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는 어떻게 인류를 변화시켰을까? 혁명 시리즈
칼렙 에버레트 지음, 김수진 옮김 / 동아엠앤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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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인간의 발명품이다.

숫자는 인류의 이야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간의 정신을 담고 있다.

<숫자는 어떻게 인류를 변화시켰을까?>라는 제목을 보면서 내가 관심이 갔던 부분은 '어떻게' 였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저자가 알려주는 포인트는 '어떻게' 라는 설명이라기보다는 '변화시켰다' 라는 주장이었다. 그런 점에서 'Numbers and the Making of us' 라는 원제를 오랫동안 쳐다보게 됐다. '숫자 그리고 우리의 형성'이라는 원제는 인류의 진화에 있어서 '숫자'와의 '관계'에 대한 저자의 관심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먼저 말하자면, '숫자는 인류를 변화시켰다' 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인류 문화의 역사 전체에서 대부분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숫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수량을 언어와 상징적 기호로 표현하는 숫자가 등장하면서 인간의 조건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 책에서 나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일어난 그러한 변화가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돌아보고자 한다. (p. 17)

저자는 언어학적 기반을 바탕으로 인류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수이다. 따라서 숫자에 대해서도 언어적으로 인류학적으로 접근한다. 저자에 의하면 '숫자라는 인지적 도구는 언어적 도구에 포함된 하위 도구 이다.' (p. 29 참고) 그리고 인류의 수에 대한 타고난 감각에는 한계가 있지만 '선천적인 한계는 숫자라는 도구를 통해서만 뛰어넘을 수 있다. (p. 32)' 저자는 숫자가 인류에 끼친 영향에 대해 언뜻 당연하게 보이는 이 두가지를 학문적으로 심층 분석하고 증명한다.

전 세계의 주요한 숫자 표기법은 공통점을 보인다. 즉, 어떤 방식으로든 모두 10배수, 또는 5배수를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해부학적 동기는 명확하다. 우리 신체에서 규칙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수량은 숫자를 만드는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사실은 3장에서 살표보는 바와 같이 구어 숫자는 물론, 표기 숫자의 기초가 된다. 우리의 손가락과 발가락은 이처럼 최소한 수천 년 동안 숫자를 구조화하는데 광범위한 역할을 하였다. (p. 66) 특히 손가락과 손이 유용했다. (중략) 문자 탄생의 서광이 비치던 시기에 등장한 숫자는 표기문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p. 67)

문자가 먼저였을지 수량표기 기호가 먼저 였을지 명확하게 확인할 순 없지만 일정한 규칙으로 막대기를 그어 표시하고 손가락을 표기하는 것은 구석기유적에서부터 이미 발견된다. 인류가 수에 대한 개념을 이미 갖고 있었지만 표시하는 방법을 나중에 문자로 만들어낸 것일까? 라는 생각에 대해 저자는 인류고고학적 분석을 통해 '세계 언어의 숫자단어에서 보이는 손가락 중심의 특징만으로도 숫자가 원래 존재하던 개념이고 여기에 이름이 붙여진 것일 뿐이라는 믿음을 다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p. 86)' 라고 말하며 수의 개념은 타고나는 것보다는 인류가 발전시킨 발명에 가깝다는 주장을 증명해보인다. 이렇게 동물과 구분되는 인류만의 확장된 수의 개념을 발전시킨 주요 원인으로 숫자라는 표시방법의 발명을 꼽는다.

세계 언어의 문법은 1, 2, 3을 정확히 구별하며, 그밖에 수량은 대략 표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아래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경향이 등장한 배경으로는 신경생물학적 근거를 생각해볼 수 있다. (p. 106) 언어의 문법은 수를 강조하며, 더 큰 막연한 수량에서 작고 정확한 수량을 구별하는 데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문법벅 수는 우리 뇌 구조의 기능적 측면을 반영한다. 즉, 우리의 뇌가 본래 타고난 기능은 더 작은 수량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p. 123) 강력한 수체계를 통해 기대할 수 있는 잠재적인 이점에 관하여 나는 우선 그러한 체계의 채택을 문화 또는 언어의 '진화'와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어야겠다. (p. 244)

