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침입자들의 세계 - 나를 죽이는 바이러스와 우리를 지키는 면역의 과학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1
신의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를 죽이는 바이러스와 우리를 지키는 면역의 과학

'서가명강' 시리즈 책을 몇 권 읽어본적 있는데 만족스러운 시리즈였다. 그 자매브랜드로 '인생명강' 시리즈가 나왔다고 해서 일단 믿고 보는 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선택한 책이었다. 이 책은 인생명강 시리즈의 1권이다.

코로나19 가 이렇게 장기화될 줄 어느 누가 알았을까... 예상하지 못했던만큼 전염병과 면역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때보다 높아진 시대이기에 이 책이 주는 메세지는 더욱 깊은 울림을 줄 것 같다. 책을 시작하고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벌써부터 마음을 파고드는 문장을 만났다.

나를 지켜 너를 구하는 일, 내가 당신의 백신이 되어주는 일. 그것이 바로 면역의 의미다. (p. 9)

코로나사태 이후 거리감이 노골적으로 벌어질수록 개인화된 사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편견이었음을 책의 초반부터 깨닫는다. 저자가 말하는 '면역'은 함께사는 사회의 정의를 새롭게 하고 있었다. '나를 지켜 너를 구하는 일, 내가 당신의 백신이 되어주는 일. 그것이 바로 면역의 의미다' 캬~! 명언이다.

이 책에서는 크게 바이러스·백신·면역 이렇게 세 가지 키워드를 다룬다. 코로나19 시대에 가장 큰 문제로 주목받고 있는 바이러스란 무엇인지, 이런 바이러스에 대항해 인류가 개발한 가장 강력한 무기인 백신은 어떤 역사를 거쳐왔는지 되짚어봤다. 그리고 면역의 작동 원리를 바탕으로 다양한 생각거리 또한 제시했다. (p. 13)

그 어느때보다 제대로 된 '면역이야기'가 필요한 시점인 이때에 잘 나와준 책이다.

'신종'이라 분류하는 정확한 기준이 무엇일까? 어쩌면 그런 기준은 없는지도 모른다. 신종이라는 말 자체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학사 안에서 신종 바이러스를 구분하는 기점이 된 시기가 있다. 대략 1970년대 초반 이후로, 그때부터 발생한 바이러스들을 신종 바이러스 라고 부르게 되었다. (p. 53)

신종 바이러스가 최신의 바이러스가 아닌 의학사적으로 50여년전 부터의 바이러스를 지칭하게 된 것은 '과거의 의학은 과학과는 거리가 있었다.(p. 53)' 라는 저자의 말에서 시사되는 바가 컸다. 의학사의 기간은 오래되었으나 과학의 발달이 의학과 만난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코로나19 이전에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질병X'라고 하는 굉장히 강력한 신종 바이러스가 언젠가 출현할 것이라는 논의가 오고 가기는 했었다. 실제로 2018년 2월 세계보건기구가 향후 중요하게 다뤄야 할 질병으로 발표한 목록에 질병X가 포함되어 있었다. 미래의 일이니 이름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대 유행을 일으킬 바이러스 질병을 질병 X라고 지칭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미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코로나19는 첫 번째 질병X가 되었다. (p. 71)

질병X 라는 단어가 있었구나... 과학계에서 대두되자마자 거의 바로 코로나19가 터진 셈이니...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 라는 속담은 이번에도 역시나 들어맞은 것인지도... 인간의 오만과 자만이 쌓일 수록 예상되는 후폭풍이 분명 있었으나 무시한 인간에게 닥친 재난을 과연 누구탓을 하겠는가... 뿌린 만큼 거두는 법인 것을...

특이성과 기억 현상은 항체와 T세포가 작동하는 기본 원리다. 즉 몸속에서 일어나는 면역반응에는 크게 항체 반응과 T세포 반응이 있으며, 이를 작동시키는 기본 원리에는 특이성과 기억 현상이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을 유발하도록 우리가 인위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바로 백신이다. 항체와 T세포의 특이성과 기억 현상 덕분에 우리는 백신을 개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p. 99)

서가명강 시리즈가 그랬듯이 인생명강 시리즈도 엄선된 필진이 주는 신뢰감이 남다르다. 저자는 바이러스 및 면역반응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권위자이다. 나는 많이 아는 사람이 쉽게 쓰는 책을 참 좋아한다. 대중서이면서 어렵게 읽히는 책은 저자가 아무리 많이 알고있는 사람일지라도 결국은 저자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본문 여기저기 등장하는 전문적인 내용도 어렵지 않게 읽을만 했다. 그런점에서 이 시리즈는 앞으로도 무척 기대가 된다.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은 나의 환경이고, 나 또한 상대방의 환경이다. 그러므로 나의 면역은 타인의 면역과 연결된다. (p. 108)

