인 작가가 알려주는 유대인의 진실은 그런 낭만과는 달랐다. 세계전쟁으로 살곳을 잃은 세계 곳곳의 유대인들을 위한 난민처로 필요했던 땅을 위해 그들은 종교를 내세웠다. 하지만 만일 그렇게 한 곳에 거대 난민촌을 세울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원래 살던 곳에 머물렀다면 그 땅에 살던 유목민들은 2차대전 후 각국이 그러했듯이 신생국가를 세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치와 권력의 세계는 보여지는 것보다 이면에 더 많은 의미들을 숨기고 있는 법임을 역사를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소설을 읽으면서도 이렇게 진하게 깨닫게 될 줄이야...

랍비 예후다 아리에가 강조하기를, 절대로 예수는 자기 자신을 신으로 소개하려 한 적이 없다. 신약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는 자신이 신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언급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p. 219) 이에 반해, 복음서에서 그는 수십 번도 넘게 자기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칭했다. (p. 220) 랍비 예후다 아리에는 어떻게 그리고 왜 예수가 '전략적으로' 자기 자신을 몇 번씩이나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묘사했는지 설명하는데, 이것은 교육적으로 필요해서, 더 많은 사람이 그를 따를 수 있도록 취한 방법이었지, 정말 자기가 하느님의 자손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p. 221)

슈무엘은 자신의 논문을 포기하고 었지만 게르숌 발드와의 대화에서 아탈리야의 아버지에 대한 자료에서 힌트를 얻어 오히려 그동안 자신이 파고들었던 것보다 더 심층적으로 '유다'에 대해 분석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읽혀지는 여러 다양한 유대자료들을 통해 그동안 몰랐던 유대교의 역사를 알 수 있기도 했다. 좁게 말하자면 유대교에서의 예수에 대한 역사에 대해서였다.

가롯 유다는 기독교를 창시한 인물이다. 그는 유다 출신으로 부유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도들처럼, 갈릴리 시골 마을 출신의 어부나 농부가 아니었다. 예루살렘에 살던 제사장들은 어떤 괴짜가 갈릴리 지역에서 기적을 일으킨다는 이상한 소문을 들었는데 겐네사렛 호숫가 여기저기에서 잊힌 마을과 성읍들을 돌며 온갖 시골에 어울릴 이적들을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홀리고 있었지만, 그 사람과 비슷하게 예언자나 기적을 일으키는 자라고 흉내를 내는 수십 명의 사람이 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이 사기꾼이거나 정신나간 자이거나 정신나간 사기꾼이라는 것이다. (p. 221) 그런데 이 갈릴리 사람은 자기를 흉내내는 자들보다 좀 더 많은 신도를 끌어들이고 있었고, 그의 명성이 날로 높아 가고 있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은 유복하고, 지식인이며, 영리하고, 기록된 토라와 구전 토라에 모두 능통하며 바리사이인들과 제사장들과 가까이 지내던 가롯 유다를 선택했고, 그 갈릴리 남자를 따라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다니는 소수의 신도 사이에 잠입하라고 보냈으며, 그들 중 하나로 위장하여,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에게 이 괴짜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 사람이 특별히 위험한 인물인지 보고하도록 했다. (중략) 유다는 열두 제자의 일원이 되었다. 그들 중에서 갈릴리 사람이 아니고 가난한 농부나 어부가 아닌 유일한 사람이었다. (p. 222) 가롯 유다는 그 나사렛 사람을 따르는 가장 확실하고 죽음까지 무릅쓰는 헌신적인 제자로 변했다. (중략) 가롯 유다는 기독교인 유다가 되었다. 제자 중에서도 가장 열렬한, 더 나아가 그는 이 세상에서 예수가 신이라고 온 마음으로 믿었던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다. (p. 223) 그(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모든 백성과 온 세상 앞에서,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한 날부터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기적을 일으켜야 했다. (중략) 그러나 예수는 유다의 조언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할지 망설였다. (p. 224) 내가 정말 그 사람일까? 과연 내가 해낼까? (중략) 유다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당신은 메시아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중략) 당신은 십자가에서 온전히 살아서 내려오게 될 것이며, 온 예루살렘이 당신의 발 앞에 엎드릴 것입니다. (p. 225) 그런데 예수가 계속 두려워하고 의심하자, 가롯 유다는 스스로 십자가 사건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p. 226) 그가 은전 30세겔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다음 세대에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자들이 상징적으로 창작해 낸 것이다. (중략) 가롯 마을의 땅 부자에게 은전 30세겔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은전 30세겔은 그 당시 일반적인 노동자 한 사람의 임금 정도였다. (중략) 가롯 유다는 십자의 환상을 창조하고, 기획하고, 감독하고 제작한 자였다. (p. 227) 하느님이 그를 도우셔서 못을 빼내어 주시고, 기적을 일으켜서 온전한 몸으로 십자가에서 내려가게 해 주시리라 믿었다. (p. 228) 유다는, 자기 삶의 이유와 목적이 자기 눈앞에서 부서지는 것을 보면서, 자기 손으로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했던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유다는 , 그곳을 떠나 스스로 목을 메고 말았다. (중략) 그렇게 첫번째 기독교인이 죽었다. 마지막 기독교인이. 유일한 기독교인이. (p. 229)