저자는 언어의 분석과 다양한 실험분석을 통해 숫자라는 개념과 인류의 수개념에 대한 차분한 증명을 전개한다. 때로는 설명으로 때로는 반례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전개해나가는 것을 읽으며 이 책은 굉장히 과학적 방식으로 서술되었구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일종의 대중적 논문같달까... 여하튼, '수 개념은 문화와 언어의 전승을 통해 습득 또는 학습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만일 수 개념이 유전적인 것이 아니라는 가설이 사실이라면, 기초적인 수리 개념은 인간의 두뇌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정신활동의 소산이 된다. (p. 139)' 라는 문장은 이 책의 핵심내용으로 보이는데 이 주장을 위해 저자는 아마존 부족의 예시를 두루 활용한다. 아마존 부족의 예시를 설명하며 저자가 보인 태도가 바람직해 인상적이었다. '그들 문화의 기록되지 않은 역사 속 어딘가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분명 이들에게도 숫자라는 놀라운 인지적 도구의 차용으로 누릴 수 있는 이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은 숫자의 도움 없이도 오랜 세월을 거치며 성공적으로 생존하고, 주변의 생태계에 탁월하게 적응해왔다. (p. 155)' 즉, 저자는 과거의 기록이 완전하지 않기에(사라진 기록들이 오히려 더 많을 수 있다) 남아있는 기록만으로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것을 조심하며 따라서 숫자를 사용하지 않는 아마존 부족이 있다고 해서 그 부족이 미개하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원시부족 연구에 있어 그들을 미개하다고 보는 관점과 그들만의 문화적 필연성을 존중하는 관점은 분명 다른 연구결과를 도출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논의가 적어도 인류의 역사와 우리의 현재 삶 속에서 숫자의 의미와 역할을 살펴보고자 했던 더 큰 목표는 어느정도 부합하였을 것이다. (중략) 숫자는 인간의 수리적 사고의 정밀성을 한 차원 높여준다. 이러한 발전은 자연스러운 뇌의 발달로 인한 산물이 아니다. 셈법을 비롯한 기타 관련 기술을 이어온 특정한 문화에서 발전한 결과물이다. 이러한 전통과 기술은 궁극적으로 숫자단어에 의존한다. (p. 181) 숫자는 인류의 이야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간의 정신을 담고 있다. 숫자는 수량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변화시켰다. 그러나 숫자는 단지 우리의 인지능력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의 경험을 형성해왔다. (p. 231)

저자는 주로 과거의 유적과 유물과 원시부족과 동물을 통해 숫자의 형성이 인류의 진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진지 기원적 설명을 하지만 우리가 알수 없는 멀고먼 과거뿐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말한다. 수체계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숫자의 영향은 어디서 느낄 수 있을까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다.

최근 학자들은 위계적 정부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주요 위계적 종교의 발전은 그러한 장소에 사람들이 모여든 결과 발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이것은 복잡한 수 체계의 혁신으로 농업기술이 발달하고, 궁극적으로 우주에서 인간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관점, 즉 지구의 기원과 지구에 사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이어졌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수 체계의 발전이 신의 개념을 창조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러한 발전이 신의 존재를 깨닫는 계기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추측은 더 큰 규모의 인구집단에서 새로운 유신론적인 종교 전통이 인과적으로 발생하였다는 주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더 큰 인구집단에서 유신론이 형성되는 이유는 무엇일까?(p. 268)