쉽게 읽히는 점도 좋았지만 구성도 괜찮았다. 길지않은 챕터는 생소한 학문적 내용을 읽는데 지치지 않게 했고 새로운 장을 시작할때마다 등장하는 '명문장'은 울림이 컸으며 매글의 마지막 페이지에 저자가 남긴 '질문'도 의미있게 다가왔다. 책을 읽는 내내 '면역'이 나의 건강적 문제가 아니라 좀더 확대된 개념으로 이해해야 함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이미 백신이 개발된 상황에서 결과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백신을 개발하기 그리 어려운 바이러스였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전 세계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봉쇄나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초조하게 기다려온 백신이기 때문에 착시 현상이 있었던 것이다. 개발을 시작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효과가 90퍼센트 이상인 백신을 개발한 것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성공이다. (p. 121~122)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커진 불안감 때문에 백신에 대한 불안감도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하지만 저자는 백신의 사전 준비 정도와 결과를 전하면서 좀더 믿어줄 것을 당부한다. '백신 거부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다각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중략) 최근 한국에서 보여진 바와 같이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쓸데없이 백신에 대한 불안을 조장하는 것도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언론도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불필요한 사회적 소모가 일어나지 않도록 원칙에 입각한 사실 보도를 해야 할 것이다. (p. 131) 가장 중요한 것은 대중이 과학적·합리적 사고로 무장하는 것이다. 사회 전반에 과학을 바탕으로 한 의사결정의 풍토가 조성되어야 비로소 현명한 개인들이 서로의 안전한 환경이 되어주는 사회적 차원으로서의 백신이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p. 132)' 라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사회적 건강은 결국 사회적 구성원이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개개인들이 좀더 정확한 정보를 취득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카더라 에 휩쓸리지 말고 이런 책을 좀 읽었으면 좋겠다. 중요한 건 팩트 아니겠는가.

면역학은 면역세포들이 나와 남을 어떻게 구분하는지에 대해 상세히 알게 되면서 그 기초가 세워지게 되었다. 어쩌면 나와 남을 구분하는 데 익숙한 인간의 본성이 이런 면역학의 기초 성립에 일조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대 면역학이 조금 더 발전하면서 나와 남의 구분이라는 명제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점점 더 드러나게 되었다. (p. 158) 면역학 발전의 초기 단계에만 하더라도 면역반응에 관한 연구는 어떻게 나와 남을 구분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시간이 흘러 나와 남보다는 무해한 것과 유해한 것의 패러다임에 따라 면역 현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p. 170)

이 책을 읽으며 '면역'의 정의를 가장 새롭게 깨달은 부분은 위와 같은 저자의 관점이었다. 코로나19는 나와 남을 뚜렷하게 구분하고 각 나라의 국적을 더욱 강하게 구별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면역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해한가와 유해한가 이다. 내부인과 외부인이라는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한 사회에서의 이민자를 예로 들어 설명한 부분을 읽으며 그러한 구분이 얼마나 무용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면역학에는 필요 이상의 과다한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다. 인간이 앓고 있는 수많은 질병 중 면역학적인 원리나 기전과 상관없는 질병에까지 면역학적 해석의 틀을 갖다 대는 것이다.(p. 210)' 라는 저자의 설명에 새삼 나의 무지 또한 깨달을 수 있었다. '면역력'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허상인지;;; '면역과 건강은 결코 일차원적으로 연결 지을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p. 210)' 를 꼭 기억해두어야 겠다.

면역반응의 기본 원리에는 몸속 생리를 넘어 인류가 역사를 지속할 수 있는 삶의 기본 원리가 담겨 있다. (p. 227)

질병과 면역에 대한 과학책인줄 알았더니 인류가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삶의 기본 원리'까지 되새겨주는 책이었다. 과학책이다 인문학책이다 구분할 거 뭐 있겠는가, 그저 삶의 교훈을 준 것만으로 '가치 있다' 로 여기면 될 것이다. 이 책은 지금 이 시대에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좋은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버 드림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조혜진 옮김 / 창비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인사건 하나 없는데도 기묘하게 공포스럽고 스릴러적으로 읽히는 이 작품은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한 인과응보를 담고 있음을 가장 마지막에 가서 깨닫게 함으로써 강렬한 메세지를 남긴다. 독은 인간이 뿌린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버 드림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조혜진 옮김 / 창비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시대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가장 빛나는 별

사만타 슈웨브린의 대표작 국내 첫 출간

띠지에 훈장처럼 써있는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후보작 이라는 것도, 셜리잭슨상 수상작이라는 것도, 2021 넷플릭스에 오리지널 무비로 공개될 영화의 원작 소설이라는 것도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스르르 잊혀져 있다. 이 화려한 이력보다 훨씬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레이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이었다.

그리고요? 아주머니는 왜 아무 말도 없죠?

이 이야기에 매여 있으니까. 나는 이야기를 완벽하게 볼 수 있지만 때로는 진전시키기가 어려워. 간호사들이 놓는 주사 때문일까?