슈무엘이 재구성한 유다의 일생은 놀라웠다. 유다는 예수를 밀고한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믿었기에 기적을 세상에 확인시켜 세상에 예수를 더 확고하고 돈독하게 세우려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기적을 확인하지 못했고, 사람으로 죽은 예수를 보며 따라 죽었다. 죽을때까지 예수를 진심으로 믿었던 유다라고 본다면 최초의 기독교인이자 마지막이고 유일한 기독교인이라는 슈무엘의 표현은 맞는 말이었다. 그렇게 유다는 '배신자'가 되었다.

"쉐일티엘 아브라바넬도요?"

"그렇지만 그는, 배신자였지요" (p. 256)

그리고 지금 또다른 이스라엘의 배신자로서 '아브라바넬'이 있었다. 아랍과 화해하고 땅을 공유하며 공생하자고 주장하는 그를 사람들은 배신자로 불렀다. 하지만 아브라바넬 자신은 스스로를 철저한 시온주의자라고 표현했다. 그가 돌아가고자 하는 곳은 그만의 이상향이었다. 그는 또다른 유다였다.

내가 장담하건데, 가롯 유다건 가롯 유다가 아니건, 이 세계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는 사라지지 않았을 걸세. 사라지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았을 거야. 유다가 있건 없건 간에, 유대인은 믿는 자들의 눈앞에서 계속해서 배신자 역할을 맡았을 걸세. 기독교인들은 한 세대가 가고 다음 세대가 와도 언제나 우리를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에 '그를 죽여라, 그를 죽여라, 그의 피 값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외치던 군중으로 기억할 걸세. (p. 378~379)

새로운 것은 늘 현재나 과거의 것을 비판하고 넘어서고 밟고 올라서기 마련이다. 예술도 그랬듯이 정치도 그렇듯이 새로운 종교의 탄생도 어떤 식으로든 기존의 종교와 다른 점이 부각되어야 하기 마련이다. 그 가장 쉬운 방법은 '다름'을 '틀림'으로 각인 시키는 것이다.

주석154.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롯 사람 유다와 나누신 계시에 대한 비밀스러운 이야기'로 시작되는 <유다복음서>는 예수와 가롯 유다 사이에서 이루어진 대화 형식으로 기록된 영지주의(육체와 정신을 나누는 급진적인 이원론으로, 인간이 어떤 신비로운 지식을 통해 육체를 벗어남으로써 신과 같은 영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종파) 복음서 중 하나이다. 이 책은 '유다의 예수 배반' 이 사실은 예수가 인류 구원이라는 지상 과업을 완성하기 위해 유다와 미리 모의한 것으로 쓰고 있다. <유다복음서>는 180년대에 이레나이우스 주교가 <이단논박>을 통해 이단서라고 경고한 바 있다. 현재 4세기에 쓰인 콥트어 문서로 남아 있는데, 이 사본은 1976년 이집트의 한 골동품 시장에서 발견되었으며, 2006년 전미지리학회에 의해 일부 복원되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세계 주요 언어로 동시에 공개되었다. (p. 481)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역사적 사실들은 실제 역사이기도 하다. 소설처럼 읽히는 역사서라고 볼수도 있는데, 역사서라기 보다는 소설로 읽힌다는 점에서 작가의 역량이 무척 뛰어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등장인물도 많지 않고 커다란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 소소한 일상 속에 쌓여가는 내적 성장의 깊이가 남다른 작품이라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자 놀라움 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일면 충격적이기도 했다.

슈무엘은 텅 빈 거리 한가운데 자기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그는 어깨에서 군용 배낭을 내렸다. 그는 그것을 먼지 앉은 아스팔트 위에 놓았다. 그 군용 배낭 위에 외투와 지팡이와 모자도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리고 서서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p. 456)

무엇을 물었을까?

소설을 읽는 동안 역사를 좋아하는 취향에 맞아서인지 빠져들어 읽었었는데, 읽으면서 새로운 역사들을 많이 배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유다라는 배신자 캐릭터에 대한 기존의 입장이 바뀌기까지 했는데, 지금도 어딘가 외로이 목소리를 내고 있을 유다를 생각해보게 되기도 했는데, 이렇게 끝나버리다니. '자신에게 물었다' 라니. 당황했다가... 이내 웃음이 났다. 그 물음을 책을 읽는 동안 이미 나 스스로에게 계속 하지 않았나?!

범인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추리하는 영화를 보는데 결말에 가서 '누구냐 넌' 이라고 끝났다고 생각해보자. 화가 날까? 웃음이 날까? 아니면.. 허탈해질까? 웃음이 날거 같다면 이 소설은 만족스러울 것이다. 만약 화가 난대도 허탈해진대도 역사를 좋아하고 종교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의 매력에 한번 빠져볼 것을 권하고 싶다. 새로운 프레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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