수개념이 인류의 지적 성장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에서부터 타고난 어림수 개념과 숫자라는 도구를 사용했을 때의 차이점을 비롯해 언어적 인류학적 수개념에 대한 비교등 흥미로운 분석들이 많았지만 이러한 수체계의 발전이 종교까지 연결될줄은 몰랐다. 저자는 '신과 사제 계급으로 조직된 종교적 믿음은 큰 집단을 이뤄 모인 사람들이 도덕과 이타심을 통해 서로 협력하는 데 필요한 매개체였다. 농경의 중심지와 이와 관련한 도시화의 도래 이후 문화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부족과 같은 더 작은 크기의 집단에서보다 비친족을 포함한 많은 구성원은 공유하는 신뢰에 의존해야 했다. 이와 달리, 소규모 부족 집단에 속하며 수렵채집으로 생계를 잇는 사람들은 친족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사이에서는 조직적인 노력 없이도 신뢰와 협력을 위한 자연스러운 동기를 형성할 수 있었다. (p. 268)' 라며 '상징성'에 주목한다. 이러한 관점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책을 생각나게 하기도 했는데, 소규모 집단에서의 직관으로 해결되던 것들이 대규모 집단에서는 실체 없는 다양한 '상징'적 매개체들이 필요하다는 개연성을 새삼 돌이켜보게 했다. 숫자라는 기호는 사실 실체가 없다. 볼수없고 만질수 없는 그런 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수량의 상징적 통합인 숫자가 인간의 발명품이라는 주장을 펼쳐왔다. 수량은 자연에 존재하며, 매미의 재생산 주기, 거미의 다리수, 음력주기처럼 규칙적으로 관찰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규칙적인 수량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숫자는 인간이 창조하기 전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 주장은 영아들과 숫자가 없는 문화에 속한 사람들, 그리고 우리와 유전적으로 가까운 종의 동물들을 대상으로 한 최근 실험 결과로 뒷받침된다. 우리가 살펴보았뜻이, 이 모든 증거는 명확한 결론으로 수렴된다. 우리는 대부분의 수량을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 것은 아니지만, 수량을 어림짐작할 수 있고, 작은 수량은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으로는 자연에서 발견되는 일정한 수량이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수량을 수적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들이 모든 수량을 정밀한 방법으로 일관되게 평가할 수 있게 된 것은 숫자, 즉 특정 수량을 표현할 수 있는 혁신적인 기호의 발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p. 276)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다양한 예시로 검증하며 결론을 도출해내는 과정을 읽다보면 흡사 어떤 보고서를 읽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매 장마다 질문으로 시작해서 결론으로 마무리되는 방식은 읽으면서 설득되는 가장 명확한 서술방식이지만 묘하게 불분명하게 다가오는 본문들은 아마도 숫자가 이미너무 익숙한 것이라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새삼스럽게 증명하는 과정은 일면 쓸데없어보이는 작업일수도 있다. 하지만 몸집을 불려가던 숫자의 단위가 이제 디지털 세계에서 소수점아래로 쪼개져가는 시대로 변화된 것을 보면서 우리의 수체계는 아직도 변화무쌍한 무언가를 품고있기에 그 기원적 발상에서부터 다시 차근차근 생각해보는 작업은 분명 의미있는 작업일 것도 같았다. 숫자는 인류를 변화시켰다. 그러나 숫자가 인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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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시간 - 바다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순간들, 바다가 결정지을 우리의 미래
자크 아탈리 지음, 전경훈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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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순간들,

바다가 결정지을 우리의 미래

Histoires de la Mer 라는 프랑스어 원제를 번역시켜보니 '바다의 이야기' 라고 나온다. 이 책은 바다를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긴 하다. 하지만 그저 이야기라기 보다는 바다를 중심에 놓고 풀어내는 역사서이자 바다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현실분석서이자 미래를 준비하는데 필요한 바다의 역할을 알려주는 제안서 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들이 바다가 묵묵이 보내온 '바다의 시간'들이기도 하다.

태초에 바다가 있었다.

저자는 130억년 전부터의 바다의 기원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 바다의 역사가 먼저 있었다. 바다에서 생명의 출발이 있었고 바다에서 역사적 전환점들이 있어왔다. 땅위에 사는 우리네 인간은 인간의 모든 문명이 땅에서 이루어졌다고 여기기 쉽지만 저자는 아니라고 바다에서 시작되었고 바다에서 변혁되었다고 풀어낸다. 우리는 땅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우리는 바다위에서 살아왔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산 사람, 죽은 사람, 그리고 바다로 다니는 사람" - 아리스토텔레스- (p. 43)

기원전 9500년에 이르러 지구의 그 어떤 곳보다도 먼저 중동 지역에서 거대한 혁명이 일어났다. 그곳 사람들이 처음으로 이동생활을 접은 것이다. 이들은 오늘날 사람들이보통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어떤 한 바다 가까이에 정착했다. 이들은 우선 요르단 계곡에 자리를 잡고(오늘날의 사해 가장자리에) 예리코를 건설했다. 이것이 인류 역사 최최의 도시이며, 이 최초의 도시는 항구도시였다. (중략) 이렇게 볼 때 정착생활과 농경이 발전한 것은 모두 바다를 통해서였다. (p. 49)

'바다의 민족들'에게는 메소포타미아인이나 이집트인과 달리 바다를 통제하는 제해권이야말로 생존의 문제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기 땅에서 생활에 필수적인 물품들을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다른 민족들은 삶에 잉여적인 물품들만 수입했다. (p. 55)