아니요.

하지만 난 몇 시간 뒤면 죽을 거야. (p. 14)

소설은 두 사람의 대화로 진행된다. '나' 아만다는 니나 라는 딸의 엄마 이고 지금 병상에 누워 있다. 그 옆에서 귀에 대고 속삭이며 말하고 있는 소년은 '다비드'라는 9살 이웃 소년이다. 나는 왜 죽어가고 있는가? 니나는 어디에 있는가? 다비드는 누구인가? 다비드가 말하는 '벌레'는 무엇인가?

나는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거든. 지금 당장은 니나가 느닷없이 수영장으로 달려가 뛰어든다면 내가 차에서 뛰쳐나가 그애한테 이르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계산하는 중이야. 나는 그걸 '구조 거리'라고 불러. 딸아이와 나를 갈라놓는 그 가변적인 거리를 그렇게 부르는 거지. (p. 27)

작가는 아르헨티나의 떠오르는 신예 작가이고, 이 소설의 원제는 스페인어로 'DISTANCIA DE RESCATE' 즉 '구조 거리' 다.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데 열이 펄펄 끓더라고요. 몸이 불덩어리엿어요, 아만다. 그때 우리 다비드의 눈앞에는 분명히 천국이 어른거리고 있었을 거예요. (p. 37)

영어판 제목이 '피버 드림'이었다고 한다. '열이 나는 꿈'

'피버 드림' 은 '구조 거리'보다 훨씬 은유적이다. 어쩌면 개인적 심리적 '구조 거리' 보다 사회적 공공적 '증상'을 표현함으로써 더 소설의 메세지를 잘 표현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구조 거리'라는 원제가 더 와닿았다. 구조할 수 있는 거리, 하지만 구조하지 못한 순간...

여하튼, 지금 병상에 누워 있는 아만다의 몸도 불덩어리다. 다비드는 세살때 그 일을 겪었다. 다비드와 아만다는 아만다가 이렇게 되기 직전의 상황을 세세하게 재구성한다. 한장면한장면 아주 섬세하게 기억해내려 애쓰지만 그어떤 구체적인 장면도 이 상황을 설명해주진 못한다. 소설적 은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는 독자의 몫이다.

이건 정상이 아니야, 다비드. 칠흑같은 어둠만 있고 너는 내 귀에 대고 소곤거리고 있잖니. 나는 이게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조차 모르겠어.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 맞아요. 아만다 아주머니. 저는 응급병동 병실에 있는 아주머니 침대 가장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있어요.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없어요. 그리고 시간이 다 되기 전에 정확한 순간을 찾아내야 돼요. (p. 46)

'정확한 순간' 이때는 다비드의 표현에 의하면, '벌레가 생기는 정확한 순간'을 말한다. 다비드는 이 '정확한 순간'을 찾기 위해 아만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을 들으며 아만다의 시간을 꼼꼼하게 되짚어가는 중이다. 이 순간을 찾아내는 것은 중요하다. 아만다에게도, 다비드에게도.

그 실은 존재하지만 느슨해서 우리에게 때때로 약간의 독립성을 허용해줘. 그런데 구조 거리가 정말 중요하니?

아주 중요해요. (p. 49)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어 있다고들 말한다. 아만다가 말하는 '구조 거리'도 비슷한 개념이 바탕이 되어 있다. 니나와 아만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실이 서로를 연결하고 있다. 니나에게 어떤 위험이 닥칠듯한 예감이 들때면 아만다의 몸에 그 실이 팽팽하게 죄어온다. 하지만 때론 그 팽팽함을 자각하지 못하여 '구조 거리'를 놓치고 만다. 아만다는 자신이 그랬을까봐 두렵다. 아만다의 딸 니나는 어디있는 걸까? 아만다는 왜 이렇게 된 걸까?

그 아이의 몸에 네 영혼이 일부 있니?

그건 우리 어머니가 하시는 얘기죠. 아주머니도, 저도 이럴 시간 없어요. 우리는 벌레를, 벌레와 아주 비슷한 것을, 그리고 벌레가 처음 아주머니 몸에 닿는 정확한 순간을 찾는 중이라고요. (p. 56)

다비드가 세살때 다비드의 엄마 카를라는 두려움에 떨며 녹색집으로 갔다. 제발 다비드가 죽지 않기를 바라며. 의사도 병원도 변변치 않은 시골동네에서 녹색집의 여자는 유일하게 민간처방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만다와 니나가 휴가차 내려온 시골마을엔 사실은 엄청난 비밀이 은밀하게 녹아있었다.

밖에서는 남자들이 드럼통을 내리고 있어. 드럼통이 커서 한 손으로 하나씩 잡고 옮기는 데 애를 먹고 있어. 엄청나게 많아. 트럭이 온통 드럼통 천지야.

바로 이거예요.

드럼통 하나가 헛간 입구에 따로 놓여 있어

이게 바로 중요한 일이에요

이게 중요한 일이라고?

네 (p. 84)

아만다는 다비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고 혼미해서 그런것 같기도 하고 다비드가 어린 소년이다 보니 정확한 정보의 한계가 있어서 그런것 같기도 하다.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시간속에서 아만다가 니나를 걱정할때마다 읽는 사람의 마음도 졸아들어간다. 스릴러적 사건이 없음에도 굉장히 스릴러적으로 읽히는 작품이다.

무슨 일이니? 나는 니나에게 물어.

축축해요. 니나가 살짝 화난 투로 말해. (p. 86)

이슬이야, 걷다보면 마를 거야

바로 이거예요. 이게 바로 그 순간이에요. (p. 87)

지금 그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무슨 일 말이니, 다비드? 하느님 맙소사,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니?

벌레요. (p. 88)

구조 거리... 아만다는 위험신호를 감지했었다. 카를라가 자신의 아들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나서 떠나려고 했었다. 휴가고 뭐고 평온했던 이동네가 갑자기 이상스레 느껴졌다. 그때 떠났어야 했다.

엄마, 손이 너무 따가워요. 니나가 제 손을 보여주더니 내 옆에 앉아. 그러고 날 안아.

나는 아이의 두 손을 잡고 한 손에 한번씩 입을 맞춰. 아이는 손바닥을 위로 뒤집어 내게 보여줘. 카를라는 과자를 한봉지 꺼내와서 니나의 손바닥 위에 한움큼 놓아.

이게 다 낫게 해줄 거야. 카를라가 말해. (p. 111)

마을사람들은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채 그냥 그러려니 살고 있었다. 이방인인 아만다 모녀가 휴가를 내려오기 전에도 분명 마을엔 이상한 일들이 있었는데...

그런 일은 그냥 일어나는 거예요, 아만다. 우리는 시골에 살고 밭에 둘러싸여 있으니까요. 누군가는 쓰러지고, 회복하더라도 이상이 생기는 일은 흔하죠. 당신도 그런 사람들을 길에서 보고요. 그런 사람들을 구별할 줄 알게 되면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놀랄 거예요. (p. 95)

그냥 일어나는 일... 이 그냥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음을... 시골에서 그냥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옮긴이의 말'을 읽으며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일을 깨닫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벚꽃이 만개 하고 화사한 햇살이 쏟아지는 봄날의 요즘, 어딘가에선 '침묵의 봄' 여전히 현재진행형 같아서...

'뿌린만큼 거둔다'는 말을 역설적으로 느끼게 한 작품, <피버 드림> 이었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화의 오리진 - 아리스토텔레스부터 DNA까지 다윈의 ‘위험한 생각’을 추적하다
존 그리빈.메리 그리빈 지음, 권루시안 옮김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리스토텔레스부터 DNA까지 다윈의 '위험한 생각'을 추적하다

'오리진'은 기원을 뜻한다. '00에 관한 오리진' 이라고 하면 어떤 '기원'을 추적한 내용을 예상하면 된다. '진화의 오리진'이라고 해서 인류진화에 대한 유구한 세월을 탐구한 책인줄 알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진화론' 자체의 생성과 발달에 대한 책이었다. 다시말하자면, '진화론'의 '기원'에 대한 책이다.

목적이 '진화론' 이라고 심플하게 정리되듯이 차례도 심플하다. 고대/중세/현대 이렇게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구분은 단어그대로의 시간을 의미한다고 보긴 힘들다. 고대/중세/현대 순서로 서술되긴 하지만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다윈의 진화론' 이 등장한 시대를 전후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라서 단어 자체의 시간적 개념보다는 진화론이 등장하기 전이 고대 이고 등장한 시기가 중세이고 인정된 이후의 시대가 현대 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듯 싶다.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기 이전 시기인 '고대'에서는 지질학적 배경이,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한 '중세'시기엔 진화 자체의 의미가, 다윈의 진화론이 널리 인정된 '현대' 시기엔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DNA연구가 주 내용을 이룬다. 무엇보다 '다윈의 진화론'에 얼킨 고정관념을 차근차근 확인하고 수정하며 보완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진화 이론에 관한 다윈의 위대한 책이 출간된 1859년 무렵, 진화는 널리 사실로 받아들여져 있었고 이미 수십년 전부터 과학자들이 본격적으로 논의해오고 있었다. 다윈의 특별한 공로는 진화의 매커니즘을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 매커니즘은 바로 자연선택이다. (p. 9) 1859년에 이르러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생각은 때가 무르익어 있었고, 다윈과 월리스가 생각해 내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가 오래지 않아 생각해 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월리스의 친구 헨리 베이츠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쩌다가 상황이 바뀐 걸까? 그리고 진화의 기원 이야기에서 왜 월리스가 아니라 다윈이 주인공이 되었을까? 이게 바로 이 책이 풀어나갈 이야기이다. (p. 10)