아리스토텔레스가 저런 말을 했던가? 하긴 고대의 역사를 보면 누군지 모를 침략자들은 다 바다에서 왔다. 미케네 문명에도 크레타 문명에도 이집트 문명에도 바다사람들은 위협적이었고 문명을 종식시킬만큼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었다. 땅에는 흔적이 남을지라도 바다에는 흔적이 남을수 없어서인지 바다사람들의 역사는 사실상 추적해 올라가기가 불가능에 가깝기에 더 궁금하고 신비롭게 느껴진다. 익숙한 문명지라고 생각했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을 바다중심적으로 보는 것은 의외로 그럴법하고 신선한 관점의 전환이었다. 이런저런 역사서를 읽으며 유목민족에 대한 궁금증이 늘어나곤 했었는데 바다민족들까지 합해지고 나니 문명의 발생과 발달은 늘 결핍과 이동에 의해 이루어졌음이 새삼 진하게 다가왔다. 역사가 정착지 중심으로 발생하고 발달하기 이전에 그 기원을 따져보는 것은 분명 의미있어 보였다. 저자는 말한다. '로마제국은 바다에서 흥했고, 바다에서 망했다. (p. 81)' 라고. 로마제국 관련 역사서를 읽다보면 지도를 펼쳐놓고 이도시 저도시 짚어가며 땅과 도시들을 살펴보게 되는데 바다에서 흥하고 망했다니 흥미롭지 않은가. ㅎㅎ

18세기 말 갑자기 모든 것이 변했다. 한때 개척자들의 것이 되었던 바다는 이제 다시 닫혀버리고 말았다. 새로운 에너지원(석탄과 석유)과 새로운 추진 방식(외차와 스크루)을 사용하는 선박들이 기존의 운송 방식을 전복하고, 산업화, 경쟁, 분업을 촉진했으며, 사람과 사상, 공산품과 원재료와 농산물의 대규모 이동을 이끌었다. 이제 바다는 이미 여러 세기 이전부터 그러했듯이 점점 더 무거워지고, 점점 더 확산되며, 점점 더 위협적으로 변하는 인간의 존재를 감내하게 되었다. 세계 경제가 도약했다. (p. 125)

역사가 현재로 가까이 올수록 전쟁은 많아지고 다양해졌다. 그 전쟁들을 저자는 익숙한듯 새롭게 그리고 간략하게 풀어낸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모든 것은 바다에서 결정되었다. (p. 147)' 라고 정리한다. 따지고보면 틀린말은 아니다. 십자군전쟁도 미국독립전쟁도 세계대전도 모두 그 치열한 육지전 뒤에 깔린 바다의 역할들이 있었다. 그동안 눈여겨 보지 않았던 바다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저자의 논리는 쉽게 읽히면서도 고개 끄덕이게 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리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시대인 현재에도 여전히 바다는 중요한 운송로이자 패권쟁탈지 였다.

결국 역사상 처음으로, 경제와 군사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경제적으로 바다를 지배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결과적으로 세계 지정학에 중장기적 변화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p. 178)

또한 어제와 오늘의 독재국가들이 해양 강대국이 되기를 주저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설사 그들에게 기회가 없었다 해도 그러하다. 독재국가들은 바다에서 잃게 될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p. 208)

로마제국이 지중해를 주름잡고 대영제국이 대서양과 인도양에서 활개치고 미국이 태평양을 손아귀에 넣었던 시절엔 세계 패권국이 곧 바다의 지배자였다. 하지만 현대시대는 그렇지 않다. 다양한 이권 다툼 속에 각자 다른 권력을 가진 나라들이 속속 올라서고 있다. 그중엔 한국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해양강대국과 민주국가의 연결성은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그리고 저자의 삶의 터전인 프랑스가 바다와의 관계가 적었기에 한계가 있었다는 역사에 대한 설명도 흥미로운 분석이었다.

중국,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인도넨시아, 싱가포르, 베트남, 한국, 일본이 이러한 변화의 승리자가 될 것이다. 적어도 이들 나라의 해안 지역은 그러할 것이다. (중략) 의심할 바 없이 모든 바다에서, 모든 공간에서 다른 모든 나라를 능가하고 경제적인 초강대국으로 떠오를 나라는 한동안 없을 것이다. (p. 226)

저자는 유럽대륙의 특히 독일과 프랑스의 대륙지향성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당분간 바다의 패권국은 과거처럼 하나의 국가가 되진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야말로 당분간이다. 중국의 급부상은 그 당분간의 미래가 얼마나 가까울지멀지 결정할 가장 큰 요인이 될 것임을 저자는 빠트리지 않는다. 그밖에도 다양한 바다 관련 변화요인들을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바다의 지정학적 미래를 조금은 예측할 수 있는 조언도 덧붙인다. 무엇보다도 바다의 미래를 위해 인류가 알아야 하고 노력해야 할 것들을 설명하는 부분(이 책의 결론이라고 할만한 책의 뒷 내용들)을 읽다보면 저자의 걱정을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한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기나긴 역사를 차근차근 풀어내면서 결국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 한 문장이다.