저자는 첫장부터 '다윈의 속설을 깨부수다' 라며 '진화론' 하면 '다윈' 하고 떠오르는 고정관념에 대해 돌멩이를 던진다. 역사에 길이남을 발명과 발견은 결과론적으로 기억되기 마련이지만 모든 발명과 발견엔 다 그 이전의 선배들의 노력과 실패와 확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저절로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알게되는 것은 없다. 이런저런 상황이 무르익게 되어 나온 발명과 발견은 다 나올만해서 나온 것이다. 다윈이 아니었더라도 그 시기의 누군가가 '진화론'이라는 이론을 정립할 수 있었을 거란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윈의 업적이 추락하는 것은 아니다. 상황이 아무리 무르익었어도 본인의 노력과 연구가 없었다면 새로운 이론을 생각해낼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이 책은 사실 진화 자체의 기원에 관한 책이 아니라 진화라는 관념의 기원에 관한 책인데, 그렇다고 제목을 그렇게 지으면 그다지 입에 착 붙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p. 12) 이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진화에 관해 생각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사람을 모두 설명하려 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중 주요 인물들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이 이야기가 다윈 이전과 이후에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보여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p. 13)

'진화론' 하면 '다윈' 이지만 저자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그리 많은 내용을 할애하지 않는다. 다윈 보다는 그 주변의 인물 혹은 그 이전 과 이후 의 인물들과 연구들을 통해 '다윈의 진화론'을 새롭게 인식할수 있도록 배경설명을 주로 한다. '다윈의 진화론'의 기원을 풀어낸 책이지만 '다윈의 진화론'은 나오지 않는다고나 할까.

엠페도클레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박을 시작으로 고대부터 있었던 진화론적 생각들은 아낙시만드로스 - 에피쿠로스 - 루크레티우스 등 에게서 그 기본개념들을 찾아볼 수 있고 이슬람 학자들에게서도 '자연 속에서 인류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또 살아 있는 종 간의 관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생각한 사람들(p. 25)' 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가 사회의 주요 사상이 되면서 '진화'에 대한 생각은 불경시 되었다. 그러다 '지질학'적 증거들로 인해 다시 서서히 새로운 생각들이 차근차근 토대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화석과 토층이라는 지질학적 증거들은 '진화'의 개념을 자연스럽고 논리적으로 이끌어내게 되었다. 그리고 다윈도 생물학자가 되기 전에 '지질학자'로 출발했었다.

로버트 훅, 칼 폰 린네, 존 레이, 샤를 보네, 모페르튀이, 디드로, 몬보도, 뷔퐁, 푸리에, 베누아 드 마예 등의 학자들의 연구 내용은 때론 사회적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무시를 당하기도 했지만 여하튼 이러한 연구들이 쌓여갔기에 다윈의 이론적 토대가 세워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다윈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 또한 당대의 진화론적 연구들에 동의하며 자신의 연구에서도 진화론적 결과를 도출해냈었다. 이 모든 '진화'적 사고방식의 바탕에는 '지구의 나이'에 관련된 연구들이 밑바탕이 되었다. '찰스 다윈은 라이엘의 지질학을 신봉하는 사람이었다.(p. 97)' 비글호의 탐험결과는(지진으로 인한 변화 및 바닷가에서 관찰한 융기의 증거들 등등) '젊은 지질학자' 다윈을 학계에 등장시켰다. 진화론은 한참후에 등장하게 된다.

라마르크, 퀴비에, 후커, 라이엘, 헉슬리 등 '다윈의 진화론'에 지분이 있는 쟁쟁한 학자들이 여럿이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월리스'다. 월리스와 다윈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각자 '자연선택'이라는 진화론적 새로운 개념을 생각해냈는데 다윈에 비해 가려져있는 '월리스'에 대해 저자는 자세하게 그의 활동을 풀어낸다. 다윈이 월리스 소식을 듣고 선수를 쳤다거나 월리스가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거나 등의 소문은 소문일뿐 진실과는 좀 달랐다. 둘은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했으며 솔직하게 소통했다. 다윈은 월리스를 지지하고 경제적으로 돕기위해 신경쓰기도 했고 월리스는 죽을때까지 다윈보다 더 적극적인 다윈주의자로 살았다.

'현대'로 구분된 3부의 내용은 앞선 내용들에 비해 맥락이 갑자기 뚝 끊기는 느낌인데 멘델의 유전법칙을 시작으로 DNA연구가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살펴본다. 여하튼, '진화라는 시간 척도에서 볼 때 유전자가 염색체 사이에서 재배치되는 일은 수시로 일어나며, 이로써 자연선택이 작용하기 위한 변이가 늘어나면서 진화를 일으키는 두 가지 새로운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둘 중 어느 것도 다윈과 월리스의 업적을 훼손하거나 신뢰도를 떨어뜨리지 않는다. 자연선택은 두 사람이 발견한 바로 그 방식으로 변이를 바탕으로 작동한다.(p. 299) 그러나 다윈도 월리스도 (또 19세기의 누구도) 자연선택의 바탕이 되는 변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고, 새로운 깨달음이 생겨난 것은 바로 이 부분이며 오늘날 최고로 인기 있는 연구 주제가 됐다.(p. 300)' 며 다윈의 진화론과 현재의 DNA연구를 연결지어볼 뿐이다.

우리의 관점으로 볼 때 여기서 받아들일 부분은 진화의 과학적 이해는 21세기의 20년대에 들어가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윈과 월리스는 자연선택의 역할을 정확하게 이해했지만, 복잡한 생물체들은 단백질의 표현 방식을 후성유전적으로 제어하는 유연성 덕분에 재난에 대처할 여지를 얻는 셈이다. (p. 311)

완전체적인 창조에서 '진화'라는 개념이 자리잡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탄생한 진화론은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저자의 말마따나 '진화 이야기는 막 시작됐을 뿐인 것 같다.(p. 312)' 왜냐하면 '진화'가 과학적 상식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진화'라는 개념을 인정하고 난 후의 진화이야기는 더더욱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화가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지기까지의 과정이 '진화의 오리진'이었다면 앞으로의 연구들이 진정한 '진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의 탐험 - 너머의 세계를 탐하다
앤드루 레이더 지음, 민청기 옮김 / 소소의책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알려진 것 너머의 세계로 떠난, 선을 넘은 사람들의 이야기!

끝없는 인간의 호기심과 열망이 만들어낸 놀랍고도 위대한 탐험의 역사!

인간은 진화의 최종산물이기 이전에 탐험의 종족이다. 인간은 지적생명체이기 이전에 떠돌이이고 방랑자이다. 영장류 중에서 아니 전 생명체 중에서 인간만큼 끊임없이 새로운 지역으로 떠나는 종족이 또 있을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보다 호기심이 앞서는 유일한 생명체가 아마도 인간이 아닐까 싶다. 그랬기에 아프리카대륙에서 태어난 호모사피엔스는 전 지구에 퍼져 살게 되었다. 탐험은 곧 생존본능이었다. 인간에게 있는 이 탐험에 대한 욕망이 지금의 인간을 있게 했다. 이 책은 그러한 '인간의 탐험'에 대한 책이다.

모든 탐험은 결국 미래에 대한 투자다. 인간이 우주 진출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대부분 미래 세대가 누리게 된다. 역사적으로 인간이 한계를 넘겠다고 마음먹을 때마다 항상 그랬다. 왜 지구 밖으로 탐험을 떠나야 하느냐고 묻는 것은 인류의 조상에게 왜 아프리카의 리프트 밸리를 떠나야 했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별달리 부족한 게 없는데도 왜 떠나야 하는 걸까? 그것은 언덕 너머에 새로운 먹을거리가 있을 수 있고,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해야만 얻을 수 있는 해답이 있기 때문이다. (p. 9) 이 책은 탐험이 어떻게 인류를 풍요롭게 만들었는지 살펴보는, 발견과 모험, 부와 정복, 편견과 관용의 이야기다. (p. 10)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선사시대 인류의 이동과 중세 대항해시대를 거쳐 지구의 오지탐험이 어떻게 우주탐험으로까지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인간의 대장정을 다룬다. 개인적으로 역사를 다룬 1부와 2부가 재미있었지만, 저자가 역점을 둔 것은 우주탐험에 대한 희망과 열망을 담은 3부와 4부인 듯 하다.

​​

인간의 탐험에 대한 역사를 다룬 책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이 책은 연대기적 서술이면서 아니기도 하다. 인간의 역사를 관통하는 탐험에 대해 모든 발견 모든 시간을 다룬다기 보다는 큰 획을 그은 몇 가지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탐험 역사에게 가장 놀라운 업적은 아마도 하와이와 이스터 섬, 뉴질랜드를 연결하는 '폴리네시아 삼각지대'에 정착한 일일 것이다.(p. 35)' 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언제부턴가 외딴섬이나 밀림지역에서 헐벗은 차림으로 살고 있는 수렵채집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점은 '야만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들이 이루어낸 탐험의 업적은 그야말로 엄청난 지혜와 기술이 뒷받침된것이었다. 나침반이나 총칼 없이는 어떤 탐험도 시작하지 못하는 우리네가 그들의 입장에서는 더 무지해 보일수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페니키아, 고대이집트, 고대그리스인들의 지리적 탐험은 상식으로 알려진 수준 이상의 엄청난 정보들을 그때 '이미'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대인이 얼마나 세계를 넓게 돌아다니고 알았는지 읽는 과정은 정말 무척이나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보통 '대항해 시대'라고 하면 유럽인이 배를 타고 해상 무역이 발달하지 않은 낙후된 세계로 들어가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런데 사실 유럽인이 갔던 곳에는 이미 잘 짜인 해상 무역망이 존재했으며, 유럽인의 모험도 실제로는 더 큰 대포로 무장한 채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을 정복하러 갔던 것이다. (p. 138)