바다를 보호해야 한다. 행동해야 한다. 가능한 모든 층위에서. (p. 283)

저자는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바다를 다르게 보고, 바다를 더 잘 알고 싶은 생각이 들기를 바란다. 이제는 소비자의 태도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엥게 이끌리는 협력자의 태도로 바다를 대해야 한다. 여전히 지각없는 약탈자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미래를 향해 배를 몰고 가는 뱃사공의 자세로 바다를 존중하고, 바다에 경탄해야겠다. (p. 301)' 라고 책을 마무리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바다가 하는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우리는 그동안 너무 간과해오지 않았나 싶다. 단순히 환경보호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배를 몰고 가는 뱃사공'의 시선으로 바다에 대해 좀더 숙고해 볼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거엔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해 왔다. 하지만 이제 바다를 지배하는 약탈자가 아닌 다른 역할을 세계가 나누어 가져야 할 때이다. 우리에게 바다는 어떤 곳인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면 저자의 통찰을 참고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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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식물책
윤주복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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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도록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1,164종 식물 정보를 알기 쉽게 담았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동물을 참 좋아한다. 그에 비해 식물은 그냥저냥... 동물원에 가면 움직임도 관찰하고 먹이도 주며 활동하는 재미가 있지만 식물원은 걷고 구경하고 여기저기서 사진찍자는 부모들의 요구에 지쳐서 더욱 아이들에겐 식물보다는 동물이 더 호감이 가는 대상일 것이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어른이 되서도 초반엔 하다못해 티비다큐를 보더라도 동물생태계의 에너지에 더 관심이 가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식물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꽃도 좋고 나무도 좋고 알면알수록 식물이 더 신비롭게 느껴졌다. 계절이 바뀔때마다 꽃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보면서 새삼 나이가 들었구나 싶기도 했다. 아 그래서 어르신들이 계절마다 그렇게 산으로 들로 꽃구경이니 단풍구경이니 다니셨던건가 싶기도 하고 ㅎㅎㅎ. 여하튼, 식물이 좋아지니 식물책도 찾아보게 되었다.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로 호칭의 변경이 다 변경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일때 반려식물이라는 단어도 등장했다. 애완식물이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반려' 라는 의미가 널리 확산되면서 그 대상도 넓어진것 같다. 반려식물과 함께 살기엔 내손에 죽어나간 화분이 하도 여러개라 집안에 무언가를 들이기보다는 밖에 나가서 구경하는게 훨씬 마음이 편하다. 그런데 마음먹고 이런저런 구경을 하다보니 의외로 동네길이며 뒷산에 다양한 식물이 살고 있었다. 그 식물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떤 특징을 지녔는지 알고 싶지만 의외로 식물관련 책들은 특별한 식물들을 주로 다룬 것들이 많았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식물들에 대해 짧고 굵지만 다양하게 알려주는 책, 그런 책이 필요했는데 <쉬운 식물책> 이 딱 그런 책이었다.

이 책은 식물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누구나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관상수, 가로수, 산나무, 야생초, 화초, 고사리식물, 곡식, 채소 등을 모두 찾아볼 수 있도록 만든 책으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1,164종의 식물을 골라 실었습니다. (중략) 사진도 같이 실어서 찾기 쉽게 구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식물을 설명하는 글은 초보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쉬운 낱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책머리에 中-

이 책은 구성이 정말 알차고 깔끔하다. 책을 시작하기 전에 [쉬운 식물책 사용 설명서] 라고 해서 이 책을 사용하는 팁을 알려주고, 세세하게 본 내용을 들어가기에 앞서 [식물의 이해] 라는 정리를 통해 기초 지식을 간략하지만 탄탄하게 잡아준다. 책의 뒤쪽에는 [용어해설] 과 [식물 이름 찾아보기] 가 꼼꼼하게 덧붙여져 있어서 그야말로 '쉬운식물도감' 이라 부를만 하다. 무엇보다 풍부한 사진자료가 정말 보기 좋았다.

차례도 심플하다.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식물들은 대부분 꽃으로 눈에 띄기 마련이고 꽃은 대부분 봄과 여름에 핀다. 따라서 차례는 봄과 여름에 피는 풀꽃과 나무꽃 그리고 화초와 논밭작물 및 그외식물들로 구분되어 있다. 사진과 식물이름들만 대충 훑어보아도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굉장히 다양한 식물들이 빼곡하게 페이지를 채우고 있다. 이 책속에 등장하는 식물이름을 다 외울수야 없겠지만 책장에 비치해두면 두고두고 찾아보며 든든할 것 같다.