고대 중국은 스스로를 로마 제국과 서로 지구반대편에서 세상의 균형을 맞추고 있는 나라고 생각했으며, 인구와 경제력 측면에서 로마와 거의 대등했다. (중략) 결국 멸망한 로마와 달리 중국의 고대 문명은 본질적으로 언어와 문화, 유산이 거의 온전히 유지된 채 왕조에서 왕조로 이어지며 발전을 거듭했다. (p. 145)

부유한 중곡과 대조적으로, 당시 유럽은 여전히 흑사병의 참화에서 회복중인 보잘것없는 변방이었고 전체 인구의 3분의1이 줄어든 상황이었다. 유럽은 끊임없이 서로 다투는 수백 개의 작고 호전적인 나라로 조각조각 나뉘어 있었다. (p. 157)

커다란 돛을 펼친 웅장한 범선이 유럽의 대항해시대를 이끈 것처럼 우리는 생각해왔지만 알고 나면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당시 인도의 교역망은 이미 세계적이었고 중국의 물자는 풍부했다. 서양인들은 건너건너오는 인도와 중국의 물품들을 보며 선망했고 인도와 중국을 찾아나섰지만 볼품없는 배들로 천신만고끝에 힘들게 찾아간 인도와 중국에서 서양인들이 내민 물품은 너무나 형편없고 보잘것 없어 무시당했다. 서양인들에게는 교역으로 내놓을만한 변변한 물품이 없었다. 그러니 인도와 중국이 가진 것들을 무력으로라도 빼앗아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대포와 학살과 정복이었다. 평화로운 교역은 시작부터 불가능했다. 말이좋아 대항해시대 이지 결국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약탈전의 시작이었다. 이는 십자군전쟁때와도 다르지 않았다. 그중에서 가장 포악한 약탈자가 콜럼버스 였다.

콜럼버스를 후원하기 위해 왕궁이 보석을 팔았다는 유명한 일화와는 달리, 두 국왕이 한 일은 팔로스 데라 프론테라는 작은 항구에 명령을 내린 것이 전부였다. 항구 마을의 빚을 탕감해주는 대신 콜럼버스에게 선박과 선원을 제공하게 했던 것이다. 팔로스에서 콜롬버스에게 제공한 세 척의 배는 과연 바다를 항해할 수 있을지 의심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p. 194)

콜럼버스는 이때 다시한번 카리브해의 신기한 물건을 들고 스페인 왕궁에 갔지만, 이번에는 반응이 훨씬 더 냉랭했다. 몇년 동안 찾아다녔는데도 아직 그곳이 아시아라는 근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p. 200) 한편 행정가로서 콜럼버스의 무능은 점점 더 심해졌다. (중략) 특사는 콜럼버스가 식민지를 통치하기 위해 고문과 폭력을 사용하고 엄청난 숫자의 원주민을 노예로 만들었다고 보고했다. (중략) 콜롬버스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발견한 땅이 아시아 대륙이라고 믿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그가 발견한 신대륙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p. 201) 노예제는 콜럼버스가 처음 만들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유산의 일부였다. (p. 202)

한때 콜럼버스가 위인전에 빠지지않고 등장하며 대항해시대의 대표적 위인으로 추앙받았었다. 하지만 최근 역사에서는 그에대한 재평가가 진행중인 듯 하다. 다른 역사서에서도 콜럼버스의 항해와 탐험은 여러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당하고 있는것을 읽은적이 있는데, 이 책에서 또한 콜럼버스의 탐욕과 무능을 읽으며 그때 그장소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이 콜럼버스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헛된 생각을 해보게된다. 여하튼, 이 문제많은 대항해시대는 유럽을 일으켜세우고 다른대륙을 짓누르며 세계를 하나로 묶어가게 된다.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은 이제 극지방을 제외하곤 거의 없다시피했다.