정보를 담은 책은 아무래도 최신정보를 담았느냐가 중요하기 마련인데 그런 면에서도 이 책은 훌륭하다. 식물의 분류에서 외떡잎 식물과 쌍떡잎 식물의 분류는 학교다닐때 익숙했던 분류이다. 그런데 최근 DNA 검사를 통해 원시적 형질을 가진 식물들을 따로 분류할 필요가 생겨서 '기초속씨식물군과' 과 '목련군'으로 일부가 분리되었다고 한다. 처음 읽는 내용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익숙한듯 새로운 식물들이 새록새록 눈에 들어오고 꽃과 열매를 함께 볼 수 있기까지 하니 무엇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책이었다.

처음 읽을 때는 식물 하나하나 숨가쁘게 읽기 바빴지만 앞으로 여러번 찬찬히 읽고 또 읽고 싶은 책이다. 꽃이 한창이고 나뭇잎이 한창이고 열매가 한창인 계절에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이 책에 자꾸 손이 가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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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계단 스토리콜렉터 93
딘 쿤츠 지음, 유소영 옮김 / 북로드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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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딘 쿤츠 였다. 제인 호크 시리즈로서 완벽한 세번째 책이었다. 앞선 두권과 전혀 다른 서사를 선사한다. 다음권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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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계단 스토리콜렉터 93
딘 쿤츠 지음, 유소영 옮김 / 북로드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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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여성 FBI 요원에서 일급 수배자가 된 제인 호크,

인류의 뇌를 통제하려는 소시오패스 집단에 맞서 사투를 벌이다.

"잡히지 마라, 주사를 맞으면 죽음보다 더한 짓을 당할지도..."

딘 쿤츠 라는 거장을 뒤늦게나마 알게해주었던 책 <사일런트 코너>를 읽은지 벌써 2년이 지났다니 참... 새삼스럽다. ㅎㅎ '제인 호크' 시리즈의 첫번째 책이었던 <사일런트 코너> 는 스티븐 호킹과 미국 스릴러 소설 양대산맥을 이룬다는 딘 쿤츠에 눈뜨게 해주었던 작품이었다. 최근 세번째 책 <구부러진 계단> 이 나온 것을 알고 그동안 미뤄두었던 두번째 책 <위스퍼링 룸>을 얼마전 읽었더랬다. 시리즈 라는 것은 연재물과는 달라서 연속적인 것은 아니라 앞 권의 내용을 다 알 필요는 없지만 시리즈 한권한권 차근차근 다 읽어가고 싶었다. <구부러진 계단>에선 제인 호크가 또 어떤 활약을 펼치게 될까~

"뉴스에는 진실이 없군요. 그렇죠? 당신에 대해서도, 다른 모든 것들도, 우리는 거짓말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어요"

"항상 진실은 있어요, 세라. 기만의 바다 아래 기다리고 있을 뿐." (p. 47)

제인이 세라의 집을 방문한 것으로 시작하는 시리즈 세번째 책 <구부러진 계단> 은 앞선 두 권 과는 좀 다른 분위기로 다가왔다. 첫번째 책에서 느꼈던 치밀한 긴박감이 두번째 책에서 유사하게 진행되면서 좀 늘어졌던 것이 세번째 책에서 다시 새롭게 조여드는 기분이랄까... 좀더 다크하고 좀더 암울하게...

제인은 누군가의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두 가지 이기적인 이유로 시작한 싸움이었다. 하나는 남편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 닉은 증거가 시사하듯 자살한 것이 아니었다. 또 하나는 다섯 살 외동아들 트래비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닉의 죽음을 수사하다가 정계와 제계 최고위층 내부의 음모를 발견하자 아이를 죽이겠다고 협박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일당의 뿌리는 자기들이 얼마나 극한의 위험에 처해 있는지 모르는 국민 속에서 매일같이 퍼져가고 있다. (p. 51)

'그녀는 자신이 수사 중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p. 51)' 죽음을 무릅쓰고 홀로 악당들을 하나하나 완벽하게 처치해나가는 제인의 모습은 분명 영웅스러운 면모가 가득했다. 하지만 시리즈 첫번째 책에서부터 내내 작가는 제인의 독백을 통해 스스로가 영웅이 아니라는것을 자각하고 있음을 평범한 사람들처럼 불안하고 무섭지만 겨우겨우 버티고 있음을 세밀하게 드러낸다. 아무리 엄청난 거대조직이 아무리 엄청난 권력과 자본을 갖고 있는 자들이 아무리 세상을 쥐고 흔들려고 해도 그들이 무시하는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이 그들을 이겨낼 수 있음을 작가는 증명해보이고 싶은것 같기도 하다.