유럽이 중국과 다른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지리적 여건도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중국의 영토는 같은 방향으로 두 개의 거대한 강이 흐르는 광활한 평원인 반면, 유럽은 해안선이 엄청나게 길고 수많은 만과 포구, 해협이 있는 들쭉날쭉한 반도다. 유럽의 강은 사방으로 흐르면서 40여 개의 지역해와 만난다. 유럽의 수로와 산맥, 삼림은 대륙을 자연스럽게 여러 지역으로 나누며, 그로 인해 무역이 일어나기 좋은 환경이 형성된다. 중국은 하나로 통일된 대제국이었지만 유럽은 서로 끊임없이 충돌하는 작은 국가들의 집합이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치열한 경쟁이 계속되었고, 그러한 경쟁이 기술이나 경제 발전을 촉진했다. 수많은 발명품이 중국에서 나왔지만 유럽의 각국은 남보다 앞서나가기 위해 그 발명품들을 더욱 완벽하게 다듬었다. 중국은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었던 탓에 혁신에 따른 보상이 없었지으므로 수백년간 정체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유럽에서는 우위를 점하기 위해 저마다 끝없이 노력해야 했다. (p. 226)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를 읽으며 지리적 환경의 중요성을 정말 깊이깊이 깨달았었다. 유럽과 중국의 발전사에 대한 대비점또한 '지리'의 효과는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만들어냈다. 사방이 뚫렸으나 지중해라는 닫힌 바다안에서 유럽은 작은 도시국가들의 각축전이 끊임없이 벌어졌고 이러한 경험들이 쌓여 결국 다양한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한쪽은 거대한 중국 한쪽은 거대한 태평양이라는 환경이 전부였던 한반도는 그런 자극들에서 수천년간 비껴나있었기에 다른 역사를 만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은 역사의 우열을 가리지 말고 자연스런 흐름에서 이해해야 할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탐험은 이제 단순히 세상을 발견하는 것만으로 부족했다. 세상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것이 탐험의 의미가 된 것이다. (p. 251)

인간은 극지방에 깃발을 꽂았고 하늘을 비행하며 온 지구를 날아다니게 되었다. 이제 인간이 가지못한 곳은 '우주' 뿐이었기에 우주탐험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현재적인 가치생산이 없는 우주탐험은 아무나 쉽게 할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기에 시작이후부터 내내 다양한 한계에 부딪혀오고 있는 중이다.

NASA는 예산이 80퍼센트가 깎이는 바람에 어려운 선택을 해야만 했다. 원래 계획은 달에 영구적인 기지를 건설하고, 지구 궤도는 도는 우주정거장을 건설하고, 우주선으로 소행성과 금성을 근접 통과하고, 재사용이 가능한 우주선을 제작하고, 화성을 탐사하는 등의 임무를 계속진행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까지는 모든 계획이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1990년 이전에 탐사선을 화성에 착륙시키려는 계획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예산이 삭감될 위기에 처한 NASA는 여러 계획 중에서 하나에만 집중하기로 했는데, 결국 재사용이 가능한 우주선 사업이 선택되었다. (중략) 전 세계적으로 우주개발의 목표는 국제우주정거장에 국한되었다. 그것이 최선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주의 다른 천체를 탐험하는 임무는 무인 우주선이나 미래 세대의 탐험가들에게도 넘어갔다. (p. 298)

'탐험의 역사'를 술술 설명하는 것을 보며 저자가 역사학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수도 있지만, 사실 저자는 항공우주 엔지니어로 미국의 민간 우주개발 업체인 스페이스X의 총괄 관리자다. 저자의 전문분야는 역사가 아니라 우주라는 얘기다. 따라서 과거의 '탐험'이야기들은 어찌보면 인간의 탐험에 대한 욕망을 설명해내는 과정이고 궁극적으로 이 욕망을 펼쳐내고 싶은 분야는 '우주탐험'이라고 볼수 있다. 우주탐험의 시대가 열리는 순간 저자의 전문적인 식견들이 마구 쏟아진다.

오늘날 우리 앞에 놓인 위험은 과거보다 크지 않으면서도 결코 적지 않은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인류의 영역을 넓히고 같은 목적으로 인류를 통합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영역을 밖으로 넓히는 것이다. 과연 인류는 이런 사명을 외면하고 탐험을 포기하게 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중에는 언제나 방랑자들이 있을 것이다. (p. 394)

'탐험의 역사에서 인류가 배운 것이 있다면, 지금까지 아무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을 하려고 노력할 때 놀라운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지금까지도 아프리카의 리프트 밸리에 갇혀 있는, 흥미롭긴 하지만 대수롭지 않은 생물종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굳은 의지로 불가능에 도전해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고 후손을 낳은 탐험가들의 후예다. 우리에게는 정말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중요한 것은 하고자 하는 의지다.p. 397)' 라며 저자는 우주탐험에 대한 인류의 의지를 북돋우려 애쓰고 있다. 대중의 우주탐험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정치적 필요성도 줄어들면서 우주탐험은 그야말로 '예산'이라는 현실적 장벽에 가로막혀 있기에 저자의 부추김은 때론 안타깝기까지 하다. 저자의 이 절절한 우주탐험 필요성을 읽으며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가 생각났다. 수십년전의 칼 세이건도 '예산'장벽에 대해 절절한 안타까움을 토로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수한 우주에 대한 열망이 참 아름답게 다가왔었더랬다. 그때의 순수함과 지금의 필요성이 합쳐져 '우주탐험'의 시대가 제대로 열리길 진심으로 응원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