컴퓨터가 하는 일은 제거할 표적을 선별하는 일뿐이에요. 잘못된 생각으로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지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을 신중하게 선별해서 제거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은 유토피아가 된다는 거죠. 하지만 사실 이건 유토피아 문제가 아니에요. 오로지 권력 문제요, 절대 권력."

"그냥 제거하다니, 제거. 살인을 대체하는 그럴듯한 말은 항상 있군요"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죠.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00만의 죽음은 통계다' 문제 있나요?" (p. 70)

시리즈 두번째 책에서 그러했듯이 세번째 책에서 또한 시리즈의 앞선 책들을 읽지 않았어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 내용전개 사이사이 꼼꼼하게 앞서 있었던 일들을 풀어내준다. 생각해보니 커다란 하나의 서사지만 몇 권으로 분권되 나온 책은 읽어봤어도 이렇게 시리즈로 된 책을 읽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한권으로서의 완성도와 시리즈로서의 완성도를 모두 갖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것도 같다. '나노테크놀로지' 기술로 인간의 뇌를 지배하려는 소시오패스 집단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한명 제인 호크 뿐이었지만 시리즈를 더해갈수록 진실을 아는 이들은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그 나노 지니를 병 속에 도로 집어넣지 못하면"

"원자폭탄의 발명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도 없어요. 하지만 인류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나요"

"오늘은 그렇죠"

"다음 순간을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내일은 오늘이 되고, 오늘은 어제가 되죠. 아들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그 애가 의미 있는 과거를 가질 수 있도록 오늘을 충분히 만들어주는 것뿐이에요" (p. 80)

거대한 음모에 맞서도 있지만 적들을 물리칠 거대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결해가는 중일뿐. 그런 오늘들이 쌓여 분명 그들이 원하는 내일과는 다른 내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지나간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다가올 미래는 바꿀 수 있다. 그러니 일단은 오늘을 열심히 사는수밖에.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영리해서 돈이나 사회적 지위, 타인의 존경 같은 잘못된 꿈과 욕구를 좇다가 도리어 화를 입는다.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세상은 카터 저건처럼 인간이 저지르기 쉬운 오류를 인식하고 교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나갈 것이다. 인구의 상당수가 지시받은 대로만 수행할 자세가 되어 있고 타인보다 더 많이 성취하고자 하는 동기가 없다면, 완벽하게 교정된 문명은 보다 쉽게 안정 상태로 유지될 것이다.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는 결국 반역의 씨앗이 된다. (p. 90)

무언가를 하고 싶고 무언가를 해내고 싶고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욕망이 없는 인간의 삶은 과연 삶이라 할 수 있을까? 그저 주어진 반복적 루틴을 지켜내며 그저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만으로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시리즈는 스릴러 소설이고 이솝우화같은 교훈을 주는 장르는 아니지만 노익장의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 사이사이에는 인간의 삶에 대에 던지는 메시지가 있었다.

지난 몇 주간, 그녀는 자칭 아르카디언들의 집 몇 군데에 침입해서 매번 현금을 찾아냈다. 집마다 평균 20만 달러였다. 대체로 여러 이름으로 된 위조 여권과 동일 이름으로 발행한 신용카드도 있었다. 자기들이 문화에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살해하고 수십만 명을 나노머신 뇌 임플란트로 노예화할 수 있는 용감한 신세계의 정당한 건설자이자 지배자라고 믿는 극도로 오만한 부류이니만큼, 만일의 사태가 닥치면 언제든지 해외로 급히 빠져나가 거액의 재산을 도피시킨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현금과 신분증을 몰래 숨겨놓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갑옷처럼 두른 이기주의 아래, 자존심과 자만심과 경멸 아래, 증오의 신념이라는 썩은 과일 중심에 의혹의 씨앗이 자리 잡고 있었다. (p. 177)

만일을 준비한다는 것은 실패가능성을 대비한다는 것이고 그들이 소수집단으로 나뉘어 서로를 모른 다는 것은 그들끼리조차도 서로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조직과 그럼 신뢰감으로 어떻게 세상을 그들의 뜻대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하지만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 때론 세상이 공평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기에 엄청나보이고 절대 무너뜨릴 수 없을것 같은 자칭 아르카디언들의 무모함을 제인호크와 함께 경멸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전 통제 매커니즘을 주입해 개조한 사람들에게 접속해서 조종할 때는 세뇌에 대한 리처드 콘돈의 유명한 1959년 스릴러 소설 제목에서 따온 '나랑 만주놀이 하지' 라는 명령어를 사용했다. (p. 184) 그런데 제인 호크가 그 접속 명령어를 알아냈다. 그 때문에 개조된 사람들을 최대한 빨리 다시 프로그래밍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고, 신규로 개조하는 사람들에게는 최신 통제 매커니즘과 함께 다른 접속 명령어를 설치하고 있었다. 식탁 반대편에서 저건은 쌍둥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라 삼촌은 아이라 삼촌이 아니다." (중략) 1955년 잭 피니 소설 <신체강탈자의 침입> 에 나온 표현이었다. (p. 185)

소설 속에 등장하는 또다른 문학작품들은 왠지 더 호기심이 생겨나게 되곤 한다. 뇌개조를 당한 사람들을 조종하는 명령어의 문장들도 그렇지만, 그들이 제거할 명단을 햄릿리스트 라고 부른다던가 자신들을 아르카디언이라고 부른다던가 하는 표현들도 문학속의 또다른 문학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인용하는 문학작품과 음악들이 조금은 옛스럽다는 점에서 작가의 오래된 연배가 조금 느껴지기도 한다. ㅎ

테러리스트나 미치광이의 소행으로 보이는 사회적 혼란을 많이 초래해서 대중들이 질서를 외치도록 하자는 것이 테크노 아르카디언들의 전략이었다. 이러다보면 사회 안보를 위한 각종 조치와 개인의 권리 제한이 점차 엄격해져서, 언젠가 뇌 임플란트로 개조되지 않은 사람들조차 엘리들의 엄정하고 계몽된 지배체제를 긍정하는 날이 올 것이다. (p. 234)

각 시리즈마다 항상 두가지 사건이 병행되어 진행된다. 하나는 평범한 사람이 뇌개조를 당해서 엄청난 살인을 저지르는 테러와 하나는 제인 호크와 대표악당과의 대결. 매 시리즈마다 조직의 핵심이라고 여겨지는 인물을 제인호크가 처단하지만 그러고 나면 더 핵심이라고 여겨지는 또다른 악당이 등장하곤 한다. 이번엔 소설가 남매가 강제로 뇌 개조를 당하여 테러를 준비하고 FBI 고위급 관료인 부스 핸드릭슨이 제인 호크의 상대역이다.

"난 슈넥과 D.J.마이클이 뱀의 두 대가리인 줄 알았는데, 그들이 죽었는데도 뱀은 살아 있어. 난 너희 아르카디언 배후의 진정한 권력이 누구인지 알아야겠어. 궁극의 옥좌에 앉아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건 그것 말고도 많아" (p. 271)

<사일런트 코너> 에서 나노테크놀로지의 개발자인 슈넥 박사를 제거했다. <위스퍼링 룸>에서 나노테크놀로지의 최대 투자자인 D.J.마이클을 제거했다. 하지만 아르카디언 조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조직이며 얼마나 엄청난 사람들이 뒤에 있는 것일까? <구부러진 계단> 에서는 앞선 두 권과는 달리 독특한 가족사가 등장함으로써 분위기를 새롭게 한다. 나노테크놀로지의 기원은 과학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뜻밖에도 기묘한 소시오패스 가족에게서 시작된 것일지도 몰랐다.

지금 다가오는 어둠은 구부러진 계단이 인도하는 저 아래 깊은 곳에 있는 어둠이었다. 수평이자 수직으로 이어지는 계단, 앵무조개 같은 나선형 계단, 미로, 한 줄기 빛도 없어서 장님처럼 더듬어 길을 찾을 수밖에 없는 복종의 방. (p. 330)

소설가 남매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테러를 일으키고 누구도 그 뒤에 조종세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지 못한다. 아들 트래비스에게 위협이 닥친줄 모르고 제인은 '구부러진 계단'을 찾아간다.

<사일런트 코너> 와 <위스퍼링 룸> 이 비슷한 구조라서 세번째 책도 그랬다면 시리즈에 대한 흥미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번째 책인 <구부러진 계단> 에서는 새로운 시리즈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확 바뀐 서사에 앞선 두 권보다 훨씬 더 뒷 얘기를 궁금하게 하는 결말로 마무리된다. 역시 대단한 작가다. 그나저나...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지는데... 네번째 책은 언제 나오지;;;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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